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 일주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4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001-148] 80일간의 세계일주

 

 

 

 


 오늘날의 세계 일주 여행

16살의 나이로 최연소 단독 세계 항해일주에 도전했던 미국의 애비 선덜랜드라는 소녀가
도전 5개월 만에 실종되었다. 원인은 거친 파도에 의해서 배가 좌초되었던 것.
다행히도 이틀 뒤에 다른 선박에 구출되었다. 일부 항해 전문가들은 자식의 무모한 도전을  

방치한 부모의 행동이 무책임하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에  

나섰다. 몇 살부터 모험에 나설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소녀의 부모들은 자식의  

모험심을 막는 부모의 과잉보호가 더 문제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식을 옹호하였다.
통신과 장거리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요즘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하는 세계 일주를  

많이 하고 있다. 배뿐만 아니라 자전거, 자동차 등 본인들이 직접 작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세계 일주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세계 여러 나라를  

이동하는 것만 아니다.  

 

세계 일주에도 테마가 있다. 지구 환경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있으며 세계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도 여행자들에게 위험한  

분쟁 지역의 국가들까지도 세계 일주의 여정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어린  

소녀처럼 기네스 북 기록이라는 세계 최고의 기록자가 되기 위해서 세계 일주를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자신 인생의 큰 목표로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어린 시절부터 부자가 되면 그 돈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 사업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얻게 된 카네기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마리 준마가 끄는 호화 마차로 세계 일주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강철왕, 세계 최고의 부호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전 세계에서 각인시켜주었다.
이렇듯 자기 PR의 목적을 가진 세계 일주도 있다. 세계 일주는 단순히 모험심 강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다. 모험심 이외에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 일주를 해야만 하는 자기만의 특정한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동시에 전 세계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자기 PR 효과가  

불러오게 된다.  

 

 

 

 과거의 세계 일주 여행 : 오리엔탈리즘의 기원  

하지만 예전의 세계 일주는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15~17세기에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
탐험가들의 등장으로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항해 시대부터 인간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근대의 시대로 오게 되면서 나날이 증가하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비(非) 서구지역에 대한 정치지배 및 교역통상 등의 체계가 

이루어져 식민지 건설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서양에서 동양 문화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고 동양 문화를 반영한 풍습과 문화가 유행하였다. 서양 화풍에 일본의 양식인  

우키요에가 유행하여 반 고흐나 드가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폴 고갱은  

당시 서구에게는 미개인의 나라였던 타히티에 직접 가서 그 곳에 정착하게 된다.  

영국의 라카프디오 헌은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의 민담 문학을 서구에 소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나중에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동양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를 가지게 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형성된다.  

단지 서구의 문화적 유행이 오리엔탈리즘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를 비추어보면 서양인들은 동양 문화에 대한 동경 뒤에는  

자신보다 아래인 동양 국가를 지배하고 싶은 이중적인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만약 유럽에서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행하지 않고, 아예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을 모르고  

있었다면 일본 내의 서양인 진출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근대적 국가로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메이지 유신도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쥘 베른의 등장 : 경이적 여행의 탄생 
 

세계에 대한 서양의 동경은 단순히 동양 문화의 유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의 발달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19세기 후반에 과학이 크게  

발달함에 따라, 자연과학의 지식을 이용한 소설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문학적 유행의  

대표주자는 프랑스의 근대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인 쥘 베른이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고작 그가 가본 나라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그러나 여행 경험으로 많은 여행가와 지리학자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얻은 지식에다가 풍부한 상상력을 더하여 일종의 과학모험 소설을 발표한다.  

작품 속에 나오는 여행들은 당시 독자들에겐 경이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였다.  

바다 밑을 여행하는 <해저 2만리>, 달나라를 여행하는 <달세계 일주>, 지구의 내부를  

여행하는 <지저 여행>, 그리고 세계 일주라는 현실적으로 가능할 법한 경이적 여행 형식을 

낳게 한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나머지 소개한  

작품들보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영화로도 리메이크하기도 하였다.
소설 장르가 모험과 과학이 결합된 소설이다 보니 아동용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아동용 모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단순히 아동용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아동용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어린이들은 단순히  

모험 이야기에 혹해서 이 작품을 읽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나도 초등학생 때 집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아동문학전집의 한 권으로써 쥘 베른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다. 그 때의 작품도 <80일간의 세계 일주>였다. 2만 파운드의 내기가 걸린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그의 하인인 프랑스 인 파스파르투와 그 밖의 주변 인물들의  

세계 일주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인도, 중국, 미국, 대서양 등 세계 각지의 인정과  

풍물들이 소개되어 있어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들은 이 작품을  

한 번 읽게 되면 빠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포그 일행과 세계 일주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지막에 갈수록 포그가 세계 일주를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2만 파운드의 

내기에서 진 장면에서는 안타까워하다가 결말에 파스파르투가 내기에 승리하였음을  

증명하게 됨으로써 어린이 독자들은 해피엔딩에 대해서 무척 기뻐하게 느낄 것이다.  

책을 덮으면 포그 일행이 세계 여러 나라를 거쳐 갔던 여행의 장면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게 된다.

그런데 오랜만에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읽어 보니, 이 작품을 아동용으로 치부하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다. 아니, 이 작품을 어린이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기 위한 단순한 아동  

모험소설로만 볼 수가 없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풍습과 성격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우다 부인은 남편이 죽게 되면 부인도 남편 따라서 죽어야 하는 인도의 풍습에 따르게  

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풍습의 진행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포그 일행들은  

인도의 잔인한 풍습에 대해서 미개하다고 비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영국 정부는 왜 이런 잘못된 풍습을 막지 못하고 있냐고 한술 더 뜬다. 분명히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습은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풍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의 풍습에는 문화적, 역사적 근원이 있기  

마련이다. 인도 사회를 지배하는 힌두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서로 때래야 땔 수 없는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다른 나라의 풍습을 미개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시각이다. 그리고  

그런 식민지 국가의 미개한 풍습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 국가가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던 통치 체제의 특징이다. 

작가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국의 문화 통치는 독립을 바라는 있었던 인도의 힘을 무마시키기 위한
일종의 회유책이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종교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관습까지도  

  존중하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격히 처벌하는 현명한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 『80일간의 세계 일주』p 77 -

등장인물들의 타 민족 문화에 대한 무지함은 파스파르투의 행동에 대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인도의 일부 사원에는 기독교인이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과 사원에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는 풍습이 있다. 하지만 파스파르투는  

그 점을 인지하지 못한 채 멋도 모르고 금단의 구역인 힌두 교 사원 안으로 들어간다.
힌두 교 사원 안의 승려들은 이방인의 출입을 목격하게 되면 당연히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세 명의 승려들은 파스파르투를 구타하지만 오히려 파스파르투는 승려들을 때려 눕히면서 

간신히 사원 밖으로 빠져나온다. 파스파르투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나이다.
만약에 도망치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금단을 어긴 죄로 그들만의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나라에 오게 되면
그 나라의 풍습을 인정하고 지켜야하는 법이다.

작품 속에 미국을 여행하는 장면에서도 독자들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기 위한 열차를 타고 있었던 포그 일행은 수 족 인디언의 습격으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어린 독자들은 이 장면을 읽게 되면 인디언에 대한  

고정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오류의 소지가 생길 수가 있다. 인디언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죽여야 하는  

그들의 슬픈 역사를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미국의 땅은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박해받았던 영국의  

청교도 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백인들은 이 거대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전에 생활하고 있었던 인디언들과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자기 땅을 뺏으려고 하는 백인들을 내쫓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터전인 땅과 자연을 지켜내기 위하여 이들이 타고 다니는 열차를
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인디언과 백인 간의 피 튀기는 살육의 역사는  

곧 미국이라는 제국이 탄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백인들이 승리하게  

되면서 그 승리의 대가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수많은 인디언 족들은 몰살당하게  

되었으며 생존한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까지도 인디언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어서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복지와  

과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숨어있는 주인공, 파스파르투

최근에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필리어스 포그이다. 그는 영국 사람이다. 반면에 그의 하인은 프랑스  

사람이다. 그런데 작가 쥘 베른은 프랑스 사람인데 왜 작품 속 주인공인 신사를  

영국 사람으로 그려 넣은 것일까? 그리고 왜 영국 신사의 하인은 자신의 나라  

사람이였을까? 영국의 부유한 신사의 하인이 프랑스 사람이라.....
당시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프랑스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민족적 수치감을 가졌을 법도 한데 말이다. 아동문학전집의 해설과 최근에 읽은  

쥘 베른 컬렉션  시리즈의 해설에는 내가 궁금했던 내용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쥘 베른의 고국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서 수치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며  

이에 대한 커다란 물의도 빚지 않았을 것이다. 뜻밖에도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작가의 숨겨진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작품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독자들의 눈에 띄게 활약을 했던 인물은 단연코  

파스파르투이다. 인도에서 화형당할 위기에 처한 아우다 부인을 구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수 족 인디언들이 열차를 습격했을 때 과거에 직업이었던  

광대 생활에서 생긴 유연성과 민첩성으로 기차 아래 사이에 매달려서 기관차와  

객차를 분리시켜 인디언들의 추격을 따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포그가 80일 안으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음을 증명을 하게 되어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던 포그를 기사회생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결국 파스파르투는 세계 일주의 성공의 숨은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그와 파스파르투의 성격을 비교하면 독자들은 당연히 파스파르투에 정감이  

가게 된다. 아우다 부인을 구한 공로를 주인인 포그에게 돌리기도 하며 포그를  

현상수배범인 줄 알고 일행을 따라다니던 픽스 형사를 포그를 미행하기 위한  

스파이라고 생각을 하여 주인을 지키려는 노력을 한다. 파스파르투는 주인을 위한  

충성심이 강하며 인간적이다. 반면에 포그는 기계 인간이라고 칭해도 어색하지가  

않은 원칙주의자다. 시간의 지배자 류비셰프처럼 자신이 정한 시간대로 일과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세계 일주하는 장면에서는 파스파르투가 중요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칭찬의 말을 표현하지 않는 괴팍한 독신 신사의 성격을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파스파르투가 세계 일주 성공을 증명하는 이야기를 해도 처음에는  

믿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조건 자신의 말이 옳다고 우긴다.  

그러다가 주인이 답답했던 모양인지 파스파르투는 주인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말을  

증명시키려고 한다. 마지막 이 장면은 원칙주의자의 고리타분한 획일적인 사고(思考)를  

은근히 희화화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 파스파르투는 남의 나라의 신사의 하인이지만
그가 주인공인 필리어스 보그보다 독자들의 눈에 띌 수 있는 활약을 하도록 함으로써 
위험한 행동을 직접 나서는 용기가 가득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미가 넘치는 대인배적 인물로 만들게 하였다. 이 프랑스 인이야말로 작품 속에  

숨어있는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프랑스 독자들은 자신의 나라 사람이  

영국인을 수발해야하는 하인이었지만 그의 훌륭한 활약상 때문에 이에 대한 수치감은  

느끼지 않았고 작가의 인물 설정에 불만의 목소리도 없었던 것이다. 
 

 

 

 위험한 독서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  
 

쥘 베른의 대표작에 대해서 평을 정리하자면, 이 작품이 아동 독자들을 위한 포맷이  

설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동용 소설이라고 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작 쥘 베른은 이 작품을 단지 어린이들을 위해서 쓴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근대  

사회의 서양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모험심을 자극하기  

위한 통속소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양을 포함한 다른 세계에  

대한 편협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도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험소설의 고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그의 문학적 공로는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올바르게 읽게 하기 위해서는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들의 독서 교육이 중요하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은 먼저
아이들을 위한 책들을 읽어보고,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이 이 책을 읽게 만들어야할지
고려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눈을 사로잡게 하는 추천도서나 어린이들의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자신들도 읽어보지 못했던 책들을 무작정 읽으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린이들이
독서라는 활동을 꺼리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아동용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뭣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이 작품을  

읽으라고 권하게 되면 아이들은 평생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된다. 결국에는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독서가 되고 만다. 아이들이 읽기 전에  

부모들은 작품을 먼저 읽어보고, 아이들이 작품을 다 읽으면 아이들과 함께 독서  

토론을 해본다. 그리고 아이들의 의견 중에서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부모가 고쳐주고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사고력을 가지게 된다. 부모의 올바른 교육이 어린이들은  

평생 독서 습관이 몸에 배어 자라게 되면서 올바른 인격과 의식 함양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한때 실종 ‘16세 소녀의 세계 항해일주’… 책임소재 논란] 뉴시스 6월 15일 입력 

http://news.donga.com/3/all/20100615/291124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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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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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요 Mr. Pamuk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이 <눈>을 발표한 지 7년 만에  

신작이 나왔다. 더군다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로 소설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유명세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최근에 나온 <순수박물관>이 처음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오르한 파묵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내 이름은 빨강>을 읽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 당시  

워낙 유명했던지라 동네 공공 도서관에 대출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빌려가곤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예약자가 많아서 예약 기회도 없었다. 꼭 읽어야겠지  

하고 벼르다가 이 책을 알게 된 지 두 달 만에 드디어 그의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두 달이라는 인고(忍苦)의 시간동안 느꼈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첫 페이지를 넘길수록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를
알리게 한 이 책의 독특한 역순행적 구성과 16세기 말의 터키를 배경으로 한 이국적인  

색채의 문장에 기대감만큼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의 장르가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 읽었건만 추리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몰입과 긴박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야, 이게 추리소설이라고? 그냥 터키에서 유명한 추리작가의 작품이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1권의 절반도 채 읽지 못한 채 다음 날 도서관에 반납을 하였다.
성숙하지 못했던 나의 풋내기 독서력이 훌륭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2년 뒤, 터키에서 유명한 추리작가는 세계적인 문학상의 No.1인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오르한 파묵을 저평가했던 과거의  

망상이 떠오르는 동시에 나의 유치했던 독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노벨상 수상 이후로 대형 서점에는 그의 책들이 진열되어있는 코너가 마련되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추리작가가  

아니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은 추리적 요소가 가미된 장편소설이었던  

것이다. 또 한 번 나의 무지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Mr. Pamuk. 당신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그리고 작가 앞에서는 염치없겠지만 노벨상 수상 이후의 작품이라는 광고에 혹하여
<순수박물관>을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망설임없이 직접 2권을 공공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여 두 권 모두 완독을 하였다. 
 

 

 그녀를 찾습니다

이번 작품은 2권이며 합친 분량만 따지면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 그리고 파묵은  

작가 생활을 하면서 펴낸 전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내어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간략하다.  

케말이라는 남자가 미모가 출중한 퓌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는 돌연  

말없이 사라지게 되어버린다.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어버린 퓌순을 찾기 위해  

케말은 그녀를 찾기 위해 방황의 시간 속을 헤매다가 결국 퓌순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퓌순은 이미 결혼한 사이였다. 케말은 포기하지 않고 구애 끝에 퓌순과  

재결합하게 되지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인생의 절반을 퓌순에게  

사로잡혔던 시간동안에 간절한 그리움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녀가 사용한  

물건들을 멜하메트 아파트에 모아둔다. 퓌순과의 사랑에 대한 추억이 담긴 수집품들은  

결국 책 제목처럼 ‘순수박물관’을 세우게  되면서 30여년에 걸친 그의 사랑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사랑에 빠져버린 우리들의 모습 
 

제목과 내용만 봐도 사랑에 관련된 한 남자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인거 같은데.....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케말과 같은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화성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그 사람이 주었거나 혹은 관련된 물건을 

버리기 마련이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추억을 지워버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케말은 

정 반대이다. 퓌순은 케말이 약혼녀 시벨과 결혼하게 된 시점부터 돌연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케말은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불문하고 단지 퓌순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녀의 

갑작스런 이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 대한 결핍과 부재가 낳은 케말의 고독감은  

그녀의 손길을 스쳐간 물건들을 멜하메트 아파트 방에 가득 채워 넣는다.  

멜하메트 아파트는 케말과 퓌순만을 위한 사랑의 공간이며 유토피아(Utopia)이다. 

하지만 그의 ‘화성인’다운 행동에 대해서 이상하게 본다거나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지 마시라. 케말의 행동은 결국 사랑에 빠져버린 우리들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연인이 되면 꼭 하는 일이 있다.
그들만의 사랑의 징표라고 알릴 수 있는 커플링을 끼고 다니거나,
만난 지 22일이 된 날을 ‘투투데이’, 100일이 되면 그 날에 기념을 하고 선물을  

주고 받는다. 커플들의 이런 행동들은 자신들 간 사랑을 더욱 더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며 서로 간의 사랑의 유대감을 강하게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없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공간에 그녀의  

물건들을 수집하면서 케말은 퓌순과의 사랑을 자신의 인생에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념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다. 그녀의 부재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수집 행동이 오랜 시간동안 그녀를 찾아다니는
끝에 재결합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만남은 곧 헤어짐의 시작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에도 이별이 있는 법이다. 케말에게는 시벨이라는 약혼녀가 존재하고 있어서  

사실 처음부터 퓌순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한 번의 이별을 겪고  

다시 한 번 퓌순과 재결합하게 되지만 교통사로로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운명조차도 이들의 행복한 사랑을 오래가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케말의 퓌순에 대한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한 번 사랑에 빠지게 되면 오래갈  

것이라고 행복감에 도취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생각이다. 

더욱이 그런 행복감에 지나치게 빠지다보면 이별 후의 후유증이 오래 남게 된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이성과 헤어지게 되면 아직까지도 상대방을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후유증의 영향은 이별 이후에도 그녀가 준 물건들에 대해 더욱 더 애착이  

가게 된다. 그녀에 대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면서 이별을 선택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기도 하며 심지어 다시 재결합하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에게 애걸복걸  

매달리기도 한다. 어쩌면 케말도 퓌순을 사랑했던 기간 동안 지나치게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퓌순이 사라진 뒤에도 그녀의 물건을 수집하는 행동은
이별 뒤에 찾아오는 사랑의 후유증을 보여주고 있다. 
 

 

 순결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케말과 퓌순의 사랑이 유토피아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작품 속 삼각 갈등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이 ‘순결’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갈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는 시벨과 퓌순이다.  

하지만 이들의 가치관은 다르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은 서구 문화가 들어오고 있는  

70년대 터키의 여성상을 말해주고 있다. 시벨은 전통적인 여자이다.  

그녀는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케말의 이중적인 사랑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
반면에 퓌순은 예전에 미스코리아 대화에 나가본 경험이 있는 서구적인 여성이다.
케말이 약혼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여
멜하메트 아파트에서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사랑에 대해서는 개방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케말은 여성이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켜야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퓌순과의 사랑은 순결만 따져서는 안 되는 특별한 사랑으로 치부한다.
케말은 시벨과의 말다툼에서 자신의 사랑 관념을 드러나고 있다.

 "순결이 아직도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그렇게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척하는 거야?
  최소한 좀 솔직해졌으면 해.” 
 “모두들 이 문제에 대해선 정직해..... 너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는 게  

  너의 문제야.
  어쩌면 너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유럽적이고 현대적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는 이 나라에서  

  그리고 한 여자에게는 중요해.” 
                                                                                             - 2권 p 234 -

남성들 입장에서는 순결은 참으로 모호하고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워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남성들끼리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기도 한다. 케말처럼 남성들도  

순결 앞에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과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과 사귀기 전에 과거의 남자를 사귀었던 경험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괜히 민감해진다. 그리고 자신과 사귀고 있는 여성이 ‘순결 여(女)’임을 바라는 

남성도 있다. 여성이 과거에 남성과 사귄 경험이 많다고 하면 우리들은 그녀를 안 좋게    

바라보곤 한다. 남성의 심리는 여성은 순결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남성들은 자신들에 대한 순결은 생각해보지 않는다. 남성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어발식 연애를 즐기는 남성도 있으며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여자 친구 몰래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남성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여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행동에 대해서 동족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자랑하고 다닌다. 무엇보다도 남성들 사이에서는 숫총각을 ‘천연기념물’이라고
비유하여 은근히 성적 비하를 하기도 한다.
결국 남성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점은 남성 지배적인 사고가 자리 잡혀 있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에게 순결을 지킬 것임을 강조하는 사랑 방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인 사랑이며 잘못된 것이다. 
 

 

 남성들이여, 케말을 본받자

개방적인 서구식 문화가 유입되면서 남녀 간의 사랑 관념도 변하고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여성들의 가치관은 천차만별이다. 한 번 사랑한 남자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끝까지 정절을 지키는 춘향이식 사랑은 옛 말이다. 2년이라는 세월동안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하고 오면 군 입대 전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했던 곰신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도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며  

원 나잇 스탠드도 이성 관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다양해진 만큼 타인의 눈으로 이들의 행동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예민한 성격을 가지다보니 이성의 부재 시 느끼는 고독감을  

더욱 느낄 수밖에 없다. 2년이라는 기간. 누구에게는 짧은 기간이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긴 시간일 수가 있다. 군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가가 정신적으로 힘들다보니 다른  

이성과 눈 맞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자유연애를 즐기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만족함을 

느낀다면야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또 젊음은 질풍노도라는 말이  

있듯이 한창 혈기왕성할 시기에 이성에 대해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의 본능이며 젊을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지만 많은 사랑의 경험은 하되 올바른 방식의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연애를 일회용 컵을 사용하고 버리듯이 한 달에  

수십 번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랑을 하지 말자. 짧아도 100일이라도 좋다.   

왠만하면 오랜 기간동안 연애를 하자. 자신의 잣대를 벗어나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 더 너그러이 이해하고, 케말처럼 ‘너 없으면 못 살 거 같다’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뜨겁게 사랑을 표현해보자. 그러면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케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집착적으로 모으지 말자.  

다만 상대방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을 해서 준 물건들은 무시하지 말자. 세월이 흘러  

그 사람과 헤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면 가끔  

그 물건들을 보면서 ‘아! 나도 예전에 이런 사랑을 했었구나’하고 즐거웠던 추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있는 남성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기념일은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남성들은 기념일 외우는 것이 귀찮고 날짜 자체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여성은 

다르다. 여성은 기념일로 하여금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랑을 더욱 더 특별하게  

여기고 싶어 한다. 또 한편으로는 기념일을 계기로 이성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며  

이 사랑이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은 심리도 가지고 있다. 여자 친구와 오래 사귀고 싶다면  

여자 친구에게 애정 표현을 자주 하고 이런 기념일도 챙겨주면서 여자 친구와의 사랑을  

돈독히 하자. 그럼 언젠가는 오랜 열애의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리뷰를 끝맺음을 안도현 님의 시로 장식하겠다. 케말도 이 시에 나오는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도 케말처럼, 아니 이 시에 나오는 연탄재와 같은
사랑을 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 어떨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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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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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 이야기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변신> p 9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카프카는 첫 구절부터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을 언급하는 동시에
이 인물이 벌레로 변해있음을 알려주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벌레 그레고리에 관한 묘사는
서술자가 환상적인 사건을 지켜보고 있듯이 자세히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첫 구절의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레고리 가족들의 소동을 보게 된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한 모습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봐  

두려움에 떨게 된다.
평상시대로라면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있어야하지만,
그는 방에서 나올 자신감은 상실되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도 그레고르가 나오지 않게 되자,
결국에는 그레고르가 일하는 회사의 지배인과 그에 대한 걱정을 느낀 가족들이
그의 방으로 모인다. 그레고르는 방문을 잠그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가족들과 지배인은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잠근 문을 열쇠로 열리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자신을 걱정했던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자 태도가 돌변한다. 소름 끼치는 벌레 보듯이
가족들은 그를 피하게 되며 이 집에서 쫓아내버리려고 한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위한 자기의 희생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고,
열등감, 고통에 시달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방에서 쓸쓸히 죽고 만다. 그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평온을 되찾았다고 생각하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방어기제의 환(環)

<변신>의 상징적 의미는 현대인의 소외 현상과 삶의 부조리이다.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과 변신한 후에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변신 전에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지만, 변신 후에는 그레고르를 구박하고 소외시킨다.
비록 소설은 짧고 우화적이지만 한 인간이 벌레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레고르의 삶은 현재 우리 삶에도 그레고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작품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우리 삶이다.
물론 그레고르의 삶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는 그레고르의 경우와 다른 특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옆집에 살던 이웃이나 친구, 그리고 한 집에 살던 가족이  

겉모습이 벌레로 변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벌레로 변하여 자신의 주관적이며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들 스스로 상대방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서민으로 상징되는 세탁소의 딸인 금잔디가
부잣집 자식들만 모인다는 명문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부잣집의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금잔디를 왕따 시키며 날달걀과 밀가루를 쏟아 붓는다.
명문고 학생들은 명문고라는 사회 집단 속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자라왔다. 그런 사회 속에서 부자와 정 반대인 서민 학생이  

명문고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봐라.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 들어옴으로써
금잔디는 자연스럽게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그러나 금잔디가 세탁소의 딸로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서민으로 자라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금잔디가 명문고 왕따로 만들어버린 큰 원인은 명문고 학생들 자체에 있다. 
 

명문고 학생들 내면에 자리 잡은 ‘종족의 우상’ 이 그녀를 왕따 시킨 것이다. 
‘종족의 우상’ 은 인간 본성 속에 잠재하는 선입견이다.
서민의 이미지는 돈 없고 빈곤함이다. 부자의 이미자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금잔디=서민’ 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서민 ≠ 부자’ 라는 방어기제의 환(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고르의 소외도 ‘종족의 우상’ 의 희생양이다.
작품 속의 그레고르는 벌레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벌레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정신과 마음만은 그레고르라는 근본적인 주체성아 남아있어서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어필한다.
비록 모든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외면하였지만, 누이동생은 소설 중반부에서야
그레고르를 곤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누이동생만은 왜 다른 가족들보다 늦게 그레고르를 곤충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는가?
누이동생을 제외한 그레고리의 부모들은
벌레로 변한 아들을 보자마자 

뇌에서 벌레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퀴벌레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어 벌레를 기피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레고르 부모의 심리에도 ‘벌레=무서움 & 불쾌감’
‘벌레가 된 그레고르 ≠ 자식’ 이라는 방어기제의 환이 작용하게 된 것이다.
단지, 누이동생은 방어기제의 환이 뒤늦게 작용되어 일시적이지만  

오빠 그레고르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 사과의 의미

그레고르를 죽음을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는 것이다.
사과가 몸에 박힌 채 그래도 놔두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게 된다.
왜 하필이면 그레고르는 사과에 맞아 죽게 되었을까?
그의 비극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방에서 홀로 쓸쓸히 죽는 설정도 괜찮은데 말이다.

근본적으로 <변신>의 그레고르는 결국 작가 자신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도 그레고리처럼 실제로 누이동생 3명과 어린 시절을 자라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카프카와 누이동생들과 나이 차가 많아
누이동생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레고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소외를 느끼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문학을 좋아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좋은 직장에다가 결혼을 하는 성공적인 가장이 되기를 원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지만,
문학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글을 쓰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원하는 안정적인 삶을 사느냐.
그의 일기에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인다. 

   조상도 없이, 결혼도 안하고, 자손도 없이.
  조상에 대한, 결혼에 대한, 자손에 대한 강렬한 욕망만을 지닌 채.
  조상, 결혼, 자손.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1921년 1월 21일 일기 내용 중에서 - 
 


결국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문학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일기에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자신의 인생에 놓인 두 길 중에
어느 길에 가야할 지 꽤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메모에는 자신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를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 즉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문학가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카프카는 자신이 원하던 문학가가 되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기대감을 저버린 결과의 죄책감이 묻어난다.
카프카는 <변신>의 그레고르를 통해 죄책감에 대한 벌(罰)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분신인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사과를 맞아 죽게 한 것이다.
비록 작품 안이지만 카프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음으로써 벌을 받게 되고,
자신의 몸에 박힌 사과는
<주홍 글자>에 등장하는 헤스터가 간통죄로 A라는 글자를 달고 살듯이
아버지를 어긴 죄의 대가를 평생동안 짊어지겠다는 자조적인 반성이다. 
 

 

 

 고독한 까마귀

‘카프카’ 의 체코 어로 직역하면 ‘까마귀’ 라는 뜻이다.
그만큼 카프카라고 하면 대표작인 <변신>뿐만 아니라
고독, 불행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그는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 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프라하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심하게 내면적이며 고독과 불행을 홀로 짊어진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카프카는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그는 천성부터 극단적인 내면성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여
평생 자신의 고향 프라하에서 지낸 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방문을 잠그듯이
카프카에게는 프라하라는 곳이 타인에 의한 두려움을 기피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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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7
윌리엄 호프 호지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1001-236] 경계지의 집

 

 

 


 The House on the Borderland  

 





 

 

 

 

우리나라에 번역된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이계(異界)의 집>의 원어 제목이다.
Borderland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뜻이 ‘국경지, 두 가지 지질 또는 생각의 중간 상태, 영역’ 이라고 나와 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는 ‘경계지의 집’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실 ‘경계지’ 라는 해석이 사전적으로 정확하나,
‘경계지의 집’ 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면 독자들은  

이 책에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계’ 라는 제목으로
책 표지에 장식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기성(奇城)과 어울려진
지금의 모습이 훨씬 나아보이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나는 <죽기 전 책 1001>에서 소개된 책을 꼭 읽을 것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 책에서 소개된 <이계의 집>의 간략 내용이 흥미로워서 읽게 되었다.
소설 속의 두 남자가 외딴 마을의 바닷가에서 폐허가 된 집을 발견하고
(책 표지에 나오는 기성을 연상하게 한다)
거기서 폐허가 된 집의 전 주인인 노인의 낡은 수기가 발견된다.
노인이 자신의 집에서 생긴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겪는 것을
수기에 기록하는데, 중요한 결말이 소개되지 않았다.
결말이 더욱 더 궁금할뿐더러
처음 접한 작가의 작품, 거기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이라서 읽고 싶었다.  

 

 

 

 이 작품의 정체가 뭐야?

사실 읽기 전부터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여
리뷰를 참고하려고 했었는데, 딱 한 편이 있다.
그러나, 책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럴 만도 하겠다.
책이 출간된 연도가 1908년이며, 장르가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이다.
즉, 직역하면 ‘우주 공포 소설’ 이다.
그리고 처음 작품의 사건 발단은 좋다. 
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장광설을 펼치는 수기의 내용에 독자들은 꽤나 머리 아플 것이다.
반전을 기대하면서 인내심 가지고 읽은 독자들은 
시원치 않은 결말에 대해 당혹스러울 것이다.
아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뒷표지에는 호러 소설의 선구자 러브크래프트가 작품에 대한 칭찬을 보고,
이 작품도 러브크래프트式 호러 소설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읽었을 것이다.
결국, 표지의 광고 한 구절 때문에 독자들은 낚였다고 해야 하나.

이 책인 코스믹 호러인만큼
노인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우주이다.
광대한 우주의 현상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태양계의 행성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그리고 녹색의 구체(球體)가 등장하여 노인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노인은 자신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현상들을 수기에 기록하는데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부터 노인은 자신 집 지하에 발견된 균열을 발견하는데
균열 내부는 나락(奈落)의 세계이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균열 속으로 내려가는 장면부터는 흥미진진하다.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어두컴컴한 광대한 나락의 세계에서
돼지 인간들의 등장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다.
여기서부터 노인과 돼지 인간의 피 튀기는 혈전이 그려질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작가는 독자들의 기대를 뒤엎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락의 세계는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하다던가, 낮과 밤의 길이는 고작 1분도 안된다. 

수기는 이상한 자연 현상들을 설명하다가 중간 내용이 누락되어 끊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노인은 자신의 방에서  시간이 수만년이나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된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애완견 개는 썩어서 먼지가 되어버리고, 

방 주위에도 시간의 세월을 못이겨 회색 먼지로 뒤덮여있다. 

그래도 노인은 황당 시츄에이션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수기로 기록한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긴 ‘가넷’ 님뿐만 아니라
악령이나 악마가 등장하는 오컬트 문학 매니아들도 실망하신다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은 호러 분야 중에서 드문 ‘코스믹 호러’ 라서
책의 내용을 차지하는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의 장면 기록은 지루한 감이 있다.
분명 순차적인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내용 구성이 어긋난 것 같은 느낌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읽는 것이 수월하지가 않다.
그리고 전개부터 등장하는 돼지 인간은 가면 갈수록 출연 비중이 적어진다.
읽어나갈수록 이들의 정확한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 대한 평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뒤죽박죽 세계에 대한 뒤죽박죽 표현한 거 같은 소설이었다. 
 

 

 

 읽어야 하는가, 읽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면 듣도 보지 못한 작가의 난해한 내용의 작품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죽기 전 책 1001>에는 분명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책이 소개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들 중에는 많은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읽혀지며
읽어도 그 가치가 지금도 유효하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이들 작품의 작가는 명망이 높으며 내용의 구성과 전개는 훌륭하다.
즉, 간단히 표현하자면 ‘정상적이며 모범적인’ 책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살면서 모범적인 책들만 읽던가.
마법을 부리는 소년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부터 시작해서
노골적인 성 묘사를 차치하는 성애 소설까지
전 세계의 독자들은 다양한 소재와 구성의 작품들을 읽는다.
이런 작품들은 인물과 내용이 일상적이지 않으며 특이하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 속에도 우리가 ‘고전’ 이라고 불리는 것도 많다.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이계의 집>은
‘코스믹 호러’ 라는 장르를 처음 시도했기에 문학사적으로는 희귀하다. 
장르의 시작과 희귀성이라는 가치가 있기에
<죽기 전 책 1001>이 명단에 드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으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사실상 호러 문학의 선구자는 러브크래프트 이전에
윌리엄 호프 호지슨이 있었다.
그러기에 러브크래프트에게 찬사를 받을만하다. 
 

 

 

 나락의 세계에서 종말 이후의 우주를 보다

우리나라에는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번역된 작품은 단 두 작품뿐이다.
<이계의 집>과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유령 사냥꾼 카낙키’ 시리즈 중의 하나인
<휘파람을 부는 방>이다. 아직 그의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에 대한 번역가의 해설도 호지슨에 대해  

관심 있을 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생애와 그가 끼친 문학적 영향만 소개되어 있을뿐
정작 작품에 대한 해설은 없다.

노인이 본 초자연적인 우주 현상과 돼지 짐승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노인이 본 우주가 먼 훗날 핵무기로 인해 종말 되어버린 지구와 우주를  

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붕이 없는 집의 중앙부에서 피처럼 새빨간, 거대한 불길 기둥이 솟구쳤다.
 비틀린 작은 탐과 망루가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지만.....
 <녹색 태양>의 광선이 집을 난타했고, 새빨간 불길과 뒤섞였다.
 마치 붉은 불과 녹색 불이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보였다.....
 까마득하게 아래쪽에 지구가 보였고, 점점 거대화하는 불길에 휩싸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의 지면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상 여기저기에서
 무거운 노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불길에 휩싸인 집을  

 중심으로 지구 전체가 발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핏빛을 띤 기괴한 구름이 고공까지 올랐다. 
  

                                                                             - <이계의 집> p 183~184 - 
 

 

<녹색 태양>이 집을 파괴하는 장면은 흡사 핵무기에 투하되는 장면과 비슷하다.
태양 광선의 색깔이 다를 뿐, 핵무기가 투하되면 주위는  

온통 오렌지 빛 광선으로 뒤덮이며
반경 지점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리게 한다.
그리고 투하된 지점에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생성된다.

결말이 다다를수록 작품에는 녹색 구체가 손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살아있는 것들을 타버리게 만든다.
고양이가 녹색 광채에게 당하는 장면은
핵폭탄에서 발생하는 방사능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고양이가 길고 날카로운 절규를 내질렀다.....
 무엇인가 형광을 발하는 어렴풋한 것이 고양이를 에워싸고 있었고,
 내가 보는 사이에도 점점 더 커지더니, 곧 빛을 발하는 투명한 손으로 변했다.
 녹색 광채가 그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내 눈앞에서 고양이가 연기를 내며 불타올랐다. 
 

                                                                              - <이계의 집> p 215 -   

  

 

그리고 녹색 형체에 닿아버린 노인의 애완견이 커다란 녹색 반점의 상처를 입게 되며
녹색 반점은 점점 커질수록 개는 무기력한 증상이 보인다.
그리고 녹색 광채에 오염된 개가 노인의 손을 살짝 핥게 되는데
나중에 노인의 손에도 개처럼 녹색 반점이 생기게 된다.
노인의 손에 있는 녹색 반점도 커지게 되며 노인도 정신적인 공황과 무기력감에 빠진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정신적인 장애를 겪는 피폭자를  

보는 거 같다. 작품 속 돼지 인간은 방사능이 만들어낸 돌연변이다.  

 


 

 

 

 

 

 

 

 

 샌디 스코글런드 作 <방사선 고양이> 

 <이계의 집> p 215의 구절을 읽으면서 딱 떠올랐던 사진 작품. 

 사진 속 노부부와 방사선에 오염되어 녹색을 띈 고양이, 

 그리고 회색으로 이루어진 밀폐되어 보이는 방은  

 <이계의 집>에서 수기 속에서 등장하는 노인과 그의 누이, 

 녹색 형체에 휩싸인 고양이, 그리고 시간이 흘러 먼지로 뒤덮인 노인의 방이 연상된다.

  

 

작가가 핵폭탄의 존재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작가가 그린 나락의 세계가 핵전쟁 이후 모든 것들이 종말이 된

세계와 흡사한 점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

지금도 몇 몇 나라에는 나라 전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불량 국가들은 핵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재료들을 은밀히 거래되고 있으며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국가적인 힘을 과시한다.
그리고 괜히 핵무기를 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핵무기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지구는 죽음의 불모지가 되어버린다.
지구 전체를 뒤엎은 방사능은 우주 전체까지 퍼지게 되어
코스모스(Cosmos)가 파괴되어 버리고 다시 원시의 카오스(Chaos)로 되돌아간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칫 핵무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인간도 노인처럼 우리 눈 앞에서 있어서는   

안 될 세계가 펼쳐지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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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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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5]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사춘기  
 

우리는 젊음을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사춘기(思春期)이다.
말 그래도 성난 바람과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주체할 수 없는 청년의 감정 상태를 뜻한다.
이성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게 되며
폭풍우가 그치듯이 사랑의 열정이 식어지면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와 여러 가지 상황들에 민감하여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의 변화가 잦다.
사춘기가 찾아오면 청년은 쉽게 기뻐하며, 쉽게 절망한다.
사춘기는 정신적인 변화 이외에도 성인이 되는 육체적 변화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춘기는 정신적인 변화로만 보고 있다.
15~20세가 되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춘기가 항상 이 나이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심신 발달은 계속 된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정신 발달 속도도 다르다.
사춘기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겪는 사람이 있으며
성인으로써의 신체적 발달은 이루었지만 조금 늦은 나이에
정신적인 사춘기를 겪는 사람도 있다.
나이는 먹더라도 정신만은 아직 젋고, 여전히 생기(生氣)가 넘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40년 동안 함께 결혼 생활하고 있는 부인이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젊었을 때의 그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낀다는
어느 60대의 애처가의 말처럼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지내는 것은
로맨시스트들의 소원일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인 사춘기가 늦은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다거나
또 한 번 느꼈던 사춘기가 또 다시 찾아온다면 좋은 것일까? 
 

  

 

 죽어도 못 보내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비운의 남자,
‘베르테르’ 도 어떻게 보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춘기의 희생자이다.
베르테르가 25세가 되던 해에 로테를 보고 한 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나 로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베르테르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약혼자의 존재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 그런 괴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인지,
그는 빌헬름이라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사연들을 애애절절하게 풀어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베르테르는 사랑의 폭풍우를 겪게 된다.
로테가 자신에게 조금이라고 호감 가는 말이나 태도를 보이면
베르테르는 집에 돌아와서 혼자서 그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암묵적으로 추파를 던져보나
로테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 갑자기 불이 타오르듯 절망과 자괴감에 휩싸인다.
로테 곁에 약혼자가 있는 것을 목격하면 절망과 동시에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베르테르의 롤러코스터식 심정 변화를 기록된 편지들을 보게 되면
마치 어느 정신병자의 수기를 보는 거 같다.
아니, 베르테르는 너무 지나친 ‘일루전 증후군(Illusion Syndrome)’ 의  

증상이 보이고 있다. 일루전 증후군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 조금만 잘해줘도
착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적인 혼란 상태를 겪게 된다.
그리고 하루 내내 그 사람이 생각나 머리가 깨지듯이 아프며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일루전 증후군은 정신병은 아니다.
일루전 증후군은 지극히 우리가 살면서 겪는 정상적인 심리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은
증후군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자신의 의지로 기억에서 지우면 된다.
그러나 베르테르처럼 너무 지나치게 증상이 계속되면 문제가 있다.
오히려 베르테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로테에 대한 사랑을 지울 의지도 없다.
자신이 지금 하나의 여자 때문에 미쳐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 스스로 사랑의 늪에 뛰어 들어가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 그 늪에 들어간 대가(代價)는 자살이라는 죽음을 맞게 된다. 
 

 

 

 젊은 88만원 세대들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발표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
출간 이후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젊은이가 많았다고 하며
나폴레옹도 이 책을 즐겨 읽었단다.

그런데 나는 읽는 내내 이 작품에 대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베르테르처럼
불같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감정 이입이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간혹 읽다가 사랑에 관한 의미심장한 구절도 있긴 있었지만,
베르테르가 자신의 심정을 이러쿵저러쿵 쓴 편지들을 읽어나갈수록
오히려 읽고 있는 내가 베르테르의 꼴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어떻게 보면 편지를 읽는 대상자인 빌헬름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친구가 기껏 한 여자 때문에 어린애처럼 투정부리는데도
정신의사가 자신의 환자들의 사연을 귀담아 듣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 편지들을 읽어나간다. 그리고 베르테르가 죽고 나서도
많은 편지들을 모아서 기록하여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한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에 큰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작품 속 시대의 ‘사랑’과 현재 시대의 ‘사랑’ 사이의 괴리감(乖離感)이다.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게 된다.
즉, 로테가 있기에 나도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해바라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항상 해를 쳐다보듯이
베르테르는 로테에 향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사랑 앞에서 울고 웃는 청년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창 괴테가 살던 독일은 낭만주의가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이다.
사회 흐름의 분위기에 탄 젊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사랑은
인간으로서 꼭 누려야 하는 정신적인 교감이었다.
괴테의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런 베르테르를 이상적(理想的)인  

젊음의 표상으로 추앙하였다.
요즘 시대와 비교하자면 ‘아이돌(Idol) 스타’ 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젊은 우리들은 사랑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의 시 구절처럼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 와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금방 사랑하고 금방 헤어진다.
그리고 지금 88만원 세대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낭만을 누릴 여유가 없다.
20대가 되면 본격적으로 취업 전쟁에 뛰어들면 자기 먹고 살기가 급급하다.
그리고 자신의 풍족한 삶을 위해서 사랑보다는 돈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회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녀가 서로 다른 부(副)의 차이가 나게 되면 평생 지속될 사랑은 누릴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이란 그냥 돈 많은 사람을 만나야 잘 사는게 장땡인 것이다. 
 

  

 더욱 더 슬픈 베르테르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면 베르테르 이외에도  

사랑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의 사나이들이 있다.
자신의 가문과 라이벌 가문의 딸을 너무나 사랑해서
기어코 몰래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로미오,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부자가 되어
옛 애인에게 찾아가 접근을 하는 'The Great' 개츠비,
비록 운명은 베르테르처럼 비극적이지만 지금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열정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마당에
자신이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슬퍼할 것이다.
우리가 ‘베르테르’ 라고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베르테르 효과’ 일 것이다.
베르테르처럼 소설을 읽고 자살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한 사람의 자살로 인해 연쇄적으로 자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안타까운 사랑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자살 유발자로 인식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은 ‘자살 유발자’ 라는 오상(誤象)의 이미지가 지속될 것이다. 
 

 

 Don't Read this at home! 
 

감정이 메말라가는 우리 사회에도
베르테르의 연애담을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는 여전히 있다.
지금도 베르테르처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전의 젊었을 때의 그 뜨거운 감정들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은 중년층들도 있을 것이다.

단, 사랑으로 인한 열병 말기 환자들에게 절대로 이 작품을 읽지 말기를 경고한다.
베르테르의 회의적인 감정에 쉽게 몰입이 되어  

당신들의 증상은 오히려 더 악화될 것이다.
괜히 이 책 읽다가 베르테르처럼 자살하지는 말기를.
자살을 하면 베르테르가 당신을 원망할 뿐이다.
그리고 당신의 고귀하고 유일한 생명을 한 순간의 선택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을 더욱 더 슬프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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