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6일 아침 7시 나는 서울 플라자 호텔 22층에서 열린 오세훈 시장 초청 조찬 강연회에 참석했다. [21세기 여성리더스포럼](2007.9 출범)과 [바른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2006년 출범)이 공동으로 주최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주력은 40대~60대 이공계 출신 교수, 연구원, 변리사 등이다. 나는 월 회비 5천원을 내는 [과실연] 회원이다보니 안내 메일을 보고 이 행사를 알게 되었다.

마침 강연 제목이 [서울을 디자인하라!] 아닌가!! 그것도 오세훈 시장이 직접 나서서 재임 기간 동안 업적과 향후 계획 및 포부를 발표 한다는 게 아닌가!! 탁상에서 구상은 하지만 실행은 한 번도 못해 본 사회디자이너(나)로서, 실제 하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 더 크게 할지도 모르는 사회디자이너(오세훈)에게서 한 수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디자인의 주된 관심은 정치가 필요로 하는 컨텐츠 생산이기에 국가 개조를 위한 가치, 비전, 전략(법, 제도, 정책)과 더불어 국토, 도시, 마을의 공간 디자인(도시계획)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좀체 초청강연에 응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오세훈 시장이 직접 나서는 것을 보니 2010년 서울시장 선거와 결코 무관하지 않는 행보로 느껴졌다. 사회디자인이 성공하는 정치를 위해 존재 하는 이상 선거와도 결코 무관할 수가 없다. 물론 선거 컨설팅 회사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정치인이 정치를 하는 근본 이유를 다루지만...... 더불어서 나는 오세훈이 이룬 무수히 많은 업적(?)과 포부/계획 중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지 궁금했다. 이는 그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강변을 매일 아침 자전거로 출퇴근 하면서 온통 파헤쳐 놓은 반포대교 주변 공사 현장을 지나치다 보니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와 서울 디자인 컨셉도 궁금했다. 이 모든 것들은 곧 한나라당과 오세훈의 사고방식, 선거 전략, 강.약점 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정말 명색이 사회디자인연구소장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모처럼 정장을 차려 입고 이른 아침에 플라자 호텔로 갔다.


연회장에는 원탁 테이블이 10개쯤 준비되었는데, 각 테이블 마다 대략 6~7명이 앉았기에 참석자는 60~70명 선이었을 것이다. 21세기 여성리더스포럼이 주최한 탓인지 참석자의 1/3이상이 50대 전후 여성(주로 이공계 교수)들이었다.


오세훈 시장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7시30분 경부터 오세훈 시장의 프리젠테이션(PT)이 있었다. 파워포인트(PPT)를 빔 프로젝트로 띄워놓고, 와이샤쓰 차림으로 단상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1시간 가량의 PT를 했다. PT 내용은 자신의 2년간의 치적과 향후 계획이었다. 그는 민선 4기의 20대 핵심 과제를 얘기했다.


이는 5대 핵심 프로젝트와 15대 중점 사업으로 나뉘는데,5대 핵심 프로젝트는 1) 경제문화도시 마케팅 프로젝트(서울 도심을
IT와 문화를 결합하여 경제. 관광의 중심지로 부활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2) 도시 균형발전 프로젝트 3)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 4) 시민행복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어르신, 장애인, 여성, 아동 청소년 관련 사업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5) 맑고 푸른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이다. 15대 중점사업에는 동대문 일대를 세계 디자인 패션 중심지로 개발하는 일, 마곡지구와 상암 DMC를 미래첨단산업 단지로 개발하는 일, 유비쿼터스 행정, 치매노인 예방, 치료, 보호를 제공하는 종합 복지 서비스 등이 주요하게 포함되어 있다. 

모든 문구들은 ‘…하겠습니다’식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선거 홍보물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2006년의 선거 공약인지, 2010년의 선거 공약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사진, 조감도가 수백 컷 소개되고, 동영상도 있었고, 오세훈의 실적을 높이 평가하는 TV 보도화면과 신문기사 스크랩(화면)도 있었다. 서울시장들이 10~20년간에 걸쳐 대를 이어 추진할 프로젝트도 있었다.
종묘에서 멈춘 숲(녹색 벨트)을 남산과 연결시키는 구상이 그것이었다. 그러려면 세운상가와 퇴계로 일대를 녹색 공원으로 만드는 어마어마한 개발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한다. 이런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수 십장의 생생한 도시 개발 프로젝트 조감도는 그 자체가 ‘손에 잡힐 것 같아 가슴을 뛰게 하는’ 비전 그 자체였다. 누가 들어도 ‘서울이 참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을 만 했다. 그런데 오세훈의 PT에는 건설회사 사장이 할 법한 PT(물론 나는 이를 들어 본 적은 없다)와는 다른 깊이가 있었다. 그것은 1993년부터 환경운동을 해 왔고, 환경, 여성, 가족을 대표 상품으로 팔고 있는 정치인의 철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베이징, 상하이, 동경 같은 인접한 거대 도시와 경쟁에서 어떻게 앞서 나갈 것인가 하는 정치가, 행정가로서의 고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세훈의 강연은 고저 강약 없이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이것만으로도 여성들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거대한 서울시를 경영해 본 사람에게서 대개 있기 마련인 참신한 얘기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격정도 없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도 없었다. 이 점이 풍운아 내지 혁명아로 살아 온 노무현, 유시민의 강연과는 다른 점이 아닐까 한다. 서울 시정 구상이나 서울 도시 디자인 컨셉의 대부분은 7~8년 전부터 삼성경제연구소나 조선.중앙의 기획.특집 기사에서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듣던 얘기였다. 전반적으로 삼성경제연구소의 지적 영향력이 뚜렷이 느껴졌다. 메모를 좋아하는 내가 메모 하고 싶은 내용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참신함에 관심이 많은 내 학자적 취향일 뿐이다. 대중의 눈으로 보면 오세훈의 PT는 매우 참신하고, 깊이 있고, 균형이 잘 잡힌 얘기로 느껴질 것 같았다. 이는 강연이 끝난 후 참석자들로부터 소감과 질의응답을 받을 때 확인 되었다. 속된 말로 50~60대 이공계 여성 교수들을 ‘뿅’가게 하였다. 질의응답 과정에서 대부분 여성 참석자들이 피력한 소감을 모아 보면 이렇다.


‘(오세훈 시장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강남 안가고 종로에 살 길 잘했다. 말 잘해서 기죽는다. 여성적이고 섬세한 지도자인 것 같다. 꿈을 갖게 한다. 내가 젊었을 때 (진작) 이 일을 하시지. 서울에서 더 오래 살고 싶어진다’

오세훈은 강연을 통해 이공계 여성 교수들 몇 십 명쯤은 ‘오세훈 빠’로 챙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오세훈의 탁월한 선택

오세훈은 강연 시작하면서 청중들 대부분이 이공계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고등학교 때 수학을 아주 못했다고 실토하면서, 수학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면서 청중들을 띄워주었다. ‘그래도 수학이 당락을 좌우하던 본고사 시절 고대 법대에 입학했는데 무슨 겸손인가’ 했는데, 알아보니 1979년 대일고를 졸업하고 고대 영문과를 지원했는데 본고사에서 떨어지고, 후기인 외국어대에 들어갔다가, 1980년에 편입학으로 고대 법대에 들어왔다. 여기에는 고등학교 시절 과외를 같이 하다가 1979년에 고대에 바로 붙은 현재의 부인과 당시 고대 수학과 교수였던 장모의 음덕이 느껴졌다.

내친 김에 경력을 좀 더 알아보니 대학 다닐 때는 닭살 커플이었고, 재학 중에는 사법고시에 전념했다. 그래서 고대 법대 79학번 중에 오세훈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1983년에 고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는 1984년에 붙었고, 1985년에 결혼했다. 정말 386과는 확실히 다른 인생이었다. 사법연수원에서는 시험당일 토사곽란으로 인해 과락이 발생하여 남들이 2년 다니는 연수원을 3년을 다녔다. 당연히 판검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되었고, 1991년쯤 법률사무소를 개업하였다. 나눠준 자료집에는 오세훈 시장 경력에 1996~2000년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이 표시 되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괄호를 쳐 놓고 (1993년 2월13일 시민법률상담실장으로 활동함)이 표기되어 있었다. 변호사 직위를 이용하여 환경운동연합에 이름만 걸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1997~2004년에는 민변 환경위원을 했다. 1998.1.1~ 1998.12.31에는 미국 예일대 로스쿨에서 (박사학위 논문 작성 차)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로 있었고, 1999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총선 당시 원희룡 등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 공천을 타진했는데 당 지도부가 미적거리는 통에 한나라당이 잽싸게 낚아챘다는 후문이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어쨌든 2000년 당시 소문으로 떠도는 공천 과정이나 2006년 강금실의 대항마로 오세훈이 부상하는 과정을 보면 한나라당의 기민함과 역동성 하나는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오세훈이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에 있었다면 결코 오늘날처럼 대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 이력부터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사법고시 하느라 들어 앉아있었고, 이후에도
‘경제정의’처럼 재벌과 각이 서는 Agenda가 아니라, ‘환경’이나 만지작 거리고, 철인3종 경기를 할 정도의 부자 풍류남(?)이라는 한계도 한계지만, 결정적으로는 당 지도부도 동료들도 오세훈의 가치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세훈의 탁월한 선택 중에 하나가 2000년에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과 2004년의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2004년의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인 국회의원 재선을 버린 것은 그 어떤 386 정치인도 감히 하지 못한 매력적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디자인, 매력, 고객가치

오세훈은 문화, 디자인, 매력, 고객감동(고객가치)를 특별히 강조했다. 문화는 정치인, 기업인 할 것 없이 누구나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에 새로울 것이 없다. 디자인과 고객감동, 고객가치는 기업인들과 샐러리맨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지만 정치인들은 이를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력은 여성들이 많이 쓰는 단어다.

나는 오세훈이 내세우는 서울비전이 [맑고 매력있는 세계도시]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시정방향은 [경제도시, 문화도시, 복지도시, 환경도시, 시민도시]고 핵심전략은 [고객감동을 위한 고품질 행정서비스] [브랜드 가치 창출을 위한 도시마케팅] [창의와 변화를 위한 새로운 조직문화] 였다. 시정기반(가치중심행정)은 [고객가치, 경제사회가치, 직원가치] 였다. 핵심 전략과 시정기반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많은 기업들, 특히 기업 서비스 조직들이 주로 채택하는 전략 일 것이다.

오세훈은 이 시대는 시(詩)와 여성의 시대, 우뇌의 시대, 감성의 시대, 디자인의 시대, 하이터치의 시대라고 했다. 과거는 좌뇌의 시대, 논리/이성의 시대, 지식기반 시대, 하이테크의 시대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본일 뿐이라고 했다. 2백원 짜리 자판기 커피와 4~5천 원짜리 스타벅스를 커피를 비교하면서 문화와 감성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주로 좌뇌를 사용하는 사람 축에 속하는 내 눈으로 보니, 오세훈 시장은 특별히 우뇌가 발달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와 정반대의 불균형이 느껴졌다. 오세훈의 강. 약점을 알 것 같았다.

오세훈의 청계천은?

오세훈의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을 증강시키는 요소는 강연 중에 수두룩 쏟아져 나왔다. 이를테면, 서울시장 재임 이후 수백 차례의 인터뷰를 했는데, 항상 받는 질문이 ‘당신의 청계천(대표 치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란다. 오세훈 시장은 ‘창의시정’ 혹은 ‘공무원 체질개선’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반포대교(잠수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나 동대문/용산 개발 프로젝트 등 토목건축 사업을 떠올린다.

국회의원 시절에 자신이 주도적으로 발의한 법 중에서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법도 일명 ‘오세훈 법’(정치자금 관련 법)이 아니라 ‘수도권 대기환경에 관한 특별법’이라고 하였다. 디젤 버스가 천연가스 버스로 대체되고, 365일 내내 도로 물청소를 하는 것이 그와 관련이 있었다. 1993년부터 환경운동에 관여해 온 이력과 앞뒤가 맞기에 진정성이 느껴지고 매력이 더해졌다.

‘창의시정/공무원 체질개선’은
기업에서는 보편화된 인사관리 기법을 서울 시정에 적용한 것이다. 사실 그 동안 공무원 사회의 경우 신분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승진을 하지 않고 대충 게기다가 정년퇴직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백약이 무효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오세훈은 인력시장 방식과 인사대상자의 확대, 다면평가, 잦은 평가(월1회 하다가 요즈음은 3개월에 1회 한다고 한다) 등을 결합하면서 동시에 3% 퇴출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동안 서울시 공무원의 경우 일단 승진을 하면, 몇 년 간의 실적(근무평정 등)은 승진 고과에 반영되지 않으니 대충 몇 년간 놀다가, 승진 심사 대상자가 되는 3년 동안은 일이 많고 승진도 잘되는 부서로 가서 빡 세게 일해서 고과를 잘 받은 후 승진을 하고 또 몇 년간 노는 것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세훈은 승진 인사 대상자를 부서에 발령받아 2년 이상 된 사람 전원(서울시 공무원 1만 명 중 4천명)으로 확대하였다. 그래서 9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는데 전에는 29년 걸렸는데, 지금은 10년도 안 걸리게 만들었다. 또 내부 인력시장 방식을 도입하였다. 4천명을 인력시장에 내놓고, 프로젝트 책임자가 스카우트 해 가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3차례를 하니 끝끝내 남는 사람이 300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든 부서에서 없느니만 못한 사람으로 판정을 받은, 아래 내지 중간층으로부터 선정되어 올라 온 퇴출 예비 후보들이다. 이들 중 2006년에는 102명, 2007년에는 88명을 ‘현장 시정단’으로 내려 보냈는데 이들 중 절반 정도가 사표를 썼다고 하였다.

오세훈은 강연에서 서울시 보증재단 업무 혁신을 자부하였다. 공무원이 갑이라면, 영세 상인(민원인)들이 보증을 서 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야 하는 보증재단 공무원은 갑 중의 갑이다. 그런데 오세훈 시장은 민원인들이 감동 할 정도로 친절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오세훈은 자잘한 민원을 원 스톱으로 처리하는 120 서비스(아파트 입구, 지하철 벽면마다 120서비스 시행을 알리는 포스트가 붙어있다)도 자부하였다. 민원인들은 첫 통화에서 필요한 정보의 80%를 얻는다고 하였다. 첫 통화에서 답변을 하지 못하는 사항은 잘 알만한 부서/사람을 찾아서 정확하게 연결해 준다고 하였다. 더불어 최근 들어 유달리 많아진 지하철에 있는 시(詩)도 오세훈의 시정의 일환 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중산층과 여성들로부터 정치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각 부서가 추진한 업무혁신(고객 감동) 사례는 각종 보고대회(창의실행 보고회의 등)를 통해 월 3개 이상 보고된다고 한다. (이 중에는 이명박 전 시장, 노무현 전 대통령, 참여정부 행정자치부 장관 등이 기조를 잡았지만,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의 지자체가 실시하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오세훈은 질의 응답 과정에서 서울시 소득(GRDP) 향상의 목표와 전망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많은 시장들이 이명박의 747처럼 소득 몇 만 불을 공약으로 내세우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숫자로 표시되는 국민소득으로 시정이나 국정 성과를 측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존경 받는 국가/기업/개인이 되면 돈이 따라온다는 꽤 재치 있고 매력 있는 답변을 하였다.

또한 1998년 예일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미국에 1년간 체류했을 때 얘기를 했다.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논문만 쓰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미국 사회의 배려로 인해 하루하루가 감동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미국이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A B C 밖에 모르는 애들을 교사들이 개인 과외 지도를 해서 전과목 A로 만들어 주었고, 애들 엄마도 어학 학습을 시켜주었다고 했다. 여기에 자극 받아 오세훈은 재임 중 외국인을 위한 서울시 글로벌센터를 만들고, 외국인 통장제도 만들고, 외국인이 많이 체류하는 곳의 표지판도 그 나라 언어로 바꾸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경기도는 규제완화에만 주력한다면서 은근히 김문수 지사와 차별화 하였다. 오세훈은 세계도시가 되려면 (김문수 지사가 주장하는) 규제완화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 특히 교육 경쟁력과 의료, 문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촛불시위도 잠깐 언급했는데 표현은 ‘올 봄의 가슴 아픈 사태…한참 발전할 시기에 터진 가슴 아픈 사태’라는 식으로 촛불 시위대도 정부도 자극하는 발언은 피했다. 얘기를 1시간을 들었지만 조선일보와 정반대의 악의를 가진 진보 언론의 기자가 참석해서 발언을 거두절미해도 자극적인 기사를 뽑아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운 재주였다.

오세훈의 정치적 매력의 원천

강연을 죽 들어보니 오세훈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 강남 중산층, 지식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 패기 있고 유능한 회사원들, 청년층의 정서와 코드를 꽤 정확하게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중심에는 기업에서 보편화된 컨셉, 즉 고객 중시, 고객 친화, 고객 감동, 경쟁, 성과주의, 유연성, 합리적 상벌, 다면평가, 극소수 퇴출 카드 등이 자리하고 있다. 기업에서는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컨셉이지만 한국 진보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국 진보가 이런 컨셉을 계속 터부시 한다면 오세훈과 보수는 이것을 독점하면서 자신들의 강력한 매력 포인트로 삼을 것이다.

일부 공무원을 퇴출시키는 일은 역대 대통령과 시장들이 시행하지 않았을 리 없다. 사실 역대 최대 규모의 공무원 퇴출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했다. 박정희는 전체 공무원의 10%를 잘랐고, 전두환도 국보위 시절에 5,044명을 숙정이라는 이름으로 잘랐다. (참여정부는 역대 정부 중 공무원 인력 감축을 공언하지 않는 최초의 정부일 것이다)

그런데 공무원 퇴출을 비교적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시하여,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공무원의 ‘군기’를 확실히 잡은 것은 오세훈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이 역시 오세훈이 가진 정치적 힘과 매력의 하나 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 중에 오세훈이 적용한, 기업적 방식을 터부시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적으로 과연 전교조와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이 오세훈 방식을 받을 수 있을까? 절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의원에서부터 한나라당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의원들까지 다양한 성향의 의원들이 있는 현 민주당은 노송(老松)처럼 오래 됐다는 것 외에 뭐 하나 선명한 칼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참여정부는 공무원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두터운데다가 분권/자율, 대화/타협을 숭상해서인지, 조중동의 무조건적인 흠집내기 탓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초기에 국정책임자가 세게 밀어붙여야 하고 불협화음도 크게 날 수 밖에 없는 이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정연주 쫒아내기, 공기업 인사, 종부세 폐지 시도, 인천공항 매각 시도 등에서 보듯이 도무지 상도의를 모르는 양아치, 도적 집단적 일면도 있지만, 정책에 있어서 터부는 없다. 박정희의 고교평준화 정책과 경제개발방식,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의 재벌 규제및 부동산 불로소득 방지 정책에서 보듯이 필요하면 좌파적 정책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그런데 한국의 자칭 진보에게는 ‘시장, 경쟁, 효율성’에 대한 터부가 있다. 이를 보수적, 우파적 가치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교조, 민노당/진보신당, 한겨레신문 등은 이명박의 교육 정책을 ‘경쟁 교육’이라고 통칭한다. 그 대척점에 ‘참교육, 인간화 교육’을 내세웠는데 최근들어 ‘평등교육’ ‘협동교육’으로 통칭되는 핀란드 교육 방식을 내세운다. 그런데 교사(공급자)의 학생, 학부모(소비자)에 대한 권력은 확실히 강화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같이 공부하는 동료가 경쟁자가 되도록 하여 협동 교육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며, 사교육이 훨씬 더 잘 먹히는 현행 내신제도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그저 경쟁이 너무 과도하며, 학교가 입시위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 칠 뿐이다. 또한 한국의 모든 과열 경쟁의 원천인, 제대로 된 일자리의 절대 부족과 이들이 누리는 한국 생산력 수준에 비추어 너무 높은 처우와 기득권자 위주의 불합리한 평가보상체계와 비기득권자(실업자,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청년세대, 자격증 미소지자 등)에 대한 과도한 배제와 차별은 거론하지 않는다. 한국의 초.중.고의 임시교사와 정규 교사, 대학의 시간강사와 전임교수의 너무나 크고 불합리한 격차도 오로지 학생/학부모/정부가 돈을 더 많이 내서 해결해 달라고 얘기할 뿐이다.

결국 한국의 자칭 진보는 시장, 경쟁, 효율, 자율의 그늘을 격렬히 성토하지만 실제로는 구부러진 동전을 볼록한 면은 그대로 두고 오목한 면만 피려고 하는 격이라서 정책적으로는 무능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득권자가 된 공공부문 종사자(공무원, 공기업직원)와 조직노동의 고용안정과 이들의 현장(기업, 학교 등)에서의 지배권 강화에는 유능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한국 보수가 소수 특권층의 이해관계를 과잉 대변한다면 한국 진보는 공공부문과 조직 노동의 이해관계를 과잉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객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해결 방안이 학교 차원에서는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과열 경쟁을 시비하기 전에 우선 내실 있는 방과후 학교 등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가정 형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뒤처진 학생들을 공교육 체계가 커버하도록 할 것이다. 방과후 학교 강사에 관한 한 교사 자격증 유무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잘 가르치기만 한다면 학원 강사의 출입도 환영할 것이다. 학교에 학원적 요소(수준별 수업, 자유로운 강사 선택권, 맞춤형 교육 등)를 많이 도입할 것이다. 교사들 간 (교장에 아부하기가 아니라 잘 가르치기) 경쟁을 촉진시킬 것이다. 성과급제와 3% 퇴출제를 도입하고, 평가보상체계를 합리화하여 교장 조기 승진제나 (유능한 회사원과 경영자들이 지원가능한) 공모제도 도입할 것이다. 동시에 선진국에는 보편화된 학교 간 경쟁을 촉진시키고, 필요시 학교 자체를 퇴출시키는 제도를 도입할 것이다. 교사, 공무원, 공기업 등 고용이 안정된 직종에 대해서는 임금이라도 동결하고, 재정적 여력으로 교사들을 많이 채용하여 교사 1인당 학생수를 선진국 수준으로 줄 일 것이다. 한마디로 학교 차원에서는 해결책이 없는 경쟁의 강도를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기회 균등, 출발선의 평등, 경쟁 방식의 공정함을 추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어 교육은 강화하되, 부모의 배경(해외유학, 해외주재, 조기유학)에 압도적으로 좌우되는 영어 성적의 입시 반영 비중은 낮출 것이다.

오세훈은 앞에서 언급한 과열 경쟁을 낳는 한국의 독특한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없다. 하지만 대중들의 절실한 요구(고객가치)가 무엇인지, 현실 가능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대중의 눈으로 보면 오세훈이 진보이고, 개혁이다. 자칭 진보는 보수이고, 반개혁이고, 무능이다. 따라서 오세훈을 보면, 지난 대선, 총선 결과가 설명이 된다. 또한 이명박에 대한 급격한 민심이반 현상도 설명된다. 이 와중에도 한나라당 지지율이 30~40%를 유지하고, 오세훈은 서울시민의 5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것은 이들이 이명박보다는 대중과 눈을 잘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간이 가면 오세훈은 이명박은 말 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과도 차별화 할 것이다. 그래 봤자 탈당은 안하겠지만…….

1980년대 그 폭정의 시대를 고시원에서 그냥 지나치고 이후에도 ‘환경’을 움켜쥔 오세훈의 삶의 궤적으로 보나, 지금 중시하는 가치(환경, 문화 등)로 보나, 지금 편식하는 (삼성경제연구소 류가 생산한) 지식, 정보로 볼 때, 오세훈은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서울시장으로서는 성공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대통령으로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강고한 모순과 부조리 구조를 혁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세훈은 대부분의 386 정치인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라는 유령과 싸우며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고, 한국사회의 독특한 토대를 직시하지 않고 즉자적으로 유럽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고, 미국의 합리적 핵심 수입에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열망과 현실 감각을 편견 없이 예민하게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국회의원 배지 앞에서 오세훈 같은 의연함도 없고, 새로운 영웅 탄생의 조건이 무르익은 2006년~2008년의 진보의 대분열 시기, 그야말로 난세(亂世)에서 자신의 깃발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세훈은 한나라당과 변호사라는 브랜드를 뒤로 감춰도 정치적 매력 포인트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나는 오세훈을 보고 2개의 절망을 느낀 것이다.

하나의 절망은 오세훈이 허접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능가할 386 진보 정치인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절망은 혼미하고 안일한 386 세대를 정치적으로 매장하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오세훈이 한국 사회의 이 강고하고 복잡한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할 ‘깜량’이 도저히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앞의 절망은 오세훈의 강점과 386의 혼미, 안일, 자만에서 기인하고, 뒤의 절망은 오세훈의 약점과 한나라당의 태생적 한계에서 기인한다.

어쨌든 오세훈이 차기 또는 차 차기 대권을 거머쥔다면 풍운아 386세대는 대충 50대 중반 내지 60세에 근접하므로서 끝내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밀려갈 수 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지체, 퇴행의 10년 내지 15년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 읽기와 정치적 매력 경쟁을

나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한 과거에 제 아무리 국가, 민족, 공동체를 위해 많은 희생해 온 정치세력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뒤안으로 밀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거 김두관 행자부 장관을 노무현의 대를 이을 영남 민주 세력의 구심으로 간주하고 말도 안 되는 이유(한총련의 미군 훈련장으로 난입을 막지 못하였다고는 이유)로, 의원 쪽수 폭력으로 해임해 버린 한나라당식의 야비한 방법이라도 써서 오세훈이 더 크기 전에 흠집 내고, 짓밟아놓자는 얘기도 아니다.

오세훈 보다 시대정신을 더 정확하게 읽어, 대중의 욕망을 더 잘 충족시켜 줄 것 같은 정치세력으로 인정을 받자는 것이다. 오세훈이 꿈도 꾸지 못할 제대로 된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을 만들고, 오세훈보다 훨씬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오세훈보다 더 강한 정치적 매력이 풍겨나 오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진짜 정치가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출처: 좋은정치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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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나의 삶이라는 문맥 속에 넣을 때 어떤 감흥이나 문제의식이 떠올랐는지가 주제가 되어야 한다."

(<책을 먹어 치우는 독후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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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ESC, 임의 발췌 및 편집)

1. 사고, 읽고, 만지고, 정리하는 것까지 책과 관련된 모든 행동이 일종의 오락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2. 책을 읽는 궁극적 이유는 "이 책을 안 읽었으면 어떡할 뻔했냐"는 '책 읽는 오르가슴'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시골의사 박경석)
3.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마라. 어떤 책들은 한두 줄 건지려고 읽는다. (시골의사 박경석)
4. 언젠가 도서관의 한 코너에 기증하면서 책에 대한 욕망을 털어버리는 게 책탐 이력의 마지막 목표. (시골의사 박경석)
5. 블로그에 책이나 작가, 주제에 관련된 단어들을 생각 나는 대로 정리한다. (독서가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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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올해 봄 <교수신문>이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단연 카를 마르크스(오른쪽 사진)의 <자본론>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만큼 자본론은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존재다. 하지만 자본론만큼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을 찾기가 드문 저작도 흔치 않을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일 노동운동사를 공부하고 1991년부터 동아대에서 강의해온 강신준(54) 교수(경제학·왼쪽)가 <자본>(1-1, 1-2. 도서출판 길 펴냄)이란 이름으로 마르크스의 주저를 다시 번역해 냈다. “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간 경제대국에 인류지성사의 최상급 고전 반열에 든 <자본> 번역본이 겨우 2개뿐이라는 건 초라한 일일뿐더러,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저문 지 20년에 가깝고 ‘퇴물’ 취급을 당한 마르크스가 강단에서조차 거의 사라져버린 우리 현실에서, 왜 지금 다시 <자본>인가?

마르크스 ‘자본’ 번역한 강신준 교수

“그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문헌적 정본 만들기인데, 이 땅에선 아직 제대로 된 독일어 원전 번역본이 없었다. 이론과실천사가 낸 <자본>은 이른바 ‘운동권 빵잽이’ 6명이 번역을 나눠 했는데, 그 번역초고 최종점검이 내 손에 맡겨졌다. 제1권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부분만 손봐서 냈고, 제2권과 3권은 내가 1990년까지 따로 번역했는데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영어판 중역본인 비봉출판사판도 한계가 있다.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은 매우 논리적이다. 영어로는 이 부분을 옮기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우리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노동운동에 문제가 많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최근 민주노동당이 둘로 쪼개질 때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주로 인적 갈등 때문에 갈라섰다는 점이다.”

‘과학의 문제’ 강조한 마르크스 

<자본>이 나온 배경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욱 문제가 된다. 19세기 유럽에서 번성한 노동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특히 1848년 혁명 때는 파리와 빈이 노동자들 적기로 뒤덮이고 정규군이 쫓겨날 정도였는데도 실패한다. 왜? “마르크스는 그때 결론을 내렸다. 세상의 변화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다, 과학적 논리를 토대로 삼고 과학의 지렛대로 무장하지 않는 노동운동은 실패한다고.”

우리 노동운동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변혁운동의 최고급 활동이 정당운동이다. 유럽에선 최근의 민주노동당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강령 논쟁이 벌어진다. 강령이란 노동운동의 과학적 프로그램이다. 잘못됐으면 바꾸든가 삭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논란에도 강령 차원의 논쟁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진행된, 그 엄청난 동력을 지녔던 노동법 개정투쟁 때도 과학적 프로그램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것은 17세기 이전에는 없던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이상한’ 가난이었다.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가 왜 가난한가? 그것은 노동력 상품의 부등가교환 때문이며,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는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교환이 사회적 합의과정이라면 교환을 바로잡는 방법도 사회적 합의에 따라야 한다. 이 사회적 합의란 다수에 의한 결정을 뜻하며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행이다.”

촛불시위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짚어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정치부문의 민주주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성됐으나, 경제부문은 대혁명으로 권력을 쥔 부르주아의 독재가 확립됐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맛본 대중이 경제부문의 민주주의도 요구하게 되는데, 이 경제적 민주주의가 바로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 이전까지 독재 상태로 방치됐으나 대중의 저항과 내부모순 때문에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케인스 체제는 바로 이런 내부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과두체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임노동세력으로 구성돼 있는데, 원래 금융자본이 제일 힘이 세다. 케인스 체제는 이 세 세력이 힘을 나눠 갖도록 국가가 강제한 것이다. 2차대전 뒤 30여년간 이 체제는 번영을 구가했다. 그런데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수익률이 떨어진 금융자본이 균점을 깨고 자신이 우위에 서는 자연상태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게 신자유주의고, 그것은 민주주의 붕괴와 독재 상태로의 복귀로 귀결됐다. 지금 한국의 촛불시위는 경제학적으로 보면 거기에 대해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가 확실히 발을 빼고 조정역할을 방기하는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추구한다. 촛불시위는 거기에 대한 저항이다.”

경제부분 과감하게 풀어 써

결국 노동운동이나 촛불시위나 불합리한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현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바로잡자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자본>은 그것을 위한 과학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게 강 교수 생각인 셈이다.

그는 사실상 독재를 합리화한 민주집중제 따위를 들고 나온 볼셰비즘을 반쪽 사회주의, 사이비 사회주의라 비판했다. <자본> 번역출간의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레닌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자본>엔 신자유주의에 대한 답도 들어 있단다. “노동자의 임금을 산업자본이 빼앗아 가고 산업자본의 이윤을 이자 형태로 금융자본이 또 빼앗아 간다. 이자라는 건 기생소득이다. 기생소득이 숙주소득을 넘어서면 붕괴한다. 그런데 우리 기업 중에 별로 이익을 내지도 못했으면서 빚을 내서 주주에게 배당하는 빚잔치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게 신자유주의다. 빚내서 배당하는 신자유주의는 애시당초 시한부 생명이었다. 우리는 그 다음을 논의해야 한다. <자본>은 그 다음 구상에도 필수적이다. 촛불시위 이후도 대비해야 한다.”

번역은 쉽게 읽히게 만든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특히 경제 부분은 과감하게 풀어서 우리식으로 옮겼다. “‘상품’ 등 제1권 앞부분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어서 딱딱하지만, 중반 이후 공장법 등 역사적 사례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생생하고 재미있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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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신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소신 있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박재승 위원장입니다. 그의 소신이 '국민에게 이로운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정서'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에 가깝다고 보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소신이라는 점은 귀감이 된다고 보여집니다.

- 통합신당 공천에서 탈락한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간적인 괴로움에선, 정책정당ㆍ이념정당이 아닌 통합신당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이 공천이었다는 대목에서, 나라를 위했고 당을 위했다는 '대의'가 무색하게 느껴집니다.

- 박 위원장이 '정치를 모른다'며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비꼬는 대목은 통쾌합니다. 그들은 애써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치를 혼동하려는 것 같군요.


(출처: 한겨레 2008.03.10)
 
박재승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은 9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강도 높은 공천 기준에 대한 당내 반발을 두고 “(나보고) 정치를 모른다고 하는데, 모른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이 기준을 세워야 전국적인 당 지지도가 올라가고, 그래야 통합민주당의 표가 불어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금고 이상 정치인의 공천신청 배제’ 기준에 따라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탈락한 정치인을 향한 인간적인 괴로움을 드러냈다. 그는 “배제된 분 중에는 평소 (저한테) 형님, 형님 하는 양반도 계신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하고 당을 위했다는 그런 양반들의 주장이 맞다. 괴롭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말 존경하는 분이다. 아마 정말 많이 원망하고 계실 거다. 그런 큰 정치인이 우리나라에 나오기 힘들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나 탈락한 이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누구는 그걸 ‘압력’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압력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 압력이 아니라, 일방적인 저항만 있을 뿐”이라며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공천심사 결과 발표가 애초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다. 앞으로 발표 일정이 어떻게 되나?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당 사정 때문에 늦추고 있는 것이지, 자료 제출을 안 해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건 좀 유감이다. 공천 배제 기준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다.

-손학규 대표와 정동영 후보, 강금실 최고위원 등이 모두 서울 또는 수도권 지역구에 출마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나?
=내가 이름을 거명한 것은 아니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패널이 묻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말했을 뿐이다. 그걸 두고 야단인데, 공심위원장이 그런 말도 못하면 얘기할 게 뭐가 있나. 일반 시민, 당원 다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그 생각은 여전하다.

-그분들이 지역구에 출마하면 지원 유세에 지장이 생긴다는 반론도 있다.
=위기 상황에서 리더로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된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런 점(부산에 계속 출마)이라고 생각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봐야 한다. 야당 대표 정도 되면 대통령을 바라봐야 한다. 대통령 되는 길이 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강금실 최고위원도 그런 급인가?
=거기엔 대답하지 않겠다.
 
-비례대표 공천에 대한 기본적인 구상은?
=비례대표 구상이 있다고 해도, 제가 먼저 움직일 영역이 아니다. 당 대표들이 먼저 구상을 해서 안을 제시하는 게 순서다.

-과거에 비례대표는 당 지도부가 자기 세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용됐다. 그건 잘못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어떤 분들이 비례대표 상위 순번에 배치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전문성을 갖추면서 당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현실정치, 현실정치 그러지만 현실정치도 한가할 때 따지는 것이지, 계파까지 고려한 현실정치에 집착하는 것은 큰일 하는 사람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지난번 라디오 인터뷰 때, 새로운 인물 발굴을 위해 접촉 중이라고 밝혔다. 어떤 단계인가? 그분들이 수도권 전략공천 후보나 비례대표 후보가 될 수 있는 건가?
=저보다도 당 대표가 하시고 계신다고 들었다. 성과가 어느 정도 있을지…. 우리 정치의 어려운 점이, 유능한 젊은이들이 정치를 멀리 한다. 거의 의도적으로 국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서 유능한 사람들이 겁나서 못 들어오게 한다. 이건 선배 정치인들이 책임져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자기 방식대로 하면 그것이 정치인 줄 안다. 나보고 정치를 모른다고 하는데, 자기들이 말하는 정치는 내 정치보다 하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기준을 세워야 전국적으로 당 지지도가 오르고, 통합민주당 표가 불어난다고 본다. 이게 비정치적인 법률 논리인가. 내가 법률가라서 법률 잣대만 댄다고 하는데, 거꾸로 사면을 받으면 총선에 출마시켜야 하는 것이 법 논리다. 사면받았어도 국민 정서에 반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안 된다는 게 내 주장, 정치적인 주장이다. 나보고 정치를 모른다고 하는데, 정치권에 안 들어왔을 뿐이지, 왜 모르냐. 크게 봐서 국민 마음 봐서 한다는 게 굉장히 정치적이다.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현역 비례대표 의원 중에서 이번에도 비례대표를 신청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받아줄 것인지?
=그건 안 되는 거 아닌가. 합당 과정에서 그 규정(비례대표 재공천 금지)이 없어졌는데, 바람직한 건 아닌 것 같다. 자기가 이 당에서 비례대표를 (또) 해야 하는 논리를 그쪽에서 세워야 한다.

-정체성 평가는 신인보다 현역 의원에 중점을 두나?
=그럴 수밖에 없다. 참 어렵다. 평소에 봤던 것과 심사하면서 보는 것이 다르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누가 하는 말의 속뜻이 뭔지 다 안다. 그러나 엉뚱하게 궤변을 얘기하는 게 보인다. 실망이 많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신당을 만들 때 합류 가능성을 내비친 현역 의원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정체성 면에서 감점인가?
=감점을 당해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말씀을 하는 거다. 무슨 행동을 할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겠느냐, 그걸 생각하면서 처신을 해야 한다. 가치의 균형 문제다. 모든 가치를 평등하게 보라는 게 아니다. 큰 가치가 있고 작은 가치가 있으면, 큰 건 크게, 작은 건 작게 보라는 거다. 아름답게 살기 위해 설정한 기준이 있는 이상, 아름답지 않게 평가될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철새는 어떤 역경이 있어도 작년에 갔던 길을 또 간다. 매년 갔던 길을 간다. 그게 철새의 길이다. ‘철새 정치인’과는 전혀 다르다. 가장 잘못 붙여진 용어다.

글 강희철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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