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인류문명을 엔트로피의 관점에서 비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1943~ )의 1980년 저작 ‘엔트로피: 새로운 세계관(Entropy: A New World View)’에 관해 말하려면 ‘엔트로피’라는 말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열역학이라는 학문에서 말하는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의 총량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그리고 제2법칙이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간단히 말하면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하기만 한다’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만, 또한 질서화된 것으로부터 무질서화된 것으로만 변화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에너지를 새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에너지를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한 에너지를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시킬 때 에너지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감소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손대지 않은 상태 그대로의 자연자원을 개발하여 그것을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시킨 경우, 엔트로피가 무척 증가한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증가한 엔트로피는 다시 감소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자연자원인 석유를 가공한 휘발유를 연료로 해서 움직인다. 일단 자동차를 움직이는 데 사용된 원유를 원래 상태 그대로 회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환경오염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가 된다. 수력이나 풍력 등의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상대적으로 적다. 바꾸어 말하면 얼마든지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가깝다. 하지만 휘발유, 석탄 등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대부분의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무척 높은 것들이다. 더구나 엔트로피가 높은 에너지는 사용되고 나서 많은 양의 오염 물질 또는 쓰레기를 남긴다.

물론 이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 그러니까 에너지원이 무한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자연자원은 언젠가는 고갈된다. 갈수록 줄어드는 자연자원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점점 더 늘어난다. 더구나 자연자원을 변화시켜, 그러니까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사용한 뒤 남는 오염물질과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늘어만 간다. 자동차가 배출하는 일산화탄소, 아황산가스, 탄화수소 등의 물질을 자동차 엔진을 돌리는 데 사용하는 휘발유로 회복시킬 수는 없다. 그런 배기가스는 우리의 눈을 쓰리게 만들고, 폐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비행기의 제트엔진에서 나오는 질소화합물, 냉각장치와 냉동공장에서 나오는 프레온가스 등은 오존층을 파괴하여 인류를 위협한다. 더구나 매연은 산성비가 되어 내리고,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통해 극지의 얼음을 녹여 해수면 상승이라는 위협을 가한다. 이러한 환경오염의 위기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엔트로피 증가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문명의 발전은 자연자원의 개발과 이용, 그러니까 엔트로피의 증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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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양자역학이 나오기까지의 고민과 토론 보여줘

20세기 초 인류 지성사에 큰 획을 긋는 물리학의 대혁명이 일어났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출현이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이론이었고, 양자역학은 원자, 전자 등 미시세계의 신비를 밝힌 것으로 오늘날의 반도체, 컴퓨터 등 IT기술의 밑바탕을 마련한 기념비적 위업이었다.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 한 사람의 깊은 사고에 바탕하여 이루어진 개인작품인 반면에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보어,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이룩해 낸 공동작업의 소산이었다.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는 이 연구의 핵심인물이었던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이란 학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대석학과 나누었던 대화를 중심으로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고민, 발견의 상황과 그 후 학문의 전개과정을 정리한 회상록이다. 이 책은 딱딱한 물리학의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열정과 고뇌, 열띤 토론, 그리고 예술과 철학, 여행과 친교, 정치적 혼란과 전쟁, 대과학자가 부딪혀야 할 시련과 고뇌가 실감나게 잘 묘사되어 있다. 물리학은 ‘기계적인 공식의 집합’이 아니라 숨쉬는 인간의 사회와 문화의 일부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과학저술 중 대표적 명저로 자리잡고 있다.

베르너 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는 1901년 남부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뮌헨 대학의 비잔틴문학 교수였다. 그는 1925년에 젊은 대학생으로서 양자역학의 기본 방정식을 만들어냈으며, 이어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한 대단한 천재였다. 1927년에 불과 26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3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58년엔 뮌헨의 막스플랑크 연구소장을 맡았고, 197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과학자로서 탁월했을 뿐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대중강연과 책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피아니스트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듯이 ‘전자가 핵의 주위를 궤도를 따라 돌고 있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가 원자의 연구에 들어섰을 때의 과학적 물질관이었다. 이러한 개념으로는 원자의 성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상황이었다. ‘부분과 전체’의 제5장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에는 당시 연구자들의 노력과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찾아내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원자물리학도 이와 비슷했다. 1924년에서 1925년에 이르는 겨울학기에는 앞날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다. 1924년 7월 이후 코펜하겐에서 강사로 있던 나는 1925년 여름학기에 다시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선의 강도에 대한 공식을 세우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시도로부터 나는 ‘원자 안에서는 절대로 전자의 궤도를 문제 삼아서는 안되며 친구 오토가 발렌호로 가는 자전거여행 도중에 아인슈타인의 견해를 대변해서 주장하였던 그 철학대로, ‘관찰할 수 있는 양만을 원자의 결정요소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에너지의 표를 계산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최초의 1항으로서 에너지의 법칙이 확증되었을 때 나는 일종의 흥분상태에 빠져서 다음 계산이 자꾸만 틀리곤 하였다. 그 계산의 최종 결과가 나온 것은 새벽 3시가 가까워서였고, 그래서 나는 수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완전한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본문 중에서 발췌 인용) 

소광섭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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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사랑의 원리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비판

사랑은 삶에 있어 가장 매력적인 소재다. 주변에 광고, 영화, 드라마 등은 온통 사랑으로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여기에 질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랑만큼 기대는 큰데 성과는 늘 성에 차지 않는 것도 드물다.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불행을 달고 다니는 이들도 많고, 사랑에 대한 환상 탓에 주제 파악 못 하고 헤매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작업 기술’의 부족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의 저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1900~1980)은 보다 본질적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정신분석학자답게 그는 사랑의 작동원리부터 분석한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첨단으로 치닫던 20세기를 보낸 사회심리학자의 분석답게 프롬의 주장은 시대와 문명에 대한 비판과 맥이 닿아 있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게 될까? 이유는 간단하다. 외롭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세상은 무섭고 버겁다. 고단한 인생 길에서 진정 나를 이해하고 함께 해줄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절실한 갈망은 미숙한 사람들을 ‘사이비 사랑’으로 이끌곤 한다. 프롬은 마조히즘(masochism)과 사디즘(sadism)을 예로 든다. 마조히즘은 자기 스스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도구가 되어줌으로써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적어도 자기가 숭배하는 인물에게 자신을 내던진 순간만큼은 그와 강렬한 일체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사디즘도 비슷하다. 사디즘은 자신의 힘 앞에서 공포에 질리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태도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기괴한 변태가 아니라 우리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변질된 사랑의 형태다. “당(黨)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말처럼, 우리 주변에는 권위에 기대어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조히스트들이 많다. 사디즘도 그렇다. 학벌이나 돈으로 환심을 사려 하고, 미모로 환심을 사려 하는 사람도 사디스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사랑은 결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프롬은 진정한 사랑이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는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면서 동시에 상대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행복해지려면 먼저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부터 키우라”고 충고한다. 내가 필요해서 상대를 사랑하는 상태는 성숙하지 못한 정신의 응석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내가 사랑하기에 그대가 필요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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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주술과 과학은 대립하지 않고 병행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프랑스의 인류학자 루시앙 레비 브륄(1857~1939)은 1910년에 출간한 저서 ‘미개인의 사고’에서 “미개인과 근대인의 정신세계와 심적 상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개인은 ‘논리 이전(pre-logic)’의 사고방식과 느낌을 지닌 사람이다. 미개인은 집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개별적인 심상들을 객관적·논리적으로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으며 논리 이전의 신비적인 관계를 통해 생각한다. 레비 브륄에 따른다면 미개와 문명은 질적으로 다르며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난 레비 스트로스는 1927~1932년 파리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중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5년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사회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브라질에서 원주민과 접촉하며 그들의 풍속, 언어, 관념, 가족제도 등을 폭넓게 조사·연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한 뒤 1950~1974년 파리대학 민족학 연구소장을 지냈고 195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 학술계 최고의 명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기도 하다.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 부족민과 접촉하면서, 비록 나무뿌리나 거미 또는 유충을 잡아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현대의 서양인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만족스럽게 부족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걸 알게 됐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문명인의 사고와 미개인의 사고는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과 관심의 주된 영역이 다를 뿐,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요컨대 미개인과 문명인의 사고방식은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의 다른 방식 혹은 태도일 뿐이다.

레비 브륄이 말한 ‘미개인의 사고’가 논리 이전의 사고라면,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La Pensee sauvage·1962)’는 이른바 미개인의 사고가 근대인 혹은 문명인 못지 않게 질서와 체계에 민감한 나름의 논리적·과학적 사고방식임을 주장한다. 근대인은 과학을 통해 자연현상의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에서 과학적 법칙을 찾는다. 때문에 근대인의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원인에 의해 결과가 결정되는 인과론적(因果論的) 결정론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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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자유주의 안에서 평등의 요구를 통합
존 롤스의 ‘정의론’
 
정의, 특히 분배적 정의 개념의 현대적 해석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단일주제의 철학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평생 한 우물만 팠던 사람이 세기의 정의론자 존 롤스(John Rawls)다. 1971년 출간된 그의 필생의 대작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은 당대 영·미는 물론 유럽 대륙 전역에, 그것도 철학계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계 전반에 걸쳐 큰 획을 그은 금세기 최고의 철학적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롤스의 정의론이 던진 파문은 단지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잡지와 신문들이 경쟁하듯 서평과 특집을 싣는 등 파격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롤스의 정의론은 그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회복지의 극대화를 내세우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비판하며 그 대항이론으로서 제시되었다. 공리주의는 모든 정책 대안 가운데 그 각각이 가져올 이득을 합산하고 생겨날 비용은 제외함으로써 순수이득을 최대로 할 대안을 선택해서 정책으로 구현하게 하는 유용하고 간명한 이론이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도모하라’는 공리주의는, 이를 명분으로 소수자의 권익은 물론 개인의 권리를 유린할 수 있는 전체주의적 함축을 갖기도 한 이론이었다.

롤스는 그의 정의론에서 “각각의 사람은 사회 전체의 복지로서도 유린할 수 없는 바, 정의에 바탕을 둔 불가침성(inviolability)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에 있어서는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 맡겨질 수도 없다”고 선언하며 공리주의를 비판적으로 겨냥하고 나선다.

롤스의 정의론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공리주의에 대항해서 정의에 의거한 개인권(individual rights)을 수호하고자 한 정의 원칙의 실질적 내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이 같은 정의원칙을 도출하기 위한 방법론적 논의로서 계약론과 관련되어 있다. 결국 롤스는 공리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공리주의와 대립적 전통을 이루면서도 그만큼 발전을 보지 못한 자연권 이론의 바탕이 된 계약이론(contract theory)을 더욱 일반적인 논변형식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최근 경제학의 성과인 합리적 의사결정이론을 끌어들였다.  

롤스의 ‘정의론’이 갖는 실질적 내용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유래된 가장 특징적인 변화로서 자유주의적 이론체계 속에 사회주의적 요구를 통합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롤스가 내세운 정의의 두 원칙 중 첫 번째는 평등한 자유(equal liberties)의 원칙이다. 이는 사상, 양심, 언론, 집회의 자유, 보통선거의 자유, 공직 및 개인 재산을 소지할 자유 등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우선적 중요성을 두고 있다.  

황경식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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