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프레시안)

'10년 전 백수'가 '요즘 백수' 위해 팔 걷고 나섰다. 
전국백수연대, 설립 9년만에 공식 인정
 
 
20∼30대 청년 실업자 모임인 '전국백수연대'가 설립 9년만에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공식적인 기구로 인정받았다. 서울시는 지난 17일 백수연대를 공식적인 NGO(비정부 기구)로 인정했다고 29일 밝혔다.

백수연대, 서울시 지원받는 공식 기구로 인정
 
이로써 백수연대는 서울시와 공동으로 공익사업을 펼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으며 매년 1000만~3000만 원 가량의 예산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서울시는 온라인 가입 회원 6800명, 친필 서명을 제출하고 가입한 회원 102명으로 구성된 백수연대가 제출한 정관과 총회 의사록을 검토한 결과 이들의 활동이 충분한 공익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백수연대가 이처럼 공식적인 기구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대표 주덕한 씨의 역할이 컸다.
1996년 직장을 퇴직한 뒤 실업자로 지내던 주 씨는 외환 위기 발발 직후인 1997년 전국백수연대를 결성하고 지금까지 계속 대표를 맡아 왔다. "백수이길 피할 수 없다면 '프로 백수'가 되자"라는 주 씨의 '백수 철학'은 외환 위기 직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우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종종 언론의 주목을 받곤 했다.
 
"오랜 백수 경험 바탕으로 청년 실업자 지원 활동 벌일 터"
 
〈백수도 프로라야 살아남는다〉, 〈캔맥주를 마시며 생각해 낸 인생을 즐기는 방법 170〉등의 책을 쓰면서 '프로 백수'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가 얼마 전 백수 신분에서 벗어났다. 지난 7월 6일 문을 연 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 소장을 맡게 된 것.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하지 않고 지낸 지 10년만이다.
 
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는 고 강원룡 목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던 실업극복국민재단에서 청년실업 문제 해소를 위해 설립한 센터다. 재단 측은 처음부터 주 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백수연대가 위탁운영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센터 설립 계획을 세웠다. 재단 측의 위탁운영 제안을 백수연대가 수락하면서 주 씨의 긴 백수 생활이 끝난 것이다.
 
주 씨는 "오랜 백수 생활을 통해 실업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며 다양하고 창의적인 청년 실업자 지원활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주덕한 대표와의 일문일답.
 
- 1996년 직장을 퇴사한 후 처음으로 월급받는 정규직 일자리를 구한 셈이다. 소감이 어떤가?
"물론 좋다. 하지만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백수연대 활동을 통해 청년 실업자들을 지원하는 일은 이미 오랫동안 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와 달리 공식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은 흐뭇하다."
 
'10년 전 백수'와 '요즘 백수', 참 다르다
 
- '백수'라는 키워드에 천착한 지 10년 가까이 돼 간다. 그동안 청년 실업자들이 처한 조건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렇다. 내가 처음 백수 생활을 시작한 1996년과 비교하면 달라진 점이 많다. 아예 구직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는 점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 부분이다.
또 늘어난 대졸자를 수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면서 대졸자들의 하향 구직이 일반화된 것도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턴 제도가 일반화된 것, 일단 취업한 뒤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금세 퇴사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 것, 비정규직과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난 것 등도 중요한 변화다.
과거에는 취업은 곧 백수 생활 종료를 뜻했지만 지금은 취업 이후에도 계속 백수가 될 가능성을 안고 지낸다. 이처럼 누구나 백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백수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제는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청년 실업자의 자존감에 대한 배려 절실
 
- 지난 10년간 고용조건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문제가 있다면.
"대졸자의 하향 구직이 일반화되면서 고졸 이하 학력을 가진 이들이 갈 곳이 없어졌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정부와 언론이 대졸 실업난에만 주로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제대로 여론화 되지 않고 있다.
또 오랫동안 실업상태로 지내는 이들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의 움츠러든 마음을 위로할 공간은 마련돼 있지 않다. 이들의 집단적인 우울증은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대책이 필요하다."
 
- 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 소장을 맡게 됐다. 앞서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생각인가?
"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 대신 '희망청'이라 불러달라. 함께 활동하는 이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 해 움츠러든 이들에게 희망을 나눠 주는 곳이 되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희망청과 백수연대는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움츠러든 청년 실업자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게 시급하다. 이를 위해 '희망청 멘토&멘티' 프로그램, '청년구직자 상담서비스' 등을 준비하고 있다.
또 청년 실업자들의 사회관계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오랫동안 실업 상태로 지내다보면 각종 인간관계가 위축되고, 사회적응력이 떨어지기 십상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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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민들레’는 시들지 않는다
장기수들의 누이동생으로 ‘컴백’했던 박영란, 다시 투쟁조끼를 입었다

광주 ‘통일의 집’에 살았던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 선생을 나는 한번도 직접 뵌 적이 없었다. 북한에서 의사 일을 한다는 나의 고모가 김동기 선생의 사촌동생과 의과대학 동창일 거라거나, 이제 곧 북한으로 가게 되면 그 고모를 한번 찾아보겠노라거나 하는 모든 얘기들을 나는 김동기 선생과 직접 나눈 적이 한번도 없다. 짬날 때마다 장기수 어른들을 찾아 뵙던 광주의 한 후배가 그런 얘기들을 중간에서 몇번 전해 주었을 뿐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떠난 지난해 겨울, 파업을 벌이고 있는 ‘동광주병원’의 노동자들을 만나러 내려갔다가 짬을 내 잠깐 만났을 때 후배는 책 한권을 내밀면서 말했다. “하 선배가 언제든 광주에 내려오면 주라고…. 김동기 선생님이 남기고 가셨어요.”

88년 겨울, 운동권을 떠난 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33년간의 감옥생활과 1년여의 짧은 사회생활에서 느낀 점들을 기록한 김동기 선생의 책이었다. 책 속표지에 선생이 쓴 친필이 눈에 들어왔다. 석줄밖에 안 되지만 “2000.8.2. 김동기 드림”까지 읽는 동안 나는 목이 메었다. 그렇게, 나로 하여금 한번도 뵌 적이 없었던 사람에게 평생 빚을 지게 만든 후배가 바로 ‘우리들의 광주 언니 민들레’ 박영란(37)이다.

80년 5월, 여고 1학년 학생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지켜봤던 박영란은 이십대 6년가량을 운동권으로 살았다. 전남대 법대의 여학생 후배들에게 그의 이름은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5·18기념재단’에 근무하는 후배 강정미에 따르면 “법대의 80년대 운동권 출신 중 노동현장까지 간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표현대로 “88년 겨울, 패잔병이 되어 운동권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지방일간지의 기자라는 소시민으로 변신한 이후에도 그 ‘젊은 날’을 후회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발로 운동권 사람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돕겠다”는 최소한의 다짐이 그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자칭 ‘얼치기 열정주의자’였던 그가 그뒤 한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사상투쟁 와중에서 종파주의자로 비판당하며 운동권을 떠났을 때 그의 ‘사회적 생명’은 이미 심대하게 훼손당했다고 생각했으며, 그뒤부터는 무슨무슨 근본주의자들처럼 글 한줄 쓰려고 해도 그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꼴에 뭘 하겠다고 나서는 거냐? 그냥 얌전히 있어라”는 자각이 항상 그의 머리 뒤꼭지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자각하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후배로부터 “선배를 지금까지 종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시절에 잘못 저지르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선배가 사람들을 안 만나고 살아서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더 험한 ‘린치’를 당했음에도 십 몇년째 의연하게 한길을 가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박영란! 네가 만든 감옥에 널 가두고 응석부리고 있었구나. 자학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달으면서, 그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7년 만의 은둔을 박차고 우리의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앰네스티가 선정한 ‘세계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의 후원사업에 힘을 보태면서 그는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저것 따지면 또 못하게 될 테니까 단순무식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소박하게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고 “고작 내가 한 일이라곤 면회 두어번 가고, 그가 부탁한 책 몇권 보내주고, 한달에 두어번 편지 보내고, 강용주의 답장을 타이핑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 것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의 그런 활동이 나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순결한 영혼을 간직한 투사’ 강용주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장기수 어른들과 피붙이처럼

1999년 2월,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69), 리공순(67), 리경찬(66), 이재룡(57)씨들을 만난 뒤부터 그는 틈나는 대로 광주 ‘통일의 집’으로 그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20, 30대 새파란 나이에 구속돼 30, 40년씩 징역을 살고 대부분 환갑을 넘긴 나이에 병든 몸으로 석방된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비극의 대가를 가장 혹독하게 치른 사람들이었다. 2000년 9월2일 북으로 돌아가기까지 1년6개월 동안, 그와 몇 사람이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상처’들을 가까이에서 지켰다. 한달에 한번씩 장기수 어른들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조촐한 여행을 다녀왔다. 그 ‘통일나들이’는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어느새 그 모임을 박영란의 애칭을 본떠 ‘민들레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몇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장기수 어른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실정법을 위반한 우리에게 여러분들이 나누어준 정을 죽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북으로 돌아가면 내 자식들과 가족들에게도 꼭 얘기하겠습니다. 70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는데 자꾸 눈물이 납니다”라고 뺨을 떨며 울게 했던 것이다.

장기수 어른들이 북으로 떠나던 날, 민들레 모임의 회원들은 임진각으로 달려가 공동경비구역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또다시 그렇게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민들레 모임’의 회원으로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결코 넉넉한 살림이 아니면서도 ‘통일의 집’에 매달 쌀 한 가마씩을 보내곤 했던 임은주·남창현 부부는 지금 그 쌀을 민들레 모임 회원들에게 나누어주며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지난해 겨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장 귀퉁이의 어두운 계단 한쪽에 봉투를 깔고 앉아, 박영란은 마음속에서 불어대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바람 때문에 줄줄 울었다. 햇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1년도 더 지난 그 얘기들을 하면서 그는 끝내 눈물지었다. 장기수 어른들의 30년 세월과 그뒤 1년6개월간 겪었던 감동의 순간들을 자신의 한두 시간 얘기로는 차마 포장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박영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사진/ 광주매일신문사 안 자신이 쓴 대자보 앞에서.

그는 요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범국민위원회’와 관련을 맺고 양민학살사건 조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인권운동센타’의 ‘진실과조사’팀의 구성원으로서 담양과 장성이 그의 담당지역이다.

“문헌자료 조사를 한 다음 현장에 나가는데 가는 곳마다 시체가 수십구씩 나와요. 그것도 50여 가구쯤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부모를 여읜 자식들은 반 비렁뱅이가 되어 제 힘으로 자랐고…. 어느덧 어른이 돼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을 만큼의 세월이 지났는데…. 놀라운 건 그들이 그 억울함을 평생을 참고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당했으면서도 참고 살 수밖에 없었던 부모세대의 고통을 필설로 다 헤아릴 순 없을 거예요. 피해자들은 평생 입 다물고 어둠 속에 숨어 울며 살았는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잘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았던 이 더러운 세상을, 내 자식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발끈을 야물게 고쳐 매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인터뷰를 위해 그가 일하는 ‘광주매일신문사’를 찾아갔을 때, 신문사의 노동조합은 25일째 파업중이었고 회사는 폐업을 운운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투쟁조끼를 걸친 전사로 우리 앞에 선 것이다.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다시 일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싸움을 마무리하고 하루빨리 현장에 돌아가 정론직필의 본분을 다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장소를 옮기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그가 내 차의 트렁크를 좀 열어달라고 했다. 자신의 카메라 장비를 내 차에 실으려는가보다 하고 무심코 열어주었는데, 웬 사내가 낑낑대며 메고 온 쌀 한 포대를 내 차에 턱 하니 싣는 것이 아닌가. 바로 임은주·남창현 부부가 보낸 ‘여주쌀’이었다. 서울까지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 쌀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민들레 박영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새로 정했다.

글·사진/ 하종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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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춤으로 편견을 타격하는 <몸> 편집장 박성혜 “걷는 것도 춤이다” 
 


사진/ "춤에 관한 고정관념을 깬다." 월간 <몸> 사무실이 있는 창무예술원 연습실에서.

에라, 처음부터 그냥 솔직하게 나가자. 무용인 박성혜(37)씨는 ‘난지도’ 출신이다. 그걸 굳이 숨기지 않는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고 대학원도 마쳤고 유학도 다녀왔으며 지금은 무용계의 거목 김매자 선생이 발행하는 춤 전문 잡지 <몸>의 편집장이면서 틈틈이 아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있으니, 누가 봐도 박성혜씨는 ‘무용인’이다. 그런데 ‘무용’과 ‘난지도’는 언뜻 연결되지 않는 단어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충돌하면서 ‘양에서 질로 전화하는’ 변증법적 탄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박성혜씨가 바로 그 드문 예다. 난지도에서 살았던 7살부터 14살까지의 세월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배운 시기였다.

가장 많은 것들을 배웠던 쓰레기산

“어느날 부반장인 내 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집에 가면서 보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아버지와 같이 병을 줍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그 아이는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부반장일 때는 내 친구이고, 쓰레기 더미에서 병을 골라내고 있을 때는 친구가 아니고….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편견’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춤을 보거나 세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춤에 관한 한 철저히 문외한인 나는 춤이 ‘귀족적 취미’라거나 ‘정신적 사치’라는 무식한 ‘편견’을 갖고 있는데 “그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아니냐?”며 심기를 건드리자 박성혜씨는 참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치품일 수도 있고 아닐 수 있어요. 정장을 입고 비싼 공연료를 내고 공연장에서 보는 춤이나, 관광버스에서 아줌마들이 추는 춤이나, 다 같은 ‘춤’인 거예요.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보기만 하지만 다른 하나는 같이 춘다는 거지요. 춤은 관찰의 대상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면 돼요.”

옆에 있던 김남수(33)씨가 거든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우리가 그런 춤에 관한 일도 하게 될 겁니다.” 김남수씨는 박성혜씨의 영향을 받아 무용 비평에 막 입문한 후배다. 튀는 감각과 넓은 소양으로 많은 사람들을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우리 사회 대표적 ‘네티즌’이다. 박성혜씨는 “내가 김남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라고 강조한다.

“어느날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내 몸이 굳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몸이 굳어서 도저히 춤을 출 수 없었어요. 그런데 평범해 보이던 친구가 춤을 추니까 살아오르는 게 보이는 거예요. 매력이 뿜어져나오는 거예요. 춤이 ‘인간’을 담기에 전혀 결함이 없는 매체라는 걸 느꼈지요.” 김남수의 설명에도 나는 계속 무식하게 나아갔다. “진리를 알려거든 우선 부인하라”고 하지 않던가…. “그게 가능해? 춤에 ‘인간’을 담는 게 가능해?” 두 사람은 이제 난리가 났다. 김남수가 마치 유치원생을 앞에 앉혀놓은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춤도 영화나 연극과 마찬가지예요. 물론 가짜와 진짜가 있어요. ‘문장을 위한 문장’이 몰가치하듯 ‘춤을 위한 춤’은 진짜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아무것도 안 하면서 빈 공간을 가리키며 ‘이게 마임의 정체다’ 하면 이건 사기예요. 그렇지만 무언가를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구석을 보여주는 것은 가능해요. 그런 아름다움을 구별하는 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푸줏간의 고기와 춤의 관계

내가 “너무 심오하다. 나한테는 너무 어려워”라고 계속 엇나가자 이번에는 박성혜가 나섰다. “지금까지 한번도 춤을 춰보지 않았고 평소 ‘춤은 내 인생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지요? 걷는 것도 다 춤이라고요. 두려워할 거 없어요.”

맞다. 나는 춤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다. 박성혜는 그걸 간파했다. “죽기 전에 내가 그런 경험해볼 수 있을까?”라고 내가 한발 물러서자 “나에게 세 시간만 주면,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해줄 수도 있다”고 못을 박는다.

이제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물어보자. “잡지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춤은 고상하고 특별하며 소수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지 못해요. 나이트클럽의 막춤은 이해하면서 공연장의 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같은 시각으로 봐도 괜찮은 거예요. 그렇게 볼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지팡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그 일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만드는 잡지 <몸>이 파격적 표지사진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돼지 머리, 남성 성기, 돼지 똥구멍, 푸줏간의 고기, 여성 음모 노출…. 이건 흡사 엽기 시리즈다. 내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몸이니까요. 그게 다 ‘몸’이잖아요”라고 간단히 답하는데, 나처럼 생각이 짧은 사람은 설명을 들어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반응은 당연히 안 좋았어요. 난리가 났지요. ‘끔찍하다.’ ‘미쳤다.’‘말도 안 된다.’ ‘푸줏간의 고기와 춤이 무슨 관계가 있냐.’ 그런데 저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춤사위 하나를 바꾸는 데도 20년 걸려요. ‘요렇게 추는 것만이 춤이다’라는 고정관념이 박히면 못 바꿔요. 저는 그것을 바꾸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싶은 거예요.”

그 일에 호흡을 함께 맞추는 사람이 김남수다. 박성혜가 김남수에게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용을 새롭게 많이 봐야 해요. 그런 사람들이 무용계에 많이 들어와서 공연도 자주 보고 춤에 대한 인식도 바꾸면서 나름대로 생산물들을 토해내면 뭔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조심스럽게 밝혀야만 될 이야기가 있다. 박성혜는 ‘운동권’ 출신이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으나 딱 한 가지만 쓰겠다. 청계천에서 ‘시다’로 일한 적이 있다. 그뒤 발레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일주일에 두번 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번 수입이 ‘시다’로 한달 동안 뼈 빠지게 일해 번 돈과 같더라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 온기라고는 다리미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발에 동상이 걸려 신발을 찌그려 신고 한달 동안 죽어라 일해서 번 돈이 일주일에 단 두번 일해서 번 돈과 같더라는 것이다.

화가 나는 날엔 구로공단으로 간다

“회의가 당연히 오지요. ‘이런 고급예술 뭐하러 하고 있나’ 그런 고민하게 되지요.”

박성혜는 오늘도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고해’(苦海)의 바다를 간다. 그래서 비싼 음식점에서 귀한 마님과 동화 속 꿈같은 얘기를 한 날은, 잔뜩 화가 나서 돌아오는 길에 구로공단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적색경보등을 켜는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는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미래가 어떠했으면 좋겠어요?”

“별로 생각 안 해봤어요. 난 ‘뭐가 되고 싶다’거나 은행잔고 같은 것에 별로 관심없어요.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바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물어본 사람이 오히려 부끄럽고 미안하다. 이번에는 박성혜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물었다. “지난번 <스파르타쿠스> 공연에 내가 사람들 초대했을 때 왜 안 왔었어요?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런 공연에 내가 제일 먼저 달려올 거라고 생각해주는 박성혜의 공감대가 고맙다. 고백하건대, 무용을 전공한 사람에게도 그런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반성한다. 우리 모두 그런 편견을 버리자. 그게 안 되는 사람은 박성혜씨를 찾아가 3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글 하종강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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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bschun55/60026840644)

-‘로쟈’라는 이름에 관해서 직접 말해달라. 그 이름은 자신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지도 더불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하다. 어떤 용도가 될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또한 자기 존재감의 과시이면서 자기 존재의 '확장'일 테니까. 물론 이건 모두 '로쟈'가 열심히 끄적거려준 덕분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밝혔는데, '로쟈'는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다(즉, 로지온의 애칭이다). 교양있는 분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대개 연상하고서 '여자' 이름이 아닌가로 판단하는데, 로쟈는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의 이름이다(혹 '박노자'의 닉네임이 아닌가란 의견도 예전엔 있었다.^^).
인터넷에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게 지난 99년부터인데, 초기엔 '이가두' '이가휘' 같은 중국풍의 닉네임을 한동안 쓰기도 했다. 그러다 '로쟈'로 정착된 건 기억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보르헤스가 언젠가 '나와 보르헤스'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와 로쟈'도 비슷하다. 많이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는 나의 페르소나(가면)이면서 대변인이고 때론 주인이면서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책읽기 주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bibliological subject' 정도라고 해두자. '나는 책을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란 명제로부터 탄생하는 어떤 주체.

-당신의 알라딘 활동(?)이나 비평고원 활동(?)은 이른바 ‘업계(책을 읽고 쓰길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당신의 독서편력에 혀를 내두른다. 당신의 그런 현재를 있게 한 책읽기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은 그 딱 두 군데인데, 해놓은 일에 비해서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오역에 관한 지적들을 자주 하면서 출판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해서, '내성적인' 성격과는 좀 다르게 많이 나서는/나대는 인물이란 인상도 주는 듯하다(나는 책 얘기가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조용한' 편이다!).
'비평고원' 같은 카페는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나는 초창기 멤버인데,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했다), 알라딘의 서재 같은 경우는 어느날 뚝 떨어진 것이다. 알라딘은 책값 좀 벌어보려고 마이 리뷰를 몇 개 쓰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해서 나름대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리뷰를 많이 쓴 건 아니고 아마도 유명세의 8할은 '페이퍼' 때문인 듯하다. 책에 대한 잡담들.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좀 부끄럽다. 생각만큼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독서의 성격과도 좀 관계가 있는데, 문학 전공자라서 자연스레 갖게 된 태도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세히 읽기'가 필요한 책이 아니면 손에 잘 들게 되지 않는다 (더불어 책을 빨리 읽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이 읽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는 체'를 많이 해서인 듯한데(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들을 적어나갈 수 있다), 사실 책들을 둘러보고 찾아보고 하는 일들을 즐기는 편이긴 하다(주변에선 내 전공이 '서지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데, 그건 '독서편력'이 아니라 '도서편력'이라고 해야 맞겠다. 어쩌면 '편력'도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책읽기의 시작점? 어머니 말씀으론 내 당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백발 도사가 책을 읽는 모습이 나의 당사주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8살 때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좍 꽂혀 있는 걸 보고 경이감을 느낀 적이 있다(우리 집에는 낱권으로도 책이 별로 없을 때였다). 어쩌자고 세상엔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책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러한 책의 존재 자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다(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당신의 글쓰기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인터넷’이 글쓰기와 관련하여 갖는 어떤 의미가 있나? 지면을 허락받는 게 아니라,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인가?
=사이버 공간이란 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원래 독서일기 같은 걸 PC에다 쳐넣곤 했으니까. 다만, 공개된다는 게 다를 뿐인데, 사실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갖긴 한다. 좀더 친절하게 좀더 풀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는 별개로(그건 별로 의식해보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걸 얼마간 의식하고는 있다. 그건 자유로움이면서 동시에 어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애정을 갖고 있는데, 가끔씩 들어오는 청탁을 받고 쓰는 게 아닌, 온라인에 직접 쓰는 글들의 대부분은 ‘곁다리 텍스트’들이다. 번듯하지도 않아서 내세우기에는 멋쩍은. 그래서 ‘책’으로 묶이지 않을 텍스트들. 그런 텍스트들을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이 인터넷 공간의 특장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외국문학, 특히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당신의 학과 진학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아니라면, 그 이유도 물론 궁금하거니와), 그것을 당신의 업으로 삼은 것은 엄연히 당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 러시아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당신을 위태롭거나 공허하게 한 적은 없는가(여기서의 위태로움은 경제적인 위태로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으로 고른 것은 운명이다.^^ 나는 예정조화설 같은 걸 믿기도 하고(‘예정파국설’이어도 무방하다). 애초에는 그냥 ‘문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고, 러시아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경제로운 위태로움’을 논외로 하면, 문학이나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적은 거의 없다. 동료들끼리는 상투적인 푸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성채는 인간들이 써놓은 최우량의 텍스트들로 구성된다. 이 텍스트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을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고답적인 어투의 육법전서 따위를 읽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오만의 대가는 현실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한편으로, 질문은 ‘외국문학도’로서의 한계 같은 걸 느낀 적은 없는가, 라고도 읽히는데, 전공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러시아문학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 혹은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다. 그저 인생이 짧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미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당신은 이전에 <텍스트>에 출판번역의 오류에 관해서 글을 쓴 적도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하여 글을 쓸 때, 당신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단 당신의 전공인 ‘노어->한국어’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특별히 이런 작업에 대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것인가?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한국인이 한글로 쓴 책만 읽고서 무얼 좀 알게 되고 또 똑똑해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유감스럽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본다. 때문에 필요한 것이 좋은 번역이다. 특히나 고전들의 번역(‘우리시대의 고전’들을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좀더 많은 책들이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게 총론이다. 번역상의 오류 등에 대한 지적은 각론에 해당한다.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거기엔 겹쳐 있다. 더구나 내 돈 주고 산 책 아닌가?
그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외국문학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크게 의식한 적은 없다. 사실, 내가 문제삼았던 책들은 대부분 문학서들이 아니라 철학서나 이론서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이 교양서라면 일반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적어도 한국어로 된 책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한 지방대학에서 문화기호학 같은 과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시키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이론서들을 읽다가 나가떨어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듯하다면서. 그런데,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도 주어 술어도 못 맞추는 오역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게 ‘학문’이고 ‘관행’이라면 어처구니없을 뿐더러 비참한 일이다.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책들과 함께 우리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신은 교육 잘 받은 세대로서 풍요로움과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직업을 유전 받지 못한 세대로서의 곤궁함과 난처함 또한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풍요로움과 곤궁함에 관해 듣고 싶다.
=교육 잘 받은 ‘세대’라는 건 무슨 뜻인가?(어느 세대와 비교해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 세대?) 교육 ‘잘 받은’은 대학원졸을 의미하는 건가? 그런데 백수인? 나의 ‘실상’을 까발려놓으라는 얘기 같다.^^ 나의 풍요로움은 물론 책이다. 책밖에 없기도 하다. 가진 재산이라고는(지방 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책값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곤궁함은 정확히 그 풍요로움이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곤궁은 확산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곤궁에 시달린다(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시달린다!). 이런 문제를 자세히 늘어놓는다는 건 궁상맞은 일이다.^^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어느 때도 인문학이 위기에 놓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적 역사가 된 듯싶다. 이것이 비록 상투적인 얘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들, 당신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을 텐데 (그것이 비록 상투적이라고 하더라도) 들려달라.
=사안은 좀 다르지만 문학이고 인문학이고 늘 위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고적으로라도 ‘그때가 좋았지!’ 할 만한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더불어, 나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 속에서의 위상이 저하되고 있다든가 필요가 절하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인)문학 혼자 억울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인문학자의 위기, 내지는 인문학 후속 세대의 위기이다. 물론 이 위기의 빌미는 태생적인데, 그것은 (인)문학이 기생적이라는 데 있는 듯싶다. 자기 스스로 밥벌이하는 게 아니라는 것. 보다 실감나게 말하자면, (인)문학 ‘공부’가 기생적이다. 이 공부는 있는 집 거덜내고 없는 집 주저앉게 한다. 한마디로 멜랑콜리한 공부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있다면 생태학적이고 진화론적인 것이다. 학문 후속 세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을 법하다. 그들은 각자의 풍토에 맞는 인문학의 부피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문학적 공간(혹은 장) 안에서 자신을 바라봤을 때, 현재의 당신의 자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 같은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게 주어진 자리가 있고 찾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 즉, 해야 할 몫이 있고 나잇값이 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일은 많다. 물론 일차적인 관심은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인문학도로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지분을 넓히면서 인문학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무늬’란 뜻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문학의 책임은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이들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많이 읽어야 하며,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자기 고백적인 글을 쓸 때, 시와 시인을 인용하곤 한다. 그리고 어느 글에서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시(인)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20대 초반에 많은 시들을 읽었고 몇 권 분량의 시도 썼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말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시라는 건 그러한 관심/사랑의 최적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는 시를 ‘영혼의 끼니’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러한 끼니로 ‘비만한’ 영혼들을 좋아한다. 한편으론 ‘찌라시’ 수준의 강파른 언어를 혐오하고. 물론 시인들은 그런 ‘끼니’가 될 만한 시들을 쓸 책임과 의무가 있다. 저급한 시들로 식중독이나 걸리게 하면 안된다.   

-당신에게 있어서, 혹은 당신의 글쓰기에 지식이란 어떤 쓸모를 갖는가? 당신은 주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편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돌이켜보면, 시적인 감수성으로 씌어진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도 엿보인다. 현재 당신의 글쓰기는 당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있는가.
=<텍스트>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이 원래 체질에 잘 맞는 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도 주정적인 면이 강하다. 한데, 그러한 면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시적인 감수성’이 ‘너절한 감상’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시는 그냥 언어만이 아니다. 시는 삶이고 삶의 파토스이다. 나는 니진스키의 일기를 시로 읽는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라는 걸 읽으며 나는 울고 싶지만, 대신에 쓴다. 이러한 울음이 감상으로 함부로 절하되는 걸 혐오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가?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의외이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 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너무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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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8-1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 정리해놓은 페이퍼도 있는데, 굳이 네이버에서 퍼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sb 2006-08-14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 (로쟈님의 서재에서 알게 된) 북매거진 <텍스트>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찾았거든요. 정리된 페이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네이버에서 찾아 정리하느라 힘들었는데.
 

(출처: 한겨레)
전진식 기자
 
 
1970년대 노동집약형 수출산업의 한 축이었으며, 1990년대 들어 동대문 의류상가의 번영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았던 대표적인 가내 봉제공장 밀집지역인 창신동과 숭인동이 기로에 서 있다. 디자인에서 원단구입·제조·판매가 원스톱으로 이뤄지고, 기동력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씽씽 미싱을 돌려대던 ‘좋았던 시절’은 점점 세계화의 뒤안으로 밀려나고 있다. 값싼 중국 의류들이 밀려들면서 하나 둘 씩 ‘공장의 불빛’이 꺼져가는 ‘창신동’의 오늘과 내일을 3차례에 나눠 싣는다.

세계화·개발 기로에 서다

경상도 산골에서 스무살에 혼자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서 20여년째 미싱을 밟고 있는 노정섭(45)씨는 6년전부터 ‘객공’으로 일하고 있다. ‘객공’이란 고용 기간을 계약하지 않고 일감이 있으면 일하고 일감이 떨어지면 자동 해고되는 비정규직의 극단적 형태다.

그는 대뜸 입고 있는 바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7천원이야. 한국산이라고 쓰여 있지만 딱 보면 알아. 중국산이지. 싼 물건에 당할 수가 있나. 길거리에서 파는 거 90%가 원단에서 바느질까지 모두 중국산이야. 일요일 오전에 평화시장 가 봤나? 거기 파는 옷들 바지고 웃도리고 3천원짜리가 수두룩해. 그런 가격을 어떻게 한국에서 만들어?”

창신동 사람들 중엔 최근 객공으로 신분이 떨어진 사람이 늘어났다. 주문이 없을 때 월급제 직원을 두면 고스란히 사업자의 빚으로 남기 때문에 정규 직원이 아닌 객공을 채용하게 된 것이다. 객공의 수입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수기인 3~5월, 9~11월엔 하루종일 일해 월 200만~300만원씩 벌지만 비성수기때는 말 그대로 ‘0원’이 된다. 노씨는 “비성수기때에는 성수기에 필요한 옷을 미리 당겨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4~5년 전부터는 그렇지 않다”며 “예전의 성수기가 비성수기가 됐고, 예전의 비성수기엔 아예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일해도 수입은 갈수록 줄어든다. 납품가격이 구제금융기 이후로 동결됐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봉제 하청을 받아 일하는 지아무개(54)씨는 “디자인에 따라 다르지만 티셔츠는 1벌에 500~600원, 블라우스는 2천~2500원, 바지는 1500~2천원을 받고 바느질을 한다”고 말했다. 이는 90년대 말과 같은 단가다. 지씨는 “하루 종일 3사람이 매달려 500원짜리 티셔츠 100장을 만들면 오히려 밑지는 장사”라고 말했다.

<한겨레>가 지난달 3~7일 창신동 봉제공장 노동자 1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한달 임금이 평균 134만원으로 조사됐다. 2006년 2/4분기 도시근로자 가구주 평균소득 225만8천원의 59%에 불과했다. 99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창신동 공장 129곳을 조사한 것과 비교하면, 봉제공장의 평균 매출액은 7년 전보다 40%나 줄어들었다. 99년엔 한달 매출이 2176만1천원이었으나 올해엔 1306만6천원이었다.

수입이 줄어들자 미래에 대한 불안도 심해지고 있다. ‘이곳이 앞으로 쇠퇴할 것으로 보느냐’란 질문에 99년엔 4.7%만이 ‘그렇다’고 답했으나 올해엔 78.6%로 늘었다. 고령화 현상도 뚜렷해 7년 전에는 30대(40.3%)가 가장 많았지만 지금은 40대(42.1%)와 50대(29.3%)가 절반을 넘는다. 인구도 해마다 평균 700여명 씩 줄어 7년 사이 15% 이상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직원 8명을 고용하고 있는 한성화(41) 사장은 “일하는 사람들이 지쳐서 떠난다”고 했다. “여자들은 식당, 남자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가는 거야. 경쟁이 안 되니까. 올해는 이렇게 공장문을 열고 있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

관련된 가게들도 연쇄적으로 배를 곯는다. 원단가게를 하는 임아무개(70)씨는 35년 동안 창신동에 살았다. 본래는 봉제일을 하다가 원단가게를 차렸는데 하루에 1만원 어치도 못 팔고 있다. “앞에 (임대로) 내놓은 식당 건물은 10개월도 더 됐는데 아직도 안 나가고 있어. 이 동네는 봉제가 중심이지. 봉제가 죽으면 지게꾼이고 용달꾼이고 오토바이꾼이고 다 같이 죽는 거지.”

파괴되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평소엔 사슬처럼 엮여있는 듯한 가족도 경제적 시련 앞에선 실밥처럼 뜯겨져 나간다. 22년째 창신동 공장에 다니고 있는 김아무개(53)씨는 8년전 아내가 빚 때문에 집을 나갔다. “아내가 사라지자 매일 밥대신 소주 5병만 마셨다”는 김씨는 그래도 딸 하나를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처럼 악착같이 일하는 그도 다섯달째 월급을 못 받고 저축한 돈을 까먹으며 지내고 있다.

창신·숭인동 일대 83만9966㎡가 3차뉴타운 후보지로 지정된 것도 봉제공장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아파트 중심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그렇잖아도 경쟁력을 잃어 허덕이는 창신동 봉제업은 해체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임자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2003년도 조사를 기준으로 할 때 창신동 일대는 서울의 봉제업체 전체 가운데 9~10%가 몰려 있다”며 “창신동이 세계화와 개발에아무런 전략없이 무방비로 해체돼간다면 우리나라 의류산업을 이끌어온 인력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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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의 어제와 오늘… 동대문시장 끼고 패션메카 성장
조기원 기자  이주현 기자 

 
전문생산자 네트워크로 거듭나야

창신동엔 왜 봉제공장들이 몰려들게 되었을까? 뿌리는 청계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평화·통일·동화시장을 축으로 한 청계천 일대의 의류공장은 우리나라 전체 기성복 물량의 70%를 소화할 만큼 번창했다. 하지만 청계천의 번영은 어린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전태일이 70년에 평화시장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은 한 달에 두 차례만 쉬며 하루 12~13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이런 청계천 공장은 70년대 말부터 창신·신당동 등으로 흩어졌다. 기성복 시장의 주도권을 대기업에 빼앗긴데다 노조활동 때문에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동대문시장에서 가장 가까운 창신·숭인동이 봉제공장의 새로운 메카로 떠올랐다. 79~80년 동대문 일대엔 제일평화시장, 동평화시장, 흥인시장, 광희시장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동대문시장은 남대문의 의류 원단·부자재 시장까지 흡수해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장소가 됐다. 동대문과 가까운 창신동은 원료를 공급받아 바로 다음날 납품하는 이점을 누렸다.

뉴타운 개발되면 설자리 잃어

숭인동에서 20여 년째 재단사로 일하는 최명주(53)씨는 “90년대 초반까지는 설·추석 빼고는 계속 공장을 돌렸다. 한때는 이곳 미싱사 월급이 공무원 월급 갑절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중국 등에서 값싼 제품이 밀려들며 창신동도 침체에 빠져들었다. 창신동 봉제산업을 옥죄는 건 또 있다. 지난해 8월 서울시는 창신동 일대를 3차 뉴타운 후보지로 선정했다. 창신동 주민들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목소리를 거세게 높이고 있어, 이곳은 아직 지구 지정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뉴타운을 둘러싼 찬반 논란에서 봉제공장에 대한 논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봉제업자들은 대부분 세들어 있다. 기존 뉴타운 사업처럼 이곳도 주거형으로 개발되면 창신동 밖으로 나가야 한다. 창신동의 공장들이 없어지는 것은 단지 노후한 주거지가 깔끔한 아파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영세했을 지라도 하나의 산업 클러스터가 사라지는 것이고 도시 고용이 위축되는 것이며 도시 서민이 빈민으로 추락하는 것을 뜻한다.

“패션 생산기지 계획 관리를”

강우원 세종대사이버대학교 부동산경영대학장은 “창신동은 동대문의류상가 등 도시의 패션을 뒷받침하는 생산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며 “도심지역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점이지역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점이지역이 노후화됐다고 해서 기존 기능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점이지역의 기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계획적 관리를 해야 도심이 활성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우관 한성대 교수(경영학)는 “창신동은 재고를 최소화하는, 그때 그때 빨리 값싸게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커왔으나 이는 결국 값싼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며 “소규모 생산자들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기획능력을 갖춰야 봉제공장들이 창신동을 떠나더라도 생존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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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14평 공장…패션시장의 새벽을 밝힌다
조기원 기자  

최명주-홍금례씨 부부의 24시

창신·숭인동의 하루는 ‘드르륵’ 거리는 재봉틀 소리와 함께 돌아간다. 좁은 골목을 따라 벌집처럼 붙어있는 다세대주택마다 하루만에 옷을 ‘뚝딱’ 만들어내는 가내 공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평범한 주택가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공장들이다. 숭인동에 있는 최명주(53)씨 공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AM 9:00~

최씨 공장이 문을 연다. 미싱사는 부인 홍금례(49)씨 혼자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6살 때부터 재봉틀을 밟았다. 33년째다. 홍씨는 “한 벌 당 공임이 4천원(봉제 2천원+재단 2천원)인데, 먹고 살려면 우리 공장에서 하루 40벌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 공장들은 청바지·숙녀복·아동복 등 저마다 전문 품목이 있다. 최씨네는 중년 여성 윗도리가 전문이다. 여름엔 남방, 겨울엔 점퍼를 만든다.

안감 달기→주머니 박기→어깨선 박기→소맷단 달기→옆솔기 박기→깃 달기로 이어지는 모든 공정을 홍씨와 미싱보조 최성순(49)씨가 익숙하게 해낸다. 디자인과 재단은 남편 최씨의 몫이다. 재단사는 대부분 남자들이다. 최씨도 1980년대 초 학원에서 재단을 배웠다. 카탈로그와 옆 매장 옷들을 두루 참고해 디자인과 재단을 한다.

그러나 유행이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캐주얼은 전문 디자이너가 있어야 한다. 이들 ‘디자이너’는 하루에 옷을 몇 벌 만들지 공장 사장과 협의해 결정한다. 캐주얼은 유명 연예인이 한번 입고 나온 옷을 그 다음날 바로 지어낼 수 있을 만큼 기동성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유행을 탄 옷은 늦어도 이틀이면 동대문 전체에 쫙 퍼진다. 중년 여성복 옷 도매 수익이 15% 수준이면, 캐주얼은 40%가 넘는다. 그러나 재고가 많고, 올해 인기있는 디자인은 다음해엔 통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높다.

PM 8:00~

해가 저물면 옷은 온전한 모양새를 드러낸다. 남은 것은 단추 달기와 다림질 뿐. 이런 마무리 작업은 보통 ‘시아게집’이라 불리는 끝손질집에 맡긴다. 하지만 최씨는 직접 한다. 한 벌당 1500원씩인 공임도 아깝지만, 저녁 때 한꺼번에 물량이 몰리는 시아게집의 품질도 만족스럽지 못한 탓이다. 최씨는 ‘시루시’(단춧구멍을 내는 작업)를 하고 단추를 다는가 싶더니, 금방 끝내고 한쪽 구석의 다림질 방으로 옷들을 싸들고 간다.

끝손질 집에선 한 벌 당 1분이면 끝나지만, 꼼꼼하게 하느라 시간이 세 곱은 걸린다고 했다. 도매시장이 문을 여는 밤 10시께까지 매장으로 물건을 나르려면 밥 먹을 시간도 없다. 물건을 갖다 준 뒤에야 동네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들며 소주 한 잔을 걸친다.

AM 4:00~

평화시장 가는 길목은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들이 타고온 차다. 길이 꽉 막혀 있는 일도 많아 이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최씨의 매장은 도매상들이 밀집해 있는 구평화시장 4층. 건너편에는 두타, 밀리오레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소매업소들이 모여 있다. 최씨 매장은 딸 이름을 딴 ‘은아패션’.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중간도매상과 소매상들과 주로 거래한다. 낮 동안 미싱사였던 부인 홍씨는 이번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가게를 지킨다.

새벽에는 원단 영업사원들이 도매상을 한바퀴 도는데, 때때로 날이 훤해지도록 이들을 기다린다. 원단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는 수고를 마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기 전에 관광버스들은 동대문을 떠난다. 곱절로 길었던 창신동도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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