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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우리 학계의 대표적인 마르크스경제학자인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내년 2월 정년퇴임한다. 1989년 47살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뒤 19년만에 교단을 떠난다. 임용과 마찬가지로 퇴임이라는 그의 거취도 큰 관심의 대상이다.

자본론이 여전히 금서인 시절인 노태우 정권때 그가 서울대에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학원 재학생의 50% 이상을 차지했던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후임을 놓고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경제학자가 후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류경제학자인 상당수 동료 교수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내년 3월 이후 후임자 채용 원칙을 정하기로 한 것은 이런 대립관계의 성격을 반영하는 어정쩡한 타협으로 읽힌다.

퇴임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 가장 절실한 주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올해 2학기 그의 학부 강의인 ‘현대마르크스경제학’ 수강생은 100명이다. 이 정도면 다른 강좌에 비해 대형 강의다. 하지만 그는 “너무 적다”고 했다. 분명 수강생 1천명이 대형강의실을 꽉 채웠던 ‘호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렇지만 최근 1~2년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지난해 2학기 같은 강좌 수강생이 41명으로 바닥을 친 이후 46, 63 등 조금씩 수가 늘어나고 있다.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경제 사정이 굉장히 나빠졌습니다. 실업자가 늘고 양극화가 많이 진행되고 있으면서 노동계급 탄압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시장주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론적으로 해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죠. 시장에 맡기면 다 해결된다는 주류경제학으로는 이론적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대표로 있는 가칭 사회과학대학원의 수강생도 지난 1학기 첫 개강때는 등록생수가 30명이었으나 2학기때는 80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이 대학원은 그가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마르크스 강좌 위주의 커리큘럼으로 학교 바깥에서 ‘교육운동’을 벌이고 있는 둥지이다.

그와 제자들이 정년퇴임을 기념해 펴낸 논문집 이름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신정완 편, 서울대출판부)이다.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정성진 경상대 교수·강남훈 한신대 교수를 포함해 진보학자 16명이 자본주의 이후 새 사회의 상을 놓고 다양한 층위의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그는 자본주의 이후 세상으로 가는 길을 말하면서 ‘점진적 과정’을 강조했다. “운동하는 세력이 하나씩 쟁취하면서 자심감이 생기고 또 쟁취 과정에서 운영 능력이 커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10년 민주화 세력의 집권은 분명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평가한다. “시민운동이나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이런 것들이 축적되면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상당수가 노동자를 타락시킨다면서 배척하는 ‘사민주의’ 아이디어도, 그는 적극 수용한다.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는 정부가 개입해서 민간의 이윤추구를 줄이고 학교와 병원을 공짜로 하는 등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업과 양극화 해결은 어렵습니다.” 이 과정은 또 민중들이 다가올 새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값진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궁극적 그림’을 이렇게 요약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생산의 사회화’라는 개념이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성격이 강해지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생산이 사회화되면 이익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관리하고 나누어 먹고 공유하는 그런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든 공장을 다 사회화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에 현 단계에서 재벌 기업의 국유화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자본이 발달하면서, 독점·재벌이 생깁니다. 이것을 사회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쉽습니다. (삼성 회장인) 이건희는 회사 주식의 1% 미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재벌은 사회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재벌 국유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이야기가 됩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이 펴고 있는 ‘재벌활용론’은 재벌의 독점력을 키우는 결과만 낳을 뿐이라고 했다. “국내 재벌이든 외국자본이든 자본의 기본은 이윤추구입니다. 재벌도 한국에서 이익 보지 못하면 다른나라로 갑니다. 재벌이 외국자본과 경쟁해서 한국경제와 민중을 돕는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모든 국민이 기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거두어야 합니다. 수출산업 위주의 경제성장으로 실업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선 고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최신 기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없다고 했다. 세금을 더 내야 자살하려는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사회도 따뜻해지는 데 세금 몇만원 올리겠다고 하면 보수 신문들은 한목소리로 복지비용이라면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지금의 우리 소득수준에 비해 훨씬 낮았던 1948년에 병원과 학교를 무료로 했고 완전고용 달성, 복지국가 건설을 뼈대로 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사회적 합의는 고작 자본가의 이윤을 늘려주는 그런 것입니다.”

”사회과학대학원 강의에 전력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마르크스 전집을 우리말로 옮기고 싶습니다. 모두 60권 분량인데 국내에는 6권 정도가 번역되어 있을 뿐입니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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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  한때 그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사회주의의 바이블(성경)’을 1989년 국내 처음으로 전권을 번역·출간했던 김수행(65) 서울대 교수가 이번 학기를 끝으로 오는 22일 정년퇴임식을 갖고 강단에서 물러난다. 그는 좌파 사회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대표적 좌파 이론가였으며, 서울대 경제학부 33명 교수 중 유일하게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해왔다.

―은퇴를 앞둔 심정은?

“마음이 편치 못하다. 내가 떠나면 서울대 경제학부의 구도가 32대1에서 33대0이 되는 셈인데, 이건 심각한 문제다. 자본주의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도 있고, 폐해를 지적하는 경제학도 있어야 한다.”

―‘자본론’을 번역했을 당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당시만 해도 그 책은 불온한 금서(禁書)였다. 번역작업을 진행하던 88년 9월, 한 출판사 대표가 이 책의 일부를 번역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89년 2월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자마자 1권(상·하)을 내고, 5월에 2권을, 그리고 90년 3월에 3권(상·하)을 발간했다. 서울대 교수가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는 식으로 출간해 버리니 경찰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더라. 그 책 판 돈으로 아파트(경기도 산본) 분양값도 냈다. 마르크스가 아파트를 사 준 셈이다(웃음).”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 유효한 모델인가?

“그렇다.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인 이상, 우리 앞에 놓인 기본 문제는 여전히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관계다. 그것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의미 있다. 갈수록 진행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열풍 속에서 노동자와 서민들은 궁핍한 삶을 강요 받고 있다. 근대경제학(영·미식 주류 경제학)으로는 이런 문제를 풀 수가 없다.”

―본인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렇다. 나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문제가 많은 제도이고 그것을 시정하는 데 마르크스주의가 좋은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각종 굴레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지, 옛 소련처럼 국내총생산(GDP)을 몇 % 증강시킨다든지, 북한처럼 ‘이팝에 쇠고기 먹는’ 물질적 세상을 구현하자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마르크스주의를 좁은 틀에서 해석하고 밀어붙이다 보니 (옛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당 관료가 자본가를 대신해 억압하는 체제를 만들었고 결국 무너진 것이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이고,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면 더 바보라는 말도 있는데.

“그것을 마르크스주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듯이 하는 얘기다. 어찌 보면 나이 들어서는 타협하라는 얘기인데, 나는 그런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정작 마르크스는 말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시에도 얼마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가 횡행했는지 보여주는 얘기다. 그의 생각을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경제적 하부토대가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기계적 유물론이 판쳤다. 오죽했으면 마르크스 본인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부인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말인가?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냄비근성이 더 문제다. 1980~90년대 한국 사회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더니, 이제는 모두들 떠나 버렸다. 그러나 한국에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었는지 의심이다. 그저 일본 공산당이 번역한 소련 공산당의 팸플릿 수준 책자를 들여와 공부하는 꼴이었다. ‘브레즈네프(소련공산당 서기장)가 말하기를…’이라는 식의 이론이 무슨 마르크스주의인가. 진보를 자처하면서도 진보에 역행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는 서울대 학생들이 많은가?

“박사과정에 9명, 석사과정에 3명이 있고, 학부에서도 240여 명이 강의를 듣는다. 열심히 공부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이론뿐 아니라 철학·역사·사회학 등 폭넓은 시각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서 기업체나 연구기관에서 활용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자녀들이 그것을 공부한다고 부모가 겁낼 필요 없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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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11-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대 경제학부의 구도가 32대1에서 33대0이 되는 셈인데" "박사과정에 9명, 석사과정에 3명"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Koni 2007-11-1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퇴임하시는군요. 저도 그 빨갛고 두꺼운 하드커버의 자본론을 갖고 있는데.
 

(출처: 한겨레 매거진 이에스씨, 일부만 임의로 편집)

- 영화사 대표가 카메라 앞에 서고, 거리에 나서는 것에 대해 김조 대표는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97년 청년필름을 세운 뒤 <해피 엔드> <와니와 준하>부터 <후회하지 않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까지 큰 영화, 작은 영화, (흥행에서) 성공한 영화, 망한 영화를 고루 경험하면서 쌓은 기술과 요령일 뿐이라고 한다.

- 그는 김용균, 정지우 감독 등 친구들의 제안으로 영화운동집단인 영화제작소 청년에 들어갔다. 거기서 “영화적 지식과는 무관한” 기획과 배급 파트를 담당한 게 그의 영화 이력 가운데 가장 앞부분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 “피디 계열에서 만든 <파업전야>에 대응할 만한 장편을 만들어보자고 완성한 게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완성도가 너무 떨어지는 거야. 그 이후로 단편만 만들다가 각자 실무 공부를 하고 돌아오자고 약속하고 들어갔던 회사가 동숭아트센터였어요. 사실 영화의 실무는 거기서 대부분 배운 거죠.” 그렇게 1년 반 동안 흩어졌던 친구 7명과 다시 뭉쳐 만든 게 청년필름이었다.

- 10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충무로에서 드물게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영화사로 버텨온 데는 대가도 따랐다. <질투는 나의 힘> <귀여워>처럼 좋은 평가는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실패한 영화들이 남겨준 빚이다. “사실 두 영화는 대규모로 배급할 작품이 아니었는데 그때만 해도 크게 펼치지 않으면 배급 경로가 없다시피 했고 또 노하우도 없어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셈이죠.” 시행착오가 결실로 맺어진 첫 영화가 1억원 남짓의 제작비를 들여 4만7천여명의 관객이 든 <후회하지 않아>다. 11월에 개봉하는 <은하해방전선>과 <색화동> 역시 작은 영화지만 자기 색깔이 뚜렷하면서도 대중적 소통이 쉬운 장르 영화들이다.

- 제작만 많이 하는 건 아니다. 몇년 전 직원들을 ‘압박’해 최초의 영화사 노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던 사장인 그는 현재 독립영화 스태프 처우 개선과 지원 방안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고 내년부터는 외화 수입에도 나설 예정이다. 또 일찌감치 커밍아웃을 했던 그답게 ‘커밍아웃 캠페인’을 벌일 계획도 있고, 케이블에 퀴어 채널을 만들고 싶은 소망도 있다. 또 토크쇼 같은 것도 진행해 보고 싶다고 한다. 시시때때로 돈과 싸워야 하는 영화사 대표로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가 산더미지만 하고 싶은 일, 만들고 싶은 영화, 계획하고 있는 즐거운 이벤트의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를 보기만 해도 영화사 이름이 왜 ‘청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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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문스크랩] 무대 체질 운동권, 사장님은 못 말려 - 한겨레 기사
    from 은 하 해 방 전 선 2007-10-30 19:35 
    무대 체질 운동권, 사장님은 못 말려 [매거진 Esc] 도대체 누구야? »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 색화동 예고편 직접 출연한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의 재밌는 영화인생 얼마 전 색화동이라는 알 듯 모를 듯, ‘야리꾸리’한 제목의 영화가
 
 
 

(출처: 한겨레에서 발췌 편집)

“그는 허기진 개한테 밥을 주려다 손을 물리고도 다음날 그 개에게 다시 음식을 주러 가는 사람입니다. 광견병이 옮을 위험을 무릅쓰고서요. 9·11 이후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학교를 세우고 젊은이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팔을 걷어붙여 돕죠. 그는 영화와 삶이 일치하는, 감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경받는 거장입니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50) 감독을 이렇게 소개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비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가베> <순수의 순간> 등 20여편으로 칸국제영화제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9·11 이전 아무도 탈레반 정권 아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그는 아프간으로 넘어가 한 달 동안 난민수용소에서 울며 일했다. 그리고 그 땅의 고난을 역설적이게도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게 그린 영화 <칸다하르>를 내놓았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디브이디로 나온 그의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마흐말바프는 벌써 2년째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개미의 통곡>을 찍으려고 타지키스탄으로 출국한 뒤 그의 영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치권이 그를 감옥에 보내려 한다는 친구들의 귀띔을 전해들어 이후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카메라는 가장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비춰왔다. 이슬람근본주의자의 이율배반을 들추고 금욕 사회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휴머니즘이 그의 종교다. 그래서 그는 이란 혁명 전엔 부패한 팔레비 왕조에게, 그리고 혁명 뒤엔 현 이란 정부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됐다.

■ 나의 고통 = 좋은 영화는 고통을 받아야만 나온다고 생각해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고 딱 6일 동안만 사이가 좋았어요. 그때 제가 생긴 거죠. 저를 키운 사람은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신앙심이 너무 깊어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걸 죄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거리를 지날 때는 음악이 들릴까 봐 귀를 손으로 막아야 했죠. 무척 가난해서 13살부터 일을 해야 했어요. 어떤 때는 한번에 13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어요. 일상생활 자체가 너무 힘들었죠. 17살 때 (팔레비 왕조에 대항하는)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됐는데 체포될 때 배에 총상을 입어 100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고문을 받았어요. 일주일에 한번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는데 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명이 떠들어대는 통에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요. 그렇게 4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어요. 출소한 뒤 저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았어요. 요즘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먼저 소설을 썼는데 그게 영화로 발전하게 됐어요. 그러니 영화가 뭔지 전혀 몰랐어요. 평론가들이 혹평을 쏟아 내더군요. 영화관련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감옥에서 익힌 학습법이에요. 뭐든지 한 가지 주제를 잡고 6개월 정도씩 거기에만 집중하는 거죠. 그러면 빨리 배울 수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정보가 너무 많은 통에 10초마다 관심사가 바뀌는 것 같아요. 처음엔 (호메이니가 주도했던 이란) 혁명을 옹호했어요. 하지만 혁명이 해방과 정의를 가져다주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비판적으로 변해간 거죠.

■ 나의 영화 = 가난한 사람들을 찍으려고 반드시 가난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자기 삶에서 겪은 고통을 기반으로 예술을 해야 하죠. 고통이 없으면 영화는 희망(꿈)을 주지 않는 판타지일 뿐이에요. 저는 사람을 바꾸는 건 정치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믿어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면 사회도 바뀌죠. 영화 <살람 시네마>에서는 파시즘이 어떻게 생활 깊숙이, 머릿속에 뿌리내리는지 보여주려고 했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람들이 굶고 병들어가는 걸 세계가 관심 없어 할 때 그 고통을 영화로 찍어 알리고 싶었어요. <칸다하르>의 모든 장면은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고통에 대한 정보예요. 그러다보니 저도 정부의 눈 밖에 났지만. 제 딸 사미라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최근 영화를 찍다가 폭탄 테러로 희생될 뻔하기도 했어요. 우리 영화가 사람들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요즘 감독들 영화들을 보면 고난도 관심도 열정도 줄어든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정부가 검열로 영화계를 죽이는 시도는 많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그런데 이제 저질 영화가 영화계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집중하지 않고 빨리 만들어내는 영화들이 너무 많아 어떤 게 좋은 작품인지 골라내는 것 자체가 힘들게 돼 버렸어요. ‘머리를 위한 패스트푸드’가 난무하다고 할까요. 영화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랑이고 대량생산으로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가장 크고 중요한 고통이 뭔지 골라내 집중하세요. 누가 날 걷어차서 아프다, 그런 아픔을 이야기하면 잡음밖에 안 돼요. 공통의 고통을 찾아보세요. 영화는 사람들에게 꿈을 줘야 하니까요.

글 부산/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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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10-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보니, 이 기사도 김소민 기자의 것이었음.
 

(출처: 한겨레)

처음이다. ‘도대체 누구야’라는 제목이 무색해졌다. 이번만큼은 제목을 바꿔야 한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박훈규(36)씨는 (나름) 유명하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팬도 많다. 많은 사람이 그를 알고 있지만 모두 다른 모습의 박훈규다. 그는 마치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굴곡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타지마할’과 같다.

그는 우선 디자이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화가가 되겠다고 가출했다. 그러나 만화가에게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신문배달, 평화시장 노동자 등을 거쳐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곧 그만뒀다. 그리고 디자인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미련 없이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그는 화가였다. 호주, 영국의 런던과 에든버러를 무작정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사람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는 사진작가다. 홈페이지(www.parpunk.com)를 운영하는 웹마스터다. 두 권의 여행책(<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을 펴낸 여행작가다. 그리고 그는 가수 비, 노브레인, 김장훈 등의 공연 영상 연출(브이제잉; Vjing)을 했다. 박훈규씨의 삶은 ‘그리고’와 ‘그러나’의 연속이었다. 삶이란 언제나 그리고와 그러나의 연속이지만 유독 그의 삶은 두서없고 정신없다.

새 책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를 펴내면서 또 하나의 ‘그리고’가 추가됐다. 음악 앨범을 기획하고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 OST’를 만들었다. 그냥 노래만 골라 모은 것이 아니다. 참여 아티스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콘셉트를 설명했고, 영국 도시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수많은 자료를 건넸다. 참여 아티스트들은 쟁쟁하다.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프라이머리, 캐스커, 노브레인, 안치환 등 색깔도 다양하다. 그의 이름 앞에 ‘프로듀서’라는 설명이 새롭게 붙게 됐다.

“지금까지 워밍업 했죠. 그런데 워밍업을 좀 격하게 했죠.(웃음)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도 좀 심하게 힘들었어요. 아, 이렇게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참여 아티스트들 만나서 한 세 시간씩 설명하다 보면 진이 쫘악 빠져요. 프로듀서라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대충 하려고 들면 쉬울 수도 있는데, 제대로 하려니까 힘들어요. 덕분에 많이 배웠죠. 이제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 나가야죠.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 함께 생각을 나누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프로듀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걸 제대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프로듀서는 ‘장악’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프로듀서’라는 단어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그리고’로 이어왔던 모든 일들을 이제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워밍업이라는 표현은 그래서다. 박훈규씨는 디자인, 사진, 브이제잉, 웹, 포드캐스팅, 여행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각 분야에 이정표를 박아 놓고 왔다. “다음에 다시 갈 때 얼마나 편하겠어요”라는 그의 말이 이해된다.

박훈규씨는 뭘 해도 남들이 간 길을 뒤따르지 않는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도 그랬고, 책을 펴낼 때도 그랬고, 시디를 제작할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길을 배우지만 길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다.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를 펴낸 이후 새로운 형태의 세미나(라고나 할까 프레젠테이션이라고나 할까)를 계속하고 있다. 이름하여 ‘트래블로그’(Travelog)다. 이를테면 ‘여행보고만담쇼’다. 직접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여 주고, 오에스티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치고, 독자들과 여행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에게 여행은 과정이나 목적이 아니다. 여행은 시작에 불과하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의 대화와 관계와 나눔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앨범 제작 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어요. 일반 시디 제작비의 두 배가 들었죠. 제대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참여한 뮤지션들이 ‘아, 이렇게 만들기 위해 박훈규라는 사람이 그렇게 돌아다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이런 시도들을 계속 할 거예요. 지금은 새로운 형태의, 아마도 국내 최초일(웃음) 여행 책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제 꿈은 ‘최고의 조직’을 만드는 겁니다. 놀던 사람들을 모아서는 계속 놀아요. 그런데 노는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언젠가는 그런 조직 혹은 집단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진지한 프로듀서가 없다는 겁니다.

그의 머릿속은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영국의 문화·도시·예술 이야기를 담았던 <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를 촉매제로 홈페이지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영국의 거리를 찍은 동영상도 재미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런던 사운드’였다. 런던 사운드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런던 거리의 소음을 녹음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음악 같다. 음악처럼 아름답다. 어쩌면 그 소리들이 도시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건 정면승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여행이란 무엇일까?’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음악이란, 웹이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꾸준히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박훈규씨는 세련된 형식의 질문을 계속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글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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