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도나 사회과학도들을 만난다면 꼭 한번 묻고 싶다. 작년 12월에 타계한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의 학문적 업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 질문에 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윌슨의 견해, 즉 유전자 결정론(또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은 여성의 신체적 · 정신적 열등함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다. 윌슨은 1975년에 사회생물학을 발표하여 진화론의 시각에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했다. 그의 책에 반영된 유전자 결정론은 환경과 양육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으로 보는 환경 결정론이 대세였던 당시 사회과학계를 분노로 들끓게 했다. 실제로 윌슨은 유전자가 성차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으며 앞으로도 여성은 남성보다 뒤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생물학자와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발언을 비판했다윌슨이 같이 하버드 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리처드 르원틴(Richard C. Lewontin)대중을 위한 과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윌슨과 사회생물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자와 좌파들까지 합세하면서 윌슨은 수세에 몰렸다. 그들은 윌슨이 성차별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한 보수 우파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윌슨이 있는 어디든 따라가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들은 심포지엄에서 연설을 시작하려는 윌슨에 다가가 물을 뿌리기도 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사이언스북스, 2009)

*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사회평론, 2003)

 















* 리처드 르원틴, 스티븐 로즈, 레온 J. 카민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생물학. 이념. 인간의 본성(한울아카데미, 2009)

 

* [품절]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이데올로기서의 생물학(궁리, 2001)





여전히 많은 사람은 유전자 결정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보는 유전자 결정론은 과학이 아니라 성, 인종, 장애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유전자 결정론과 관련이 있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은 남성의 여성 지배를 신체적 차이에 근거한 자연의 질서로 본다. 굴드는 자신의 책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 1977)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 1981)에서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된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는 견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르원틴은 굴드보다 한층 더 혹독하게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학자다. 그가 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 Biology, Ideology and Human Nature, 1984)DNA 독트린(Biology as Ideology: The Doctrine of DNA, 1991)은 사회생물학과 유전자 결정론을 요목조목 비판한 책이다이 네 권의 책은 유전자 결정론이 불편하지만, 조리 있게 반박하지 못하는 독자에게 힘이 되어 준다.


















* 데버라 캐머런 페미니즘(신사책방, 2022)


* 앤 커, 톰 셰익스피어 장애와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그린비, 2021)


* 마리 루티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동녘사이언스, 2017)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하려는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는 진화심리학과 유전자 결정론을 반대한다심리학자 마리 루티(Mari Ruti)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진화심리학 이론이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생산되는 현실을 비판한다페미니스트 언어학자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페미니즘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여성 지배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보다 몸집이 크며 체력이 좋고, 공격성이 있어서 사회와 여성을 지배할 수 있다. 장애학도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하는 학문이다장애와 유전자 정치는 이름만 바뀌면서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우생학의 실체를 보여준다. 우생학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고, 장애인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정책들이 만들어졌다. 사회생물학은 1970년대에 등장한 신우생학이다.


유전자 결정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깊어지면서 환경 결정론은 본성 대 양육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오랜 논쟁이 양육 가설을 지지하는 환경 결정론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이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지지해야 하는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해야 한다. 더 나은 쪽은 없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 에드워드 O.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 2011)

* 에드워드 O. 윌슨 자연주의자(사이언스북스, 1996)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사실과 전혀 다른 편견을 낳는다. 그 편견의 예가 진화론자는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한다든가 윌슨 같은 사회생물학자들을 성차별주의자이자 우파라고 속단하는 일이다그러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은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이 유전적 요인과 환경과 상호 반응하면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사회생물학출간 이후에 펴낸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우연(genetic chance)과 환경의 필연(environmental necessity)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 둘 다 인간 행동에 필수적이라는 윌슨의 견해는 책에 또다시 나온다. 개인은 자신의 환경, 특히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43).” 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는 사회생물학 논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지나오면서 느낀 생물학자의 솔직한 심정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윌슨은 사회생물학이 정치적인 동기가 반영된 학문이라고 비난받은 것에 반박했는데, 자신은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유전자 결정론이 우파의 정치적인 강령과 손을 잡는 것에 우려하는 과학도와 사회과학도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인간 행동의 본질을 설명할 때 무조건 양육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전자 결정론자를 성차별주의자’, ‘반페미니스트’, 나쁜 과학을 신봉하는 세력으로 몰아세우는 비난은 독단적인 태도다


















* [e-Book] 스켑틱 Vol. 4: 과학을 사유하다(바다출판사, 2015)

* [e-Book] 스켑틱 Vol. 16: 길러진 본능인가 타고난 학습인가(바다출판사, 2018)

 



 

과학 잡지 스켑틱4의 특집 기사 제목은 진화하는 진화심리학이다. 진화심리학이 인간 본성에 관한 최신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지식의 범위를 어떻게 확장해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이 어떤 학문인지 파악했으면 본성과 양육’을 주제로 한 특집 기사가 실린 스켑틱16를 읽으면 된다.

 


















*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20세기를 뒤흔든 진화론의 핵심을 망라한 세계적 권위의 교과서(동아시아, 2014)

 

* [절판] 딜런 에번스 진화심리학(김영사, 2001)





센스 앤 넌센스진화심리학은 진화심리학의 한계를 설명하면서도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까지도 비판하는 책이다. 센스 앤 넌센스의 저자는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본성과 양육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분해하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라는 재료가 섞어져서 만들어진 케이크와 같다. 그래도 유전자 결정론과 진화심리학이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케이크에 먹음직스러운 환경적 요인만 쏙 빼서 먹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본성과 양육, 어느 쪽이 옳은 건지 따지는 건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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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2-04-16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굴드 책을 읽으면서 윌슨에 대해 비판하는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항상 궁금했었습니다. cyrus님 덕분에 조금 이해가 되었어요.^^ 개개인의 다른 생각들이 중요하면서도 무언가에 비판적인 주장이 당론처럼 집단의 주장이 되어버리면 (그리고 전문가의 이름으로 강요되기 시작하면)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기 쉬울 것 같습니다. 리처드 도킨즈 계열인 <개미와 공작>의 헬레나 크로닌이 굴드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맥락도 뭔가 비슷한 이유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가능하시다면 이 맥락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cyrus 2022-05-01 17:46   좋아요 2 | URL
<개미와 공작>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리처드 도킨스와 윌슨은 유전적 결정론 지지자로 분류돼요. 물론 이들은 환경적인 요인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도킨스 계열인 헬레나 크로닌이 도킨스와 윌슨을 혹독하게 비판한 굴드에 반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

초란공 2022-05-01 21:29   좋아요 0 | URL
아, 도킨스와 윌슨이 이런 관점에서 함께 묶일 수도 있군요!! 여기에 굴드나 르원틴의 관점을 이해하고 이들의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blanca 2022-04-16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이를 키울수록 본성과 양육 두 측면 어느 한 부분도 함부로 폄하할 것이 못된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에 정말 공감합니다. <스켑틱> 16호 읽어볼게요.

cyrus 2022-05-01 17:49   좋아요 1 | URL
육아가 양육의 동의어에 가깝게 느껴서 그런지 육아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적 요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

이하라 2022-04-16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생적인 것과 환경적인 것 중 하나만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텐데 한측만 강조하는 경향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게 더 신기합니다. 과학과 사회에 대한 책들은 참 깊은 감상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 깊은 사유가 가능하도록 저도 다양한 장르의 독서를 해야겠다는 깨우침이 드네요.

cyrus 2022-05-01 17:51   좋아요 2 | URL
이제는 ‘본성 대 양육’이 아닌 ‘본성과 양육’으로 표현이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파이버 2022-04-16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천적인 것도 후천적인 것도 둘다 중요하죠... 가끔 문제를 겪는 아이들을 키우시는 부모님들이 양육방식에 대해 자책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마음아파요...

cyrus 2022-05-01 17:54   좋아요 3 | URL
사회가 양육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하면 양육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능력으로 인식하게 돼요. 이러면 주변 사람은 부모의 양육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참견하게 됩니다. 이런 주변의 압박감이 부모를 힘들게 하죠. ^^;;

미미 2022-04-16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덕분에 더 폭넓은 독서를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22-05-01 17:58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에 다양한 분야의 책을 두루 읽는 분들이 많아요. ^^

건수하 2022-04-16 1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학을 공부하긴 했는데 윌슨의 책은 통섭만 읽다가 말아서 윌슨의 업적에 대햐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그 분의 제자 최재천 교수는 존경할만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환경과 양육 두 가지 다 영향이 있다는 사실은 막연히 다들 알고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얼마나 영향을 준다-에서 입장이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그 무엇, 얼마나가 과학이 추구하는 바이고요. 그 무엇-얼마나를 자세히 설명하다보면 그 분야를 전공한 과학자들 외에는 모두가 알고 싶지 않아진다는게 과학이 대중들에게 오해받고 거리를 두게 되는 이유인 것 같아요. 과학자들도 좀더 대중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야할 것 같고 학교에서의 과학교육이 과거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현재의 이슈와도 관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22-05-01 18:00   좋아요 3 | URL
저도 수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과학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학 교과서에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

mini74 2022-04-16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었던 책이랑 연결돼서 무지 유익하게 읽었어요 책 몇몇 권은 관심도 가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cyrus 2022-05-01 18:02   좋아요 2 | URL
사회생물학과 관련된 책이 더 있는데 내용이 길어져서 언급하지 못했어요. 그 책들을 읽고, 사회생물학에 대한 글 한 편 더 써볼 생각이에요. ^^

감은빛 2022-04-2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경단체 신입활동가였던 시절에 사회생물학 석사과정 대학원생들과 공부모임을 짧게 한 적이 있었어요.
제대로 공부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살짝 맛본 수준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정도이지만,
당시에도 이 학문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것은 기억나요.
잘 정리해주신 이 글 덕분에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좋네요.
고맙습니다! ^^

cyrus 2022-05-01 18:06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사회생물학의 기초적인 내용만 이해한 상태라서 더 공부해야 해요. ^^

Angela 2022-04-23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nature vs nurture 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있는것같아요~

cyrus 2022-05-01 18:10   좋아요 2 | URL
‘대(vs)’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요. ‘본성 대 양육’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 사람들은 본성과 양육이 절대로 섞이지 않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로 이해하게 돼요. ^^;;

gmrtkadbs 2022-11-2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이렇게 생물학관련 해박하신 독자는 처음 뵈요. 혹시 리처드도킨스의 확장된표현형 리뷰 쓰신거 있으실까요? 제가 이기적 유전자 읽고 리처드 도킨스가 확장된표현형부터 보라고 해서 봤다가 제 레벨이 아니라 된통 혼났거든요ㅜ cyrus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원소 -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작지만 강력한 이야기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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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성분이다. 2022년 현재 주기율표에 채워진 원소는 총 118개. 화학은 물질의 구조와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소를 이해하는 것은 화학을 공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학창 시절에 화학을 공부하면 원소의 성질과 원소 기호를 외워야 했다. 그런데 무작정 외우면 과학 공부가 재미없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과학 공부는 암기가 아니라 실험해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러려면 실험 도구부터 재료 등을 다 챙겨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과학 공부를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생소한 원소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필립 볼(Philip Ball)원소: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작지만 강력한 이야기(The Elements: A Visual History of Their Discovery)는 누구나 화학을 쉽게 접할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원소의 발견으로 발전해온 화학의 역사를 풍부한 도판을 곁들어 설명한 점이다책 어디에도 원리법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론에 대한 설명은 없다이론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실험이나 과학 공부가 학습 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가장 중요한 이론만 알아도 화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그렇지만 원소》는 이론과 실험보다 화학의 실용적인 측면에 주목한다대부분 사람은 과학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축적되어 형성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저자는 과학이 실험실에서 태어나 발전되었다는 기존 인식에 반대한다그는 과학이 태어나는 지점을 확장해 기술자와 노동자가 일하는 채석장과 공장으로 시선을 돌린다저자가 고른 여러 점의 도판에 금속을 채굴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화학물질로 제품을 만드는 공장 내부 풍경이 담긴 판화와 기록사진이 포함되어 있다멘델레예프(Mendeleev)를 비롯한 여러 명의 과학자는 세상에 흩어져 있던 원소들을 주기율표에 모으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 과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들을 발견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멘델레예프가 놔둔 주기율표의 빈칸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하지만 지금의 주기율표를 만든 또 다른 기여자는 기술자, 장인, 노동자다.


기술자, 장인, 노동자들은 튼튼하고 유용한 제품을 효율적으로 만들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제조법을 고안했다. 이 과정에서 원소가 우연히 발견되었다기술자와 노동자가 원소를 조합해서 실용적인 제조법을 만들고 있을 때, 과학자들은 원소의 정체를 밝혀냈다원소는 과학자와 기술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된 화학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눈부신 화학의 역사가 만든 어두운 그림자는 원소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려는 여성과 비()백인의 탐구 정신을 가두게 했다백인 남성은 본인 스스로 과학의 발전을 이끄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식했고,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과 백인 외 인종을 억압하고 착취했다저자는 오랫동안 과학사에 드리워진 불평등의 그림자를 걷어낸다


과학사의 절반을 가린 불평등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야 빛을 본 여성 과학자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930년대의 주기율표에는 우라늄 오른쪽에 원소가 없었다.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것은 주기율표를 넓혀주는 좋은 방책으로 보였다. 1934년에 세그레는 로마에 있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와 함께 이 실험을 시작했다. 그해 말에 페르미와 오스카 다고스티노(Oscar D’Agostino)는 두 가지 새로운 원소가 만들어졌다는 증거를 발견했으며, 두 원소는 원자번호 93번과 94번 원소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두 원소의 이름으로 아우세늄과 헤스페륨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우라늄의 핵이 분열 후 더 작은 조각들로 분해되고 남은 산물이다. 그들의 판단은 4년 후 오토 한(Otto Hahn)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이 바로잡았다


(원소》, 202쪽)



페르미는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투입해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더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는 핵분열반응을 일으키는데, 페르미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핵분열을 시도한 사실을 간과했다.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 이 두 사람에게 페르미가 했던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한 리제 마이트너가 핵분열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유대인 출신의 마이트너는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 정책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중성자로 우라늄을 붕괴시키는 실험을 한 뒤에 그 결과를 편지로 써서 마이트너에게 보고했다.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 뒤늦게 우라늄 핵분열 실험에 합류했다)는 실험 결과를 세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을 맡았다. 1938년에 한과 슈트라스만은 핵분열 실험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듬해에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핵분열이 일어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규명한 논문을 발표했고, 논문은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렸다. 마이트너는 이 논문에 핵분열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했다


그러나 핵분열을 증명한 공로는 오토 한에게 돌아갔고, 그는 194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한은 마이트너와 슈트라우스의 공로를 부인했다. 한은 한술 더 떠서 마이트너를 동료가 아닌 조수였다고 주장했다. 리제 마이트너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모두 겪은 바람에 핵분열을 발견한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92년 독일에서 109번 원소가 만들어졌는데, 마이트너의 이름을 딴 마이트너륨(Meitnerium, Mt)’으로 명명되었다


저자는 남성 중심적 과학을 비판하고 있으면서도 마이트너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214쪽에 마이트너륨이 딱 한 번 나오지만, 이 원소의 화학적 성질에 대한 설명이 없다. 심지어 마이트너가 한과 함께 91번 원소 프로탁티늄(protactinium, Pa)을 발견한 사실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프로탁티늄은 방사능 독성이 강해서 소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원소다. 마이트너륨은 반감기가 아주 짧아 금방 분해되어 사라지기 때문에 화학적 성질이 밝혀지지 않은 특수한 원소다저자는 산업적인 가치와 연구 가치가 높은 원소들이 발견되는 과정을 비중 있게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110~118번 원소)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빈약하다. 마이트너륨처럼 이름만 나온 원소들이 있다. 118개의 원소 전부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세상의 모든 원소 118(시어도어 그레이 저, 영림카디널, 2012)알수록 쓸모 있는 원소 118(오시마 켄이치 저, 지브레인, 2020)을 권한다.


책에 오역으로 보이는 단어가 있다.



 파라셀수스의 사상을 따르는 파라셀수스주의의사들은 의화학파(iatrochemist)라고 불렸다. 이들은 건강이란 신체의 네 가지 호르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전부라는 옛 생각에 반대했다


(64쪽)


[원문]


 These “Paracelsian” doctors were sometimes called iatrochemiststhe word iatrochemistry means “medical chemistry’and they opposed the old notion that health was all about balancing the four humours of the body.


(The Elements: A Visual History of Their Discovery》 62, 64쪽)



‘Humour’의 뜻은 익살스러운 농담이다. 그 외에 기분’, ‘기질(氣質)’, ‘체액’이라는 뜻도 있다.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체액(혈액, 담즙, 점액, 흑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으며 체액들의 균형을 맞추면 좋은 기질이 나타나 몸이 건강해진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체액이 모자라거나 너무 많으면 병이 생긴다. 히포크라테스 이전의 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신이 내린 형벌을 받아 질병에 걸린다고 믿었으며 주술로 치유하려고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4원소설(, 공기, , )에 주목했고, 이에 대응하는 네 가지 체액이 인간의 몸에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의 학설은 ‘4체액설이라는 이름으로 중세에 알려져 오랫동안 정설로 자리 잡았다. ‘호르몬(hormone)’자극한다, 흥분시킨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hormao’에서 유래했다‘four humours’의 의미에 부합하는 번역어는 네 가지 체액(기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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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01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유, 넌 뭐 이런 어려운 책을 읽고 그랴. 쉬는 날은 푹 쉬지. 아님 어머니 도와드리거나 그러지 안쿠.><;; ㅋㅋ
암튼 새해 복 많이 받아!🥰

cyrus 2022-02-01 18:00   좋아요 3 | URL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읽어봤어요. 이번 설날 잘 쉬고 있어요. 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새파랑 2022-02-01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원소˝라니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만 보기 힘든 Cyrus님의 별 네개 군요~!! 고띵때 외운 주기율표가 그냥 만들어진게 아니었군요 ㅎㅎ

cyrus 2022-02-01 18:04   좋아요 2 | URL
원소가 발견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서 책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

mini74 2022-02-01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워보이지만 재미있겠어요. 새파랑님 말씀처럼 보기드문 별 4개이기도 하고요 ㅎㅎ 원소이름이 제가 배우던 때랑 바뀌어서 넘 힘들어요 ㅠㅠ

cyrus 2022-02-02 14:26   좋아요 1 | URL
그죠? ‘나트륨’을 쓰면 옛날 사람 취급 받아요.. ㅎㅎㅎ

psyche 2022-02-03 04:45   좋아요 1 | URL
앗 지금은 ‘나트륨‘을 쓰지 않나요?

mini74 2022-02-03 12:28   좋아요 0 | URL
소듐? 칼륨은 포타슘? 뭐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ㅠㅠ

mini74 2022-03-08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첨되신거 축하드려요 ~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2-03-08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별 네개 책이 당선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

라파엘坤 2022-03-0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2-03-0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하라 2022-03-0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2-03-09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당선 축하드려요.

투표 안하셨다면, 오늘 꼭하는 거 아시지요^^

thkang1001 2022-03-0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익스트림 물리학 - 수식 없이 읽는 여섯 가지 극한의 물리
옌보쥔 지음, 홍순도 옮김, 안종제 감수 / 그린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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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수학 없는 물리라는 물리학 교재가 있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수학 없는 물리번역본은 12판이다. 제목만 믿고 이 책을 고른 사람들은 십중팔구 수학을 싫어할 것이다. 이 책에도 각종 수식이 나온다. 수학 없는 물리의 원제는 ‘Conceptual physics’. 원제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개념적 물리학이다. 수학 없는 물리를 쓴 폴 휴잇(Paul G. Hewitt)은 자신의 책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려는 독자들에게 수식을 외우는 것보다 물리학의 개념을 먼저 이해하라고 당부한다. ‘Conceptual physics’의 국역본 제목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수학보다 물리라고 붙여주고 싶다.


수식이 아예 나오지 않는 물리학 교재가 이 세상에 단 한 권이라도 있을까? 수학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간절히 원하겠지만, 그런 책으로 공부하면 광범위한 물리학의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 수학 없는 물리학은 효모가 들어가지 않은 빵이다. 수학이라는 효모가 있어서 물리학은 점점 부풀어 올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응집물질물리학, 반도체 물리학, 핵물리학, 천체물리학 등)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과학책인 익스트림 물리학의 부제는 수식 없이 읽는 여섯 가지 극한의 물리. 부제를 믿지 마시라. 여기도 수학 용어와 수식이 나온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수식은 물리학을 거들 뿐이다. 어려워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제쳐도 된다. 익스트림 물리학은 수식을 건너뛰면서 읽는 과학책이다. 중국의 과학 강사 옌보쥔(严伯鈞)수학이라는 장벽 앞에 두려워서 물리학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저자는 수학 공식을 이용하지 않고도 물리학을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물리학을 설명하기 위해 수식 대신에 사용한 도구는 극한적 사고(limit thought). 극한적 사고란 조건 변수를 극한으로 설정해 놓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이론에 비추어 추론하는 일이다. 극한적 사고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과 비슷하다.

 

조건 변수를 극한으로 설정하면 물리적 현상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이해하려면 물체를 빛의 속도와 가까울 정도로 아주 빠르게[극쾌(極快, the fastest)] 운동하도록 설정해야 한다. 우주의 범위를 크게 봐야지[극대(極大, the largest)]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 개념인 휘어진 시공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운동하는 물체의 질량을 아주 무겁게 만들면[극중(極重, the most massive)] 시공간의 휘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자가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원자는 입증 불가능한 존재였고, 과학자들은 원자를 부정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를 보여주지도 않고, 실제로 있다고 주장만 하는 원자론자들의 말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다행히 과학이 발전하면서 미시적 세계[극소(極小, the tiniest)]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원자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미시적 세계에 대한 인식 없이는 원자를 이해할 수 없다. 온도를 아주 높게 하거나[극열(極熱, the hottest)], 반대로 절대 0도까지 온도를 많이 낮추면[극냉(極冷, the coldest)] 특별한 물리적 현상이 생긴다.

 

익스트림 물리학을 펴낸 출판사는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 그린북이다. 출판사는 익스트림 물리학이 기본이 부족한 이공계생들을 위한 책이라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학생들이 읽기 편하지 않다. 익스트림 물리학에는 73명의 위대한 과학자, 47가지 물리학 원리와 정리, 25개의 물리 실험과 사고실험, 44가지 물리학 이론과 541개의 물리학 · 수학 개념이 나온다. 그런데 적지 않은 인명과 용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만든 색인이 없다. 색인이 있으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고도 용어를 단번에 찾을 수 있다. ‘색인 없는 책은 마음 가는 대로 아무 데나 골라 읽는 자유를 억압한다.

 

책의 역자는 과학 비전공자다. 물리학 교사가 책의 감수를 맡았지만, 책 곳곳에 미흡한 점이 여러 개 보인다. 특히 용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v는 은하가 멀어지는 속도, D는 은하 사이의 거리, H는 허블 상수이다. 허블 상수는 약 70km/(s·Mps)이다. 파섹(pc)거리의 단위3.26광년이다. (121)

 

 

파섹은 우주공간에서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

 

 

 지구 자전의 영향 때문에 지표면에 있는 전향력(Coriolis force, 코리올리의 힘, 물체가 떨어질 때 휘어지는 힘-옮긴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179)

 

 

전향력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회전하는 물체의 표면 위(자전하는 지구의 지표면)에 있는 물체가 수직 방향으로 떨어질 때 휘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힘이다. 전향력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체의 방향이 휘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걸까? 왜냐하면 전향력은 회전하는 물체에 의해서 생기는 실재의 힘이 아니라 가상의 힘이기 때문이다. 전향력을 물체가 떨어질 때 휘어지는 힘으로 대충 설명하면, 독자는 전향력이 실제로 일어나는 힘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갈릴레이의 자유낙하 실험은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서서 무거운 쇠공과 가벼운 나무 공을 들고 두 개를 동시에 떨어뜨렸더니 무거운 쇠공과 가벼운 나무 공이 같이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실험을 통해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질량과 관계없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181)

 

 

갈릴레이 위인전에 꼭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실험으로 알려졌지만,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 올라 자유낙하 실험을 한 적이 없다.

 

 

 힉스 입자(Higgs boson)는 만물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이다. 질량이 없으면 중력도 있을 수 없다. 중력이 없으면 천체가 형성될 수 없다. 항성도, 행성도, 지구도, 생명도 생겨날 수 없다. 힉스 입자가 만물에 질량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계도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서구 종교계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라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 때문에 힉스 입자는 신의 입자(The God Particle)’로 불린다. (463)

 

 

힉스 입자의 별칭인 신의 입자는 미국의 물리학자 레온 레더만(Leon M. Lederman)과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 딕 테레시(Dick Teresi)가 함께 쓴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레더만은 처음에 자신의 책 제목을 ‘Goddamn Particle(빌어먹을 입자)’로 정했다. 책이 나올 당시에 힉스 입자는 발견하기 힘든 입자였고, 힉스 입자를 찾아서 검증하는 일은 물리학자들 앞에 놓인 난제였다. 그러나 출판사 측은 빌어먹을 입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Goddamn’‘God’로 수정했다. 힉스 입자의 역할은 세상을 만든 창조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힉스 입자는 신 그 자체다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유신론자는 과학사를 새로 쓴 LHC(대형강입자충돌기)의 힉스 입자 발견에 숟가락을 얻지 말기를. 바뀐 책 제목 때문에 실제로 기독교 인사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힉스 입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근거라면서 김칫국을 마신 적이 있었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123쪽






 우주에는 대기층이 없어서 허블 우주 망원경은 대기층의 교란을 받지 않고 더 많은 빛과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주1]



[주1] 원서는 2020년에 발간되었다. 그래서 허블의 뒤를 이을 차기 우주 망원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90년에 발사된 허블 우주 망원경은 총 다섯 번의 정비를 받으면서 관측기기가 교체되었다. 20211225일에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발사되었다. 제임스 웹(James Webb)NASA 2대 국장의 이름이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에 허블보다 집광 면적이 넓은 반사경이 장착되었는데 허블이 관측할 수 없는 아주 먼 우주공간과 적외선 영역을 관측할 수 있다.





* 133쪽


 빅뱅 이론은 1927년 벨기에 천문학자인 조르주 르메르트(Georges Lemaître)가 처음으로 제시됐다.[주2]



[주2] 조르주 르메트르는 가톨릭 사제이기도 하다. 2018년에 개최된 국제천문연맹 총회에서 우주 팽창을 주장한 르메트르의 업적이 인정받아 허블의 법칙에서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허블과 르메트르보다 먼저 우주 팽창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러시아의 수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Alexander Friedmann)이다. 1922년에 프리드만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프리드만 방정식을 이용한 우주 팽창 모델을 제시했지만, 1925년에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 266





아인슈타인: 나는 자네(플랑크)처럼 젊지 않아.[주3]




[주3] 막스 플랑크(Max Planck)1858년에, 아인슈타인은 1879년에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은 자신보다 21살 많은 대선배인 플랑크에게 반말할 수가 없다.





* 295



 


플랑크상수(Plank constant) [주4]  




[주4] 철자 오류→ Planck constant

 




* 377





우라늄-23514세 개[주5]의 중성자를 가진 방사성 동위원소임.



[주5] ‘143의 오자. 143개의 중성자가 있어 원자 질량이 23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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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18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학없는 물리>랑 <Conceptual physics>는 좀 괴리가 있는거 같아요 ㅋ [주3]은 재미있네요 ^^ 고등학교 때 물리를 선택했긴 했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하나도 모르겠네요 😅

cyrus 2022-01-19 22:52   좋아요 1 | URL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성이론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ㅎㅎㅎ 잊을만하면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봐요. ^^

얄라알라 2022-02-06 0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4세 개...오자는 1글자이지만 내용을 확 다르게 전달하네요^^:;;어쩜 이리 꼼꼼히 독서하시는지.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
이시카와 마사토 지음, 이정현 옮김 / 시그마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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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 책의 제목이 도발적이다. 인간의 본성은 교육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이 책을 노려봤을 것이다. 본성 대 양육이라는 주제는 하루 이틀의 논쟁이 아니다. 인간의 기질은 과연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길러지는 것인가? 이 책을 분노의 눈길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후자의 관점을 옹호하는 환경 결정론자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유전자가 인간의 기질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유전자 결정론자(또는 생물학적 결정론자)’의 입장에 가깝다. 일본의 진화심리학자가 쓴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는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책의 저자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행동과 능력이 만들어졌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우리를 조종하는 유전자의 힘이 워낙 강력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실현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양육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51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이 모든 사례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환경 결정론자는 꾸준히 배우면서 노력하면 분명 기질을 바꿀 수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가지지 못한 능력을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한 사람을 위한 조언으로 둔갑하기 쉬운 환경 결정론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노력만 하면 똑같은 기질과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내가 무조건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대로 내가 잘하는 일을 아무리 노력해도 하지 못하는 타인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의 힘을 거스를 수 없어서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해보지도 않고 벌써 포기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양육의 효과를 맹신한다. 교육으로 인간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사회는 개인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하거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고는 더 노력해보라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노력해! 노력해! 노력해!

 

진화심리학은 진화에 인간의 심리에 연관 지어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학문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을 수렵 채집 시대’, 즉 석기 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 몸에 각인된 삶의 흔적이 있는 동물로 규정한다. 가파른 속도로 발전해와 지금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문명사회에 인간의 심신은 적응이 덜 되어 있다. 아직도 인간의 몸과 행동에 수렵 채집 생활의 흔적이 배어 있다. 따라서 석기 시대에 살아가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현대 사회와 불협화음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과식을 선호하지만, 그에 따른 각종 성인병과 비만을 경계한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서 살이 찌는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석기 시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이었다. 식량을 구하기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인류는 어떻게든 식량을 구해서 최대한 많이 먹었다. 그래서 인간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 충분한 영양분을 미리 쌓아 두게끔 진화했다. 하지만 식욕을 멈추는 절제심은 진화하지 않았다. 세상이 변하고 발전할수록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의 종류가 많아졌다. 이제는 얼마든지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다. 우리는 먹거리가 넘쳐나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과식을 선호하는 오래된 우리의 본성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식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유전자의 힘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솔직하게 받아들인다.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면 편하다. 그렇다고 저자가 노력에 따른 결과와 양육의 장점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다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거야라는 패배주의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저자는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과감히 포기해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양자 모두 자신만의 개성이 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진화심리학이 언급된 문장은 이 책의 부제다. 저자는 후기에 진화심리학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심리를 설명하는 것(282)’이라면서 두루뭉술하게 언급했는데, 사실 이것만 보고 진화심리학이 어떤 학문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이러면 대중은 진화심리학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낄 것이고, 이 학문에 선뜻 접근하지 못한다. 진화심리학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저자의 글은 대중이 진화심리학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 주범이다. 이 책에 알맹이가 빠져 있다. 책의 빈틈을 메꾸지 못한 역자도 잘했다고 볼 수 없다. 역자는 진화심리학의 강점과 약점을 비중있게 다루면서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후기를 썼어야 한다. 대부분 사람은 모든 진화심리학자를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보수주의자와 결탁한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비난하는데, 꼭 그렇지만 않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유전자의 힘과 환경의 영향이 상호 반응해서 인간의 기질이 형성되거나 변화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저자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의 원인을 모두 석기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살아온 조상들의 모습에서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된 석기 시대의 환경과 생활상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의 약점이다. 인간의 기질이 수렵 채집 생활에 적응하도록 형성되었다고 보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입장은 모호한 추측을 양산한다.

 

저자는 인간이 고독해지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고독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고독하게 지내는 것을 개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낮에도 고독하게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대부분 사이좋은 협력 집단에 어울리는 쪽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이것 역시 수렵 채집 시대의 흔적이다. 온종일 다른 사람과 교류할 일이 없다면 마음은 쉽게 병들고 만다. (60)

 


낮에 고독하게 지내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저자의 입장은 고독의 긍정적 효과를 외면하고 있다. 온종일 다른 사람과 교류할 일이 있으면 마음이 쉽게 병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최대한 줄이면서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 물론 고독을 긍정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외로운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소중하게 여긴다. 세상과 단절한 채 생활하는 은둔형 외톨이는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고독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 심취한 저자는 택시 운전사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98), 택시 운전사가 아닌 내가 봐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택시 운전사도 비 오는 날에 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빗길 운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빗길을 지나는 차는 평상시보다 미끄러지기 쉽다. 사고 없이 안전하게 운전해야 하는 택시 운전사는 비 오는 날에 예민해진다.

 

그리고 저자는 SM 플레이를 좋아하는 건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아픈 게 좋다는 마조히스트를 이해하지 못한다.

 


 SM 플레이에서는 사디스트가 채찍으로 마조히스트를 때려서 서로 만족을 얻는다. 소리에 비해서 아프지는 않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픈 게 좋다는 마조히스트의 고백은 이해하기 어렵다. (219)

 


대중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를 왜곡한 정보를 접해서 SM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면 SM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점점 더 불어난다. 저자는 SM 플레이를 단순히 지배 복종 관계에 대한 충동을 승화시키는 성행위로 보면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계약 관계를 지향하자고 주장한다(220). 한술 더 떠서 SM 플레이 대신에 그것과 비슷한 효과(통증을 참으면서 느끼는 성취감)가 있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SM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저자는 SM을 오해하고 있다.

 

SM 플레이는 도미넌트(Dominant, 줄임말은 ’, 지배 성향이 있는 사람)와 서브미시브(Submissive, 줄임말은 ’, 지배당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 간의 상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성행위다. SM 플레이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규칙과 응급처치 요령이 마련되어 있으며 대화를 통한 파트너 간의 상호 합의를 강조한다. 그래야 SM 플레이 도중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할 수 있고, 성범죄를 방지할 수 있다. SM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습득한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는 적당히 선을 지키면서 쾌락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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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1-03 2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새해 복 많으받으세요~올해는 사이러스님의 리뷰 작년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mini74 2022-01-03 2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보니 이해가 ㅠㅠ특히 낮에 고독한게 바람직하지 않다니 너무 편파적인거 같아요. 오랜만이라 더 반가운 리뷰 ~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새파랑 2022-01-04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포기하면 편하긴 할거 같은데 문제는 포기하는게 쉽지가 않다는 거겠조? ㅎㅎ cyrus님 오랜만에 뵈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이하라 2022-01-04 0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22-01-04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아!^^
 
질병의 지도 - 흑사병에서 코로나바이러스까지 지도로 보는 유행병과 전염병의 모든 것
산드라 헴펠 지음, 김아림 옮김, 한태희 감수 / 사람의무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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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점   ★★★★   A-






인류의 생명을 살린 한 장의 지도가 있다. 그 지도는 콜레라 희생자가 늘어나던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존 스노(John Snow)라는 의사는 콜레라의 발병 원인과 경로 전염을 파악하기 위해 죽음의 거리가 된 런던 소호 가를 직접 돌아다녔다. 당시 사람들은 공기 중에 있는 독소가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스노는 상수도의 오염된 물이 콜레라 대유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집집이 돌아다니며 콜레라로 사망한 주민이 살았던 집을 조사해서 지도에 표시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지도를 살펴본 스노는 콜레라 환자와 사망자들의 집이 특정 우물 펌프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스노가 의심한 우물 펌프가 콜레라 감염을 일으키는 진원지였다. 지도는 의사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한 장의 지도가 공기를 타면서 거리를 떠도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콜레라의 실체를 밝혀주었을 뿐 아니라 죽음의 행렬을 멈출 해법을 보여주었다.


지도에는 넓고 거대한 세상이 축약되어 있다. 그렇지만 스노가 만든 콜레라 지도처럼 질병의 전염 경로도 담겨 있다. 역학 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지도는 병균에 맞서 싸우는 의학자들이 반드시 챙기는 전투 장비다. 질병의 지도는 아주 작고 치명적인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질병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면서 질병을 대하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까지 들려준다. 과거 사람들은 실체와 감염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사람들의 일상은 죽음과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었다. 보이지 않은 적의 공격을 받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전염병 대유행 시대의 흔한 풍경이었다. 전염병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온몸을 죄어오는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했다. 그러나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고안한 치료법은 한계가 있다. 비과학적인 치료법은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저자는 여러 가지 전염병에 내리 패배하는 인류의 처절한 모습도 보여준다.


질병에 굴복당한 사람들을 살리고, 질병에 언제 포위당할지 모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인류의 도전들은 헛수고로 끝났다. 지금 보면 다시 거론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를 왜 알아야만 하는가. 여러번 전 세계를 휩쓴 전염병 대유행 시대를 피부로 느낀 인류의 헛수고는 단순히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전보다 더 강력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염병 대유행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가 다시 봐야 할 역사. 이 역사는 무지한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흑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살 수만 있다면 허무맹랑한 치료법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과거 사람들을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우리도 과거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전염병 대유행 시대가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심리는 불안해진다. 전염병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은 사실과 거짓을 차분하게 판단하게 해주는 이성을 닳게 만든다. 이때 전염병과 관련된 가짜 정보들이 여기저기 나타나 이리저리 떠돌게 되고, 이성에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들을 찾아 파고든다. 이 사람들이 백신 부작용까지 두려워하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에 현혹되기 쉽다. 저자는 2017년 루마니아에 홍역 환자 수가 전년보다 급증한 사례를 들면서 백신을 거부하는 태도가 전염병 대유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질병의 지도에 소개된 발진티푸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걸린 전염병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난한 발진티푸스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강제로 격리되거나 멸시받았다. 질병의 지도는 전염병 대유행 시대의 환자들이 차별받는 현실에도 주목한다. 나병(한센병)과 에이즈 환자들은 살아 있어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을 위험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전염병 감염 경로를 밝혀내는 작업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환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발진티푸스의 위력을 확인한 어느 의학자는 발진티푸스의 역사는 인류 고난의 역사와 같다고 말했다. 2019년 11월 중순에 시작된 전염병 대유행에 지친 사람들은 의학자의 말에 들어 있는 발진티푸스를 코로나19’로 바꾸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생각보다 많다. 게다가 현행 치료법과 백신도 소용없는 변이 병원균이 나타나고 있다. 전염병의 역사는 인류 고난의 역사다. 하지만 전염병 대유행에 인간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살기 위해서 전염병을 전파하는 동물을 찾아내 도살했다. 심지어 전염병을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동물마저 도살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인간을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라고 볼 수 없다. 전염병의 역사는 동물 고난의 역사이기도 하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42

 




특별한 치료은 없지만 → 특별한 치료법은 없지만



 

 


* 82




 

 특히 젊은 시절의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1]동백 아가씨(The Lady of the Camellias에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에서 이 질병에 영감을 받았다.


[원문, 원서 82]

 

 notably Alexandre Dumas, the younger, in his novel The Lady of the Camellias and Giuseppe Verdi in his opera La Traviata.

 

 

[1] 《몬테크리스토 백작삼총사를 쓴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동백 아가씨의 작가 뒤마(1824~1895)는 동명이인이다. 두 사람은 이름이 같은 부자(父子) 관계다. 그래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아버지를 뒤마 페레(père)’, 아들을 뒤마 피스(fils)’라고 부르기도 한다. ‘père’‘fils’는 각각 아버지와 아들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원서(The Atlas of Disease)‘the younger’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영미권 남성의 이름 뒤에 붙이는 ‘junior(Jr.)’와 같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알렉상드르 뒤마동백 아가씨의 작가를 아버지 뒤마로 잘못 알고 있는 역자의 오역이다.





* 110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의 글에서도 장티푸스처럼 보이는 병에 대한 묘사가 발견된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2]가 열병을 치료하고자 냉수욕했다는 보고에서 그가 앓았던 병이 장티푸스일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원문, 원서 110]

 

 A description of what appears to be typhoid is found in the writings of the fifthcentury BC Greek physician Hippocrates, and a report of Emperor Caesar Augustus of Rome taking cold baths in order to treat a fever is thought to refer to the illness, but it is impossible to be sure.

 

 

[2] ‘Caesar Augustus’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칭호이다.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 및 정치적 후계자로 지명받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원로원은 초대 황제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존칭을 주었다.

 





* 150





특별한 치료이 없으며 특별한 치료법이 없으며

 


 



* 182




 

검증된 치료은 없음 검증된 치료법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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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1 07: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오랜만에 글 보니 너무 반갑네요~!! 여전하신 날카로운 독서를 하시는군요. 요즘 시기에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염병의 역사는 동물고난의 역사라니~!

얄라알라 2021-12-01 11:18   좋아요 4 | URL
날카롭고 지적인 독서! 새파랑님의 말씀에 하나 더 얹었습니다. cyrus님 반갑습니다!!!

cyrus 2021-12-02 22:20   좋아요 4 | URL
사스가 유행했을 때 사향고양이, 오소리와 너구리가 도살당했어요. 이유는 사향고양이에서 사스 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인간 때문에 오소리와 너구리는 억울하게 떼죽음을 당했어요. 이런 사실을 책을 통해 처음 알았어요. 사람들은 전염병 대유행 시기를 겪으면 사망자 수에 주목해요. 그래서 전염병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도살당한 동물이 있는지, 또 얼마나 되는지 모를 수밖에 없어요.

이하라 2021-12-01 07: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요즘은 리뷰보다는 독서모임에 더 주력하시나 봅니다. 시기적절한 리뷰 반갑게 보았습니다. 리뷰로라도 종종 뵐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cyrus 2021-12-02 22:22   좋아요 3 | URL
독서 모임 활동에 주력하고 싶은데 오미크론 변이 때문에 또 당분간 불가능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

프레이야 2021-12-01 08:0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전한 대처와 태도, 여전한 차별. 인간과 동물의 고난의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퍼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특히 뒤마 피스를 잘못 옮긴 건 치명적이네요. 예리하고 정확하신 지적 🙌 최고예요.

cyrus 2021-12-02 22:27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님이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

미미 2021-12-01 08: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에궁 사이러스님!! 오랜만입니다😊

cyrus 2021-12-02 22:28   좋아요 2 | URL
오랜만입니다, 미미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

레삭매냐 2021-12-01 09: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얼굴 보기 힘듭니다. 속히 캄온!

stella.K 2021-12-01 13:27   좋아요 3 | URL
여기선 다들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농담입니다.ㅋㅋ

cyrus 2021-12-02 22:29   좋아요 3 | URL
레샥매냐님이 달궁에 컴백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달궁인들이 많습니다. 달궁 온라인 모임할 때마다 달궁인들이 레삭매냐님 얼굴 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ㅎㅎㅎㅎ

페넬로페 2021-12-01 09:5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cyrus님!
여전히 미주알 고주알에 감탄합니다.
전염병으로 온 세계가 꽁꽁 얼어붙은 이 시기에 정말 이때까지의 노력이 허무할 정도입니다^^

cyrus 2021-12-02 22:32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페넬로페님. 잘 지내고 계시죠? 독서모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번 연말 독서 모임이 무산될까봐 걱정입니다.. ^^;;

stella.K 2021-12-01 13: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야. 살아 있네. 이제 영영 안 나타날 건가 했지.ㅋ
뒤마가 부자였구나. 20대 초반에 아들을 낳으셨구만.
우리가 주로 기억하는 건 아버지 아닌감?

전염병은 지가 있을만큼 있다 사라질 건가 봐.
백신도 좀 무력하다 싶어.ㅠ

cyrus 2021-12-02 22:50   좋아요 4 | URL
누님, 잘 지내고 계시죠? 무릎은 좀 어때요? 서재 전체 글이 비공개되거나 서재 자체가 사라져버렸다면, 제가 알라딘을 완전히 떠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ㅎㅎㅎ

미미 2021-12-02 22:45   좋아요 2 | URL
헉..사이러스님 지난 글들도 찾아 읽는데 서재 사라지는 일 부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mini74 2021-12-01 2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방가방가 넘 오랜만입니다. 잘 계시지요. 글이야 당연히 여전히 좋아요. 날씨가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자주 봬요 *^^*

cyrus 2021-12-02 22:37   좋아요 5 | URL
오랜만입니다. 미니님, 잘 지내시죠? 어제는 진짜 겨울이 왔다는 걸 실감하는 날이었어요. 미니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

새파랑 2022-01-07 17: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당선 축하드려요. 바쁘실텐데 그래도 즐거운 독서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mini74 2022-01-07 17: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글에 오탈자까지 ! 항상 고마운 글 ㅎㅎ 축하드립니디 ~

이하라 2022-01-07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새해 기쁘게 시작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그레이스 2022-01-0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얄라알라 2022-01-07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은 페이퍼라 생각했는데, 불과 30여일 전이네요^^ cyrus님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2-01-07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2022년 임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hkang1001 2022-01-07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1-08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