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되는 순간 - 메트로폴리탄 관장의 숨은 미술 기행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 정말 성가신 단어다. 이 단어에 정의를 내리기가 우선 까다롭다. 그렇다 보니 의미가 다양하고, 연상되는 관념도 뒤숭숭하다. 미술을 아름다운 것, 세련된 것, 멋진 것 등을 그대로 재현하는 행위로 설명할 수 있지만, 오늘날 미술은 더 이상 현실이나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화가는 자신의 감정과 사고, 의지를 표현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 새롭고도 다채로운 회화를 창조해내기에 이른다. 현대미술은 난해하다. 아니 난폭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싶다. 어떻든 유추하기 힘든 오늘날의 미술이 뭔가 충격과 부담, 또는 당혹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요즘 마크 로스코 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회화적 장치나 단서가 없고 거대한 캔버스에 색채만 존재하는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관람객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거나 감성의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난해한 그림 앞에 당혹스러워한다. 이런 사람들은 로스코의 그림을 어떻게 감상하는지를 잘 모른다. 만약에 사람들이 나에게 “로스코의 그림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림을 보기 전에 로스코에 관한 책을 읽어보세요. 로스코가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전시회 그림을 봤는데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전시용 도록을 사서 읽어보세요. 미술을 이해하려면 공부해야 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되묻는다. “농담 하시는 거죠?” 내 대답은 농담 반 진담 반이다. 로스코 같은 현대미술은 그냥 눈으로 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로스코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가격이 매겨진 로스코의 그림이 어린아이가 물감으로 장난치는 수준으로 본다. 그림을 머리로 이해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머리로 먼저 이해해야 그림을 보는 눈이 떠지고, 화가가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래서 미술을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상도 무겁고 힘든데 난해한 그림을 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을 무려 31년 동안 지낸 필립 드 몬테벨로는 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과 실망감을 누구보다 더 가까이, 그리고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와 함께한 대화에서 필립은 미술과 관람객이 더 가까이 좁혀질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한다. 대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틴은 자신과 필립을 가리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두 사람은 미술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면서도 자신들을 미술의 아마추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아마추어(amateur)’는 비전문가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는데 ‘프로’의 수준보다 한 단계 낮은 하수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아마추어를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필립과 마틴은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30년 넘게 미술관 관장에서 짬밥(연륜)을 먹은 필립이라면 미술 초보자도 어려운 미술을 좋아하게 만드는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도 미술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술을 이해하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인 발레리의 말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작품이 무덤이 될지 보물이 될지는 관람객에게 달려 있다.” 결국, 손철주의 책 제목처럼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니까 이런 출발은 곧 그림에 대한 안목은 넓어지고 또한 그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유익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의 미술이든 시대의 맥락, 작품과 화가가 마주한 현실에서 그림이 탄생하기 때문에 그림을 보기 전에 전반 지식을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논리이다.

 

멋진 예술 작품을 보고 잠시 정신 착란에 빠지는 현상을 일컫는 ‘스탕달 증후군’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스탕달은 소설 못지않게 미술에도 크게 경도됐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원본이 무한 복제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스탕달처럼 예술 작품을 보면서 황홀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그림 앞에서 무덤덤할 뿐이다. 스탕달이 살았던 시대의 미술관은 예술적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신성한 장소였지만 지금은 하루에 많으면 수백 명의 인파가 드나드는 산만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동일한 이미지의 복제로 원본의 아우라가 희미해져 버렸다. 과연 이 시대에 미술의 효력도 사라진 것일까. 필립은 아우라를 사랑했던 발터 벤야민의 걱정에 반기를 든다. 복제기술이 사람들을 미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훌륭한 복제기술은 원본의 세부묘사도 복원한다. 그러므로 미술관에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그림 원본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더라도 집에서 편안하게 복제품을 볼 수 있다. 요즘 전 세계의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들을 모아놓은 인터넷 웹사이트가 있다. 웹사이트에 있는 그림 사진을 확대하여 미술관에서 볼 수 없었던 그림의 세부표현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원본의 힘과 그 고유한 가치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법. ‘모나리자’ 원본을 보기 위해 오늘도 전 세계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다. 박물관은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원본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으로 세워진 아우라의 거대한 집합소다. 유럽을 대표하는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는 작품 중 상당수는 제국주의 시대 때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것들이다.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문화재는 출토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라는 논리를 펼치지만, 약탈 문화재가 어떻게 그들의 자존심이 될 수 있는가. 그들이 게걸스럽게 긁어모은 약탈문화재를 반환하지 않을까? 문화대국이라서? 천만의 말씀이다.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이것저것 다 돌려주면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은 텅 빌 것이고, 그에 따라 주요한 수입원인 관람료 수익이 팍 줄어든다.

 

필립은 유럽의 미술관이 식민지의 노획물을 보유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술관이 식민지의 문화재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구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문화재 약탈의 역사를 미화하는 입장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캄보디아 문화재 사례를 든다. 캄보디아 문화재는 약탈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본국의 문화 재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앙코르와트는 대단한 문화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리를 국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사업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캄보디아 정부가 약탈당한 자국 문화재가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해야 하는 유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환을 요구하는 태도를 필립은 모순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필립은 문화재의 가치를 입증하고 소중하게 관리를 하는 박물관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가 국가의 유산으로 인식되는 것이 서구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하는 필립의 입장을 동의할 수 없다.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국가의 입장을 서구적 관점으로 덧씌우는 필립의 논리는 문화재 반환의 정당성을 흐려 놓을 수 있다. 문화재 반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필립의 태도는 기 소르망의 어이없는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기 소르망은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 참석차 방한했을 때 “약탈이 아니라 서구가 문화재를 보호했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문화재 반환에 대한 필립의 입장이 모순적이다. 그는 파리에 있었던 산 마르코 대성당의 말 조각상이 베니스에 반환된 사실을 긍정적으로 본다. 또 산 마르코 대성당의 말 조각상은 유구한 역사적 전통이 있고, 베니스 사람들의 자랑거리이므로 원래 자리인 베니스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 조각상이 파리에 15년 동안 있었던 시간이 산 마르코 대성당 출입구 위에서 보낸 800년이라는 시간과 비교하면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필립은 반환 문화재에 부합되는 조건으로 ‘시간’을 강조한다. 그의 입장대로라면 대영 미술관에 전시된 ‘엘긴 마블스’를 그리스에게 돌려줘야 한다. 엘긴 마블스는 영국인 엘긴 경이 약탈해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이다. 2천5백 년 전에 제작된 그리스 고전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국 정부가 3만5000파운드에 사들여 대영 박물관에 전시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리스 정부는 엘긴 마블스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 정부 승인 하에 합법적으로 반출했다는 근거를 내세우면서 거부했다. 이렇게 시작된 양국 간 분쟁은 오늘날까지도 진행 중이다.

 

2013년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10세기 때 만들어진 캄보디아의 석상을 본국에 되돌려 준 적이 있다. 예술품이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미술관에 전시돼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수많은 약탈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 입장에서야 어정쩡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터다.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관 관장이 문화재 반환 문제를 미적지근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아쉽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쌩 2015-05-1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탈인가 구제인가
문화유산의 보호자라고 봐야하나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도서를 우리나라에 대여형식으로 돌려받은 걸로 알고있는데
반환이면 반환이지 몇년단위로 갱신 대여라는게 완전 웃깁니다.


cyrus 2015-05-15 21:24   좋아요 0 | URL
그들의 문화재 보호 역할을 존중하지만, 약탈의 역사를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입장을 보면 어이가 없죠...

transient-guest 2015-05-15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시작은 약탈입니다만, 그간 보존해온 공로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되었습니다. 계기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인데요,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이라크에서 엄청난 유물/유적들이 파괴되었거나 팔려나갔잖아요. 고대 바빌론/앗시리아 유적이 망가진 것을 tv에서 보면서 엄청 맘이 아프고 속이 상했습니다.

cyrus 2015-05-15 21:2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조국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무뢰배들 때문에 제3국이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집니다.
 
뭉크 뭉크 다빈치 art 1
에드바르드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 다빈치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에 욕심을 부린다. 부, 명예, 건강 그리고 행복한 삶 등 여러 가지를 누리고 싶어 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사람 욕심은 한없지만, 그중 가장 큰 욕심은 무병장수.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이 건강이다 보니 의학 수준은 높아졌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된 것은 아니다. 소음과 공해 그리고 전자파가 가득한 도시에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늘어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인간은 태곳적부터 본능적으로 많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기아와 질병 또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 우리에게 기아와 전쟁의 두려움보다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건강에 대한 불안에서 매 순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뭉크의 그림은 무의식 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를 현실보다 어두운 색채 속에 일그러진 선으로 그렸다. 뭉크의 예술 세계에는 항상 불행했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그림이 바로 일기이며, 자전이고 삶의 고백이다.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군의관 아버지와 독실한 신앙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크게 의지가 되었던 누이마저 잃게 되자 자신도 늘 죽음의 환각에 시달렸다. 그 자신 어린 시절을 병과 정신착란,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 찼었다고 회상했을 정도였으니, 그의 그림의 중심주제가 죽음이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뭉크는 미술의 길에서 자기를 발견했고, 자신의 불행한 심정을 가장 진실하게 그려냄으로써 역으로 새로운 삶의 통로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은 그를 떠나지 않았으니 그의 그림이 과격하다 하여 전시장이 폐쇄되기도 했고 알코올 중독과 정신 착란으로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뭉크의 삶은 끊임없는 의문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미술이 유일한 위안일 뿐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편안함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 역시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성격이상자였다. 애증이 엇갈리는 이들 부자의 관계는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뭉크는 아버지의 자살로 우울증에 빠져 괴로워한다. 아버지 사망 소식을 알게 된 날에 쓰인 뭉크의 일기에 당시 심란했던 뭉크의 정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뭉크의 정신 상태는 길에 지나가는 늙은 남자를 죽은 아버지와 닮았다고 착각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담배를 들고 있는 자화상」 1895년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항상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입 언저리의 담뱃대에서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등은 굽고 낡은 잠옷 차림이던,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항상 친절한 미소를 보내던 그가. 짙은 담배연기 사이로 미소를 짓던 바로 그가. 다시는 그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44쪽)

 

 

뭉크 연구가들은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이 상처받은 유년기의 기억이 되었고, 뭉크 예술세계의 우울한 색조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뭉크가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쓴 미공개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버지의 죽음 역시 정신적으로 연약한 뭉크를 괴롭히게 한 불행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뭉크는 반으로 갈라져 버린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자신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던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버려 상실되었다는 사실에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뭉크는 늘 죽음이 자신 곁에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뭉크는 「담배를 들고 있는 자화상」을 통해 회색 연기가 나는 담배를 피웠던 아버지의 영혼을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인 캔버스에 잠시 불러들인다. 아직도 아버지의 표정을 잊지 못한 것일까. 죽은 아버지를 떠올릴수록 뭉크는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죽음의 얼굴은 미소 짓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뭉크 앞에 나타난다. 어두컴컴한 배경에 시나브로 사라지는 담배연기를 눈으로 따라가면 무언가를 주시한 채 불안감에 떠는 뭉크의 동공을 마주친다. 틀림없이 뭉크가 두려움 짙은 눈으로 바라본 것은 죽음의 얼굴이었으리라.

 

《뭉크뭉크》는 미공개 일기와 자신을 후원해준 구스타프 쉬플러에게 보낸 편지들 그리고 뭉크가 직접 쓰고, 삽화가 있는 짤막한 이야기 세 편이 담겨 있다. 회화, 드로잉,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방식을 이용하여 주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흔적들과 아픔을 그대로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그와 같은 형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설명적인 텍스트를 작품에 덧붙이기도 한다. ‘자유도시의 사랑’과 아담과 하와를 패러디한 ‘알파와 오메가’는 분열증에 가까운 뭉크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뭉크는 ‘알파와 오메가’에서 오메가를 뱀의 유혹에 굴복하는 하와보다 더 악랄한 여자로 묘사했다. 오메가는 알파 몰래 짐승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는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고뇌에 시달렸던 뭉크는 여성에 대한 악의적 감정을 ‘알파와 오메가’에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뭉크는 죽음 다음으로 여성을 두려운 존재라고 봤다.

 

뭉크의 일기는 뭉크의 내면에 투영된 불안과 절망, 자연의 절규 자체다. “핏빛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 검푸른 해변과 도시에는 불로 된 피와 혀가 걸려 있었다”는 저 유명한 「절규」의 착상 이미지뿐만 아니라 일기 속에서도 온통 기괴한 비명으로 넘쳐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덮쳐올 죽음의 거대한 손길에 대한 예견이라고나 할까. 앙드레 말로는 “예술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덧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게 예술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예술가는 가도 예술은 살아남아 언제까지나 그 영혼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뭉크는 살아 있는 영혼을 그대로 캔버스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살아 있는 생생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그런 모습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뭉크는 사랑, 죽음, 고통, 불안 등의 감정을 거친 붓질로 그린다. 그것은 불행한 개인사에 기초한, 뼈아픈 영혼의 고백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양물감 2015-03-1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크는 그림이 의외로 익숙(?)해서 관심이 많이 가는 화가예요.불행한 개인사라... 읽어보고싶습니다

cyrus 2015-03-11 16:14   좋아요 0 | URL
혹시 익숙한 그림이라면 ‘절규’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 저는 처음에 ‘절규’ 같은 뭉크의 그림을 봤을 때 불쾌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뭉크의 생애를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림이 어두워서 여러 번 볼수록 슬픈 느낌도 나요.

붉은돼지 2015-03-1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때의 주인공이 가지고 싶어한 물건이 아마 턴테이블, 타자기 그리고 뭉크화집이 아니었던가요

cyrus 2015-03-11 22:2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는 이 주인공을 보면서 화보, 타자기, 절판본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

나와같다면 2015-05-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크의 `절규`를 보면 그가 느낀 극한의 공포. 공황상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것 같아요. 그 작품은 극 사실주의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그는 분명히 그 하늘 색을 봤고.. 그 적멸감을 느꼈을거예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에서 예술 분야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은 미술이다. 음악, 무용 같은 공연예술이 절대로 미술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미술품의 탁월한 보존성 때문이다. 수천 년 전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의 조각, 중세의 벽화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당시 음악이나 무용은 재현할 수 없다. 소리나 몸동작은 후대에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 한 점에서 역사와 시대 문화를 해석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분석과 해설은 딱딱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특히 배경 지식 없이 그림을 보면 그것은 '페인팅'에 그칠 것이다. 예술이나 미술전시장이 어색한 사람들의 많은 고충은 도무지 미술품 앞에 서 있으면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양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서양미술사를 완파하지 못한 이는 자신의 지적 교양 수준을 반성하며 작품설명 기기를 목에 걸고 귀 기울여 듣기 바쁘다.

 

대부분 서양미술 관련 서적은 입문자에게 불친절하다. 진지하고 어려운 말만 골라서 하는 강의실의 교수님처럼 좀처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한쪽을 읽고 넘기면 앞의 내용이 벌써 가물거린다. 몇십 쪽을 넘기고 나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다. 개념어와 역사적 배경 사이에서 널뛰기하다 보면 어느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사실 서양미술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서양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양미술을 만든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친절한 서양미술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이주헌이라는 친절한 안내자를 동원해야 한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미술작품을 통해 지루함을 넘어 흥미 있는 미적 여행의 세계로 안내한다.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0년대

 
 
저자는 서양미술의 본질에 좀 더 쉽게 다가서기 위한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인간 중심적, 사실적, 감각적 특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잘 살린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이다. 어린 헤라클레스가 잠자는 헤라에게 몰래 다가와 젖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헤라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제우스는 얼른 어린 헤라클레스를 떼어놓지만, 헤라의 가슴에 나오는 젖방울은 하늘과 땅으로 향한다. 하늘로 간 젖은 은하수(Milky way)가 되었고, 땅에 흘린 젖은 순결한 꽃의 상징으로 알려진 백합이 되었다. 

 

틴토레토의 그림에 나오는 신은 인간의 모습과 같다. 이뿐만 아니라 종교화에 등장하는 예수나 천사 또한 인간의 형상을 띤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특징은 역사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장르가 역사화다. 화가는 역사화를 통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한가운데 있는 인간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며 그 속에서 역사적 상황에 마주친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서양미술에서는 시각적 재현 또는 모방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체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연마저도 똑같이 그리려고 했다. 원근법의 등장으로 눈으로 보는 듯한 풍경이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어졌고, 여기에 더 나아가 빛과 그림자를 묘사함으로써 완벽한 환영적 재현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다시 틴토레토의 그림을 살펴보면 벌거벗은 헤라의 몸에 그림자에 의한 음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화사한 색채를 통해 시각이 촉각으로 환기하는 공감각적 표현을 구사하여 관객은 사실적인 느낌을 받는다.

 

 

 

 

 

김홍도  「씨름도」  1745년

 

 

저자는 서양미술의 세 가지 특징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동양미술과 직접 비교한다.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의 차이점은 우리가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와 작가의 미술작품에서 발견한 차이점을 통해 서양미술에 접근하는 길을 터주고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서 그림자 한 점이라도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나면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동양미술은 그림자를 묘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적인 외양보다는 본질의 진실한 내면(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김홍도의 그림이나 정선의 풍경화를 처음 본다면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원근법이나 그림자 표현이 없어서 사실감이 떨어지는 어설픈 그림으로 오해하기 쉽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각으로 다시 서양미술을 바라보는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참신한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17년 전부터 시작된 미술 특강에서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교양 미술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서양미술을 보는 이 세 가지 시각은 고전미술(현대미술로 규정하는 20세기 이전 미술사조, 즉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인상주의까지)에서만 한정되어 있다. 서양미술을 독학하는 독자라면 유의해야 할 점이다. 이 책을 이해하고 난 뒤에 중상급 정도의 서양미술을 더 알고 싶으면 역시 동일 저자가 펴낸 『지식의 미술관』(아트북스, 2009년)과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을 읽어보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마법 거울은 참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의 얼굴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다. 거울로 인하여 백설공주는 계모 왕비에게 살해될 위험에 처한다. 계모 왕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기보다 어쩌면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시기심이 많은 여자인지 모른다. 그래서 왕비는 매일 같이 거울에다 대고 누가 예쁘냐고 연신 묻는다. 거울이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고 대답하길 원한다. 알고 보면 계모 왕비는 ‘답정녀’(답을 정해놓은 여자)의 원조이다. 그러니까 왕비 본인은 자신이 예쁘다는 착각에 빠졌다. 거울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다.

 

거울은 원본을 모방한다.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앨리스처럼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야릇한 충동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본 거울상은 진짜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현란하게 치장한 자신을 비춘 거울상에 일종의 도취를 느낀다. 계모 왕비처럼 거울을 통해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스스로 판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미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사실을 은폐하고 '나쁜 것'으로 몰아세운다.

 

 


 Scene #2  서경식이 들여다본 ‘미술’ 거울들

 

서경식 선생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펴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미술을 ‘거울’로 비유한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미술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례를 시작한다. 과연 선생은 ‘미술’ 거울에서 무엇을 봤을까?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 일단 선생이 본 ‘미술’ 거울은 다음과 같다.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나탈리 르무안), 홍성담, 송현숙은 지금도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미술’ 거울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다간 화가 두 명,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과 월북 화가 이쾌대는 만든 지 오래된 ‘미술’ 거울이다.

 

그런데 선생이 보는 ‘미술’ 거울 중에 신윤복을 제외하면 나머진 우리에게 낯선 이름들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 ‘미술’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미술’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 입양되어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한국계 화가 미희, 파독 간호사 출신의 재독 화가 송현숙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서 남한 땅에서 잊힌 이쾌대. 이들은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적이지 못한 미술로 배제되었다. 거울인데도 디자인이 조금 튄다는 이유만으로 거울들만 모아놓은 진열장에 놓이지 못한 채 하자품으로 분류되어 차가운 창고로 향하는 운명과 같다. 하자품 신세가 된 ‘미술’ 거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 즉 한국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본 이 ‘미술’ 거울들을 ‘우리 미술’로 포함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애초부터 이 책 제목을 ‘나의 우리 미술 순례’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의 의미가 내포된 ‘조선미술’이라고 사용한다. 원래 선생은 ‘우리’와 ‘미술’ 사이에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이라고 정하고 싶었다. 배타적인 자의식이 강화되는 ‘우리 미술’이라는 언어의 권위성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역사의 흉터를 비추는 ‘미술’ 거울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왼쪽)

윤석남 「어머니 I : 열아홉 살」, 1993년 (오른쪽)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곧 정체성을 되묻는 성찰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속에 포함된 진짜 ‘나’를 찾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8개의 ‘미술’ 거울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진짜 ‘나’의 정체성을 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의 흉터가 보기 싫어 일부러 거울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슬픈 역사의 생채기로 인한 흉터가 많다. 일제 강점기,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남북 분열, 5월 18일 광주의 역사. 깊게 팬 역사의 흉터를 보는 것은 차마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외면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 몸에 남은 흉터도 ‘우리’ 몸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에게 분열과 고통, 공포를 줬던 아픈 과거도 ‘우리’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흉터를 외면한다. 반면 아름다운 역사만 보려고 하며 자랑하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만 비춰주는 왜곡된 ‘미술’ 거울만 들여다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런 ‘미술’ 거울들은 대상의 단점을 은근슬쩍 감추고, 장점만 부각해주는 계모 왕비의 마법 거울과 같다.

 

신경호, 윤석남, 미희, 송현숙은 역사의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화가들이다. 그들은 역사의 흉터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진짜 ‘미술’ 거울이다. 신경호는 광주 사람으로서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예술적으로 증언하고자 노력한다. 지금도 극우로부터 공격받고, 왜곡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예술을 통해 구출함으로써 잊고 여전히 역사 하나로 인해 분열된 ‘우리’의 본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윤석남은 위안부 문제에 ‘어머니’와 관련된 아련한 기억을 접목해 공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희와 송현숙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6261번째 해외 입양인인 미희는 자신의 처지를 ‘한국 경제성장의 산업폐기물’이라고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말 속에 고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세계의 투명 인간들,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서려 있다.

 

 


 Scene #4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보다는 끊임없는 타자와 대화하는 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일단 계모 왕비처럼 ‘미술’ 거울들 앞에서 질문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보고 싶고 익숙한 것들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향해 물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선생의 미술 순례는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빗금을 쳐놓은 ‘우리 미술’의 환상을 의심한다.

 

과연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일단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우리’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상의 거울만 자꾸 들여다본다면 어떤 대상의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고 삐딱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보게 될까. 진실한 내면이 오롯이 남아있는 정체성일까 아니면 타자의 눈에 맞춘 거짓된 아름다움만 뽐내는 가짜 정체성일까. 진짜 나를 보았을 때, 한 점 부끄럼이 느껴져서 괴롭더라도 전자의 거울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마주 볼 수 있는 진실한 물건이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진실을 외면하고 환영에 가까운 아름다움만 보여주려는 미술은 계모 왕비처럼 착각에 빠진 대중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14-12-2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 보고 있는 중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어렴풋하게 잡히던 것들이 cyrus님의 리뷰덕분에 더 명확해지네요.

cyrus 2014-12-26 00:14   좋아요 0 | URL
긴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중인데 제 글이 의도치 않게 바람님에게 스포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바람돌이 2014-12-26 00:42   좋아요 0 | URL
지금 3분의 2쯤 읽었으니까 스포는 아니구요. ㅎㅎ

stella.K 2014-12-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 벌써 읽었네.
그렇지 않아도 서평단 신청 왜 안하지 했는데.
난 그저께 도착해서 아직 시작 안하고 있어.
서경식이야 워낙...!

cyrus 2014-12-26 14:01   좋아요 0 | URL
신청하고 싶었는데 그 책에 신청자가 너무 많았어요. ㅎㅎㅎ 운 좋게도 지난주에 도서관 신간코너에 서경식 선생의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어요.
 
칼데콧 컬렉션 칼데콧 컬렉션 1
랜돌프 칼데콧 지음, 이종욱 옮김 / 아일랜드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총각의 쓸데없는 궁금증 하나. 부모는 자녀를 위한 그림책을 어떤 기준으로 고를까? 그림만으로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운 책? 아니면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책? 그림도 좋지만, 교훈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을 고를 수도 있다. 요즘 아빠와 엄마도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외국 작가의 그림책이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외국 작가의 그림책을 읽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작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외국 그림책이라면 디즈니 만화뿐이다. 미키 마우스, 아기사슴 밤비, 곰돌이 푸, 신데렐라 등 디즈니가 만든 고전만화의 일부 장면을 그림책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그림책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책의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러자 글자 대신 그림만 있는 책만 읽었다. 어머니는 한글을 완전히 뗀 아들이 그림책만 읽는 것이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 싶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글자가 많은 아동 문고나 위인전을 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사준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처음에 그림이 없는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림만 보는 독서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어머니는 반강제적으로 글자로 된 책을 읽게 했다. 어머니가 강요하는 독서 때문에 잠시 독서의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림에 집착하는 습관을 잊지 못해 엉뚱하게 오락실의 게임에 빠졌다. 거의 밤늦게까지 오락실에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 거대한 화면에 가득 채운 역동적인 그림과 눈을 자극하는 색채는 책의 존재를 완전히 잊게 해줄 정도로 나를 유혹했다.

 

요즘 아이들의 눈은 책보다 기계 속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독서를 방해했던 것이 TV, 오락, 비디오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성능이 좋은 기기들이 하나씩 우리 일상에 파고들기 시작했는데 가장 친숙한 것이 스마트폰이다. TV를 많이 보는 아이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스마트폰만 온종일 보는 아이다. 고사리 같은 조그만 손보다 큰 스마트폰을 꼭 쥐면서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한다. 아이들은 집에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간다고 아이들을 집에 혼자 놔두고 갈 수 있다. 예전 아이들이라면 집에 혼자 있다는 공포감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혼자 집에서 놀 수 있다. 오히려 집에 어머니가 없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한편으로 그림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순수한 동심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림책 몇 권만 읽어도 전혀 무섭지 않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집에서 혼자 노는 재미를 알고 있을라나.

 

만약에 내가 부모라면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자식이 책을 좋아하도록 어떻게 가르칠까? 정답이 없겠지만, 우선 그림책을 읽도록 권할 것이다.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걸로. 그리고 아이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좋을 것 같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의 행동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부모처럼 똑같이 따라 한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제일 좋은 방법이 부모와 자식이 한 권의 책을 같이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 간의 친밀감이 더욱 향상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독서의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미래의 자식과 함께 읽게 될 그림책을 장만하게 된다면 『칼데콧 컬렉션』을 꼭 살 것이다. 랜돌프 칼데콧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활동한 그림책 삽화가이다. 칼데콧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한해 동안 뛰어난 그림책 작가에게 ‘칼데콧 상’을 수여하고 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글 없는 그림책’의 모범이다. 그림 한 컷에 달랑 글자 한 두 줄만 있거나 아예 글자가 없는 것도 있다. 글자가 없는 책이라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칼데콧은 오직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칼데콧의 그림은 누구나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려고 그림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묘사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자칫 단순하게 느껴지는 선 하나만으로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케치를 많이 했던 경험 덕분에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칼데콧 상을 받았고, ‘그림책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모리스 센닥은 칼데콧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책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칼데콧의 그림책이 “글이 없는 곳에서는 그림이 말하고, 그림이 없는 곳에서는 글이 말한다. 마치 튀어 오르는 공과 같다”고 평가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더 읽고 싶어진다. 그림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다음 장면에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예스러운 그림 속에 세련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칼데콧이 묘사한 동물과 인물의 표정은 생생하다. 그림책을 펼치는 순간, 그 속에 있는 동물과 인물은 독자 앞에서 살아서 숨을 쉰다.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위협하는 개가 무서워서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운 채 겁에 질린 고양이의 표정을 보라. 이런 재미있는 묘사는 그림책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눈웃음 짓는 강아지의 표정만 봐도 강아지의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칼데콧은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드는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아이가 읽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눈에 최대한 맞추도록 했다. 글자에 익숙하지 않아 그림이 편한 아이부터 글자를 전혀 모르는 아이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영국에 자란 아이들의 귀에 익숙한 전래동요, 구전민요, 동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짧고 반복되는 문장이 많은 편이다. 단순한 이야기와 단순한 그림의 만남. 이런 단순한 조합은 그림책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빽빽한 활자로 이루어진 책만 읽어서 색다른 독서를 원하는 독자라면 칼데콧의 그림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이 무겁고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애서가라면 이런 책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다. 심심할 때 가끔 읽어 볼 수 있다. 아니면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같이 읽어도 좋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에 익숙한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그림책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영국 전래동요를 낯설게 느껴진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너무나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이 요즘 아이들의 취향에 맞을지 의문이다. 유명한 외국 그림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것만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폴 아잘은 “어린 시절에 처음 읽은 책과 처음 본 그림에 의해서 자기 나라의 지난 역사와 전통의 훌륭함을 알고 강한 조국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책과 그림의 추억은 가슴 깊은 곳에 차고 들어 일생 동안 간직하게 된다”고 말했다. 외국 그림책이 넘쳐나고, 아이들이 접하는 그림책이 외국 작품이 훨씬 많은 현실에서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른도 그림책을 읽어야 한다. 아직도 다 큰 어른이 그림책을 읽는 모습이 수준 낮게 보이는가. 가끔 어른도 그림책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속에 소중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부모와 아이가 그림책을 같이 읽으면 그 추억이 공유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14-12-21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대는 분명 멋진 아빠가 될 거야~
우리집에는 칼데콧 그림책 딱 한권인데 찔린다;; 근데 지민이가 많이 좋아해. 요 시리즈 장바구니에 쏘옥 담아놔야지. :)

cyrus 2014-12-21 10:29   좋아요 0 | URL
누나도 이 그림책을 만족스러워 할거예요. ^^

바람돌이 2014-12-21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모든 종류의 그림책들을 다같이 읽었는데 어른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딱히 일치하진 않더군요. 그리고 딸랑 둘뿐인 녀석들 역시 그림책 취향이 전혀 다르더이다. ^^

cyrus 2014-12-22 20:46   좋아요 0 | URL
역시 경험자의 말씀은 유익합니다. 아이의 취향이 부모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데도 무조건 부모 취향이 따른 책을 아이에게 권한다면, 아이들이 책을 멀리할 것 같습니다. ^^


해피북 2014-12-21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며 대단한 내공이 느껴지신다 했더니 역시그랬네요 ^^ 저는 동화책을 고를때 그림의 조화로움 과 색채를 주로 보는거 같아요. 조금 날카롭거나 어두운 색깔보다는 밝고 화사한 그림책을 선호하는데 아이들에게 읽어줄때도 시각적 효과가 있고 집중력이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덕분에 이런 동화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과 복사해서 색칠놀이도 하고 이야기도 만들고 해도 좋을거 같네요^^ 더불어 야나님 말씀처럼 좋은 부모님이 되실거 같다는데 공감합니다^^

cyrus 2014-12-22 20:50   좋아요 0 | URL
그저 책을 좋아하지 알고 보면 헛똑똑인데요. 내공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늘 독서를 통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서재 이웃분들의 건전한 비판과 의견도 귀 기울이려고 합니다. 해피북님 말씀도 잘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라서 그림책을 고르는 부모의 심정이 무척 궁금했어요. 사실 이런 궁금증을 가진 미혼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