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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의 쿠바 - 체 게바라와 함께 한 혁명의 현장
그레고리 토지안 지음, 홍민표 옮김, 오스왈도 살라스.로베르토 살라스 사진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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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기자이자 사진작가인 그레고리 토지안 이지만, 책의 절반은 오스왈도 살라스, 로베르토 살라스 부자(父子)의 사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아버지 오스왈도와 아들 로베르토는 1959년 쿠바의 민주화(저는 이 글에서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하고자 합니다.) 이후 쿠바로 돌아와, 새 정부의 신문이었던 <레볼루씨온> (Revolucion, 혁명) 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해왔습니다. 이들의 사진이 곧 쿠바의 사진이라고 할만큼, 이들은 새 정부 이후의 모든 변화들을 사진으로 담아내었습니다.

- 쿠바 보다는 카스트로에 좀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정치혁명 이후의 쿠바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만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혁명을 전후로 한 카스트로, 그리고 체 게바라의 활동에 맞추어져 있지요. 그나마, 사진은 글을 풍부하게 하지만, 글을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 하지만, 이를 두고 불평하는 것은, 직접 책을 고른 독자로서의 도리가 못됩니다. 카스트로는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오랜 군부독재로 고통받았던 쿠바를 민주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고, 망명자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던 '726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살라스 부자 역시 726운동을 통해 카스트로와 민주화 운동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이들은 운동가이기 이전에 자신들의 조국을 사랑했던 사진작가였을 뿐입니다.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쿠바에도 있다. 나는 눈먼 박쥐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도시의 거리를 걷더라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뉴욕? 5번가에서 쇼핑을 하는 여자는 뉴욕이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럼가에 사는 사람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옳다."

- 물론, 아들인 로베르토 살라스가 아직까지 사진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그의 사진에서 쿠바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떨어진다는 아쉬움마저 지울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쿠바 정부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레볼루씨온>이 이전만큼 넉넉한 필름과 지면을 그에게 허락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 <레볼루씨온>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레볼루씨온>은 새 정부의 기관지로서, (책에 등장하는) 살라스 부자의 사진을 통해 쿠바의 기층 민중들에게 새 정부의 활동을 홍보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신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것과는 달리 사진 일색의 신문이었죠. 그것은 오랜 독재 아래에서의 쿠바 민중들의 교육율이 무척 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민중들에게, 사진으로 닿고자 했던 새 정부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 우리가 알고있다시피, 쿠바는 새 정부 이래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지정책의 한편으로 생필품의 부족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쿠바의 새 정부는 1959년의 정치혁명 이후에 곧바로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미국의 농업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면서 경제제재와 금수조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무역으로부터의 단절이란, 사탕수수 무역을 통해 경제를 일으키고 싶었던 쿠바인들에게 꽤나 절망스러운 것이었죠.

- 그것은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인한 원조의 중단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고 오늘의 쿠바에 이르렀습니다. 살라스 부자의 사진에는, 1961년 일주일에 한번 자발적인 노동일을 지정하고 앞서 실천했던 체 게바라와, 1965년 국민 누구나 사탕수수 제배에 동참시키고자 했던 카스트로가 있습니다. 이제 쿠바의 새로운 사진작가들이 바통을 넘겨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1959년의 카스트로는 여전히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카스트로의 쿠바를 넘어 쿠바인의 쿠바를 조명해주길 기대합니다.

※ 스페인어를 번역하는데 있어 몇가지 문제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발음 그대로 한국어로 쓰되, (괄호 등을 덧붙여) 원래의 표기와 뜻을 동시에 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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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 갈무리신서 2
크리스 하먼 지음, 김형주 옮김 / 갈무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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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의 동독, 1956년의 헝가리와 폴란드, 1968년의 체코, 1980년의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노동자 투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68년의 체코는 '프라하의 봄'으로, 1980년의 폴란드는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 레흐 바웬사의 연대노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소위 사회주의 국가의 폐해 내지 침략상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크리스 하먼의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은 좀 더 폭넓은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위 사건들을 관통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동유럽의 이러한 격변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1985년의 뻬레스트로이카, 1991년의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 못지 않았던 격변들이, 다시금 '노동자의 국가'라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의 성격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 저자인 크리스 하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합니다. 이는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인데요, 크리스 하먼이 이를 동유럽 사회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것입니다.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이 1945~1983년 사이의 동유럽 사회를 분석한 글이라면,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은 1985년 소련의 뻬레스트로이카를 비롯해 1980년대 말의 동유럽 사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 국가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국가관료들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본주의를 뜻합니다.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기본으로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발전 초기단계나 전시(戰時)경제에서, 국가가 사적자본 대신 생산수단에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자본주의입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시적 혹은 전략적으로 나타났던 반면,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서는 50년 이상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 다릅니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혁명가들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당의 레닌 조차도, "이 혁명은 (그 당시 가장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고립되어 패배하고 말 것이다."라고 했죠. 하지만, 독일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19년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한 독일공산당의 소수가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독일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군인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 이제 혁명 러시아는 고립되었습니다. 많은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지만,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기존 기득권층과의 혹독한 내전을 치뤄야 했습니다. 혁명을 세계로 확장시키기는 커녕, 러시아에서의 혁명정부를 지키기에도 버거웠던 것이죠. 그리고, 내전의 와중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 100여년 전 러시아는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습니다. 아직도 인구 대부분은 농민들이었죠. 인구의 10%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산업화된 도시를 차지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당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며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뤘던 많지 않던 노동자들은 더욱 소수가 되었고, 1924년에는 급기야 레닌마저 사망하면서 볼셰비키당의 성격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 일국사회주의론, 즉 일국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는 가능하다는 주장이 등장하는 것이 이 즈음입니다. 이는 1924년 스딸린의 저작 <레닌주의의 기초>에 처음 소개되는데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와 레닌이 부인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국가 수립 가능성이 하루 아침에 뒤집어졌는데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던 러시아가,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경제 발전의 관건은 축적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과 봉건사회와 달리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공장과 같은 대규모적인 설비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런 설비를 마련하기 위한 폭력적인 축적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이런 축적은, 식민지 무역이나 엔클로우저와 같은 일방적인 자원과 토지의 강탈, 노예 매매, 아동 노동과 같은 극심한 노동착취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생산자들의 이해와는 괴리된, 경쟁적 축적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고 생산자들을 위한 경제체제를 만들자며 자본주의를 타도한 혁명 러시아가, 경쟁적 축적을 해야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경쟁적 축적이 존재하는 사회, 그것은 더 이상 사회주의가 아니었습니다.

- 스딸린은 “우리는 선진국들에 비해 50년에서 100년 정도 뒤져 있다. 그 간격을 우리는 10년 안에 없애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국사회주의의 선포와 함께, 주변국과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죠. 당시 스딸린의 고민은, 세계 자본주의에 합류하고자 했던 개발도상국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구요. 이 저개발 국가들은, 기존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사적 자본도 형성되어 있지 않고, 설사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대규모적인 축적을 위해서는 사적 자본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이 국가 경제계획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국가 주도의 경제계획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던 러시아가 신속했습니다. 그래서, 이 국가들은 적어도 초기에,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합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동유럽 국가들로 넘어가야겠군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 식민지 분할에 있어서, 소련은 서구 열강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했는데, 동유럽 국가 체제의 성격은 소련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습니다. 서유럽 국가 체제의 성격이 미국과 영국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듯이 말이죠.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각국 공산당들은, 연립정부의 형태로 집권하게 됩니다. 이 국가들에서도 전쟁 이후의 산업 발전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안정된 직후인 1947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를 시작으로 광범위한 국유화가 진행됩니다.

- 국가 주도의 산업 발전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산업은 1960년대에 이르자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자국 내에서의 축적은 무리 없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상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외와의 교역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여기에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까지 더해져, 필연적으로 국내 산업이 재편되었습니다. 중공업 분야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소비재 공급은 더욱 줄어들었고, 소비재 산업에 대한 투자 역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왔고, 불만을 촉발시켰습니다. 또 다른 방편으로 차관을 들여온 국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관을 통한 산업 발전 효과가 미미하자, 이것이 상환할 수 없을 정도의 채무로 바뀌면서 도리어 국가 경제를 발목잡기도 했습니다.

- 경제 위기와 함께 해결책은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 대신, 기업 스스로 계획하고,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두되었고, 이것은 곧 국가기구를 분열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체제의 변화가 단순히 그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 계획경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력구도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주창하는 세력이, 기존 권력구도에서 어느정도 비켜서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동유럽의 격변이란, 경제 위기에서 시작하지만, 이러한 국가관료들의 권력싸움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소련에서는 스딸린과 흐루시쵸프가, 헝가리에서는 라코시와 임레 나지가, 체코에서는 노보트니와 두브체크가, 폴란드에서는 고무우카가 그러합니다.

- 경제 위기와 암암리에 이루어진 국가관료들의 권력싸움은, 1953년 스딸린의 사망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스딸린 통치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소위 개혁파들에게 무게를 실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소련과 스딸린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통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각국의 국가관료들이 밀려나게 됩니다.

- 극심한 축적으로 인한 소비재의 부족과 경제위기로 고통받았던 대중들은, 기존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옛 집권세력들에게 분노했고, 임금 인상을 비롯한 소비재의 공급과 정권 교체(정치적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개혁파 국가관료들은 대중들의 '정권 교체' 요구에 실려, 자신의 집권을 추구합니다. 폴란드의 고무우카가, 헝가리의 임레 나지와 같은 개혁파 국가관료들이 이런 방식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 물론, 옛 집권세력들과 개혁파 국가관료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습니다. 개혁파 국가관료들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중앙계획경제를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고자 했지만, 국가관료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이 옛 집권세력들을 끌어내리자 마자 새로이 집권한 후, 약간의 양보조치(임금 인상, 언론의 자유)를 취하고는 입을 씻었던 것입니다. 소련 역시도 동유럽 각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때 마다, 어김없이 탱크와 군대를 투입했구요.

- 물론, 대중들이 한결같이 개혁파 국가관료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개혁파 국가관료들의 해결책(시장의 도입)이란, 경쟁적 축적의 필요라는 측면에서는 중앙계획경제와 한치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혁파들은 축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 축적 자체를 해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국가자본주의 정권에 대항한 동유럽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동유럽 국가들의 성격을 밝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느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투쟁 일반의 경험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체제 위기 아래에서 일어나는, 상층 국가기구의 분열과 대중기구의 수립이라는 하나의 정형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며, 거의 모든 노동계급을 포괄하는 강력한 대중기구라 하더라도 명확한 정치적 강령을 가진 정당과 결속되지 못한다면, 결코 정치적 대안으로 떠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60년대의 동유럽의 격변은,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소련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로 대변되는 개혁파들은 뻬레스트로이카라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 옛 집권세력을 겨냥한 글라스노스트를 실시했고, 이미 느슨해져있던 동유럽 국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극도로 약화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에는 또 한차례 격변이 일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고, 체코에서는 시민포럼과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대대적인 민영화와 외자 유치가 추진되었습니다.

- 하지만, 변화는 '변한 것은 없다'라는 역설적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국가관료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기업을 불하한 후, 기업가로 명함을 바꿔 스스로 불하받고 있습니다. 북치고 장구치는 이들의 행태 속에서 '동구권의 몰락'은 호들갑이 유난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국가관료가 독점하든, 자본가가 독점하든,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경제 체제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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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삶과 전설 1
부사령관 마르코스 지음, 주제 사라마구 서문, 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윤길순 옮김 / 해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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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티스타 운동. 이들이 계승하고자 하는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911년 멕시코 혁명의 주역으로서, 원주민 자치권과 토지 개혁을 요구해 1917년에 헌법으로 제정시켰습니다. 100여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 벌어지고 있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곧, 헌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음을, 원주민의 자치와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 멕시코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영국을 시작으로, 봉건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모든 곳에서 토지 개혁의 요구는 있었습니다. 지주-소작농 관계에서 자신이 직접 생산한 생산물의 대다수를 빼앗겨왔던 이들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주기를 바랬던 것이죠.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졌고, 소작농과 소농들은 자신이 일구어온 토지를 분배받기는 커녕 빼앗긴 채, 생존을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1960년대 자본주의 한국이 그러했고, 오늘날 자본주의 중국이 그러하듯 말이죠. 땔감으로 쓸 나무 한 그루만 내 손으로 베어도, 가혹한 법적인 처벌을 받는 곳. 그곳이 바로 사파티스타 운동의 진원지인,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주입니다.

- 멕시코에서는 그 진통이 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도록 땅을 갈아 생계를 유지해왔던 원주민들은 1911년 멕시코 혁명 이래로 줄곧 토지 개혁을 요구해왔으나, 1992년 토지 개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토지 사유화가 결정됩니다. 종료된 토지 개혁과 강행되는 사유화 앞에서, 원주민 공동체들은 1993년 원주민혁명비밀위원회를 구성하고, 10년 가까이 무력 항쟁을 주장해 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인정하게 됩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NAFTA 가 시행되던 1994년 1월 1일, 그렇게 사파티스타 운동은 시작됩니다.

- 기실 사파티스타 운동이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100여년 넘게 지속되어 온 '원주민의 자치, 토지 개혁'이라는 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주목받았던 것 뿐입니다. 이들은 과거와 달리 인터넷을 이용해 전 세계로 자신들의 요구를 알렸고, 정치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1994년 8월에는 6,000여명이 참석한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개최했고, 1996년 4월에는 전 세계에서 참가하는 대륙간 엔쿠엔트로(encuentro)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70년간 집권해오며 행정 입법 사법을 독점하고 토지 개혁을 끝내버린 제도혁명당(PRI) 대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와 원주민 공동체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통해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자는 계획까지 제안했습니다.

- 하지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은 이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94년 2월 시작되었던 평화회담은 무위로 끝났고, 1년 후에 재개된 회담을 통해 '산 안드레스(san andres) 협정을 통해 일정한 합의에 이르렀지만, 법률로 제정되지 못하고 결국 협정이 폐기되기에 이릅니다. 2001년 무장을 해제한 사파티스타 원주민들과 20여만명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이행을 촉구했지만, 협정에서 협의된 내용은 몹시 후퇴한 채로 입안되었습니다.

- 사파티스타 운동에 국한되지 않은, 토지 개혁 운동의 근본에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있습니다. 봉건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규모 자본(토지)의 축적과 이를 바탕으로 한 규모의 경제가 그것입니다. 새로운 생산관계의 문제는 '규모의 경제'라는 월등한 생산력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어내기 위한 '생산관계'에 있습니다. 대규모 자본(토지)의 축적이죠. 자본과 토지를 축적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산관계는 합의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었습니다. 토지의 실질적인 생산자였고 소유자여야 할 이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소유권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 단지, 결정의 비민주성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제된 자본주의화의 혜택 역시도 올바르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방적인 약탈행위는, 오로지 축적된 자본(토지)을 독점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더 많은 자본과 토지,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계화를 하는 것이지, 그들이 내세우는 것 처럼 세계적인 경제 분업과 효율적인 생산이라는 경제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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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크리스하먼 지음 / 갈무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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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하먼과 마이클 헤인스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크리스 하먼은 1989년 경에 동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옛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의에 대하여, 마이클 헤인스는 자본주의 동유럽의 향후 전망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저자 모두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며, 이들은 스딸린의 소련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유럽 국가들의 성격에 대해서 독자적인 입장(국가자본주의)을 고수해왔습니다.

- 1989년 동구권의 변화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두고, 많은 매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해석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에 동의했습니다. 이제 10년 정도가 지나서,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경제정책들 - 규제의 완화, 공기업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 - 의 폐해가 고발되고, ’자본주의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라는 얘기도 들리지만,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패배한 사회주의와 승리하지 못한 자본주의. 무엇이 승리하든, 우리가 먹고 살만한 어떤 경제체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편역자 이원영씨는 두 사회주의자들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역자 서문으로 뻬레스트로이카가 선언된 1985년과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1991년의 한국 학계와 운동세력들의 논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와 이론의 흥망을 논하는 거대 담론 속에, 막상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 성격에 대한 연구는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말하기 이전에, 소련과 동유럽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분석을 해보자’는 것이 편역자의 의도입니다.

- “동구권의 변화가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변화의 움직임이 1989년에 맞추어 진 것은 아닙니다. 변화는 그 이전부터 조금씩 있어왔고, 정치적 공백기 - 고르바쵸프의 뻬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점점 지지를 잃어가고 있을 때 -를 빌어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 뿐입니다.
폴란드에서는 1988년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 기존 지배정당과 노조가 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고, 헝가리에서는 1987년 시위로 기존 지배정당이 분열하게 되며, 동독에서는 1990년 고르바쵸프 지지시위가 열려 여행의 자유, 자유선거, 정치개혁, 서독과의 경제통합, 등의 성과를 이루어냅니다. 루마니아에서는 1987년 트랙터 공장의 파업으로 시위가 시작되어 결국 차우체스쿠 대통령이 도피하고 시위대를 지지하는 군대와 함께 행정기구가 결성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89년 ‘프라하의 봄‘ - 1968년 소련 군대가 프라하에 투입되었던 - 2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적인 시위가 일어나 정부가 재구성되며 자유선거 실시를 이루어내며, 불가리아에서도 1989년의 시위로 정부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 동유럽의 이러한 변화들은 매우 평화적이었다는 것이 크리스 하먼은 분석입니다. ‘평화로웠다’는 것은, 세력간의 충돌정도를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에, 시위를 주도한 ‘반대파’ (기존 정권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들이 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연합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 이것은 다시 말해서, 1989년 동유럽의 변화들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일정정도의 정치적 변화들을 쟁취했지만,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에서 기존 지배정당들은 유지되거나 분열되었을 뿐이고, 대통령 외에 기존 권력을 구성하고 있던 정치관료들, 기업 경영진들의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을 퇴진시킨 1960년 419항쟁이나,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1987년 6월항쟁에 비견할 만 합니다. 물론, 두 항쟁의 경우, 동유럽의 경험과는 달리 반대파들이 직접 행정기구에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 크리스 하먼은 뜨로츠키의 명제에 따라, 한 사회의 생산관계와 지배계급을 변화시키는 ‘사회혁명’과 지배권력을 교체하는 ‘정치혁명’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평화적인 변화는, 붕괴할 만한 사회주의는 애당초 없었음을, 즉 붕괴할 만한 ‘차별화 된 생산관계나 지배계급’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음을 논증한다고 주장합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경제를 사회주의 로 바라보는 시각이나,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모종의 경제체제로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 ‘평화적이었던’ 동유럽의 체제이행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 그는 1989년 이전의 동유럽 사회를 ‘국가자본주의’ 로 규정합니다. 동유럽 사회는 대대적인 정치혁명을 바탕으로, 국가자본주의에서 다국적자본주의로, 진보도 퇴보도 아닌 옆걸음질했다는 것이죠. 변화한 것은, 과거 국가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되었던 국내의 경쟁이 해소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국가자본주의란 국가가 대외적인 경쟁을 위해 내부적인 경쟁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대립적인 경제체제를 상징했던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의 경제체제란, 국가 개입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1941~1944년까지의 미국 전시경제와 소비에트연방의 경제체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 그는 1950~60년대 동유럽 경제의 성장률이 세계 각국 경제의 성장률 보다 월등히 높은 것을 근거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경제에서, 초기에는 국가자본주의가 다국적자본주의 보다 우위를 점유했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경쟁을 통제하면서, 내부의 자본을 집약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의 우위는 1970년대를 경과하며 무너지게 됩니다. 국가 내부의 자본을 동원하는데 있어서는 국가자본주의에 뒤쳐졌던 다국적자본주의는, 국가 외부의 자본까지 집적하면서 국가자본주의를 앞질러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국가자본주의와 다국적자본주의의 차이는, 자본주의 고유의 ‘축적’을 하기 위한 전략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 자본주의가 이전의 경제체제와 달리 놀라운 속도로 경제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 이면에서 극심한 양극화와 계급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특유의 축적능력에 있습니다. 영미식 다국적자본주의가 저질러 온 엔클로우저 운동, 부랑자법, 식민 지배, 노예 무역과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식 국가자본주의가 저질러 온 강제노동수용소, 파업과 기생주의 에 대한 처벌, 등은 다르지 않은 폭력행위로서, 대규모적인 집중과 집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된 것이죠.

- 다국적자본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전략이 불가피하게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외국 자본과의 결합 속에서 더 큰 규모의 자본을 축적해야 했는데, 이것은 곧 '노멘클라투라'라 불리우던 국가관료들의 경제 장악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죠. 지배세력의 균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니 체제경쟁에서 밀려날 것이고, 다국적자본주의로 나아가려니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권력의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의 국가관료들은 균열합니다. 이런 지배세력의 균열과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맞물리면서 뻬레스트로이카를 비롯한 대대적인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크리스 하먼은 이런 변화들 속에서,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내 사회주의적 좌파들의 무기력을 지적합니다. 기존 정치세력들은 분열하고 있었고, 폴란드의 연대노조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포럼을 비롯해 자생적인 대중조직들이 탄생하며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었지만, 좌파들의 대안제시가 미흡했기 때문에, 이들 반대파들은 다국적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새로이 지배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통제하기도 했구요.

- 결국, 기존의 정치권력은 반대파에 편승했던 국가관료 일부와 반대파 지도자들로 교체되었고, 밀려난 과거 국가관료들은 대거 사영기업체로 이전합니다. 다국적자본주의로 옆걸음질 친 이후, 대거 설립된 사영기업들의 대다수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내부시장 경쟁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사라진 다국적자본주의 아래에서, 과거 국가관료들은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죠.

- 2부에서 마이클 헤인스는 다국적자본주의 동유럽의 전망을 예측합니다. 그는 시장을 개방하며 기대했던, 대규모의 해외자본의 유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과거 소련의 무역보조에 의해 보충되었던 내부시장의 경쟁력은 약화되었고,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해외 투자자들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렇듯 동유럽의 경제는 세계시장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시장으로의 편입은, 일국 차원에서 행사되던 최고권력이, 초국적 기업을 비롯한 세계 시장 맹주들의 주변권력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북한, 베네수엘라, 쿠바와 같이 소위 '현존 사회주의'라 불리우는 국가들의 공통점은, 세계시장으로의 편입, 즉 기존 권력의 재편과 주변화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국가들이 세계 경제와의 협력 없이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북한과 같이 국가의 폭력이기도 하고, 베네수엘라와 같이 풍부한 석유자원의 소유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체제 유지가 지속가능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국가자본주의의 다국적자본주의로의 전화가 보여주는 진실은, 세계적인 경제협력만이 높은 삶의 질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로 편입된 동유럽 경제의 현실은, 세계적인 경제협력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세계적인 경제협력은 형식에 불과하며, 무엇을 위한, 누구에 의한, 어떤 방식으로의 협력이냐가 근본적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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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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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태어난 1871년은 러시아 전역에서 나로드니즘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봉건 구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던 나로드니키들은, 차르 정부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을 통해 뜻을 펼치고자 했고, 이들의 장렬한 죽음은 젊은이들을 이 대열로 끌어들였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유태인으로, 지체장애로 차별받았던 학생 로자 역시도 이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로자가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나로드니즘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스위스는 유럽 각국의 혁명가들의 피신처였고, 로자는 취리히 대학에서 수학하며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한다. 혁명의 시대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유럽의 혁명가들에게, 나로드니즘과 스위스로의 피신은 하나의 정형과 같았다고 보여진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1세대인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빅토르 아들러, 등을 여기서 만나게 된다.

그녀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1898년 독일 사민당에 가입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녀에게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독일은, 분명 세계혁명의 중심지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고, 그녀는 평생 국제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혁명 없이도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베른슈타인이 불러일으킨 수정주의 논쟁으로 드러난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논리를 반박하는 논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발표하면서, 독일을 비롯해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여느 혁명가들과 다름 없이,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당내 갈등과 분화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연합체였던 제2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던 역사 깊은 독일 사민당 내의 분화는 더욱 격심했으며,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전쟁이 발발하는 1914년 직전 1912년 선거에서 독일 사민당은 대거 승리하게 되는데, 의회로 진출한 사민당 내의 주요 지도자들은 전쟁공채 징수에 찬성하고, 심지어 대거 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주도적인 세를 떨치던 그(녀)들이었기 때문에, 로자는 전쟁과 당, 두가지 모두에 맞선 어려운 싸움을 해야했다. 그녀는 어제까지 친분을 유지했던 당내 주요 지도자에게도 필요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예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독일 전역에서 연설했으며, 1905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전쟁이 한참 무르익던 1919년 그녀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 끝까지 전쟁 반대를 고수했던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하게 되고, 1919년 예기치 못했던 봉기로 휩쓸려들어간다. 로자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지지하던 젊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봉기에 반대했지만 끝까지 함께 했고, 실패한 봉기에 의해 결국 그녀는 독일 유격대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로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막스 갈로가, 대외적 활동 못지 않게 로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보통 혁명가들은 자신의 정치활동에 일반적인 가치들을 종속시켜왔기 때문에, 그(녀)들의 일대기에서 정치활동 이외의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스위스 피신 중에 만난 폴란드의 지하운동가 레오 요기헤스를 비롯한 뭇 남자들과의 사랑, 가구나 악세사리에 대한 관심, 동물과 자연에 대한 애정, 등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솔직했으나, 이를 자신의 정치활동 아래 망설임 없이 종속시키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8년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가장 천박한 모욕들을 받아왔어요. 그러나, 그런 모욕들에는 결단코 단 한줄도, 단 한마디 말로도 응수한 적이 없어요. 적수들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인 갈등을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몰고가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해야해요.”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350쪽

마지막으로, 로자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했던 부분을 살펴야 한다. 그녀는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직접 경험하면서, 크게 두가지 사안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출했다.

첫 번째는, 민족정책이다. 봉건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투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지배하고 있었고, 10월 혁명 이후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는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 분리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로자의 경우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스위스로 유학한 이래 줄곧,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으며,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라는 명제 아래, 국경 없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촉구해왔다.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905년 혁명 이후 의회가 설립되면서 차후 러시아의 혁명전망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이 논의는 크게 세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는데, 의회의 설립과 이에 대한 참여를 종용했던 멘셰비키 그룹과, 현재는 의회의 설립과 참여에 그치지만 의회를 이용해서 노동자 정부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볼셰비키 그룹, 마지막으로 노동자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노동자 정부의 구성에 즉각 나서야 한다는 트로츠키 그룹이었다.
마지막 입장은 1905년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논문에서 제시된 것으로 ‘영구혁명론‘ 이라 하는데, 볼셰비키 그룹은 1917년 4월 이후 이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영구혁명론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대립해왔던 각 세력들에게 1905년에 설립된 의회를 비롯해 1917년 2월에 설립된 임시정부라는 공식적 국가기구는,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의 세력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다. 로자가 반대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 더 읽어야 할 책

<대중파업론> : 로자가 1905년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분석한 글.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며 향후 혁명 전망을 제시한 글은 이 외에도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 등이 있다.
<자본축적론> : 1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고 있던 1912년. 독일 사민당의 찬성 움직임을 경계하며 집필한 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매커니즘을 서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 레닌도 <제국주의론>을 집필해, 자본주의의 마지막 발전 단계로서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 1898년 독일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 그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독일 사민당 지도부를 비판한 글. 로자는 이 논문을 발표하며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목받게 되고, 수정주의 논쟁은 1904년 독일 사민당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배격되어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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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0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sb 2006-06-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 어록을 인용하려면, 로자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 사민당 내에서 얼마나 고립되었는지를 좀 더 설명했어어야 했는데, 좀 뜬금없죠?

2006-06-23 0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b 2006-06-2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답변 드립니다.

1.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에 대해서, 평전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입니다. (꼽아놓은 책이 있긴 합니다. 풀무질 출판사에서 나온 <룩셈부르크주의>, 로자의 저작선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중' 이라는 어휘는,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민'은 일하는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데, 소생산자인 농민을 포함합니다. 아시겠지만,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구분하지요. '민중'도 '인민'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2. '인터내셔널' 이란 각국 사회민주당 내지는 공산당, 즉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정당들의 연합기구를 뜻합니다. 그에 숫자를 붙이는 것은 역사가들이 편의상 붙인 것인데요, 시대에 따라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다가 해체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연대기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각각의 인터내셔널은 가입 조건이나 활동 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북막스 출판사의 <마르크스주의와 당>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시대 별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3. 기존 체제가 격변하는 시기에는 늘상 대중기구가 출연합니다. 러시아에서는 그것을 소비에트(평의회)라고 불렀고, 한국의 경우에도 해방 직후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죠.
'프롤레타리아 독재' 란, 노동자 소비에트가 혁명 이후 공백상태인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재' 가 뜻하듯이, 노동자 소비에트가 농민 소비에트와 같은 다른 대중기구에 앞서 새로운 국가권력에서 주도권을 명확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죠.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는데, 페테르부르크는 공업도시였기 때문에, 구성원이 대다수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란, 혁명 직후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여기에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처럼 노동자들이 중심인 소비에트 못지 않게, 농민 소비에트들도 소속되어 있습니다.)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소비에트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 러시아 대다수가 농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획기적인 주장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 붕괴는 예언이나 예정이 아닌, 사회발전의 일반법칙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로 발전했듯이, 자본주의 역시도 새로운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는 일반법칙입니다. 그것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달려있겠죠. 실패한 혁명도 있고, 성공한 혁명도 있듯이요.

로드무비 2006-06-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책을 통해 읽었으니까요.
제 댓글이 뜬금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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