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강대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잘 조화시켜”

“경제대국조차 힘에 부치는 군사력을 시도하기 때문에 국력이 쇠퇴하고, 적정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나라가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다.”  - 본문 중에서

역사를 관찰하면 어떤 국가들은 강력해진 반면 어떤 국가들은 쇠퇴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흥밋거리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Paul M. Kennedy·1945~) 예일대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지난 5세기 동안의 세계적인 정치행태를 광범위하게 분석하여 경제력과 군사력 간의 긴밀한 관계를 규명하여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있다.

정교한 학술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1987년 여름 발간되자마자 미국 독서시장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이 출간되었던 1980년대 후반은 아직 냉전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 경제는 불황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많은 지식인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저자는 역사상의 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을 분석하면서 미래를 예견하고자 했다.

1500년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가는 유럽 제국이 아니라 중국의 명나라였다. 그렇게 막강하던 명나라는 왜 당시까지는 후진적이었던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뒤지게 되었을까? 저자는 그 원인을 중국의 막강한 중앙집권적 권력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은 비옥한 땅과 인구, 지정학적 위치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제국은 소극적이며 진취성이 부족했다. 중국은 막강한 함대를 통해 세계의 부를 긁어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 지역이 지나치게 부유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베이징(北京)의 귀족들은 해운 산업 및 무역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해 유럽 각국의 사회는 봉건사회로 중앙집권적 권력이 없었고 각 봉건 제후들은 각자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치열한 자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봉건 영주들의 자유경쟁이 뒷받침된 유럽은 막강한 부와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등장했고, 중국은 쇠퇴하고 말았다.

아시아에서는 유럽 국가와 사회 구성이 비슷한 일본만이 봉건적인 형태로 유럽과 유사한 국가발전의 길을 걸었다. 유럽은 분산된 국가체제가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으로 말미암아 유럽 국가들은 스스로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수단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다양한 국가 간의 경쟁이 해상으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정치군사적 다원화와 지적 자유가 끊임없이 서로 작용하면서 ‘유럽의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유경쟁에 의한 유럽 각국의 번영은 내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몇 차례에 걸쳐 유럽의 국가들은 축적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충돌시키면서 ‘승자 없는 전쟁’을 되풀이하였다. 피레네조약에서 빈협정에 이르는 오랜 기간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유럽 각국 간의 내부 경쟁은 단기적으로는 전쟁과 파괴를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군사적 경험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 내는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견제와 상호보상이라는 이중원리로 유럽은 점차 경쟁하지만 일정 부분 협력하는 형태의 선진적인 다국가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결정지은 새로운 요소는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기술은 경제적인 번영과 더불어 군사적인 역량으로 이어졌다.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은 1815년 이후 기술을 바탕으로 나머지 국가들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강대국이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비유럽 지역은 점점 쇠퇴해 갔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지역은 점차 근대화라는 새로운 경제시대를 맞게 되었다. 산업혁명에 있어서는 후발국이었으나 유럽 내부 전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었던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하여,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경제대국이 되었다. 4년간의 남북전쟁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치열한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은 군사적으로도 성숙하게 되었다.

이윤철 한국항공대학교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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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
“고상한 신사숙녀도 동물의 속성을 버리기는 힘들다”

인류역사상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는 구절만큼 심각한 오해와 비난과 질시를 받았던 말도 없을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직후 등장했던 이 말은 동물원 우리에 갇힌 침팬지와 고릴라가 바로 만물의 영장이자 과학과 문화의 수호자인 현대인의 조상이라고 지칭함으로 해서 진화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데 더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은 틀렸다.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다. 다만 진화의 역사에서 원숭이와 인류는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을 뿐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영장류(靈長類)와 유인원(類人猿)의 차이를 아는가? 또 역사 시간이나 생물학 시간에 배운 원인(猿人)과 현대인의 차이는?

네 발 짐승을 일컫는 포유류 중에서 영장류는 고양이나 코끼리, 물개, 곰 등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모든 원숭이류를 한데 묶어서 지칭하는 용어다. 여기에는 긴꼬리원숭이라든지 안경원숭이처럼 겨우 원숭이의 모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은 동물도 모두 포함된다. 영장류 중에서 유독 인간과 많이 닮은 원숭이 무리가 있는데 바로 꼬리 없는 원숭이인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유인원이다. 유인원이란 말은 ‘인간을 닮은 원숭이’라는 의미다.

수백만 년 전의 먼 옛날, 영장류의 한 무리에서 유인원 무리가 새로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유인원 중에서 일부가 인간의 조상이 되었는데 이처럼 인류가 갈라져 나온 이후에도 고대의 유인원은 계속 진화를 거듭해서 현대의 유인원이 되었다. 또 인류의 조상도 진화를 거듭해서 마침내 현대인인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조상이 태어났다가 사라졌다.

원인은 바로 그런 인류의 먼 조상들을 지칭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만 년 전에 현생인류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이 탄생했는데 이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약 10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났다.

따라서 침팬지나 고릴라와 같은 현대의 유인원과 인간은 다만 조상을 같이할 뿐이다. 분류학상으로는 가까운 형제라고나 할까? 하지만 유인원이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과학에서 동물학이라고 하면 사람을 제외한 다른 동물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이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물학자의 관심거리는 되지 못했다.(의학과 같은 실용과학은 물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은 실용적 목적 수행을 위해서이지 과학적 호기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관행에서 탈피하여 마치 개나 고양이를 관찰하듯 또는 침팬지나 고릴라를 연구하듯 사람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국의 저명한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였다. 그가 1967년에 발간한 ‘털 없는 원숭이(The Naked Ape)’는 인간을 원숭이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것을 관찰한 흥미진진한 연구보고서다.

Ape는 유인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털 없는 원숭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털 없는 유인원’을 지칭하고 모리스의 연구대상은 곧 인류의 가까운 형제동물인 침팬지나 고릴라에 빗댄 인간을 뜻한다. 이제 인간을 동물원 우리에 가두고 모리스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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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의 ‘성(聖)과 속(俗)’
“비종교적인 현대인, 행동은 여전히 종교적으로”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에 인도에 가서 산스크리트를 공부하고 요가 수행을 하기도 했고 결국 요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0년 이후에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루마니아 공사관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1945년 이후 파리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적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1956년에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기 전까지 엘리아데의 중요한 학문적 저작은 대부분 파리 시절에 집필된 것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에 이르는 이 시절에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샤머니즘’ ‘이미지와 상징’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포괄성을 겸비한 일련의 저술작업을 수행했다.

초기의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비하면 미국에 건너간 이후에 그가 보여준 학문적 내용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미국적인 학문 풍토가 엘리아데의 창조력을 감퇴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살펴볼 ‘성(聖)과 속(俗)(The Sacred and The Profane)’은 1957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는다. 책이 출간된 배경은 이렇다. 1955년에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학회에서 엘리아데는 ‘로볼트 독일 백과사전’ 시리즈를 편집하고 있던 엔리코 그라를 만났다. 그리고 엘리아데는 1956년 1월까지 160쪽 분량의 ‘성과 속’을 쓰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성과 속’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엘리아데가 독일 출판사를 통해 그의 파리 시절 학문을 요약ㆍ정리한 소책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과 속’은 주로 ‘종교형태론’ ‘영원회귀의 신화’ ‘이미지와 상징’의 세 권이 결합해 응축된 책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이 기존 저술의 단순 요약본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엘리아데는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던 다소 난해한 자신의 중심 사상을 매우 자상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은 ‘세계 안에서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성은 속의 정반대다. 성은 종교적인 인간 삶의 방식이고, 속은 비종교적 인간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장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성스럽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한 엘리아데의 답변은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을 설명하는 이 책의 맨 처음 두 장에 제시되어 있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공간은 그저 아득히 펼쳐져 있는 균질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인간은 ‘공간의 단절’을 경험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위(하늘)와 아래(지하)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 즉 저 너머의 세계로 이행하는 통로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를 창조한다.

바로 이 장소가 ‘세계의 중심’이다. 중심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와 소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흡수한 성스러운 힘을 다른 모든 장소에 전달할 수도 있다. 중심이 잡혔을 때 세계는 비로소 ‘인간적인 세계’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 만나는 신전이나 사원만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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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집단은 왜 이기적이 되는가” 파헤쳐
 
한번 만들어진 조직은 어지간해서는 없애기 어렵다. 조직은 그 생리상 끊임없이 예산과 사람을 끌어들여 몸집을 키운다. 할 일이 없어지면 명칭과 역할을 바꿔서라도 가늘고 모질게 살아남는다.

예를 들어 보자.
‘작은 정부’는 언제나 있던 요구사항이지만 공무원의 수는 자꾸만 늘어간다. 부처간 이기주의로 예산이 낭비되기 일쑤고 이권을 놓고 중앙과 지방정부 간 다툼이 벌어지는 일도 예사다.

조직끼리 벌이는 한심한 다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욕하곤 한다. 큰 틀에서 바라보고 무엇이 진정 정의인지를 아는 경영자라면 이 꼴로 일이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터다. 썩어빠진 조직윤리도 문제다. 제대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꾸준한 의식개혁으로 공정과 정의를 다잡아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도자의 인품이 훌륭하고 조직원들이 정직ㆍ근면하다면 조직 사이의 다툼은 사라질까. 이 물음에 대해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최고로 좋은 사람이 모인 집단도 가장 영악하게 비뚤어질 수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는 제목만으로도 니버의 입장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왜 니버는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그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엘리트 목사였다. 성직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니버도 처음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반듯하고도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노동자 편에 서서 포드(Ford) 공장과 싸운 후에, 나아가 1차 세계대전의 잔인함을 겪은 다음에 그는 도덕윤리만으로는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예로 든다. 전쟁터의 병사 대부분은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그네들은 희생과 용기라는 면에서도 최고의 용사들이었다. 지휘관 역시 그랬다. 국가 지도자들 역시 자기네 나라가 ‘문명의 미래와 가치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애국심과 인류애(人類愛)가 뒤얽힌 이 전쟁은 강대국 사이의 잇속다툼이었을 따름이다. 설사 국가 지도자 중에 누군가는 전쟁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목적 때문에 일어났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니버는 그 이유를 조지 워싱턴의 말을 빌려 담담하게 일러준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이익과 상관없이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고지식한 도덕심 때문에 전쟁을 벌인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목매달아 죽여야 마땅한 매국노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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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조직은 규모가 커지면 반인간적으로 변해”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는 ‘인간사고의 방향을 바꾼 극소수의 창조적 인물’로 칭송될 만큼 20세기의 지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세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1973)’에선 전통 경제학의 주류와 테크놀러지에 대해 거센 비판을 하고, 두 번째 저서인 ‘혼돈으로부터의 도피(A Guide for the Perplexed)’에선 첫 번째 저서의 내용에 철학적·도덕적 바탕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삶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저서 ‘좋은 작업(Good Work)’에선 오늘날의 테크놀러지가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초래하는 악영향을 파헤치고 있다. 독일 태생인 그는 1930년에 장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 정부의 경제정책자문위원을 역임했고, 1977년 사망할 때까지 학술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슈마허가 그의 저작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다. 그가 주장하는 진정한 발전의 길은 ‘근대적 성장’과 ‘전통적 정체’ 중의 택일이라기보다는 그 사이의 중용이다. 슈마허의 정치·경제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반근대적이다.
 
그것은 소규모·분산 지향적이며 반경제과학적(antieconomic science)이다. 1776년 애덤 스미드의 ‘국부론’ 이래 경제학자들은 모든 분야의 사회과학자 중에서 가장 엄밀하고 성공적인 과학자들로 자부해 왔다. 과학자이고자 하는 열망과 자부는 어느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것이었다.

리카르도와 시니어의 경제학을 ‘음울한 학문’이라 부르며 비난하고 거부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이라 주장하며 생물학에 있어 다윈의 진화론과 견줄 만한 것이라 자랑했다. 그러나 슈마허의 경제학은 그런 유의 과학적 경제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오늘날 주류 경제과학의 모든 가정과 전제에 뿌리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고 도전했다. 슈마허의 정치경제학은 무정부주의자의 견해와 흡사하다.

이를테면 크로포트킨, 톨스토이, 간디 등이 그들이다. 다른 무정부주의자와 달리 이들은 ‘조직의 규모’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소규모 지향적인 무정부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적 가치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지만 사적 소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유기업의 규모가 너무 거대하여 구성원 개개인을 소외시키지 않는 한 다양한 형태의 사유기업이나 사적 소유는 환영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가 적이며 죄악이다. 규모의 거대함은 비인격성의 모체일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필요나 요구에 둔감하게 되고 권력의 독점이나 남용을 낳기 때문이다. 슈마허가 그의 주저를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임효선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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