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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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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미국에 불기 시작한 '정부재창조' 바람 

 

 

 

 

 

 

미국 연방정부의 구조는 19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환경의 변화로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주된 초점으로 정부 운용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신보수주의의 물결로 인해, 미국 연방정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 기능의 민영화, 정부지출 삭감, 지방정부 간 관계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클린턴-고어 행정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클린턴-고어 행정부는 출범 초기인 1993년 범정부적인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NPR : National Performance Review)을 마련, 관리통제 위주의 업무 직위를 줄이고 능률향상을 통한 ‘일 잘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Works better and Costs less)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앨 고어의 MPR은1998년 두남이라는 출판사에서 '기업형 정부 재창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간되었다) 이를 위해 1993년 NPR 보고서를 통해 5년간 연방공무원 25만개 직위를 폐지를 권고했다. 이후 대대적인 인원감축에 들어가 공무원의 수를 클린턴 행정부 출범 초기의 218만 8천 647명에서 집권 말기인 2000년 12월에는 176만 1천 376명으로 42만 7천여명, 19%를 줄였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는 백악관 조직도 대대적으로 감축을 시도했다. 과거 30년간 600여명으로 유지돼오던 백악관 인력을 25% 감축, 500명 선으로 줄였다.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이러한 개혁프로그램을 주도하기 위해 신설한 정부혁신사업단을 직접 이끌면서 정부실적 및 결과에 관한 법과 정보기술개혁법 등을 제정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앨 고어가 주도한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의 중요한 의의는 인사행정 개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규제 완화, 민영화를 통한 정부 부문의 독점성을 파괴함으로써 시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 공급자의 역할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1992년에 집필한 오스본과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기업가적 정신이 공공 부문을 어떻게 전환시키는가>는 고어의 NPR 실행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오스본과 게블러는 정부를 기존의 행정 관료제적 접근이 아닌 기업가적 접근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업가적 정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중점적으로 축약할 수 있다. ① 정부는 과거처럼 노를 젓기보다는 방향을 잡아 주어야(Steering) 한다. ② 정부의 활동으로서 서비스의 독점보다는 서비스 제공에 경쟁 개념을 도입한다. 시장 지향적 정부로 변모해야 한다. ③ 고객(국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낭비를 줄이고 고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오스본과 게블러가 주창한 ‘정부재창조론’은 이듬해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기업가 정신을 통한 정부혁신을 주도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적 정부가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오스본 &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그리고 앨 고어의 정부혁신은 경영에서 볼 수 있는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비슷하다. 다운사이징은 조직을 야위게 만드는 경영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슬림화를 통해 능률의 증진을 추구한다. 기업체의 관료화에 따른 불필요한 낭비조직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구를 단순화하여 의사소통을 원활화하여 신속한 의사결정을 도모할 수 있다. 오스본 & 게블러가 주장한 새로운 정부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은 정책을 담당하며 제도를 움직이는 정부의 역할은 무조건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더 많은 공공 서비스 권한을 이양하는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시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으며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공공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촉진한다. 이는 곧 참여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행정학 전공에서 배우고 있는 정부재창조론의 장점이다. 공무원 시험 문제에도 출제될 정도로 정부재창조론은 지금까지도 행정 이론의 발달에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정부재창조론 도입에 비롯되는 장점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7년에 행정학 전공 기초 강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정부재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을 줄이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책을 읽게 될 줄이야. 그 책은 바로 매튜 A.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가 함께 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두 정치학자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 때문에 ‘다운사이징’되었다고 비판한다. 기업가적 정부의 역할이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오스본의 주장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시민의 정치 역할이 축소되는 개인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시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통치행위를 할 때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자의 임기를 매우 짧게 하고, 추첨의 방법으로 선발과 교체를 빈번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통치자의 전횡 기회를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통치자의 책임은 사회계약론으로 설명되었다.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신뢰가 깨지면 시민은 저항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시민 간 계약의 실증적 기초도 없고, 통치자에 대한 시민의 선출권이 전제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소극적 권리 이상일 수 없었다.

 

 

또 다른 접근은 국가권력을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에 의해 실현된 삼권 분립이 대표적이다. 이 제도가 분할된 국가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민의 통제권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회와 행정부는 서로의 권력을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두 권력 기구의 갈등 사이에서 사법부의 힘 역시 커졌다. 이러한 권력 확대의 과정에서 정부 권력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의 범위가 다시 축소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민주주의가 축소된 결정적인 계기가 클린턴 행정부 때 실행된 앨 고어의 NPR이다. 저자 크렌슨과 긴스버그는 정부 혹은 정치 엘리트들은 더 이상 능동적이고 대중적인 시민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권력을 유지,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한다.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 대중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대중의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된 민주주의다.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非) 엘리트, 즉 시민의 정치 참여를 종용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민주주의로 변했다. 종래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통해 공론의 장을 형성하던 대중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사익(私益)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변화는 민주주의를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익을 위한 참여 범위로 제한을 두는 꼴이 되었다. 정부는 고객이라는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 선택의 기회를 하나의 유인으로 제공한다. 고객은 자신의 공공 서비스 선택 및 참여가 정치적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민의 도움 없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정치 엘리트의 새로운 기술을 그동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중의 능동적 정치 참여를 수용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축소된 것이다. 사실 기업가적 정부 모형을 기반을 둔 정부재창조론은 정부의 목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부의 목적만 격하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치 참여 목적 또한 점점 격화되고 있다.

 

 

 

 시민의 참여가 제한된 정부 혁신은 반쪽짜리 성공

 

책은 주기적 선거만으로 정부에 대한 시민의 통제권으로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기인한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없다. 공익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대중민주주의의 해체에서 비롯된 개인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여주는 심각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주의는 잘못된 통치의 책임을 일상적으로 추궁하고 실질적으로 더 나은 정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는 ‘지루한 성공’만을 허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매 정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정부 혁신이 관료제적 정부를 변화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 몰라도 시민의 정치적 행사를 축소하고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의 힘을 도외시한다면 지루한 성공이 아니라 반은 실패한 반쪽짜리 성공이다. 오늘 당장은 잘못된 통치를 비판하고 저항해야 하겠지만, 결국엔 힘을 조직하고 대안을 형성하는 시민의 결속력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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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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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의 세계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세계화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국가 간 교류가 증대하여 개인과 사회집단이 갈수록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국제화가 국민국가 간의 교류가 양적으로 증대되는 현상을 말한다면, 세계화는 양적 교류의 확대를 넘어서 현대 사회생활이 새롭게 재구성됨으로써 세계사회가 독자적인 차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오래된 미래』『행복의 경제학』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세계화의 역사를 3단계로 보고 있다. 초기 단계는 제국주의적 식민지화 시기에서 시작해서 두 번째 단계는 식민지 독립 이후 서구화된 신흥 국가의 등장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세계화는 경제, 정치, 문화 세 수준에서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호연관을 이루면서 진행됐다. 경제적 수준에서 세계화는 교역·투자·통신 등이 확대되어 국가 간 상호의존이 증대하고 지구적으로 다자간의 협의·조정·협력 등이 강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화를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최근 더욱 두드러졌는데, 세계무역의 완전자유화를 주장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초국적 기업의 활동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기서 전후 세계화를 주도한 주체로서 초국적 기업의 활동은 생산부문을 지구적으로 재배치하는 신국제분업을 통해 기존 국경의 의미를 축소시켜 왔다.

 

근대 경제학에서 전제해온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이다. 국제시장에서 한 국가의 국부(國富)를 평가할 때도 경제성장률과 GDP는 핵심도구로 사용됐다. 통상적인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행복 계산법은 단순하다. 소득이 높고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그 사람은 많은 이익을 얻고 더 행복해진다는 논리다. 소득이 높으면 직장과 사회에서 더 나은 지위와 위치를 차지할 기회가 많아져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아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경제활동의 범위를 지역에서 세계로 확장시켰다. 자립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초국가적인 거대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도시 빈민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강대국들은 세계화를 빌미로 자유무역협정(FTA)을 강요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다.

 

세계화가 가져온 또 다른 폐해는 천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이다. 수입과 수출,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오염물질과 쓰레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환경 파괴는 가속도가 붙는다. 오염은 기후 변화를 가져오고 생태계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파괴의 속도전을 벌이는 기업과 정부가 있다.

 

이처럼 그동안의 경제의 세계화는 행복의 개념과 이익의 개념을 맞바꾸면서 경제와 행복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지만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세계화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국제적으로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의 빠른 물결은 갈수록 심해질수록 빈부격차는 곳곳에서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한 지역화 중심의 경제학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세계화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진 양면적인 과정이다. 세계화는 전지구적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위기인 동시에 경제·문화적 삶을 향상할 새로운 기회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경쟁적으로 세계화를 외치며 정부는 개인이 당장 불행하고 힘들어도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생산성 향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를 당연하게 이해시켜 왔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성장 중심의 세계화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따라서 세계화에 대한 더욱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가 요청되며, 경제의 세계화가 낳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더욱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대응 전략 또한 모색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 외에는 다른 경제성장의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경제성장의 대안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지역화'이다.

그가 주장하는 '지역화'란 자연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경제적 논리들을 반대방향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경제활동을 인간적, 생태학적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거대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 마트에서 소비하지 말고 지역의 소규모 시장에서 지역 상인에게 물건을 소비하면 상품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배기가스 같은 오염도 줄일 수 있다. 상품 변질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농약이나 방부제 사용도 피할 수 있어 소비자는 건강한 먹을거리를 더 싸게 얻고, 지역 생산자는 이익을 지역 발전에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한 에너지를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에 정부는 개발비를 더 많이 투자하고 다양한 형태로 지원해야 한다. 즉 한정된 자원을 써버리고 없애는 경제논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로 재생산되는 소비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지역화 중심의 경제학은 '파괴의 소비'를 멈추고 지역이 주체가 되는 경제활동이다. 각각의 문화에서 다양성을 찾고 그 고유한 문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나'로 살아가는 게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행복의 경제학'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의 경제학’은 자연과 사람, 지역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며 목적을 상실한 채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지역화 활성이 우선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세계화 위기의 시대를 탈출할 수 있는 전략으로 WTO를 뛰어넘어 WEO(세계환경기구, World Environment Organization)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안한 WEO의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 환경보호를 위한 법률을 만든다.

  ◉ 환경비용을 ‘내부화’ 한다.

  ◉ 사회적 외부성을 처리한다.

  ◉ 무역 문제에서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주권 국가들이다.

  ◉ 다국적 기업이 지역에 기반을 두거나 지역화하도록 규제한다.

  ◉ 국제법을 만들어 작동시킨다.

  ◉ 갈등 해결 과정을 향상시킨다.

  ◉ 자본 흐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p 262)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지만, 일부 선진국의 WTO 체제 유지와 개별 국가 간의 이해관계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실현성이 그리 높지 않다. 호지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군대 없는 코스타리카, 국민총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부탄, 생태마을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세네갈 등을 WEO 가입 가능성 높은 국가로 꼽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힘을 모아 주도적으로 WEO를 창설한다 해도 이들 국가의 정치 지도력으로는 WTO 체제에 익숙해진 국가들을 WEO에 가입하게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이 이론적 대안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지역경제 발전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구를 보지 말고, 지역을 봐야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일변도이고 국가주도적인 발전행정의 폐해를 극복하면서 지역화를 활성하는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덜 소비하고 덜 파괴하는 방법으로 바꿔야 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교육이 지속해야 한다. 즉, 생산과 소비의 균형, 지방과 도시의 균형, 사람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지역 중심의 경제활동으로 하나라는 연결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행복한 경제를 만들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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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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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시궁창`의 준말이다. 미국의 유명 래퍼 에미넴이 주연한 영화 <8마일>에 나온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는 대사에서 유래했다. 현시창’. 갈 곳 잃은 현대 젊은이의 좌절과 체념을 적절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꿈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꿈을 이루기는 힘들고 앞에 놓인 현실은 보잘것없다는 대조와 격차가 느껴진다.

 

우리 부모 세대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꿈의 크기마저 제한되는 삶을 살면서도 사회가 급성장하면서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많았다. 반면에 부모 세대의 자녀인 우리 청년 세대는 유례없는 풍요 속에 살지만 꿈을 이뤄가기엔 사회의 꽉 짜인 틀이 무겁게 느껴진다. 격심한 스펙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크게 나아질 것이 있는지조차 의문이 든다.

 

누구나 계급 상승을 위해 악착같이 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특히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 청년 세대들은 고액의 대학등록금, 좁은 취업의 문으로 인해 낭만적인 대학 생활 대신 아르바이트에, 외국어와 공모전 같은 스펙 쌓기로 내몰린다. 그것도 모자라 사회생활을 학자금 대출의 빚더미에서 시작하고, 취업준비생으로 몇 년을 보내기 일쑤다. 취업을 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출판가에는 청춘 마케팅이 대세다. 청춘의 절반은 월 평균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이며 고용불안과 조기 퇴직 등 앞 세대가 겪었던 불행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 불행이 능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88만원 세대를 한 번 더 절망케 한다. 청춘 마케팅의 핵심은 위로 마케팅이다. 위로는 '희망 없음'이라는 88만원 세대의 불치병을 달래주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성찰 없는 위로가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프니까가 청춘이다'라고 그 현란한 수사로 위로하기에는 한국의 청춘들이 너무나 지쳐있고 좌절의 심연이 너무 깊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눈물 섞인 빵 한 조각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가 발견한 스물네 편의 사연 속에 등장하는 젊은 얼굴들은 고상한 청춘의 번뇌, 고민, 방황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아픈 청춘들이다.

 

대형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던 29세의 젊은 청년이, 5m 높이의 용광로 위에서 고철을 녹이는 작업을 하던 중 1600의 용광로에 추락하여 사망하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누리꾼이 쓴 조시가 그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끝내 동상은 세워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며 열악한 3D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의 고달픈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였다.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 '그 쇳물 쓰지 마라' 중에서 (p 22~23) -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학생 4명의 자살은 '경쟁'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카이스트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이곳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이미 오랜 동안 경쟁을 해 왔다. 그렇다보니 이곳에서의 경쟁도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학생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십수 년을 경쟁만 하고 살아 온 이들에게 경쟁은 어찌보면 인생에서 필수적인 항목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기부여를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연이어 터진 심각한 사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공짜는 없다"고 말하는 카이스트 전 총장의 강경한 입장은 무섭게 느껴진다. 한 마디로 현 사회에서 경쟁은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 설사 이로 인해 누군가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전 카이스트 총장의 반응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반응이다. 카이스트 자살 사건으로 인해 한 때 경쟁중심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이슈화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친듯이 경쟁을 부채질하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와왔다.

 

『현시창』속 스물네 편의 사연은 절망적이면서도 우울하다. 노동, 돈, 경쟁의 프리즘으로  청춘의 어두운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희망적인 위로 한 마디도 없다. 저자는 위로 대신에 '현시창'을 "현실(現)을 직시(視)하고, 청년 세대에게 우울한 미래를 안겨다 주는 나쁜 사회와 싸우기 위해 창(槍)을 들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선동적인 문구만 가지고 '청춘이 절망하는 나쁜 사회'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는 절판이 된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을 꽤 인상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 문구를 기억할 것이다.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 우 교수는 『88만원 세대』절판을 선언하면서  "죽어도 바리케이트를 치지는 못하겠다는 20대만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춘이여,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며 청년 세대를 향한 일갈도 덧붙였다. 청년 세대의 얌전한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나머지 『88만원 세대』의 저자는 청년들이 짱돌을 들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판까지 언급했다. 
 
나쁜 사회에 맞설 수 있는 창과 짱돌을 들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88만원 세대가 청년 담론을 제기한 지도 5년이 지났다.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길 주변을 확인해야하듯이 청년 세대가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아갈 길을 찾으려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을 막는 '나쁜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창과 짱돌을 손에 쥐고 있어도 무슨 소용이랴. 

 

청년 세대가 착취를 당한다고 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로지 돈을 목표로 안정만 추구하는 영악한 젊은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 '나약한 세대'. 지금의 30~40대, 소위 '386 세대'가 말하는 '88만원 세대'는 이렇다. 이러한 기성세대의 지적에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청년 세대 중에서도 자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모를뿐더러 정말 자신보다 '현실이 시궁창'인 청년들의 분노에 귀담아 듣고 공감하는 이가 아직은 드물다. 그저 자신과 관련 없는 남 이야기로 치부한다.  

청년 세대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차별의 창(窓)을 부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청년 세대에 대한 역지사지, 나아가 감정이입의 노력이 중요하다. 정말 고통 받는 청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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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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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뺏기 놀이’라는 게임이 있다. 사회자가 신호를 보내면 즐겁게 춤추며 돌던 놀이의 참가자들은 개수가 하나 모자란 의자로 달려가 앉아야 한다. 의자는 하나씩 줄어들고, 결국 둘이서 하나의 의자를 차지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거기서 즐거운 춤추기는 끝난다. 어릴 적 즐거웠던 의자 뺏기 놀이가 어른이 되면서 '경쟁'으로 인식된다. 마지막 의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봐야하는 것을, 어린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부터 시작된 쌍용자동차 노조의 ‘의자 뺏기 놀이’는 끝났다. 그러나 너무나도 길었던 의자놀이에 최후의 승자는 없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 잔인한 상처만 남았을 뿐이다.

 

지난 2009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77일간의 옥쇄파업은 경찰의 강제 진압을 거쳐 노사가 해고자 일부를 무급휴직으로 돌리는 데 합의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됐다. 쌍용차 사태의 개요다. 시간이 3년 넘게 흐르면서 잊힌 기억을 되살린 건 ‘죽음 행렬’이다. 그 기간 쌍용차 관련자 중 22명이 사망했고, 그 중 12명은 자살했다. 파업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해고란 경영이 악화한 기업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을 할 때 종업원을 해고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다. 하지만 기업들이 아무 때나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에만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 있다. 정리해고하려면 사전에 근로자들에게 충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며, 해고 50일 전에 해당자에게 알리고 고용노동부에도 신고해야 한다. 노동법은 근로자들에게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보장하는 대신 사측엔 정리해고나 직장폐쇄 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정리해고에 대해 노동단체 등은 ‘해고는 일종의 살인’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 이에 대해 기업 측에선 정리해고해서라도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결국은 회사가 망해 모두가 피해를 본다고 주장한다.

 

쌍용차 문제는 근로자들의 삶의 터전이고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회사와 그 종업원, 그리고 이 회사에 투자한 주주, 채권자들의 시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쌍용차는 노사합의 사항을 이행하고, 적반하장격의 노조와해 시도를 멈춰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적극적인 치유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경영진에만 달린 게 아니다. 노사가 신뢰와 타협의 토대 위에서 힘을 합쳐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노동자들에게 내미는 일이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진행된 ‘의자놀이’를 대중과 언론은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처절한 목소리를 우리는 그냥 무심코 지나치고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쌍용차 출신’이라는 낙인이 워낙 강해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도록 이미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일자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대기업에서 추락했다는 무기력증과 사회적으로 봉쇄됐다는 생각 등이 겹치면서 해고노동자들에게 이중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현존 국가와 자본의 구조가 갖는 폭력성과 그 비인간성도 문제이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미 공감의 능력과 감수성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다. 쌍용차 사태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만 여긴다고 해서 공감이라고 할 수 없다. 감성에 매몰된 대중과 정치의 관심은 눈물 언저리만 맴도는 공감을 가장한 방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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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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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싸우는 이유는 국가가 조장하는 빈곤과 오랜 독재와 군국주의가 가져온

인간 파멸에 끝없이 희생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 p 531)

 

 

 

 

 

  제3세계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못 사는걸까?

 

내가 다니는 학교 행정학과 3학년 전공수업 중에 ‘발전행정론’이라는 과목이 있다. 이번 2학기에 개설되어 있는 과목으로 수학하고 있다. 발전행정론은 발전도상국의 국가발전을 위한 전략과, 국가발전 추진 체제로서의 행정 체제의 발전 문제를 연구하는 행정학의 한 분야이다. 발전도상국의 발전 전략을 거시적으로 다루는 과목이라 오늘날 행정학과 과목 중에 구식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에 크게 유행하다가 1970년대에 사라진 반짝 이론인 것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신청한 전공수업 중에서 제일 관심 있게 공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발전도상국들의 빈곤은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니까. 과거에 ‘제3세계’라고 불리던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선진국들에 비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사실 과목 내용 자체만 흥미로워서 공부하는 건 아니다. 발전행정론 수업이 토론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과목을 안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토론 방식은 한 주마다 교과서 한 챕터를 주제로 삼아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토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찬반 의견을 나누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준비한 의견들을 서로 교환, 비교해나가면서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몇 주 전에 했던 토론 주제는 ‘제3세계 국가의 저발전 원인과 대책’이었다.

 

25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각자 제3세계 국가의 저발전 원인에 대해서 의견을 말했는데, 다양한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학생은 기후가 열악해서 원조를 받아도 발전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일부 제3세계 국가에서는 여전히 선진국의 경제 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제3세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학생들의 토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자들 사이에서도 저발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대에 잠시 유행했던 발전행정론 역시 개발도상국으로 부상한 제3세계의 저발전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 분야이다. 발전행정론의 유행이 시들어지면 또 다른 학자들은 저발전의 원인을 분석한 이론들을 가지고 나온다. 이처럼 시대가 바뀔수록 이들 국가의 저발전 원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고 하고 있지만,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경제제도의 방향이 국가 발전을 좌우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북한)과 포용적 경제제도(남한)가 만들어 낸 빈곤과 발전의 결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공동으로 저술한 경제학자 대런 애시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우리 발전행정론 토론을 듣고 있었다면 아마도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학생들이 주장한 기후 원인론, 원조 부족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세계 저발전의 원인은 간명하다. 지구촌 빈부 격차는 지리나 문화 탓이 아니다. 정치, 경제 제도가 얼마나 포용적(inclusive)이냐, 착취(extractive)하느냐가 결정적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남북한의 차이를 비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북한이 이처럼 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은 연원은 분명하다. 남한에서는 경제적 삶을 지배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규칙인 경제제도가 국민의 저축과 투자, 혁신을 보상해준 반면,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양측 모두 중앙집권화의 역사를 통해 성장이 가능했지만, 원래 그런 권력이란 좋게도 쓰이지만 나쁘게도 쓰이는 법이다. 남한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수출과 혁신을 장려하고 공공재를 제공했지만, 북한은 탄압과 통제를 위한 권력을 휘둘렀을 뿐이다" (p 15)

 

 

남북한이 보여주는 차이에는 전 세계 부국과 빈국의 차이를 통해 일반 이론의 모든 요소를 설명할 수 있다. 저발전의 원인은 바로 '제도'에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포용적인 제도'는 발전 성공으로 이끌며 모두를 끌어안고 잘살게 만든다. 반면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가져온다.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고,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는 포용적인 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착취적인 제도에 의한 국가의 경제는 곧 패망으로 가는 길이며 저발전이라는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착쥐적인 제도에 의한 국가 실패를 지도자의 무지 탓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무조건 옳은 말은 아니다. 소수 엘리트가 수탈적 제도를 선택하는 건 경제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가 불러올 결과는 부와 소득분배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 권력도 분산시키며 다원화된 사회로 변모된다. 이렇게 되면 수탈적 체제의 지배층이 인민을 통제하기는 더 이상 어렵다. 이러한 착취적 제도에 의한 저발전 상태는 현재 북한의 김정은 체제뿐만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 구 소련, 해방 이후 제3세계 국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한 국가라고 여겨지고 있는 저발전 상태의 일부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군부, 관료 독재 체제에 의한 착취적 제도가 작동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예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진부한 이론 

 

책의 공동 저자는 경제 발전에 지리적 위치를 강조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 문화적 차이를 중시하는 막스 베버, 선진국 경제학자들이 잘 가르쳐 주기만 하면 가난한 나라도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책의 뒷표지 심지어 책 마지막 장까지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들을 할애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비난한 제레드 다이아몬드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예비 노벨경제학상이라 불리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경제학자의 주장이라고해서 기존 학계를 뒤흔들 신선한 이론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과찬이다. 사실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들은 몰이해를 넘어서 참을 수가 없이 요란스럽다. 

 

애쓰모글루의 주장은 '미시적 행위의 거시적 결과'라는 시각에서 설명한느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즉, 착취적 제도를 만들어 내는 국가의 지배자, 개인의 행위에서 저발전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이미 1960년대 미국의 경제학자 맨커 올슨(1932~1998)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얼핏 고전적 엘리트 이론을 연상케 한다. 다음 책 본문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자.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실수와 무지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뜻이다. (p 109~110) 

 

 

19세기 말에 등장한 고전적 엘리트 이론은 사회는 권력을 가진 소수 엘리트와 가지지 못한 일반대중으로 구별되며, 소수의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지도자(엘리트)가 다수의 일반대중을 지배한다고 본다. 소수 엘리트 체제는 자율적이고 다른 계층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사회전체나 일반대중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정책을 결정한다. 대표적인 고전적 엘리트 이론은 파레토의 법칙(20대 80 법칙)과 미헬스의 과두제 철칙 등이 있다. 그 중에 과두제 철칙은 애스모글루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는 민주적, 다원주의적 체제와 구분된다. 이렇듯 애스모글루는 고전적 엘리트 이론을 경제 체제와 접목해서 저발전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포용적인, 너무나 포용적인' 제도의 결과는 시장실패

 

저발전 원인을 딱 한 가지 관점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저발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일부 국가의 저발전 현상은 학자들의 명철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애스모글루는 저발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국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제시했으나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허점이 몇 가지 있다.

 

사유재산이 보장된다는 것은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한다. 결국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제도와 비슷하다. 다만 포용적 제도와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와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그로 인한 국가 내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포용적'과 거리가 먼 문제점을 낳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기업들은 자본을 독점화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 역시 '포용적 제도'의 취지랑 다르다.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고, 소득 분배가 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실패'로 이어지며 저발전의 원인이 된다 .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정부 시절의 경제발전을 '포용적 제도'의 사례로 보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제3세계 국가에서는 경제사회의 원초적 자본축적의 결핍을 원인으로 경제발전을 주도하게 되고, 국가주도 산업화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출현을 조장하기 쉽다. 정치발전(민주주의)와 경제발전(자본주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지만 양자의 과제가 동시에 진행, 달성된다는 건 쉽지 않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산업화의 효율적인 추진과 발전위기의 극복을 명분으로 대부분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구사하며, 특히 민중부문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세워 노동자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배제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치제도는 민주적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하여 민중저항을 유발하고, 이 와중에 경제적 측면의 효율성과 효과성마저 감퇴되면 저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은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수적 사례인 셈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애스모글루는 한국 박정희 정부의 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하는 게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사례처럼 착취적 정치제도에도 불구하고 경제제도가 포용적 성향을 띤 덕분에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경제제도가 더 착취적으로 바뀌어 성장이 멈춰 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p 144)

 

 

 

부록을 제외한 본문만 해도 6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에 한국의 사례가 소개되었다고 해서 그리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다.한국에 대한 평가는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드러날 뿐이니까.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경제는 포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권력 실세와 엘리트 관료의 부패는 아직 착취적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 점점 부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실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진정한 창조적 파괴를 물론, 고성장에 의한 국가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성공적으로 고성장한 한국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실패한 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치와 경제 체제의 포용성을 높이기 위한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창의와 혁신을 북돋울 포용적인 제도의 정착이 중요하지만, 냉혈한과 경쟁만이 남아 있는 이 척박한 한국 사회 지도에 '포용'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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