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프 드림스 - 할인행사
스티브 제임스 감독, 얼 스미스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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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다큐멘터리 제작학교 강좌를 듣고 있습니다. 서울영상집단의 공미연 감독께서 맡고 계신데요, 어느 날은 몇 편의 DVD를 나누어 보고 감상평을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어렵지 않게 <후프 드림즈>를 선택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이라는 낯설지 않은 주제에 대해, 다큐멘터리라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 궁금했습니다.

- 오랜만에 쓰는 마이리뷰가 뒷골목으로 빠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방식이란 굉장히 "잔잔하다." 라는 것입니다. 예의 보아왔던 성공 부풀리기도, 그 반대의 실패 부풀리기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극에 익숙해져있는 이들에게는 다소 밍숭맹숭하게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는 시간에 따라 흘러갑니다.

- 이야기 전개는 간단합니다. 아서와 앤더슨이라는, 미국 프로농구 선수가 꿈인 두 고등학생의 4년 간의 (학교)생활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는데요, 두 주인공은 사립인 성 조셉 고등학교 농구부에서 활약했지만, 등록금을 충당할 수 없었던 아서가 공립 고등학교로 전학오면서 이야기의 두 축이 만들어집니다. 170여분 동안 4년 여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면, 앤더슨은 꽤나 이름 있다는 - 프로농구 진출 가능성이 많은 - 종합대학에, 아서는 전문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입학식이 아닌) 졸업식과 두 사람의 담담한 표정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죠.

- <후프 드림즈>는 감독의 주관 대신 시간이라는 객관적인 요소에 이야기 흐름을 맡긴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실업과 턱없이 부족한 생활보조금으로 고통받고, 마약과 절도로 빠져드는 아서의 부모, 이혼과 편모 가정에서 일찍이 가정을 꾸리는 앤더슨, 프로농구를 지망했던 유망한 대학 농구선수였지만 이제 자신의 일상에 실망하는 앤더슨의 형, 하나의 사회 구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고통들은 중심 소재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감독은 아서와 앤더슨을 만나기 위해 8,000여명에 가까운 프로농구 지망 청소년들을 만나왔고, 두 사람을 만난 이후에도 6년 동안 250여 시간의 촬영을 했습니다. 편집만 2년을 했고, 결국 170분 짜리 다큐멘터리가 탄생한 것이죠. 감독은 이 후 있었던 인터뷰에서, 영화가 녹화되고 있던 고교 생활 중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카메라는 두 사람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접근 방식이 감독과 영화가 두 사람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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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2disc) : 한정판 - 초도출시 양장본
강우석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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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에 TV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부러 봤습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1907년의 경의선 철도 부설권 계약을 전면 무효화, 공식적인 사과 까지 받아낸다는 자위적인(?) 결말 때문에 다소 비아냥을 받았던 영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략 살펴본 관련 기사나 논평이 대략 그러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감독의 인터뷰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구요. 

- 역사영화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역사가 '영상화' 되는 것 만으로 감지덕지하는 터라, 크게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허구를 보태긴 했지만, 1895년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과 명성황후 살해, 1896년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1905년 을사조약과 을사 5적, 1907년 경의선 철도 부설권, 1919년 고종 독살, 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 사실, 공격이냐 방어냐를 떠나서 전쟁이라는 물리적 수단을 문제 해결의 중심에 둔 것도 아니고, 독립적이고 상호협력적인 국제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비판할 지점은 못된다고 보여집니다. 오히려, 마지막 장면이었던 대통령과 국무총리와의 논쟁에서, 국무총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은, 영화 내내 대통령 측에 실려있었던 무게를 덜어내면서 문제제기의 모양새를 갖추려 했던 것은 아닐런지요.

-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과, 영화의 현재적 배경(경의선 철도 부설 철회)를 단순하게 비교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비판이긴 합니다만, 영화 전반을 감싸고 있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고려한다면, 좀 너그럽게 보아줄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고종 - 대통령], [어전회의와 을사 5적 - 국무회의와 국무총리 국정원], [일본 차관 - 일본 외상], [고종 독살설 - 대통령의 실신] 이라는 단순한 비교 장면이야 말로,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역사의 현재성'을 풀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오히려, 영화를 통해서 일제 식민 지배와 일제 부역 문제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졌다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 첨예한 대립 구도를 만들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과 (권한대행을 맡았던) 국무총리의 국무회의 장악을 대비시켰던 것이 논쟁을 비껴가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대통령을 민족주의에서, 국무총리를 사대주의에서 좀 더 가깝게 배치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마지막으로, <마지막 황제>에 이어서 고종이라는 대한제국의 황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모아 재구성해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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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 [할인행사]
뤽 베송 감독, 대니 드비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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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유럽, 100년 넘게 지속되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프랑스 군대를 이끌었던 19세의 소녀, 잔 다르크. 그녀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 당하지만, 500여 년이 지난 1920년, 성녀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 동안 그녀에 대한 영화가 꽤 많이 제작된 모양입니다. 저는 가장 최근에 나온 뤽 베송 감독의 것을 보았습니다.

- 그 동안 제작되었던 영화들은, 대부분 백년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거나 잔 다르크의 비극적 죽음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뤽 베송 감독은 잔 다르크의 삶 전체를 이끌었던 '신의 계시' 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는 몽환적 장면의 연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영국 군대에 체포된 이후의 잔 다르크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자아와 갈등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녀는 구체적이지 않았던 신의 계시, 백년전쟁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복수심, 처참한 전쟁에서의 살육, 등 으로 인해 심하게 갈등하다가, 결국 화형 직전에 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 신의 계시 만큼이나 그녀를 화형시킨 종교재판 역시, 재판 과정에서 일어나는 왕과 종교와의 이해관계가 구체적이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재판은 중세를 '암흑' 으로 비유하는데에 곧잘 쓰입니다만, 중세의 종교재판을 바라볼 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대부분의) 현대 사회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종교가 정치 위에 군림한 형태로 중세를 바라볼 수 있겠지만, 중세에는 종교와 정치의 구분 자체도 어려울 뿐 더러 오히려 종교가 한 사회의 규칙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재판을 단순히 종교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잊혀져야 할 끔찍한 과거에 불과하겠지만, 사회 규칙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현재성을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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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 [초특가판] 인피니티 특별할인
첸 카이거 감독, 장국영 외 출연 / 인피니티(Infinity)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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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군벌 시대 부터, 1937년 중일 전쟁,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국민당 공산당의 집권, 1966년 문화대혁명 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경극 배우인 두 주인공(장궈룽 張國榮, 장페위 張風毅)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 급변했던 중국의 근현대사와 그로 인한 사회 문화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황제> 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황제> 에서 '황제' 푸이가 갈등의 주체라면, <패왕별희> 에서는 '경극 배우' 데이와 샬로우가 될 것입니다.

- 같은 경극 배우이자, 패왕과 우희라는 중심 배역을 맡아 오래도록 함께 해 온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샬로우의 경우, 연예계의 큰 손으로 등장하는 원 대인이나, 중일 전쟁의 침략자 일본군, 국민당 군대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견지하지만, 문화대혁명 이 후로는 강제를 이기지 못하고 데이와 쥬산(궁리) 뿐 아니라 자신을 파멸시키고 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데이나 쥬산의 경우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데이는 강제 연행된 샬로우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 앞에서, 직권으로 자신을 가석방시킨 국민당 고위간부 앞에서 경극을 보입니다. 쥬산 역시 마찬가지로, 매번 외압에 맞서려는 샬로우를 제지하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 하지만, 데이와 쥬산의 타협은 결국 자살로 이어집니다. 타협과 자살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모순된 태도인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후자가 전자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데이에게는 패왕에 대한 정절을 지킨 우희 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쥬산에게는 샬로우에 대한 사랑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전자와 후자를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변화하는 사회와 개인의 갈등, 여기서 더 이상 생각이 진척되지 않아 무척 답답합니다.

- 보탬 하나: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조선의 남사당 놀이 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관습에 의해 탄생한 여장남자 배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보탬 둘: 아름다운 자태의 궁리를 만나는 것도 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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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를 論한다 - 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박효종 외 지음 / 바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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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이 책은 '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원장, 서울대 박효종 교수, 소설가 복거일 씨, 한나라당 원희룡 국회의원,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연세대 함재봉 교수, 정성환 씨 까지, 보수주의자를 표방하는 7명이 한국의 보수주의 세력을 비판하는 글을 묶어두고 있습니다. 책은,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것을 '한국 보수주의의 위기' 라고 생각해 - 물론, 일부 필자는 한나라당이 한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 기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 7명 필자들의 논점과 내용은 제각각인데요, 박효종 교수와 원희룡 국회의원, 소설가 복거일 씨의 경우는 다소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으로 일관했던 것 같고,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와 연세대 함재봉 교수는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보수주의 비판에 대한 비판, 즉 반(反)비판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정성환 씨는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층에, 김정호 원장의 경우는 경제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쓰고 있습니다.

- 우선, 필자들의 글을 싣기 이전에, 출판사와 필자들부터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누구인지"를 토론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복거일 씨의 경우는, 보수/진보 라는 (이미 가치판단이 포함된) 표현 대신, 좌파/우파 친체제/반체제와 같은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김정호 원장의 경우도, 자신은 한국사회가 변화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보수주의자라는 호칭은 부담스럽다는 얘기를 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한 권의 책에서 조차 필자들 사이에 합의되어 정의된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제각각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은, 적어도 책읽기에는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지요.

- 더구나, 필자들이 '보수주의' 가 갖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이것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은 굉장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좌파' 내지 '빨갱이' 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겠죠. 물론, 언어란 사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것인 만큼, 그 언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왜곡한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변화를 꾀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적극적인 대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라고 말하기 보다는, "너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극적이니까요. 적어도 보수주의는 좌파나 빨갱이 처럼 법적인 위협을 받는 호칭도 아닌데.

- 용어를 정리하는 데 있어, 초기 보수주의를 주창한 에드먼드 버크의 표현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보수주의란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모색하는 것" 이죠. 이 표현을 한국 사회에 적용할 때, 전통과 질서의 의미가 '자유민주주의' 와 '시장경제체제' 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개혁'에 있는데요,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왜 모든 개혁 세력을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들은 앞에서 에드먼드 버크의 표현을 실컷 인용해 놓고, 바로 뒤에서 "시장의 질서나 독과점 방지, 사회적 약자를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 진보" 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전혀 일관성이 없지요. 

- 한 발 양보해, 이것이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면, 이들은 점진적인 개혁과 급진적인 개혁의 차이를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당신은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구주의가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생각이죠. 정성환 씨는 한국 보수주의의 과제가 '조갑제 류의 극우 세력' 과의 결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극우 세력과의 관계 보다 개혁 세력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 두번째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라는 시장의 논리를 주창하면서, 기업 운영을 "혼신을 다해 기업을 일구고 고용을 창출했다." 고 미화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기업가들은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기업을 운영하죠. 노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죠.

- (몇몇 필자들이 지적하고 있지만)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개혁을 넘어선 모종의 조치라면, 국가 주도로 모든 산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며 금융시장을 통제했던 3공화국이야 말로 역대 정부 중에서 가장 반체제적인 정부가 아닐까요.

-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우선이냐를 가지고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는 것 역시 형용모순에 불과합니다. 성장과 분배 앞에는 '시장경제체제' 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성장에 중점을 둘 것이냐 분배에 중점을 둘 것이냐 하는 논쟁이죠.

- 용어의 혼란과 그로 인한 자기 모순은 자유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성환 씨는 "진보를 빨갱이로 보는 색안경을 버리자."고 요구하고 있는데, 본질적인 문제는 색안경이기 이전에, 물리적 강제와 폭력이었습니다. 즉, "빨갱이 좀 예쁘게 봐 달라." 는게 아니라, "빨갱이를 허용하네 마네 운운할 자격이 없다." 는 것이죠. 자유민주주의는 시장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국가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니까요.

- 두번째로, 특정 정치세력 내지 이익집단을 '보수 세력' 이라고 총칭해서도 안됩니다. "보수 세력은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주류였다." 라던지 "혼신을 다해 기업을 일구고 고용을 창출했다." 라는 표현에서 저는, 필자들이 보수주의 라는 사상의 표현을 (전혀 다른 범주인)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표현과 뒤섞어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들을 지칭하려면, 가장 중립적인 표현으로 (순수한 의미에서) '기득권' 이 되겠습니다. 아니면, 정확한 명칭을 나열하던지요.

- 마지막으로, 함재봉 교수와 김정호 원장의 경우는 용어의 혼란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함재봉 교수는 87년의 민주화 항쟁을 언급하면서, 근대국가 건설 이후 일어난 보수주의 세력의 균열을 진보 세력이 이용한 것일 뿐 진보 세력의 공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더러 (정작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보수주의 세력의 균열 운운하는 것은 정말 웃지 못할 해프닝일 것입니다. 김정호 원장 역시 진보 세력을 논평하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 부자에 대한 적대감, 미국에 대한 적대감, 북한에 대한 온정적 태도"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연민', '적대감', '온정적 태도' 에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지 의문일 뿐입니다.

- 사실, 책이 표방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 비판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지역주의, 과거사 청산을 내걸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집권과 함께 정치권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보수를 논한다>는 지금까지 보수주의를 독점해 온 세력들이, 새로운 보수주의 경쟁 세력을 맞이해 벌이는 자기혁신 노력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필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자기혁신 전략이라는 것이, 도덕적 의무 지키기, 군사문화에서 벗어나기, 중산층 정서 이해하기, 미래비전 제시하기와 같은 것들이라, 이것을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뭐 열심히 노력해서 열린우리당, 민주당과 공정한 경쟁을 벌이시기를 바랄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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