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조개구이 먹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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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만한 제국 - 하워드 진
2. 경제학의 역사 - 존 갈브레이드
3. 문명의 공존 - 하랄트 뮐러
4. 월스트리트 제국 - 존 스틸 고든
5.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 슘페터
6.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 브루스 커밍스
7.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 송두율
8. 미국의 민주주의 - A. 토크빌
9. 세계화와 그 불만 - 조지프 스티글리츠
10.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 윤건차
11.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 - 조셉 나이 외 다수
12. 과학혁명의 구조 - 토마스 쿤
13. 국부론 - 아담 스미스
14. 실천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
15. 자유론 - 존 스튜어트 밀
16. 감시와 처벌 - 미셀 푸코
17. 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8. 엔트로피 - 제레미 리프킨
19. 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스피
20. 다산문선 - 정약용
21. 시민 정부론 - J. 로크
22. 법의정신 - 몽테스키외
23.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24. 꿈의 해석 - 프로이트
25. 미디어의 이해 - 마샬 맥루한
26.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27.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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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제한은 고리대의 폐해를 막는 좋은 장치다. 하지만, 이자율을 무한정 낮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법정 이자율 이하로는 돈을 빌리기 어려울 만큼 신용이 나쁜 이들은 아예 돈줄이 끊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서양 속담은 이처럼 좋은 뜻을 가진 정부의 시장 개입이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차라리 선의를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대안은 늘 있었다. 시장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별도의 신용대출 창구를 만드는 게 좋은 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입법들은 대부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최저임금제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악용해 임금을 무한정 깎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고용주에겐 고용을 포기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잘못 운용되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최저임금제가 제구실을 하려면 실업자 대책이 충분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도 임금을 깎기보다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움직인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의 ‘기간제 고용 2년 제한’은 고용주로 하여금 2년간 일해 숙련도가 쌓인 사람을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뽑을지, 아니면 그를 정규직으로 전환해 계속 쓸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 결과를 보면, 법이 시행된 뒤 1년간 비정규직은 22만명 줄고, 정규직은 44만명 늘었다.

그런데 정부가 7월 확대 시행을 앞둔 이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한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대거 해고할까 걱정해서란다.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정규직 전환 채용을 포기하는 기업들도 일감이 있는 한 사람을 쓴다. 문제는 계약이 끝난 노동자들이 회사를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악용하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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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브로노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과학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발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다른 한 저작 ‘인간의 유래’ 역시 그것에 못지않은 명저라는 사실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와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지며 그 근원은 먼 옛날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요컨대 다윈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동의 조상을 갖는, 결국은 생물학적 진화의 한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개 생물종에 불과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모든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찬란한 현대문명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

여기 한 탁월한 석학의 설명이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동물 가운데서 유독 인간만이 자기 환경에 갇혀 있지 않은 유일한 존재다. 상상력, 이성, 정서적 예민성과 강인성으로 인해 인간은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일련의 발명을 통해 자기 환경을 개조해온 것은 일종의 다른 종류의 진화, 즉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문화적인 진화인 것이다. 나는 그 문화적인 산봉우리의 연속을 ‘인간의 등정’이라 부른다.” 
 
제이콥 브로노스키(Jacob Bronowski)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는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와 크게 대조적이다. 다윈이 생물학적 인간의 근원을 밝혀서 ‘겸손한 인간’의 면모를 제시했다고 한다면 브로노스키는 문화적 인간의 역사를 설파해서 ‘인간의 성공’을 자축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한 인물이 어느 한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는 경우는 사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섭렵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다. 더욱이 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물리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동시에 시인이자 극작가로도 활동했고 또한 계관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연구가로서도 탁월했던 그런 인물이라면 그는 ‘석학 중의 석학’으로 불려도 별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브로노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서 1908년 태생의 그를 사람들은 ‘20세기의 르네상스인’으로 칭송하였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여서 여러 권의 명저를 남기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하지만 브로노스키를 정녕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한 권의 책 ‘인간 등정의 발자취’ 때문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원래 그가 같은 제목으로 제작했던 13부작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다시 글로 정리한 것이다. 이 TV 프로그램은 1973년 전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며 방영되었는데 이듬해 다시 책으로 발간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작업에 너무 열정을 쏟았던 나머지 그는 책이 간행된 그 해에 6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러면 브로노스키는 이 책에서 과연 어떤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인류문명을 과학이 이루어 놓은 업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문명이란 지식과 지식의 성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원래 지식(knowledge)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인류문명사의 근간은 곧 과학의 역사이며 그것이 바로 그가 강조했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브로노스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과학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예술·문학·종교·기술·건축 등 인간 문화의 전반을 두루 망라한다. 그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이런 문화와 문명의 인류역사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만 전문적이고 난해한 과학적인 해설로서가 아니라 유려한 문학적 비유가 곳곳에 녹아있는 휴머니스트의 필체로서 말이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의 삼림이 초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초원에 노출된 유인원의 일부는 두 발을 딛고 일어서서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진화하였다. 그렇게 해서 자유로워진 두 손을 사용해서 연장과 무기를 움켜쥘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초식성이었던 식성은 점차 잡식성으로 바뀌었으며 그렇게 되자 식물만을 섭취하던 때에 비해서 여가 시간이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원시인류는 그런 남겨진 시간 동안에 협동으로 더 큰 짐승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언어가 발달하고 이에 따라 두뇌의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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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마틴 부버의 ‘나와 너’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관계 메말라가
 
‘나와 너(Ich und Du, 1923)’는 언뜻 보기에 ‘만만한’ 책같이 보인다. 책이 얄팍한 데다가 ‘나와 너’라는 제목에서는 연애소설 같은 가벼움마저 풍긴다. 하지만 산뜻한 마음으로 책을 펴든 독자라면 식겁할지도 모르겠다. 책장 가득 철학의 난해함이 시의 오묘함 속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철학적 산문 시(詩)에 가깝다.

하지만 ‘나와 너’에는 마약 같은 매력이 있다. 독자는 쥐나는 머리와 먹먹한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좀처럼 책을 던져버리지 못할 터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종교적인 절정체험을 논리와 언어로 풀어내는 재주를 지닌 철학자다. 표현을 바꾸어 집요하게 반복되는 그의 핵심 주장은 일상에서 맛보기 힘든 높은 삶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에서 부버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부버는 ‘나-너’와 ‘나-그것’이란 두 개의 근원어로 세상을 분석한다. 부버가 직접 드는 예로 근원어를 설명해 보자. 우리는 흔히 나무와 ‘나-그것’의 관계로 만난다. 생물 종(種)의 하나로 나무를 분류하기도 하고 가구 재료로 쓰기 위해 몇 그루인지 수로 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무와 ‘나-너’ 관계로 만날 때도 있다. 나에게 나무가 단순히 감상하고 이용하는 ‘그것’이 아니라 내 전부를 바쳐 사랑하는 ‘너’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부버가 말하려는 바를 어린왕자와 장미의 관계에 빗대어 풀어보자. 어린왕자는 자기가 소중하게 가꾸던 꽃이 여느 장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데 실망했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장미는 자신이 쏟았던 그 정성 덕분에 그에게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부버는 “‘그것’은 번데기요, ‘너’는 나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제든 ‘너’로 내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다시 ‘그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람 사이의 만남도 그렇다. 부버에 따르면 ‘나-그것’으로 서로를 대하는 사이에서는 진정한 ‘만남(Begegnung)’은 없다. 인사를 예로 들어보자.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에게 우리는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안녕(安寧)’에 정말 관심을 갖고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네 인사는 따분하고 틀에 박혀 있다. ‘안녕!’이라는 말 속에 당연히 담아야 할 상대방의 안전과 평화를 비는 마음이 얼마나 막연하게 느껴지는가? 카피르(Kaffir) 사람이 쓰는 신선한 인사말과 비교해 보라. 그네들은 사람을 만날 때 자기 몸을 상대 몸에 꼭 붙이면서 ‘자네가 보이네!’라고 말한다. 미국 인디언은 더욱 구성지고도 고상하게 ‘그대여! 내 냄새를 맡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모든 사람과 이렇듯 친근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는 없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나-너’의 관계는 ‘나-그것’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대도시 상가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상대와 맺는 관계는 대개 ‘나-그것’ 차원에 그친다. 서로 ‘이용’하고 ‘경험’하는 수준에서만 상대를 대한다는 뜻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경제로 복잡하게 얽힌 거대 국가는 반드시 ‘그것’의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버는 유능한 정치가나 경제인일수록 사람을 ‘사업이나 목표를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지녔는지’로만 가늠하고 대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몰인정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만약 지도자들이 사람 하나하나를 ‘너’로 대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는 “당장 그네들 머리 위에서 무너지고 말 터”이다. 하나하나의 사정을 다 봐준다면 원칙도 정의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사람을 모두 ‘그것’으로 보고 법과 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나-그것’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사회생활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자연과학에서 연구를 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인과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성과와 책임을 나눈다는 뜻이다. 법칙과 원칙에 맞는지를 살펴서 뭐가 옳고 그른지를 가린다. 그래야 공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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