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프레시안)

"지금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 기고] 21세기, 왜 트로츠키를 기억하는가?

2007-02-05 오전 9:01:41

정성진 교수의 새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트로츠키가 한국 사회에 주는 현재적 의미를 묻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은 정 교수의 저서에 대한 평가에 앞서 트로츠키의 삶과 사상이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주는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는 기고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편집자>

"너희는 이제부터 영원히, 너희가 비롯된 곳으로 돌아가라, 역사의 먼지 속으로!"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앞두고, 혁명에 반대하며 소비에트 회의장에서 퇴장하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를 향해 이렇게 장엄한 외침을 남긴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도 '역사의 먼지' 속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아니, 우리가 그를 그렇게 보낼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레온 트로츠키다.

지금 우리가 트로츠키를 돌아봐야 할 이유

최근에 그의 이름을 불러내 마르크스와 나란히 세운 책이 나왔다.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그것이다. 요즘 그 책에 대한 서평 탓에 좀 떠들썩한 것으로 안다. 나는 책을 아직 꼼꼼히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해 직접 언급하거나 논쟁에 뛰어들 처지도 아니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1917년 10월 혁명이 아흔 돌을 맞는 올해에 트로츠키를 다시 불러내는 두툼한 분량의 책이 국내 저자의 손으로 나왔다는 것은 일단 의미가 적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훑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더 생각났다. 바로 아무도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2006년이 1956년으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였다는 사실이다. 1956년은 어떤 해인가? 1956년 2월 25일 새벽,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의 폐막을 앞두고 갑자기 대회장이 봉쇄한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예정에 없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장장 일곱 시간에 걸쳐 계속 소개된 보고서의 내용은, 3년 전 죽은 스탈린 대원수의, '전 세계 노동계급의 영도자'라 불리던 그 사람의 (사실은 그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일파와 그 체제의) 죄상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제20차 당 대회의 스탈린 비판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 선언인 줄 잘못 이해한 헝가리 민중이 그로부터 39년 전 10월의 러시아 민중과 똑같은 포즈로 역사의 무대 위에 나섰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은 탱크로 대답했다. 이른바 '노동자 국가'에서 일어난 노동자·민중의 봉기, 헝가리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조국의 탱크에 유린당한 헝가리 민중을 보며 가슴이 찢어진 서유럽 사회주의자는 결국 1956년 말부터 공산당을 집단으로 탈당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른바 '신좌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연초에 있었던 흐루시초프의 지루한 연설보다 더 정확히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를 꿰뚫고 또 한 번의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을 재발견한다. 착잡하지만, 작정하고 낸 그 책의 제목도 다시금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배반당한 혁명>(김성훈 옮김, 갈무리 펴냄)이 그것이다. (편집자 : 트로츠키는 1929년 스탈린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암살 위협을 피해가며 터키,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1936년 이 책을 완성한다. 1937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결국 1940년 트로츠키가 멕시코에서 비극적으로 암살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바로 이 1956년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작년에 '스탈린주의 대 제국주의'의 구도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 한반도에서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와 연관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왕년에 미국과 소련이 벌이던 핵무기 개발 경쟁 비슷한 일이 재연됐고, 남한의 좌파정당이 북한 정권과의 관계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아니, 지금도 와병 중이다). 이때마다 내가 주문처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름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1917년의 승리를 통해 한 세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뿐만 아니라, 1956년의 패배를 통해 여전히 우리와 동시대인인 저 트로츠키 말이다. 그리고 그가 반백의 나이에 망명지에서 새롭게 시작한 투쟁을 새삼 다시 돌아보았다.

"관료주의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의 회복, 그리고 노동조합의 부활을 의미한다. 산업 활동에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이것은 근로 대중의 이해에 들어맞도록 기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경제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함으로써 관료주의적 오류와 좌충우돌 때문에 생겨나는 비용 전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궁전, 새로운 극장, 전시용 지하철 등 실속은 없으면서 비용만 많이 드는 사업들은 순위에서 노동자 주택단지 건설에 밀려날 것이다. (…) 군대 내의 계급은 즉시 철폐될 것이다. 훈장의 번쩍거리는 쇳조각은 용광로 속에 던져질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 중)

이 짧은 문장이, 지금 이 사회에서 똑같이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 안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미래의 절실한 과제일 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종파주의'의 딱지를 붙일 이유가 될 수 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인 글월이 아직도 이렇게 격한 찬반 대결을 낳는다면, 이런 현상을 '동시대성'의 징표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 아직도 이렇게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꼭 그만큼 트로츠키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적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이기를 사양하는 이유

그럼 이 시대의 좌파는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뒤늦게라도 트로츠키'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운동을 만들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건 아니다," 이렇게 답하겠다. 트로츠키주의는 우리의 '교과서'가 아닐 뿐더러, 우리에게 새삼 또 다른 교과서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 속 혁명 사상의 '위대함'은 그것의 '해방을 지향하는 힘'에서 나온다. 가령, 우리에게 레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혁명의 공식과 상투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잡동사니를 헤치고 혁명의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한데, 그 '레닌'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건 '레닌주의'는 정작 또 다른 공식과 상투어로 변질하곤 했다.

트로츠키의 경우 이 반전은 좀 더 희극적인 양상을 띠었다. 한평생을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현실에 대한 창조적인 돌출로 일관했던 트로츠키 자신과는 정반대로,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지루하고 번잡한 교리 문답과 스콜라적 논쟁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한계를 돌파하기에는 자기만족적이기만 했던 소규모 정파들의 가족 멜로 드라마였다. 지금도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 들어가서 영어로 '트로츠키주의(Trotskyism)'를 검색해보면 나라마다 족히 열 개 아니 스무 개는 넘는 무수한 트로츠키주의 정파를 찾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애초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갈라져서 지금은 서로 어떤 심오한 차이를 갖는지조차 확인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굳이 이런 역사까지 외국 것을 수입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먼지' 속으로 돌아가야 할 것들 중의 하나일 뿐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간판을 내건 이론가나 활동가의 무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일 테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 나라 안에만 붙잡힌 시각으로는 그 한 나라의 변화마저 이뤄낼 수 없다는 각성과 한반도 안에 존재하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와 모순을 돌파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동안 우리는 그 각성과 용기를 일깨우는 상징으로, 평생을 현실의 문제에 대한 각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로 일관했던 트로츠키, 그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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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가 죽어야 트로츠키가 산다" 
[이재영 기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읽고
 

2007-01-29 오전 10:40:13    

책읽기는 즐거워도 책에 대한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책을 드는 순간부터 책읽기가 숙제가 되어 버리니, 소란스런 지하철이나 쾌적한 화장실에서 가끔 책 꺼내 보는 소소한 재미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책 펴두고 밑줄 긋는 고역이 시작된다. 더군다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펴냄) 같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제대로 읽는 데만 족히 반년이 걸릴 거리이다. 언론 편집인의 시간관념이 그런 '긴 시간'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 아닌 '책 소개'를 겸한 개인적 '단상'이다.

경제사상사에 대한 고급 읽을거리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첫 번째 장점은 그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간 한국에 트로츠키주의를 소개한 이들은 크리스 하먼,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이 영국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국 SWP 당원에게 트로츠키가 갖는 오늘날의 의미는 한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간 이렇게 영국 SWP 당원의 눈으로 해석된 트로츠키를 소개받아 온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정성진의 책은 그간 공간적, 시간적 번역을 따로 해야 했던 독자의 수고를 덜어 준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또 다른 장점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다르게) 트로츠키에 시선을 온전히 고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이 책(1~3부)은 경제사상사에 대한 국내외의 최신 해석을 종횡무진 다루고 있다. 리카도, 마르크스, 제2인터내셔널, 레닌, 월러스틴, 브레너, 네그리는 물론 장상환(경상대 교수), 이병천(강원대 교수), 신정완(성공회대 교수)도 언급된다. 19세기 이래 정치ㆍ사회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던 경제이론을 비판적으로 일별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이 책을 "대학 학부 수준에서 정치경제학 기초를 이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쟁점들을 공부하는 '고급 정치경제학' 과정 또는 대학원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과정의 교재"로 권하는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책 제목만 보고 한국 경제에 대한 정치한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을 기대했던 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부지런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영구군비경제론'이나 '장기파동론'의 방법 틀을 이용해 한국 경제를 분석한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펴냄)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가 계승할 트로츠키주의?

총 4부로 구성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본격적으로 트로츠키가 언급되는 것은 맨 마지막 제4부의 네 장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트로츠키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의 눈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성진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한 토니 클리프의 생애를 되짚는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영국 SWP의 창당을 주도한 클리프는 20세기 트로츠키 추종자의 투쟁과 분열의 핵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정성진은 클리프의 생애를 통해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이론과 실천을 일별함으로써 이른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계승해야 할 트로츠키주의를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마지막 장(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는 이렇게 도출된 트로츠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대안 경제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이 '참여계획경제'는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김익희 옮김, 북로드 펴냄) 등의 논의에서 따온 것이다. 정성진은 이 15장에서 최근의 참여계획경제의 논의에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적 비전이 아닌) 스탈린주의적 편향이 엿보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비판은 책 전체에 걸쳐서 한결같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현실과 맞지 않는 과장이 적지 않아 눈에 거슬리곤 한다. 그 중 몇 개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는 (…) 차베스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이고 그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언급은 영국 SWP와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사회주의자들 안에서나 그렇지 세계 진보 운동의 최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황 파악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또 어떤가?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인식도 자의적이다.

바로 정성진이 그렇게 적대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비판을 받는 대상이 이미 '~주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온갖 흐름에 대해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 식의 비판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도 의심스럽다.

'계획경제' 집착한 스탈린의 재탕?

물론 진보학자들이 거시적 변혁 전망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비판은 타당하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이론가 장상환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확한 정보 수집의 불가능과 동기 유발의 어려움, 개인의 개성적 발전의 저해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장상환의 '솔직한' 고백에는 사회주의를 일종의 경제학적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하려는 욕망이 보인다. 즉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제거된 계획경제만 가능하다면 사회주의가 가능할 텐데, 하는 식의 아쉬움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정성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살펴보자.

"정보화의 핵심인 네트워크 경제의 발전에 따라 아래로부터 참여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20세기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11장)."
"가령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면, 이를 수집 분석해 전국적 및 전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15장)."

이런 정성진의 언급은 무척 당혹스럽다. 그가 되살리려고 하는 트로츠키뿐만 아니라 역사 속 대다수 사회주의자는 계산 가능성과 같은 요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배경, 그 배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설 정치적 주체의 역동적 형성을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역동적인 흐름을 계산을 통한 계획경제의 실현과 같은 식으로 곡해한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가 아닌가?

사실 이것은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트로츠키 역시 정성진이 '경제주의'로 후퇴했다며 비판한 레닌의 신경제정책(1921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을 "퇴각이되 항복은 아니"라며 과도 단계로 인정하고, 그 과도기가 "한 세기 또는 반세기 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측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신경제정책은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 할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정성진이 얘기하는 '트로츠키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정성진의 책 곳곳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스탈린주의'적 문법이 보인다.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배분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신속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귀결될 것이다(15장)." 트로츠키의 경제 이론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고, 잘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의 '트로츠키'를 '스탈린'으로만 한 번 바꿔보라. 스탈린이 그토록 강조했던 '국가사회주의만 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라는 인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사가 그리 잘 풀린다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 정도로는 21세기 한국 사회 진보 이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 정성진은 이 책의 원고를 '다함께'에 보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IS 경향의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다함께는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다. 나는 한국에서 이들이 과연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들이 트로츠키를 잘 알고 자주 인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정치 일정 때마다 트로츠키가 살아 있었더라면 비판을 넘어 혐오해 마지않았을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닌,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다. 또 현실 정치인으로서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평의회의 자율성에 반하는 결정과 실천을 했다. 내가 굳이 트로츠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걸출한 혁명가였던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교과서의 문구를 신봉하는 것보다는 트로츠키의 실천적 굴절을 연구하는 것이 트로츠키가 꿈꾸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정성진의 이 노작을 끙끙대며 읽은 후, 마음 한 칸이 개운치 않은 것은 과연 나 혼자뿐일까? 

이재영/민주노동당 前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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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심사인가?"
[이정구 반론] 이재영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서평에 부쳐

2007-01-31 오전 9:27:21

정성진 경상대학교 교수가 펴낸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도서출판 한울 펴냄)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마르크스주의를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다. 정 교수는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오면서 특히 트로츠키를 매개로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을 꾀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이 책은 이런 정 교수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된 것이다.

지난 29일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이 책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트로츠키주의를 지렛대로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하려는 그의 노력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정 교수도 트로츠키주의를 '만능'으로 보는 오류를 보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 전 실장의 서평에 대해 민주노동당 당원 이정구 씨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인 다함께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씨는 "이 서평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목조목 이 전 실장을 반박한다.

<프레시안>은 정 교수의 새로운 책에서 촉발된 이번 논쟁이 한국의 새로운 진보 담론과 한국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유의미한 토론으로 전개되길 바라며 이 씨의 반론을 소개한다. 앞으로도 생산적인 논쟁이 이어질 경우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정성진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쓴 이재영의 글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편파적이고 부당한 깎아내리기, '아니면 말고'식의 억측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부터 살펴보자.

이재영은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당시 트로츠키는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 중이었고,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심지어 그 당시 트로츠키의 직책은 군사 분야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적군 사령관이 아니라 당의 전쟁문제 정치위원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시 혁명의 최정예 부대였던 크론시타트 수병과 1921년의 수병은 계급 구성이 달랐다. 1917년의 수병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페트로그라드의 공업 노동자로 구성돼 있었고 내전 동안 혁명을 방어하며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1921년의 수병은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이었다.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은 반혁명 위협이 사라진 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요구는 반혁명 세력의 복귀를 부르는 신호나 다름없었기에, 볼셰비키가 이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백군과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계급들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반혁명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비극적 결정이었고 불가피한 폭력이었다.

사회주의는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

그러나 이재영의 억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다고 힐난하지만 오히려 그런 식의 근거 없는 비난과 낙인 찍기는 그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이재영의 서평은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 동안 스탈린주의(NL과 PD)와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 등)에 맞서 트로츠키를 지렛대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새로운 대안으로 구체화하려는 그의 노력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성진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논의 과정, 그리고 잠정적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성진의 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재영이 찾아낸 이 책의 장점이라곤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이다. 그의 글을 따라가며 반박해보자.

이재영은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가 (…) 사회주의"라는 '상황 판단'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 안에서나 그렇다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그도 언급했듯이,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 세계사회포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대안 사회를 논의하는 주제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재영은 정성진이 참여계획경제에 대한 논의를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에서 가져왔다고 폄하하고 싶겠지만, 앨버트 또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논객 중의 한 사람이다. 1999년 시애틀 시위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반자본주의 운동과 남미의 반란에 고무된 사람들은 오직 IS만이 아니었다. 다양성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태주의자들, 노조원들, 자율주의자들 등이 반자본주의 운동에 동참했고, 또 남미의 격변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이런 운동의 성과 덕분에 세계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체제와 시장경제가 아닌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옛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민주노동당이 등장했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다르지만, 한국 사회의 대안 사회 모델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계획경제의 가능성 모색해야

이재영이 계획경제의 불가능성을 반박하는 정성진의 주장을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산 논쟁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 이와는 무관한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재영은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사실 정성진은 바로 이런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최근 세계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는 앨버트나 팻 데바인 등의 참여계획경제를 원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이루지 못하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는 진보진영에 속하는 많은 사람에게 분명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생산과 투자를 전국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계획하는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조정 메커니즘은 어떨지를 논의하는 것은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이고 연구 대상이다. 또 참여계획경제 논의는 적어도 시장과 계획의 결합이나 시장의 활용을 담고 있는 시장사회주의와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이재영은 시장이냐 계획이냐 하는 논의에서 불쑥 사회 변화의 주체 문제를 끄집어내고는 정성진을 스탈린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어느 곳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투쟁이 없는 계획경제의 청사진만으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 않다.더욱이 이재영은 스탈린식 "계획경제의 실현"을 레닌과 트로츠키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신경제정책을 들고 있다. 즉 레닌과 트로츠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신경제정책을 정성진이 경제주의라고 비판했으니, 트로츠키 자신과 정성진이 말하는 트로츠키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재영의 논법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뒤 앙상한 뼈만 남은 것을 두고 '같은 뼈조각이니 사람과 원숭이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동자 국가가 안팎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한 신경제정책을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한 채 위로부터 내리는 일방적 지시에 따른 '계획' 경제(사실 계획경제라기보다는 지령경제라는 말이 더 맞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트로츠키에게도 약점과 실수가 있었고 또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한 소련의 진압을 옹호하거나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한 중국 지배자들을 옹호한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자기해방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수를 보존하고 후대 사회변혁 운동가들에게 전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정성진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함께 한미 FTA 반대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한편, 이재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인 '다함께'가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린다며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주장했다. 이재영은 진지하지 못하게 "추문" 운운함으로써 마치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면서도 이를 간접화법으로 표현해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함께가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사실과 북한 지배자들의 억압에 반대하고 탈북자들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남한의 범자민통 동지들은 대체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 운동의 일부다. 다함께가 이들의 전략과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다함께는, 이재영의 주장과 달리, 트로츠키가 말한 공동전선 정신에 부합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정치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쑥덕공론을 펼치거나 지지하고 연대해야 할 운동을 그 지도 세력의 정치사상을 핑계되며 지지하지 않는 종파주의가 진정한 문제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이재영의 서평은 비판이 아니라 근거 없는 중상과 비방일 뿐이다.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 상충되는 정치적 노선들이 존재하며, 이들 간의 비판과 토론은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으로 존중되고 고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재영 씨의 서평은 이와 같은 진보진영 내부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기초한 비판이 아니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식의 비방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이는 진보진영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를 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진보 학계에서 정말 오랜 만에 나온, 또 오랜 기간 숙성된 역작임은 이재영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영은 이 노작을 비판하려면 우선 시간을 갖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비판을 할지라도, 지금 이 서평처럼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는 트로츠키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며 너스레를 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주의 혹은 케인스주의의 입장에서 '다함께'에 대해서든 정성진에 대해서든 인식과 대안에서의 차이와 논리적 비판을 분명하게 제기했더라면, 21세기 우리나라 진보의 대안 모색을 위한 토론의 발전에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정구 / 민주노동당 당원ㆍ다함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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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하나…훈고학은 이제 그만"
[반론]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2007-02-06 오전 9:50:3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트로츠키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실장을 지낸 이재영 씨와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 단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한 차례씩 주고받은 논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 이재영 씨가 다시 재반론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이번 글에서 "이정구 씨의 반론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와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이 많다"며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좀 더 솔직하게 담았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트로츠키, 레닌,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훈고학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도 던지고 있다.

<프레시안>은 트로츠키의 한국적 수용을 둘러싼 이번 논란이 현재 한국 진보 세력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한 지표라고 판단해 기고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없다

'다함께'의 이정구는 내가, 트로츠키가 크론시타트 반란을 파괴했다고 비판한 것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을 잘 알지는 못한다. 잘 모르는 내가 알고, 잘 아는 그가 모르는 사실 몇 가지만 확인하자.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외지에 출타 중이었으며, 군사령관이 아니라 '당 전쟁 정치위원'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업적 역시 대부분의 전투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야 한다. 반란이 진압되기 며칠 전인 3월 5일, 트로츠키는 국방 인민위원 자격으로 크론시타트 수병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통첩했는데, 이 일도 타자병이나 전신병의 책임이지 트로츠키의 책임이 아니라고 구차하게 변명해 보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1980년 5월에 전두환이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니다. 나는 혁명가 트로츠키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있다.

이정구는 '트로츠키가 진압하지 않은' 크론시타트 반란을 달가워하지도 않는다. 안타깝지 않은가? 트로츠키가 현장에 있었다면, 더 많은 치적을 쌓았을 텐데. 이정구는 반란이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고, 반란자들이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의 제거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도 거짓이다. 그 해 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 이에 볼셰비키 사병 당원의 3분의 1이 공식 탈당하여 봉기에 동참했다.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유언비어는 국외에서 밀류코프(Miljukov)가 만들어낸 것이고, 반란자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연장선에서 "소비에트에서의 선거"를 주장했다. 이정구의 러시아 혁명 얘기는 역사 날조다.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두고 이재영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운운하는 것은 트로츠키의 ABC에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노동자 파업을 봉쇄한 계엄령 철폐, 사회주의자 석방, 집회의 권리,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요구로 내걸었다. 이게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트로츠키의 ABC'는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조금 안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노동조합의 자주성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계급의 생산적 산업조직은 매우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어떠한 과제일까? 그것은 물론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여 국가와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휴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조합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조직이며, 종래의 노동조합과 다를 뿐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혁명적 노동조합과도 다르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중)

혁명과 내전기의 상황에서 볼셰비키와 트로츠키가 옳았는가, 노동자 반대파가 옳았는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민주주의의 최고양식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차원에서 당시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한 일은 카니발리즘에 가깝다. 그래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던 것이다.

"인민위원 지배 타도! 권력 인수 당시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3년 전 우리는 '당신들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당신들의 대표를 소환할 수 있고 당신들은 새로 소비에트 선거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크론시타트에서 당으로부터의 압력이 없는 새 선거를 요구했을 때 새로 부상한 트레포프 트로츠키는 이렇게 명령했다. 총알을 아끼지 말라!"

민주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천박한 태도는 차베스에 대한 돈독한 애정으로도 확인된다.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고 싶기보다는 그가 입법권까지 독점한 것이 걱정된다. '사회주의'나 '반미'를 내걸었다고 열광할 필요는 없다. 그런 군부 쿠데타 정치인은 나세르 이래 수없이 많았다. 국유화나 미국과의 긴장이라면 단연 박정희를 꼽는 것이 옳다. 차베스의 실험은 페론보다 훨씬 덜 진지해 보인다.

딱지 붙이기는 이제 그만!

이정구는 "이재영은 (…)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듯하게 말"했다고 타박한다. 그런데 바로 몇 줄 아래에서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라고 반문한다. '야합'이든 '연대'든, 했다는 말인가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재영의 다함께 비판에는 안타깝게도 (…) 분파주의가 엿보인다"고? 다함께가 당당하고 분파적이지 않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것은 "국내외 보수언론조차 (…)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도"했다고 뿌듯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는가를 스스로 되짚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 조상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 테니, 다행스럽다.

물론 다함께는 옳다. 옳기 때문에 옳다. 옳은 조직이 하는 일이므로 누구와 놀든 그것 역시 옳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정성진 역시 충실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다함께의 이 같은 철학 방법을 따른다. 정성진이 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가 청산되지 않은 포스트스탈린주의라 규정할 때 그런 방법론이 가장 빛을 발한다.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논하면서도 스탈린에 반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스탈린주의를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포함시키는데, 나는 이것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뿐이다. 올바른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로 인정했으므로 포스트스탈린주의다! 자율주의는 왜 또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이정구는 "정 교수의 책을 조금만 훑어 보아도 (…) 풍부한 논거에 입각한 논리적 비판을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내해주는데, 그곳 어디에서도 자율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관계에 대해 단 한 줄도 설명돼 있지 않다. 케인스주의에 대해 정성진은 이렇게 말한다. "진보 진영의 케인스주의로의 경도는 (…)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스탈린주의적 뿌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하면서 케인스와 같은 개량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이들과의 연합을 도모했던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런 논박은 모리스 돕이 케인스 비판에 비적극적이었던 데 대한 증명일 수는 있지만, 장상환, 신정완, 이병천 등 한국의 '케인스주의자'를 비판하는 논거는 못 된다. 대입논술에서 이런 주장은 '논리 비약, 논거 부적절'이라 채점한다.

훈고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투쟁하는 당대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는 생산민주주의를 주장한 노동자 반대파에 대항하여 '지령 관료제'를 옹호하였고, 노동조합을 군대처럼 통제하기를 희망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트로츠키주의자'는 그것을 보지 않는다.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 고르바쵸프가 내건 "다시 레닌에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이 경향의 시초이다. 모든 죄과를 스탈린에게 뒤집어씌우고,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자 했던 이 발상은 마르크스 이래의 후계자들에게서 오도(誤導)와 왜곡보다는 계승이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스탈린에서 레닌으로, 레닌에서 마르크스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파산하고 만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향에 아직도 둘러싸여 있다. 기존 사회주의 실패의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추정되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의존,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를 대립시키고 후기 마르크스를 취사선택하는 알튀세르의 방식, 그리고 유행하는 외래 사조(思潮)를 직수입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천박한 상업주의. 그러나 우리의 실패가 상당 부분, 현실 적합성에 대한 주체적 검증 없는 차용(借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더욱 중요하게는 진보사상 또는 진보운동이라는 것이 특정 사상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분리 곤란한 게슈탈트적(Gestalt的) 거대한 총체라는 점을 되짚어 볼 때, 특정한 이론적 권위로의 도피는 잠시의 모면책일 수는 있어도 진보사상 본래의 목적인 대중 조직, 국가 운영에 기여하기는 어렵다.

"모건 스탠리의 2004년 4월 26일 민주노동당 방문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당이 직면하게 될 두 가지 시험대, 즉 시장과 대중 투쟁에 대한 개량주의자의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국유화 계획'을 묻는 모건 스탠리의 물음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인식, 『다함께』 30호, 2004)

개악보다 개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는 분명히 '개량주의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2004년 4월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다함께는 그 때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현재는 있는가? 다함께는 개량주의자인가? 국유화는 카페 혁명가의 낭만이다. 혁명을 준비하는 정당의 정책실장이라면 어떤 이유로, 어떤 기업을, 어떤 시기에, 어떤 방법을 통해 국유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국유화를 되풀이하는 데 멈춰서는 안 된다. 그의 책상 위에는 국유화 법률 공포안과 재정 충당 계획, 정치적 경제적 프로세스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의 민주노동당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가질 필요도 없는 당이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있어 우리는 실천의 문제에서 이론상의 문제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여 대한민국을 개조할 날이 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물론은 다른 철학 체계들과는 달리 결코 자기완결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여러 과학들과의 연결에 의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물질 생산의 후진성은 그리스 철학을 명민한 추측으로서만 긍정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진보적 원칙과 몇 가지 과학적 발견의 '절대적 구성'일 뿐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유물론은, 유물론의 내용을 채울 과학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나마 성과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물론 실현의 관념적 과도기였다.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

후진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마르크스주의의 얼굴을 덮고 있던 카리스마 가면이 벗겨졌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에 접근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다함께처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Return to Marx)"가 바른 길은 아닐 듯 하다. 마르크스로의 복귀 또는 그의 수많은 문헌에서 그럼직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고순도의 결정을 얻기 위해 알코올 램프의 불꽃을 돋우는 아편쟁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 짓은 마르크스 훈고학(Marxolgy)이지,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아니다. 체제가, 매순간마다 재생산되는 물질과 의식의 최후 종합이라는 점에서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모두를 안다.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 J. Gould)는 진리를 찾는 도상에서 인류가 지표 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적절한 가르침으로 코코란 선장의 말을 인용한다. "아직 멀었다."

이재영 /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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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사민주의' 비행기로는 절대로 날 수 없어"
[이정구 재반론] 지금 진보 세력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2007-02-12 오전 9:14:1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출간을 계기로 트로츠키가 21세기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소개된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의 반론에 대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재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이재영 위원이 낡은 마르크스주의(트로츠키주의)에서 벗어나자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진보 세력의 혁신은 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편집자>

누가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재영은 내가 "역사 날조"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그런지 크론시타트 반란 문제부터 살펴보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과 그 진압은 우익,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자, 아나키스트들이 애호하는 쟁점이다. 이 사건이 볼셰비키가 자기 자신의 지지자를 공격한 대표적 사례이자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레닌ㆍ트로츠키 정치와 스탈린 공포정치의 연속성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해 주는 호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재영은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크론시타트 반란자들 대부분이 '농민 신병'이라고 말한 것은 실은 크론시타트 반란 연구의 고전인 <1921년 크론시타트>의 저자이자 반란군에 호의적인 아나키스트 역사가 폴 아브리치였다. 최근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도 이 통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재영은 크론시타트 반란 직전인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고 주장하면서 크론시타트 반란을 마치 '제3의 노동자 혁명'처럼 미화하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아브리치에 따르면,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은 마무리되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반란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란 진압에 동조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도 크론시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이 반란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실, 내전 말기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것은 주로 식량 부족 때문이었는데, 이들이 식량 배급을 더욱 악화시킬 게 뻔한 '곡물 징발 중단'을 요구했던 크론시타트 반란을 지지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이와 관련해, 이재영은 당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다"면서, 그 증거로 "총알을 아끼지 말라" 운운한 <크론시타트에 관한 진실>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재영은 그 인용문을 쓴 것은 '노동자 반대파'가 아니라 크론시타트 반란 지도부인 '임시군사혁명위원회'인 것 정도는 알고나 인용했어야 했다. 이재영은 자신이 크론시타트 반란군과 함께 노동자 민주주의의 구현체로 애지중지하는 '노동자 반대파'조차 크론시타트 반란 사태가 터지자 당시 10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반대파들과 함께 투하체프스키의 진압 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어야 했다.

이재영은 또,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내 주장도 "거짓"이며 "역사 날조"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볼셰비키와 공산당에 호의적일 리 만무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반란군이 "경제 개혁 이외에도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와 (…) 공산당 독재의 종식 (…) 등을 요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반란군은 군대, 공장 등에서 볼셰비키 기구들을 폐지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크론시타트 함대에 있던 볼셰비키 정치위원 등 수백 명을 체포 구금했다. 물론 반란군이 내건 15개 강령에 "소비에트 선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 반란군들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어떤 초보 운동가도 어떤 조직이나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그들이 내건 슬로건만을 갖고 판단하지 않는다. 진지한 역사가는 박정희와 공화당이 "한국적 민주주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해서 그들을 민주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다름 아닌 그 크론시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조차 반대했던 반란이고, 1920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에 맞서 당시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던 '노동자 반대파'까지 무력 진압에 동참한 반란이다. 그런데 그 반란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한 '제3의 노동자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재영의 주장처럼 크론시타트 반란군이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요구하고 실현하려 했다면, 도대체 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 로마노프 왕조의 복귀를 노리는 러시아 왕당파들,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이 모두 크론시타트 반란을 지지했을까? 그들이 언제부터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된 것일까?

이재영의 주장은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따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발로다. 예컨대 이재영은 내전 시기 트로츠키가 제기했던 노동자의 군대화나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 주장과 관련해 이 주장이 제기된 역사적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당시 출판된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구절(트로츠키 자신은 곧 자기비판을 하며 이 주장을 철회했다)을 인용하면서 마치 트로츠키가 내내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한 사람인 양 암시한다.

비판 대상에 대한 무지

이재영은 트로츠키가 1920년대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서 당내 민주주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투쟁하고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는 다당제를 주장한 사실(이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잘 서술되어 있다)은 피해 간다.

다함께는 물론 정성진도 트로츠키 사상의 적잖은 부분에 대해, 또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현재 같이 뜻을 같이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이론과 정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재영은 이 역시 전혀 "보지 않는다". 이재영의 억측과는 반대로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만큼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먼 것은 없다. 다함께는 이재영이 주장하듯이 우리와 다른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트로츠키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결코 매도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그가 21세기 사회주의의 대안 구상을 위해 중요한 자원으로 고려하는 참여계획경제의 세 가지 모델('파레콘', '협상조절', '노동시간 모델')이 모두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적대적임에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운다. 또, 같은 책에서 정성진은 때로 다함께보다 더 나아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 심지어 알튀세르주의자로부터도 수용할 것은 수용한다.

정성진과 다함께는 북한의 사회 체제를 노동자 권력과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할 국가자본주의적 착취, 억압 체제로 규정하지만, 남한의 주체사상파가 북한 체제를 지지한다고 해서 이들을 이재영처럼 하나의 적으로 대하는 종파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들이 반신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반전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한 이들과도 연대한다.

이재영은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트로츠키 사상의 정수는 1906년에 발표한 영구혁명론에 있는가 하면, "망명객 시절", 즉 1930년대의 "언행" 중에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섣부른 제4인터내셔널 창건과 같은 오류들이 적잖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재영은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는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데 정성진이 각종 자료와 논거를 동원해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과 스탈린주의 간의 연속성 명제이다. 1989~91년 붕괴된 현실 사회주의의 실체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형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일 뿐임을 논증하는 작업은 정성진의 책이나 다함께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적 부분인데, 이재영은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고는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실패를 이유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 앉았다"고 주장한다.

정성진이 옛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본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매개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스탈린주의 간의 질적 단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기초로 21세기 조건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창조적 발전과 한국적 착근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인 이재영은 물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어떤 점에서 동의하지 않는지를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며 지적해야지, 이런 시도와 모색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애써 간과하며 논쟁을 원점으로 되돌려서는 우리 진보 진영의 이론과 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파주의

한편, 이재영이 다함께와 범자민통의 "야합" 또는 "연대" 운운하면서, 다함께가 당당하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 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이재영이 인용했듯이, 나는 지난번 글에서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광범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자신과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과도 기꺼이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야합'이라면 다함께는 '야합'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분파주의에 눈이 멀어 연대와 투쟁의 대의를 종파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멀다. 게다가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선거에서 범PD 계열일지라도 지난해 하반기 이래 최대 쟁점인 북핵과 일심회 사건과 사회연대전략 문제에서 우리가 보기에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면 그를 지지했고, 민주노총과 현 금속선거에서는 NL계열이 아니라 노동자의힘 등 옛 PD계열 내 좌파를 지지하고 있다.

이재영이 다함께의 정치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마르크스 훈고학"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다함께 신문이나 사이트를 잠깐 둘러보아도 다함께가 "마르크스 훈고학"자들이기는커녕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정세 분석과 반전ㆍ반제국주의ㆍ반자본주의 투쟁에 헌신하는 투사들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재영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는 "마르크스 훈고학"도 이재영처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면서도 역사와 사상을 그 전체 역사적 맥락 및 진화 과정 속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뻔히 보이는 것조차 보지 않고, 자기 맘에 드는 것만 골라 보고, 그것도 멋대로 날조해서 진보를 호도하는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때로 유용하다.

낡은 사회민주주의

이재영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재영의 문제의식을 추적하다 보면 이재영이 타고 있는 '비행기'의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영은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이 비행기의 이름은 분명히 사회민주주의다.

이는 이재영이 민주노동당의 집권이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라거나, 국유화 계획을 "앞으로 오랫동안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낡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자"며 이재영이 제시한 것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행 비행기 티켓이다. 그러기에 이재영에게는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지적이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파악"처럼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재영은 글 끝 부분에서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하고 자문하고 그 답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재영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방법을 버리고 계급투쟁과 역사 발전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관념론을 채택했음이 분명히 확인된다. 이재영이 이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그 개량주의적 관념론의 비행기는 이미 지난 20세기 동안 무수히 되풀이된 이륙 실험에서 형편없이 실패한 바 있다.

이재영이 글 끝 부분에서 "아직도 멀었다"며 일갈하며 자신의 "무지"를 시인한 것이 진심이라면, 그 이륙은커녕 추락할 것이 뻔한 고물 비행기에 동승하라고 어쭙잖은 말장난과 거짓말로 호객하는 짓은 당장 그만 두고, 먼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부터 깨쳐야 할 것이다.

이정구 / 다함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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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2-1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입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재영 씨가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왜 자신들이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사회주의는 아니다 라고 말하려는거지?

마법천자문 2007-02-1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의 몇몇 책들은 읽어볼 가치가 있겠지만 '트로츠키주의자' 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sb 2007-02-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저 역시 트로츠키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은 - 그가 트로츠키주의자 이든 아니든 - 한국 사회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는 것으로 환영하고 싶습니다. 이재영씨가 좀 더 책 소개에 충실했다면, 프레시안에서 기대했던 좋은 논쟁이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러시아혁명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The 1917 Russian Revolution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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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왜 러시아 혁명인가?

지난달인가 MBC에서 창사특집 다큐멘터러로 '러시아 혁명' 편을 방송한다는 얘기를 후배로부터 들었지만 결국 한번도 보지 못했다. 강의자료로도 요긴할 듯싶어서 녹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흐지부지됐다. 오마이뉴스에 이 다큐를 직접 제작한 한홍석 PD와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길래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특집다큐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보든가 해야겠다. 다큐에서 공개된 아래 사진은 박헌영과 그의 딸 박비비안나라고.  

오마이뉴스(06. 12. 28) "왜 러시아 혁명이냐고? 분단국이니까"

2006년이 저무는 시간,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올해도 TV의 위력은 대한민국에서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도 친숙한 매체로 TV는 자리했다. 온갖 종류의 드라마뿐 아니라 월드컵 축구 등을 전달한 TV는 여전히 사랑받은 매체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TV에서 어땠을까? 보통 야심한 밤에 편성되는 시간표가 웅변적으로 말해주듯,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소위 시사 교양물들은 우리나라 TV의 비인기 종목이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 문화적 역량의 지표로 다큐멘터리가 자리매김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지난 11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근 한 달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5부작 <세계를 뒤흔든 순간- 러시아 혁명(한홍석 연출)>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17년 혁명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혁명이 다다른 곳까지를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깊이와 재미는 물론이고, 충실한 자료화면, 고증을 통한 역사 재연, 4개국을 넘나들며 직접 따온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해설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춘 빼어난 수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의 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러시아 혁명'을 조명했다는 데 있다. 19세기 말 몰락해가던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끔찍한 테러가 만연하던 스탈린 시대까지, 그 먼 북구의 땅에도 '우리'는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의 꿈을 꾸며 192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또 소련의 각 지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우리 동포들이 스탈린 숙청의 희생물로 스러졌다. 박헌영의 딸은 아직도 그곳에 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런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신자유시대를 사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대미문의 노동자 혁명이었던 '러시아 혁명'의 이상은 본산지에서조차 실패했는데 말이다. 재미있고 내용도 알찬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신자유경제 체제와 분단 체제라는 두 짐을 걸머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1년간의 기획, 세 대륙을 돌며 100일에 걸쳐 진행한 촬영, 그리고 지난 두 달 반을 '노가다' 모드로 편집실에 틀어박혀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주인공, 한홍석 PD를 지난 12월 19일 오후 서울 남산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러시아 혁명>이 종영되고 이틀 후다. 다음은 한홍석 PD와 나눈 일문일답.

- 대장정을 끝낸 소회는?
"아직도 끝났다는 실감이 안 난다. 너무 큰 주제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응도 아직 잘 모르겠다. 편집실에서만 두 달 반을 지내서 시청자들 반응은커녕 동료들의 반응도 아직 모른다."

- 이 다큐멘터리를 자평한다면.
"정치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청자들에 대한 서비스라 생각한다. 이걸 보고 이 주제에 흥미를 느껴 전문적인 관심까지 두게 된다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성상 빠진 부분들이 안타깝다. 정말 많이 촬영했는데…. 러시아 문화·사회 문제 쪽으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시간 제약 때문에, 그리고 현실의 제약 때문에 완성본에 결국 포함하지 못한 것들이 안타깝다."

- 이 작품을 기획하며 세웠던 목표나 의도는 무엇인가?
"이전에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다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러시아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까지 미국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다. 우리의 분단 체제를 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0~50대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러시아 혁명에 대해 많이 듣고 읽었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책으로만 읽었던 트로츠키가 이렇게 생겼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이런 사건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40~50대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한다(웃음).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40~50대들이 많이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재미'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역사는 재미있는데, 이제 '재미'가 뭔지도 헷갈리지 않은가. 역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고자 '장르 실험'을 했다. 러시아 현지 배우들을 출연시켜 역사를 재연했다.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것이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실험적 형식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현지 배우들을 고용해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역사상 처음이다."

- <러시아 혁명>을 만들기 전과 만든 후, 러시아 혁명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게 된 지점이 있는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다양한 가치는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아직도 효용성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은 몰락했지만 사회주의 이상이나 평등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지고지선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생각이다. 지금 러시아에서 아직도 구소련 체제를 그리워하고 그 때의 좋은 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들이 반동적이어서가 아니다."

- 매편 폭넓은 학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영국·미국 학자들 수십 명이 등장했는데.
"섭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연락을 취하면 그쪽에서 놀라고는 했다. '왜 한국에서 러시아 혁명을?'이라며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설명했다. '우리는 아직 분단국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금방 이해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방송국 게시판에 보면 '왜 러시아 혁명을 다루면서 러시아 학자들보다 영미 학자들이 더 많으냐'고 불평하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유는 이렇다. 러시아는 소련 체제를 거치며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관변학풍이 심했다. 그에 비하면 영미 학계에서는 지난 몇십 년간 광범위하게 축적된 객관적, 역사적 학문 전통이 있다. 대가도 그쪽에 분포되어 있고. 그들은 우리와 인터뷰를 아주 즐겼다. 소련이 붕괴한 후 영미권에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 요즘 침체해 있었던 터라 우리와 인터뷰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다."

- 그 학자들을 전부 다 직접 만났나?
"그렇다. 미국 학자들의 경우는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학자들을 만나느라 미국을 횡단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 보스턴으로 나왔다. 미국 학자들은 쉬웠다. 연락만 되면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쉽게 인터뷰에 응했다. 도리어 러시아 학자들 중에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미국 학자들은 인터뷰를 즐기면서 진행했다. 그들은 말을 시키면 자기가 즐거워서 마구 말을 하는데 보고 있으면 흥이 날 정도였다."



- 박헌영의 딸이 구소련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어떻게 찾아냈나?
"사실 박헌영 딸에 대한 소식은 몇 년 전 국내 일간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외에도 스탈린 딸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락처까지 알아내 다섯 번인가 부탁을 했지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됐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우리와 인터뷰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 총5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4부가 가장 인상적이다. 관심도 가장 많았고. 4부는 러시아 혁명 후 진행된 소련의 산업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국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다."

- 차기 작품도 기대된다. 어떤 걸 구상하는지.
"구소련과 한국 전쟁을 묶어서 다뤄보고 싶다. 가제는 '스탈린과 한국전쟁: 1945-1953'. 러시아에서 한국 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이 요즘 많이 공개되고 있다.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청자 요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나는 요구한다!). MBC가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그것이 사회 공익에 얼마나 기여 하는가도 보지만 시청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은 시청자가 원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 시대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드라마 왕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드라마가 강세고 세계사 시리즈 같은 교양물은 점점 위축되고 약화하여가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윤새라-조경국 기자)

06. 12. 29.





 

 

P.S.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이 흥미를 끈다. '스탈린과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것. 시청자의 요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요구해줄 수 있다. 러시아쪽 자료들이 다수 공개되고 있는 걸로 알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의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에는 러시아 TV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잠시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정권의 성립과정에 러시아가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생존하고 있는 고위 관계자들 인터뷰와 함께 자세히 보여주었었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관한 자료/도서들은 얼마간 나와 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풀무질, 2003-4)를 아직 갖고 있지 않은데, 그게 좀 아쉽군. 거기에다 따져보니까 러시아쪽 시각의 혁명사 소개는 빈곤한 듯하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시대에 대한 관련서들은 러시아나 영미권에서 차고 넘친다. 가장 정평있는 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권 저작으론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의 저자인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들이 기본서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간략한 역사'라고는 하지만 430쪽이 넘는 분량이다). 왜냐고? 우린 아직 분단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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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티스타 봉기 10주년 전세계 기념행사

연합뉴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 신자유주의 반대와 원주민 권익보호를 요구하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일인 1994년 1월1일 일제히 봉기한 지 1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에 돌입했다.
  
  특히 이달 17일은 1983년 11월 17일 좌익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비밀결사조직으로 결성한 EZLN이 공식 출범한 지 20주년이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에 사파티스타군의 지도자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최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사파티스타군 홍보지 '레벨디아(반군이라는 뜻)'가 중심이 돼 이번주부터 내년 1월 12일까지 7주간에 걸쳐 멕시코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각종 기념행사를 벌일 계획이라
  고 밝혔다.
  
  'EZLN 운동:20년과 10년, 발포와 말'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10일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사파티스타군 소속원들이 사파티스타 역사를 기록한 기념 책자를 시민들에게 배포하면서 공식 개막했다. 뒤이어 멕시코 곳곳에서 원탁회의와 함께 ▲무도회를 포함한 각종 파티 ▲비디오 상영 ▲기념사진 전시회 ▲라디오 프로그램▲사파티스타 활동상을 담은 CD 배포 등이 예정돼 있다.
  
  또한 그 동안의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진보적 예술인들이 기증한 작품을 상품으로 내걸고 가격이 1달러에서 10달러에 이르는 복권을 멕시코 전역에서 판매하는 행사를 포함한 다양한 기금 모금도 이뤄진다.
  
  레벨디아는 멕시코 전역을 비롯해 세계 다른 국가의 일반 시민들도 기념행사에 초대한다면서,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www.revistarebeldia.org)를 통해 다양한 주최 기관이 행사 일정을 홍보하고 일반인들이 정보를 얻는 매개체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레벨디아는 멕시코 전역에 걸쳐 계획된 다양한 행사 일정을 접수하기 시작했다면서, 멕시코 외에도 아르헨티나 몇몇 도시를 비롯해 베네수엘라, 미국 텍사스주(州), 칠레, 스페인, 브라질, 이탈리아, 캐나다 등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전했다.
  
  이번 기념행사와 관련해 사파티스타군 전문 집필가인 카를로스 몬테마요르 씨는 "사파티스타 봉기는 세계화의 불합리한 점에 대항한 첫 시민운동"이라면서 "이번 첫 10년간은 사파티스타 운동의 시작일 뿐이며, 사파티스타 활동은 앞으로도 끊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파티스타군은 94년 1월 봉기시 남부 치아파스주(州) 산 크리스토발을 시작으로 멕시코 남동부 6개 도시를 점령해 나갔고 멕시코 정부를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단 12일간의 교전 끝에 휴전이 선언되고 이후 활동 영역이 치아파스주 일부 지역으로 한정된 채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단기간에 그쳤지만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스키마스크로 대표되는 사파티스타 무장봉기는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알려졌으며,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남미 지역의 원주민 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결정을 영향을 주었다.
  
  또한 멕시코 국내적으로도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원주민 현안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했으며, 나아가 원주민 인권의 중요성과 민주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2000년 대선에서 지난 71년간의 제도혁명당(PRI) 장기집권 체제를 허무는 데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다.
  
  지금도 정부 보조금을 거부하는 사파티스타군은 정부와의 평화협정은 멕시코 인구의 10%인 원주민에 대해 광범위한 자치를 인정하는 개헌이 이뤄질 때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국민행동당(PAN) 소속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치아파스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2000년 12월 취임 직후 원주민 권리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멕시코 사회의 보수우익 기득권층인 의원들은 주요 조항을 대폭 삭제 또는 수정한 채 의결해 원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 때문에 폭스 정부가 치아파스주 반군거점 지역의 정부군 철수와 반군포로 석방 등 일련의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
  
  그렇지만 사파티스타 반군은 2001년 2월 원주민 권리법의 의결을 촉구하기 위한 '평화 대장정' 이후 정부와 열었던 협상 창구를 모두 굳게 닫았다. 치아파스주남부 라칸돈 열대우림에서 침묵 투쟁을 벌여온 사파티스타는 현재 인터넷 사이트(www.ezln.org)와 방송국을 만들어 세계 각국 정부와 인권단체와 국제기구들을 상대로 멕시코 정부의 부당성과 기득권 층의 횡포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에 사파티스타 운동을 알리러 왔다'
 
[오마이뉴스 2003-10-10 19:12] 
 

"사파티스타 운동은 민주, 자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 기예르모 미셸 교수가 사파티스타 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3 최한성
기예르모 미셸 멕시코 메트로폴리탄 개방대학 교수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사장 이명순)이 주최하는 제3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8일 밤 한국을 찾았다. 사파티스타 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미셸 교수는 방한기간 동안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투쟁사와 이들이 조직한 '좋은 정부위원회'에 대해 강연을 여는 등 사파티스타 운동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지난 9일 '사파티스타 운동의 발전'을 주제로 한 강연에 앞서 만난 그는 "사파티스타 운동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써 사파티스타 운동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리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미셸 교수는 사파티스타 운동을 "'희망의 철학', '평등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아울러 "사파티스타 운동은 민주와 자유, 정의를 추구한다"고 덧붙였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얼굴에 스키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맨 얼굴을 드러내면 그저 한 개인의 얼굴만 보일 뿐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얼굴을 가림으로써 여자·농민·노동자·어린이 등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고대 마야인들은 주체와 객체가 동일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는데, 그 후손인 치아파스 주민들이 이를 이어받아 사파티스타 운동의 정신으로 계승한 것이지요."


 
 
▲ 기예르모 미셸 교수가 자본주의 매스미디어를 비판하고 있다. 
 
ⓒ2003 전미희
미셸 교수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자본주의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는 운동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사파티스타 운동가들은 '정치세계는 범죄와 거짓, 그리고 배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인간은 자기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생각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파티스타 운동의 존재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사회권력을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사회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압박, 자본주의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그 예로 지난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를 들었다.


"당시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했던 것은 WTO에 반대하는 세계 각국의 저항세력들이 계속해서 정치권력을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이경해씨의 죽음도 그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한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세계 민중들의 존엄성을 지킨 것이지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저술활동도 벌이고 있는 미셸 교수는 기성 매체들이 사파티스타 운동을 포함, 전세계 민중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존 매스미디어의 경우 민중운동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관련된 주제를 다루더라도 정보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지난번 칸쿤의 경우 WTO에 반대하는 각국 민중대표들의 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러나 기존 매스미디어에선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국 언어로 소책자를 만들어 나눠주면서 스스로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미셸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매체들이 거대자본에 의해 통제되어 있음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이 매체들은 민중들로 하여금 삶에 있어 진정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고민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기존 미디어에 맞서 대안매체를 더욱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새로운 매체를 만드는 것, 기존 미디어의 사용방식을 달리하는 것 모두 필요합니다. 퍼블릭액세스 운동은 그 중요한 일부로써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시민사회의 작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기성 매체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권리의식을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미셸 교수는 이번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가 우리나라 대안언론운동 활성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울러 사파티스타 운동이 한국사회의 자율적인 시민사회 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도 밝혔다.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이번 영상제에서는 미셸 교수와 동행한 비디오 액티비스트 칼로니코의 사파티스타 관련 다큐멘터리 다섯 편이 상영된다.

/최한성 기자 (hanmunjung@freechal.com)
 
“사파티스타 생생한 역사 영상에 담아”
 
[한겨레 2003-10-10 01:00] 
 

 
[한겨레]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 참여차 한국온 비디오 아티스트 칼로니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활동상을 10년째 영상에 담아온 ‘비디오 아티스트’ 크리스티안 칼로니코(46·멕시코 메트로폴리탄개방대학 영화·비디오학과 교수)가 한국에 왔다. 멕시코의 독립 다큐제작 프로덕션인 ‘마르카 디아블로’와 엔지오 단체인 ‘침묵에 맞서는 소리’의 대표이기도 한 그가 서울에 온 것은 민언련이 개최하는 ‘퍼블릭액세스 시민 영상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 영상제에서는 칼로니코가 찍은 사파티스타 관련 다큐멘터리 다섯 편이 10~12일 상영된다.
9일 ‘멕시코의 퍼블릭액세스 운동’을 주제로 한 영상제 강연에 앞서 만난 그는 “먼나라로만 여겼던 한국에서 사파티스타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니 정말 뜻깊고 기쁘다”고 말했다. 칼로니코가 찍어낸 사파티스타 필름은 500시간 분량의 대기록이다. 그는 자신의 필름을 “사파티스타 운동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고갱이를 추린 것이 이번에 소개되는 <치아파스:완결되지 않은 역사>(1995), <치아파스:역사와 존엄성>(2001) 등 다섯 편의 작품.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80년대 이후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운동,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고 각자 길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갑자기, 1994년에 멕시코의 오지 치아파스, 그것도 오래도록 소외돼 왔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예를 통해서 민주주의와 자유, 자율, 공존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 솟아오른 겁니다. 이 운동은 말하자면 하나의 새로운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대표적 반세계화 운동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활약중인 반세계화주의자들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94년 사파티스타 무장봉기 이후입니다. 반세계화주의자들은 치아파스에 관심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고 실제로 교류를 통해 서로 배워간 겁니다.” 그는 사파티스타 혁명가 마르코스 인터뷰에 얽힌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1995년 사파티스타 혁명가 마르코스에 대한 인터뷰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 직후 정부군의 군사 움직임이 있어, 인터뷰가 무산되었죠. 긴장의 시간이 지난 뒤 나를 포함한 제작팀 3명은 치아파스로 갔어요.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여러날 지나도록 응답이 안 와요. 할 수 없이 ‘우리는 독립 다큐를 하는 사람들이라 예산이 없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작별 편지를 보냈죠. 숙소에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어느날 밤, 갑자기 누군가 복면을 한 채 기관총을 들고 나타나 ‘너희들 여기서 체포되었다, 누구 맘대로 가느냐’고 외쳤어요. 그게 바로 마르코스 사령관이었죠.” 그렇게 장시간의 마르코스 인터뷰는 성사되었고 그 성과물이 이번에 상영되는 한시간반짜리 다큐 <역사와 말>(1996)이다.

‘침묵에 맞서는 소리’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독립 다큐필름 페스티벌에도 관여하고 있는 그는 퍼블릭 액세스 운동이 필요한 까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멕시코는 불과 몇년 전에야 70년 일당 독재가 마감했어요. 퍼블릭 액세스란 공적인 미디어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제작한 영상물을 공적인 공간에서 방영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권리 운동입니다.” 이번 영상제에는 사파티스타 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기예르로 미셀 멕시코 개방대학 교수도 함께 왔다. (02)392-0181.

글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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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반론
: 각 반론에 대한 주요 논자들과 논문을 함께 정리

(1)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가격이나 임금은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 1930년대 Max Shachtman, Bruno Rizzi
: 오늘날 Gyory Bence, Janos Kis(헝가리), Rudolf Bahro(동독), Antonio Carlo(이탈리아), Hillen Ticktin(영국)

- 서구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가격과 임금을 결정해 온 것이 아니다. 시장 보다 더 근원에 있는 것은 경쟁이다. 경쟁이 가격과 임금을 결정해 왔다는 점에서, 동구와 서구는 일치한다.

(2)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공황은 유효 수요의 부족에서 나오는 공황이 아니라, 공급의 부족에서 나오는 공황이다.

- 동구와 서구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과잉 축적에 있다. 과도한 속도의 축적을 수반하는 경쟁의 압력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다.

-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자본주의 일반의 발전형태에서 동유럽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 고전적 의미의 자유시장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투자가 이윤율을 감소시키면 투자가 줄어들지만, 관료제적 경제에서는 투자가 계속된다.

(3) 관료는 하나의 계급이며, 이 계급의 통치 때문에 소련 사회의 문제가 발생한다. 소련 사회는 사적 소유 보다는 진보적이다. (1930년대 맥스 샤흐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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