에드바르트 뭉크 - 미술문고 208
장소현 / 열화당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Scene #1 두려움에 지배당한 자

 

 

 

 

 

Edvard Munch 「By the Deathbed」 1893

 

 

만남 뒤엔 이별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반복 되는 일이다만, 해도 해도 익숙해 지지 못하는 것이 이별의 슬픔이다. 인간의 모습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이별의 아픔에 슬퍼함으로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가진 아름다운 동물이다. '행복은 순간이요. 슬픔은 영원하다'라는 어느 시인의 구절처럼 인간은 원래 사랑의 따스함보다 우울함과 슬픔을 오래 기억한다는 연구 결과로도 나와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공유함으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만들어 가는 반복적인 삶을 살아간다. 배신과 증오, 불안과 절규, 죽음, 사랑, 행복 다양한 심정들을 반영하는 예술가들 중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생애의 사랑과 이별은 모두 고통이었다.

 

뭉크의 그림은 무의식 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숨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림을 그렸던 뭉크는 폐결핵으로 죽은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처받은 유년기의 기억은 뭉크 예술세계의 기본 색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불행한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Scene #2 그림에 덧칠된 황량한 마음

 

 

 

 

 

Edvard Munch 「The Storm」 1893

 

 

뭉크의 그림은 습하고 어둡다. 그것은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굳이 까발리려 하는 잔인하고 악랄한 취미를 가진 적처럼 가까이에 붙어 있다. 음습한 기운과 불길하고 축축한 두려움. 출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 불안한 공간에 갇혀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공포를 기다리며 병들어가고 있는 단절과 고립의 상황. 이런 현대인의 내면을 뭉크는 격렬하고 고통스럽게 그린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시간의 약에 의해서 완치될 줄만 알았던 마음의 환부가 욱신거린다.

 

어릴 때부터 계속되어 온 식구들의 죽음과 병의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 뭉크의 그림은 그가 일일이 겪어낸 상처의 흔적이며 고통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풍경들은 매우 주관적이며 상징적이다. 뭉크의 감정이 풍경 속에 곧장 전이되어 들끓고 흔들리며 휘감긴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뭉크의 그림 전반을 흐르는 주제는 상처와 불안, 외로움과 죽음이다. 이것이 노르웨이의 쓸쓸하고 스산한 풍경과 맞물리면서 우리의 황량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뭉크는 말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삶의 불안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안을 통해 스스로를 예술로 치유해내고 나아가 자신의 이러한 성찰이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리라는 소망을 품었다고 밝혔다. 절망을 직시한 끝에 그는 불안이나 병, 상처와 고통 같은 어둠의 영역들을 통해 마침내 빛나는 희망의 삶에 다다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Scene #3 뭉크는 다리에서 무엇을 보았나?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절규」는 핏빛으로 회오리치는 하늘과 소용돌이치는 터키석 빛 피오르드와 진홍빛 노을이 물든 물결이 어지럽다. 그리고 사선으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맨 앞에는 한 사람이 온몸을 움츠린 채 서서 우리를 향해 해골 같은 얼굴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그는 어떤 공포와 마주친 것일까? 그의 비명소리에 물결은 미친듯이 소용돌이친다. 그는 두려움에 턱이 빠져나갈 듯 악을 쓰지만, 저 멀리 뒤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친구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삶을 위협하는 두려움에 맞닥뜨려 있어도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Edvard Munch 「Anxiety」 1894 /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1892

 

 

「절규」를 그린 바로 이듬해 뭉크는 외계인처럼 눈동자 아래가 퀭하게 시들해진 군중의 일부를 다리 위에 데려다놓는다. 이 그림 제목 또한 「절규」와 마찬가지로 시니컬하다. 제목은 불안.

 

이 그림 속에 있는 인물들은 뭉크의 또 다른 작품 「칼 요한 거리의 저녁」속의 사람들과 빼닮았다. 표정과 생김새, 옷차림은 물론 서로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향한 포즈도 같다. 뭉크는 노르웨이 오슬로 시 번화가인 칼 요한의 거리에 서게 했던 인물들을 쏙 빼다가 「절규」의 남자가 서 있던 ‘다리’ 위로 옮겨놓았다. 그 뒤로 주황색 하늘이 펼쳐진다.왜 그는 유독 다리에 집착했을까?

 

뭉크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절규의 원인이나 결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리 위를 기억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어떤 ‘순간’이었다. 뭉크에게 있어 그 장소는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장소 인근에는 정신병원이 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종종 미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근처에는 방목장과 도살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레 로헨이 문제의 장소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뭉크에게 있어서 삶은 죽음과 경계선상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절규」의 배경은 다리 위의 거리지만, 사실은 뭉크 자신의 내면의 세계이며 자아의 모습이다.

 

 

 

Scene #4 뭉크는 두려워서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뭉크의 「절규」에 나타나는 해골 같은 형상의 인물과 원근법이 상실된 불안감을 연출하는 풍경을 보면서 죽음의 불안을 회화로 남긴 일종의 유서라고. 그리고 현대인의 불안과 절망을 상징할 때 자주 나오는 익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뭉크를 평생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노래한 어둠의 화가로만 봐야 하는가? 그를 ‘불안’과 관련된 화가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린 우울, 무력감, 허무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인 불안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뭉크가 심취했던 ‘불안’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불안은 사람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뭉크는 자신의 예술이 키에르케고르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정도다. 자신의 마음을 위협하는 불안이 때로는 생존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뭉크는 깨달았을 것이다.

 

뭉크는 “절규, 나는 대자연을 통과해 가는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라고 1895년에 제작한 석판화에 적어놓는다. 사람이 들어주지 않는 절규를 들어주는 자연. 뭉크는 끝없이 불화하는 자신과 세상과의 진절머리 나는 외로운 싸움을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관심이 없다. 그의 상처, 그의 절망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뭉크는 거대한 절규를 몸소 느꼈을 뿐, 굴복하지 않았다. 불안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보면 현실에서 도망칠 법한데 뭉크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불안은 뭉크의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불확실성의 조건들을 확실성의 조건으로 바꾸도록 이끌었다. 뭉크에게 불안은 장애가 아니라 탁월한 예술창작이나 위대한 학문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그에게 불안은 자신의 삶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뭉크에게 다리라는 장소는 감정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외부 세계가 아니다. 그가 다리 위에서의 ‘순간’을 기억하고, 집착하는 이유는 세상과 단절된 자신의 절규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핏빛 하늘 그리고 어지러운 물결로 둘러싸인 다리는 뭉크에게 생(生)의 감각을 흔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뭉크의 절규는 거대한 자연 속의 절규를 듣고 두려움에 떨어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질식할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 한다는 혼신의 외침이다.

 

뭉크는 그림을 그리며 버텨낸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통각이 마비된 지옥 같은 세상이지만 “나는 영혼을 해부하듯이 그릴 것이다”라고 끝없이 자기 암시를 하며 자신과 싸운다. 자신의 적이면서도 예술적 동지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을 낱낱이 해부하여 그림으로 표현한다. 뭉크 본인은 자신을 병마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체질이라고 여겼지만, 정신력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뭉크는 그림의 주제에 몰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칠 정도로 그렸다. 하나하나의 붓 터치에 담은 작품들은 그의 감정들을 대변한다. 그저 그려진 작품이 아닌 몰입되어진 작품에는 작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Edvard Munch 「The Sun I」 1911~1916

 

 

그 숨결 속에는 너무나 절박하고 처절하기에 오히려 살아야 한다는 희망이 꿈틀거린다. 뭉크라는 사내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인생의 밑바닥을 치는 순간 다시 희망이 찾아오는 묘한 반전과도 같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의 날 참고 참으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뿌쉬낀의 시 구절처럼.

 

 

 

Scene #4 피할 수 없다면, 불안을 즐겨라!

 

뭉크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나 초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뭉크’ 그 자체다. 뭉크 스스로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를 자유의지가 낳은 고백이자 인생에 대한 관조를 명료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봤다.

 

그의 그림들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전·후반기의 색조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몸과 정신이 병으로 고통 받을수록 생명감이 넘치는 훨씬 밝은 색체와 힘찬 붓 터치를 구사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운 불안의 감정을 뭉크는 자신의 유일한 장난감이자 마음 치유제인 붓과 물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이런 걸 바로 진정한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예술철학에서 보듯이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내면의 풍경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쿵!' 하고 가슴을 때리는 것처럼 내게 큰 울림을 준 것이리라. 가족의 죽음과 연인의 상실, 그에 따른 슬픔과 고통, 우울, 그리고 노년에 죽음을 맞는 뭉크의 내면세계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불안은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현실적 근거가 있는 불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뭉크는 ‘예술’이라는 현실적 근거가 있었기에 불안과 절규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삶이 언제는 우리에게 우호적이던가. 때론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이 위태롭고 우리가 바치는 열정을 비웃듯 차갑고 냉랭한 시선을 던져도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담담히 걸어가야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돌아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처럼. 뭉크의 고뇌는 위대한 예술이 되어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자가 누리는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그래서 인류의 축복이 되었다. 참으로 뭉클하기 않은가. 뭉크를 알면 그의 예술은 어두운 게 아니라 뭉클하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기 일쑤지만, 뭉크와 같은 표현주의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가끔이나마 이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삶을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삶의 교훈을 준다. 이런 점에서, 뭉크의 그림들은 개인의 삶에는 고통의 정수일지라도 만인의 삶에는 더없는 가치를 오늘도 내면의 절규와 불안의 늪에 허우적이는 우리들에게 뭉클한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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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4-02-0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사탕을 어마어마하게 받으셨던데 혜성! >ㅅ< 축하하오 - ㅋㅋ
곰발님이 일등상 받았다고 해서 축하하러 들어왔다가 목록을 보니 혜성이 뙇!! >ㅅ <

cyrus 2014-02-03 22:29   좋아요 0 | URL
하나님, 혜성이 아니라 해성... ^^;; 여기서는 실명 공개를 잘 하지 않는데 뜬금없이 댓글로 저를 부를 줄이야.. ㅋㅋㅋㅋ 먼저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곰발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글을 아주 재미있게 잘 쓰시더군요. 삽하나님 같은 젋고 발랄한 분이라면 좋아할만한 글이에요.
 
팜므 파탈 - 치명적 여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이명옥 지음 / 시공아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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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에게 가장 약한 존재는 남자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사랑하고 싶은 본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하고 때문에 미모의 여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자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여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과 맞설 수 없었다. 때문에 여자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세상을 쥐고 흔드는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녀들에게 미모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미모의 여자들은 남자의 소유욕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유독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 여자들을 팜므 파탈(Femmes fatales)이라고 한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8년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1868년 작 「레이디 릴리트」는 19세기말 유럽 문화를 지배했던 팜므 파탈의 원조 격 그림으로 꼽힌다. 릴리트는 태초에 이브가 생겨나기 전에 아담의 여자다. 릴리트는 이브처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지지 않고 흙으로 빚어졌다. 그녀는 정숙한 아내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다. 음탕한 릴리트의 유혹을 걱정한 하나님은 아담을 보호하고자 그녀에게 벌을 내려 낙원에서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브를 선사한다. 유대신화 속 최초의 여성인 릴리트가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 모습의 이 그림은 오늘의 영화 및 광고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팜므 파탈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콜리어  「릴리트」  1892년 

 

 

존 콜리어의 ‘릴리트’는 낭만파 시인 키츠의 《라미아》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키츠는 그의 시에서 릴리트를 황금빛과 초록빛 그리고 청색의 무늬가 있는 뱀으로 비유했는데 콜리어는 릴리트의 악녀 이미지를 뱀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벌거벗은 릴리트는 뱀에게 몸이 감긴 채 황홀경에 빠져 있다.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자와 뱀을 함께 그려 넣었다. 그는 릴리트의 유혹을 갈망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남자의 이중성을 표현했다. 뱀은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뱀과 여자를 연결시켜 성적인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4~1620년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 유디트는 음탕한 릴리트와는 전혀 다른 여인이다. 잔인하고 야만적인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의 도시 베툴리아를 침략한다. 마을이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미망인 유디트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기로 한다. 유디트의 미모와 달콤한 말에 속아 홀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연회에 초대한다.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먹여 유혹한 유디트는 그가 잠들자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스라엘은 그녀의 행동에 용기를 얻어 앗시리아 군대를 물리친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 1901년

 

 

나라를 구한 여인 유디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화가들이 즐겨 찾는 주제였지만 구스타프 클림트는 유디트를 성적 대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작품 「유디트 1」에서 유디트를 남자의 목숨을 빼앗은 요부로 표현했다. 이 작품 속의 유디트는 왼쪽 가슴을 노출한 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다. 넓은 금빛 목걸이를 하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은 굳어 있지만 몸은 여성으로서 매력을 뽐내고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의 제목을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라고 표시했지만 그가 표현한 유디트는 사실 살로메에 가깝다. 목이 베인 세례 요한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살로메의 모습과 섹스를 무기로 적의 머리를 베어버린 유디트의 모습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살로메 -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멸의 여자

 

 

 

 

 

오브리 비어즐리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삽화 」 1894년

 

 

 

《구약성서》에서 유디트가 나라를 위해 남자를 유혹했다면 살로메는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헤롯왕의 의붓딸 살로메는 그가 베푸는 만찬에서 매혹적인 춤을 춘다. 그 춤에 반한 헤롯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한다. 성서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은 어머니 헤로디아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 《살로메》에서는 주인공 살로메가 세례 요한을 사랑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복수심에 불탄 살로메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헤롯왕을 유혹하고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5년

 

 

오스카 와일드의 영향을 받아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로메를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 귀스타브 모로(1826~1898)의 「환영」이다.

 

이 그림에서 살로메는 가슴을 노출한 대담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화면 중앙에 있는 세례 요한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세례 요한은 피를 흘리며 살로메를 바라보고 있다. 세례 요한의 얼굴 주변에는 금빛 후광이 둘러져 있다. 화면 왼쪽 살로메의 매력에 빠져 있는 헤롯왕은 의자에 앉아 있다. 이 작품에서 살로메는 비극적 사랑에 빠진 냉혹한 여인의 모습보다는 이국적인 배경 위에 농염한 아름다움과 유혹적인 춤으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사실 팜므 파탈은 사회적으로는 여성을 옥죄던 관습과 도덕에서 벗어나 권리와 욕망을 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남성중심사회의 반발이자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그저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동적 존재였던 여성이 그러나 실제로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남성을 주도해 치명적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남성의 공포가, 세기말 유럽사회를 달구었던 팜므 파탈 논의에 담겨있다.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의 목소리가 수면에 올라오면서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 사이에서 여성 혐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성우월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여성을 혐오하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근거로, 여성의 열등성과 그들이 남성에게 미치는 치명적 영향력에 대한 이론이 난무했다.

 

특히 사진과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출현해 팜므 파탈 이미지는 문학과 미술보다 더 큰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한다. 이에 따라 팜므 파탈은 자연스럽게 그림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간다.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 팜므 파탈의 전설적인 존재다. 먼로는 "나를 숭배하던 남자들은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내게 키스하고, 품에 안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먼로는 남성들의 우상이었고, 섹스의 화신이었다. 먼로는 에로틱한 요부, 백치미의 표본으로 각인돼 있다. 많은 영화에서 섹시하지만 머리는 텅 빈 금발미녀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악이 공존한다. 우선 남성을 단번에 사로잡는 외모, 성적 매력을 갖고 있다. 또 내면에 뜨거운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은 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모양처, 청순미인과는 정반대로 '나쁜 여자'들이다.

 

이렇게 팜므 파탈이 출현했던 시기와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대의 대중들이 19세기 말에 창조된 팜므 파탈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팜므 파탈은 성적 금기를 깨는데 따르는 희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은 금지된 성에 탐닉할 때 죽음보다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굳이 바타유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성욕은 억압할수록 커지며 두려움은 욕망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역사와 예술에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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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 이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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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마르셀 뒤샹은 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했다. 오늘날 이 작품과 유사한 신형 디자인의 매끈한 ‘샘’들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한 채 도처에서 사람들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주고 있다.

 

우리가 아는 ‘아방가르드’의 모습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괴짜 예술가들의 창의력 또는 기행(奇行)의 산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술의 개념을 뒤집는 ‘파괴적’ 행위와 실험들이 자아내는 진풍경들이다. 아방가르드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경계를 탐험’하는 작업으로써, 그 실천 방법에는 상반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이미지 감각 충동을 좆아서 내면으로 여행’하는 방법으로서, 이 경향의 예술가들은 명상 신비주의 약물 심지어 자해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반항을 밖으로 표출해 경직된 규범 도덕 제도에 맞서는 예술을 창조’하는 방법으로서, 이 그룹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관객을 공격하며, 심지어 이들의 예술을 이해 못하는 관료들을 비난’ 함으로써 성과를 올리고 쾌락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끈질기게 지적하듯 아방가르드는 ‘전위’에 앞서 ‘반항’이었다. 모택동도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했으니, 반항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시초가 ‘일상생활, 도덕규범, 예술규범 등이 한 줄로 깔끔하게 늘어서’ 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폭로할 수 있을 정도로 종이처럼 얄팍’한 중산층의 얄팍한 삶과 문화에 대한 반항으로 비롯됐다. 그러나 반항을 아방가르드의 전제로 본다면, 반항이 일반화되고 ‘제도’가 되는 순간 아방가르드는 설 땅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세계 도처가 아방가르드라면 도대체 뭐가 아방가르드인가?’ ‘충격적인 예술이 록 밴드처럼 대중성을 확보했다면 그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 점을 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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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0
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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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경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맡기고, 구름과 바위와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 고독하면서도 우아한 인물, 프리드리히

 

한 사내가 절벽 위에 올라 안개 자욱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떨어지는 화면 중간에는 물 위로 삐쭉삐쭉 솟아오른 바위들이 도열해 있고 바위 위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웅크린 듯한 모양새가 마치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 그 너머로는 멀찍이 거대한 산봉우리가 물안개 뒤로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치 신성이 깃든 듯 신비로운 모습이다.

 

사내는 관조자로서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자연은 온통 격정으로 충만하다. 산과 바위는 마치 격렬하게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수파와 물안개는 좌우로 요동치며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절벽 위에 두 다리로 단단히 무게중심을 잡은 사내의 머리카락도 거센 바람에 휘날리며 이런 격렬한 움직임에 호응하고 있다.

 

자욱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초겨울의 이른 아침. 사내는 왜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한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발걸음은 대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보는 이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안개 속의 방랑자'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시각적 기념비다.

 

독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낭만주의는 지나치게 합리성에 얽매인 계몽주의와 고전적 규범을 맹신한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운동으로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괴테와 실러가 중심이 된 '질풍노도'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자연스레 화가들로 하여금 내적인 성찰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몇몇 진지한 화가들은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종교적 명상으로 나아갔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종교적 명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에 정신적인 깊이를 쌓아갔다. 당시 독일 화가들이 이탈리아로 달려가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적 규율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 그는 모국인 독일의 풍경을 진지하게 탐색,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북구 특유의 자연을 신비롭게 묘사했다.

 

 

 

 ♣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고독한 파수꾼

 

프리드리히는 자연에 깃든 정신성을 다름 아닌 신이라고 보고 풍경화를 신을 향한 구도와 명상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안개 위의 방랑자’처럼 자연의 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독하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관람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점은 등장인물을 뒷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자가 그림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주 자연을 관조하도록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월출」  1821년경

 

 

프리드리히는 "화가는 눈앞에 보이는 외형만 그려서는 안 되며,자기 내면에 보이는 것도 그려내야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화가가 자기 내면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극언할 정도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낭만주의라는 시대정신과 어우러져 그를 확고부동한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프로이센 왕의 후원을 받고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등 그의 성공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대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화가의 만년에 이르러 낭만주의자들은 점점 현실감각이 없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게 되고 후원자들의 손길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세상을 뜨는 날까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남는다. 자신이 평생 걷게 될 고독한 여정을 예상하고 있는 ‘안개 속의 방랑자’처럼 말이다.

 

 

 

 ♣ 바다 저편 무한성을 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18~1820년

 

 

산이나 바다에서 우리는 제약되지 않은 느낌은 모든 것이 트여오는 듯한 체험을 한다. 심신이 트이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무한성의 체험이다. 내가 사는 공간이 내게 속하면서도 나를 넘어 저 먼 곳까지 이른다는 느낌은 광활함의 감각이다. 낭만주의는 가장 간단히 말해 이 무한성의 경험이고 그 그리움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하늘(공기)과 바다(물)와 땅(모래)을 본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요소다. 지구가 생명의 요람이 된 것은 물과 대기 덕분이다. 땅이 인간의 토대라면 바다는 그가 유래한 곳이다. 인간은 하늘의 대기를 매순간 들이켜고 내쉰다. 그림 속 인물은 한 점처럼 서 있다. 그는 이쪽-관찰자가 아닌 저쪽을 향해 있다. 낭만주의 회화의 인물에는 이처럼 등을 돌린 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관찰자는 인물과 같은 시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외부의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 속 수도사는 땅의 끝에 서 있다. 이 모래언덕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기와 땅과 바다뿐.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룩처럼 자리한다. 그래서 외롭다. 황량함과 고독은 자연의 전체, 즉 우주 앞에 선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은 화면의 5분의 4를 채운 하늘에서 잘 암시된다. 물과 땅과 대기는 그가 오기 전처럼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다.

 

근원적인 것은 이렇듯 단조롭고 무한하다. 그러면서 순환한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농축되어 비로 된다. 그 사이에 어떤 것은 굳어져 물질이 되고, 이 물질은 바람에 날려 모래가 되며, 모래는 먼지로 떠돌다가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자신을 쉼 없이 비워내는 탈세속화의 과정이다. 인간의 생애는, 그 육체는 먼지와 바람과 물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뭉쳐있는 고체가 모래언덕이라면, 모여 있는 이 물질도 바람으로 물로 언젠가 소진될 것이다.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연의 근본요소는 인간의 성취를 무시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뤼겐의 백악 절벽」  1818년

 

 

자연의 무한한 모습은 우리의 정서를 압도한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된 정서적 효과, 절망과 활력을 동시에 일으킨다. 절망은 자연의 파괴적 힘에서 온다. 가늠할 길 없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자기 몸이 보잘것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무시간적 우주에서 우리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활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풍경 모사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길, 그래서 이지러진 시대의 영혼을 정화하길 바랐다.

 

 

 

 ♣ 고독과 명상이 필요한 시간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 (지는 태양 앞의 여인)」  1818~1820년경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무엇보다 무한성의 경험이다. 이 무한성은 진실하고 영원하며 신적이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화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이면서 꿈꾸기이며, 기도이고, 비전이다. 참된 자연의 체험은 성스럽고도 장엄한 종교의식과 같다. 그래서 믿음은 회의와 만나고, 우울은 희망과 짝한다. 세계의 전체를 어루만지게 된다고나 할까. 삶의 이곳은 그 둘레와 너머까지 가늠할 때 온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여분을 허용하고 그 나머지를 돌볼 때 본래성에 다가선다.

 

그의 풍경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홀로 있어야 한다. 그림 속 방랑자나 수도사처럼 혼자 서서 느끼고 생각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정신의 내면적 눈은 이때 생긴다. 생명은 지워지고 있는 하나의 점이면서 무한의 우주로 이어진 고리다. 이 무한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왔던 세계가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이 일부의 세계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또 다른 광활함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여기 이곳이 저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부분은 어떻게 전체로 이어지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서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렵다.

 

고독한 낭만주의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덧없이 스러지며 순환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자연 현상을 고독하게 바라보는 작지만 커다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그것에서 ‘나’란 주체, 개체는 무의미해 보인다. 영원과 무한 속에서 유한한 인간 존재는 그만큼 슬프고 남루하다. 그러나 우리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저 신비스러운 자연 앞에서 세계에 대한 성찰과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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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박물관 - 상상의 힘으로 서양미술사를 재구성하다
필리페 다베리오 지음, 윤병언 옮김 / 휴먼아트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Scene #1  싸구려 복제 그림에서 비롯된 명작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라파엘로의 원작 모사)  1517~1520년경

 

 

15141518년경, 복제 전문가인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는 은밀히 그림 한 점을 복제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심판을 묘사한 젊은 거장 라파엘로의 그림이다. 마르칸토니오는 이미 전과가 있었다. 1506년경, 뒤러의 판화 80여 점을 표절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림 전문 위조범죄자였다. 그럼에도 4년 뒤에 다시 라파엘로의 그림에 손을 댄 것이다.

그 중 한 점이 파리스의 심판이다. 하지만 그의 복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사람들을 위한 업적이 되었다. 현재 라파엘로가 그린 원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르칸토니오가 복제한 판화를 통해서 라파엘로의 원작을 짐작해볼 수 있다. 마르칸토니오가 남긴 가짜그림 한 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는데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다.
 

1861년 어느 날, 마네는 오래된 판화 한 장을 손에 넣는다. 이 판화에 감동을 받은 마네는 그것을 수채화로 치밀하게 모사한다. 그런데 이 판화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마르칸토니오가 복제한 판화였다. 놀랍게도 대중의 기억 속에 묻힌 복제판화가 350년 뒤에 부활한 것이다.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 1508~1509년경

 


이 판화에서 마네가 관심을 가진 인물은 따로 있었다. 화면의 오른쪽에 모여 앉은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그들이다. 모두들 신분이 바다의 신이다. 마네는 누드의 여인과 옷을 입은 남자가 어우러진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라는 그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네는 조르조네의 그림 속 배경에 복제 판화 속 바다의 신들만 모셔 와서 유화로 그린다. 원작과의 차이라면, 누드였던 2명의 남자에게 옷을 입힌 것뿐이다. 마네의 그림은 살롱에 출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리고 관람객들로부터 심한 욕설과 함께 혹평을 받기도 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년

 

 

 

마네가 살롱에 출품한 그림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 그런데 제목처럼 한가롭게 점심을 먹는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낯뜨겁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옷을 입은 남자들 사이에 누드로 태연히 앉아 있거나 물에서 하반신을 씻고 있다. 관람객들은 이 그림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여인을 누드로 그리되, 여신처럼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림 내용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마네가 조르조네의 그림과 원작을 복제한 판화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가져온 제작 과정이었다. 구도와 설정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마네는 다른 화가의 그림을 표절한 것이다.

 

 

 

 

 Scene #2  어서 와~ 상상 박물관은 처음이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제작비화를 설명하면 꼬리표마냥 따라오는 것이 마르칸토니오와 조르조네의 그림이다. 서양미술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마네의 그림 제작이 표절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술 비평가들 어느 누구도 마네의 그림을 표절이라고 시비 걸지 않는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올랭피아」와 더불어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네는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고 구도를 똑같이 흉내 내기만 하는 아마추어 화가가 아니다. 구도를 그대로 빌렸을 뿐 인물의 모습과 자세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원작을 표절한 것이 아니라 모방을 통한 변용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창작을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작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상상력 때문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분노를 삼키지 못했던 관람객들은 틀렸다. 아니, 그들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마네의 작품 제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보수적인 관람객과 화가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작이고,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진정한 창작이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필리페 다베리오. 이탈리아의 유명한 예술 평론가인 그가 마네의 그림이 걸려 있는 1863년 살롱전에 있었다면 기발한 상상력으로 원작에 변용을 시도한 점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상상 박물관’에 전시하고픈 작품 1호일지도 모르겠다.

 

필리베 다베리오가 만든 ‘상상 박물관’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박물관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보면 연대기 순 혹은 작가별로 분류되어 있다. 관람객은 큐레이터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순서와 방법대로 그림을 감상한다. 르네상스 회화만 전시된 르네상스 관을 지나면 바로크, 로코코 순으로 전시된 그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별로 전시된 그림을 본다면 방대한 미술사를 하루 만에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을 본다면 정말 제대로 감상한 걸까? 일단 그림 한 점을 보려면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전시회에 관람객이 붐빈다면 그림 한 점을 1분 이상 보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렇다고 큐레이터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오디오 북의 설명을 동시에 들으면서 그림을 보기에는 산만하다.

 

그러나 필리베 다베리오의 ‘상상 박물관’은 굳이 연대기 순으로 그림을 볼 필요가 없다. 3층과 반 지하로 구성된 상상 박물관에는 ‘생각하는 방’, ‘도서관’, ‘점심식사 방’, ‘놀이방’, ‘침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독특한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방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전시관 한 곳에 모여져 있다. 시대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필리베 다베리오의 개인적인 상상력으로 꾸몄다.

 

그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티치아노와 조르조네가 그린 비너스 두 점만 가지고 앵그르가 창조한 터키탕의 내부부터 시작해서 고야가 사랑했던 벌거벗은 마야 부인 그리고 마네가 그린 프랑스 매춘부 올랭피아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 모든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전시한다. 벌거벗은 여체가 등장하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그렇게 특별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리베의 시선은 여체 한 곳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그림 속 주변 대상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동해서 그들을 하나의 연관성으로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 / 페터 파울 루벤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3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1650년경 / 프란시스코 고야 「벌거벗은 마야」 1797~1800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녀」 1808년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루벤스의 거울은 벨라스케스가 훔쳐 갑니다. 거울에다 티치아노의 모델까지 같이 훔쳐 가게 되죠. 그렇게 해서 그의 비너스가 탄생합니다. 단지 사실주의 화가라기보다는 현실적인 화가다 보니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섹시한 작품을 그리기로 작정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벌거벗은 마야>가 탄생하게 되고... (중략) 8년 뒤에는 청년 앵그르가 루벤스를 모델로 다시 그리게 됩니다. 앵그르는 라파엘로의 터번을 상당히 사랑했던 인물이죠. 그래서 모델에게 터번을 씌운 채 그림을 그립니다. (중략) 이듬해(1863년)에 파리의 살롱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네가 그의 올랭피아를 <우르비노의 비너스>처럼 누드로 그린 뒤에 루벤스의 흑인 시녀를 데려다가 손에 꽃다발을 쥐게 하고 티치아노의 강아지 대신 검은 고양이를 집어넣은 그림이 전시되었던 겁니다. (137~138쪽)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그림들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설명하는 필리체의 능청스러운 상상력은 상상 박물관에 입장한 관람객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 그의 그림을 보는 법은 우리가 전시회에서 보는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리체는 그림은 아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봐야 한다. 오랫동안 고정된 형태로 이루어진 사유의 틀은 상상 박물관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버려두고 와야 한다. 시대와 주제를 초월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Scene #3  미로와 같은 상상 박물관 즐기기

 

공짜로 전시한다고 해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빈손으로 상상 박물관에 출입했다간 미로 속에 갇혀버린 신세가 될 수 있다. 상상 박물관에 한 번 들어간 이상 쉽게 나올 수 없다. 필리베의 방대한 상상력으로 구축된 미로를 즐기고 출구로 나오기 위해서는 복잡한 미로를 유연하게 헤쳐 나올 수 있는 실타래, 즉 무한한 생각을 자유롭게 술술 풀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 박물관은 필리페 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미로 게임이다. 필리베는 미로와 같은 상상 박물관을 만들고 여기 들어온 독자와 관람객을 짓궂은 장난을 펼친다. 박물관 한 층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림을 먼저 제대로 알아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리베가 큐레이터처럼 친절하면서도 상세하게 그림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림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하고 나머진 개인적인 감상을 늘어놓을 뿐이다. 이제 막 서양미술에 입문한 독자나 관람객에게는 상상 박물관 출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상상력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에 ‘쏘우’ 필리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미적 게임에 갇힐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매혹적인 이야기에 사로잡히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워 질 수 있다.

 

이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상상 박물관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쏘우’ 필리베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로를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상상력’ 실타래를 꼭 챙겨야 한다. 혹시 상상 박물관에 가보고 싶은 독자라면 꼭 ‘상상력’ 실타래를 챙기시길. 그런데 그 ‘상상력’ 실타래를 누구한테 받느냐고? 미술에 어느 정도 지식과 식견을 가진 아리아드네를 만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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