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개인의 문화적 취향은 계급을 반영”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구별짓기’(La Distintion·1979)는 현대사회의 문화와 계급의 관계를 경험적인 연구와 독특한 이론으로 규명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의 역작 가운데 하나다. 부르디외는 파리고등사범학교(ENS) 출신의 사회학자로서 프랑스 최고의 지성을 상징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교수였다. 저자는 독창적인 사회문화이론가로서 3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또한 68혁명세대 지식인으로서 말년에는 빈곤, 실업, 파업, 세계화 등 현실 문제에도 자주 개입하는 등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와 닮은 데가 많은 학자다. 부르디외는 사후에 사르트르와 푸코에 이어 프랑스 지성사에 빛나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르디외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0년대 말 전국민을 상대로 한 전국적인 조사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음악, 미술, 의상 스타일, 실내장식, 스포츠, 요리, 영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프랑스인의 문화적 취향 및 생활양식이 밝혀지게 되었다. 부르디외의 관심은 이 같은 경험적 조사 연구의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르디외의 이론적 관심사는 사회에서 개인 및 집단의 문화적 취향은 무엇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는지, 또 문화가 사회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밝히는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이 책에서 특히 문화와 계급 간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등의 문화적 행위가 때론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의 계급을 드러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르디외에게 있어 개인이 어떠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소비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계급을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사회공간으로서의 장(場)’ ‘문화자본’ ‘아비투스(habitus)’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먼저 ‘사회공간으로서의 장’이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가 혹은 이질적인가에 따라 개개인이 서로 구별되는 공간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처럼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중산층은 중산층끼리 서로 구별된다. 특히 이러한 장에선 개개인이 정치, 경제, 문화와 같은 다양한 자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실상 서열이 매겨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곧 사회공간으로서의 장으로, 그 안에서 권력이나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서열을 결정한다.

‘문화자본’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여러 자본 가운데 하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자본이란 가정환경, 가정교육과 같이 어려서부터 내면적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클래식을 향유하고 문화·예술 소장품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처럼 오랫동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 형성되기도 한다. 또 학력과 같이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해주는 문화자본도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우수한 학업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훌륭한 문화자본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력은 문화자본의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과거의 귀족과 하층민, 오늘날의 상류층과 하류층의 관계처럼 계급·계층 간에 불평등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단지 경제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클래식 음악을 즐기기 어려운 것과 같이 이들 사이엔 문화자본 또한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개인의 취향과 문화소비 경향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재능이나 기호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출신계급(계층), 교육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드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란 개념을 통해 이러한 문화적 불평등을 설명한다. ‘아비투스’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취향을 갖거나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기제이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론 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아비투스가 의식적으로 나타날 때는 자신을 남과 차별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된다. 예를 들어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 음악을, 또는 축구보다는 골프를 선호하는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유한 가정환경이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기호를 갖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속한 계급(계층)의 사회적, 문화적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즉 축구보다 골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은근히 자신이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도적 전략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듯이 보인다.

또 다른 예로 하층계급이 기름진 음식과 튼튼하고 실용적인 옷을 좋아하는 반면에, 상류층은 채소와 생선류의 식단과 고급 브랜드의 패션을 즐기는 것이 결코 개인적 차원의 취향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을 남과 구별지으려는 계급(계층)적 차원의 구별이 있다. 축구와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계급(계층)에 따라 이토록 취향이 달라지는 것을 두고 하층계급의 ‘필수적 취향’과 상류층의 ‘사치스럽고 자유분방한 취향’이란 말로 구분한다.

사람들은 계급적 위치(상류층이냐 하류층이냐) 및 성향(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취향이 비슷할수록 사이가 더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취향의 차이가 출신, 직업, 정치 성향의 차이로 나타날 수도 있다. 샴페인을 마시며 승마와 사냥, 골프를 즐기는 우익성향의 기업체 경영주와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즐기는 좌익성향의 노동자가 친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 선호하는 음료, 스포츠, 정치성향 등은 각각의 계급(계층)의 사회적 위치와 상응한다. 이를 두고 문화와 계급이 상동구조(相同構造)를 이루고 있다 본다.

그러나 문화적 취향 혹은 문화 소비행태가 반드시 사회계급과 기계적이고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귀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승마, 펜싱, 테니스, 골프는 오늘날 더 이상 상류층만이 즐기는 배타적인 문화행위라고 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나 스포츠가 중산층에 의해 채택될 때 상류층은 이를 버림으로써 이러한 고상한 취미는 더 이상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다. 역으로 하류층의 문화적 취향이 상류층에 전파될 수도 있다. 청바지는 과거 미국의 하류층 노동자들이 즐겨 입었지만 이제 명품 청바지의 경우 일부 상류층만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이 되었다.

‘구별짓기’는 현대인의 취향과 소비문화 현상에 대해 개념적 기초를 제공하는 이론서다. 일상생활에서의 문화 소비행위는 그 사람의 계층 혹은 계급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류층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구별짓기 위해 비싼 외제 승용차를 타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며 유명 브랜드의 비싼 옷을 입는다. 또 골프나 승마를 즐기며 해외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는 문화생활을 즐긴다. 이런 문화생활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류층의 과시적이고 차별적 의도가 담긴 상징적인 행위일 수 있다. 부르디외의 문화이론은 이처럼 문화 속에 담긴 계급(계층)의 상징적인 행위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고찰은 현대인의 소비문화에 대한 마케팅 분석 및 전략 수립의 이론적 근거로도 이용되고 있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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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동양 = 야만’ 서구의 지배논리 분석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비교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1978년 출간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동양을 다룬 서구의 문학, 문화, 사상, 역사에 내재한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비판하였다.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의 영·미계열 학교와 하버드대 등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학위를 마친 그는 아랍 출신(동양)과 미국 학자(서양)로서의 내적 긴장을 소지한 이른바 경계인이었다. 그가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났을 때 유럽과 미국의 언론이 아랍 사회를 반서구적·위협적 존재로 접근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연구에 착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본래 산스크리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동양의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연구업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 지난 2세기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간파한 사이드는 동양을 다루기 위해 기획된 체제와 이슬람에 대한 편견, 동양과 서양 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유색인과 여성에 대한 정복을 정당화하는 이념 등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20세기 최고의 인문서로 평가되는 ‘오리엔탈리즘’은 3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지성계에 새 물줄기를 열었고 지금도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유럽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친숙한 ‘우리 서양’과 낯선 ‘그들의 동양’으로 이분했다고 파악하였다. 가장 큰 대비는 ‘서구=문명’과 ‘동양=야만’이었다. 낙후한 동양인은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어린애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어른인 서양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간주되었다. 유럽은 근대 서구인의 동질적 시선으로 동양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고 열등한 타자(他者)로 정형화한 것이다. 서양을 가치의 중심에 두고 동양을 ‘불완전한 동양’으로 여긴, 동과 서라는 인위적 경계와 구분은 힘센 서양이 서양을 위해 서양과의 관계에 따라 동양을 규정하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사고방식의 소산이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몇 가지 주요한 사항을 주장하였다. 첫째,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의 정치적 목적, 즉 유럽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유럽 도서관에 있는 한 서가의 책이 인도와 아랍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는 오만한 발언처럼 서양인은 동양 사회와 문화를 저평가하여 서구의 개입을 당연시하였다. 비합리적이거나 순진무구한 동양인은 이 잔인한 물질세계를 통치하거나 변화를 추진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아버지와 같은 서구의 도움으로만 진보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동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상대적으로 우월한 서구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본디 정체성의 구성은 반대쪽 타자의 창출과 관련되는 법이기 때문에 서양이 우수하면 동양은 열등하고 동양이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이면 서양은 진보적이고 합리적이 되었다. 동양인이 나약한 여성과 미숙한 어린애라면 서구인은 그들을 돌보는 강한 가부장적 성인 남성이었다. 이는 백색 피부의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유색인을 가르쳐서 문명세계로 이끈다는 제국주의의 논리로 작동했다.

셋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거짓으로 기술하였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그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네’라는 영국 시인 키플링의 시가 시사하듯 서구는 열등한 동양을 창조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영구불변의 것으로 박제하였다. 동양인은 본래 부정적이며 늘 그렇기 때문에 둘의 간격은 좁혀질 수 없었다. 수동적인 동양은 과학과 상업 분야 등 인류 진화의 주류에서도 고립된 변화의 무풍지대였다. 광대한 비서구세계를 단일한 ‘불변의 동양’으로 왜곡한 오리엔탈리즘은 영화, TV, 사진, 그림, 광고, 문학, 학술서적, 신문과 잡지 등을 매개로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발전한 서양과 낙후한 동양’이라는 식의 대비는 서구가 비서구 세계를 인식하는 고정불변의 공식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라크전(戰)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일견 이라크인을 판단력과 자기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없는 어린애로 여기고, 영원히 어른이 못되는 ‘피터 팬’을 대신해 무지몽매한 지도자 후세인을 심판해주는 정의의 ‘샘 아저씨’를 자처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테러와 무질서, 전근대성도 질서와 안정, 선진문명을 소지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상투적 표현이다. ‘미국이 미숙한 이라크인을 훈육하여 성숙한 어른으로 만든다’는 명제는 ‘우수한 인종인 서구인이 미개한 동양인을 지배하여 문명세계로 인도한다’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논리와 흡사하다. 오늘날의 대제국 미국이 가르쳐서 ‘어른’으로 키우려는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 이란, 라이베리아, 북한 등 모두 비서구 국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제국주의를 지지한 동양에 대한 서구의 차별적 인식, 곧 오리엔탈리즘의 유산이자 계속이다. 여기에 도전한 이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쓴 목적이 서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 받는 아랍과 제3세계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이 책의 출간 이후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비서구 문화의 상대적 진리에 주목하는 다양한 연구와 활동이 이어졌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고 밝힌 사이드의 통찰은 포스트콜로니얼(탈식민주의) 연구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비서구인의 연구 활동, 하층민의 경험을 담은 역사서술, 페미니스트와 다른 마이너리티(소수자)의 담론에도 반영되었다.

식민지가 모두 사라진 오늘날에도 지구상의 절반을 ‘저주받은 자들’로 여기는 서구의 편견은 잔존한다. 무슬림은 여전히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고, 인도는 늘 역동성이 부족한 신비한 나라이며, 일본은 가라테와 동일시된다. 사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그것을 전복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사이드의 말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경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우수하다고 믿는 건 누가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처럼 어리석다. 글로벌화와 사람들의 교류와 이동이 활발해진 오늘날, 서양의 지배적 위치를 탈중심화하고 비서구 세계를 응시하며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할 필요성은 그래서 한층 유효하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인의 경험 속에 자리하는 동양의 특별한 위치에 근거한, 동양과 타협하는 한 방식이다. 동양은 유럽에 인접할 뿐 아니라 유럽의 가장 크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곳이고 유럽 문명과 언어의 근원이자 그 문화적 경쟁자이며, 유럽의 가장 짙고 가장 빈번히 재발하는 타자(他者)의 이미지들 중 하나이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이 그 대조적 이미지, 사상, 성격, 경험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본문 중에서)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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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가 두려운 현대인, 타인(他人)에 촉각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1950)은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이 일단 사회 안에서 형성된 후 그 사회에서의 일, 놀이, 정치 및 육아활동 등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한 책이다. 물론 부제 ‘변화하는 미국의 성격에 대한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의 주안점은 19세기에 미국을 지배했던 사회적 성격이 점차 다른 종류의 사회적 성격으로 바뀌고 있는 변화를 관찰하는 데 맞춰져 있다.

‘사회적 성격’이란 개인의 행동과 사회구조를 연결시켜주는 중간장치로서, 예의범절처럼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암묵적으로 따라하도록 요구하는 양식(동조성의 양식)이다. 리스먼은 이 사회적 성격을 전통지향형, 내적지향형, 타인지향형으로 구분하면서 이 세 유형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며 논리적으로도 당연하다고 본다.

인구변동 따라 사회적 성격 변화

전통지향형 사회의 사회 구성원은 전통을 엄격히 따르도록 요구된다. 사회생활의 중요한 관계는 주로 엄격한 의식과 예절에 의해 통제된다. 이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씨족집단과 같은 혈연집단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이때 개인의 창의력이나 전통에 어긋나는 이질적인 목표의 추구는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지향형이 지배적인 사회는 인구곡선상에서 높은 출생률과 높은 사망률로 인해 총인구가 증가하지 않거나, 늘어나도 매우 천천히 증가하는 인구정체시기에 해당한다. 리스먼은 이 인구정체시기를 ‘인구의 고도증가 잠재력의 단계’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만일 이 시기에 높은 사망률을 낮출 수 있는 어떤 일(많은 식량생산, 새로운 위생수단, 병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지식 등)이 일어난다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축적과 기술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사회구조가 급격히 변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일어나고 분업과 사회의 계층화가 촉진된다. 전통의 힘은 약해지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어진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내적지향형 사회다. 내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행동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원천이 부모나 권위 있는 연장자에 의해 인생초기에 주입되어 내면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내면화’된 행동규범은 굳이 전통의 통제를 받지 않고도 사회구성원으로 하여금 일정한 ‘코스’를 유지하면서 ‘성공’이라는 하나의 일반화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내적지향형 사회는 보통 높은 출생률과 낮은 사망률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다. 이러한 증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는데, 그 이유는 출생률 역시 사망률이 감소하면서 이내 낮아지기 때문이다.

개인과 세계, 대중매체로 소통 

산업화가 사회 전 분야에서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1차산업과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 반면에 사무직 계통의 일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는 그 수와 비율이 늘어난다. 노동시간이 짧아지고 교육, 여가, 서비스업 등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매스미디어에서 나오는 말과 이미지의 소비도 증가한다. 개인과 외부 세계의 관계는 점차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을 매개로 한다. 이러한 변화와 관련해 가족과 육아법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가족의 규모는 더 작아지고, 엄격했던 예전의 훈육방식이 응석을 받아주는 육아방식으로 대체된다. 또 학교와 동년배집단(peer group)의 영향력은 훨씬 더 커진다. 여기서 출현하는 사회의 모습이 ‘타인지향형’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위와 바람에 대해 몹시 민감해지고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심리적 욕구가 커진다. 타인지향형 사회의 구성원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신호를 포착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에 싸여, 마치 주변의 신호를 포착해내는 레이더(radar)마냥 다른 사람의 동향을 주도면밀히 관찰하는 데 주의를 집중한다. 인구곡선상에서 보면 타인지향형 사회는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낮고 전체 인구에서 중년층과 노년층의 비율이 커지는, 인구의 초기감소기에 해당한다.

놀이가 창조적인 사고 키워줘

리스먼은 이상과 같이 사회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한 다음, 인간을 적응형, 아노미형, 자율형이라는 세 가지 보편적인 유형으로 나눈다. 적응형은 전형적인 전통지향형, 내적지향형 및 타인지향형의 사람들로 사회의 요구에 잘 순응하는 인간형이다. 아노미형은 사회의 규범을 깨뜨리는 범죄자와 같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따를 능력이 없는 인간형이다. 마지막 자율형은 사회의 행동규범에 동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이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인간형이다. 문제는 점차 타인지향적으로 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자율형 인간이 나타날 수 있는가다. 리스먼은 직장에서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억지로 미소를 짓는 등의 행위(거짓인격화)와 사회가 분업화되면서 교제하는 사람의 폭이 좁아지는 현상(강요된 사생활화) 등이 사람의 자율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놀이와 여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놀이 속에는 다양한 능력개발의 기회가 있으며 거기서 개발되는 능력은 창조적이면서도 유토피아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결국 개인은 여러 가지 놀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나름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율성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리스먼이 ‘고독한 군중’을 쓸 당시의 미국 사회가 반드시 타인지향형의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젊은층과 대도시 그리고 중간계급 사람의 성향을 토대로 타인지향형이 미국 사회 전체에서 주도권을 잡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보았다.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 같은 유형의 사회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산업화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의 예상이 옳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부터 대중소비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생활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타인지향형’이 사회적 성격에서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스먼이 해법을 찾고자 고심했던 문제가 이제 시공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우리의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 역시 서로 비슷해지려고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사회적인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지향적인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의 동시대인이 개인에게 있어서의 지향(志向)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직접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친구나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러한 원천은 생활지침으로서 그것에 의존하는 습성이 어릴 때 심어진다는 의미에서 내면화되어 있다. 타인지향적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그 지침과 함께 바뀐다. 일생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추구하는 과정 자체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신호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뿐이다. (본문 중에서)

이상률 번역가·‘고독한 군중’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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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과학만능주의 미래를 소설로 경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우리는 유전자 조작, DNA 염기서열, 게놈(genome) 등 생명공학 용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또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줄기세포 사건으로 인해 줄기세포는 물론 배반포, 테라토마와 같이 어려운 용어도 이해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렇듯 생명공학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생소한 분야가 아니다. 1978년 최초의 시험관아기인 루이스 브라운이 영국에서 태어난 이래 생명공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생명공학이 미래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구원의 손길이 될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생명공학의 경이적 발달로 미래에 나와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이 대량 생산되어 거리를 활개치고 돌아다닌다면, 그런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그런 끔찍한 미래 사회를 일찍이 그의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예리하게 그려냈다.

1932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과학기술이 극한적으로 발전한 먼 훗날의 세계를 상정, 그때의 변모된 인간사회를 그려낸 ‘반(反)유토피아 소설’이자 ‘공상과학소설’이다. 저자 헉슬리가 살았던 당시의 서구사회는 파랑(波浪)과 격동(激動)의 시대였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은 서구 지성계를 흔들어 놓았다. 전쟁에 환멸을 느낀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에겐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나아가 1929년의 경제공황과 전체주의 정권의 확대로 인해 서구 지성인들의 시대정신은 더욱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헉슬리 또한 이런 시대적 상황을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진화론의 권위자이자 생물학자였던 조부(祖父)의 낙관적 진보주의를 물려받는 대신 인문학적 상상력을 기초로 한 문명비판 사상에 경도되었다. 여기에는 현대문명에 비판적이었던 소설가 D.H.로렌스와의 교류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자신도 과학문명이 전쟁을 불러오는 등 인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목격하며 적극적으로 비판의식을 키워나갔다.

소설 ‘멋진 신세계’는 포드(Ford) 기원 632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포드 기원이란 미국의 자동차회사인 포드(Ford)가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해 ‘T형 자동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서기 1913년을 기원 1년으로 한 연혁(沿革)이다. 소설 속 인류의 삶은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 덕분에 가난, 질병, 불안, 고통, 죄의식, 슬픔 등이 제거되었고, 설령 기분이 우울해지더라도 ‘소마’라는 약을 먹고 금세 쾌활함을 찾을 수 있다. 소설 제목이 가리키듯 지금껏 인간이 꿈꾸어왔던 ‘멋진 신세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멋진 신세계’란 말은 지독한 반어를 담고 있다.

소설 속 인류는 더 이상 어머니의 자궁을 생(生)의 근원으로 삼지 않는다. 유전자 조작으로 100여쌍의 쌍둥이가 공장에서 인공적으로 동시에 부화되고 또 기계적 조작에 의해 양육된다. 유리관 속에서 배양되는 태아는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등 각기 지능과 능력이 다른 5등급으로 분류되어 차등 양육된다. 이렇게 태어난 인간들의 머릿속엔 당연히 아버지나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근원적 고향이 어머니의 자궁이 아니라 인공부화국의 유리관이 되어버렸다. 이들에게 가장 큰 욕은 ‘어머니를 가진 놈’이란 말이다. 태어날 때 인간의 감정과 개성이 처음부터 인위적으로 조작, 조절되고 사랑과 신앙은 철저히 금지된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심리학자 버나드 마르크스는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수정(受精) 당시 인공부화국 직원의 실수로 감수성과 개인적 감정을 지니게 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 존은 소설 속 사회에서 이단(異端)으로 여겨지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백인 남자다. 그는 문명세계와 격리된 야만인 보존지역에서 태어나 ‘멋진 신세계’로 불리는 어머니의 고향 런던을 늘 동경하며 자란다. 그러던 중 버나드가 존을 그의 어머니와 함께 문명세계로 데려온다. 존은 문명세계에 입성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루었지만 인간의 감정이 말살된 ‘멋진 신세계’에 동화되지 못하고 고립된 생활을 자처한다.

어느 날 존은 문명세계를 관장하는 세계 감독관 무스타파 몬드와 각각 ‘원시문명’과 ‘과학문명’의 대변자로서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존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선 인간이 상상력과 예술적 직관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몬드는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는 진리라든지 예술 따위는 필요치 않다고 일축한다. 결국 존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작가는 존을 통해 당대의 과학기술 만능 풍조를 공격하는 한편 ‘생명공학’(물론 이 소설이 쓰일 당시엔 이런 용어가 없었을 테지만)이 야기할 수 있는 전율스런 미래를 예언하고 경고한다. 특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전통적인 자연인이 언젠가는 실험실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대량 생산될 복제인간에게 지배당해 그들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혹은 안락함과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과 편의를 위해 출발한 과학기술의 수준은 어느덧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낼 날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때문에 1932년 책 출간 당시 단순히 한 편의 기발한 공상과학소설로만 받아들여졌을 이 작품은 7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히려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다가온다. 예컨대 서두(書頭)에 묘사되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을 공장에서 맞춤형으로 만들어내는 장면은 당시 컨베이어벨트에서 연속적으로 차를 만들어내던 포드사의 자동차공장을 암시한다. ‘포드시스템’으로 명명되는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공장의 연속공정 시스템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 기계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서글픈 현실을 대변한다.

‘멋진 신세계’속의 극단적 세계는 우리가 진정 옳다고 지향할 수 있는 과학기술사회는 결단코 아니다.(아니 10분의 1이라도 지향할 수 없다.) 그런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파멸케 할 뿐이다. 그렇다고 과학기술 자체를 전부 용도폐기하고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말대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싫든 좋든 단 하루도 과학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다만 모든 것을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만능주의 내지 과학제일주의를 우려하고 경계해야 한다. 헉슬리가 던진 메시지도 이에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미국의 한 미술관에 전시된 인상파 화가 고갱의 작품 밑에 붙어 있는 제목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도외시한 채 지금 우리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를 몰고 ‘멋진 신세계’를 향해 무작정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박경서 영남대 영문학과 강의전담객원교수ㆍ영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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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 그린 ‘반 유토피아 소설’
조지 오웰의 <1984년>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다. ”  (조지 오웰)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의 ‘1984년’은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를 그린 ‘반(反) 유토피아 소설’이자 정치소설이다. 출판 당시(1949년 9월), 이 소설은 영미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급의 정치문서’ ‘또다시 읽고 싶지 않다’는 비난조의 평가를 받기도 했고 ‘우리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현대정치에 이만큼 큰 영향을 준 작품은 없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1984년 4월 4일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1984년’은 시작된다. 1950년 핵전쟁으로 세계는 3개의 초강대국인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로 재편되었는데, 그 중 오세아니아가 이 소설의 중심무대다. 오세아니아는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사고까지 감시하는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억압적 사회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이 개인의 모든 활동영역을 감시하고 도청함으로써 개인성은 파편화되고 해체되어 있다. 당이 만든 가공인물인 ‘빅브라더’가 권력의 정점에 있다.

오세아니아는 개인의 일기조차 죄가 되는 사상적 말살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윈스턴은 일기를 써 반역적 행위를 하고 나아가 당의 전복을 꾀한다. 그러나 그는 불빛 속으로 빠져드는 한 마리 나방의 운명처럼 전체주의의 절대권력 앞에 힘없이 굴복 당한다. 이제 ‘무산자계급의 혁명이 전체주의 당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그의 꿈은 무자비하게 짓밟힌다. 그는 당의 한 요원이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은 비평가들로부터 극단적인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후 세계 3대 ‘반(反) 유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읽어보았다면 두말 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과 그가 이 소설에서 만들어 낸 신조어인 ‘빅브라더’는 저널리즘에서 널리 다루어져 이제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해 친숙함을 느낄 정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1984년’에서 그가 예언하고 있는 다양한 미래 상황이 과연 우리의 눈앞에 언제 그리고 얼마만큼 닥칠 것인가라는 우려와 궁금증 내지는 재미(?)가 서로 맞물려 강한 시사성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이 어떤 작품이며 또 어떤 문학적·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도 오웰과 ‘1984년’을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84년’의 반(反) 유토피아

이 소설의 문학적 이해의 잣대가 되는 ‘반 유토피아(anti-utopia)’라는 용어는 ‘유토피아’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유토피아’의 기원은 1516년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라는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공상의 섬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u’와 ‘장소’라는 뜻의 ‘topos’가 결합된 복합어다. 결국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가 인간의 고귀한 꿈이 실현되는 지고의 선과 행복이 존재하는 이상향이라 한다면 ‘반 유토피아’는 그 반대로 예견되는 최악의 미래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유토피아 문학’의 메시지는 희망과 자신감이 되고 ‘반 유토피아 문학’에서는 현대인의 절망감과 무력감이 드러난다. 오웰의 반 유토피아는 당대 전체주의 체제의 폭력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문학장치이다. 

■ ‘1984년’의 운명적 탄생

오웰이 이 소설을 철저히 ‘반 유토피아’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물론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결코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작가에 의해 경험된 것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비록 그 초고가 1947년에 완성되었지만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반 유토피아적 분위기는 20세기 전반기 미증유(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음)의 격동의 시대 전체를 반영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보낸 제국주의경찰 생활, 파리와 런던에서 체험한 극빈자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 등을 통해 오웰은 대영제국주의의 허구성, 자본주의의 모순, 전체주의 특히 스탈린주의의 실체를 깨닫게 된 바 그의 정치문학관은 만년으로 갈수록 더욱 비관주의에 빠져든다. 이제 그가 예견해 볼 수 있는 미래사회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소설 속 ‘오세아니아’와 같은 절망적 사회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있어 ‘1984년’의 탄생과 그 내용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 ‘1984년’의 현재성

‘1984년’을 흔히 스탈린주의가 중심이 된 전체주의만을 다룬 것으로 착각하는 독자가 있다. 거꾸로 스탈린이 죽은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 소설 속의 상황은 거짓이며, 더 이상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고 위안한다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우선 오세아니아에 속해있는 ‘에어스트립 원’은 영국을 가리키며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도시도 ‘런던’이다. 거기엔 초고층건물이 많고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이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국가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사회는 정치적으로 전체주의 국가인 동시에 고도의 기술적 전체주의 국가다. 즉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미래의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上程)시켜 놓은 반 유토피아적 세계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당대의 정치적 전체주의하의 인간의 운명과 인간성 말살을 그린 것인 동시에 인간이 물품화되어 기계처럼 정형화된 고도의 관리 산업사회시대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넓게는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각종 테러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고 좁게는 폐쇄회로, 도청, 감청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1974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 탄핵을 모면하기 위해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개인의 정보를 입수했을 때 이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고도의 사생활 보호안을 만들어 발표한 적도 있다. 그리고 작년, 시끄러웠던 안기부 X파일 사건 같은 것은 바로 현대판 ‘빅브라더’가 저지른 결과물인 셈이다. 이런 것은 일찍이 오웰이 예견하고 우려했던 것이 아닌가.

‘1984년’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정치적 풍자도, 무의식적 심리상태의 증언도 아니다. 이 작품은 혼돈의 역사 속에 흐느적거리고 있는 현대인을 깨우치고자 한 작가의 고뇌에 찬 산물이다. 작가는 윈스턴의 희망처럼 인간적인 인간으로 대변되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사회로의 복원을 촉구하고 있다.

박경서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강의전담객원교수·‘1984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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