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는 일상세계로부터 단절을 추구하는 사조다. 회화에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소재들로 화면을 꾸미는 장르를 말한다. 또한, 대상을 과도할 정도로 자세하게 그리되 그것을 약간씩 비틀어 생소한 느낌을 주어 혼돈을 체계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화가들에게 강조되는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보다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뛰어난 상상력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인간의 꿈과 욕망,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등 서로 모순되고 대립하는 세계를 상상력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변용했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그는 생전에 시인으로만이 아니라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에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기점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등이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끈 브르통은 일상의 상식에 매몰돼가는 인간을 해방하고 꿈과 잠재의식이 엮어내는 초현실의 새로운 세계를 제공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세계로 인간을 안내하는 길잡이인 초현실주의 회화의 기법을 마련한 것은 막스 에른스트였다.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콜라주(collage)를 보고 브르통은 이것이야말로 ‘초현실주의의 시금석’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에른스트는 다양한 초현실주의 기법을 선보였는데, 프로타주(Frottage)는 20세기를 거쳐 오늘날 작가들에게 유용한 실험적인 기법이다. 누구나 어릴 적에 백 원짜리 동전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검게 문질러 그려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게 프로타주다. 잎, 천 따위의 면이 올록볼록한 것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면 피사물의 무늬가 베껴지는데, 그때의 효과를 조형상에 응용한 것이다. 프로타주의 어원은 '문지르다'는 뜻의 프랑스 단어 '프로테'(frotter)에서 파생됐으며, 화가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차원에서 우연히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효과를 노린다. 에른스트가 프로타주 기법을 발견한 것도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비가 내리던 그날 저녁, 나는 프랑스의 해변에 있는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마룻바닥에 깊게 파인 홈들을 흥분한 가운데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명상과 환각 능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나는 마루 위에 종이 몇 장을 아무렇게나 놓고 연필을 문지르기 시작해 몇 장의 스케치를 떴다.

 

(막스 에른스트, 베르너 슈피스의 책 《막스 에른스트 : 프로타주 기법과 예술세계》 14쪽)

 

 

 

 

그라타주(Grattage) 또한 에른스트가 자주 사용한 기법이다. 이것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그림 제작 방식이다. 종이에 크레파스로 여러 가지 색을 칠한 뒤에, 까만색을 덧칠해 날카로운 물건으로 원하는 형상이 나오도록 긁어낸다. 에른스트는 캔버스에 물감을 여러 겹 바른 후 표면을 긁어서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얻으려고 했다.

 

 

 

 

 

이성과 상식을 거부하는 초현실주의 미술은 192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서구 미술 흐름의 중추적인 사조였다. 그러나 국내 화단에서 초현실주의는 상대적으로 별로 활발치 않았다. 개인적으로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들은 있었지만, 이들이 하나의 유파를 형성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초현실주의 그림의 난해성은 관객의 접근을 막아버리기도 한다.

 

 

 

 

 

에른스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그림들은 어둡고 불길한 징후를 간직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음산하고 불길한 분위기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에른스트의 『세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 예수를 때리는 성모』는 기존의 성모자 상을 뒤집는 도발적인 그림이다. 성모는 벌거벗은 아기 예수의 엉덩이가 벌겋게 되도록 손바닥으로 때린다. 힘이 세게 들어간 성모의 엉덩이 스매싱 때문에 아기 예수의 광륜(halo)이 바닥에 떨어졌다. 성모 뒤에 에른스트, 브르통, 엘뤼아르 세 사람은 무심한 눈빛으로 폭력의 광경을 바라본다. 에른스트는 도발적으로 종교의 금기를 우롱한다. 그러면서 종교적 금기 속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보여준다. 성모가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행위는 언뜻 보면 섬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비현실적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은 엄연하게 존재하는 실존의 인간이기도 하고 또 일상에서 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상 폭력성을 두려워한다. 살풍경한 현실, 이해 불가능한 인물들의 태도를 보면서 관객은 어쩔 수 없이 내면의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비 온 뒤의 유럽 II』는 1차 대전이 휩쓸어 황폐해진 유럽을 초현실주의적인 연출로 극대화한 작품이다. 에른스트는 군 복무 중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유럽을 목격하면서 ‘반 문명, 반이성’을 표방하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사정은 이해되고 남음 직하다. 에른스트에게 전쟁은 인간 내면의 증오와 파괴성에서 시작된 극단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광란의 현실을 그리면서 인간 무의식의 지층 속에 새겨진 폭력성을 더듬었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게 될 때 화가의 생명은 끝”이라고 말했다. 그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에른스트의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굳이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 정답에 가까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이상한 불길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만 즐기면 된다. 이 불길한 환영을 보라, 그리고 긴장하라. 초현실주의 그림이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순간, 그림의 생명은 끝이다.

 

 

 

 

※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http://www.wikiart.org/)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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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9-09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문예사조에 밝으시네요 ^^!: 덕분에 해설이 곁든 명화 감상 합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16-09-09 17:00   좋아요 2 | URL
그림 해설은 책에 있는 내용을 기본적으로 참고하고요, 그림에 대한 제 생각을 덧붙입니다. 책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입니다. ^^;;

yureka01 2016-09-09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에서도 현실의 은유..이런게 초현실그림이 아닐까 싶어요. 너무 직설적인 경우 정치적인 박해가 염려될때 써먹는 고단수의 기법같은거..^^.

cyrus 2016-09-09 17:44   좋아요 1 | URL
초현실주의자 대부분은 좌파였어요. 제가 좋아하는 마그리트는 벨기에 공산당원이었습니다. 달리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소재로 초현실적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

yureka01 2016-09-09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주장을 직설적인 회화로 표현하기보다는 역시 예술은 한번 비틀어야 제맛인가 봐요..

cyrus 2016-09-09 17:5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는 화가의 메시지를 숨긴 그림을 좋아해요. 이런 그림은 관객의 호기심을 유도해요. 그리고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
 

 

 

 

 

 

 

 

 

 

 

 

 

 

 

 

 

 

 

우리 사회에 학문 간의 융합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이제 경제(경영)와 예술이 서로 손을 맞잡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지식과 감성의 융합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 경제 그리고 예술을 연결짓는 건 상당히 어렵다. 몇 년 전부터 통섭이 파도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데, 우리나라는 항상 화두만 던져진 채로 풀리지 경우가 많다. 융합은 인위적인 작업으로 이루려고 해선 안 된다. 그건 접속과 생성이 아니라 어설픈 용접 수준에 불과하다. 어설픈 융합은 그 속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훤히 보인다. 잘된 융합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술과 경제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약칭 예술과 경제’)은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낸 잘못된 융합의 결과물이다. 미술관에서 그림 좀 본다고 전방위 융합이 되는 게 아니다.

 

예술과 경제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야 할 내용이 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를 소개한 저자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다.

 

 

 

   

   

터너가 활동하던 시기는 명확한 색과 뚜렷한 형태를 가진 그림이 최고로 간주되던 빅토리아 시대였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각광받을 수 없었다. 당시 안개 같은 연기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증기기관이 뿜어내는 연기였고, 그 연기는 산업동력의 원천이지 창조적 예술의 원천이 아니었다. 흔히 하는 말로 터너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은 항상 실패를 먼저 맛본다. 물론 지금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국민화가로 칭송받는 터너지만 당시엔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 작가에 불과했다. (예술과 경제18)

 

윌리엄 터너는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풍경, 즉 환상적인 일몰이나 신비한 빛, 자연의 폭발적인 역동성 등의 소재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자유로운 색상과 느낌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터너는 직접 자신을 배에 묶고 바다로 나가 거기서 절절하게 느끼는 감동적인 바다를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터너의 대표작 , 증기, 속도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본 뿌연 광경을 담은 그림이다. 당시 사람들이 느끼던 기차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터너가 시대를 앞서가던 화가인 것은 분명하다. 터너는 말년에 갈수록 새로운 화법을 시도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실패만 겪은 비주류 화가가 아니다

 

 

 

 

 

 

 

 

 

 

 

 

 

 

 

 

터너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로열 아카데미(영국 왕립미술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터너는 승승장구했다. 고전적인 풍경화를 그려 인기를 얻었고,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29세에 작업실 겸 화랑을 개설하여 그림 주문을 받았다. 로열 아카데미는 보수적인 미적 담론을 고수했던 미술학교다. 터너는 전통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고, 로열 아카데미 강단에 서서 고전적인 원근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터너가 여러 차례 유럽을 여행한 이후로 표현 양식에 변화가 생겼다. 점점 그림 속 대상이 희미해지고, 구도가 단순해졌다. 현대 추상 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생동감 있고 대담한 붓 터치를 시도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터너의 독창적인 그림을 비난했지만, 이 이유만 가지고 터너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주류 화가로 보기 어렵다. 터너처럼 처음부터 주류의 인정을 받다가 점점 전통적인 회화양식에 거부하는 화가들도 있다.

 

 

 

 

 

 

 

 

 

 

 

 

 

 

 

 

 

 

터너에 대한 설명보다 더 어이가 없는 내용이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 경제가 국가경쟁력을 갖추려면 미래파처럼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과 경제를 아직 안 읽어본 독자는 미래파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재보다 앞서서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분명 멋진 일이다. 미래파로 분류된 화가들도 미래지향적 회화를 강조했다. 그런데 그들의 실체를 자세히 알게 되면 미래파의 등장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미래파의 실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통을 극도로 싫어하는 과격주의자’, ‘과학과 기계에 열광하는 자’, ‘반페미니스트’, ‘전쟁에 좋아하는 파시스트에 가깝다.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 처음 등장했다.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는 1909년 파리에서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움, 즉 속도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확언한다. 포탄을 타고 가는 것처럼 소리 내며 질주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 우리는 운전하는 사람을 찬미하고 싶다.

 

* 우리는 전쟁(세상의 유일한 위생학), 군국주의, 애국심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들의 파괴적 몸짓,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아이디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조롱을 찬미한다.

 

* 우리는 박물관, 도서관, 모든 종류의 아카데미를 파괴하고 도덕주의, 페미니즘, 모든 기회주의적이거나 실용주의적 비겁함에 맞서 싸울 것이다.

 

(리처드 험프리스 미래주의11, 미래주의 선언문 내용 일부)

    

 

 

           

 

   

  

 

    

  

 

미래주의 선언은 총 열한 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다. 마리네티는 이 선언문을 통해 속도의 아름다움이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라며 미래파 운동을 태동시켰다. 미래주의자들의 눈엔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가 더 매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기계의 속도감에 도취한 나머지 니체와 베르그송의 사상을 왜곡한 신념을 고수했다. 미래주의자들은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산업화가 뒤처진 이탈리아의 참담한 현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우렁찬 기계 소리가 들리는 장밋빛 미래를 염원했다. 급진적 변화를 서두르는 미래주의자들의 초조함은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마리네티는 예술과 정치를 하나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무솔리니와 가까이 지냈다. 미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관중이 많은 극장에 몰래 들어와서 전쟁을 지지하는 선동적인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1차 세계대전은 미래파의 결속력을 와해시켰다. 전쟁에 참전한 미래주의자들은 전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미래파의 종말을 앞당겼다.

 

 

 

 

 

 

 

 

 

 

 

 

 

 

 

 

 

 

미래파는 다다이즘과 러시아 현대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전쟁과 파시즘을 숭상하는 미래파의 야망은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점을 보지 못한 채 미래파의 미래를 단순히 진보에 대한 열망으로 이해한다면, 미래파의 반쪽 얼굴만 본 것과 같다. 예술과 경제저자는 독자에게 미래파의 좋은 얼굴만 보여줬다. 그리고 미래파가 추구하는 변화를 점진적 변화로 보고, 경제에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속도를 강조했다. 미래파는 급진적 변화를 추구했고, 그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속도는 국가의 몰락을 앞당겨 멈추기 힘든 폭력으로 변질하였다. 폴 비릴리오는 속도와 정치에서 혁명은 일종의 과속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발전의 가능성을 열었던 속도가 전쟁 무기, 즉 핵무기라는 위험천만한 무기의 발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속도를 선점하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경쟁이 과열되고, 도덕의 가치가 위협받는다. 미래파는 완전히 사라졌어도 속도에 열광하는 본능은 여전하다. 우리나라에도 속도 본능이 남아 있다. 무조건 일등을 하고, 이기고 봐야하는 것이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여전히 빠른 속도로 산업이 발전했던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http://www.wikiart.org/)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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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7-22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너 제가 정말 좋아하는 화가인데요. 예전에 알라딘에서 나온 엽서북도 샀던.. 이 글을 보고 나니 오히려 마로니에북스의 책을 읽고싶네요^^
책제목이 뭔가 그럴듯했는데 전혀 아닌가보네요.. 미래파의 미래주의 선언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미래파 운동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라.. 많이 배웠습니다ㅎㅎ

cyrus 2016-07-23 11:56   좋아요 0 | URL
마로니에북스 타센 시리즈의 글자 폰트가 작아서 불편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좋은 책입니다.

이택광씨의 《미래주의 선언》에 선언문 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역이라는 내용의 100자평이 있습니다. 《예술과 경제》의 저자 덕분에 저도 미래파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있을지 모르는 김형태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비종 2016-07-23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를 텐데요, 저 역시 속도가 아름답다는 미래파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점점 빨라지면서 속도를 향한 질주는 집착에 가까운 전쟁과도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자동차를 놓고 걸을 때 생각합니다. 걷는 것이 과연 차를 이용하는 것에 비해 초라하거나 미개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걸까 하고.

cyrus 2016-07-23 12:01   좋아요 0 | URL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면, 느림을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인터넷 속도가 향상된 스마트폰이 나오면, 기존에 쓰고 있는 스마트폰의 성능이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점진적 변화는 좋게 보는데, 급진적 변화는 달가워지 않습니다. 제가 보수 쪽에 가까워요. ^^;;
 

 

 

 

 

 

 

 

 

 

 

 

 

 

 

 

 

 

일본을 대표하는 회화로 우키요에가 있다. 17세기 일본 에도 시대에 나타난 회화 양식으로 통속적 정서를 담았으며, 감각적이고 장식성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세기 말 유럽에 번진 자포니즘 열풍의 선봉에 섰던 것도 우키요에였다. 고흐와 모네, 드가 등의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강렬한 색채, 과감한 시선 처리에 완전히 매료됐다.

 

 

 

             

 

모네는 방안을 우키요에로 가득 채울 정도로 열렬한 수집광이었다. 말년에 그는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을 짓고 연못에 일본식 다리가 놓인 정원을 가꾸었다. 이러한 연관성에 의미를 부여해서인지 지베르니를 일본식 정원혹은 일본풍 정원으로 잘못 소개하는 책이나 칼럼니스트, 기자가 많다.

 

 

 

 

 

 

 

 

 

 

 

 

 

 

 

 

 

 

작은 침실에서 북적이는 사람들의 소음을 등 뒤로 한 채 내려다본 바깥 정원 풍경은 온통 푸른색과 흰색, 붉은색 등의 갖가지 색들이 뒤엉켜 강렬한 빛을 발하여 5월의 따사로운 햇볕에 더욱 발랄하게 느껴졌다. 정원으로 나와 청보라색 라벤더와 연분홍색 튤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예쁜 꽃밭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며 지하통로를 통과하니, 모네의 명작 '수련'이 탄생된 일본풍 정원과 연못이 나타난다.

(서유럽 자동차 여행중에서)

    

 

지베르니에는 모네와 친분이 있는 화가와 미술상들이 방문했는데, 그중에 다다마라 하야시라는 일본 출신의 미술상도 있었다. 다다마라 하야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알려줄 정보가 한 개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모네에게 우키요에를 공급한 인물로 추정된다. 하야시는 수련이 있는 물의 정원이 일본식 정원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는데, 모네는 그의 주장을 부정했다. 아치형 다리는 일본의 양식을 따랐지만, 모네가 직접 고르고 심은 꽃들 중에 일본에서 가져온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베르니 토착종이거나 유럽에 자라는 것들이다. 모네가 정말로 일본식 정원을 만들 계획이었으면 일본에 직접 들여온 식물 위주로 심었어야 했다. 하야시는 지베르니 정원을 방문했음에도 정원에 대한 모네의 생각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야시처럼 국가의 문화를 과도하게 부각해서 미화하는 태도를 국뽕’(국수주의를 뜻하는 은어)이라고 한다. 모네가 일본 문화에 애착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지베르니 정원을 일본식 정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다.

 

 

 

                 

 

 

모네는 정원이 딸린 작업실을 만들고, 정원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정원에서 예술미를 발견한 최초의 화가는 아니다. 모네 이전 혹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은 파리 근교에 있는 시골에 살면서 풍경화를 그렸다. 특히 파리에서 북서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는 화가들의 근거지였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오베르 쉬르 우아즈가 거리상으로 파리와 가깝다. 모네의 정원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폴 세잔과 카미유 피사로도 오베르에서 작업했는데,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가 된 네덜란드 출신 화가도 조용한 오베르에 정착했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다.

 

 

 

 

 

 

 

 

 

 

 

 

 

 

 

    

 

정신병원에 퇴원한 빈센트는 자신의 주치의 폴 가셰 박사의 집에 딸린 정원과 화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의 정원을 그렸다. 빈센트가 오베르에 머물던 최후의 시기에 그려진 까마귀가 남긴 밀밭이 걸작으로 알려졌지만,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정원 그림도 훌륭하다. 빈센트는 십 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동안 개인 정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병원 생활을 하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모네는 지베르니의 정원 속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화가의 행보가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빈센트도 정원을 사랑한 화가였다. 그는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정원을 잊지 않았다. 영국에 살았을 때 정원 조경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고흐는 정원 속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림을 그릴 때 큰 행복감을 느꼈다. 고흐와 모네 두 사람 모두 생각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마주했다. 고흐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모네는 가족들의 죽음에 실의에 빠졌고, 두 눈이 백내장에 걸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마음을 크게 다친 두 사람은 정원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찾았으며 위로를 얻었다.

 

만약에 빈센트가 지베르니에 정착했다면, 아니면 반대로 모네가 오베르에 정원이 딸린 작업실을 세웠다면 과연 두 사람은 역사적인 조우가 이루어졌을까? 주관적인 상상력을 덧붙이자면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을 것 같다. 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빈센트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정원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어나자 모네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서로 친해지기가 무척 힘들었을 듯하다.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http://www.wikiart.org/)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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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07-2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리에 갔을 적에 다들 지베르니 타령을
하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군요.

아마 차가 없으면 고생 엄청할 것 같은
예감입니다만.

cyrus 2016-07-21 17:33   좋아요 0 | URL
정원의 일본식 다리 때문인지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
 
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
데브라 N. 맨코프 지음, 김잔디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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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는 시간에 쓰러져가는 존재의 풍경을 날카롭게 포착한 사람들이다. ‘인상이란 단어는 중요하지 않다. 클로드 모네가 주목한 것은 모든 존재는 허물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사라져 곧 안 보이게 된다. 그가 순간적으로 잡아낸 것은 아름다움의 진실이다. 모네는 생애 말년에 수련 연작을 발표하면서 화가의 열정을 불태웠다. 파리에 멀리 떨어진 지베르니에 정착한 모네는 센 강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손수 수련을 키우며 그것을 즐겨 그렸다.

 

 

 

 

모네의 정원을 보기 전에는 모네를 이해할 수 없다. 모네의 걸작들은 모두 그가 살던 지베르니 정원에서 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네는 자신의 그림을 보려는 손님들이 아틀리에를 찾으러 오면 가장 먼저 정원을 구경시켰다. 걸작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싶었던 손님들은 정원을 자랑하는 화가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정원을 둘러보는 일은 모네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다. 수련은 여름에 피는 꽃이다. 모네의 수련 그림에서 넘실거리는 아련한 물너울은 여름의 열기를 닮았다. 어쩌면 모네는 일반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단번에 사로잡을 수 없는 눈부신 빛의 아우라를 그림으로 완벽히 재현했음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네는 자신의 삶에 따사하게 비춰주는 빛이 간절한 사람이었다. 모네는 부질없이 사라지고 마는, 끊임없이 달아나는 빛을 붙잡고 싶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년의 모네는 절망적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 명이나 먼저 떠나보냈고,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건강마저 좋지 않았다. 아폴론 신은 빛과 태양의 약동을 관장하고, 시와 음악을 사랑했다. 아마도 신은 빛을 모조리 그림에 담는 비범한 능력을 갖춘 지상의 화가에 질투심을 느꼈을 것이다. 폴 세잔이 격찬했다는 모네의 위대한 눈은 백내장에 손상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네는 정원에게서 위로와 희망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하얀 캔버스에 옮긴 빛의 아우라에 영원성을 부여했다. 시력이 많이 약해진 이후로 색채에 대한 감각도 변했다. 모네의 수련 그림은 점점 더 추상으로 다가갔다. 이 시기에 그린 지베르니의 연못 풍경은 형상이 거의 사라진 채 색채와 터치만 남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에너지로 꽉 차 있다.

 

 

 

     

수련은 모네가 평생 추구한 빛과 색채의 철학을 집약한 마지막 정화다. 그는 하늘과 주변 풍경이 잠긴 거울 같은 물 위에 무리 지어 뜬 채 빛과 대기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수련에 매혹됐다. 그것은 빛과 물, 대기의 흐름을 끈질기게 탐구해온 그에게 최상의 소재가 됐다. 지베르니 정원은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기 위한 수단이자 예술가로서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모네의 유일한 안식처다. 말년에 그려진 모네의 그림에서는 사람보다 정원 풍경이 더 많다. 자연을 향한 애정과 빛을 향한 열정이 모네를 거장의 반열에 올렸다. “날씨가 참 좋군요. 먼저 정원을 둘러보겠소?” 정원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하는 모네의 첫인사말이다. 이제는 빛의 안내자의 부드러운 인사도, 화초를 심는 늙은 화가의 애틋한 모습은 없다. 그가 일평생 화폭에 옮기려고 애쓴 빛의 마술이 찡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정원의 빛은 먼지가 되어 공중 분해된다. 그렇지만 모네의 그림 속에 있는 빛은 푸른 불꽃이 되어 내뿜고 있다.

 

 

초판 1쇄의 230쪽에 모네의 딸 마르테 오슈데 버틀러의 생몰 연도가 잘못 나왔다. 버틀러의 출생연도가 ‘864’로 되어 있다. 숫자 1이 빠졌다.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http://www.wikiart.org/)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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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7-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네가 소실점과 입체감을 무시한 평면적 그림의 선구자라고 하던데요. 그림을 봐선 당최 모르겠습니다. ㅠㅠ

syo 2016-07-18 21:15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화가는 아마 마네일거에요^^

북다이제스터 2016-07-18 22:1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마네입니다. 제가 좀... ㅠㅠ

syo 2016-07-18 22:20   좋아요 2 | URL
마네의 ˝올랭피아˝하고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교하면 궁금하신 부분에 대한 답을 얻으실수 있으실거같아요. 그 두개 비교해주는 책이 많더라구요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7-18 22:28   좋아요 0 | URL
정말 진짜 감사합니다. 티치아노 그림은 퍼득 떠오르지 않네요. 꼭 찾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yureka01 2016-07-1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진 찍기 전엔 모네 그림을 이해 못했죠..
그런데 빛에 따라 변하는 그의 그림스타일이
놀랍더군요.

cyrus 2016-07-19 16:5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서울에 열린 인상파 그림 전시회에 가서 직접 그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책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느낌이 달랐습니다. ^^

표맥(漂麥) 2016-07-1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베르니 정원길을 보니 문득 <검은 수련>이 떠 오릅니다. 아무 것도 읽기 싫을 때 한번 읽어 보시길... 모네의 지베르니 마을이 무대입니다...^^

cyrus 2016-07-19 16:52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

프레이야 2016-07-1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었던 지베르니 수련이 핀 정원과 연못을 보고 와서 더욱 감회가 ^^
책 담아갑니다. 무더위도 즐거이 누리시길요 ^^

cyrus 2016-07-19 16:54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프레이야님. 잘 지내시죠? 프레이야님도 건강 조심하시고, 7월 마지막 여름 잘 보내세요. ^^
 
마네의 회화 파레시아 총서 1
마리본 세종 엮음, 미셸 푸코 외 지음,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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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양쪽에 하늘로 껑충 솟은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다. 길 중앙에 개를 데리고 유유히 걸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나무 뒤에선 두 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로수를 따라 눈길을 옮겨 본다.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길의 끝에서 지평선과 만나 사라진다.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선 나무가 수평선 위의 한 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로 불가능한 점이다. 이 그림을 그린 호베마는 멀고 가까운 풍경의 느낌이 잘 드러나도록 원근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기찻길을 바라볼 때나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을 볼 때면 나란한 두 선(평행선)이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화가들은 일찍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 나타난 17세기 북유럽의 전원 풍경은 조용한 시골 마을의 가로수 길과 별다르지 않다. 시선이 자꾸 소실점에 머무르면 이 길을 직접 걷고 싶은 느낌이 피어난다.

 

실제처럼 보이고 깊이감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만질 수 없는 평평한 종이일 뿐이다. 소실점과 원근법은 평면을 실제와 같이 똑같이 보이게 하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원근법은 대상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기술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인 동시에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이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시각은 주체가 되어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산, 나무 같은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신이 자연을 창조하듯 그림 속 세상을 창조한다. 신과 종교의 영역에서 탈피해 자연의 모습을 닮은 풍경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세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바라보자며 화가와 감상자가 맺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 회화의 약속을 인상주의 화가들이 과감하게 파기했다. 대상을 똑같이 모방하는 사실주의의 전통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양미술사를 논할 때 인상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 으레 ‘빛의 과학적 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변하는 물체의 색을 추구했다. 더 나아가서는 원근법에 근거한 오랜 회화의 약속을 뒤엎은 ‘평면성’의 자기반성이라는 개념의 덧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적 미술의 근간을 바꾸어놓은 혁명이었다. 이 미술 혁명의 선두주자가 에두아르 마네다. 마네는 명암법과 원근법이 사라진 평평한 평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가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비난과 모욕이 쏟아졌다. 어떤 때는 관람객이 휘두르는 채찍질로부터 그림을 보호해야 할 정도였다.

 

 

 

 

 

마네는 1866년 『피리 부는 소년』을 살롱 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소년은 완벽한 구도로 화폭 한가운데 서 있다. 자세가 안정되었고, 좌우 균형 또한 문제없어 보인다. 그런데 살롱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출품작을 기본이 부족한 그림으로 판단했다. 그 이유는 마네의 그림은 기존의 초상화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네는 배경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인물만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자 또한 생략했다. 인물만 남은 그림이 마치 사방이 하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처럼 느껴진다. 살롱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의도적인 표현을 낯설어했다.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그를 변호하기 위한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그러나 마네를 향한 자신의 호감만 잔뜩 드러냈을 뿐, 마네 회화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마네에 대한 애정을 고작 신문지에 쏟아 부은 졸라의 변호가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만일 졸라가 미셸 푸코만큼이나 그림 보는 눈이 조금만 더 예리했었더라면, 마네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생전에 졸라가 시도하지 못한 것을 푸코는 해냈다. 푸코는 튀니지에서 마네를 주제로 한 강연을 열었고, 죽기 전에 강연 내용을 정리한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푸코 최후의 저서가 될 뻔했던 원고는 파기되어 사라졌지만, 강연 녹취록과 녹음테이프가 다행히 보존되었다.

 

 

 

 

 

푸코는 마네가 그림 그리는 방식이 ‘고약하고 신랄하며 짓궂다’고 말한다.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네는 원근법 없이도 감상자의 시선을 움직이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카페-콩세르의 구석』이라는 그림을 보자. 언뜻 보면 시끌벅적한 카페 내부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 감상자의 눈을 안심하게 하는 소실점이 없다. 즉 원근법이 무시된 그림이다. 인물의 구도가 산만하다. 손님이 주문한 맥주를 든 여종업원은 전방을 바라본다. 그 옆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손님의 시선은 후방으로 향해 있다. 이들은 무엇을 향해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일까. 마네는 감상자가 절대로 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숨겼다.

 

 

 

 

 

『카페-콩세르의 구석』보다 먼저 그려진 『화실에서의 점심식사』라는 그림도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 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 네 명의 시선은 서로 어긋나 있으며 각자 생각에 빠져 있다. 식사 분위기가 썩 즐겁지 않아 보인다. 감상자는 탁자에 기대어 앉아 정면에서 얼굴을 살짝 돌리면서 주시하는 남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 저 남자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마네는 감상자가 궁금한 광경을 잘라내 버렸다. 그다음에 광경의 조각을 태연하게 감추었다. 감상자의 시선을 그림 속 장면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감상자는 그림 속 인물이 향하는 시선을 쭉 따라가면서 그림에 드러나지 못한 비가시적인 대상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마네는 의도적인 연출을 통해 감상자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한다. 반면 화가의 유희에 속아 넘어간 감상자는 화가가 감춘 것을 보려고 캔버스 주변이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다. 철학 박사 다비드 마리는 푸코가 마네의 그림에서 감상자의 자유를 발견하여 감상자에게 되돌려 주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마네는 감상자의 눈과 정서를 고정하는 원근법을 거부함으로써 감상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운동성을 부여했다. 그 대신 마네는 감상자가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그림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카롤 탈롱-위공은 감상자에게 그림의 해석을 요구하는 과거의 전략을 폐기한 마네가 ‘회화의 침묵’을 원한다고 말했다.

 

푸코는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은 미술사 지식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하길 잘했다. 사실 비가시적인 광경을 잘라내는 표현 방식은 마네를 비롯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이들은 일본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의 평면성에 영감을 얻어 사물을 보는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푸코의 평가는 이미 미술 연구가들이 분석한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마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회화를 심도 있게 공부한 독자라면 푸코의 강연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말과 사물》에서 보여준 박학다식한 논의가 펼쳐지는 푸코의 분석을 원했던 독자라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원고가 없는 강연 녹취록의 한계다. 푸코는 독자가 더 알고 싶은 내용 모두 삭제해버렸다. 그 점이 무척 아쉽지만, 독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텍스트(혹은 그 속에 있는 마네의 그림)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푸코 스스로 ‘침묵’을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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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0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21 15:23   좋아요 1 | URL
예전에 님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세테를 지적한 글을 썼던 날 기억합니다. 에밀 졸라, 보들레르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동시대 화가들의 재능을 눈여겨보면서 항상 그들의 편에 서서 전통과 맞서 싸웠으니까요.

페크pek0501 2016-04-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근법이 느껴지는 풍경이 좋던데요.
역시 예술가는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걸 싫어하는군요...

cyrus 2016-04-23 11:30   좋아요 0 | URL
원근법이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켜줍니다. 그래서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과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크게 놀랐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