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동아일보)

《백태웅(白泰雄·43). 1992년 ‘해방 후 최대 규모의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조직’(국가안전기획부 발표)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로맹) 중앙상임위원장으로 구속 기소돼 1심 재판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 급진세력이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는 현재 캐나다 서부 최고 명문인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로스쿨 교수로 국제인권법과 한국법 강의를 맡고 있다.

법을 부정했던 그가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그 스스로 ‘법에 대한 투쟁(Fighting against Law)’이 아니라 ‘법을 위한 투쟁(Fighting for Law)’을 한다고 말한다. UBC와 고려대 법대의 ‘공동 법학석사(LL.M.) 프로그램’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26일 서울에 온 그를 만나 ‘법’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과거의 ‘백 위원장’은 법에 저항했고 지금의 ‘백 교수’는 법을 옹호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데, 백 교수에게 법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법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정권은 법을 통해 국민을 제압하려 했고, 그 법을 따르는 것은 정당성이 없는 권력에 추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법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법은 통제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은 지키고 옹호해야 할 대상이죠.”

― 백 교수의 말씀은 독일 등 대륙법계 국가의 ‘법치국가 원리’와 영미법계 국가의 ‘법의 지배’의 차이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둘 다 국가권력이 법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독일 법치주의는 ‘법’의 실질적 내용을 문제 삼지 않고 다만 법으로서의 형식적인 외형만 갖추면 됩니다. 반면 ‘법의 지배’에서의 ‘법’은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이고 타당한 법만을 의미하죠.
“그렇습니다. 독재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법을 제정해 국민을 지배하면 그것은 ‘인(人)의 지배’이지 ‘법의 지배’가 아닙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법의 지배’의 정신에 비춰보면 악법은 법이 아니죠. 악법이 없도록 하는 것, 악법도 좋은 법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법의 지배의 정신입니다.”

백 교수는 2003년 UBC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인권법’ 강의를 개설했고 2004년부터는 ‘한국법’ 강좌도 개설해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의 법과 법체계 전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 외국에서 한국법을 가르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캐나다는 한국 이민자의 수가 최근 급증하고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무역거래도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당연히 법률문제도 많아질 것이고 그에 대비해 한국과 캐나다 모두 상대방의 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이 ‘한반도에서 탈피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한국도 이제 한반도를 넘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한국법 강좌도 그런 고민의 소산입니다. 지금 미국을 포함해 북미 전역에 정식 한국법 강좌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에 UBC 로스쿨 메리앤 보빈스키 학장을 모시고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도 북미 최초로 UBC에 정식 한국법 강좌를 개설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법 석좌 기금교수직을 만들기 위해 국제교류재단 및 몇몇 로펌과 협의 중입니다.”

― 올 초 백 교수께서 한 국제세미나에서 “한국의 진보세력도 북한인권 문제를 거론할 때가 됐다”고 발언했다는 외신이 보도돼 파장이 컸는데….
“발언의 전체 맥락보다는 어느 한 부분이 강조돼 보도된 것 같습니다. 예민한 문제라서 말하기 어렵지만, 한국은 북한인권 문제도 너무 한반도 중심의 세계관에서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법 이외에 백 교수의 과거 일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적당할 때 말씀을 드릴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정치를 하실 생각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입니다. 내년쯤 UBC의 한국법 프로그램을 정착시키고 돌아오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아닙니다.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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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386의 사상적 배후는 '강철서신'의 김영환?
(출처: 월간 말 구영식 기자)

'전향 386'들의 다수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사상적 배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386인사들은 대체로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김 위원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형태의 글로 운동진영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강철서신'이다.

80년대 학생운동권 강타한 '강철서신' 주인공

김 위원은 구학련 활동 이후 구속되었다가 출소해 반제청년동맹(1989년)민족민주혁명당(1993년, 민혁당) 등 비합법 주사파 조직에서 핵심활동가로 활동했다. 특히 민혁당은 90년대 중반 내부 사상투쟁을 통해 '김영환파'에 의해 장악됐다. 김 위원은 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차례 면담하는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일성주의자'였다는 것이 당시 동료들의 평가다. 그와 민혁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한 386 인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94년 김영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해는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영환은 '육체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94년은 내게 가장 슬픈 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철저한 김일성주의자였다."

김 위원은 99년 터진 '민혁당사건'에서 공소보류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받았는데 그가 국정원에서 '반성문'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민혁당을 해체한 뒤 구해우(현 광주평화개혁포럼 대표) 등과 함께 '푸른사람들'을 결성했다. 푸른사람들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운동권 출신의 친목·학습모임이었다. 그는 구해우 대표에 이어 2기 회장을 맡았다. 또한 김 위원은 홍진표·한기홍 등과 함께 1998년 11월 현재 젊은 우파의 사상지인 <시대정신>을 창간했다. <시대정신>은 80년대 NL 주사파 그룹이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만든 잡지였다는 점에서 운동권 안팎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03년 1월호를 끝으로 격월간지에서 계간지 형태로 발간해오고 있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단골 필자로 등장한다. 2004년 가을호에는 박세일 의원(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권두 인터뷰로 내세워 눈길을 끌고 있다.

'전향 386'의 사상적 거처 역할을 해오고 있는 <시대정신> 그룹은 북한민주화로 포장한 북한붕괴론을 제기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황장엽 전 비서가 만든 주체사상이 60년대 이후 김일성 주석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즉 황 전 비서의 주체사상이 진정한 주체사상이라는 것. 그래서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이들을 '황파'라고 부른다.

한홍구 교수 "김영환은 주체사상을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 버렸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11월 25일자 <한겨레21>의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에서 김 위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 버렸다. …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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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NL주사파 운동권 핵심이었다
뉴라이트운동 주도하는 '전향386', 그들은 누구인가
(출처: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운동권들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자본가만큼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나."
소위 '수구꼴통'의 우익집회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다. 지난 24일 자유주의연대 창립 기념토론회에 참석한 한 386 운동권출신이 내뱉은 '자본가 찬양가'다. 그는 범청학련 부의장과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지낸 'NL(민족해방) 주사파'출신이었다.

지난 4·15 총선에서 전대협 출신이 12명이나 당선되면서 운동권 386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 또다른 부류의 운동권 386이 뜨고 있다. 자유주의연대로 집결한 이들은 <조선>과 <동아> 등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으면서 현재 뉴라이트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전향 386'들로, 대다수가 과거 NL 주사파 출신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홍진표·한기홍, "김정일 정권 타도" 기치 건 <시대정신> 창간멤버

 
▲ 홍진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오마이뉴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자유주의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향 386'은 신지호·이동호·최홍재·최희섭·한기홍·허현준·홍진표 등으로 확인됐다. 이중 PD(민중민주) 계열인 신지호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는 80년대 NL 주사파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먼저 홍진표(42)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홍 실장은 한때 국보법(2번)과 집시법(1번) 위반으로 3번이나 투옥된 운동권이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홍 실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82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이듬해 정치학과 83학번으로 다시 입학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홍 실장은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과 함께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남한 학생운동사상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김영환 위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홍 실장은 이후 전민련(전국연합의 전신) 통일분과 간사와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국장 등을 지내며 10여년 동안 통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현재 젊은 우파의 사상지 역할을 해오고 있는 <시대정신>의 창간 멤버이기도 하다.

홍 실장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현 정권을 '수구좌파'로 규정한 뒤 "현 정권은 북한인권문제는 외면하고 김정일 정권 유지에 목을 걸고 있다"며 "정상적인 좌파라면 지금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홍 실장과 함께 <시대정신>를 창간한 한기홍(43)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노동운동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한 대표는 대학 3학년 때 중퇴한 뒤 인천의 작은 공장을 전전했다. 인쇄노조와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각각 3년씩 일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이후 94년부터 97년까지 철도청 하급 기능직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90년대 말 사상전향한 그는 '푸른사람들'에서 활동했다. 푸른사람들이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운동권들의 친목·학습모임이었다. 그는 1기(구해우)와 2기(김영환)에 이어 3기 회장을 맡았다.

한 대표는 99년 12월 "2000만 북한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김정일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이를 계기로 '전향 386'들은 <시대정신>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과거 전대협은 폭력혁명세력... 민주화운동세력이란 용어 쓰지 말아야"

 
▲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최홍재(37)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역시 <시대정신> 편집위원이다. 최 위원은 고려대 신방과 87학번으로 91년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5기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 대행을 지냈다. 최 위원은 94년 한총련 조통위원장을 지냈으며 그 이후 97년까지 전국연합 자주통일위원회에서 일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98년부터 2000년까지 민화협 연수기획부장을 지냈으며 열린사회시민연합의 은평지부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다.

최 위원은 스스로 "골수 주사파였다"며 "98년 북한 기아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북한체제의 허구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와 함께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한 386 인사는 "그는 매우 성실했고 열정적인 동료였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전대협 5기와 6기 중앙위가 이월식을 한양대에서 했다. 교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승용차가 길가에 죽 늘어서 있었는데 홍재가 백미러를 다 때려 부시더라.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자본가는 다 때려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조국통일투쟁과 관련해서도 강경발언을 했다." 최 위원은 90년대 후반 사상적 변화를 겪으면서 젊은 우파의 집결지인 <시대정신> 그룹에 합류해 현재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민주통일센터 사무국장도 지냈다.

최 위원은 자유주의연대 창립기념식 토론회(24일)에서 '잃어버린 세대 386(?)-386에 대한 성찰적 회고'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80년대 386'에 대해 "좌경도 용공도 아닌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며 "소련식 사회주의국가를 만들거나 북한식 김일성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강력한 이념세대였다"고 규정했다. 최 위원은 '정치권 386'에 대해 "히틀러의 게르만주의보다 더욱 파괴적인 '우리 민족끼리'라는 시대착오적 담론에 매몰되어 있다"며 "한국 386은 김정일과 운명공동체"라고 주장했다.


▲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지냈다. 그는 이동복 전 의원이 상임대표로 있는 '북한민주화포럼' 간사를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1월 1일 북한민주화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학교 때 조국통일그룹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잘못된 사상에 입각해 살았다"고 '고백'했다. "애국운동세력은 좌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나처럼 친북주사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친북주사파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에 나서야 한다. 과거 우리(전대협)들은 폭력혁명세력이었다. 더이상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말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한의 학생운동과 좌파운동을 지도하는 세력은 김정일정권이다.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할 때 한민전 투쟁지침과 북한의 혁명관을 단파라디오로 듣고 그 내용을 각 대학의 토론자료로 내려보냈다. 애국운동진영은 남한의 좌파를 성장시킨 배후(김정일)를 찾아 집중 공격해야 한다."

유일한 PD계열 신지호... 90년대 초 "더 이상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선언

또 전북대 88학번인 허현준 민주통일센터 연구원(36)은 1994년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냈다. 범청학련 남측본부 부의장로 활동하면서 '남·북·해외 공동연석회의'를 성사시켰던 그는 범청학련사건과 서울대 범민족대회사건으로 두차례 구속됐다. 특히 그는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사건 때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2년간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허 연구원은 98년 (주)다우스마트라는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하고 2003년 4월에는 인터넷 생선회 쇼핑몰(피시팔팔)을 열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통일운동과 장애인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3년 민화협과 통일맞이,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탈북자동지회 등에 활어횟감을 무료로 배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허현준 민주통일센터 연구원

허 연구원이 총학생회장으로 있던 전북대는 90년대 중후반 이후 새로운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즉 NL그룹 주류에서 분화한 '사람사랑(사사)계열'의 근거지였던 것. 이들은 '푸른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대부분의 전북지역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심지어 총학생회 사무실에 '김정일 정권 타도'라는 슬로건을 내걸 정도로 '북한타도론' 혹은 '북한붕괴론'에 집착했다.

허 연구원은 자유주의연대 창립기념 토론회에서 "한총련 중앙간부들은 밤에는 김일성 회고록을 읽고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비디오를 보면서 탄복하고 박수를 쳤다"며 "386의 이념적 토대는 북한정권의 붕괴와 함께 급격히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최희섭(40) 열린사회시민연합(시민연합) 동대문지부장은 경희대 사학과 84학번. 그는 5기 전대협에서 조통위 정책위원을 지냈으면 이후 전국연합에서 활동했다. 시민연합은 <시대정신>과 연계된 박홍순(87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숭규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시민연합은 서울민통련과 민주쟁취국본 서울지부가 각각 시민단체로 전화된 서울민주시민연합과 서울겨레사랑지역운동연합이 합쳐져 1998년 창립한 단체다. 시민연합은 창립 초기부터 '북한실상과 탈북자 실태', '북한현실과 통일운동의 방향' 등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자유주의연대에 소속된 '전향 386'들 중 거의 유일한 PD계열인 신지호(42) 대표는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82학번)를 졸업했다. 신 대표는 노회찬·조승수 의원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추진위 울산 책임자였다. 신 대표는 90년대 초반 '고백논쟁'을 일으키며 운동진영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바 있다.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에서 활동하던 그는 잡지에 '고백' 등의 글을 통해 운동권을 공개 비판하며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신 대표는 92년 8월호 <길을 찾는 사람들>에 기고한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에서 "사회주의의 핵심이 사적 소유의 폐지에 있다면 장구한 역사발전이 있는 후라면 몰라도 앞으로 상당기간은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그것을 신봉하지도 행동에 옮길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기고글의 편집자주에는 "지난 수년간 지하노동운동을 해오면서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해왔다는 필자가 맑스레닌주의자에게 묻고 있다"고 적혀 있어 그의 운동경력을 짐작케 한다. 이후 그는 "운동권은 이제 경실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자신의 충고에 따라 경실련에 들어가 정책파트에서 활동하며 서경석 목사를 보좌했다. 신 대표는 경실련 활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 수석연구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팀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신 대표는 최근 "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는 80년대 운동권이 주창했던 민중민주주의의 노무현 버전"이라며 "지배계급 교체, 기존질서 해체 등의 발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종인 민중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노무현 정부를 공격해왔다.


▲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왼쪽)과 지난 92년 8월호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에 실린 신 대표의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기고글.

전대협 출신들의 반응 "극단적 단절... 정치세력화를 위한 이미지화작업"

이들에 대한 전대협출신 386인사들은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슬프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성원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사무처장은 이들의 변신을 "극단적 단절"이라고 표현하면서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는 말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전문환 전대협 동우회장은 "우익인사가 후원하고 우익매체가 띄워주고 있는 자유주의연대의 출범은 우파의 위기의식에 기반한다"며 "하지만 이들의 고백에는 무게나 비전이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전 회장은 "이들은 정치세력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며 "현재의 활동은 결국 정치권 진출을 위한 이미지화작업"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지역기반 등 하부조직력이 없어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등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향 386'의 사상적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김영환 위원의 과거 동지였던 A씨는 "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냐고 그들에게 따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환이나 홍진표는 당시 학생운동권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들은 우리한테 공장에 들어가라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들은 혁명 지도자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이들은 그동안 운동권에서 나름의 지위를 누려왔다. 이것은 당시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많은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들이 사상적 지도자인 것처럼 행세하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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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는 가장 후진적인 외눈박이"
386 골수 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전향한 서강대 신지호 교수
(출처: 주간조선 정장열 기자
jrchung@chosun.com)

동아일보에 칼럼을 정기 기고하는 신지호(申志鎬ㆍ42) 서강대 교수가 요즘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다. 386 골수 운동권 출신인 그는 과거 운동권 동지였던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을 향해 “동지들을 속일 수 없다”며 친북좌익의 성향과 주사파적 시각이 변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이들에게 “과거 청산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향한 사회주의자’로서 우리 사회 좌파의 시대착오에 대해 메스를 가하고 있는 신 교수를 지난 10월 2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평소 칼럼에서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던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나.
“노무현 정권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말 중 하나가 386 정권이고 17대 총선 이후 386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386의 다수가 주사파 출신이다. 또 민노당의 다수파도 주사파 출신들이다. 주사파들은 아직 한국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일반 국민에게 반미(反美)ㆍ친북(親北)의 바람을 일으키는 진원지이다. 한국 정치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주사파 문제를 제대로 검증하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 사람들이 과거 어떤 사람들이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한국을 앞으로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가 명확해져야 국민의 정치적 선택도 분명해질 수 있다.”

-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이 아직 친북 성향이라고 단정했던데 이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와 다름이 없다는 얘기인가.
“물론 주사파도 다양하게 분화됐다. 민노당 주사파 출신들은 거의 변함이 없는 반면 열린우리당 주사파 출신들은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고 신봉했던 데서 이제는 북한을 감싸고 이해하는 식으로 변했다. 이들은 북한의 문제점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을 한다. 이런 변화도 제대로 된 자기 반성을 통한 게 아니라 북한 체제의 문제점이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북한에 대해서는 외눈박이들이다.”

-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오류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 필요하다는 입장인가.
“그렇다. 주사파는 기본적으로 민족사의 정통성이 대한민국에 있는 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나. 그들이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번이라고 밝힌 적이 있나.”

-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주사파적 시각이 아니라 통일의 염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 정서를 앞장서 대변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나.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족이나 통일 지상주의로는 그들의 태도가 설명이 안된다. 친(親) 김정일 노선을 걷는 것과 민족ㆍ통일지상주의가 일치할 이유가 없다.”

신 교수는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을 비롯해 현 정권에 참여한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아분열증 환자’라는 주장도 폈다. “이 사람들은 세계사적으로 검증된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 노선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경시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 문제를 물어보면 인권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게 생존권이라며 ‘북한도 일단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민주주의 인권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를 편다. 과거 우리의 권위주의 정권에 적용했던 논리와 북한 전체주의 정권에 적용하는 논리가 180도 모순이다.”

“한국 좌파는 수구 맹동적”

- 주사파를 포함한 우리나라 좌파들의 문제점이 뭔가.
“한국의 좌파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가장 후진적인 좌파다. 한국의 좌파는 크게 세 덩어리로 분류가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주사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노당 내의 과거 PD계열이다. 또 하나가 주사파나 PD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 막시즘 등 서유럽풍의 세련된 좌파이다. 이런 세련된 좌파가 대표주자가 되면 그래도 괜찮을 수 있다. 독일의 사민당 같은 정당은 과거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좌파 진영에서는 아직도 주사파가 가장 영향력이 크다. 성숙된 좌파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수구적 맹동적 좌파다.”

신 교수는 주사파에 대해 “고쳐서 새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100% 폐기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최악의 전체주의인 김일성ㆍ김정일 체제를 지탱하는 주사파가 사회주의 내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사회주의였으며 북한의 실패가 곧 주사파의 실패”라는 것이다.

- 노무현 정권을 평소 좌파 정권이라고 지칭하던데 현 정권 인사들은 좌파 정권이라는 평가에 반발하고 있고 사실 구체적 정책들을 봐도 좌파라는 평가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많다.
“과거 PD계열은 주사파들에게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노선을 걷지 않고 자본주의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오로지 미 제국주의 반대투쟁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을 보면 그때 구도와 비슷하다. 시장친화적인 주장을 펴는 일부 386 출신 의원들을 보더라도 경제 정책은 우로, 사회ㆍ문화적인 것은 좌로 가져가겠다는 태도다.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빠진 것은 통일ㆍ외교ㆍ안보 문제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점이다. 이제까지 노무현 정권의 방향을 보면 반미는 아니라고 해도 탈미(脫美)는 분명하다.”

- 현 정권의 정책이 과거 주사파의 전략과 비슷하다는 얘기인가.
“구도가 닮았다. 현 정권은 시장경제 마인드를 갖고 있는데 왜 우리가 좌파냐며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시장을 조금 중시하는 마인드를 보여준다고 좌파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시장이 작동하기 때문에 정부가 좌지우지할 단계를 넘어섰다. 정책에서 일정한 편향이 나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를 조정해 나간다. 하지만 안보ㆍ외교ㆍ통일 문제에는 시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조정자가 없다. 국민에게 이 부분에서 확고한 믿음을 주지 못하면서 시장이 감시하는 경제 정책에서 약간의 우파적 경향을 보인다고 좌파의 이미지를 벗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은 주사파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좌파 정권이다.”

유시민씨 권위·전체주의 차이 몰라

- 좌파 진영이 지금도 ‘박정희보다 김일성이 낫다’는 식의 사고를 한다고 보나.
“과거에는 박정희·전두환이 싫고 김일성을 좋아한다고 내놓고 얘기했지만 지금은 조금 변했다. 지금 좌파의 멘탈리티는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싫다는 쪽이다. 과거 유시민 의원이 한 신문 칼럼에 ‘유신 5공의 체육관 민주주의나 김일성에게 100% 찬성표를 던지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나 오십 보 백 보다’라는 글을 쓴 걸 기억한다. 유시민 의원은 운동권 내에서 우파라는 평가를 받았고 주사파 출신이 아니다. 이런 사람조차 과거 개발독재는 우파 독재였고, 저쪽은 좌파 독재였는데 뭐가 다르냐는 위험한 논리를 편다. 이는 권위주의 체제와 전체주의 체제의 차이점을 전혀 모르는 한심한 얘기다. 과거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이 전체주의였다면 지금은 권위주의 체제다. 이 차이를 중국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신 교수는 한국의 현 정치 지형을 ‘시대착오적인 20세기 수구 연합’이라고 규정했다. 북한과 운명을 같이 할 열린우리당의 수구 좌파 세력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나라당의 수구 보수 세력,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민노당의 반동 좌파 세력이 우리 정치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한국 정치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수구 보수를 대신할 혁신 보수가 등장하는 보수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박정희 시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지금 박정희식 모델로는 절대로 2만달러 시대를 열 수 없다. 지금은 작은 정부와 민간의 활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모델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조도 내용도 없이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보수가 아니라 철학과 영혼이 있는 배고픈 보수가 필요하다. 이런 보수 혁명이 일어나 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진 다음에라야 우리 사회 좌파도 진정한 변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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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념과 사상은 변화해야 한다. 단, '현실과의 호흡을 통해서'라는 전제이자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전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향 근거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향근거에는 '북한 체제가 대안이 아니다'라는 현실은 있는데, 정작 한국의 현실은 없다. '철학과 영혼이 있는 배고픈 보수'가 대체 어떤 현실적 정책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북한을 이상사회로 생각했던 과거에도, 사회주의를 만병통치약 정도로 생각하는 현재에도, 현실 불가능한 배고픈 보수 운운하는 미래에도, 여전히 현실과는 담을 쌓은 이들이다.
 

386 운동권, 사교육 시장 '완전정복'

(출처: 오마이뉴스)

"386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386운동권 출신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 6월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운동권386들이 사교육시장을 장악했다"며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던 사람들이 이제는 학원 장사를 해서 떼돈 버는 세상이니 도대체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두고 일부에서는 '운동권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라며 박수를 보냈고, 일부에서는 '망발'이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운동권들의 사교육 시장 장악은 업계에도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얘기다. 386운동권의 사교육 시장 장악은 현재의 입시제도와 한국적 학벌주의가 만들어 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사교육 시장에 강자로 등장했나

386운동권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94년 수학능력시험으로 입시제도가 바뀌고, 논술 비중이 높아지면서부터. 운동권들은 비판의식과 종합적인 사고를 요하는 언어영역과 논술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입시 경향이 통합교과형으로 바뀌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2008년 입시부터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이 통합교과형 논술을 대학별 고사로 선택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송파구에서 논술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L씨는 386이 사교육 시장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수능의 주요 출제자들이 80년대 중후반에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교수들이다. 그들의 논문주제는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언어 시험에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나오고 민중정서를 담은 이규보나 정약용의 작품이 자주 출제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86이 겪었던 비판정신과 출제 경향이 유사하다."

사실 386운동권들의 사교육 시장 진출은 생계형에서 출발했다. 80년대말과 90년대초에 사회에 나가 마땅히 뿌리내릴 곳이 없었던 이들은 운동에 한 발을 걸치고 밥벌이를 위해 학원강사로 뛰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돼 사교육 시장으로 진출한 이들도 적지 않다. 386운동권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입지를 넓힌 결정적 계기는 90년대 후반 강남 대치동 학원가가 커지면서부터다. 여기에 2000년 대학 수시 시장확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386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학원은 조동기논술학원, 유레카논술아카데미, 초암논술아카데미, 플라톤청솔학원, 학림학원, 청산학원 등이다. 이들은 소규모 학원에서 출발해 영역을 전문화하면서 규모를 확장시켰다. 이들 학원 대부분은 현재는 100명이 넘는 강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출판부, 논술연구소, 어학원을 부설로 두고 기업형으로 움직인다. 인터넷 강의가 일반화된 지 오래다. 이들 사교육 시장의 정점에는 코스닥 상장기업 메가스터디가 있다. 이들 학원들은 네트워킹을 통해 서로 그물처럼 연결돼 있다.

사교육시장에서 돈 벌어 비정규직운동... 정치권 진출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한 황광우(서울대 77학번)씨는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황씨가 지은 <진리는 나의 빛> <황씨 아저씨네 논술 서리>는 논술교재로 유명한 책이다.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의 교장인 정광필(서울대 78학번)씨도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 강의를 했다. <르몽드 코리아>의 대표이사인 박승흡(서울대 80학번)씨는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논술강사를 시작했다. 그는 학원강사로 뛰면서 번 돈으로 비정규직센터를 만들었고, 노동전문지인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전대협 2기 출신인 조동기(고려대 85학번)씨는 강남 대일학원에서 국어과목으로 스타강사 대열에 들어선 이후 97년말 대치역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을 열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는 전국에 19개 분원을 마련하고 올해 매출목표를 4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강동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청산학원을 이끄는 쌍두마차인 최원극(외국어대 84학번)씨와 박영재(서울대 84학번)씨는 주체사상쪽 조직이던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소속으로 골수 운동권이었다. 91년 속셈학원 수준으로 출발한 청산학원은 과학고, 민족사관고, 외국어고 전문학원으로 성장해 매출 100억원대의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논술과 구술 면접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22개 분원을 두고 있는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 장민성(서울대 81학번), 박홍순(성균관대 82학번)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된다. 박홍순씨는 민주노동당 중앙당 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구로갑 후보로 출마한 바 있다.

노원구에 있는 학림학원의 채광석(성균관대 87학번)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운동권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학림학원에는 성대 운동권 출신들이 강사로 다수 포진하고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인 이윤호, 송재인씨도 80년대 초반 학번으로 운동권 출신들이다.

과학탐구 영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연봉18억원을 기록한 이범(서울대 88학번)씨도 좌파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했던 <학회평론>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학원 사업을 하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다. 열린우리당 정청래(건국대 85학번)의원과 정봉주(외국어대 80학번)의원은 길잡이학원과 외대어학원을 운영하다가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경우다.

총학 집행부 회의같은 마라톤 강사회의

운동권들의 사교육 성공비결은 끈끈한 연대감과 네트워크, 조직관리능력, 친화력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철저한 친분과 인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 학원의 경우 강사 회의가 총학생회 집행부 회의와 비슷하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들린다.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회의도 학생운동 시절 마라톤회의를 연상케 한다. 초암논술아카데미의 경우 일요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교사 80여 명이 각 학년별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아이들이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과연 그것이 강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토론하고 고민한다. 철저한 분석을 통해 '시험에 나올 법한 문제'를 찍어낸다. 철저히 경쟁시스템이 도입된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앞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미나가 끝나면 뒷풀이가 진행된다.

이러한 386출신의 사교육 시장 활약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 변혁을 외칠 때의 모습과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교육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공교육 취약성과 입시 중심 체제에 대한 진단없는 비판은 현실과 동떨어진 감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386출신 학원 관계자들은 인터뷰 요청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지금 구조대로 가면 공교육은 사교육 시장에 먹힐 수밖에 없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이들은 공교육의 상징이 된 전교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386출신의 한 학원장은 "전교조가 아니라 전개조(전체가 개조대상이라는 의미)"라면서 "변화하지 않고, 교원평가제에 부정적인 모습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한만중 전교조 전 정책위원장은 "사교육 업체들이 교과서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공교육을 포위할 정도로 성장한 상태에서 공교육의 취약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면서 "사교육을 이기는 공교육은 현실 조건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386은 이미 중산층, 비판은 무의미하다"

한편에서는 사교육을 통해 제도가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겠다는 목소리도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이윤호 대표강사는 "학교교육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 한계를 21세기 대안적 교육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초암논술아카데미는 '풀로 엮은 집' 등의 문화사업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386운동권 출신이자 대치동 전문학원 1세대인 김찬휘(서울대 83학번), 한석원(서울대 83학번), 이범(서울대 88학번)은 무료인터넷 강의를 통해 교육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올해 3월 인터넷 공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죽음의 삼각형 : 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2008년 대입이 내신-수능-대학별 고사로 이뤄진 최악의 균형이라며 혹평했다. 이 동영상은 학교-학원-대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2008학년도 대입은 논술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시장을 팽창시키고 있다. 지난 4월 <대우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는 현재 16조8000억원에서 계속 확대될 전망"이며 "향후 5년은 고등학교 학생수가 증가하는 황금 시기"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언론사와 학원이 손잡고 논술강사 양성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강사를 확보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학교-학원-대학의 균형보다는 사교육 쪽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크다. 시장질서에서 철저히 살아남아야 하는 386세대에게 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교육 약화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다. 논술강사를 하고 있는 J(서울대 인문대 박사과정)씨는 "이미 중산층에 편입돼 있는 386운동권들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면서 "예산을 가지고 정책을 움직일 수 있는 국가가 국립과 사립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고, 차별화된 지원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지역 특목고의 한 교사는 "교사 1인당 학생수를 현재 35명에서 20명으로 낮추고, 학교조직 슬림화를 통해 운영의 자율성을 높여 나가야 한다"면서 "다양한 방식의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실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암C&C 이윤호(44)대표는 잘 나가는 논술강사다. 81학번인 그는 대학시절을 뜨겁게 보냈다. 대학을 3군데나 옮겨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는 문화운동을 했다. 잡지 <리뷰> 만들 돈을 구하기 위해 13년 전 처음 학원시장에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정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사교육과 공교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현 제도 속에서는 공교육이 아무리 개혁을 외쳐봐야 틀을 깨고 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교육주체 만들기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이윤호 대표가 공개한 자신의 월급은 비수기인 요즘 200만원 내외. 물론 한참 잘나가는 입시 시즌에는 하루 15시간 강의를 해서 한 달에 3000만원 이상을 번다. 몇 달 일해서 1년을 먹고 사는 셈이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하면서 고민이 많았지만 그는 대안적 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 고민을 해결하고 있다. 시장적 질서와 가치적 질서의 균형을 부여하려고 애쓴다. '풀로 엮은 집' 운영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이곳의 다양한 강좌는 민예총 문예아카데미를 연상시킨다. 초암논술아카데미는 94년 출발해서 직영학원 5개를 포함해 서울과 경기에 8개 학원이 있다. 홈페이지에 밝힌 내용을 보면 2005년 1월까지 약 2300여 명이 수강하고 있으며 140여 명의 강사가 있다. 강의배정이나 수익배분에 있어서도 스타시스템에 의존하기보다는 함께 나누는 방식을 중시한다. 매주 일요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진행하는 80여명의 학원강사 세미나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토론하는 자리다.

21세기 새로운 교육 모델 지향이 이들의 목표다. 이 대표는 386운동권의 비판과 자유로움이 조직을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사교육 시장이 결국 양극화나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양극화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사교육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한 386이 비판도 많이 받고, 왜 그런지 이유도 알지만 나름대로의 건강성도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합리적 인식이 있다는 것은 교육을 합리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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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 금지`가 이들을 키웠다

(출처: 중앙일보)

강남의 사교육 논술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대형 논술학원의 1년 매출이 100억원이 넘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수백억원은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개인적인 논술 과외까지 감안하면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진다. 이 거대한 시장의 승자는 1980년대의 386 학생 운동권 출신들이다. 강남 입시 논술시장의 양대 봉우리인 유레카와 초암을 비롯해 C, N, H 학원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학원들을 움직여 가는 주력이 바로 386 운동권이다. 강남의 논술 명문학원 중 비운동권 출신이 대표강사인 곳은 몇 안 된다.

사교육 시장이 번성한 가장 큰 배경은 널뛰기를 거듭한 정부의 교육정책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학부모들이 사교육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권 386들은 대체 어떻게 강남의 논술 시장을 석권하게 됐을까. 혹시 그들이 과거의 운동권적 사고방식을 학생에게 주입하는 건 아닐까.

◆ 밥벌이 위해 시작했다 = 80년대가 운동권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운동권 좌절의 시대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해체, 소련의 몰락은 운동권에 커다란 좌절과 동요를 불러 왔다. 국내에선 군사정부가 물러나면서 운동권은 투쟁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80년대의 운동권이 90년대 중반 학원계에 투신한 것은 '밥벌이' 때문이었다. 초암아카데미 노원초암 함경목 원장은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선배의 제안을 받고 논술강사가 됐다. 그는 "학원강사는 이력서를 낼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한때 제적되거나 감방 경력이 있는 386 운동권은 90년대에 정상적으로 갈 곳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과거 경력을 캐묻지 않는 학원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도 "(2001년) 9.11 사태가 터져 토론을 하다가 선배가 '너 지금 뭐 하냐'하며 논술 교재를 준 게 (내가 강사가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런 인연과 결속력으로 이들은 빠르게 논술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다 보니 특정 학원에 같은 계열의 운동권 선후배가 많다. C학원의 경우 노동운동을 했던 민중민주(PD) 계열이 많다. A학원엔 박노해 시인 등이 관련됐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관련자들이 있다. 대학과 노동운동 현장 혹은 감방 생활의 선후배 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원에 PD 출신이 많고, 어느 학원에 민족해방(NL) 계열이 많다는 건 이들 사이에선 다 알려진 비밀이다. 하지만 학원 측은 학원강사들의 과거가 외부에 알려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 정부 정책 덕분에 컸다 = 94년 주요대학에서 사실상의 본고사가 부활됐다. 그 무렵엔 논술시험인 국어와 영어.수학 시험을 봤다. 그런 분위기에서 초암(94년), 유레카(96년)가 생겼다. 조모 강사는 "수요가 늘게 되면서 논술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97년 이후엔 논술고사만 남았다. 학교 교육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본고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99년부터는 논술고사가 주요대의 입시를 좌우하게 됐다. 당시 초암과 유레카는 서울대 등 주요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이 두 학원은 급속히 성장했다.

초암아카데미의 이모 대표는 "당시 17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세 명은 경희대 한의대, 연세대 의대, 이대로 갔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대에 진학했다"며 "다음해 목동에 분원을 냈는데 240명 정원에 1200명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2008학년도 서울대가 논술을 통합교과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초암아카데미 성민기 원장은 "시장은 냉정하다"며 "가치가 있으면 투자가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 운동권이어서 성공했다 = 80년대 운동권에선 PD와 NL 계열 사이에서 치열한 사상 투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팸플릿이 회람됐고, 수없는 세미나와 토론, 대자보 작성이 이뤄졌다. 대중 설득도 중요한 실력이었다. 386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의 허점을 공격하는 기술을 익혀 나갔다는 것. 조모 강사는 "운동을 하면서 10여 년간 학습을 했다. 운동권 아니면 체계적인 학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상식 원장은 "우리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대안, 헌신성이 있었고 자기계발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운동권이었기에 논술시장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강사는 "비운동권 출신들은 거대 담론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한 분야에서만 강해 논술 강의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초암아카데미 함경목 원장은 "90년대 이후는 운동권이 취약해 논술 시장에서 크지 못했다"고 했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모 강사는 "누구도 밥벌이를 나쁘다고 할 순 없다"며 "우리의 공통 가치는 '우리는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은 "공교육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대해 원죄 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강승우 김윤미 인턴기자 / 사진 =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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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들을 대학 출신에 국한하는 것도,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와 활동방식을 가진 이들을 '386'이라고 뭉뜽그리는 것도, 사교육 자체의 폐해와 사교육에 몸담고 있는 특정 집단의 아이러니를 뒤섞는 방식도, 엉터리 일색이다.

비로그인 2006-09-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86이라는 말에 벌써 학번이 들어 있으니까요... 이른바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벌고, 또 그 돈이 운동단체에 기부되는 거.. 참 아이러니하죠..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
 

(출처: 매일노동뉴스)

“‘이론’과 ‘실천’을 잇는 긴장 유지할 것”

"전체 노조조직률 11.6%, 민주노총 조직률 4.3%, 2000년대에 들어 더 뚜렷해진 정규-비정규직간의 갈등과 시민사회에서의 주변화 속에서 한국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낸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겸 정책실장 은수미씨(41). 그가 지난 2월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3월부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서 본격적인 연구자 생활을 시작했다.

80, 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은수미씨의 박사논문은 무엇이 ‘위기의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적 진입을 가능하게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97년 감옥에서 나와 보게 된 노동운동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은 박사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 대기업 노동운동이나 정파갈등 등에서 ‘위기’를 실감하면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은 박사는 지난 12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주최한 노동포럼에 발제자로 참가해 석·박사과정 6년만에 출고한 이 논문 내용을 처음으로 노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 박사의 지도교수도 “5번을 읽고나니 내용을 좀 알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1시간여 발제로 논문내용을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논문에서 사용된 핵심분석틀인 ‘연결망 분석’이 학계에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관계구조, 사회적 연대, 정치적 연대, 상징, 조직구조 등과 같은 개념은 일반인에게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자나 청중들 모두 노동계 토론에서 나오는 ‘주장’과 ‘정책과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나, 은 박사의 논문엔 이같은 내용이 거의 없다. 박사논문에 ‘정책’을 담는게 ‘마이너스’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은 박사의 문제의식도 반영돼 있는 결과다. 은 박사는 다음날 노동연구원에서 기자를 만나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최대지점은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자가 더 나갈 때 ‘감히 내가’라는 두려움도 들고, 한편으론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연구내용을 안 받아들이거나 추상적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은 박사가 한국노동연구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이론과 실천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전제한 뒤, "그런 면에서 연구원이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노동연구원은 "이론을 필요로 하면서 현실의 요구에 답해야 하는 곳이자 현장을 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은 박사의 설명. 실제 은 박사는 12일 보건의료노조의 올해 첫 산별교섭 현장에 나가보기도 했다. 사노맹 사건으로 6년간의 수감생활과 6년간의 석·박사 학위과정으로 아주 오랜만에 '현장'을 접한 소감은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인식되는” 현재 노동판도 한국노동연구원을 택한 한 이유였다. 은 박사는 “난 오픈마인드로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A를 이야기하면서도 B나 C나 D도 함께 생각하고 있는데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낙인찍히는 것 같다"고 답답해 했다. 특히 "사노맹 출신이라는 것으로 규정된 느낌”이라는 것.

연결망 분석이 1차 자료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이번 논문은 자료수집에만 4년여가 걸렸다. 반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자정까지 집중적으로 써 집필기간은 6개월이 소요됐다. 은 박사는 1차 자료로 1983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조직 중 전국적 연합사건에 참여한 1,609개 조직의 결성선언문, 주요구성원, 강령, 조직체계 및 규약, 내부회의록, 보도자료, 정책보고서, 기관지 등을 활용했다. 자료수집 과정에 쏟아부은 돈만 2천만원 이상. 은 박사는 자료수집이 가장 어려웠다며 노동계가 역사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계에서 ‘자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여력이 없어 간직하지 못하는 탓이 크지만 자료를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었던 국가보안법 영향도 있다. 사노맹 같은 급진노동단체는 더 그러했다.

이와 관련 은 박사는 급진노동운동의 경험에 대한 성찰도 하고 있었다.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대중적 동의를 못받고 이념이 대안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혁명적 건강성이 있었는데, 지금 흐름에 대해선 그 부분도 의문을 갖는다.”

은 박사는 모주간지와 인터뷰에서도 사노맹 활동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점조직화된 지하활동이다보니 조직 내 인간적인 소통이 약했다. (…중략…) 소통이 없는 연대의 나약함을 고민하지 못한 것도 돌이켜 보면 잘못”이라고. 그러나 은 박사는 “급진적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내에서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배제됐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과대평가되는 면도 있고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는데 앞으로 이 부분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노동사회연구소 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했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상징과 구조의 분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면서 "상징과 구조의 인과성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 실장의 문제제기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빨리 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부분을 담지 못했으나 이 논문을 책으로 발간하자는 제안이 있어 책으로 낼 때 인과관계도 밝혀낼 예정”이라고 답했다. 은 박사의 이번 논문에는 '향후 과제'로 둔 문제들이 곳곳에 있었다.

김 실장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 한 뒤 ‘상징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인과성에 대한 연구를 재주문했다. “연구자가 제기한 명확한 현실을 보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연구자에게 문제제기를 다시 던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은 박사에 말을 떠올리면, 바로 이런 ‘소통’이 비로소 은 박사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할 듯 싶다. 은 박사는 앞으로 조만간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민주노총에 미친 영향’과 ‘사회적 교섭의 전제조건’ 등에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급진적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돌아온 은 박사가 만들어갈 새로운 ‘역할모델’이 기대되고 있다.

송은정 기자  ssong@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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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적 건강성을 오로지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의회민주주의는 대중적인 동의를 받는데 있어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관습적인 우선순위를 의미할 뿐이지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념의 대안성입니다. 점조직적 지하활동이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어려움일 뿐이지, 이념 자체에 내제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출처: 중앙일보)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 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 이해찬 민주당 의원, 한나라당 소장 개혁파인 심재철, 김부겸 의원,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전 대표, 이들은 23년 전인 1980년 5월 15일 한 곳에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맞서 운동권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만여명이 결집한 서울역 광장 시위의 주역이 바로 이들이었다. 당시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고 말한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 부근 경찰 저지선에 시내버스가 돌진해 전경 1명이 숨졌다. 한 학생이 치켜든 플래카드에서 '경희대 복학생회'를 확인한 경찰은 현장에서 시위를 이끌던 문재인(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씨를 연행했다. 당시 경희대생 文씨는 75년 교내시위로 제적됐다 80년 복학했다. 문재인씨는 이날 청량리 경찰서로 연행된다. 그리고 며칠 만에 文씨는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2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경찰서장은 소주 파티를 열어줬고 경희대 재단이사장의 신원보증으로 文씨는 석방됐다. 文씨는 후에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했다. 盧당선자는 20년 변호사 동업자인 文씨에 대해 "나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이라고 소개했다.

지도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철야농성이라도 벌이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시민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복학생 막내인 김부겸씨 등은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일단 퇴각하자"고 했다. 함께 있던 서울대 이수성 학생처장(전 국무총리)도 "여기저기 알아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충고했다. 공수부대 출동 움직임이 전해지자 지도부는 결국 '회군(回軍)'을 결정한다.

80년에 이어 84년에도 구속됐던 유시민씨는 명문장의 '항소이유서'로 유명하다. TV토론 사회자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바리케이드 앞에서 화염병을 들던 심정으로'라며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盧당선자는 이 당에 대해 "같은 여당이자 전략참모가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봄' 당시 구속학생 중에는 유종일 한국경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있다. 졸업 후 친형인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했던 그는 지난해 '노연(盧硏.노무현과 함께 하는 연구자 그룹)'을 만든 핵심 주역이었다. 2001년부터 노무현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그는 지난 대선 때 盧후보의 핵심 공약들을 구상했다.



'서울의 봄' 주역들인 운동권 2세대들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않았다.
당시 숙명여대 형난옥 총학생회장(현 현암사 전무)은 "그때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20년이 흐른 뒤인 2000년에 다시 모여 '봄날 동우회'를 만들지만 정기모임도 없고 연락조차 뜸하다.

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서 대규모 민주화항쟁이 벌어졌고 신군부는 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정권의 폭력성을 목격한 운동권 학생들은 과격해졌다. 화염병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지하서클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론이 스며들었다. 노선투쟁도 치열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광주항쟁은 80년대 운동의 모태이자 학생운동 의식화.조직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 첫 신호탄이 이른바 무림(霧林)사건. 파고 들수록 실체를 종잡을 수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 80년 12월 11일 서울대 도서관 학생식당에 뿌려진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을 정부는 '명백한 좌경화'로 규정했다. 당시 선언문을 써 구속됐던 김명인씨는 현재 문학평론가로 우뚝 섰다. 고세현 창작과비평 사장, 현무환 웅진미디어 사장, 최영선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등도 함께 구속됐다. 구속자 중 서울대 토목공학과 학생이었던 윤형기씨는 학원가에서 전설적 기록을 세운 인기 수학강사다.

  

81년에는 학림 부림사건 등이 꼬리를 물었다.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연대를 강조한 학림사건으로 이선근(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민병두(문화일보 정치부장) 박문식(회계사)씨 등이 구속됐다. 같은 해 부산지역 대학생 21명은 불온서적을 읽었다 해서 구속됐다. 이른바 부림(釜林)사건이다. 盧당선자는 이때 부산대생 이호철(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내정자)씨의 변호를 맡으면서 운동권 책을 처음 접하고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국회의원이 됐을 때 첫 보좌관이 이호철씨였으며 그는 지금도 당선자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 한사람이다.

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에도 큰 충격이었다. '반미(反美)운동'이 갑자기 돌출한 데다 지나치게 과격하고 대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고신대생 문부식(현 당대평론 편집위원)씨는 7년 만에 석방된 뒤 시인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文씨는 무림사건의 주인공 김명인씨와 공개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의 방화로 교내 진입 경찰 7명이 숨진 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 벌어진 '80년대 반성 논쟁'에서다.
"성급한 결정이다. 진압경찰의 희생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문부식)
"새삼 '내 안의 폭력'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의 잣대로 80년대 인간을 몰아붙이고 학대하는 짓이다." (김명인)
운동권 내부의 과장된 명분론과 과잉 폭력을 경계한 文씨에 대해, 金씨는 당시 국가의 '거대한 폭력'부터 먼저 짚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82년부터 대학가 이념서클 사이에 벌어졌던 '사투(思鬪.노선투쟁)'는 NL(민족해방)대 PD(민중민주) 논쟁으로 이어졌다. 지하 유인물을 통한 이 노선 투쟁은 86년 자민투.민민투라는 별도의 투쟁조직을 탄생시켰다. 당시 지하 유인물 주인공들의 '오늘'은 다양하다. 85년 '깃발'을 쓴 문용식씨는 벤처기업 나우콤 대표이고, 함께 구속된 안병룡.황인상씨는 변호사가 됐다.

운동권 필독서로 70만부나 팔려나간 '철학에세이'의 저자 조성오씨는 41세에 사법고시에 합격,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생운동 조직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84년 학도호국단 대신 직접선거로 총학생회가 구성되고, 85년에는 전국 연합 공개조직인 전학련이 등장했다. 대규모 연합시위로 '학생회장=구속'의 관행이 굳어진 것도 이때다. 서울대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인 백태웅씨는 '사노맹(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오랜 투옥생활 끝에 현재 미국에서 사회운동 전반을 연구 중이고, 84년 첫 서울대 총학생회장 이정우씨는 현재 변호사다.

 

같은 해 고려대 김영춘 총학생회장은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됐고 지금은 한나라당 의원이다. 전학련 초대 의장 출신 김민석씨는 재선의원을 거쳐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뒤 국민통합21로 옮겨가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김민새'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김창호 선임전문위원, 이철호 차장, 백성호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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