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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올해 봄 <교수신문>이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단연 카를 마르크스(오른쪽 사진)의 <자본론>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만큼 자본론은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존재다. 하지만 자본론만큼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을 찾기가 드문 저작도 흔치 않을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일 노동운동사를 공부하고 1991년부터 동아대에서 강의해온 강신준(54) 교수(경제학·왼쪽)가 <자본>(1-1, 1-2. 도서출판 길 펴냄)이란 이름으로 마르크스의 주저를 다시 번역해 냈다. “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간 경제대국에 인류지성사의 최상급 고전 반열에 든 <자본> 번역본이 겨우 2개뿐이라는 건 초라한 일일뿐더러,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저문 지 20년에 가깝고 ‘퇴물’ 취급을 당한 마르크스가 강단에서조차 거의 사라져버린 우리 현실에서, 왜 지금 다시 <자본>인가?

마르크스 ‘자본’ 번역한 강신준 교수

“그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문헌적 정본 만들기인데, 이 땅에선 아직 제대로 된 독일어 원전 번역본이 없었다. 이론과실천사가 낸 <자본>은 이른바 ‘운동권 빵잽이’ 6명이 번역을 나눠 했는데, 그 번역초고 최종점검이 내 손에 맡겨졌다. 제1권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부분만 손봐서 냈고, 제2권과 3권은 내가 1990년까지 따로 번역했는데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영어판 중역본인 비봉출판사판도 한계가 있다.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은 매우 논리적이다. 영어로는 이 부분을 옮기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우리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노동운동에 문제가 많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최근 민주노동당이 둘로 쪼개질 때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주로 인적 갈등 때문에 갈라섰다는 점이다.”

‘과학의 문제’ 강조한 마르크스 

<자본>이 나온 배경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욱 문제가 된다. 19세기 유럽에서 번성한 노동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특히 1848년 혁명 때는 파리와 빈이 노동자들 적기로 뒤덮이고 정규군이 쫓겨날 정도였는데도 실패한다. 왜? “마르크스는 그때 결론을 내렸다. 세상의 변화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다, 과학적 논리를 토대로 삼고 과학의 지렛대로 무장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실패한다고.”

우리 노동운동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변혁운동의 최고급 활동이 정당운동이다. 유럽에선 최근의 민주노동당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강령 논쟁이 벌어진다. 강령이란 노동운동의 과학적 프로그램이다. 잘못됐으면 바꾸든가 삭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논란에도 강령 차원의 논쟁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진행된, 그 엄청난 동력을 지녔던 노동법 개정투쟁 때도 과학적 프로그램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것은 17세기 이전에는 없던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이상한’ 가난이었다.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가 왜 가난한가? 그것은 노동력 상품의 부등가교환 때문이며,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는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교환이 사회적 합의과정이라면 교환을 바로잡는 방법도 사회적 합의에 따라야 한다. 이 사회적 합의란 다수에 의한 결정을 뜻하며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행이다.”

촛불시위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짚어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정치부문의 민주주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성됐으나, 경제부문은 대혁명으로 권력을 쥔 부르주아의 독재가 확립됐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맛본 대중이 경제부문의 민주주의도 요구하게 되는데, 이 경제적 민주주의가 바로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 이전까지 독재 상태로 방치됐으나 대중의 저항과 내부모순 때문에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케인스 체제는 바로 이런 내부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과두체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임노동세력으로 구성돼 있는데, 원래 금융자본이 제일 힘이 세다. 케인스 체제는 이 세 세력이 힘을 나눠 갖도록 국가가 강제한 것이다. 2차대전 뒤 30여년간 이 체제는 번영을 구가했다. 그런데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수익률이 떨어진 금융자본이 균점을 깨고 자신이 우위에 서는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게 신자유주의고, 그것은 민주주의 붕괴와 독재 상태로의 복귀로 귀결됐다. 지금 한국의 촛불시위는 경제학적으로 보면 거기에 대해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가 확실히 발을 빼고 조정역할을 방기하는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추구한다. 촛불시위는 거기에 대한 저항이다.”

경제부분 과감하게 풀어 써

결국 노동운동이나 촛불시위나 불합리한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현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바로잡자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자본>은 그것을 위한 과학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게 강 교수 생각인 셈이다.

그는 사실상 독재를 합리화한 민주집중제 따위를 들고 나온 볼셰비즘을 반쪽 사회주의, 사이비 사회주의라 비판했다. <자본> 번역출간의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레닌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자본>엔 신자유주의에 대한 답도 들어 있단다. “노동자의 임금을 산업자본이 빼앗아 가고 산업자본의 이윤을 이자 형태로 금융자본이 또 빼앗아 간다. 이자라는 건 기생소득이다. 기생소득이 숙주소득을 넘어서면 붕괴한다. 그런데 우리 기업 중에 별로 이익을 내지도 못했으면서 빚을 내서 주주에게 배당하는 빚잔치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게 신자유주의다. 빚내서 배당하는 신자유주의는 애시당초 시한부 생명이었다. 우리는 그 다음을 논의해야 한다. <자본>은 그 다음 구상에도 필수적이다. 촛불시위 이후도 대비해야 한다.”

번역은 쉽게 읽히게 만든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특히 경제 부분은 과감하게 풀어서 우리식으로 옮겼다. “‘상품’ 등 제1권 앞부분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어서 딱딱하지만, 중반 이후 공장법 등 역사적 사례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생생하고 재미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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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여울 > 혁명과 인간의 삶-모든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서문: 혁명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1. 영국혁명 (1640-1660년) - 페터 벤데
2. 명예혁명 (1688-1698년) - 에크하르트 헬무트
3. 미국혁명 (1763-1787년) - 헤르만 벨렌로이터
4. 프랑스혁명 (1789-1799년) - 미하엘 바그너
5. 1830년 7월 혁명: 프랑스와 유럽 - 악셀 쾨르너
6. 독일혁명 (1848-1849년) - 디터 하인
7. 파리 코뮌 (1871년) - 베아트리스 부비에
8. 볼셰비키 혁명 (1917-1921년) - 디트리히 바이라우
9. 독일혁명 (1918-1919년) - 클라우스 쉐호벤
10. 멕시코혁명 (1910-1940년) - 호르스트 피쉬만
11. 중국혁명 (19세기 후반-1957년) - 위르겐 오스터하멜
12. 이집트혁명 (1952-1962년) - 마이클 손힐
13. 쿠바혁명 (1958-1959) - 니콜라우스 베르츠
14. 문화대혁명(1966-1976) 현대 중국의 정신적 외상 - 토머스 헤베러
15. 68혁명 - 아서 마윅
16. 이슬람 혁명 (1979년) - 파울 루프트
17. 동독의 89혁명 - 하르트무트 츠바르

부록
출전
저자 약력
해제: 근대세계와 혁명
옮긴이의 말

- '레볼루치오'(revolutio)는 중세와 근대초기까지도 천문학적 용어로 쓰였다. 행성들의 순환이나 규칙적인 회귀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14세기가 되어서야 정치영역으로 옮겨졌는데 이때에도 봉기와 시민전쟁이 예전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홉스가 청교도혁명이 왕정으 부활과 함께 순환운동으로 끝났으므로 '혁명'으로 파악했다.(7)

- 명예혁명이 되어서야 미래지향적 변화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게 디었다.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을 통해 지금의 의미가 구현된 셈이라 한다.

- 혁명은 국가를 전제로 했다. 정부의 인적구성변화 - 사회의 정치적 조직변화 - 소유관계만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포함된다.(9)

- 열악한 상황이 최고로 악화된다고 해서 항상 혁명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 위기에 뒤이어 호황이 오고 최초의 개혁들이 독재를 느슨하게 만드는 상태야말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13)

- 윌러스틴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근대 세계의 혁명이란 기껏해야 기존지배 계급의 자리바꿈이거나 성공적 변신, 또는 기존 국가간체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시켰을뿐이었다. 프랑스혁명도 러시아혁명도 국가간 체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503)

김동택

- 윌러스틴은 우리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존 체제를 연장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무너져야 하는 것이며 그럴 때 세계는 좀더 평등하고 분권화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 에코는 미래사회가 '포스트모던인가 또 하나의 중세인가'를 언급하면서 잘 조직화된 현대사회에서 사소한 사건은 전체로 파급되며 그 결과 중앙의 통제력은 상실되고 또 다른 중세, 즉 보다 평등한 분권적 체계로 세계가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504)

- 네그리와 하트, 윌러스틴은 공통적으로 붕괴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대안 운동과 전략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실체가 분명치 않다. 이것이 근본적 변혁을 야기할지, 기존 체제의 지배 계급이 또한번 성공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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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진행중)

얼마전 <레디앙>과 <프레시안> 등의 온라인 저널에서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바 있는데, 그에 대해 정리하면서 겸사겸사 몇 가지 생각을 얹어놓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개강이 코앞인지라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던 차에 마침 그 논쟁을 잘 정리해놓은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되니 고마운 일이다(하기야 같은 정리라 하더라도 내가 하면 무급이다, 곧 무가치하다!). 나는 나중에 얹어놓을 생각만 추려놓으면 되겠다.

한겨레(07. 03. 02)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 스탈린주의적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반자본주의 혁명 대안을 놓고 좌익 진영에서 심심찮게 제기되는 이분법적 질문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인터넷 매체 <레디앙>과 <프레시안>을 통해 트로츠키주의 문제가 몇 차례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21세기 사회주의 전망’ 이분논쟁

올해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90돌을 맞은 해다. 그 혁명의 주역 가운데 한사람인 레온 트로츠기(본명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스테인·1879~1940)의 혁명노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반자본주의 혁명 운동 안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됐다. 최근의 국내 논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책은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가 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아카데미 펴냄)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광범위한 경제학적 주제를 다루는 전반부에 이어, 후반부에서 트로츠키 사상을 재평가하고 거기에 근거해 ‘21세기 사회주의’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논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 뒤에 나온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 논쟁을 ‘트로츠키주의 대 자율주의’라는 구도로 바꿈으로써 불씨를 키우는 구실을 하고 있다(*나중에 적을 테지만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는 좀 부실한 책이다). 국내 트로츠키주의 단체 ‘다함께’의 운영위원인 최일붕씨가 쓴 이 책은 제1장에서 국내 자율주의 운동의 이론가인 조정환(갈무리 출판사 주간)씨를 실명으로 불러들여 대립지점을 명확히하고 있다(*본격적인 것도 아니고 각주에서 조정환, 황광우 씨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197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자율) 운동을 벌이면서 형성된 자율주의 운동은 혁명 주체, 혁명 전략, 혁명 전망에서 트로츠키주의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다.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1921년 러시아 크론스타트(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에 대한 평가다.

1917년 10월혁명 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내전이 휩쓸고 간 러시아는 산업시설이 거의 다 붕괴된 황폐한 땅으로 변했다. 10월혁명의 주역인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인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은 ‘전시 공산주의’ 상황에서 혁명의 유산을 막으려 가혹한 억압적 조처를 시행했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볼셰비키의 전위독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러시아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상트페트르부르크 요새지역 크론스타트의 수병 부대원 1만5000명은 1921년 3월 1일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하며 임시혁명위원회를 결성했다. 빵과 자유, 민주주의를 달라는 요구를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당시 트로츠기는 볼셰비키 정부의 군사인민위원(국방장관)이자 적군(붉은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크론스타트 진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혁명을 구하기 위한 피할 길 없는 유혈사태였는가, 10월혁명 이상의 파국을 알리는 조종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그런 주장은 트로츠키 자신이 먼저 내놓았다. 뒷날 국외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이 반란 진압을 ‘비극적 필요’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전은 휴머니즘의 학교가 결코 아니다. 이상론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은 언제나 혁명의 ‘극단성’을 비난한다. 그러나 ‘극단성’은 혁명의 본성 자체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혁명 자체는 역사의 ‘극단성’을 뿐이다.”

트로츠키주의자 최일붕씨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에서 크론스타트 반란을 백군(반혁명군)이 개입한 반혁명적 봉기로 규정한다. “만약 크론스타트 반란이 성공했다면, 그리하여 안 그래도 약화된 볼셰비키 정부가 타도됐다면 그 즉시 혼란과 그걸 틈탄 공산주의자 학살, 국외로 도주한 백군의 귀향, 그리고 마침내는 극우 독재의 수립이 그 자리를 메웠을 것이다.”

혁명 극단성 비난하지만 불가피

정성진 교수도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진압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쪽에 선다. “트로츠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크론스타트 봉기의 진압을 트로츠키가 직접 지휘했다면서 트로츠키의 잔인성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트로츠키는 비극이지만 크론스타트 봉기를 불가피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에 찬성했을 뿐이다.” 트로츠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현장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비판자들은 5·18광주항쟁에서 전두환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한다.

크론스타트 문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은 자율주의 진영에서 나왔다. 자율주의 운동과 흐름을 같이하는 책 <무엇을 할 것인가?>(워너 본펠드·세르지오 티슐러 외 지음, 갈무리 펴냄)는 크론스타트 봉기를 러시아 볼셰비키 독재에 대항해 10월혁명의 이념을 실현하려 한 ‘제3의 혁명’으로 묘사한다. 이 책은 크론스타트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신문에 쓴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노동계급은 10월 혁명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쟁취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좀더 심한 억압이다. 볼셰비키 정부는, 정치 위원과 관료들의 편안한 삶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국가의 유명한 상징인 망치와 낫을 총검과 감옥으로 바꾸었다.”

책의 지은이들은 트로츠키가 제시한 ‘영구혁명론’에 빗대어 “역사의 아이러니에 걸맞게, 영구혁명이론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존경받는 대표자인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이후로 혁명을 영구화하기 위한 가장 진지한 시도를 저지했다”고 트로츠키를 비판한다.

자율주의 진영에서 크론스타트 봉기가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 독재라는 전위 중심의 혁명이 아닌 노동자를 비롯한 피억압자 자신들의 자율적 혁명의 가능성을 봉기 참가자들이 보여주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가 아니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코뮨(공동체)으로써 그리고 자유롭게 선출된 자신들의 평의회(소비에트)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 권력의 원형을 제공했다.”

 

말하자면,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는 전혀 다른 혁명의 공식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볼셰비키 혁명과 볼셰비키 독재를 역사 발전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인정한다. 트로츠키는 이 혁명 과정의 주역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의 역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뒷날의 소련을 혁명의 배반이자 탈취라고 보기 때문이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트로츠키는 스탈린 일파와 벌인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볼셰비키당에서 제명당한 데 이어 국외로 추방당한 뒤로 스탈린의 소련을 ‘혁명을 배반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저주했다. 스탈린이 혁명을 배신했으며 권력을 강탈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이 빼앗아 파멸시킨 혁명을 원점으로 되돌린 뒤 거기에서부터 혁명을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스탈린 폐해 트로츠키 안에 내재

반면에 자율주의는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트로츠키 안에 벌써 내재해 있다고 본다. 러시아 10월혁명을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적 혁명이 아니라 볼셰비키라는 전위들의 독자적 혁명이었다고 보는 데서 이들의 관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10월혁명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하나라고 볼 수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된 혁명,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크론스타트 봉기는 볼셰비키의 독재를 뚫고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자기를 지배하겠다고 일어선 ‘혁명의 혁명’이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혁명정당이라는 전위를 중심으로 하여 혁명세력을 철저한 규율에 복속시키는 경향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율주의라고 할 만하다. 자율주의의 자율은 이렇게 외부에서 부과하는 규율, 다시 말해 타율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 타율이 근본적으로는 당이라는 조직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율주의 운동은 어떤 형태의 당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그렇다면 ‘어떻게 혁명을 이룰 것인가’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전통적인 혁명 도식을 따르면, 혁명세력은 당을 중심으로 하여 뭉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자에게 자율주의는 관념적으로 보일 것이고, 자율주의자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억압적으로 보일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3. 02.

P.S. 자칭 트로츠키주의자인 최일붕씨는' 크론슈타트 봉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크론슈타트 반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반란의 주동 세력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라고 본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상이한 계급 이해관계가 충돌한 것이엇다.(...) 1917년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인근 페트로그라드 공업 노동자들로 이뤄졌었다. 그러나 내전 동안 그들은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했다. 그래서 1921년 크론슈타트 요새는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들이 메우게 됐다. 크론슈타트 주둔 발트해 함대 수병들의 4분의 3 이상이 이런 농민 신병들이었다."(52쪽) 즉, 반볼셰비키 농민반란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트로츠키의 진압 책임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당시에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중이었다.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그가 크론슈타트에 가지 않은 이유는 노동조합 논쟁에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진압 책임자였다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순준히 지어낸 얘기다."(54쪽)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저자가 가장 많이 참조하고 있는 책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한 폴 아브리치(애브리치)의 <크론슈타트 1921>(프린스턴대출판부, 1970)이다.

  

정다신/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사회학연구소 연구원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216114040&s_menu=문화

다함께가 '국제사회주의자(IS)'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던 시절, 그들은 그나마 학계에서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이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성진에 대해 IS 그룹에 속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만 살아있는 지식인 분자'로 취급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이토록 정성진을 옹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관념론의 소산이자 자신들의 지주 격인 국가자본주의론을 자신의 조직원도 아닌 이가 풍부하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 분자의 입은 어느새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그 누구보다도 저들에게 힘을 실어 줄 이데올로그로 전화하여 칭송받게 됐다. 이번에 <프레시안>을 통해 제기된 논쟁에 이들이 이렇게 핏대를 세우게 된 이유도, 그 동안 타 정파나 집단들이 무시해 오던 다른 때와는 달리,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다함께가 신주처럼 모시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에 의해 발명된 국가자본주의론은 저들이 항상 자신들이 트로츠키 교조주의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애호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자신들이 비판에 열려 있고 심지어 트로츠키주의 그 자체까지도 비판하는 융통성 있는 활동가들임을 보여 주려고 애용하는 부분은 철저하게 클리프와 그 계승자들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교과서에 나온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정 역사를 왜곡하는가?
  
  이정구를 비롯한 다함께 그룹, 아니 저들이 암송하는 영국 SWP의 이데올로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모든 혁명을 국가자본주의 혁명으로 만들기 위해, 유일무이한 노동자 혁명이었다는 러시아 혁명을 계속 왜곡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늘 혁명 계급이 노동자 계급인지, 또 '무슨 무슨 주의'에 오염된 이들인지가 강조돼 왔다.
  
  노동자 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고 문맹에 가까운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무슨 주의에 물들고 무슨 주의자들인 양 과장, 왜곡하는 나쁜 습관은 이런 왜곡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시기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은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고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반 볼셰비키였다는 특유의 이분법 논리로 역사를 과장, 왜곡하는 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이전 수병들과는 다른 농민 출신 신병들이 주가 되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이정구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 운운까지 하며 이 점을 무슨 엄청난 일인 양 하고 있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나와 있는 당시 노동자 계급 주도의 수많은 반 볼셰비키 파업, 반란 등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말이다.
  
  페트로그라드에는 푸틸로프 공장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의 수십 배는 더 되는 러시아에 도시가 페트로그라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페트로그라드에는 노동자 계급 중에 상대적으로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 많았다. 그럼에도 심지어 최대의 볼셰비키 지지 기반인 푸틸로프 공장마저 잔혹한 전시 공산주의 기간 내내 반 볼셰비키 파업이 진행된 사실을 이정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이유를 주로 식량 부족에 있는 것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버릇도 영국 이데올로그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소비에트 선거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박정희까지 빗댄 부분을 보며 이정구가 진정으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일부 반 볼셰비키 세력에 철저하게 조종된 농민 출신 신출내기들의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당시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던 노동자 계급의 요구였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었다. 당시 푸틸로프 공장은 친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주도 하에 간신히 파업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외 수많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서의 파업은 이정구의 주장과는 달리,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에도 이어졌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때 내전은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종결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을 아사 직전으로 몰고 가던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고, 볼셰비키가 주장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비롯한 민주주의 약속은 파괴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을 비롯한 일련의 파업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지극히 정당한 노동 대중들의 항의 행동이었다.
  
  지지하기 애매한 집단마저도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다함께가 감히 굶어 죽어 가는 생존권과 관련된 항의 행동을 억지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나누어 한 쪽을 반동으로 몰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 당시 여타의 공장에서의 파업과 시위에는 볼셰비키 지지 노동자들의 볼셰비키에 대한 항의 행동이 즐비했다는 것만은 꼭 알아 두기를 바란다.
  
  이정구가 정직한 활동가이고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에서만의 일부 농민 출신 수병의 반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 외의 전 러시아에서까지 벌어졌던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반란은 정당했다. 진압 이후 볼셰비키가 전적으로 전시 공산주의를 폐지하고 수병들의 주장 중 중요한 부분인 농업과 가내 공업 등의 자유시장경제 요구 등의 맥락에서 시장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은 이정구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요구가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농민뿐 아니라 노동자들 역시 볼셰비키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완전한 흑백 논리로 이 당시부터 소련 붕괴 때까지 지속되었던 크론시타트 반란에 대한 거짓을 그대로 인용하여 크론시타트 반란을 왜곡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이기는커녕 스탈린주의의 교조에서 한 발 자국도 못 벗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크론시타트 반란의 주역들이 노동자 계급 출신이면 다함께 동지들은 또 무슨 이유를 댔을까? 혁명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 한 후진 노동자들, 멘셰비키 영향 하 노동자들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자의 군대화, 노동조합의 국가 기관화 등등 명백한 반사회주의적 조치들을 옹호하려거든 똑같은 맥락에서, 아니 맥락은 그만 두더라도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알고 주장하기 바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영국 SWP와 같은 외국의 이데올로그가 발행한 교재가 아닌 사료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며,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 대해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갖는 것이다. 영국에서 내려 온 거 그냥 아무거나 무조건 외지 말고 사료를 근거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영국 SWP의 이론은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가장 핵심적인 주장들과 거리가 멀다. 트로츠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고 자평하는 클리프의 주장만 절대적으로 따르는 다함께에 그들이 좋아하는 '~주의'를 갖다 붙이자면, 트로츠키주의자라기보다는 클리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하루라도 빨리 국가자본주의를 비롯한 관념론의 극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을 클리프주의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고 치장하는 데에도 조금 더 나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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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en.wikipedia.org/)

Alexander Gavrilovich Shliapnikov (1885~1937)

was a Russian communist, trade union leader and skilled metalworker.
러시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 숙련된 금속노동자였다.

Shliapnikov was born in Murom, Russia to a poor family of the Old Believer religion. His father died when he was a small child. Shliapnikov began factory work at age thirteen and became a revolutionary at age sixteen. He joined the Bolsheviks in 1903. He was arrested and imprisoned at various times for his radical political activities, including his involvement in the 1905 revolution. Shliapnikov left Russia in 1908 and continued his revolutionary activities in Western Europe, where he also worked in factories and was a devoted trade unionist.
그는 러시아 무롬(Murom, Russia)의 가난한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었다. 그는 13살 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6살에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1903년에 볼셰비끼(Bolsheviks)에 가입했고, 1905년 혁명에 연루된 것을 포함해, 그의 급진적인 정치활동 때문에 수차례 체포와 투옥을 당했다. 그는 1908년에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에서 혁명활동을 계속했고, 거기서에서도 그는 공장에 다니며 노동조합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Shliapnikov returned to Russia in 1916. He, Vyacheslav Molotov, and Petr Zalutskii were the senior Bolsheviks in Petrograd at the time of the February Revolution in 1917. More prominent figures such as Lenin, Zinoviev, Kamenev and Stalin were abroad or in Siberian exile when the February Revolution began. In 1917, Shliapnikov became a member of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Petrograd Soviet of Workers' and Soldiers' Deputies. He also was elected to chairmanship of the Petrograd Metalworkers' Union and later of the All-Russian Metalworkers' Union. He led negotiations of a wage agreement between Petrograd metalworkers and factory owners in 1917.
그는 1916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와 몰로또프(Vyacheslav Molotov), 짤루스끼(Petr Zalutskii)는 1917년 2월 혁명 당시만 해도 뻬뜨로그라드에서 고참 볼셰비끼 당원이었다. 레닌(Lenin), 지노비예프(Zinoviev), 까메네프(Kamenev), 스딸린(Stalin)과 같은 더 유명한 인물들은 2월 혁명 당시 해외에 있거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있었다. 1917년 그는 뻬뜨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뜨 최고위원이 된다. 그는 또한 뻬뜨로그라드 금속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되며, 후에 전(全)러시아 금속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된다. 그는 뻬뜨로그라드 금속 노동자들과 공장 소유주 사이에서 임금 협상을 이끌었다.

Following 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Bolshevik seizure of power, Shliapnikov was appointed Commissar of Labor. Lenin called for a Bolshevik dictatorship, which was opposed by some Bolsheviks. Shliapnikov supported a coalition government composed of left socialist parties, but he did not resign his post in the government, as some other Bolsheviks did.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vacuating industry from Petrograd, as the Germans approached in 1918. As Commissar of Labor, he helped draft important directives on workers' control of industry and nationalization of industry and he staffed government bureaucracies with staff from trade unions. In the summer of 1918, he went to the south of Russia on a mission to gather food for the population of the Bolshevik-controlled cities of central Russia.
이어진 10월 혁명과 볼셰비끼의 집권에서, 그는 노동인민위원으로 지명(was appointed)되었다. 레닌은 몇몇 볼셰비끼들이 반대했던 독재를 요구했다. 그는 좌파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된 연합 정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볼셰비끼들이 그러했듯이, 노동인민위원직을 사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8년 독일군이 공격할 때, 뻬뜨로그라드 산업시설을 소개하는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인민위원으로서, 그는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산업의 국유화에 대한 중요한 방향을 이끌었고, 노동조합 지도자와 정부 관료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1918년 여름, 그는 볼셰비끼에 의해 통제되는 중앙 러시아 도시의 인민들을 위해 식량을 징발하러 남부 러시아로 향했다.

In fall 1918 and continuing into early-1919, Shliapnikov served as Chairman of 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Caspian-Caucasian Front in the Russian Civil War. He also served in 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Western Front during the Civil War. During the Civil War, Shliapnikov began to criticize the increasing tendency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and Soviet government to rely on authoritarian measures to enforce policies towards industry and industrial workers. To Shliapnikov, denial of workers' right to participate in economic decision-making was a step away from the goals of the 1917 revolution.
1918년 가을부터 1919년 초까지, 그는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에서 Caspian-Caucasian 전선과 서부 전선의 혁명군사위원회에서 일했다. 내전 도중, 그는 러시아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정책을 강제하기 위해 권위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증가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경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노동자들의 참여권이 거절되는 것은 1917년 혁명의 목표와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Shliapnikov became leader of the Workers' Opposition movement inside the Russian Communist Party. Alexandra Kollontai was a mentor and advocate of the group, which was composed of leaders of trade unions and industry who were all former industrial workers, usually metalworkers. This movement advocated the role of workers, organized in trade unions, in managing the economy and the political party. The Russian Communist Party leaders succeeded in suppressing the Workers' Opposition and in 1921-1922 finally subordinated trade union leadership to the Party. In 1921, Shliapnikov was forced out of his elected post as chairman of the Metalworkers' Union.
그는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 운동(Workers' Opposition movement)의 지도자가 되었다. 꼴론타이(Alexandra Kollontai)가 모두가 (금속)노동자 출신인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노동자 반대파 운동의 조언자이자 격려자였다. 이 운동은 경제와 당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역할을 지지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노동자 반대파들을  억누르는데 성공했고, 1921~1922년 사이에 마침내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당에 복종시켰다. 1921년에 그는 금속 노동조합 위원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In 1922, Shliapnikov and some others from within and outside the Workers' Opposition, including Alexandra Kollontai, presented an appeal, called the Letter of the Twenty-Two, to the Communist International Executive, requesting that the Comintern help heal a "rift" within the Russian Communist Party between Party leaders and workers. Party leaders and Party-controlled media condemned the appeal. Two of the signatories of the appeal were expelled from the Party, but Shliapnikov, Kollontai, and Sergei Medvedev narrowly escaped expulsion.
1922년 그와 꼴론타이를 포함한 노동자 반대파 운동 안밖의 몇몇은 공산주의자 국제 위원회에 러시아 공산당에서 지도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균열을 치료해줄 것을 요청하는, '22인의 편지(the Letter of the Twenty-Two)'라고 불리어진 소원을 제출했다.(present an appeal) 당의 지도자들과 당에 의해서 통제된 언론은 이 소원을 비난했다. 이에 서명한 사람 중 2명이 당으로 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쉴라프니꼬프, 꼴론타이, 메베데프(Sergei Medvedev)는 가까스로 제명(expulsion)을 피했다.

Shliapnikov turned to writing his memoirs and held jobs in metals import and economic planning institutions. The Party Central Control Commission investigated him and Sergei Medvedev in 1926 and in 1930 for alleged factionalism in connection with the formation of oppositionist groups among workers in Baku and Omsk. In 1930, the Party Politburo forced Shliapnikov to publish a public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in writing his memoirs of the revolution. This was not the same as a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committed by him since the revolution.
그는 금속을 수입하고 경제 계획을 세우는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당의 중앙위원회는 1926년과 1930년, 바쿠와 옴스크(Baku and Omsk)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대파가 형성되었던 것과 관련하여 분파주의로 그와 메베데프를 조사했다. 1930년 당 정치국은 혁명에 대한 회고록에서 그의 정치적 오류를 공공연히 시인한 것에 대해 그를 처벌하기로 했다. This was not the same as a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committed by him since the revolution.

Shliapnikov was expelled from the Communist Party in 1933 and imprisoned in 1935 for fabricated political crimes. Charged under Article 58 of the Soviet Criminal Code, he did not confess guilt, nor did he implicate others. Nevertheless, he was found guilty, based on others' testimony, and he was executed on the 2 September 1937, during the Terror.
그는 1933년에 공산당으로 부터 축출되었고, 1935년 조작된(fabricated) 정치 범죄로 투옥되었다. 소비에뜨 형법(the Soviet Criminal Code) 58조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그는 유죄임을 시인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을 연루시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해 유죄로 결정되었고, 1937년 10월 2일에 사형되었다.

Shliapnikov was posthumously rehabilitated and restored to membership in the Communist Party in 1988.
그는 죽은 뒤에 복권되었고, 1988년 공산당에 의해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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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완종 <10월 혁명사>)

1920년 노동조합 논쟁

- 뜨로쯔끼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 : 노동조합 군사화, 지도부 교체
- 9차 당대회: 노동자 반대파(쉴라쁘니꼬프)에서 생산과 분배 등 경제영역의 모든 권리와 기능이 당연히 노동조합에 넘겨져야 한다고 주장, 뻬뜨로그라드 당 조직 뜨로쯔끼 비판, 민주집중파 테제(부하린, 라린, 쁘레오브라줸스끼) 제출
- 모스끄바 당 위원회 반박, 10인 강령(레닌, 스딸린, 까메네프, 지노비예프, 똠스끼, 깔리닌, 루주딱) 제출
- 뜨로쯔끼 입장 철회, 노동조합의 국가화 '정도'만을 논의
- 10차 당대회: 10인 강령, 부하린 + 뜨로쯔끼 초안, 노동자 반대파 토론 / 신경제정책 실시로 토론 무산
- 11차 당대회: 꼬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소원

노동자 반대파

- 선거에 의한 지도기관의 구성, 당 업무 및 쏘비에뜨 업무의 지방조직으로의 이관, 지방조직의 통제와 지도에 대한 모든 당원의 복종, 해당 선거민들의 동정에 관한 간부의 정기보고, 당내 비판의 자유 보장, 당 지도기관의 노동자화, 구성원의 정기적 교체
- 레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에 강제성을 거부하는 것은 미친 짓이오. 여기서 행정과 사업에의 관료주의적 접근은 필수적이오."
- 뜨로쯔끼: "그러한 방식의 운영은 비효율적이며, 경제적 측면에서 일을 모두 망쳐버리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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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의 '진짜 사회주의'

온라인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박노자 글방을 들르게 됐다. 최근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을 놓고 프레시안에서 벌어진 논쟁을 정리해두려다가 여유를 못 내고 있었는데('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문제'가 정해놓은 제목이다) 마침 그와 관련한 '만감'이 있기에 옮겨온다. '진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필자의 '사회주의'관을 내비치고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당신들의 러시아'인지라 박노자 교수의 러시아 이야기는 챙겨두게 된다. 원문에 오타가 여럿 되기에 교정해두었다.

박노자 글방(07. 02. 07) '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에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서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면은,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이 '만감'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07. 02. 19.

P.S. 단순하게 말하면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라는 대비 속에서 '트로츠키주의'와 '슬랴프니코프주의'의 차이를 읽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차이/대비는 제목에서 암시되는바, '사회주의 vs 진짜 사회주의'의 구도로 정식화될 수도 있겠고. 의미심장한 멘트는 맨마지막 문장이다.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필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러한 비극적 운명까지도 '진짜 사회주의'의 구성적 요건이 아닐까, 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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