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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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 갈등의 실마리를 찾아

책을 지은 이태하 교수는 철학을 하시는 분입니다. 서경대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다는군요.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이라는 제목에 섞인 '반성'이라는 단어가 암시하지만, 이 교수 께서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갈등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해요.

제작년이었나요, 오랜 기독교 신자이셨던 아버지께서 돌연 교파를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는 크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등 여러 교파가 있고, 또 그 교파 내에서도 다양한 교단으로 쪼개져 있죠. 거대 교파인 장로교에서 생소한 대한예수교침례회로 적을 옮기신 것입니다.

집안에 갈등이 굉장히 많았고, 그 갈등을 풀어가는 중에 저는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수련회까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 평행선

고등학교 이후로, 그러니까 소위 머리가 큰 이후로, 저와 '신앙'은 줄곧 평행선을 이뤄왔습니다. 응당 아버지를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죠.
수련회는 그 평행선의 접점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교파를 옮긴 이후에 신앙'생활'이 달라진 아버지가 제게 실마리를 제시한 덕도 있었구요.
이 교수 역시도 평행선에 주목합니다.

각각의 평행선을 '종교'와 '과학'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런지요.
실제, 개신교인들이 제공하는 불신감이란, 대략 그(녀)들의 '배타성'에 기인하다고들 해요.

하지만, '개신교인들의 배타성이 문제다' 라고 쉬이 결론 내리기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 배타하는 주체와 배타당하는 객체 사이의 불균등한 세력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요.
개신교인들은 분명 한국사회에서도 엄청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배타하는 주체인 셈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배타당하는 객체일겁니다.

세력관계를 차치하고 본다면, 배타당하는 객체 역시도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배타성이란, 토론이나 설득의 과정 없이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행동이 빚는 폭력성을 뜻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 점에서 이 교수의 이 책,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겁니다.

# '상보성'을 아시나요?

이 교수의 전공인 '종교철학'은, 메타학문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종교철학의 연구대상인 학문이란, 다름 아닌 신학이구요.

따라서,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즈음은 적지 않이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계속 평행선의 비유를 들자면, 종교철학은 평행선의 접점을 찾기 보다는, 평행선의 거리를 좁힐 따름입니다. 종교철학자는, 종교의 전제조건이 되는 세계관, 즉 신학의 일관성 내지는 정합성만을 검토할 테니까요.

그는 과학과 종교의 '상보성'을 얘기합니다.
만약, 과학과 종교라는 평행선을 만나게 하려고 했다면 '상호보완성'이라고 하겠지만, 만나지 않는 평행선이니 '상보성'이 옳은 표현일겁니다.

상보성은 접점 보다는, 두 평행선이 향하는 방향에 더욱 주목합니다.
각각의 평행선은 각각의 역할을 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같은 방향이란, 다름 아닌 '삶의 문제의식' 이구요.

교수는 자살사건을 예로 들었으나, 전 연애담을 예로 들께요.

갑동이와 병순이가 서로 헤어졌다면,
'삶의 문제의식'은, 두 사람의 슬픈 마음이요,
'과학의 역할'은, 두 사람의 행적을 좇는 것이고,
'종교의 역할'은, 행적의 바탕이 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병순이와의 헤어짐이 너무 슬프다며 찾아온 갑동이에게,
절친한 친구인 을동이는, 그간 있었던 '사실'을 들음과 동시에, '사실'에 내재된 두 사람의 속내를 곰곰히 생각해 볼테니까요.
삶의 문제의식을 해결하는데에는, 사실 만으로는 몹시 부족하다는겁니다.

# 주연은 내어줄지언정

오늘날의 철학은 과학에게 꽤나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철학계의 동향은 전연 모르니, 철학자 탁석산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현실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는 사례는 생명 공학과 관련한 윤리 문제가 거의 다가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을런지요.

그의 논평처럼, 철학은 과학에 주연을 내어줄지언정, 연극판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십자가들이 이를 보여준다면 섣부른 판단일런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평행선의 접점을 만들고 심지어 하나로 만드려 하는 억지 노력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접점에 서있는 두 평행선의 이름은 '철학적인 과학'과 '과학적인 철학'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상보적 노력의 밖에는

이쯤되면, 수련회를 다녀온 후의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가 조금 풀리는 듯 합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비판 자체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 물론, 이곳 역시도 '오대양사건'으로 대표되는 많은 말썽(?)을 일으켰고, 많은 의혹이 있지만 - 그것은 기존 개신교 우파 내지는 다수파를 이루는 교파들의 옳지 못한 행적들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는데, 재정 마련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금전거출이라든지, 세력 확장을 위한 무리한 사업 집행들을 도마에 올립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통쾌한 비판의 이면에는, 바로 '과학적인 철학' 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창조과학회(http://www.kacr.or.kr)라는 학회의 부흥을 기반으로, 성경의 기적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이는 과학과 철학의 상보성에 어긋나는 셈이에요.

창조과학회의 과학적 논거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그(녀)들의 이런 노력이란, 과학의 힘을 빌어 철학을 설득하려는 '과학적인 철학'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학적인 철학이든 그냥 철학이든,
그(녀)들의 이런 노력이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해서 자꾸 현실 도피적으로 흐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마르크스의 명제는 이곳에 자리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녀)들은 아슬아슬한 자동차 경주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어요.
자신의 실력으로 관객에게 속도감을 선사하지 못하고, 경쟁 선수를 위압하려 지나치게 옆에 붙었다가 불의의 사고로 치닫는 안타까운 장면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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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3
정승우 지음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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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많이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소설들은 종종 영화화 되죠.

이렇게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경우,
감상평의 한축은 늘상, 소설의 독자가 그려낸 이미지와 감독이 만들어 낸 영상과의 차이입니다.

이를테면, 보리스 파스테르냐크의 <닥터 지바고>를 데이빗 린 감독이 65년에 영화화 했는데,
주인공 지바고 역에 오마 샤리프가 어울리느냐 안어울리느냐가 화두로 떠오른다는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설을 읽지 못하고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은, 이런 논쟁에 끼어들기가 영 마땅치 않습니다.
논쟁은 둘째 치고서라도, 차후에 소설을 읽을 때에도 위의 독자들 만큼의 어색함을 느끼기란 좀처럼 쉽지 않죠.
물론, 원작을 심하게 변형시킨 경우는 제외한다면 말이죠.

# 원작

이렇듯, 영화의 영상이 관객에게 주입하는 이미지는 꽤나 강렬한 것입니다.
아니, 강렬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소설이라는 '원작'에까지 영향을 미치죠.

그런 점에서 '신화적 예수'는 영화의 영상과 같습니다. 전세계를 강타한 흥행영화인 셈이죠.
이 영화는,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 역시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예수의 삶'이라는 원작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요,
이 영화의 두터운 팬(Fan)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원작을 시시해하거나 심지어 별 관심을 보이지 않기 일쑤입니다.

즉 예수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음을 굳건히 믿는 기독교인들, 그 중 몇몇은,
부활 이전의 예수의 삶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심지어 무관심하다는거죠.

# 예수 대 예수

'신화적 예수'가 전세계를 강타한 흥행영화라면,
'역사적 예수'는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봉영화입니다.
두 영화는 '예수'라는 동일인물의 삶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극본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이죠.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서로 다른 두편의 영화는,
" 과연 어느 영화가 더 원작에 충실했는가? " 라는, 원작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일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승부를 가리기 힘든 논쟁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차피 원작이 영화라는 영상으로 변화되는 순간, 감독의 주관적인 이미지가 투영되기 마련일테니까요.

1940년대 살만(Warner Sallman)이 <그리스도의 머리(Head of Christ)>라는 작품에서 그려낸 아름다운 금발, 오뚝한 코, 부드러운 수염을 가진 예수와,
2001년에 영국의 BBC 방송이 기획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법의학자이 그려낸 갈색피부와 뭉툭한 코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예수.

어느 편이 객관적 진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깨다

어차피, 객관적 승부를 가릴 수 없는 것이 영화의 세계라면,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신흥개봉영화의 흥행조건은, 아니 흥행여부가 영화의 전부가 아니니 만큼, '주목여부'는 그 자체로 작품성이 뛰어나거나, 혹은 아주 깨거나 일겁니다.

한달에 한번 영화관을 기웃거리는 주제에 작품성 운운하기는 뭣하지만,
이 영화 아주 깬다는 것 만은 틀림없습니다.

'중세 서구교회' 라는 감독이 주연한 전편에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 예수는,
후편에서 유대교를 개혁하려 했던 개혁가로, 도덕 교사로, 여성해방을 주창한 운동가로, 율법을 가르친 랍비로, 심지어 혁명가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니 깬다 할 수 없을겁니다.

물론,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깬다'는 것은 깨어져야 할 고착화 된 이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봉영화의 진정한 공적은, 이제껏 그 이미지만으로 원작을 압도했던 '신화적 예수'에 대해,
원작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는데에 있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관객들은 원작인 '예수의 생애'에 대해 돌아보게 될겁니다.

# 역사적 예수 연구

사실, 영화가 아닌, 역사적 예수 '연구'는,
저 멀리 근대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 서구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서를 교회의 경전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비판적 학문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라는 도그마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성을 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책이라는 전망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튀빙엔 대학 같은 독일 대학을 중심으로 성서를 역사적 비평적 전망으로 독해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진행되었다.
19세기를 통해 역사비평적 연구의 성과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이 신의 영감을 받은 특정 저자가 한순간 기록한 신앙적 계시에 의한 책이 아니라 복잡한 구전 단계를 거친 수집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

대략 200여년이 되어가는 긴 시간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도 발전과 정체를 반복하는데요,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수많은 학자와 업적에 대해서는 속편하게 기억하지 않기로 하고, 그 흐름만을 대체로 살펴보면 시기적으로 나눌 수 있는 변화들이 있어요.
제 편의대로 그들을 각각, '1세대', '2세대', '3세대' 라고 부를께요.

1세대(라이마루스, 바이스, 슈바이처)는 말 그대로 깨는 사람들이었어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는 유대교의 개혁가, 새 종교의 창시자, 종말론적 예언가, 혹은 도덕교사로 지칭됩니다.
2세대(불트만)는 이런 경향에 제동을 건 사람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기존 서구 교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은 아닌데, 이들은 1세대 연구가들의 약점을 꼬집어내며 역사적 예수 연구에 회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기존의 신화적 예수가 중세 서구 교회의 입맛에 맞았다면, 도덕교사로 모아지는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입맛에 맞을 뿐이라는거죠. 객관적 연구는 불가능하다라는 회의감을 일으킵니다.
3세대(호슬리, 예수 세미나 그룹, 베르메스)는 로마식 도시 세포리스의 발굴,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발전, 쿰란 문서와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과 같이, 실증적인 연구자료들이 많이 확충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본격화 한 사람들이에요. 사회학적인 방법도 많이 도입되어 연구도 훨씬 체계화되었구요.

# 여전한, 아니 더 확실해진 거리감

흥미로운 점은,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화적 예수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를 탈신화화 하는 것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성의 특정 조건을 만족시킨 영화들을 두고 객관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 처럼,
역사적 예수와 신화적 예수 역시도 대립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더구나,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을 전후로, 연구배경 역시도 달리 하고 있구요.
역사적 예수 연구는 부활 이후의 예수에 대해서는 나름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 합니다.

연구가 신화적 예수와의 거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데에는,
2세대 연구자들이 밝힌 '객관적 예수'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글쎄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여기에서 멈추어 서는걸까요?

안개는 조금씩 걷히고 있지만, 아직도 강을 건너기엔 힘이 들어보여요.
실로 방대한 연구업적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움에 책을 덮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김규항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책 <예수이야기>를 낸다는데,
그가 과연 강 어디즈음에서 노질을 시작할런지 조심스레 기대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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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나라 인간 나라 2 - 세계 정신 문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 신화의 세계편 신의 나라 인간 나라 2
이원복 글 그림 / 두산동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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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정말 회원분들 이름이 가물가물하네요.
요즘엔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문득 '아 이 책에 대한 후기를 누가 올렸더라?' 할 때가 있습니다.


몇일 전에 신화와 관련된 만화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 주옥같은 후기들. 정말 아쉽습니다.


이원복 교수 다들 아시죠? <먼나라 이웃나라>로 알려진.
<먼나라 이웃나라> 외에도 다양한 경제분야 관련한 저작도 써내셨었는데,
작년께인가 해서 종교, 신화,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이 나왔죠. '신의 나라 인간의 나라' 시리즈.


2.
여러분은 신화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계신가요.
제 경우엔 신화가 꽤 따분하게 느껴졌었거든요.
(북클럽에 독서후기가 올라왔을 때 더 진지하게 읽어둘걸 그랬나봐요.)


지금은 굉장히 다른 느낌이랍니다.
철학 이전에 종교가 있었다는건 알았는데,
종교 이전에 신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답니다.


철학은 Philosophy.
Philo(지혜) + Sophy(사랑). 인간의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인간과 가까운 신화 속의 신이든, 종교 속의 절대신이든, 신의 행동과 말이 아닌 인간의 지혜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바로 철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3.
좀 더 따져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신화와 종교의 차이?
신화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철학으로의 변화들을 보면, 변화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기서의 변화란 신화가 종교로 대체되고, 종교가 철학으로 대체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설명방식에 새로운 설명양식이 보태어지는 과정입니다.)


신화와 종교를 비교하는데에는,
① 경전의 유무 ② 번안의 가능성 ③ 윤리나 도덕과의 연관성 ④ 민족, 집단과의 연관성
등등으로 기준을 둘 수 있다고 합니다만,


꼭 이렇게까지 체계화하지 않더라도,
그 왜 삘(Feel)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뭔가 엄숙함의 깊이가 다르죠.
엄숙함이라는 것은, 권위와 연관이 있구요.


종교와 신화는,
모두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되,
종교는 권위있는 이해. 비약하자면, 강요된 이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종교에는 번안의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의 이해, 하나의 통치질서가 필요해진 것이리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이렇게 따져보는거죠.
역사적으로 하나의 통치질서가 필요해진 때라면? 왜?


4.
그런데, 사실 이렇게 호들갑이면서도,
신화 자체가 그리 흥미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 건너뛰며 몇시간만에 주욱 읽어나갔죠.


신화도 방법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대에 신화가 있었다면, 지금은 철학이 있고 과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행동이나 감정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이 숨쉬고 있는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신화의 스토리가 아니라, 신화의 정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화의 정신. 스스로의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적극성이겠죠.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스스로의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적극성.
생각 생각.
그런데, 생각하는 것에 참 게을러지는 우리입니다.


주제넘는 소리지만, 스스로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주어진 환경, 주어지는 일들에 허덕이고 있지는 않은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대학 진학을 위해서, 대학 다닐 때는 취업을 위해서, 직장 다닐 때는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해서, 결혼 후에는 자식을 위해서. 수많은 '위해서'들.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들에 적응하기에 너무 바쁜건 아닐런지요.


잠시 뒤쳐질지라도 한번 멈춰서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주어진 조건들에 적응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들 자체를 이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좀 뜬금없었네요. ^^;


[보탬]


저도 아직 종교편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종교가 신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느니만큼, 신화편에서도 종종 소개가 되었습니다.


오 이것도 굉장히 흥미있더라구요.
특히,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조로아스터교.


어린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관련 서적 있으면 소개 좀 부탁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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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님
 
전에 한참 토론 비스무레한 것이 벌어진 적이 있었죠.
그때 어떤 회원분께서 북클럽은 독서 동아리이니까, 순수 독서후기에 좀 더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었구요.


그때 전 이런 생각을 했었더랬죠.
순수한 독서후기와 안순수한 독서후기를 나누는 기준이 있기는 한걸까 라구요.


책에 있는 내용만을 다룬다고 해서 순수한 독서후기이고,
현실을 다룬다고 해서 안순수한건 아닐테지요.
어차피 책에 쓰여진 글이든, 사람의 말이든, 행동이든, 알게모르게 현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책을 읽을 때 필요하다는 `배경지식` 은 그래서 쓸모가 있는 것이구요.


예를 들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기 위해서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사회적 변화들을 알아야 쉽게 혹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처럼.
(얼마 전에 썼던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대한 후기에서도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대적으로 축소왜곡되어 출판된 점을 말씀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책을 읽고 쓰되, 책에 없는 내용을 쓰는 독서후기가 더 잘 쓰여진 독서후기라고 생각합니다.
책에 없는 내용을 쓴다는 것은, 책에서 배우고 느낀 내용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다는 뜻이죠.


에구 서론이 길어졌는데요,
저 역시 이원복 교수님의 경제관련 저작 (서울대 송병락 교수님하고 같이 썼었죠)들을 보면서 진홍님과 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마찬가지 맥락에서,
사람의 생각의 표현인 말이나 글(책)이 얼마나 순수성(중립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꽤 부정적입니다.
더군다나, 현실에서 힘과 우위를 다투는 주제를 비교 내지 분석하는 성격이 글이라면 더더욱이요.


우위가 존재하는 현실을 중립성을 견지한 투명테이프를 덧붙인다는 것은 곧,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우위가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보면,
`작가의 시각`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현실의 우위` 가 되는 셈입니다.
이 교수님의 만화 역시도 현실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셈이 되겠구요.


그래서,
이 교수님의 만화를 보는 진홍님께서는,
만화의 순수함과 안순수함이라는 잣대 보다는, 만화가 반영하는 현실의 우위 자체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시는게 더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종교편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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