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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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대통령을 거치며 18년간 공식 비공식적인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구가했던 박정희. 그는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로서의 비판과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경제대통령으로서의 환호를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 일정정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현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박정희는 잊혀져가고 있지만, 시도때도 없이 위기에 처하는 한국경제는 '경제대통령' 박정희를 어김없이 등장시킵니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다시 한번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이 등장해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 저자는 경제정책을 포함해 집권시절 박정희의 정책을 분석하여,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근대주의'와 달리, '반동(reaction)'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북의 군대가 남의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것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반동'이란 "원래는 역학상의 용어로 동()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사회현상에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진보’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정치적 반동’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진보의 반작용인 '반동'은, 무엇을 진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단어인 것이죠. 결국, "박정희는 반동적인가"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박정희를 반동적이라 규정하고 있는) 저자의 진보가 무엇인가?"가 될 것이며, "(이 책을 읽고있는) 나의 진보는 무엇인가?"가 될 것입니다.

- 진보에 대한 최소공약수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더 나은 삶의 질'일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정도 구현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진보는 유효하며,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 만으로 구현하지 못한 '더 나은 삶의 질'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루어 낼 수 있는가"가 오늘날 진보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많은 이들은 '경제발전'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치세력들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주문은 진보에 대한 열망입니다.

- 저는 '박정희 평가의 모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사고,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지만 경제는 발전시켰다'는 평가는,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으니 경제발전만 남았다'는 사고와 같습니다. 저는 이 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516 군사쿠데타 이전의 민주당 정권에게도, 박정희 정권에게도 경제발전의 화두는 '축적'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이야 기업 수준에서도 국가 기간산업 규모의 투자가 가능하지만, 당시에 이런 투자를 위해서는 해외의 원조와 차관, 전국에 흩어져있는 자본을 규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권이라도 봉착해야 하는 과제였을 것이고, 차이는 어떤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입니다.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주도적으로 자본의 동원과 축적이 용이했지만,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있던 한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는 사유재산을 집중하기 위한 절차가 따로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폭력이 동원됩니다. 516 군사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던 '민주당 정권의 무능력' 역시 '자본 축적의 무능력'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의 정치폭력이 자본 축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들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정치정화법, 1963년 군정 4년 연장안, 4대 의혹 사건, 1964년 화폐계혁, 1966년 삼선개헌, 1971년 국가비상사태, 1972년 비상계엄령과 유신헌법, 등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행보는 대부분 집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대 의혹 중 유일하게 자본축적과 연관된 새나라자동차 사건 역시도 자동차 산업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죠.

- 제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자본주의 국가의 초기 자본축적에는 폭력이 수반된다는 보편적 진실입니다. 영미의 자본주의가 식민 지배와 노예 무역을 통해서 자본축적을 이루었다면,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중국, 북한은 당의 독재를 통해서, 자본주의 한국은 정치폭력을 통해서 자본축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저는 이점이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정희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주의의 폭력성, 분리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적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만 있다면, 1970년대에 칭송받아야 할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라 김일성일지도 모릅니다. 체제 경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던 경제 발전에서의 김일성과 박정희의 차이, 정치폭력을 휘둘렀던 박정희와 김일성의 차이 보다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서 경쟁적 폭력적으로 자본축적을 해야했던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런지요.

- 신드롬으로까지 추켜세워진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의 반영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박정희 신드롬을 바라보고 있을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들의 용기와 신념, 열정을 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도 끔찍한 정치적 폭력으로 점철된 70년대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 집권세력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희미하게 려줄 뿐입니다. 우리가 박정희 신드롬으로 부터 진정으로 깨우쳐야 할 점은,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어 낼 대안세력의 형성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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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크리스하먼 지음 / 갈무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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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하먼과 마이클 헤인스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크리스 하먼은 1989년 경에 동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옛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의에 대하여, 마이클 헤인스는 자본주의 동유럽의 향후 전망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저자 모두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며, 이들은 스딸린의 소련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유럽 국가들의 성격에 대해서 독자적인 입장(국가자본주의)을 고수해왔습니다.

- 1989년 동구권의 변화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두고, 많은 매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해석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에 동의했습니다. 이제 10년 정도가 지나서,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경제정책들 - 규제의 완화, 공기업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 - 의 폐해가 고발되고, ’자본주의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라는 얘기도 들리지만,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패배한 사회주의와 승리하지 못한 자본주의. 무엇이 승리하든, 우리가 먹고 살만한 어떤 경제체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편역자 이원영씨는 두 사회주의자들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역자 서문으로 뻬레스트로이카가 선언된 1985년과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1991년의 한국 학계와 운동세력들의 논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와 이론의 흥망을 논하는 거대 담론 속에, 막상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 성격에 대한 연구는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말하기 이전에, 소련과 동유럽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분석을 해보자’는 것이 편역자의 의도입니다.

- “동구권의 변화가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변화의 움직임이 1989년에 맞추어 진 것은 아닙니다. 변화는 그 이전부터 조금씩 있어왔고, 정치적 공백기 - 고르바쵸프의 뻬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점점 지지를 잃어가고 있을 때 -를 빌어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 뿐입니다.
폴란드에서는 1988년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 기존 지배정당과 노조가 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고, 헝가리에서는 1987년 시위로 기존 지배정당이 분열하게 되며, 동독에서는 1990년 고르바쵸프 지지시위가 열려 여행의 자유, 자유선거, 정치개혁, 서독과의 경제통합, 등의 성과를 이루어냅니다. 루마니아에서는 1987년 트랙터 공장의 파업으로 시위가 시작되어 결국 차우체스쿠 대통령이 도피하고 시위대를 지지하는 군대와 함께 행정기구가 결성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89년 ‘프라하의 봄‘ - 1968년 소련 군대가 프라하에 투입되었던 - 2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적인 시위가 일어나 정부가 재구성되며 자유선거 실시를 이루어내며, 불가리아에서도 1989년의 시위로 정부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 동유럽의 이러한 변화들은 매우 평화적이었다는 것이 크리스 하먼은 분석입니다. ‘평화로웠다’는 것은, 세력간의 충돌정도를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에, 시위를 주도한 ‘반대파’ (기존 정권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들이 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연합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 이것은 다시 말해서, 1989년 동유럽의 변화들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일정정도의 정치적 변화들을 쟁취했지만,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에서 기존 지배정당들은 유지되거나 분열되었을 뿐이고, 대통령 외에 기존 권력을 구성하고 있던 정치관료들, 기업 경영진들의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을 퇴진시킨 1960년 419항쟁이나,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1987년 6월항쟁에 비견할 만 합니다. 물론, 두 항쟁의 경우, 동유럽의 경험과는 달리 반대파들이 직접 행정기구에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 크리스 하먼은 뜨로츠키의 명제에 따라, 한 사회의 생산관계와 지배계급을 변화시키는 ‘사회혁명’과 지배권력을 교체하는 ‘정치혁명’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평화적인 변화는, 붕괴할 만한 사회주의는 애당초 없었음을, 즉 붕괴할 만한 ‘차별화 된 생산관계나 지배계급’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음을 논증한다고 주장합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경제를 사회주의 로 바라보는 시각이나,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모종의 경제체제로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 ‘평화적이었던’ 동유럽의 체제이행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 그는 1989년 이전의 동유럽 사회를 ‘국가자본주의’ 로 규정합니다. 동유럽 사회는 대대적인 정치혁명을 바탕으로, 국가자본주의에서 다국적자본주의로, 진보도 퇴보도 아닌 옆걸음질했다는 것이죠. 변화한 것은, 과거 국가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되었던 국내의 경쟁이 해소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국가자본주의란 국가가 대외적인 경쟁을 위해 내부적인 경쟁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대립적인 경제체제를 상징했던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의 경제체제란, 국가 개입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1941~1944년까지의 미국 전시경제와 소비에트연방의 경제체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 그는 1950~60년대 동유럽 경제의 성장률이 세계 각국 경제의 성장률 보다 월등히 높은 것을 근거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경제에서, 초기에는 국가자본주의가 다국적자본주의 보다 우위를 점유했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경쟁을 통제하면서, 내부의 자본을 집약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의 우위는 1970년대를 경과하며 무너지게 됩니다. 국가 내부의 자본을 동원하는데 있어서는 국가자본주의에 뒤쳐졌던 다국적자본주의는, 국가 외부의 자본까지 집적하면서 국가자본주의를 앞질러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국가자본주의와 다국적자본주의의 차이는, 자본주의 고유의 ‘축적’을 하기 위한 전략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 자본주의가 이전의 경제체제와 달리 놀라운 속도로 경제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 이면에서 극심한 양극화와 계급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특유의 축적능력에 있습니다. 영미식 다국적자본주의가 저질러 온 엔클로우저 운동, 부랑자법, 식민 지배, 노예 무역과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식 국가자본주의가 저질러 온 강제노동수용소, 파업과 기생주의 에 대한 처벌, 등은 다르지 않은 폭력행위로서, 대규모적인 집중과 집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된 것이죠.

- 다국적자본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전략이 불가피하게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외국 자본과의 결합 속에서 더 큰 규모의 자본을 축적해야 했는데, 이것은 곧 '노멘클라투라'라 불리우던 국가관료들의 경제 장악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죠. 지배세력의 균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니 체제경쟁에서 밀려날 것이고, 다국적자본주의로 나아가려니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권력의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의 국가관료들은 균열합니다. 이런 지배세력의 균열과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맞물리면서 뻬레스트로이카를 비롯한 대대적인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크리스 하먼은 이런 변화들 속에서,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내 사회주의적 좌파들의 무기력을 지적합니다. 기존 정치세력들은 분열하고 있었고, 폴란드의 연대노조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포럼을 비롯해 자생적인 대중조직들이 탄생하며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었지만, 좌파들의 대안제시가 미흡했기 때문에, 이들 반대파들은 다국적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새로이 지배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통제하기도 했구요.

- 결국, 기존의 정치권력은 반대파에 편승했던 국가관료 일부와 반대파 지도자들로 교체되었고, 밀려난 과거 국가관료들은 대거 사영기업체로 이전합니다. 다국적자본주의로 옆걸음질 친 이후, 대거 설립된 사영기업들의 대다수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내부시장 경쟁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사라진 다국적자본주의 아래에서, 과거 국가관료들은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죠.

- 2부에서 마이클 헤인스는 다국적자본주의 동유럽의 전망을 예측합니다. 그는 시장을 개방하며 기대했던, 대규모의 해외자본의 유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과거 소련의 무역보조에 의해 보충되었던 내부시장의 경쟁력은 약화되었고,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해외 투자자들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렇듯 동유럽의 경제는 세계시장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시장으로의 편입은, 일국 차원에서 행사되던 최고권력이, 초국적 기업을 비롯한 세계 시장 맹주들의 주변권력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북한, 베네수엘라, 쿠바와 같이 소위 '현존 사회주의'라 불리우는 국가들의 공통점은, 세계시장으로의 편입, 즉 기존 권력의 재편과 주변화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국가들이 세계 경제와의 협력 없이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북한과 같이 국가의 폭력이기도 하고, 베네수엘라와 같이 풍부한 석유자원의 소유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체제 유지가 지속가능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국가자본주의의 다국적자본주의로의 전화가 보여주는 진실은, 세계적인 경제협력만이 높은 삶의 질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로 편입된 동유럽 경제의 현실은, 세계적인 경제협력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세계적인 경제협력은 형식에 불과하며, 무엇을 위한, 누구에 의한, 어떤 방식으로의 협력이냐가 근본적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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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저격수의 고백 - 세계 경제의 뒷무대에서 미국이 벌여 온 은밀한 전쟁의 기록 경제 저격수의 고백 1
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 / 민음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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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좌지우지 하려는 ‘제국’으로서의 전략이, 일방적인 식민지 정복에서 더욱 노골적인 식민지 쟁탈전쟁으로, 그리고 경제지배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70년대 이후 발행된 미국의 채권에 허덕이는 남미의 고통스런 목소리는 오래되었으며, 이런 폐해들은 ‘신자유주의 전략’이라는 하나의 화두로 이미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두에 그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저항과 연구, 조직적인 행동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운동, 세계사회포럼, 반세계화 시위, 등이 그것입니다.
기존의 문제제기가 제3세계의 피해자와 저항세력들의 목소리였다면, <경제저격수의 고백>은 이러한 미국의 경제지배 전략을 수행해 온 내부자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경제지배 전략의 매커니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덧붙여, <경제저격수의 고백>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제지배 전략을 두고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질 수 있는가?”라며 의아해하며, 이는 곧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을 발생시키기도 하는데요, 존 퍼킨스의 구체적인 행적과 은퇴, 집필을 앞둔 갈등과 고민은 이런 의아함을 씻어줄 것입니다. 경제지배는 소수 음모집단의 ‘007작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합법적이고 세련된 외양을 갖추고 있고, 수많은 전문 인력들이 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받아들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논리를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음모론은 모순적인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할 뿐” 이라는 그의 외침이야 말로 이 책의 진정한 의의가 될 것입니다.

- 존 퍼킨스는 다국적 컨설팅 회사의 직원으로서, 1971년부터 인도네시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그는 토목, 건축, 통계 전문가를 동행하여 해당 국가의 곳곳을 둘러보며, 산업 발전계획을 수립합니다. 컨설팅은 단지 제안에 그치지 않으며, 차관 제공, 업체의 선정까지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경제지배의 합법적이고 세련된 외양입니다.

- 문제는 대상 국가들이 대부분 남미, 중동, 아프리카의 저개발 국가라는 점에 있습니다. 대규모 개발에는 노동력을 둘째 치고라도 돈과 기술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이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컨설팅 회사가 노리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통계조작까지 서슴지 않는 계획안, 초호화 로비, 심지어 정보기관이나 군의 동원은, 컨설팅 회사에 대한 모종의 신뢰관계를 만들기 위해 적절하게 선택적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 대상국가의 지도자들이 이를 수락하는 순간, 차관을 제공할 세계은행을 설득하고, 토목 건축회사들을 소개하는 것도 컨설팅 회사의 몫입니다. 엄청난 금액의 달러화는 굳이 대상국가에게 갈 필요조차 없이, 미국 내 계좌에서 이체될 뿐입니다.

- 대상 국가들이 차관을 바탕으로 설립한 기반 시설들이, 채무를 이행할 수 있는 수익을 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컨설팅 회사의 계획에 없습니다. 의아하지만, 채무를 이행할 수 없을 정도의 계획을 고의적으로 세우기도 합니다. 대상 국가가 채무를 이행한다면 응당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로 막대한 이자를 비롯해 대상 국가의 정치와 경제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상 국가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약간의 양보와 더불어 기민하게 대처할 준비도 되어있을테구요. 에콰도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는 산유국으로서, 콜롬비아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알짜배기 운하로서, 컨설팅 회사의 대상 국가가 되었습니다.

- 물론, 이런 고수익의 전략이 아무런 장애 없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데 자국의 자원으로 충분한 돈이 비축되어 있는 국가도 있었고(사우디아라비아), 경제니 통계는 모르지만 컨설팅 회사의 장미빛 계획이 ‘계약의 체결‘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지도자(에콰도르 하이메 롤도스, 콜롬비아 오마르 토리호스)도 있었으며, 지도자는 부패했으되 국민들과 재야의 지도자들이 이를 간파하고 저항한 경우(이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컨설팅 회사 대신 정보기관이나 군이 동원되었던 것이죠.

- 전략이 실패한 경우는 이란과 베네수엘라 뿐이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대한 부는 로비라는 또 다른 부에 의해서 무너졌고, 콜롬비아의 훌륭한 지도자는 정보기관의 테러에 의해 무기력하게 무너졌지만, 이란의 대중적 봉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 대한 지지는 아직 미국의 전략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은 우리에게 (외신보도를 맥락 없이 인용하기 좋아하는 언론 덕분에) 소위 ‘테러국가’ 내지 ‘말썽꾸러기’로 알려져있구요.

- 존 퍼킨스는 경제저격수를 통해 각국을 돌아다니며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콜롬비아의 오마르 토리호스와 같은 소신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과, 911 테러로 드러난 드높아지는 중동 국가들의 저항을 목격하며 책을 집필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양심의 가책을 넘어, 경제지배 전략에 남발된 환수되지 않은 막대한 차관, 미국의 쌍둥이 적자라는 위태한 세계 달러경제에 대한 우려이며, 보복테러와 보복전쟁으로 이어질 악순환 속에서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저항의 목소리입니다.

- 은퇴를 고민하며 그는 부하직원들에 대한 인간적인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직접 정보기관에 의해 포섭된 자신과는 달리, 그저 컨설팅 회사의 직원으로서 전문적 지식과 능력을 빌려주고 있는 그들, 하지만 분명 경제지배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손과 발이 되어있는 그들을 말입니다. 그는 “음모론이야 말로, 모순적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경제발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야 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풍부해진다는 의미에서 경제발전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제3세계 국가들에 전에 없던 기반시설과 산업시설이 개발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누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개발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것입니다. 헐벗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고작 2$를 쥐어주며 하루 12시간씩 노동시키는 당신 기업가들을 경제발전의 주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장과 일하는 아이들, 그리고 당신들이 아이들에게서 빼앗아간 수천 수만달러의 몫이 바로 경제발전이니까요. 이들이 없다면 당신들이 약탈해 간, 소위 ‘합법적 이윤’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제발전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당신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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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8-30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두텁게 만들어진 고백서이군요
 
사랑의 조건
안재성 지음 / 한길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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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의 외도를 마감하고, 다시 계획을 세워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외도의 이유는 지금의 진창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외도를 마감하는 이유 역시도 같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상을 그렸던 <경성트로이카>의 작가이자, 서문에서 자신의 과거 활동을 회의하는 것으로 인상에 남았던 안재성씨의 소설 <사랑의 조건>을 끝으로 외도를 마치려고 합니다.

- <사랑의 조건>은 80년대 한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합니다. 흔하지 않은 소재이며, 그래서 ‘노동소설’이라 따로 묶여있는 운동권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가장 흔한 소재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80년대 운동가 개인의 역사가 시작되는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을 비롯해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83~84년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대규모 공장 이전, 85년 구로 동맹파업,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87년 대통령 선거와 89년 천안문 사태와 소련(소비에트연합)의 해체, 91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투쟁하고자 했던 운동가들의 고민과 갈등을 옅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이라는, 더구나 하나의 사랑 풍경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랑의 조건이라는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 어두운 시대와 무거운 정치적 사건들 사이에 기묘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죠.
주인공인 ‘나’와 김진숙이라는 여성의 인연은, 주인공이 80년 5월 광주의 소식에 분개하여 서울 복판에서의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소설의 시작에서 함께 시작합니다. 다만, 독서후기의 편리를 위해, 분리해서 적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가발제조업체였던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에 대항해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를 점거하고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야당 당사에 경찰병력을 투입하면서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김경숙 노조 위원장이 사망하고,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의원직에서 제명되게 되죠.
이 사건은 단지 특정 노조의 생존권 투쟁을 넘어서, 한 노동자의 죽음과 정치적 싸움으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동시에 박정희 정부 말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구요.

- 이런 사회상은 그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10.26 이라는 정치 테러가 발생하고, 전두환을 필두로 한 새로운 군부집단이 10.26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군정의 연장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권력의 일시적 공백기를 겨냥해 숨죽였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군부집단은 비상계엄령의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대학 휴교령, 등으로 다시금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대학생들과 국민들의 열망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배경이 되는 것이죠.

- 70년대 말부터 권력의 공백기 동안 민주화를 주장하며 거리를 누볐던 이들은, 5.17 조치로 인해 높아진 현실의 폭력 앞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동시에, 끔찍한 폭력을 자행하며 정부를 장악한 군부정치의 연장은 기존 운동과 새로운 운동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편의적으로 분류하자면,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이라는 세대의 갈등으로, ‘민주화’와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정치 슬로건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인 ‘나’와 1980년에 포고령 위반으로 대학에서 제적당한 작가의 이력 또한 후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새로운 운동은 83~84년경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대규모 노동현장 이전으로 표현됩니다. 어떤 이가 “트럭으로 사람들을 실어오는 것 같았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존 운동 방식의 전환은 거대했습니다. 세계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하니까요. (19세기 러시아의 나로드니즘 운동에서도 많은 학생 출신 운동가들이 농촌으로 이전했지만) 주인공인 ‘나’가 강제징집과 전역 이후에 노동현장을 막연히 동경하며 노동일을 시작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 하지만,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대규모 노동현장 이전이, 단순히 70년대 운동방식에 대한 회의나 이유없는 열풍일 수는 없습니다. 당시 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던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주의의 기초>와 같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이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노동일 속에서 그가 재회하고 학습을 받게되는 후배 박인주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합니다. 운동가들의 노동현장 이전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불만과 맞물리면서 85년 구로 동맹파업을 비롯한 파업투쟁과 서노련, 인노련, 인민노련, 등을 비롯한 노동자 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일제시대와 해방을 전후로 해서 많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중국의 공산당과 교류를 했고, 소위 ‘본토’에서 직접 교육을 받은 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80년대 초중반의 이런 사회상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이 6.25 전쟁과 이후 몇차례의 정부를 거치며 거의 완전하게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노동현장으로 이전해 노동조합을 비롯해 학습소모임과 노동자 조직을 구성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 대학 내에서는 여전히 이제 막 유입되기 시작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용과 활동방식이 비슷했던 70년대 학생운동의 유형을 변화시킵니다.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서, 학생운동은 뚜렷한 내용의 차이와 그에 따른 활동방식의 차이를 가지는 각각의 세력으로 분화하게 됩니다. 분화는 여러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을 겁니다. 기존의 인적 전통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인적 전통을 무시하면서 사상을 좇아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이며, NL-CA 라는 큰 조직 구도 속에서 선택을 내리지 못하거나, 않고 있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구요.

- 대학과 노동현장 모두에서 새로운 운동이 이루어지는 사이,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어용 집행부가 교체되거나,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500여만명이 참여했던 6월 항쟁의 의미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7월부터 9월까지 계속되었던 노동자 대투쟁 역시 노동운동의 대중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동안 학생 출신 운동가들과 소규모 학습 소모임에서 비롯된 운동이 비로소 그 주인에게로 자리매김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 하지만, 노동자 대투쟁은 80년대 초반 노동현장으로 이전한 운동가들에게 다시 한번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자 대투쟁은 하나의 큰 물줄기였다기 보다는 수많은 작은 물줄기였고, 이제 겨우 5년 정도 되었을 뿐인 노동현장의 운동가들은 물줄기들을 하나로 모아내지 못했던 것이죠. 대중적인 투쟁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시키지 못한데 대한 고민이 다시 한번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거대한 투쟁의 물결은 그 해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가라앉게 됩니다.

- 노동자 대투쟁을 거친 후, 88년에도 노동자 투쟁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됩니다. ‘수많은 작은 물줄기를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로 모아낼 것인가’ 하는 질문은 운동가들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내에서도 이루어졌고, 그 성과가 90년 출범하는 전노협이라는 노동조합 전국조직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운동가들의 갈등이 채 아물기도 전에, 또 한번의 갈등이 찾아오게 됩니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고, 소비에트 연합이 해체한 것이죠.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대중투쟁 속에서 자리매김하지 못했던 사회주의 운동세력들은, 계속되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막연했던 정치적 전망이 사라지면서 활동을 중단하는 이들도 많았고, 70년대 학번을 비롯한 일부는 제도권 정치로, 일부는 기존의 정치적 전망을 한없이 낮춘 채 대중운동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인 ‘나’와 같이 “달라진 것은 없다” 며 기존의 활동 – 전국적인 전위정당의 조직 - 에 매진하는 이들도 있었구요.

- 이렇게 각자의 길을 선택하며 89년의 소용돌이가 어느정도 가라앉을 무렵인 91년,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이 있었습니다. 전투경찰, 해군함정, 헬기를 비롯해 육해공 도합 5만명의 군사병력이 동원되고, 노동자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 새총과 민주박격포로 무장해, 마치 전쟁터를 불사했던 현대중공업노조의 거대한 투쟁은, 80년대를 관통했던 노동운동의 상승을 마감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알려져있습니다.

- 주인공 ‘나’의 역정은 현대중공업노조의 투쟁을 마지막으로 끝이 납니다. 그 해 91년에 쓰여진 <사랑의 조건>은 이렇듯, 70년대 민주화 투쟁 80년 광주민중항쟁을 딛고 일어서 80년대를 풍미했고,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89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맞아 91년 현대중공업노조 투쟁에 쉼표를 찍는, 운동가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느새 15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90년의 전노협은 민주노총으로 전화했고,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는 물론이요 3김의 정치가 막을 내렸으며,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당이 탄생하여 버젓이 공개활동을 하는 등,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주인공 ‘나’가 이루고자 했던 ‘전국적 전위정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규모의 사회주의 조직들이 열심히 공개 비공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성과가 집약되고 있지는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 완전한 사회를 이루고자 했던 ‘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나’는, 80년대 투쟁의 역사가 저물어가는 울산의 바다 앞에 서서 “사랑과 혁명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미완의 시대 전부가 최고의 완결성을 가지는 것” 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변한 것은 완전한 사랑과 혁명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김진숙을 아내로 소유하려 하지 않고, 패배한 투쟁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내 김진숙과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인간 김진숙을 사랑해야 했듯이, 혁명의 주체 노동계급과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착취받고 노동하며 살아내는 노동계급을 담담하게 사랑해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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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8-2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중공업 노조도 이제 많이 변했죠. 투쟁않는다고 민노총에서 제명되고 거꾸로 비정규직에게 교묘히 떠넘기면서 과실을 회사와 공유하는 모델로 전환합니다. 오웰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노동자들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인간해방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끌어안고 많은 사람들이 불을 살랐지만 어느새 그 열정이 식어가면서 보이는 현실은 점점 차가와집니다.

sb 2006-08-2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엊그제는 12년 무쟁의라고, 한 전의경의 부모에게 감사편지를 받기도 했더군요. 정규직 노동자들은 쟁의 없이도 생존과 권리 보호가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만, 이면에는 하청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습니다. 민주노총에서 제명된 것은, 하청노동자 박일수씨가 분신했을 때, 현중노조 대의원들이 장례식장까지 난입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가로막았던데에 있습니다.
저는 열정은 두번째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에 앞서, 바로 이 시대가 노동자들을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이기는 싸움을 위해서 단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테니까요.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 - 박근혜 53년 인생 이야기
천영식 지음 / 북포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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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산적인 얘기를 주고받자면, 정치인 박근혜를 '박정희의 딸' 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접근방식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박근혜의 정치행적 속에서 박정희를 발견하는 방식이죠.

굳이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녀가 현실정치에 개입하고 있는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박정희의 딸' 이라는 수식어는, 당대표까지 역임한 주요 정치인 중의 한명이면서도, 별다른 정치적 이슈를 만들고 있지 못한 그녀의 책임인지도 모릅니다. (04년 415 총선에서 대중동원력을 과시했다든지, 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로 피습을 당해 병원신세를 졌다든지 하는 것들은 정치적 이슈에는 못미치는 사건들입니다.)
그녀의 정치적 경력과 내용의 모순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런 모순은 백수에게도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300여쪽이 넘는 그녀의 일화를 읽으면서도, 그녀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목표를 묻는 질문에 '나라사랑' 이라고 대답했다는 내용 아닌 내용을 둘째 치자면, "세력과 돈, 충성파로 포진했던 20세기 정치에 대한 거부" 내지 "고성장 경제정책, 안보동맹의 강화, 하향평준화를 막는 교육정책의 도입, 작은정부론" 정도가 고작이니, 이거 너무 싱겁다는겁니다. 이런 정도의 거대담론이라면, 그녀의 당적 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니까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면, 한나라당 내에서 당내 분파를 형성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나, '약간 샌님 스타일에다 이지적이고 개혁 지향적인 소장 그룹' 이라는 정치적 인맥에 대한 것, 등 좀 더 세세한 분석도 있습니다만, 올해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건데 꽤나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나 싶구요. 이런 점은 올해 말 부터 내년에 이르는 대선국면에서 좀 더 확연해 질 것 같습니다.

'박풍' 이라니, 연예계 에이전시 산업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흔히들 '3김 시대' 와 함께 인물 중심의 정치가 막을 내렸다고 말하지만, 인물이 중심인 것은 여전하되 인물이 형성되는 방식만 변화하는 것이죠. 과거의 인물이 그 개인의 정치적 행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면, 현재의 인물은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미니홈피나 16개에 달하는 인터넷 팬클럽(?)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죠.

형식만을 본다면, 문화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 집단의 영역에서 창조되고, 다시 개인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에이전시 산업일겁니다. 정치 역시, 정당이라는 집단의 영역에서 창조되고 그것이 정권 내지 대통령이라는 개인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라면, 그 또한 한국 정치의 진일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형식을 넘어 내용까지 닮아가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에 의해 내세워진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앞세우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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