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빛나는 전망 출판사)

이 글은 <국제혁명당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Revolutionary Party)>의 한축인 <공산주의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이 2000년에 쓴 팸플릿「트로츠키와 트로츠키즘 (Trotsky and Trotskyism)」을 번역한 것이다. 이탈리아 좌익 공산주의에 역사적 뿌리를 둔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의 혁명사상과 정치적 입장에서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좌익공산주의의 다른 한 축인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도 큰 틀에서 <공산주의노동자조직>과 동일하다.

1920년대 초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코민테른의 퇴행과 더불어 반혁명적 물결이 스탈린주의로, 파시즘으로 가시화 되면서 이에 맞서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 트로츠키와 그 추종세력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비판과 투쟁을 전개한 세력은 이태리로부터 전 유럽에 망명한 좌익공산주의 세력이었다. 좌익공산주의의 역사는 <국제공산주의흐름>이 출간한 ?이태리 공산주의 좌파(1926-1945) : 혁명 운동사에의 공헌?에 자세히 실려 있다. 편집부는 이 책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을 출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구체적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은 역사학도의 책무일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할 모두에게 주어진 역사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혁명가의 저작을 편의적으로 암송하거나 인용하여 교조로 수용하거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 절대적 언명으로 전략·전술을 이해하는 운동(연구 및 실천)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관행을 반성하자는 뜻이다.

둘째, 특히 우리 사회의 혁명운동의 역사와 실천이 일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그것이 주체사상이건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스탈린주의이건 간에)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폭넓은 역사적 성찰을 가로막고 스탈린주의의 옹호가 마치 반혁명 운동에 대한 투쟁의 푯대인 것처럼 착각하는 풍조를 형성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 본격적 논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도 스탈린주의의 반대 항으로만 이해되거나 몇 권의 저작, 보기를 들어 ?영구혁명??배반당한 혁명??이행기 강령?에 대한 학습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하는 전략·전술이라는 경직된 태도를 형성시켰다. 물론 우리는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가 지니는 주체적 역사 서술 방법과 혁명과정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우리 사회에 실천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세력들이 여러 형태로 트로츠키의 영향을 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반혁명적 스탈린주의를 진정으로 넘어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째,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과 조직을 정립하는 책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이를 위하여 세계혁명의 발전을 저지시켰던 반혁명운동의 흐름과 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운동세력이 평가되어야 한다. 스탈린주의 극복의 시발점은 그 운동의 전선에 함께 섰던 모든 좌익 반대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진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일부 세력이외에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본격적 논쟁을 벌인 적이 없다. 이 책의 출간이 바로 이것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익 공산주의 세력과의 연대와 갈등의 역사를 몇 가지 정리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1925년 3-4월 이탈리아 공산당은 3차대회에서 ‘보르디가적’인 경향을 제거하기 위해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을 출판하는 것을 금지했다.

2) 1926년까지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통일전선과 노동자 및 농민정부에 대한 거부
② 반파시즘 그리고 계급투쟁 영역에 근거하지 않은 정책의 거부
③ 일국사회주의 거부
④ 민주주의 방어 거부

3) 그 당시 비레닌주의와 트로츠키 반대의 입장을 지닌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 세력은 독일 좌익 공산주의의 테제를 방어했다.
① 의회 문제 : 전술문제 아닌 전략문제이지만 맑스주의와 공산주의의 반의회주의와 관계없는 생디칼리즘의 반의회주의와는 구분.
② 민족 문제 : 로자룩셈부르크 입장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해방의 승리자라는 레닌 입장 거부.
③ 노동조합 문제 : 혁명노조 거부, 노동조합내의 어떤 활동도 거부,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분적 투쟁의 참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 투쟁기관으로서의 노동조합 거부.
④ 당과 평의회 : 보르디가와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받아들여 당 문제를 2차적으로 판단.
⑤ 러시아와 국가 :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러시아 혁명의 반혁명적 기원은 NEP(신경제정책)와 크론슈타트  진압이며 러시아는 국가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카스트화 했음.

4) 1927년 7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좌익분파 분리 (프랑스, 벨지움, 룩셈부르크, 스위스, 미국, 러시아와 연대)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한 러시아 공산당 15차대회에서 트로츠키 축출.

5) 트로츠키와 연대했지만 보르디가 테제, 코민테른 2차 테제를 지지하고 러시아 반대파와 트로츠키가 방어한 코민테른 3차, 4차대회 테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이탈리아 분파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 분파”로 규정함. 이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① 코민테른 좌익 분파의 구성
② 임시 중앙위원회 구성
③ 격월간 「Prometeo」출간
④ 기회주의와 기회주의자에 대한 투쟁(공산주의선언, 코민테른 1, 2차 대회의 테제, 로마 테제,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국대회 테제, 5차대회에 보르디가가 제출한 테제, 코민테른 프랑스 지부의 릴리대회에 좌파가 제출한 테제, 보르디가의 모든 저작)
⑤ 당면목적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동지의 재통합, 트로츠키 의장 아래 6차대회 개최 촉구

6) 1929년 2월 추방당한 트로츠키 중심으로 국제 좌익 반대파 결집
① 트로츠키와의 서신교환과 터키방문
②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의 좌익은 트로츠키를 대표로 제안
③ 1932년까지 폴란드에서 스페인까지 “볼세비키-레닌주의자”로 스스로를 부르는 소그룹이 존재
④ 그러나 이들 세력은 이질성이 큼 (소련의 외교정책 등)

7) 이탈리아 좌익은 국제 반대파에 동의하지만 트로츠키와의 견해 차이를 숨기지 않았는데 1929년 「Prometeo」20호에 트로츠키에게 공개서한을 보냄. 9월 25일 트로츠키는 답장을 보내고 이탈리아 좌파가 프랑스에서 영향이 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대표라고 인식하고 1928년의 “좌파의 강령”을 칭송함.

8) 1930년 4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 좌익반대파 대회에 Prometeo가 불참하자 트로츠키는 이탈리아 좌파에게 “민족적-공산주의자”인가 “국제주의적 경향”인가를 묻는 질의서를 보냄.

9) 1930년 6월 3일 답장에서 “① 우리는 우리를 국제 노동 운동의 일부로 생각한다. ② 코민테른 창설 이후 우리는 좌파경향에 속해 왔다. ③ 우리 경향의 국제 분파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 조직이 한 그룹주위에 상이한 국가로부터 온 인사나 집단의 인위적 결합체가 아니라고 맑스주의로부터 배웠다”라고 반박함.

10) 1930년 6월 19일 트로츠키의 세 번째 편지에서 둘 사이의 간극이 더 벌어짐. 정치적 강령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좌파와 달리 트로츠키는 국제 조직 창설보다 그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봄.

11) 1932년 트로츠키는 이탈리아 좌파와의 관계유지를 거절함.

12) 1933년 2월 트로츠키는 “보르디가주의자는 좌익 반대파의 유기적 부분인 적이 없다” “Prometo집단은 국제 좌익반대파에 속한 적이 없다” “볼세비키-레닌주의의 유일한 지부는 신이탈리아 반대파 (New Italian Opposition)이다”라고 하고 ‘보르디가주의’와 선을 그었음.

13) 이들의 근본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스페인 문제와 민주적 슬로건
트로츠키가 ?스페인 혁명과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공화국 슬로건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라고 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파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체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호 밖에 없다”고 주장함.
② 독일 문제와 통일전선
1931년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독일사민당의 통일전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파는“중도주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함.
③ 분파와 당 문제
1931-32년에 러시아 국가에 모든  공산당들이 복속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파는 모든 나라의 좌익 분파의 실질적 발전이 당이며 혁명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인터내셔널의 인위적 구성이 당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함.

14) 1933년 이탈리아 좌파에게 제기된 근본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①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로 아직도 규정되는 러시아 국가의 본질.
②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1931년 이후 제국주의간의 경쟁시기의 중요한 문제인 “민족해방 투쟁의 본질”
③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시기의 혁명당의 역할과 사회주의 이행기의 본질.
④ 1914년 이래 노동자 투쟁, 프롤레타리아트 경제조직의 형태, 노동조합에서 이탈리아 분파의 활동.

<트로츠키주의 비판>

차례
서문 트로츠키주의 비판을 내며 

1부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의 기원 
좌익 반대파와 연합 반대파 
일국사회주의 
소련의 본질 1부 - 경제 
소련의 본질 2부 - 정치혁명 
이행기 강령과 제4인터내셔널 
이행기 강령과 당 
이행기 강령 요구 
제2차 제국주의 전쟁 

2부 트로츠키와 국제 공산주의 좌파 
1934년의 프랑스 전환 
스페인 내전 
중국, 그리고 아비시니아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주의 공산주의자 당 

3부 1989년 이후의 트로츠키주의 분석의 위기 
트로츠키주의의 핵심 혼동 
카멜레온으로서 불변하고, 만화경으로서 일관적인 
결론  

부록1 나탈리아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과 결별 선언 
부록2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 연대기 1879-19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노맹, 비합법 전위조직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
조희연, <역사비평> (1992)

1. 머리말
2.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의 전개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1) 1980년대 혁명적 인자의 존재상황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2) 사노맹의 형성과정 제헌의회그룹과 사노맹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3) 사노맹의 인적 구성과 지역적 기반
4. 사노맹 조직구조와 그 변화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1) 사노맹의 활동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2) 사노맹의 검거
6. 맺음말

1. 머리말

1991년 11월 출범선언을 통하여 세간에 자신의 존재를 공식화한 이후 숱한 화제-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를 뿌리면서 활동하였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1991년 3월 그 중심인물인 박노해가 검거되고 1992년 4월 조직총책 백태웅 및 중앙위원들이 검거됨으로써 실질적인 '붕괴'상태에 돌입하였다.
사노맹에 대해서는 그간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박노해의 명망성만으로 유지되는 허상(虛像)의 조직", "좌익맹동적 편향의 극단적 발현"이라고 하는 평가에서부터, "남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의 맥을 계승하면서 불굴의 혁명투지를 보여준, 이 시대 사회주의혁명운동의 적자(適者)"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주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대립되는 평가가 주어지고 있는 사노맹에 대한 운동사적 평가는 유보될 수밖에 없으나, 사노맹의 검거는(구혁명운동과 연관된 세력이 주도하였던 사회주의전위조직 결성시도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의 '통일혁명당 서울시창당준비위원회'나 1970년대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등의 검거와 달리 1980년대 변혁적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성장한 신세대 혁명운동인자들에 의한 '전형적인' 비합법혁명전위조직이 '붕괴'하였다는 점에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의 한 커다란 전기를 상징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이처럼 1980년대 이후의 혁명적 운동사의 일정한 분기점을 상징하고 있는 사노맹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것의 실체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글이다.
1980년대 한국사회 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변혁적 사회운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과 달리 1980년대의 사회운동은 조직화, 대중화, '이념적 급진화'라는 측면에서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1970년대까지의 정치적 갈등은 '보수세력 내의 여야갈등'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정치적 갈등의 장(場)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지 못하였으나, 1980년대 사회운동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변동에서 변혁적 사회운동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위상변화는 학술연구에도 영향을 미쳐 변혁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공개적이고 (半)합법적인 형태의 운동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것도 1980년대 이후의 운동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대 한국사회운동의 총체적 파악을 위해서는 그간 충분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1980년대 이후의 다양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논문은 사회운동에 대한 이러한 연구 상황을 극복하는 의미에서,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들 중 사노맹을 선택하여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하여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그간의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를 비합법운동에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시도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노맹의 실상을 조직적 형성, 조직적 확대, 조직적 활동과 검거, 조직구조의 측면들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사노맹에 대한 운동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을 밝히는 데 초점이 있으므로 이념에 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의 전개

1980년대는 1970년대까지의 반파시즘 민주화운동의 축적 위에서 사회운동이 변혁운동으로 자기정립하고 변혁운동으로서의 사상이념적, 조직적 기초가 강화되어오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특히 학생운동이 변혁적 성격을 선진적으로 강화시켜왔으며, 이러한 학생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변혁적 인자들을 중심으로 전위적인 지도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1970년대까지는 혁명적 인자들의 존재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혁명적 인식을 갖는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전위조직의 건설시도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1980년대의 전위조직은 주로 학생운동의 선진적인 인자들과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및 기층 출신 노동운동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운동영역을 중심으로 본다면 1970년대까지의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은 기본계급의 성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변혁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학생운동 출신인자들은 목적의식적으로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하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지원투쟁을 전개하였다. 점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두 가지 논리인 현장론과 정치투쟁우위론 모두에서 중시되던 바였다. 이러한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이전 및 활동, 외부지원과 노동운동의 내적 계기를 통한 선진노동자들의 성장으로 인하여, 1980년대 중반에는 목적의식적인 정치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 할 수 있는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바로 1985년 6월의 구로연대파업이었다. 이 연대투쟁의 조직적 성과로서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으로 나타났는데, 이 조직은 1년여 동안 선진적인 노동운동의 정치적 투쟁체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노련은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으로부터 정치투쟁으로 발전해야 하는 당위성, 노동계급의 정치의식화와 조직화라고 하는 원칙적 과제를 제기하였을 뿐,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의 총체적인 변혁론을 정식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 말 학생운동으로부터 변혁론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당시 NL(NLPDR,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의 대립- 내적인 해체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비합법 조직들은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면서 서노련 이후 부재상태가 된 민중운동의 정치적 지도조직을 건설하려는 형태들로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들의 주체는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와 선진노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변혁운동진영이 크게 NL진영과 반(反)NL진영으로 양분화되어 있는바, NL진영은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은 아니나 핵심적인 진영은- 자신의 전위조직을 '한국민족민주전선'(KNDF)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합법 전위조직을 별도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반면에 반NL진영 혹은 비(非)NL진영은 한국사회의 독자적인 정치적 지도조직 혹은 전위조직을 건설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위조직 건설-그것을 구체적으로 시도하건 아니면 전망으로서 제시하건 간에- 문제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체적인 시도가 몇몇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제헌의회 그룹으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루어진 전위조직을 유형화하고자 할 때. ① 일정한 부문운동의 전위조직인 경우와 전체운동의 통일적 지도를 지향하는 전위조직인 경우, ② 조직적 결합의 수준이 협의체적 성격의 조직인 경우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체계를 갖는 조직'인 경우, ③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학생운동 출신 인자들이 대다수인 조직인 경우와 학생운동 출신이 많더라도 사회운동 속에 일정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조직의 경우, ④ 조직이 소그룹적 결합의 수준을 부분적으로 넘어선 수준에 있는 경우와 동맹의 수준에 이른 경우, ⑤ 조직의 지역적 범위가 서울 및 수도권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와 비록 제한되기는 하나 전국적인 범위에 걸쳐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1980년대의 지하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지하조직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발전된 조직이라고 하면 이상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후자의 특징이 지배적인 조직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시기별로 나누어본다면, 1980년대 초반의 전위조직의 다양한 시도들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전민노련'), '전국민주학생연맹'(이하 '전민학련' 1980년 5월 결성, 1980년 6월 검거)이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반제동맹당'(1985년 10월경부터 활동, 1986년 10월 검거). '마르크스-레닌주의당'(1986년 10월 검거), '제헌의회그룹'(1986이 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반제동맹당(1985년 10월경부터 활동, 1986년 초부터 활동, 1986년 11월 검거). '노동자해방 투쟁동맹(이하 '노해동' :제2차 제헌의회그룹, 1987년 중반에 재건됨. 1988년 4월 분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1987년 11월 결성,『노동자의 길』발간),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연맹' (1987년 11월 결성, 『노동자의 깃발발행』, '사회주의노동자동맹'(1988년 4월 준비위 구성, 1989년 11월 정식결성), '노동계급', '자주민주통일그룹', '반제반파쇼투쟁그룹', '국제사회주의자들' (IS) 등이 있다.
먼저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은 197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노동조합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는데, 변혁운동과 대중운동을 선도하고자 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무림노선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준비론적 시각을 공격하면서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에서의 선도성을 복원시키면서 전체 정치투쟁 활성화의 선도적 투쟁을 담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과 조직화를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의 전민학련을 상정하였는데, 이 조직은 1981년 1월경 결성된다. 전민노련은 1980년 5월에 결성되었는데, 그 지도적 인물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자,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노동운동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인자들, 1970년대 학생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인텔리 인자들이었다. 이 조직은 1981년 6월 총책 이태복씨가 연행되면서 검거되기 시작하여 8월경까지의 수사로 조직이 파괴되게 된다.
제헌의회그룹은 전민학련에 참여하였던 김철수, 윤성구, 민병두와 새롭게 최민 등이 중심이 되면서 1986년 5월경에 결성된 조직이다. 이 조직원들은 직업적 혁명가로 자처하고 비합법적인 지도그룹을 목적의식적으로 결성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직선제개헌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던 NL진영에 대립하여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 개량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신민당을 비판하면서 약 반년 동안 학생운동의 '민민투'조직을 지도하면서 '반파쇼투쟁'을 수행하였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은 본격적인 전위조직 건설의 물적 토대가 사상적 통일성의 확보에 있다고 보고 전국적 정치신문(NPN)의 발간을 통하여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전위조직의 건설을 구체화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다. 이 조직은 1986년 11월경부터 1987년 1월까지의 시기에 대대적 검거를 맞아 파괴된다.
이 제헌의회 그룹이 검거로 파괴되면서 잔류성원들이 제헌의회그룹을 재건한 것이 바로 노해동이다. 이들은 1987년 4월경 정식으로'신중앙위원회'를 결성하면서 활동하고, 이 조직이 중심이 되어 1987년 대선 시기에 백기완씨를 대통령후보로 하는 독자후보전술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선투쟁과정에서 당면정세에 대한 판단 및 전략전술적 대응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로 노해동그룹은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립된다. 1988년 4월 민중집권과 민중주도성의 목적의식적 추구를 강조하던 소수파가 노해동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때 잔류한 다수파 역시도 내부에 상이한 의견그룹간의 논쟁을 통하여 대립하나 일정한 의견의 수렴을 보게 된다.(다수파 내의 논쟁에 대해서는 김영수 편, 『한국사회변혁운동론의 모색-CA그룹의 자기비판과 새로운 전망』, 백산서당, 1989 참조). 그러나 이 다수파는 대중운동 속으로 산개할 것을 결의하면서 1988년 말에 스스로 해체하게 된다. 1988년 4월경 분리된 소수파가 17개월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재집결하여 결성한 한 것이 바로 '사노맹'이다. 제헌의회그룹에서 사노맹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객관적인 혁명운동의 발전을 반영하여 협의체적인 수준에서 동맹적 수준으로,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 중심에서 일정한 기반을 갖는 여러 계급의 성원이 확대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노맹은 1980년대 전위조직운동의 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사노맹을 1980년대 전위조직의 비교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 1>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조직분화과정

다음으로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초반에는 학생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기본계급의 성장과 그를 위한 노동현장으로의 이전 및 활동을 중시하던 현장론에 따라 학생운동 과정에서 의식이 성장한 많은 인자들이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학생운동 배경에 따라 일정하게 소그룹적 연계를 갖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소그룹적 연계수준을 넘어서 지역적, 전국적 기반을 갖는 정치조직을 건설하려는 것은 운동발전의 일반적인 지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처럼 소그룹적 수준의 조직에서 탈각(脫殼)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조직들이 사건화된 것은 바로 1980년대 중반 '반제동맹당'사건, '마르크스-레닌주의당사건'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사건은 1986년 11월 검거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당시 학생운동에서 광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에 기초하여,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조직체를 건설하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동운동에서는 서노련의 실질적 붕괴 이후 다양한 소그룹이 분립하는 상태로 전화되고 있었는데, NL적 경향을 갖는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이 소그룹적 연계구조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며 대중적인 정치적 조직체를 건설하려던 초기과정에서 검거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86년 10월말에 검거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사건'은 주로 학생운동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지역현장운동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의사건도 마찬가지이겠는데, 서노련 해체 이후 새로운 노동운동의 정치적 조직을 건설하려는 과제가 현안으로 제기되고, 여기서 '지역현장운동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단위지역 현장에 대중적 토대를 갖춘 현장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지역현장조직→지역노동자동맹→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이라고 하는 건설경로를 거쳐 노동자대중의 정치조직이 발전되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은 바로 이러한 지역현장운동론에 기초하여,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지도적 인물간의 지역협의체를 운영하면서 활동하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은 소그룹적 결합관계를 부분적으로 벗어난 수준의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포괄범위도 전국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특정지역에 국한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동맹당'사건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건설'사건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수사당국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1980년대 중반에 사건화 되지 않고 상당한 기간 동안 자신을 조직적으로 유지하여온 조직으로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이하 '인민노련')과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을 들 수 있다. 당초 이 조직들은 서노련의 외곽지역조직으로서 인천지역 운동조직이었는바. 서노련 해체 이후 일정한 이념적 통일성 아래 소그룹적 수준의 자기조직을 유지확대하면서 전국적인 혁명적 노동운동의 한 유파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인민노련이나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반제동맹당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조직적 결집수준을 넘어선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인민노련은 1986년 여름 인천지역에서 소그룹으로 결집되기 시작하여 1987년 2월 '살인, 강간, 고문 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지역노동자투쟁위원회'를 중간과정으로 하여, 1987년 6월 26일 인천지역의 다른 활동가그룹과 결합하여 결성된다. 이 그룹은 『노동자의 길』이라는 소책자를 계속 발간하고 있다. 1989년경부터는 내부에 이견이 발생하여 『사회주의자』라는 별도의 비합법 소책자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 그룹의 주요 성원들은 1990년 당국에 의해 조직의 중심적인 많은 인자들이 검거되었고, 최근에 -이른바 '신(新)노선'에 기초하여 합법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와 그 후신으로 탄생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음으로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서노련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그 입장을 대체로 계승하는 그룹들이 조직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을 전개해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그룹을 '신삼민'그룹이라 부른다. 이 그룹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지속적으로 발간해왔다. 이 조직 역시 1989년 8월에 당국에 의해 주요 구성원이 검거된 바 있다. 이 그룹은 주요 성원들 역시 인민노련 그룹과 함께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를 거쳐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1) 1980년대 혁명적 인자의 존재상황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의 변혁운동사는 종속적 독점자본주의화의 제모순과 그러한 자본주의화에 수반된 종속적 파시즘의 모순에 대항하는 투쟁과정에서 이념성, 조직성, 대중성에서 지극히 낮은 수준에 있던 운동이 점차 높은 수준의 운동으로 성장해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구혁명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으면서도 혁명적 인식과 실천능력을 담보한 신혁명운동인자들이 성장해오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는 이러한 혁명적 인적 자원이 전후에 새롭게 성장한 학생운동 속에서 광범하게 형성되고 혁명적 인자의 풀(pool)로서 존재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60년대 대표적인 조직사건인 통혁당사건 공판 모습

특히 이러한 전후세대의 혁명적 인자로의 발전은 광주민중항쟁과 그에 대한 군사정권의 '대량살륙적 제압'과 그에 대한 심화된 반성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 낮은 수준의 인식에 머무르고있던 사회운동-특히 학생운동-에게 있어 광주항쟁은 폭력적 실체로서의 국가권력에 대한 본질적 인식과 그것의 혁명적 전복의 당위성, 광주항쟁에서와 같은 민중의 혁명적 진출을 올바른 방향 속에서 지도할 수 있는 목적의식적인 전위세력 및 선도조직의 필요성, 학생운동 등 인텔리 중심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기층민중운동의 활성화의 필요성, 군부세력의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적 지배주체로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 등의 교훈을 던져주게 된다. 광주항쟁이 군사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 그것의 의미를 보다 심층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구좌익운동이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은신(新)혁명운동세대들이 대거 형성되어 나오게 된다. 초기에 이러한 신혁명적 인자들은 주로 이론적 수준에서의 혁명적 인식에 도달하였을 뿐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및 중반의 격렬한 반파시즘투쟁과정에서 전후의 잠재적인 신혁명운동인자들이 실천적으로 단련됨으로써 비합법 혁명조직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인자들이 다수 형성된다(학생운동에서의 혁명적 인자의 형성, 확대). 또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공개적인 이념논쟁은 선진운동인자들로 하여금 용이하게 혁명적 이념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였고 혁명적 이념에 대한 거부감도 축소되게 되었다. 이로써 1980년대 이후 1970년대의 의식수준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혁명적 인식 위에서 독자적인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인자가 전후세대들 중에서 광범하게 형성됨으로써 비합법 혁명조직의 주체적 요인이 완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에 머무르고 있던 선진적 노동운동 역시 제5공화국 군사정권과의 투쟁과정에서 점차 정치투쟁으로 발전해가게 되며, 그 과정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배출된다. 이러한 기층노동자들 수준에서 인식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하였던 요인 중의 하나는 학생운동 선진인자들의 혁명적 인식변화와 그에 기초하는 현장으로의 투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5년 선진노동자와 인텔리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결합하여 만든 서노련은 이러한 발전의 출발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그 후 5공정권에 대한 반파시즘운동의 고양과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한 생존권투쟁과정에서 노동대중들의 전반적인 의식이 상승하였고, 일부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결합'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운동의 과제가 부분적으로 현실화됨으로써, 혁명적 인자의 존재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은 인텔리출신 노동운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의 결합체인 노동운동단체들의 강화발전으로, 노동대중들의 단결조직인 노동조합의 지역적, 전국적 연합조직의 강화발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들의 인식변화는 학생운동처럼 대규모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선진적인 인자들에 국한해본다면 많은 혁명적 인자들이 형성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도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전에는 일부 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 국한되었으나, 이후 대중운동이 활성화됨으로써 대중적인 수준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처럼 학생운동의 경계를 넘어 혁명적 인자들이 생성, 확대됨으로써(혁명적 인텔리뿐만 아니라 혁명적 민중의 생성),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지도조직의 건설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 1980년대에 혁명조직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구혁명운동인자들이 연령적으로도 거의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실제 6ㆍ25 전후의 시기에 청년세대로서 일정한 구혁명운동을 하였던 세대들의 경우, 60∼70세를 넘는 등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종속적 독점자본주의화를 통하여 한국사회가 전면적인 자본주의적 구조변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혁명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구혁명운동의 조건과 질적으로 차별화되고 현실적으로도 혁명조직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역량이 신혁명운동세대들에 의해 담보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적인 지하조직운동은 구혁명운동인자들이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으나, 1980년대에는 새롭게 성장한 신혁명운동적 인자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그들이 독자적인 혁명적 활동능력을 일정하게 체득하게 됨으로써 주로 신혁명운동인자에 의한 비합법 전위조직이 추동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자적인 혁명적 이론에 기초하여 혁명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즉 신혁명운동과정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광범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노맹 전신으로서의 '제헌의회그룹', '노해동'은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과는 구별되는 신혁명운동인자 중심의 지도부가 구성된다. 이미 1980년대에 이르면 생물학적으로 노령화되어 구혁명운동 경험 속에 있는 인자들이 조직활동의 일선에 설 수 없는 조건 때문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후 학생운동의 투쟁경험이 구혁명운동과는 별개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재생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지하조직의 결성을 추동하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이 전후 학생운동세대들에게 확보되어 있지 못하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1970년대의 남민전이 자신의 조직적 활동의 정치사상적 기초, 조직활동의 전거를 전적으로 혹은 일정부분 구혁명운동에 두고 있었던 데 반해, 1980년대 이후 조직들이 구혁명운동의 역사적 경험과는 별개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행하고, 중앙위원급 지도부들이 신혁명운동인자들로 충원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전후 학생운동을 포함한 변혁운동이 구혁명운동에 상응하는 혁명적 인식과 실천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2) 사노맹의 형성과정 제헌의회그룹과 사노맹

사노맹은 전신은 '제헌의회그룹'과 그 재건그룹으로서의 '노해동'이었다. 이 조직은 앞서 레닌이 활동하였던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결성된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동맹'의 명칭과 조직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은 레닌의 이원적인 전위당 조직원칙에 따라서 '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이라고 하는 분리된 중앙지도부를 구성하였다.(레닌,「우리의 조직적 과제에 관해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 홍승기 역, 『레닌저작선』, 거름, 1988. 291∼305쪽 참조). 사상적 중앙에 속한 인물들은 김철수, 유강근, 이성희였고, 실천적 중앙에 속한 인물들은 최민, 윤성구, 민병두, 김성식 등이었다. 이들은 전후에 자생적으로 성장한 혁명적 인텔리 및 학생운동 출신의 현장지향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1970년대 반파시즘 학생운동의 과정에서 혁명적 인텔리로 성장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이들은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하에서 투옥되었거나 학생운동과정에서 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 혁명운동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고 전후 반파시즘 학생운동과정에서 그 인식과 실천역량이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지도적 인물로서 최민을 들 수 있는데, 최민은 1978년 대학에 입학하여 긴급조치하 학생운동의이념적 급진화과정에서 혁명적 의식을 갖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의식형성의 장(場)도 학내의 공식적인 서클인 '대학문화연구회'에서였으며, 혁명적 인자로서의 실천적 경험도 역시 반유신 학생운동과정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의 지도적 성원들은 전적으로 전후세대 및 전후의 운동경험 속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들의 경우 특별한 배후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구혁명운동으로부터 혁명적 이론과 조직적 활동경험이 전수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들의 학생운동 경험에서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부여받고 있었다. 이처럼 구혁명운동과의 '단절'적 조건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중요한지적 원천은 주로 고전적 저작, 특히 레닌의 혁명저작들이었다. 실제 제헌의회그룹의 초기 조직의 원형은 전적으로 레닌의 저작 우리의 조직적 관제에 관해 한 동지에게 띄우는 편지에 의거하고 있었고,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조직적 경험이나 구남로당의 조직구조나 조직활동 등이 참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헌의회조직은 1986년 말경부터 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조직적으로 붕괴되는데, 제1차 제헌의회조직의 중간지도부 제1차에서는 중앙지도부가 아니었음은 1차조직의 중앙지도부가 구속된 후 조직을 재건하면서 제2차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조직명을 '노해동'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조직의 지도부는 박종운, 김정일 등이었다. 이들 역시 1977∼1979년 사이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운동 출신들이었다.

우리가 1980년대 전위조직의 한 전형으로 상정한 사노맹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1986년 말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가 구속되고 난 후 결성된 '노해동'의 지도부 중 '소수파'가 1988년 4월 조직적으로 분리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고, 그래서 조직의 중앙지도부는 노해동에 참여하였던 인자들로 구성된다. 노해동 내부에서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립은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1987년 대선투쟁과정에서 그리고 13대 국회의원 선거투쟁과정에서의 대응방안을 둘러싸고 첨예화되었고, 그것이 급기야는 조직적 분열로 나아갔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다수파는 주로 조직국 성원으로 구성되고 있었으며, 소수파는 주로 편집국 성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노해동에서는『선봉』이라는 비합법 기관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편집국이라고 하면 바로 이 『선봉』편집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양자간의 이론적, 실천적 대립은 주요하게는 대선국면에서의 선전의 방향과 전술적 방침을 둘러싸고 심화되었는데, 1988년 13대 총선이 종결된 후 과거의 실천을 평가반성하는 과정에서, 1988년 4월 소수파는 '사회주의를 명확히 내건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결성'을 목표로 노해동으로부터 분리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출범준비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인적 규모는 학생 및 현장활동가를 포함하여 2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분리 당시 소수파의 규모는 현장활동가 120명 정도, - 성남 45명, 인천 18명, 편집부 18명, 노도운동단체, 지방 및 여타 지역 등 학생운동활동가 80여 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분리선언서에서는 ① 노동계급 전위정당 건설을 구체적인 일정으로 올려놓는 일, ② 당면 계급투쟁전선에서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영도를 부인하는 기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비판, ③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선전선동계획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1988년 6월 조직결성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문건(일명 TASK)을 작성하여, 사노맹의 조직사상적 기본방향을 확정하고 구체적인 조직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제헌의회그룹'부터 사노맹에 이르기까지 중앙지도부는 과거의 혁명운동과는 단절된 전후, 특히 1970년대의 학생운동 출신인자들로 구성되는바, 사노맹 중앙 지도부 역시 전원 전후의 혁명인자들로 구성된다. 사노맹의 초기 중앙위원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태웅, 박기평(박노해), 남진현 등이었다. 1992년 5월 15일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1년 조직개편시 대거 중앙위원의 교체가 있었는데, 구속되어 있는 박노해 등 특별중앙위원 2인 외에, 백태웅을 포함하여 7인의 중앙위원, 도합 9인의 중앙위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국가안전기회부,『사회주의 혁명 지하조직의 활동전모), 1992. 5; 『사회주의 혁명 지하조직의 활동전모 보조자료』, 1992. 5 참조).
사노맹은 조직적으로 제헌의회그룹의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있으나, 제헌의회 그룹과 비교하여 갖는 특징은 제1차 제헌의회그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조직'을 자임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주로 프롤레타리아적 성원이기보다는 현장활동 경험이 일천한 인텔리 출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노해동에 이르면 ①학생운동과정에서 성장한 현장지향적 인텔리 활동가뿐만 아니라 (혁명적 인텔리). ② 학생운동과정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할 수 있으나 상당한 기간동안 지역노동운동 혹은 현장노동운동 관련영역에서 활동함으로써 혁명적 활동가로서 일정한 자기기반을 갖는 인자들과, ③ 기층출신으로서 1980년대 신혁명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혁명적인 활동가로 성장한 선진노동자들(혁명적 민중)도 참여하게 된다. 기층민중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참여는 박노해 같은 인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박노해는 부친이 해방 이후의 좌익운동 출신이기는 하나 자신이 혁명적 활동가로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1970년대 이후 일련의 반파시즘 투쟁과정에서, 파시즘하에서의 자생적인 노동운동을 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②, ③의 경우는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되는 부분인데,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학생운동의 위상 및 전체 혁명운동의 발전전망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과정에서, 기층민중의 혁명적 발전 및 주력군으로서의 성장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형태의 혁명적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현장론'이라는 논거하에서 노동자로 존재이전하거나 현장노동운동의 외곽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선진 학생운동인자들은 대규모로 현장 혹은 현장 관련영역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과정을 통하여 지역적 기초에서, 개별사업장에서, 더 나아가 노동운동 속에서 자기기반을 확보하고 그것을 확대하는 경우도 많이 나오게 된다. 1980년대 후반 사노맹에서는 바로 이러한 발전이 반영되어 일정한 자기기반을 갖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 현장에서 성장한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며, 이것이 1980년대 초중반의 혁명조직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노맹 지도부의 구성은 1960, 70년대의 좌익조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신혁명운동인자들로 충원되기 시작하였음을, 전후의 운동과정에서 성장한 운동인자들이 본격적인 혁명적 좌익으로 성장하였음을, 나아가 신혁명운동인자들이 혁명적 인텔리 출신만이 아니라 기층출신 인자들까지 포함하는 발전적 구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사노맹은 '자신을 자생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전위조직', '노동자계급의 비합법 전위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인적 구성하에서 사노맹은 1988년 4월 사노맹 준비위를 구성한 이후 1989년 11월 12일 '지역ㆍ업종별 노조 전국회의'가 서울대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공식적인 출범선언을 하게 된다.

3. 사노맹의 구성 및 조직구조 (3) 사노맹의 인적 구성과 지역적 기반

사노맹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성장한 기층민중운동, 그 과정에서 기층출신의 변혁적 인자들의 형성확대 등의 조건 때문에 1960, 70년대에 비하여 변화된 구성을 보이게 된다. 즉 1960, 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들이 학생운동에서 성장한 인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데 반하여, 기본계급 출신(노동계급, 농민 등)의 인자들도 상당한 규모로 참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운동이 기본적으로 인텔리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학생운동의 이념적 발전에 기반하는 측면이 강한 반면에, 1980년대 운동은 기층운동 지향성이 보다 명확하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실체화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나타나는바, 사노맹은 이러한 기반 위에 서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비록 광범한 대중적 기반위에서 서는 것은 아니었으나, 객관적인 조건을 반영하여 1980년대적 전위조직의 한 형태로서의 사노맹은 선진적인 혁명적 인텔리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혁명적 민중들이 참여하는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사노맹이 1988년 4월경 '제헌의회그룹'으로부터 분리할 때 조직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2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 1990년 10월 안기부의 수사 발표시에는 1,600여 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 후 1991년 4월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정조직원이 500여 명에 이르고 지지자들이 2,500여 명, 전체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기부의 발표는 수사의 공적을 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압수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사노맹 정조직원의 규모는 300여 명에 정도에 이르고 지지자들까지 포함한다면 1,500여명 내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밀조직이므로 조직원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70년대의 비합법조직의 정조직원이 100명 이하의 수준이었다면, 1980년대 비합법조직의 하나로서 사노맹의 경우 비록 조직원은 아니나 지지자 혹은 협조자의 위치에 있는 인원들이 1960, 70년대에 비하여 훨씬 많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는 1970년대적 조직에 비하여 1980년대적 전위조직의 인적인 확대의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노맹의 주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공장소조의 결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노맹의 공장소조원은 포항제철, 선경화학, 서광, 해태 등 전국 500여 개의 공장 및 230여 개 노동단체에 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노해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구속되기 전, 전국적으로 100여 군데에 공장세포 창설작업을 하려는 과정에서 구속되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과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기부의 경우 자신들의 수사대상을 증폭시켜서 발표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또한 박노해 진술의 경우 재판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나온 언명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1987년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획기적 고양과 확산, 현장에서의 파업활동 등을 통한 혁명적 의식의 제고 등으로 사노맹의 인적 확대과정의 중요한 대상의 하나가 노동자들이 되고 있으며, 현장노동자에 대하여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점만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압수된 극비문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수도권위원회와 영남위원회는 역할이 맞먹는 정도이나, UC(울산-필자)등은 대공장의 존재로 영향력으로 보면 비중이 더 크다. 특히 MC(마산창원 필자), PH(포항 필자) 지역 대공장에는 우리의 영향력이 있다. 수도권에서는 공장에 영향력은 아직 적고, 단체 파견역량이 많다. "(국가안전기획부,『소위 확대개편된 사노맹의 조직실체』, 1991. 4, 163쪽)]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정치적 노동운동의 중요한 구성은 사실 학생 운동 출신의 현장활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주체적 역량이 제고되면서 사실 학생운동 출신의 도움 없이도 현장역량만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에 의해 현장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이 장애를 받는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현장운동의 중요역량만으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에 의해 현장운동의 자연스런 발전이 장애를 받는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현장 운동의 중요역량이 기층출신에서 충원되는 방향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사노맹의 조직확대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충원범위인 지역적 확장은 반파시즘대중운동이 1980년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보다 구체화된다. 사실 부마항쟁 이후 반파시즘운동의 지역적 협애성(狹碍性)은 완전하게 타파된다. 특히 1980년 봄의 정치적 경험, 1987년 대투쟁의 경험은 반파시즘운동이 일정지역에서만 전개되는 상황을 완전하게 반전시키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사노맹은 기존 노해동의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로 분리되어 만들어졌으므로 초기에는 특정지역에 한정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즉 사노맹의 초기 지역적 기반은 성남, 인천, 부천, 안양, 서울 중심의 활동가들로 한정된다. 그리고 과거 '제헌의회그룹'의 영향하에 있던 학생운동 역시 서울 및 일부지역에 한정되는 결과를 갖는다.
사노맹이 제헌의회의 다수파로부터 분리되는 1988년 4월부터 사노맹이 정식으로 외화되는 1989년 11월까지는 바로 사노맹의 형성과정이자 초기의 조직적 확대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989년 초까지는 주로 내적 조직정비 및 훈련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조직확대라는 측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1989년 초 대중사업의 활성화를 향한 '일대전환'을 한 이후 인천, 서울 정도에 머무르고 있던 사노맹 조직은 점차 대중활동이 강화되면서 시위원회의 형태로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부산, 포항, 대구, 구미 등으로까지 그 조직적 기반이 부분적으로 확대해가게 된다. 특히 지방에서 노동자 밀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울산, 구미 등지에도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1년 초의 조직개편에서는 지방사업의 활성화로 인하여, 지방위원회를 각 지방별로 분권화하여 일정하게 의사결정권을 갖는 활동단위로 전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점 역시 사노맹의 지역적 기반이 확장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확인케 해준다. 실제로 분권화 요구는 하부단위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인바, 2년여에 이르는 조직사업을 통하여 이미 일정한 정도로 그 지역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사노맹의 지역적 확대과정은 그 영향력하에 있는 사노맹계열 학생운동의 지역적 확대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준비위원회' 시기에 사노맹의 외곽학생조직이었던 '통일민주학생연맹'은 학내 기반이 주로 서울의 일부대학이었고 그 내실이 약하였던 데 반하여, 1989년 초 일대전환 이후 본격적인 외부조직사업을 하는 시기의 학생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지역민주주의학생연맹 (서민학련, SDSL)의 경우에는 상당한 조직적 기반을 서울권 대학에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서민학련은 1990년 5월 '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전민학련, 통상 민주주의학생연맹이라고 한다. JDSL)으로 확대되는데,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전민학련은 서울대 등 전국 45개 대학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대학 2학년 이상의 공식조직원은 400∼500 여 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서술을 종합하여 볼 때, 1970년대의 혁명전위조직에 비하여 사노맹은 변화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조직적 성원이 보다 확대된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학생운동 출신의 혁명적 선진인자까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포괄하는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1970년대의 남민전은 서울 중신의 조직이라는 성격을 부분적으로밖에 탈각하지 못하였으나, 사노맹에 이르면 지방조직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일정하게 포괄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필자는 여기서 사노맹의 인적 지역적 기반이 이전 시기에 비해 절대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노맹의 대중적 기초가 대단히 광범위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4. 사노맹 조직구조와 그 변화

조직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사노맹이 1960, 7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에 비하여 진일보한 측면은, 사노맹에서는 골간조직의 설치 및 그 분화, 외곽조직의 분화 및 독자적 활동, 각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조직 가동 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노맹의 조직적 발전의 특징을 사노맹의 시계열적인 조직분화과정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사노맹의 조직적 발전 및 분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사노맹 결성의 준비단계로서,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준비위원회'(이하 '사준위')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분리선언이 이루어진 1988년 4월경부터 1989년 11월 사노맹 정식출범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다시 두 개의 소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소시기는 '일대전환'이 이루어지는 1989년 초까지이며 제2소시기는 '일대전환' 이후의 시기이다. 다음 조직적 분화의 제2단계는 사노맹 정식 출범에서부터 1990년 후반의 검거선풍에 맞서 조직보위와 개편을 이루어내는 1991년 초까지의 시기이다. 다음 제3단계는 대규모 조직개편 이후 1992년 5월 중앙위원의 대규모 검거사건까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노맹 조직의 결성준비단계인 제1단계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88년 4월 1일 노해동으로부터 소수파가 분리선언을 하고 1988년 6월 1일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 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창립취지문을 작성 배포함으로써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년 7개월에 이르는 기간을 통하여 사준위 상태에서 조직의 정식 결성을 준비하게 된다.
먼저 제1소시기인 1989년 초까지 사준위는 지옥훈련 및 조직훈련을 통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육체적 자기준비, 조직결성의 물적 확보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게 된다. 일대전환 이전에 사준위는 주로 조직체계의 재구축, 조직결성의 인적 준비작업(혁명적 인자의 육성작업)과 물적 기반 확보작업에 집중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에 사준위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확보하기 위한 '지옥훈련'과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 조직사업, 물적 조건 확보와 선동 등 '필수실천'"을 두 개의 주요한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1988년 6월부터 10월경까지 중앙 및 지방의 핵심조직원 50여 명이 사상교육, 체력단련, 무술습득 등을 완료하게 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를 자임하는 조직원들이 그러한 자임에 부응하는 자질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발적 훈련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준위는 조직체계를 재정비하면서 제헌의회 시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조직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당초 분리선언 후 6개월의 준비를 거쳐 1988년 9월 1일을 기해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체적 조건의 확보를 위한 준비가 여의치 않아 출범은 거의 1년여가 늦어지게 된다.
제1소기기 말의 조직구조는 다음 그림과 같았다. 사준위 이후의 준비기를 거치면서 조직체계를 재정비하여 다음과 같은 조직구조를 완비해내게 된다.

<그림 2> 1988년경 사노맹 준비위원회 조직구도

먼저 분리 당시에는 주로 조직국과 『선봉』편집국이라고 하는 두 중심기구 중에서 『선봉』편집국에 소속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과거 편집국 성원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지방조직에서는 주로 안양ㆍ성남지역과 인천ㆍ서울지역 등 수도권위원회 소속성원들과 일부 영남위원회 성원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는 주로 내적 준비작업에 집중하였고 외곽조직을 발전시킨다거나 프랙션망을 파견해낸다거나 하는 외적 작업은 유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주로 분리 당시의 조직체계를 재구축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점에서는 골간조직의 분화수준이 낮고 골간조직의 지방조직 역시 지극히 미미하였다. 또한 외곽조직의 분화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프랙션조직 역시 본격적인 가동단계에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회그룹'의 초기 조직구조가 협의체적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중앙(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이 존재하는 구조였다고 한다면, 재건중앙(노해동)은 단일한 지도력을 갖는 하나의 중앙 밑에(과거 두 개의 중앙 역할에 해당하는) 조직국과 편집국을 두었다. 사준위 역시 이러한 노해동의 조직방식을 따라 초기에는 중앙위 산하에 편집국과 조직국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중앙위에 편집국과 조직국의 2인이 각각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집행하는 식이었다. 이때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종결정기관으로서의 중앙위가 실질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고, 실제적인 지도력을 가진 상임중앙위원이 조직을 지도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들이 모이는 모임을 중앙상임위원회라고 불렀다).
여기서 편집국은 사상적 지도의 의무를 담당하는 기구였으며, 주로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을 내용적으로 담보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대외적인 선전선동매체를 발행하는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조직국은 조직사업, 연락업무 및 사무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조직국은 백태웅을 중심으로 남진현 등이, 편집국은 박노해 등이 지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 중앙상임위나 편집국 혹은 조직국은 임시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지방조직은 수도권위만 가동되는 상태였고 이 수도권위에서는 서울, 성남, 인천, 안양지역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여타 지역에서는 수임자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수임자들은 지역별로 2∼3명이었는데, 경북지역의 수임자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금 많은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고, 조직사업은 본격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상태에 있던 사준위는 조직의 정식 결성을 위한 내적 준비작업이 완료되고 각 지역에서의 기초적인 인적 확충작업이 완료된 후에, 외적인 대중사업을 본격화하게 되면서 사준위 단계의 제2소시기로 이행해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이루는 요인으로는, 1988년 10월 말경부터 구속자들이 석방되고 수배자들이 수배가 해제되며 동시에 광주ㆍ5공청문회를 통하여 대중적인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내적 준비 차원으로부터 전환하여 외적인 대중사업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들 수 있다. 1989년 초 이후의 이러한 사업의 기본방향을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일대전환』이라는 팜플렛이다. 이 팜플렛에서는 대중사업방식에서의 일대전환을 표방하였는데, 대중사업방식, 노동조합활동방식, 비합법 정파활동방식 등의 대중적 전환을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SJD 선생 회견록」, 국가 안전기획부,『소위 확대개편된 사노맹 조직실체』, 163쪽 참조).
이 일대전환 이후 사준위는 대중활동을 대폭 강화하게 된다. 여기서 대중활동이라고 할 때는 대중운동 및 그 조직들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 그러한 운동들 속에서 조직원을 발굴하여 참여케 하는 것, 학생운동 등에 개입하여 정치적 지도를 수행하면서 과거 제헌의회그룹의 영향력하에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정비하여 하나의 조직적 대오로 편제해내는 것,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발간을 통하여 사준위의 정치적 방침을 일반화해내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겠다.
이 제2소시기를 경과하면서 사노준위는 <그림 3>와 같은 조직구조로 발전해가게 된다. 일대전환 이후의 조직체계에서는 중앙골간조직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중앙상임위원을 없애고 중앙위가 실질적인 권한과 결정권을 갖도록 한 것이며, 부분적으로 하부지도기관의 독자적 권한을 확대하였다. 1989년 말 사노맹 출범시까지 이루어진 조직적 발전으로서는 먼저 중앙골간조직의 분화와 지방조직의 분화, 외곽조직 및 프랙션조직의 건성을 들 수 있다.

<그림 3> 1989년경 사노맹 준비위원회의 조직구도

먼저 편집위의 경우 연구정책기능을 강화하여 그 산하에 정치, 경제, 노동, 농민, 학생문제연구팀을 만들고 각각에 연구원을 위촉하여 일종의 내동자(內動煮)로서 정세분석자료를 만들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중앙조직에서는 기존에 조직국으로 통합되어 있던 업무가 대폭 분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조직규모가 확대되고 조직원이 증대되면서 내부의사 전달을 전담할 사무국, 즉 조직문건 수발을 전담할 부서가 분화 신설된다. 그리고 조직국의 고유한 업무인 조직사업활동이 분화되는데, 외곽기관(예컨대 노동문학사와 같은 부설기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지도할 프랙션이 설정되고, 시도 및 지방위원회가 보다 활성화가 되어 각계 대중조직(예컨대 전국회의 등)에 대한 프랙션이 가동되게 된다. 이 시기의 조직구조 변화의 중요한 의의는 그 이전 시기에는 중앙상임위원(백태웅, 박노해)이 편집사업과 조직사업을 각각을 직접 관장하면서 중앙과 하부가 실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각 지방위원회와 편집위원회, 각종 프랙션조직이 이전 시기와 달리 분화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외곽조직(사노맹 내적으로는 편집위원회나, 사무국 등은 부속기관으로 설정하고 있고, 노동문학사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등은 부설기관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은 골간조직을 중앙위, 지방위 및 부속기관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외곽 방계조직이라고 한 것은 부설기관을 지칭한다)으로서 노동문학사(『월간 노동해방문학』 발간)와 노동자대학, 민주주의학생연맹(민학련) 등도 만들어지게 된다. 먼저 1989년 4월호부터 발간된 『월간 노동해방문학』은 정치적 선전사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기에 상당한 조직력이 투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발행인 밑에 실질적으로 내용적 지도를 담보하는 상임기획위원장이 있고, 그 산하에 편집국과 사무국, 영업국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사노맹은 편집위의 지도 아래 상임기획위원장(사노맹의 조직원)이 운영을 전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보인다.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독자적인 기관이며 프랙션이 파견, 지도하는 기관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준위의 부설기관 혹은 외곽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노동자대학을 들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자대학은 사준위만이 추진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운동의 여러 그룹이 연합하여 추진하는 것이나, 사준위의 영향력 및 지도력이 강한 상태였던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다름으로 사준위의 외곽사업으로서 민학련에 대한 지도를 들 수 있다. 사준위는 제1소시기에서부터 학생운동파견망을 설정하여 그간 제헌의회그룹 노선에 동의하고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자파의 외곽 학생운동조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노맹은 통일민주학생연맹(이하 '통민학련')의 구성과정, 서민학련의 결성 및 전민학련으로의 확대과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학생운동에 대한 조직적 지도의 '구조화'를 시도하게 된다.
사준위는 공식적 출범을 준비하기 위하여 사노맹의 본견적인 활동을 가능케하는 각 운동 단체의 파견망 구축, 각계 영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조직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당시 사회운동단체에 파견망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구축된다. 즉 전국회의, 전국농민회총 연맹, 노동자대학,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여러 대중단체들(예컨대 종교단체)등이었다. 사준위는 당시 변혁운동 진영의 대중조직들에 파견망을 파견하여 단순정보의 수집에서부터 정치적 지도력의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적 사업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조직적 발전으로서는 지방조직이 시위원회체계로 분화발전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준위 초기에는 인천ㆍ서울지역위원회와 안양ㆍ성남지역위원회로만 분화되어 있었는데 각 지역별 특수성에 따라 조직사업을 확대하기 위하여 시위원회체계의 체계로 지역조직을 분화해가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위원회는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포항, 부산, 대구, 구미 및 기타 시수임자로 구성된다. 사준위의 시기가 지나면서 수임자가 시위원회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면 시위원회로 전환시키고, 그렇지 못한 수임자들은 시수임자로 설정 운영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위원회는 지역적 조직을 완결해내고 필요한 조직에 프랙션망을 건설하는 것으로 상정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9개 지역위원회가 모두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그리고 영남지방의 대공장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위원회의 구성 및 활동이 일정하게나마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2소시기를 통하여 그 이전과는 달리 골간조직이 분화될 뿐만 아니라, 골간조직, 프랙션조직, 외곽조직의 구분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사준위의 시기를 거쳐 1989년 11월 노동자대회장에서 사노맹의 정식출범을 선언하게 되면서 사준위 상태에서 사노맹으로 정식 전환하게 되며, 이에 따라 조직적 분화의 제2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 시기는 1991년 1월 중앙위에서의 조직개편시까지의 시기를 설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정식출범한 이후 준비과정에서 확보된 조직적 기반에 의거하여 자신의 조직적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조직적 활동을 수행하며, 이에 대해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이 주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한 조건이므로 출범 이후 사노맹은 권력의 집중적인 추적과 탄압을 받게 된다. 따라서 사노맹의 경우 본격적인 활동시기는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과의 대결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 말의 조직구도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직적 측면에서는, 출범까지 골간조직을 확보한 후 그것을 분화시켜가며 나아가 외곽조직을 확산시켜가고 그것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해가며, 동시에 여타의 정파, 민중진영의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프랙션조직을 더욱 확대해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림 4> 1990년경 사노맹의 조직구도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외곽조직의 분화로, 먼저 노동문학사라고 하는 문예창작부를 독립적 문예조직인 노동해방문학실(이하 '노문실')로 확대개편한 것을 들 수 있다. 노문실은 1990년 2월 노동문학사에서 비합법 조직으로 분리 독립하여 개설된다. 이 노문실은 여러 문학계열(민족해방문학계열, 민중적 민족문학계열, 민족문학계열, 노동해방문학계열 등) 중에서 노동해방문학계열에 속한 문예활동가들의 비합법 문예전문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문실은 '민중문학통일전선' 형성의 일환으로 '노동자문학가동맹' 결성을 추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 노문실은 전국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지부의 결성을 시도하고 지부 결성의 일환으로 '노문실 대학생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주도하에 마산ㆍ창원의 대학생문예조직(전선의 불꽃)을 결성하게 된다(1990. 5).
다음 중앙위원인 백태웅은 대학원 및 인텔리 출신의 전문연구역량을 갖는 소수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이하 '사과원')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사노맹의 선전선동활동의 자료개발및 노동계 급당 강령작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구축작업을 수행하는 기구라고 판단된다. 이 조직은 1990년 5월 '준비위원회' 명의의 내부제안문을 제출하였으며, 사과원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 8일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1990년 11월 창립제안서를 배포하게 된다. 그 후 1991년 1월에 정식으로 출범하며 1991년 6월에 재개편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과원은 사상투쟁, 이론투쟁의 영역에서 전위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에 복무하는 사노맹의 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인 표현에 따르면 사노맹은 사관원이 독자적인 연구단체로서 일종의 연구자전위조직일 뿐, 사노맹의 조직원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며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사노맹의 외곽조직으로서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의 설립을 들 수 있다. 1990년 1월 중앙위원 백태웅, 남진현을 중심으로 하여 사노맹과 동일한 이념적 기초 위에서 활동하는 '선진적인 학생정치조직'으로서의 전민학련에 대한 조직적 지도를 수행하고자 설립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이다. 사노맹은 서민학련을 중심으로 전민학련 구성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사회주의 학생연구소를 통하여 실질적인 조직적 지도를 행하고 있다. 사회주의학생연구소의 건설은 학생운동 파견망의 위상을 격상시켜 그것을 별도의 부설조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파견자망 구축시도를 들 수 있는데,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서 결성된 각종 대중단체 및 운동단체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각 대중단체의 활동에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고, 이것은 출범 당시에 비하여 상당히 확대된 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조합의 전국적 단일조직인 전노협, 민중당 등에 파견자망을 구축하여 사회주의운동세력의 확대 및 대중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행하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도 파견자를 보내 내부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발전의 제2단계에서는 1989년의 조직구도가 유지되면서, 즉 기본구조의 변화보다는 외곽조직의 확대분화(예컨대 사회주의학생 연구소, 노동해방 문학 실 등), 프랙션 활동의 확대(전농 등) 등 부분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발전의 제2단계 시기는 조직원들의 검거사태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제1차 검거는 1990년 9월 17일 사노맹중간책임자인 현정덕의 구속을 계기로 한 일련의 구속사건 (제1차 보위사고), 그 후 10월 1일 중앙위원 남진현의 구속을 계기로 한 일련의 구속이 그것이다(제2차 보위사고).

<사진> 1991년 3월 12일 구속된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

이러한 검거사태를 계기로 사노맹은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그로 인해 조직적 분화의 제3단계로 변화해간다. 1991년 2월경까지를 통하여 완결된 조직개편은 제1차 보위사고와 제2차 보위사고를 맞아 조직을 복원하고 종래 활동방식을 혁신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노맹의 내부문건인 『조직개편 투쟁에 관 한 지침』(국가안전기회부, 『사노맹 유인물분석』 제8집, 1991.10, 98∼106쪽)에 따르면 조직개편 투쟁의 기본적 목표로서 ① 중앙지도 기관의 강화 ② 지방조직의 건설과 분권화 ③ 프랙션의 독자활동 단위화, 분권화 ④ 통일성의 강화 ⑤ 사업의 공식화와 사무전산화 ⑥ 강령과 규약의 명문화 ⑦ 대중성의 강화 ⑧ 물적 조건의 안정화 등이다. 즉 사노맹은 중앙기관의 통일성 있는 지도와 각 하부기관의 독자적인 활동성이 통일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지방기관과 프랙션조직의 분권화 및 독자활동단위화라는 원칙 위에서 조직을 개편하고, 그에 대한 중앙위의 통일적 지도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의식하에서 조직개편을 단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 5> 1991년 1월 조직개편 이후의 사노맹 조직구도

구체적으로 조직개편을 보자. 먼저 중앙위가 기존의 4인에서 9인으로 확대되는데, 이에는 구속된 박노해와 남진현 등 특별중앙위원 2인 외에 중앙상임위원 2인, 정책위원장, 조직위원장, 수도권위원장 등 7인을 포괄하여 총 9인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의 최고 심의ㆍ결정기구로서의 중앙위원의 확대는 조직의 분권화라는 각도에서 각 중요기관의 책임자가 결정기구에 참여함으로써 의사결정과정의 중복을 막고 각 중요기구가 자신의 관할영역을 최종책임지는 독자적인 사업단위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적으로 지방위를 중심으로 한 지방조직의 분권화와 독자사업단위화라는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앙상임위원은 중앙위로부터 위임된 범위 내에서 일상적인 조직의 결정을 내리고 조직을 총괄지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중앙위가 각 조직의 중요사항을 모두 최종 결정하였던 상태에서 탈피하여, 분기별로 회합하여 주요 방침만 결정하고 나머지 집행을 각 기관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전화하게 된다.
다음으로 그간의 조직활동의 확대를 반영하여 중앙정책위와 조직위가 분화되었는데, 정책위는 "당면정세와 전술방침 수립 등 사노맹 투쟁노선에 입각하는 선전선동의 내용을 안출해내고 외곽조직 및 파견망 조직의 활동방침, 대중단체의 투쟁방침을 안출하는" 등 정책적 지도임무를 주로 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분과, 통일국제분과, 정치분과, 대중단체 분과, 편집부로 나뉜다. 여기서 편집부는 기존에 편집위가 주요하게 담당하였던 『월간 노동해방문학』발간지도사업과 사노맹 명의의 각종 유인물의 내용을 책임지게 된다.
다음 조직위는 조직적 지도임무를 담당하는데 연락통신부와 사무부(총무부), 지방사업부, 대중사업부(파견부)로 나누어진다. 조직체계상 조직국에 해당하는 일을 담당하는데, 연락 통신부는 부서간, 부서와 외곽조직, 부서와 파견자 및 조직간의 연락, 통신, 문서 수발을 담당하고, 사무부는 각종 자료의 관리 및 재정사업을 총괄하며, 지방사업부는 지방조직의 확대추진, 각 지방위 하부조직의 결성 및 지도관리를 담당한다. 그리고 대중사업부는 그간 중앙위 산하에서 관장되던 각 운동단체의 프랙션조직망을 일괄 관리하며 대중운동 단체의 투쟁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지방위는 이젠 체계에서는 9개의 지역위원회로 되어 있었는데, 각 지방위를 광역화하여 4개 권역으로 나누어 활동하게 된다. 기존의 각 지방위는 독자적인 결정권한이 제한되었으나, 분권화하면서 광역 지방위는 자신의 관할사업에 대해서 독자적인 결정권한을 갖게 된다. 여기서 수도권위는 서울, 인천, 경기지역 위원회로 구성된다. 영남위는 울산준위, 마창준위, 대구ㆍ포항 수임자, 부산수임자 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수도권위와 영남위의 역량이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고 하는데, 영남위는 대공장에 대한 영향력이 일정정도 확보되어 있으며, 그 주요한 기반이 공장역량으로 구성되는데 반해, 수도권위는 대부분의 역량이 단체파견역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남위의 경우 대구지역위는 안동, 원주, 포항, 구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진노동자에 대한 조직사업이 확장되었으나, 보위사고 이후 대구와 포항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음으로 중부위와 호남위는 준비위 상태로 존재하고 있고, 강원, 태백, 경기도 이천 등의 지역에는 수임자가 활동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각 지방위는 각자의 실정에 따라 중앙의 기관들에 준하는 하부실무 전문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편집국, 사무국, 연락사무국, (정치)선전국 등이 그것이다.
개별 지방위 산하에는 국이 존재하고 있으며 지역사업 담당 국장과 부속기관 국장이 지방위의 구성요원이다. 부속기관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무국, 선전선동 담당부서, 공장사업 담당부서, 지역의 여타 정파에 대한정치적 사업을 담당하는 정파 담당부서 등이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방위의 하부에는 공장 소조 담당부서가 있는데, 각 공장에 소조를 확대하여 이것을 공장프랙션 조직, 나아가 공장세포위원회로 발전시키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공장소조의 조직화 사업의 진전 정도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명확히 단정할 수 없으나,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일정한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활발한 지방의 경우 지역을 더욱 세분화하여 지역국을 두는 경우도 있다. 영남위의 경우 발전속도가 빨라 8개월 사이에 200여 명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한다. 영남의 경우 울산, 부산, 구미 등의 지역국을 설치하고 있으며, 주 업무는 일반사업부(민족민주운동단체사업, 노동운동단체사업)와 공장사업으로 나뉘어 있다. 호남지역이나 기타 농민지역의 경우는 농민사업부를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조직구도는 1991년 초의 상황에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1991년 3월에 박노해 및 김진주가 구속되는 등 제3차 조직보위사고가 발생하게 되면서 조직개편에 관한 문건들이 발견됨으로써 조직개편의 윤곽이 제시되었는바, 비합법조직의 특성상 조직구조가 노출되었으므로 1991년 5월 중앙위에서 보위사고에 대응한 부분적인 체제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이때 이루어진 조직개편의 내용으로는 ① 중앙조직위를 중앙조직국으로 중앙정책위를 중앙정책국으로 개편한다. ② '중앙상임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총책인 백태웅, 중앙조직국장(丁明燮), 중앙정책국장(殷秀美)으로 구성된 '중앙상임위'를 신설하여 중앙단위의 일상적 집행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③ '전산부', '시각매체연구소' 등을 비서실 산하에 신설한다. 중앙골간조직 부속기관인 전산부는 '조직 효율적 관리 및 조직보위', '조직의 사무의 전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설립된 전문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중앙상임집행위원장의 직속기관으로 위치지어진 것 같다. 시각매체연구소는 비디오그래픽 등 시각매체를 이용하여 선전선동물 제작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91년 5월 이후에 이전 단계와 달리 형성된 중앙부속기관으로서는 '노동자영상교육센터'(노동자들에게 노동해방사상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노동자정치교육기관' 설립을 목표로 하는 기관)가 있다.
다음으로 파견망이 확대됨으로써 프랙션조직을 구축하여 각계에 조직적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도 지속되었는데, '민중진영 단일정당추진위원회'에 파견망을 보냈고, 보건의료 분야 및 종교기관에 파견망을 확대하여 조직의 외부영향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사노맹은 각 지역의 공장소조를 구축하려는 작업에 많은 힘을 투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골간조직의 건설 및 분화, 외곽부문조직의 분화 및 조직적 활동의 확대, 각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조직의 가동이라는 점을 볼 때 1970년대의 남민 전에 비하여 사노맹은 그 조직적 발전정도가 더욱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곽 방계조직에서 외부 대중운동에 상응하는 부문별 조직분화를 시켜내고 그에 기초하여 각 계의 변혁운동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1970년대와 비교하여 상당한 조직적 발전의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1) 사노맹의 활동

1980년대의 전위조직활동이 1970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갖는 두드러진 특징은 투쟁의 전명화 및 대중투쟁에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는 변혁적 인식이 선진활동가들의 수준에서 그리고 선진대중의 수준에서 확산 되어가고, 따라서 전위적 인식과 대중적 인식의 괴리가 일정하게 극복되며, 또한 합법적 논의공간에서 일정하게 자유롭게 제시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사노맹의 활동은 1970년대적 수준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사노맹의 조직활동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사노맹의 대외적인 투쟁활동,둘째로 대중투쟁과 관련한 활동, 셋째로 혁명조직의 기본사업이 라고 할 수 있는 내부교양사업, 넷째로 '보급투쟁' 활동을 들 수 있다.
먼저 사노맹에서 대외투쟁이 갖는 비중은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 전위조직에 비하여 더욱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1960년대 조직에서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정간(精幹)요원의 육성ㆍ은폐의 과제는 대중운동 속에서 혁명적 인자들이 자생적으로 육성되어 나오고 완전 한 은폐의 필요성이 감소하기 때문에, 그 과제는 약화되고 대회투쟁에 일차적인 주안점이 두어지게 된다. 즉 '방어형 조직'이라는 성격보다는 '투쟁형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 통일혁명당은 그 자체가 비밀조직적 성격을 띠면서 일종의장기적인 준비조직으로서 활동을 하였고, 1970년대 남민전에서도 한편으로 당면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그 기조는 정간요원의 발굴 육성이라는 장기적인 과제 수행에 조직의 상당한 역량을 투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1980 년대 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은 당면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과 그것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과제에 일차적인 비중을 두는 조직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사노맹은 창립 후에 사회주의적인 선전선동, 가두투쟁 및 선전선동, 가두투쟁 및 선전선동, 경찰서 등 권력의 하부통치기구에 대한 독자적인 타격투쟁, 기타 다양한 대중투쟁에의 참여 및 선전선동작업에 광범하게 참여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공개화되지 못하였던 사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선동을 사노맹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주의 공개적인 선전선동을 위하여 내는 발행물로는 중앙기관의 선전선동기관에서 발행하는 팜플렛과 3∼4쪽의 간단한 '리플렛', 1∼2쪽의 단순 유인물 등이 있으며, 외곽기관에서 발행하는 매체로는 노동문학사의 『월간 노동해방문학』, 사회주의학생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새벽바람』. 기타 지방위 및 그 하부기관이 발행하는 기관지나 유인물 등이 있다. 반파쇼 투쟁을 위한 가두선전선동도 사노맹이 전개한 투쟁적 활동 중위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인확성기를 동원한 대형 선전선동활동, 대형건물에 선전선동 플래카드를 공개적으로 부착하여 반정부투쟁을 선전선동하는 사례도 들 수 있다. 또한 1989∼1990년 사이 시내에서 파출소를 공개적으로 타격한다거나 화염병을 투척하는 사례, 1990년 5월 메이데이투쟁시 주자파출소에 대한 타격투쟁 등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러한 선전선동, 타격투쟁 등은 1970년대 선전선동이 소규모에 그치고 있었고 단속(斷續)적인 활동이었던 점에 비 추어본다면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은폐적인 활동이 아니라 반(半)공개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1970년대에 비하여 반합법공간이 확장된 데도 기인하지만 1970년대에 비하여 보위능력이 훨씬 발전한 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후 사노맹은, 1990년 5월의 대규모 반민자당가두투쟁시, 1991년 5, 6월 가두투쟁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깃발과 슬로건, 팜플렛으로 선전선동활동을 공개적으로 수행해왔다.

사노맹의 투쟁적 성격은 무장투쟁을 -비록 단기적인 시행사항으로 상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하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박노해는 민중무장봉기의 단계 별 이행과정을 제3단계(제1단계 : 자생적 무장화 단계, 제2단계 : 계획적 조직적 무장화 단계, 제3단계 : 기존 국가권력의 무장력 제압과 접수단계)로 구분하고, 궁극적으로 지배권력의 무장력에 대한 무장적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하는 인식하에서 이에 대한 일정한 준 비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예컨대 폭발물 개발을 추진한다거나 무기고 탈취계획을 수립한다 거나 지방위별로 민중무장력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 것 등이 이러한 것이다(물론 사노맹은 궁극적인 힘의 근거가 무장력에서 유래하며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혁명의 일반적 목표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무장이 수반된 민중봉기'가 불가피하다는 일반론적 인식을 넘어 서서, 현실적인 투쟁형태에서 무장투쟁 혹은 도시게릴라투쟁을 사고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둘째, 1980년대에 오면 각계의 대중운동이 활성화된 채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노맹의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와 수준이 훨씬 확장된다는 점에서 사노맹 활동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정도라는 점에서 보면, 대중투쟁 전개과정에 집단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영향력 수준을 뛰어넘어 전위조직이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대중운동이나 대중조직체에 대해 프랙션적 지도를 포함하여 일정한 조직적 지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위조직이 대중조직에 대하여 일관된 조직적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노맹에서 나타나는 대중투쟁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라는 점은 먼저 현단계 대중운동의 주력 중의 하나인 학생운동 내부에 자신의 외곽조직을 확보함으로써 학생운동의 흐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1970년대와 달리 사노맹 의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의아해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조직적 영향력은 전체 학생운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학생운동의 일부 정파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1988년경 NL이 주도하는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하 '서총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등에 대립하여 CA그룹은 학생운동조직인 서울지역대학생총연합 건설추진위원회(이하 '서건추')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CA 다수파가 NL로 합류하면서 서건추는 서총련 소수파로 통합된다. 이로 인해 제헌의회그룹의 학생 운동 지도선이 부재하는 상황이 된다. 서건추가 서총련으로 통합된 후에 상부지도가 없는 관계로 통하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운동의 제세력들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준위가 결성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를 시작하게 되고, 이러한 지도하에서 통합에 합류하지 않은 조직들이 모여 통민학련(외대, 한양대, 동국대 중 심)을 결성하는데, 이 통민학련은 1989년 상반기 민주화투쟁 학생연합(이하 '민투학련', 서울대, 건국대 중심)이라고 하는 (CPC계)조직과 통합하여 서민학련을 결성하게 된다(후에 양자는 조직적으로 결별한다). 사노맹은 이처럼 통민학련부터 시작하여 서민학련 및 전민 학련(민주주의학생연맹의 전국적 조직)결성에 이르는 과정에 지도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지도노선을 따르는 학생운동세력을 창출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학생운동 내에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 검거시에 전민학련 위원장도 사노맹 조직원으로 구속된 바 있다. 이 전민학련은 사노맹의 이념적 지도를 따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투쟁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러 차례의 가두투쟁에서 전민학련은 독자적인 이름으로 가두선전선동작업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은 이러한 방계조직에 대한체계적인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학생연구소'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전민학련에 대하여 전략전술적 지침을 내리고 정 치적 지도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과 학생운동 방계조직과의 조직적 지도 피지도 관계를 보면, 직접적인 조직적 지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1980년대적 특징의 하나이기도 한데, 비록 전위조직이 변혁운동 전체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정파적 그룹 내에서는 -조직적 연관을 갖건 갖지 않건 간에- 일정하게 지도 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노맹 역시 자신의 변혁이념인 '민족민주혁명론'(NDR) 그룹 내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70년대의 전위조직에 비하여 훨씬 높은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대중투쟁과 전위조직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학생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넘어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가 1970년대에 비하여 부분적으로나마 확대되었다는 점도 사노맹 활동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은 기층 대중운동이 활성화되고 기층운동 가운데서 선진적인 변혁이념에 공감하는 인자들이 보다 확대된 규모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사노맹은 1980년대의 노동운동의 조직적 대중적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조직들 및 노동조합 내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작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다양한 프랙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 나타난 각계각층의 사회운동조직 특히 노동운동 및 변혁운동조직들 들에 자신의 입장과 조직적 입장을 관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간 사노맹은 노동자대학,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농민회총연맹, 국민연합, 전국빈민연합, 민중당 내에 파견망을 보내 어 그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의 문건에 따르면, 전노협이 결성되기 전의 전국회의 산하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1988. 12. 22) 결성시부터 파견자를 2∼3명 정도 보내어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양한 운동 조직에 자파조직원을 파견하여 각 공개단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관철되도록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91∼1992년경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중당', '민중진영 단일정당추진위원회', '민중회의',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파견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으로도 보인다.
사노맹은 혁명의 주력군으로 상정하고 있는 노동계급 내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 한 조직적 시도를 하는데, 위의 파견망 외에도 전국의 많은 공장에 세포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사업장을 혁명의 요새로 만들기 위하여 성남, 안산, 창원, 포항, 울산, 태백 등지의 기업노조와 업종별 노조,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병원, 지하 철, 운수노조 등에 조직원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가능한 사업장에서 특히 서울수도권과 울산 등 동남공업단지 내에서-공장소조작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국가안전기획부, 『사노맹의 실체 수사결과』, 1991. 10, 38∼40쪽). 이러한 결과로 울산 등 몇 몇 지역에서는 현장의 선진노동자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장도 존재 한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위에서도 중앙조직에 상응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데, 지역에 존재하는 노동운 동단체에 파견망을 둠으로써 조직적 연관관계를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동시에 공장사업부를 두어 개별공장에 자신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그것을 공장프랙션 혹은 공장세포조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의 시도와 함께 계기에 따라 파업투쟁을 확산하기 위한 선전선동작업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작업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중앙조직국 산하에 공개투쟁조직인 '노동해방선봉대', 비공개 투쟁조직인 '사회주의선봉대', '선동소조'등 을 결성하여, 집회 및 파업투쟁이 있는 곳에 투입하여 선전선동을 전개하였다.
사노맹의 공장사업은 1989년 초 '일대전환' 이전에는 주로 학생운동 출신 및 선진노동자 들을 중심으로 한 내적 훈련에 초점이 주어지고 있었고, 대중사업으로서의 공장활동이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대전환 이후 ① 대중조직에서의 프랙션 활동 ② 지역 사업 ③ 지역단위에서의 공장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사노맹 자체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장사업 자체도 활성화되기가 어려웠고, 사노맹 출범 이후에야 더욱 확대된 규모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1991년 이후에는 공장활동 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에서 사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의 경우 전반 적인 이면적 심화와 각계각층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조응하여 노동운동의 선진활동가와 선진 대중을 일정하게 확보함으로써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인적 기반을 더 확대된 규모에서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인, 인적인 영향력의 확보시도와 함께 사노맹이 1970년대와 달리 다양 한 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여러 운동 영역 및 인자들에게 홍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사노맹은 "노동해방 이념과 사회주의이념을 선전선동하는 합법적인 매체" 로서 『월간 노동 해방문학』을 정규적으로 발행함으로써 선진활동가 및 선진대중의 정치적 인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회적인 경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노동해방과사회주의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함으로써 대중운동의 정치적 지향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통혁당의 경우『청맥』이 있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독자 적인 이념을 선전 선동하는 잡지라기보다는 당시 진보적인 잡지의 한 형태였을 뿐이었고, 1970년대 남민전은 우회적이건 직접적이건 자신의 이념을 유포할 수 있는 잡지의 창간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반면에 1980년대 사노맹은 확장된 정치적 공간의 영향 때문이기는 하나, 공개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선동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기적인 팜플렛인 『긴급전술결의』,『한걸음 더』,『새벽바람』등을 발간함으로써 자신의 이념을 확산할 수 있는 기제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도 1970년대에 비하 여 일정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쩨로 사노맹이 행한 내부 교육사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인적 재생산이라는 점에 서 사노맹의 내부 교육체계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보다 체계화, 정교화된다는 점을 지적 할 수 있다.
먼저 사노맹은 엄혹한 현실 속에서 조직보위를 위하여 엄밀한 선발기준하에 조직원을 포섭하고 있다. 외부의 한 성원이 조직원으로 가입하려는 경우 추천자가 '가입추천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본인에게 가입원서와 자기소개서 및 정치사상 소견서를 제출하도록 한 다음, 포섭대상자의 '사상성', '비밀활동능력' 등 50여 가지 기준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게 된다. 이때 포섭대상자의 출신성분, 투쟁경력 등에 대한 신원사항을 은밀히 조사하고 설문조사, 직접면담을 통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검토한 후 가입케 하고 있다. 선발된 후에도 6개월 이내의 후보조직원의 검증기간을 거쳐 조직원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직원 자격기준은 초기에는 조직보위 차원에서 대단히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나, 1991년 1월 조직개편 후에는 가입자격을 완화하여 과거 사노맹의 지지자 격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충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조직원으로서 가입한 다음에는 1개월에서 1년 간의 '사상교양', '체력훈련' 등 소위 지옥훈련을 실시하여 직업적 혁명전위투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옥훈련은 사준위 시기에는 조 직원으로서 서약한 모든 조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조직원으로서 선발된 경우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인식과 실천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무장과 혁명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실시'-'혁명의식 강화를 위한 좌우면 설정'-'조직 활동의 목표달성을 위한 슬로건 제정'-'직업혁명가로 육성하기 위한 소위 지옥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엄혹'한 현실 속에서 직업적 혁명활동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 고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지옥훈련만으로 훈련과정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더하여 '필수실천'이 뒤따라야 완전한 조직원으로서의 교육이 완결된다. 조직원으로서의 사상적 무장을 위하여 세미나를 주 1회 개최하여 투쟁이념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그것이 끝난 후에는 투쟁이념 정립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세미나과정에서는 '민족민주혁명'이념,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세인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다. 마지막에 실시되는 지옥훈련에는 체력훈련, 무술훈련, 실무훈련(통신연락 등), 팀워크훈련 (위장, 상황판단 훈련 등), 담력훈련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사노맹은 1970년대까지의 비합법 전위조직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조직원 후보자의 '성분' 을 분석하고, 조직원으로 선발된 경우에도 강도 높은 조직원 교육을 통하여 내부의 이념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혁명가로서의 이념적, 실천적 자질을 향상시키려는 시도를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70년대의 내부교육과 1980년대의 내부교육이 다른 점은 혁명적 인식을 획득하기 위한 일반적인 교양이 내부 교육과정에서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는 대중의 이념적 급진화가 진전되고대중운동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조직내부 에서 수행되어야 할 혁명적 교양내용을 습득한 상태에서 조직원으로 가입하게 되므로 내부 교양에서는 정파적 입장에서의 정치사상 교육 등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조직원으로서의 교양내용은 '10대 보위수칙' 등 조직 및 조직원의 보위를 위한 훈련지침, 조직원 상호간의 접선방법(무인포스트를 이용한 접선방법 등), 내부의 비밀을 위한 은어사 용법 등이 들어있으며, 10대 보위수칙에는 기밀유지 방법, 미행차단방법, 기타 안전대책 등 이 포함되어 있다.

사노맹은 조직원으로 가입하여 조직활동을 시작한 후 이를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평가(暗行點檢)하여 더욱 높은 활동을 위한 평가 및 지도자료로 활용하기도한다. 중견 핵 심간부인 현정덕이 구속되면서 드러난 자료에 의하면, 하부조직원 역량평가서를 작성하는데, 평가기준은 ① 조직적 안정성 ② 임무수행 능력 ③ 비밀활동 능력 ④ 이론 및 조직지도 능력 ⑤ 재정 능력과 임무수행의 조건정도 등이다. 이 각각의 평가기준을 다시 세분하여 그 각각에 대하여 9등급(상상, 상중, 상하,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으로 평가하고 하부조 직원에 대한 지도 및 비판의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결국 1980년대 전위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의 경우 가입 및 승격과정의 체계화, 내부혁명교 육체계의 제도화, 일반 혁명교양을 전제로 한 특수한 혁명교양 제도의 확보 등으로 1960, 70년대에 비하여 더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동반한 인적 재생산메카니즘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사노맹의 활동을 '보급투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즉 사노맹이 자신의 물적 재생산을 위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으며 그것이 얼마나 체계화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적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사노맹을 살펴보게 되면, 산업화의 진전으로 이전시기에 비하여 객관적인 물적 자원동원력이 확대되고, 전위적 활동인자들과 대중들의 정치의식상의 괴리가 축소되기 때문에 내부적인 자금조달력이 대단히 확대된다. 그래서 사노맹의 경우 북한이나 일본의 자금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체의 회비, 특별기부금을 통하여 조직활동자금을 마련하게 된다. 물적 재생산 능력이 객관적 조건, 주체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확대강화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사노맹은 계급투쟁의 3대영역을 조직, 사상, 재정으로 설정하여 재정확보 활동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재정사상이 아닌 사회주의적 재정사상에 기초하여 재정을 모집, 운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노맹은 조직활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보급투쟁'(보투, BT라고 지칭)이라고 명명하고, 4차에 걸쳐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하게 된다. 초기의 조직 결성자금을 마련하기 위 한 활동은 '신혼비 작전'이라고 명명하는데, 이 작업은 1988년 9∼11월에 집중되었고, 부분적으로는 1989년 초까지 진행된다. 여기에서 1억 2,000여만원의 자금을 모집하여 아지트, 인쇄시설 등 조직적 사업의 물적토대를 확보하게 된다. 2차로 1990년 8월부터 11 월간에는 당국의 수사가 확대되면서 '도피 및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박노해 치료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약 5,000만 원 정도의 자금을 모금하게 되며, 3차로 1990년 12월 중순부터 조직개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확보작전을 '호랑이 사냥 작전'으로 명명하고, 자금확보에 나서게 된다. 4차로 사노맹은 1991년부터 1992년 초까지 '지각변동'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보급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약 5억 원 정도의 목표액). 이러한 자금확보 활동은 박노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상당부분 매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물적 재생산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사노맹은 이러한 비정규적인 기부금을 통한 조직운영자금 확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서 수익사업을 통하여 조직 자체 내에서 체계적으로 확보하려는 시도를 행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사노맹 후원자 3개팀 12명으로부터 사업자금 3,000만 원을 확보한 후, 소위 '인삼사업계획'을 수립하여 경기도 이천 및 발안의 인삼밭에 1,400만 원을 투자, 입도선매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알루미늄 피막처리기술을 이용한 신소재 개발사업에 착안, 재정후원자로 하여금 5,000만 원의 자본금을 출자케 하여 이윤을 분배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이 계획은 노출되어 중지된 것으로 판단된다-지속적인 수익 사업을 계획,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안정적인 조직운영자금 확 보를 위하여 학원, 광고기획사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사노맹은 또한 조직적으로 월간지 등에 기고하여 사노맹의 대중적 선전과 동시에 조직자금 을 동원하려는 시도도 한 바 있다. 특히 박노해 시인의 명망성을 이용하여 『신동아』등 월간지에 기고하고 고료를 조직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등의 방법도 사용하고 있다.

사노맹은 조직규모가 늘어나고 전업적 활동가가 많아지면서 대규모의 자금이 소요됨으로 써, 그러한 조직운영자금의 조달 자체도 문제이지만, 조직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도 문제였다고 한다. 실제 일선기구에서의 재정난이 심각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었다 고 한다. 하부 활동가들의 경우 활동하면서 생활비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학원강사, 자영사업 경영,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활과 활동을 병행해가는 경우도 나타난다.
1980년대의 전형적인 전위조직으로서의 사노맹은 1970년대까지의 전위조직이 그 객관적 조건의 열악성 때문에 외부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을 극복하면서 자체의 여러 방법을 통하여 방대한 조직운영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며, 그 조달방법도 일시적인 특별출연방 법을 넘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조달방법, 즉 수익사업 혹은 기금조성에 기초한 재정운영 방법의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980년대 전반적인 조건 의 변화가 사노맹이라는 특수조직에도 반영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 사노맹의 활동 및 검거 (2) 사노맹의 검거

1988년 4월 사준위가 결성된 시점으로부터 기산하면 조직총책이 검거되는 1992년 3월까지 4년여의 기간, 1989년 11월 사노맹의 출범이 공식화된 시점으로부터 기산하면 2년 반의 기간동안 조직파괴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사노맹은 1990년 9월 연락국의 현정덕이 검거되면서 위기상황에 돌입하고 1991년 3월 조직의 중심인물인 박노해의 검거로 다시 조직적 위기가 가중된 후, 1992년 3월 조직총책 백태웅이 검거됨으로써 조직의 실질적 '붕괴'를 겪게 된다.
1960년대의 통혁당 서울시창당준비위원회, 1970년의 남민전과 비교하여 사노맹의 검거 과정은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첫째는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들의 경우 일정 한 검거의 단서로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가 본격화된 이후 단기간 내에 조직지도부로 파급되고, 조직지도부의 검거와 함께 조직이 일괄 붕괴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의 하부에서 조직침탈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그것이 곧바로 조직지도부의 검거로 이어지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조직보위 및'반격투쟁'이 이루어지다가 후에 조직지도부의 검거와 함께 조직의 '붕괴'가 나타나게 되며, 또한 조직지도부의 검거가 이루어지더라도 조직의 전모가 완벽한 의미에서의 조직붕괴-실질적인 '붕괴'이며 설혹 조직이 잔존한다고 하더라도 재건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직파괴가 심대한 것이지만-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노맹의 검거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노맹의 검거과정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1990년 9월 현정덕을 비롯한 연락국 조직원들의 검거와 10 월 중앙위원인 남진현의 검거를 계기로 한 조직파괴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1991년 2∼3월 김진주, 박노해의 검거를 수 있다. 셋째는 1992년 4월 사노맹 총책 백태웅의 검거단계이다.
첫째 단계를 사노맹에서는 '제1차 보위사고' 및 '제2차 보위사고'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유인물의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현정덕(수사발표에 따르면 연락국 책임자이다)과 관련조직원들이 구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관련자들이 검거된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그 의 수사과정에서 노출된 단서를 계기로 중앙위원인 남진현이 검거되어 사노맹의 중요 보고서 및 조직 내부자료들이 압수된다. 이를 계기로 역시 전국에서 많은 조직원 및 지지자들이 검거된다. 수사당국에 의한 검거가 본격화될 것에 대비하여, 사노맹은 1990년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60일간을 '비상보위대책기간'으로, 1990년 8월 15일부터 9월 10일까지를 '초비상보위대책기간'으로 설정하고, 조직보위를 위한 내부적 방안들을 강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직원이 검거된 후 사노맹은 이른바 '반격투쟁'을 전개한다.
둘째 단계는 박노해 검거과정에서 중앙위의 문건을 포함하여 조직 내부의 중요 문건이 압수되어, 그 당시까지의 조직의 실상이 상당부분 드러나게 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박 노해 검거로 압수된 자료를 기초로 하여 그 이후 조직원의 검거가 확대된다.
셋째 단계는 1992년 3월 조직총책 백태웅을 비롯하여 중앙위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단계이다. 수사당국은 이전에 수집된 정보를 기초로 하여 사노맹의 주요 아지트를 파악하였고 그곳을 감시하여 1992년 4월 29일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핵심간부를 포함하여 관련자 40명을 일괄 검거함으로써, 조직은 실질적 '붕괴'를 보게 된다.
사노맹은 사실 1980년대 이전의 비합법 혁명전위조직과의 연계없이 1980년대에 성장한 혁명적 인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결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 1970년까지의 비합법 조직이 갖는 조직적 취약점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었다. 조직의 장기적 보위를 가능하게 했던 사노맹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먼저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의 경우, 조직의 최상층부와 하부조직원이 무매개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으로써 조직상층부의 검거가 곧바로 최하부조직원까지의 일괄 검거로 나타나게 되는데, 사노맹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을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960, 70년대 비합법조직의 경우, 조직원간의 연계가 비록 무인포스트나 암호를 이용하기는 하였으나- 인적 연계를 불가불 동반하여 조직원 상호간의 노출이 일정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 하부와 상부, 조직부서간의 연계가 인적 연계방식이 아니라 통신망을 통한 문서전달체계로 이루어짐으로써 한 부서의 조직침탈이 다른 부서의 조직침탈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조직원과 비조직원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조직적 노출의 가능성을 극소화하였고, 조직원의 노출을 철저하게 차단하였다는 것이다. 1960, 70년대 비합법 조직의 경우- 사회적 조건의 열악성 때문이 기도 하나- 조직적 활동이 비조직원에게 노출되어 그것이 검거의 단서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비조직원과의 모호한 연계가 검거의 단서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사노맹의 경우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이러한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검거된 조직원이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여 조직전모의 노출을 차단하고자 했고, 조직을 보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제1차 보위사고에서 검거된 현정덕은 "숟가락으로 목을 찌르고, 안경을 쓴 채 머리를 책상에 받고, 혀를 깨무는 등 6회에 걸쳐 자해를 기도하고, 4일간 단식, 묵비권 행사 등 극렬한 심문투쟁을 전개" 하였고, 박노해 역시 자해를 감수하는 자세로 조직보위를 시도하였다는 것은 사노맹 조직원들의 특징적 모습-이러한 자해의 모습자체에 대해서는 대중적 평가가 다양할 수 있겠으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사과정에서 협조자가 발생하여 그로 인하여 조직의 전모가 용이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이전 시기에는 많았으나 사노맹의 경우 조직원의 '변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바,이 역시 사노맹의 특징적 모습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검거과정을 통해 볼 때, 사노맹의 조직적 취약성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수사당국의 입체적인 수사 및 미행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백태웅 스스로도 지적하고 있는 바인데, 조직보위에 대한 '원론적'인 강조와 생활화에도 불구하고 수사당국의 수사방식의 고도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둘째, 검거위험이 만성화하여 각 관련기관의 보위가 불철저하고 이완되어 있었다는 점 을 지적할 수 있겠다. 후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수사당국은 사노맹의 중앙부속기관인 조직 국과 수도권위에 대한 집중적인 감시와 미행을 상당기간 동안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수사의 고도화에도 기인하는 것이나-이를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수의 아지트간의 상호 연계에도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점은 1992년 4월의 검거 때 중요 아지트의 일괄급습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셋째, 조직부서간의 연계를 통신망을 통한 문서보고체계로 하는 보위에 대한 적극적인 측면을 위에서 특징으로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갖는 역기능적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문서보고체계상 조직 내의 논의 및 상ㆍ하부의 교통이 모든 문서화된 형태로 보존되게 된다. 이것은 일단 자료가 수사당국에 입수되는 경우 조직의 전모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사노맹은 문서 자체에 암호를 사용하거나, 컴퓨터 자료의 경우 일정한 '방어(protect)'메카니 즘을 만들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소화하려고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역기능적 측면을 차단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사노맹의 조직구조와 조직활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필자 는 이 글에서 먼저 사노맹이 그 일부를 이루는 1980년대 비합법 전위조직들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에 사노맹의 조직적 형성과정, 그것의 인적 구성 및 지역적 기반, 사노맹 조직구조의 실상 및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사노맹의 조직적 활동내용과 조직검거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사노맹이라는 특수한 조직의 인적, 조직적 발전과정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사노맹이 인적으로 확대를 경험하고 조직적으로 분화발전되어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이 곧 사노맹의 대중적 기반이 광범하다든가, 지배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사노맹이 갖는 '혁명적 위협'의 정도가 심대하다는 것을 곧바로 말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사노맹의 인적인 발전에도 불고하고 여전히 '혁명적 인텔리' 조직으로서의 한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대중적 기반의 정도가 협애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비록 사노맹의 조직적 기반이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갖는 혁명적 위협의 정도가 절대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노맹이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변혁적 사회운동은 빠른 속도로 발전되어왔으나, 그 이면에서 지배권력의 안정화도 더욱 빠른 속도로 진전되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노맹의 '혁명적 위상'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1989년부터 199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노맹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주로 그 노선 혹은 이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노맹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입장 및 혁명적 노동자계급적 관점에서 여타의 많은 노선에 대한 비타협적인 사상투쟁을 전개하였고 그것이 오히려 사회운동진영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노맹의 이념적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사노맹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조직의 실상이 어떠한지, 하나의 조직으로서 사노맹이 갖는 특징은 어떠한지에 대한 학문적 분석에 주안점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념 및 노선에 대 한 분석은 배제하였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이것은 사노맹이라는 조직에 대한 '혁명운동사적 평가'를 필자가 유보하였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사노맹에 대한 분석논문을 쓰기에는 사노맹이 너무 '동시대적인' 사건이고, 더구나 조직성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한 자료가 아직 충분히 확보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글은 극히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해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세철 (사회주의정치연합)

1. 글쓰기에 대하여

1-1. 장기계획으로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역사를 쓰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글은 1980년대 말부터 기금까지 공개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참여한 관찰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느낀 단상을 거칠게 정리하고 문제 제시하는데 그친다. 나로서는 구체적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글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 있고 주관적일 수 있지만 역사적 글쓰기의 새로운 보기를 보이고 싶은 모험심도 있다.
(참고 글 : 1. 한국노동당의 ‘신전략’비판 2.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자 정치운동:정치조직을 중심으로 3. 사회주의 역사에서 배우자)

1-2.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 연합 추진 위원회”, “민중당 창준위”, 민중당,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노동자정치연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노동자의힘, 사회주의정치연합(준)에 이르는 15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1-3. 주체적 경험과 느낌 등의 단상으로 표현하면서도 몇 가지 평가 틀을 지닌다. 첫째,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유지했는가의 문제 둘째,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실현했는가의 문제 셋째, 의회와 선거에 대한 원칙을 견지했는가의 문제 등으로 구분하고 분석한다.

2.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투쟁으로서의 합법 정치전술 평가

2-1. 7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초반에 걸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정파의 1세대에 해당된다. 이들은 학생운동을 거쳐 이전한 엘리트 사상집단이며 이들의 사상 이론적 기반은 대체로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론적 학습의 깊이와 폭은 레닌과 스탈린 저작, 소련에서 간행된 교재, 일본에서 간행된 저술들이었으며 혁명적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하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2단계혁명론이 군부파시즘의 암혹한 정세와 맞물리면서 혁명적 정세의 임박함에 긴박되고 고무되고 있기도 했다.

2-2. 이들 세력의 조직노선은 당연히 비합법 전위당 노선이었고 파시즘의 탄압 속에서 더욱 그 노선이 정당화 되었다. 흔히 PD, ND, IL로 표현되는 세 개의 큰 정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의 노선과 정세인식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생략한다. (참고자료 2참조)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주체사상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전선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보수야당 추종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87년 대선 당시 독자 후보론의 입장에서 함께 했으며 (물론 CA가 주도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거연합은 92년까지도 이어진다.

2-3. 87년 이후 선거전술을 넘어선 조직노선으로의 합법정당 건설론은 복합적 요인이 교직되어 나타났다. 첫째,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고 집약된 사회주의 진영의 합법공간으로의 진출의 필요성이라는 공감대의 형성 둘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사상적 동요와 혼란, 수정주의, 기회주의의 확산, 혁명의 포기로 인한 합법.개량주의의 합리화, 셋째. 9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정치주의자들의 욕구와 계산 그리고 이에 편승한 패거리 정치, 넷째, 노동운동을 포함한 대중조직의 성장과 발전 등이다.

2-4. 민중당의 창당은 바로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비합법 정파가 개입 또는 적극적 결합을 했고 반군부독재 투쟁세력이 상층(일부 혁신계와 지식인 포함)은 주로 인민노련이, 사무국과 학생위원회는 CA를 포함한 PD정파들로 구성되었다. 중앙위원회는 인민노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전략으로 포기하고 민중당을 전략당으로(혹은 그롤 준비하기 위한 단계로)인식한 세력이 주도한 당의 생명은 짧았다. (참고자료 1참조) 한국노동당 창당과 탄원서 사건(PT독재와 폭력혁명노선 폐기)이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전술당으로 개입한 세력은 철수하거나 탈당하고 그 일부가 민중회의라는 정치조직을 건설한다.

2-5. 민중당 내에서의 사상투쟁은 주로 강령 건설 과정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강령위원회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강령작성으로 이어지는데 민중당의 경우는 교수위원회(당에 교수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진보적 지식인의 집단적 결합이 지니는 의미 때문에 두게 되었다)가 강령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령작성을 했다. 교수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은 교수들(대부분 사민주의자들)은 정책위원회의 자문을 하고 있었다. 민중당 강령은 최대 강령은 아니었지만 이행기 강령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민중민주주의 강령의 틀을 원칙적으로 담아냈다. 강령이 확정되기까지 교수위원회와 정책위원회의 대립이 있었고 학생위원회는 원칙적으로 교수위원회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참고자료, “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회의와 좌절을 넘어서서” 참조) 민중민주주의를 민중주체의 민주주의로 수정하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민중당 상집에서 있었고 실제로 민중당 강령은 사문화 되었다.

2-6.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의 합당, 통합민중당, 그리고 소멸은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과하면서 양분화 되고 사회민주주의를 전략당으로 표현하려는 세력과 합법정치전술로서 지속적으로 구사하려는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이념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합법.개량주의 반대 투쟁 전선으로 구획되었다.

2-7. 그 이후 제파와 사노맹 모두 조직사건으로 탄압받다 해체되었다. 민중회의 시절 사노맹과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사노맹은 합법정치부대로 사회당(추)을 만들었고 1992년 대선 이후 민중회의와 통합하여 민중정치연합을 만든다. 제파는 전국노련으로 편입되거나 한노정련으로 진로를 잡는다. 그리고 대중조직의 활동가로 분산된다. 이 시기의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 중심은 사상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보듯이 수정주의와의 투쟁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다. 노동계급에 부르죠아 사상이 침투한 것이 수정주의, 특히 사민주의이며 우리 사회의 대중운동의 투쟁과 역행하는 청산주의적 합법개량주의 세력과 투쟁하는 것, 즉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복원시키고 세워내는 것이었다. 반합법정치조직으로 존재하고 있는 조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상을 보위하고 선전-선동하려는 과정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대신 “근본변혁”이라는 용어가 대체되었고 당 건설 투쟁은 장기적 과제로 미루어졌다.

2-8. 92년 대선은 위와 같은 정세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사회주의는 망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계급대중의 패배주의나 일반대중의 우경화의 이데올로기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선전 선동할 수 있는 공간을 얻어내고 그것을 당면한 대중투쟁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계기로서 대통령선거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강령을 구체화된 선거강령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것이었고 92년 백선본 강령은 90년 민중당 강령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직사건의 검찰 기소문을 보면 92년 선거강령을 주로 언급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하나는 선거투쟁의 공동투쟁을 기반으로 흩어져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연대.통합하는 성과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진정추(인민노련)는 통합에 응하지 않고 민중회의와 사회당(추)가 통합하여 1993년 민중정치연합을 결성한다. 전국노련(제파)의 경우 대중운동으로의 산개와 이론연구운동의로의 우회로뿐만 아니라 경제주의적 성향이 강한 특성 때문에 사회주의정치운동세력과 함께 할 수 없었다.

2-9. 사노맹이 해체되고 약화되면서 민정련은 당 건설 경로를 둘러싼 노선대립(민중연대안과 정치연합안)으로 분화되고 진정추와 사회당계열이 통합되는 진보정치연합으로, 민중회의 계열이 노동정치연대로, 그리고 계급해방그룹이 노진추(노진추는 단지 인민노련의 탄원서 사건만을 문제 삼았다)로 분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당 계열이 기존의 사노맹 노선과 달리 전략수정을 하고 전략으로서의 합법당으로 선회한 것이고 노진추 역시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세력은 민주노동당내에서 사민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회의의 일부였던 청년그룹은 청년조직을 만들고 그 후 청년진보당 그리고 사회당을 만든다.

2-10. 각 정치세력은 각개 약진하면서 세력보존과 확장을 한다. 96-97 총파업의 공동투쟁전선이 복구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연대 틀을 형성하고 또 한번 정치연합을 모색한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가 그것이다. 정치연대는 테제 형식을 빌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을 정리하였지만 임박한 대선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합법개량주의, 사민주의 세력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국민승리21을 결성하였고 일부 민족주의세력 역시 합법정당전술에 입각하여 사민주의 세력과 연대하고 있고 노동자 민중진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정치연대 운영위원회는 다수가 대선 불참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본 출범하기 몇 일전 정치연대 대표였던 나는 선거 참여조건을 직접 작성하여 권영길 대표와 담판을 하게 된다. (중도 후보 사퇴 불가, 대중투쟁과 함께하는 선거투쟁, 계급적 관점의 견지 등) 공개된 합의문을 놓고 정치연대는 선거참여를 결정하게 되고 일부가 정치연대를 탈퇴하고 청년진보당을 창당하게 된다.

2-11. 합의문의 이행여부를 놓고 (선거강령 내부 투쟁, 종이정당 사건,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 등) 선대본 내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는 선대본 공동대표를 사임하게 되고 강령위원회에서 철수, 서울 선대본을 중심으로 한 내부투쟁(일어나라 코리아 포스터 철거 등)을 한다. 정치연대의 사후 평가에서 선거참여 결정이 문제가 있었음을 결론짓게 된다. 96-97 노동계급의 정차파업의 성과를 그대로 개량주의 세력에게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대선 이후 사회주의세력의 조직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판단 등이 참여 결정의 근거가 되었지만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건이었다.

2-12. 정치연대의 후신인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새정조)에서의 논쟁은 이념 논쟁이 아니라 조직노선을 둘러싼 쟁점이었다. 민주노동당의 결성과정에 좌파블럭으로 개입하자는 견해(노동조합, 현장 그리고 노진추 등)과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의 독자적 정치조직화를 주장하는 견해가 대립되었고 노진추 그룹이 탈퇴하고 좌파블럭론이 안을 철회함으로서 노동자의힘(준)이 결성되었다. 새로운 정치조직의 이념과 상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 논쟁은 이때부터 본격화 될 수밖에 없다. 쌩디칼리즘이나 무정부주의,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가 혼합된 정치운동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급정당 건설을 말하기보다 이념논쟁을 선행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희화화되어 버렸고 혁명적 맑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공동담론으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단결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정치신문의 형태로 세력을 표현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은 이념적 소통, 혁명적 정치조직과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을 위한 연대에 적극 나서야 한다. (참고 : [전진]기본노선, 사민주의의 좌익적 언사)

3.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중투쟁과 선거 투쟁 평가

3-1. 10년 주기의 공황으로 볼 때 1987년, 1997년, 2007년 전후의 주기를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호황에는 대중투쟁의 소강상태로 불황에는 대중투쟁의 고양으로 표현된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87년 7, 8, 9노동자 투쟁, 96-97정치총파업은 우리 노동운동의 질적 양적 발전을 이룩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3-2.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관철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확장되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시작되어 김영삼 정권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을 볼 때 자본과 자본가 권력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 전술이 한국사회에서는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 파시즘 아래에서 억압, 착취당했던 노동계급이 어용의 굴레를 벗고 생산의 주체로 올라오는 대중투쟁의 시기,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의 시기 10년, 정치총파업을 통하여(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정치의 주채로 나서는 8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아마도 2007년쯤에는 역사의 주체, 혁명의 주체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3-3. 그러나 이러한 성장, 발전기도 불구하고 개량주의화 관료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경향도 함께 보이고 있다. 1991년 전노협이 내세웠던 깃발인 평등세상건설과 노동해방은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퇴색하고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에 묻혀버렸고 총연맹과 연맹, 그리고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의 만연은 조직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혁명성, 계급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노동자정치운동의 개량주의와 맞물리면서 노사협조주의와 교섭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3-4. 사회주의정치세력이 지금까지 대중투쟁의 정치적 지도부의 역할을 할 만큼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부분적 개입과 상층 및 현장에서의 부분적 영향력밖에 행사하지 못하였다. 또한 선거와 맞물리는 상황에서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결국 선거주의에 빠지는 과오를 범하였다.

3-5. 합법정치전술로 민중당을 규정한 세력과 전략당으로 규정한 인민노련의 경우를 보기로 들어보자.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이 고양될 때 보수야당(김대중과 김영삼)은 지자체 선거가 있자 투쟁본부에서 이탈하였고 민중당 역시 선거 참여를 결정하면서 대중투쟁을 방기하였다. 나는 유일하게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였고 결국 민중당을 탈당하였다. 92년 5월 총선에서 보여준 민중당 후보의 모습은 보수야당의 선거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6. 96-97 노동법, 안기부법저지범대위가 광범위하게 구성되기 전까지 민중운동탄압범대위가 존재했을 뿐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단결하여 대중투쟁에 결합하여 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예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쟁의 주체인 노조와 그 상급단체인 총연맹인 민주노총의 주도권 하에서 대우자동차투쟁, 삼호중공업투쟁 등 몇몇 사회주의 세력의 적극적 개입의 성과를 보여준 투쟁이 있었으나 역시 부분적 성과에 지나지 않았다.

3-7.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적 지도력의 결여는 혁명사상 이념의 불철저성(사민주의 세력 등)에도 기인하지만 정파이기주의와 가족주의로 인한 사회주의연대의 분절성도 큰 원인중의 하나이다. 대중조직이 정치운동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대중조직을 장악하려는 선거주의(조합권력이 되었건, 현장권력이 되었건, 중앙권력이 되었건 간에)가 판을 치고 (지금까지의 총연맹 위원장 선거에서의 연합전술, 특히 이번 금속 선거에서의 3차 연합전술) 총파업 투쟁에서의 비공식적 개입과 결과에 대한 무책임 등은 그를 주도한 특정 정치조직의 책임이며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의 신뢰를 깨뜨리는 작풍이었다.

3-8. 최근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의 결성은 여전히 참여세력에 대한 불신, 공동투쟁체에 대한 상과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 주도권 다툼 등의 갈등적 요인이 있기는 하나 모처럼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일상적 대중투쟁을 촉진시키고 책임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사상.실천적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세력 사이의 노선투쟁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 오류에 대한 반성을 근거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상설적인 공투체를 지역 중심으로 건설하고 투쟁하는 업종(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현장투쟁위원회를 만들어간다면 산별과 연맹에만 목을 매는 관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3-8. 선거와 의회를 통한 집권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민주의세력(민주노동당 등)을 제외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은 합법정치전술로서의 합법당의 필요성(혁명정당건설 이전에)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부르주아선거에도 사회주의자 연대를 통하여 전술을 공동 결정해야 한다. 92년 사회주의 사상투쟁의 교두보 구축의 방어적 투쟁은 사회주의 세력의 불안정한 통합,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확대로 유실되면서 97년 양날개론으로 더욱 강화된다. 민주노총을 등에 업는 민주노동당의 출범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연합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고립화된다. 97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전망을 가지지 못한 채 몇 가지 선거투쟁을 조건으로 권영길 선본에의 결합은 96-97 정치파업의 성과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진영의 오류였다.

3-10. IMF관리체계를 경과하면서 주기적 공황에 접어들고 신자유주의 압살에 변혁적 노동운동이 압살당하고 개량주의와 관료주의가 만연되면서 맞게 된 2002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99년 이후 최대의 정파로 성장한 노동자의힘은 계급정당건설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확고한 강령과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민주노동당을 전술적 개입으로 판단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고 있으며 운동내부의 선거정치에서 중앙파와 국민파와 끊임없이 연합하려는 기회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반위에서 2002년 대선 공투본 전술과 경선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 전술은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당 건설이라는 전략이 전제되지 않은 전술이라는 점 둘째, 사회주의 진영의 광범위한 논의와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사민주의, 민족주의 세력과의 공동선거 투쟁에 대한 환상과 그에 기반한 지분을 구축하려는 대중추수적 노선이 착종되어 있었다는 점 넷째, 그 지분을 기반으로 2004년 총선에 연합하려는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 사회당의 경우 87년부터의 민중후보전술에 집착함으로서 당 건설 보다는 합법적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에의 편향, 사회주의의 상업적 대중화, 노동계급운동의 부문운동화 등이 작용하여 노동자의힘과 합의가 무산되자 사회주의정치연합(준)과의 합의를 깨뜨리고 독자 대응함으로서 역시 실패하였고 왜소화 되었다.

3-11. 돌이켜보면 가장 강조해야할 사상투쟁과 선전 선동을 소홀히 하고 그 혁명 사상을 담지 할 조직건설(당)에 대한 확고한 전망과 실천을 게을리 한 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거부하면서 가족주의와 종파주의에 매몰되어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의 선거주의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하는 근본적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계획과 사업이 부르조아 선거일정에 맞추어 역산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보기이다. 글과 말은 현란한 혁명적 언사를 구사해도 몸으로의 실천은 중도주의적 활동에 그치는 모습이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공개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3-12.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복원을 위한 연대와 소통이 노선투쟁과 토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혁명적 대중투쟁이 끊임없이 고양되도록 하는 혁명적 대중조직과 현장조직의 건설, 그리고 일상적 투쟁을 담지 할 투쟁체 건설이 선행되면서 혁명정당 건설의 상과 성격 및 경로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투쟁전술, 선거전술을 세우는 것이 순서이며 이것이 사회주의정치운동 15년의 결산이다.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힘차게 연대단결하는 운동이 펼쳐지지 않는 한 어느 한 세력과 정파의 행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기관지노힘 제31호)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에 다녀와서
이정일
 

사회주의정치연합 준비모임 주최로 지난 4월26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 회관 3층 홀에서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현황과 과제'란 제목으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60여명이 참석하였고, 연령층은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다. 발제를 담당한 단체소속원이 대부분이었으나 학생들과 노동조합에서도 약간의 수가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다지 밝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회주의정치운동이 처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이리라.
토론회는 오후 3시30분에 오세철 교수의 인사말과 사회로 시작되어, 7명의 발제가 오후 6시30분경까지 진행된 후,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내용은 개략적으로 보면, 노동자계급 대중투쟁에 대한 평가, 노무현 정권의 성격, 80-90년대 사회주의정치운동과 현재 상태에 대한 평가, 사회주의정치운동진영의 이후 방향 등이었다.

<주제 발제> (가나다순, 발제문 요약)

거듭남으로 하나되기 (남진현 진보운동전략연구소 소장)

현시기 남한의 정치세력 판도는 기본적으로 '보수'와 '개혁', '진보'의 3대 세력간의 대립투쟁관계이다. 일부 사회주의운동진영은 보수우익세력의 크고 집요한 영향력에 대해 지나치게 경시하면서 좌파진영 내부에서의 논쟁과 권력싸움만을 일삼고 있다. 이러한 협소한 시야를 극복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성격은 자유주의좌파의 개혁세력이 중도파와 연합하여 장악한 정권이며, 이에 대한 대응은 양면성, 즉 보수우익세력에 대한 공격에서는 연대하고, 동시에 철저한 개혁과 진보를 향한 헤게모니싸움을 전개해야 한다.
범진보진영은 좌파적 민족주의계열, 사민주의계열, 사회주의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좌파민족주의계열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자유주의좌파의 헤게모니 아래 포섭되지 않도록 견제와 비판이 필요하다.
사민주의도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고, 따라서 사민주의는 '의회주의적 사회주의'라고 규정 가능하다. 그러나 사민주의는 의회의 양면성에 대한 안이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변혁보다는 국가권력의 장악 그 자체에 더 무게를 두는 잘못된 발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사민주의자들과 긴밀한 연대를 거부한다면 관념적 좌익주의에 머물 것이다.
범사회주의진영의 결속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좌파 내 각 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는 정기적인 정치토론 네트워크로 '좌파포럼'을 검토해보자.

한국에서 사회주의 정치운동, 혁신과 연대를 위하여 (박성인 노동자의힘 강령위원장)

현 시기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위기의식'은 과거와는 다른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혼란과 동요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투쟁의 성과에 기초하면서,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새로운 질적 발전을 요구하는 가운데서 제기되는 '위기의식'
짧게는 96∼97년 노동자총파업 이후, 길게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 대중운동의 성장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적인 목표가 현실적인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위기의식'
현대자본주의의 위기를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의 전면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전쟁 등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에 맞서, 반제·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대중투쟁이 반자본투쟁으로 고양될 가능성이 커지고, 반제·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투쟁이 현실화되는 정세 속에서의 '위기의식'

따라서 현시기 한국 사회주의정치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 혹은 '위기의식'은 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청산'과 '해체'를 예비했던 '위기·위기의식'이 아니라, 사회주의정치운동의 '부활·소생'을 위한 '위기·위기의식'이다. 임종을 앞 둔 고통이 아니라, 출산을 위한 진통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최근 사회주의정치운동진영의 '위기' 논란, 이에 따른 '사회주의정치운동진영의 연대, 혹은 통합'을 둘러싼 논쟁과 시도를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정치적 방향' 속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90년대 초반 이후, 사회주의 정치운동진영이 힘겹게 유지하거나 진전시켜 온 사상과 이론, 전략과 전술 등을 먼저 공동의 '성과', 즉 계승과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총괄하고 집약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먼저 사회주의 정치운동진영의 공유하고 있는 사상이론적 기반을 확인하고, 이어 '차이'가 무엇인지, 이 '차이'를 어떤 수준에서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지에 대해 서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8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은 그것이 탄압에 의한 것이었든 아니면 역량에 의한 것이었든, 아직은 '써클운동'(정파)의 단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나라의 사회주의 정치운동도 써클운동의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 다음의 3가지 점을 주목할 때 써클운동 단계 극복을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 내용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단위가 '써클', 혹은 '정파'였다는 점에서, 그 사회주의의 이념과 전략 전술은 한편으로는 유지·혁신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적·정파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써클운동은 그 자신의 해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정치사상적 내용과 조직적 지도력, 전 써클성원의 역량)이 써클이라는 형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할 때,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다한다는 점이다.
셋째, 바로 이 써클운동의 태내로부터 형성되고 검증된 정치사상적·조직적 지도력이 중심이 되어, 써클을 뛰어넘는 '당적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 '당적 통합'을 모색하는 주장이나 시도가 또 하나의 써클로 제약되는 것을 넘어설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 공세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분열과 노동운동의 위기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맞선 투쟁 속에서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노동자민중의 역량에 대해서 주목하고, 이러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반자본'투쟁으로 진전시켜 나가는데 사회주의 정치운동진영이 그 정치적 전망을 현실적으로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한 사회주의운동은 무엇을 가지고 시작할 것인가? (백철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활동가)

91년 소련의 몰락 이후에 남한 노동운동진영에서는 청산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남한의 사회주의진영에서는 인민노련, 삼민동맹,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를 구성하여 합법주의적, 투항주의적 행보를 계속하였고, 사노맹은 사회주의 합법화를 주장하면서 합법주의, 개량주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진영의 청산주의적 움직임이 현재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 결국 91년 소련의 몰락 이후에 남한에서 등장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사회발전적 노동조합운동론, 비합법적 노동운동의 청산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론적, 조직적, 실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개량주의의 삼두마차가 되었다.

전위정당론은 대중과의 선진적인 결합방식이다. 전위정당은 강령적, 조직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엄격하게 선발된 전위로 출발한다. 하지만 이런 조직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대중적 전위정당을 지향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당독재로의 변질은 전위당 이론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전위당 이론이 무너진 자리를 비집고 들어선 것이다.
엄격한 비밀주의는 조직관계에 대한 비밀이다. 이 조직관계에 대한 비밀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타도에 대한 공공연한 선전 선동을 수행하는 것이 비합법 정치조직이다. 사회주의 활동의 공간이 열려진다는 것은 정권의 필요와 판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적 투쟁역량이 성장하고 계급적 역관계가 변화되는 만큼 보장되는 것이다. 합법과 비합은 단순히 조직의 공개와 비공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내용의 차이이다.

노동자의 힘의 활동가 정치조직론은 전형적인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이다.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이란 강령적 수준 하에서의 노선적 통일없이 조직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강령적 수준이란 전위정당, 국가파괴 전략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적 소유의 철폐와 생산수단의 사회화 등 혁명의 핵심적 테제에 대한 인정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라 느슨한 공동투쟁체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당의 계급좌파와 이를 지지하고 나선 사회주의 대중정당론 역시 '과정으로서의 조직건설론'이다.
사회당의 출동노선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의회진출에 모든 전략적 전술적 사고를 집중하는 개량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사회당 바깥의 명망가'에게 기댄 통일좌파의 출동노선은 사회당의 의회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사회당의 계급좌파를 지지하는 사회주의 대중정당론은 "집권을 목표로 하면서 대체권력"을 주장한다.

"노동계급 대중운동의 새로운 폭발적 고양을 총체적으로 준비하고 선도해 냄으로써 새롭게 성장ㆍ발전하는 노동계급 대중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도력을 구축하고, 그러한 힘을 제도정치영역으로 확장하여, 집권 가능성을 가진 현실정치의 실체로서 위상을 확립한다". (양준석/오민규 사회주의 대중정당의 발전전략에 대하여)

결국 이들의 집권전략은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가 아닌 국가의 활용론에 머무르고 있다. 대중투쟁에 대한 강조는 집권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노동계급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된다면 그러한 힘은 제도정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를 철저하게 분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폭발적인 노동운동의 고양을 제도정치영역으로 제한하여 집권으로 향하는 계기로 돌리려 하고 있다. 왜 노동자 투쟁의 폭발적 고양을 자본주의 체제로 가두는가?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조직적,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혁명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전국적 노동자투쟁전선을 형성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조직해야 한다. 현장을 통한 전국적 조직화의 중심은 대공장이다. 전략적 지역과 공공, 금속의 대형사업장을 중심으로 거점을 강화해야 한다. 현장과 사회주의 정치의 굳건한 결합만이 희망이다.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좌표설정을 위하여 (이성민 사회주의정치연합)

사회주의정치연합(준)은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의 투쟁이 일국투쟁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일국에서조차 각개 약진하는 운동형태를 극복하지 못하면, 사회주의정치운동의 미래는 물론 현재성조차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문제의식과 관료화된 민주노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평의회 건설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사회주의 정치포럼'을 정례화하자. 평의회 운동과 맑스주의 이념사상의 대중화를 위한 사이버(오프라인) 전진기지 '이스크라넷'을 구성하자.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통일과 전진을 위한 제안 - 사회주의 대중정당의 발전전략에 대하여 수정증보판 (양준석/오민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난 10년 고난의 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적인 기회를 부여잡아야 할 시점에 서 있다.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은 각기 분절된 절망에 갇힌 채 고립분산되어 각개약진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역량들을 '총체적인 전망' 아래 통일시켜 냄으로써 역량있는 전위를 갈망하는 대중운동의 강력한 요구에 부응해야 할 시점, 새로운 전진의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하며 열어낼 수 있는 시점에 있다. 그 대안이 '사회주의 대중정당'이다.

1)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사상적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선명하게 내거는 정당이다.
2)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사회주의 활동가를 비롯하여 사회주의에 동의하는 대중들을 폭넓게 포괄하는 정당이다.
3)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집권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을 '대중권력 형성'이라는 보다 원대한 목표를 향한 중간과정으로서 위치 지우는 정당이다.
4) 사회주의대중정당은 스스로 정치투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모든 대중운동의 전위로서 역할하는 정당이다.
5)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에 철저하게 복무하며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으로부터 자신의 성장 발전의 동력을 획득하는 정당이다.
6)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선거투쟁과 의회활동을 비롯한 제도정치투쟁을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 및 지도력강화를 위한 전체적인 기획 속에서 적절하게 구사해 나가는 정당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잃어버린 10년'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애초에 편집부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았을 때 그 주제는 "변혁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였다. 사실 필자로서는 편집부의 요청에 쉽게 응할 수가 없었다. "변혁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라는 짧은 말 안에는 이미 90년대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필자가 요즘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부의 기획안에 구애받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일단 필자의 설익은 생각을 풀어본다.

92년 - 하나의 매듭

달력이 말하는 기계적인 '90년대'와 우리 기억 속의 '90년대'의 경계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자는 91년 1월 1일에 시작했겠지만, 후자는 92년의 언제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의 말 속에 자리잡은 '80년대'와 '90년대'의 구분은 바로 이 92년을 전후한다.

92년에 한국의 사회운동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우선, 89년-91년 사이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한 사후 평가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노협의 침체에 대해, 민중당의 총선 실패에 대해 근심 싸인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군부독재 뒤에 처음 등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김영삼 정권이 탄생하게 될 대선이 있었다.
 
92년 당시 민중운동권에는 80년대에 형성된 사회주의 지향의 활동가층이 가장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다. 다수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포괄한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가 합법대중정당 노선을 천명하면서 <한국노동당(준)>을 출범시켰을 때, 그 발기인 수가 4천여명이었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의 규모가 대략 어느 정도였는지 힌트를 준다. 이 흐름에 결합하지 않은 전노협 활동가들의 나머지 절반이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든지 '반제반봉건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경향의 활동가들을 더 합하면 대략 기만 수준의 '전위'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극은 바로 이러한 극성(極盛)의 시점이 곧바로 쇠퇴와 해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당시 남한 사회주의운동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냉철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각각의 사상유파가 형성해놓은 담론의 연장선 위에서 진행된 스탈린주의 비판은 어떤 공동의 토론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의 '신노선', 구 <현실과 과학> 그룹의 알튀세 학파 수용, 트로츠키주의의 재평가 등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 존재했던 분파 구도를 새로운 지평에서 성숙시키기보다는 더욱 더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 운동에는 다양한 형태의 '청산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추구하던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의 '교조적' 추종자임을 선언했다.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의 상당수는 경실련의 '시민운동'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념 세계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학생운동권이 가장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90년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세계사 속의 90년대'와 '우리의 90년대'

한 동안 우리는 이러한 90년대의 흐름을 우리의 독특한 현상으로 이해했다. 발전자본주의의 성과가 '하늘을 찌르고', 오랜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이 발전하기도 전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닥치고, 비로소 '시민사회'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한 남한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이것이 세계사의 '90년대'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이를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말로, 다소 추상적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제한적인 민주화 과정도, 그리고 그와 함께 꾸준히 추진되어온 한국 경제의 자유화 과정도, 대중문화의 범람도, 사회운동의 침체와 혼돈도 모두 당시의 세계사 흐름과 무관한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돌연 이 사실을 고지한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다. 하나는 96-97년 총파업, 다른 하나는 97년 말의 외환 위기. 96년 겨울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반대 총파업은, 95년 12월의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 소식과 함께, 노동'계급'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역사의 전면에 드러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한 동안 '청산'의 대상이 되어온 자본-노동 관계의 중요성, 노동계급운동의 능력과 역할 등등이 다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노동계급운동의 침체뿐만 아니라 그것의 부활까지도 전 지구적으로 동일한 시간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97년 겨울의 외환 위기는 90년대의 모든 혼란과 대열이탈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 자본주의 '영속 성장'의 신화를 박살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시간을 세계 자본주의의 시간대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바라보던 오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 기회였다. 이제 우리는 80년대 말 '3저호황'으로 촉발된 '영속 성장'의 분위기마저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틈이었을 뿐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80년대 혁명운동이 설정한 여러 의제들이 결코 '청산'의 목록에 포함될 수 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확인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상당히 낯선 용어가 21세기 벽두 한국 사회의 설명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90년대'를 '세계사의 90년대'의 시점에서 뒤늦게 되짚어본다는 의미가 강하다. 세계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항상적 위기를 심화시킨 지난 10년간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92년의 언제쯤엔가 우리가 받아들인 '성장'과 '안정'의 환상, '청산'의 변명들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운동 주체의 복구 - 90년대가 남겨준 무거운 유산

하지만, 문제는 모순된 현실이 그 뼈를 드러낼 때, 막상 이제까지 줄기차게 모순의 작동을 폭로하고 이를 공격하던 그 운동 주체는 형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혁명적 노동운동이 해체되고 나서 노동조합조직만으로 외롭게 진행되어온 한국의 노동운동이 96년 총파업을 성사시켰을 때, 그 총파업은 철저히 노동조합의 좁은 시야에서, 그 해석틀 안에서, 그 조직 골간만으로 이뤄져야 했다. 한편, 한국 자본주의 최초의 본격적 공황인 97년 외환 위기의 와중에서도, 담론 지형을 지배한 것은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의 말들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해인 2000년 1월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어쩌면, 90년대 유일하게 착실한 성장을 해온 노동조합운동이라는 대중운동에 기대어 이러한 한계를 급속히 벌충해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보상하고 세계사적 시간의 긴박성에 발 맞추어 혁명 역량을 복구하고 확장시켜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천을 거듭하면 할수록 역사에 '공짜'는 없다는 진실만이 뼈아프게 드러난다. 이제는 노동조합운동도, 당운동도, 환경운동·여성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한때 우리가 벗어버렸던 근본주의=급진주의(radicalism)의 깃발을 다시 부여잡고 '새로운 10년'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각오를 위해서였다면, '잃어버린 10년'도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