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의 경제성장과 발전전략 - 회고적 재평가, 동아시아연구단 총서2
윤진표 편 / 오름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동남아의 경제성장과 발전전략> 읽고있습니다.

제목과 개요만 보고 책을 골라버릇 하다보니, 늘 글쓴이는 뒷전이네요.
동아시아연구단이라는 컨소시엄에서 낸 논문집이더군요.

일곱분의 연구원께서 쓴 일곱편의 논문이 실려있는데,
서문에서 연구의 취지와 각 논문의 개요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어놓은 편이라, 저는 순서대로 읽는 방식 대신 골라서 읽는 여유를 보이고 있지요.
일곱분의 연구원이 각각 다른 나라와 주제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연구했다는 점이 다소 흥미롭네요.

첫번째. 박번순님 『동남아 경제의 발전요인과 특성』
두번째. 이요한님 『ASEAN 경제협력의 발전과정: 성과와 한계』
세번째. 윤진표님 『태국의 경제발전과 국가-시장관계의 변화: 회고와 재평가』
네번째. 전제성님 『인도네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구조와 모순』
다섯번째. 박승우님 『필리핀의 발전전략과 국가와 사회관 관계의 재평가』
여섯번째. 노영순님 『말레이시아 국가정책과 화인자본』
일곱번째. 이한우님 『사회주의권 쇠퇴 이후 베트남 사회주의 체제의 지속과 변화: 소유제 개혁을 중심으로』

일단, 첫번째 박번순님의 논문의 경우, 다른 논문과는 달리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난 '공통점에 주목' 했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합니다만,
사실, 동남아 국가들의 발전이래봤자, 우리나라의 발전과정과 대동소이(大同小利) 한지라 크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전제성님, 노영순님의 논문 또한 나중에 읽기로 했습니다.
두분의 연구원이 다루고 있는 두 나라의 경우,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족벌주의를,
말레이시아는 다민족국가로서의 민족간의 입김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죠.
우선, 일반화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필요한지라, 특수성이 짙은 국가들은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어 미루다보니,
결국 이틀동안 두편밖에 못읽었는데요.
윤진표님의 논문에 대한 후기를 써볼 요량입니다.

----------------

# 발전경제학

동남아의 경제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용어인 것 같습니다.
발전경제학은 성장의 엔진으로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인데, 쉽게 얘기해서 국가 주도 하에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국가개발O개년계획' 이거니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당시엔, 국가가 세운 큰 안목의 경제발전계획에 기업들이 종속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겁니다.

언제나 열심히 연구하는 분들은, 우리와 같은 범인들의 머리 속을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필자는 발전경제학의 특징으로,
(1)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우위 (2) 시장에 대한 정부의 우위 (3) 수출산업의 주도, 이렇게 3가지를 꼽고있죠.
아 명쾌하여라.

# 준발전국가 태국?

필자는 위에서 설명한 발전경제학의 개념을 기준으로 태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을 고찰하는데,
그의 결론인 즉은, 태국의 국가기구가 저 위의 3가지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자격미달이었다는겁니다.

사실, 우리도 익히 겪은 97년 금융위기는 태국에서 시작되었죠.
태국에서 동남아로,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러시아, 브라질로 연쇄적인 금융위기가 일어났었습니다.

90년 중반만 해도 아시아의 호랑이로 인정받던 태국의 경제발전.
이 경제발전을 말아먹은 것이, 능력미달의 국가였다는게 필자의 결론입니다.
발전경제학에서 국가의 역할로 규정해놓은, 통화 외환에 대한 효율적 관리, 시장에 대한 합리적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면박을 주는군요.

# 태국정부만 잘못인가?

물론, 필자가 제가 받아들인 만치 단호한 논조를 취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제위기의 요인을 내부와 외부에서 찾고자 할 때, 필자는 내부를 취사선택 한 것입니다만,
실제 논문의 대부분을 외재요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겁니다.

이 논문을 읽는 독자 조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 외재적 요인

외재적 요인은 대충 70년대에 미적미적 시작해서, 85년 엔화급등에 탄력받아 급성장하고, 9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97년에 주르륵 무너지는,
동남아 국가 일반의 공통점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태국의 경우,
70년대까지만 해도 주력산업인 농산물을 내다팔아 공산품을 조금씩 사서쓰는 수준이었는데, 80년대에 수출주도의 산업국가로 변모하게됩니다.
농산물 팔아서 공산품 들여오는, 수지타산 안맞는 무역수지의 적자가 큰 압박이 되었겠죠.

그런데, 농산품 팔던 태국기업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럼, 돈이 덜 드는 산업부터 시작하는겁니다. 노동집약적인 섬유 의류 산업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외국인의 투자가 시작되는 시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외국인들은, 노동집약산업 보다 진일보한 전기전자 자동차 산업의 생산공장을 태국에 설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서히 공업화되는 태국에 호재가 된 것은,
85년 일본의 엔화급등. 일본의 무역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자, 이제 일본돈까지 비싸게 쳐주고,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의 화폐가치 또한 덩달아 오릅니다.

전엔 100원으로 런닝 1개 만들었는데,
화폐가치가 오르니, 100원으로 런닝 3개는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국 1ㆍ2차 산업에 가격경쟁력이 붙게되면서, 태국 경제가 치솟기 시작합니다.

때맞추어 외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자동차 업계들이, 대거 동남아에 생산공장을 세우게됩니다. (이때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도 진출했죠.)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에서 생산공정을 하청, 외주하듯이, 외국의 거대한 자동차업계들이 태국에 생산공장을 세우기 시작한겁니다.
물론, 자동차업계 뿐만은 아니구요.

때맞추어, 92년에는 금융이 자유화되면서, 외국의 공장만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물밀듯이 쏟아지게되죠.

# 대외의존도

이렇게 태국의 과거사를 쭉 읊은 다음,
필자는 문제점을 꼽기 시작합니다.

태국은 한마디로 대외의존도가 굉장히 높다는게 필자의 지적인데요,
산업전체가 외국기업의 하청업체화 되어있고, 금융자유화 이후에는 금융시장 자체도 외국자본이 많아서 국제금융의 변동에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많다는겁니다.

말은 맞는 말인데, 여기서 당황하는 독자.
이제껏 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외국의 투자를 주 요인으로 들어놓고,
이제와서 그것이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니.

# 금융위기

결론에 이르면, 당혹감은 더 커지게됩니다.
태국경제에 대해서 상당량을 80-90년대의 특징인, 외국기업과 외국자본의 투자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언급하고서,
화살은 태국정부로 돌아갑니다.

즉, 태국경제의 특징이 상대적으로 큰 대외의존도라고 설명하고서,
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은, 대외의존도가 큰 국내경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태국정부라는겁니다.

자세한 내막이란 이렇습니다.
태국정부는 '통화바스켓제도' 라고 해서, 태국 바트화를 미국의 달러에 고정시켜두었죠.

모든 환율은 對달러 비율로 씌여지잖아요.
달러도 한 나라의 화폐단위일 뿐인데, 기축통화로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적이라는겁니다.
이런 안정성을 빌리고자, 태국은 자국의 바트화를 달러에 고정시켜두었죠.
태국돈 25바트 가져오면, 언제든 10달러 주겠다고 한겁니다. 대신, 태국정부는 달러를 많이 모아두었죠. (외환보유고)
25바트 가져와서 바꿔달라면 바꿔줘야하니까요.

그런데, 90년대 초에 달러가치가 급등하게됩니다.
달러에 고정시켜둔 바트화도 급등하게 되는데, 미국경제가 잘된다고 태국경제가 잘되는 것도 아니니, 태국 바트화는 과대평가 되는 시점입니다.

이렇게되면, 바트화 가지고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쟤들이 정말 달러당 25바트로 돌려줄 능력이 있는걸까 의심하기 시작하죠.

게다가 머리좋은 투기꾼들, 바트화를 대량으로 팔아치우기 시작합니다.
태국의 외환보유고가 심각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죠.

가뜩이나 의심가는 상황에서, 외환보유고까지 줄어들게 되니 태국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는겁니다.
결국, 통화바스켓제도 라는 일종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선택합니다.

바트화는 달러당 56바트까지 뛰었다고 하네요.
1000원짜리가 순식간에 500원짜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태국국민들 짜증나겠죠.

세계를 요동시킨 외환위기의 시작입니다.

# 타박받는 태국정부

필자는, 달러가치가 상승했을 때, 태국정부가 바트화 환율을 조정했어야 한다고 타박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뭐 여러가지 시장관리 능력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긴 하지만,
핵심이 금융시장 통제능력입니다.

허허 태국정부 몹시도 억울하겠습니다.
그런데, 왠걸? 97년도에 같은 금융위기를 겪은 우리나라 정부도 몹시 타박받지 않았었습니까.

# 건방지게 말하기

물론, 10년 넘게 경제학만 연구한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제가 따라가긴 도무지 역부족입니다만,
적어도 이 논문에서는, 조금 생뚱맞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당 부분 언급한 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쑥 빠진 채,
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만을 타박하는건 조금 야속해보입니다.

건방진 발언일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 세계화된 경제에서 국가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거나,
시각 자체가 국가경제에 갇혀있는건 아닐런지.

# 다시 한번 대외의존도에 대해서

뭐 세계화라는게 그렇습니다.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분업이 세계단위로 이루어지고,
국가규모의 시장이 세계규모로 커지고,
국가규모의 자본이 세계규모로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대외의존도 운운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겁니다.
세계화 자체가 국가 간의 의존도를 높이는 일인데, 세계화된 국가경제의 문제점으로 대외의존도를 꼽는다는 것은 약주고 병주는 모양새죠.

어차피 모든 생산활동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대외의존도란 좋은겁니다. 쌀 잘 만드는 국가에서 쌀 만들고, 자동차 잘 만드는 국가에서 자동차 만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진정한 문제는, 의존 자체가 아닙니다.
의존의 주체와 방식이죠.

누가, 무엇을 위해서 의존하는 경제를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이 부분은 칼럼에서 깊게 얘기해보도록 할께요.

# 낭만이라고는 없는 논문

이 다음엔 박승우님의 논문과 이요한님의 논문을 읽어볼 참입니다.

대학 다닐 적에 숙제를 열심히 안해서 그런지,
논문이란 형식은 굉장히 어색하네요.

하지만, 논문이라는게 형식 자체가 딱딱해서 그렇지,
문제의식 하나는 뚜렷해서 읽기 편하더라구요.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라고나 할까요. 허허

--------------------

저번에 한편의 논문만 뽑아서 후기를 올렸던 <동남아의 경제성장과 발전전략>의 계속입니다.

저번에도 얼핏 말씀드린 것 같은데,
이 책은 동아시아연구단이라는 컨소시엄에서 낸 논문집이죠.

그런데, 컨소시엄이라는 단체의 성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동아시아연구단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한시적으로 모여 연구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그 계기는 단연 동아시아 경제위기구요.

97년 태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 브라질, 러시아까지 강타했던 금융위기는,
그 이전까지 표준적인 발전모델로 각광받던 아시아 모델에 먹칠을 했습니다.

덕분에, 술자리의 험담에서부터 시작해서 학계의 논문까지,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해명(?)하기 위한 무수한 시도들이 이루어졌었죠.
도서관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분량이라고 하더군요.

'동아시아연구단'이라 정체성을 밝힌 이 경제학자 + 사회학자 그룹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역시도 연구의 시작을 60년대, 즉 동남아 국가들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경제개발을 시작할 때 즈음인 60년대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60년대에 시작한 경제를 60년대부터 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실제 동남아(동북아도 마찬가지)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해외의 자본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중을 두고있으면서도,
정작 그 뿌리를 쫓지 않는다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뭐 예를 들면, 80년대 태국의 자동차 산업으로 유입된 자본은 일본의 자동차 산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들에는 왜 일본의 자동차 산업에서 자본이 나오게 되었고, 그것이 태국으로 흘러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연구단이 사건의 소재들을 다루는 비중이란, 기실 그들이 가진 문제의식의 투명한 반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해외자본에 대해서 좀 더 천착했더라면, 논문들이 훨씬 매끄럽게 전개되었을 것 같네요.

오늘은 두편입니다.

------------------

# 박승우 교수, 『필리핀의 발전전략과 국가와 사회관 관계의 재평가』

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따져보는데 있어서, 필리핀의 사례를 분석하는 것은 꽤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대부분이 보였던 반응이,
'국가가 시장에 너무 개입을 한 나머지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필리핀은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이 선택했던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던 국가였습니다.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던거죠.

그런 필리핀에서도 경제위기를 피하지 못했다는 점은,
시장만 자유로우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거라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논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인데,
논문의 서두에서는 바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난감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 과연 필리핀의 정치경제체제에 구조적 본질적인 한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와 관계없이 특정의 국면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체제 운용의 결함 때문인가. 이와 관련해 우리는 그 원인의 단서를 아무래도 필리핀의 국가체제의 특성, 국가와 경제간 관계, 국가와 계급간 관계에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

그리고는, 1962년 마카파갈 대통령, 1972년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 1986년 아키노 대통령, 1992년 라모스 대통령까지,
시기별로 각 정부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논문은 이어지고, 박승우 교수는 시기를 꿰뚫는 공통의 한계로서 다음을 결론내리게 됩니다.
필리핀의 정치경제체제는 (1) 약한 국가 (2) 가산제 국가 (3) 이권추구 자본주의 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런 체제 운용 상의 문제점이 필리핀의 자유시장경제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독자, 대략 난감해지기 시작합니다.

박승우 교수는 '약한 국가', '가산제 국가', '이권추구 자본주의' 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만 많은 양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저자 약력을 들추어봤더니 사회학과 출신이더라구요.)
대략 짚어보면,
'약한 국가'는 미국의 식민지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필리핀에 정부를 운영할만한 관료집단이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있고,
'가산제 국가'는 특정하게 마르코스를 지목한 것인데, 국가기구가 대통령 자신과 그 가족,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을 위한 사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꼽으며,
마지막으로 '이권추구 자본주의'는 기업들이 정상적인 기업활동 보다는 정치인이나 행정관료들과의 연줄 형성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을 뜻하죠.

결국, 동남아의 경제위기를 사회학적인 분석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박승우 교수의 시도는,
약하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며, 이권만을 추구하는 국가를 탓하며,
손쉽게 시장의 손을 들어주고 마는겁니다.

아 허망하여라.
상당 분량의 개념 설명과 시기적 경제정책의 나열을 슬쩍 제껴놓고 보면,
박승우 교수의 논리 전개란 다소 황량하기까지 한겁니다.

결국,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전망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 필리핀은 1986년을 전후하여 시민사회의 급격한 성정과 민주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는 분권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민주화와 분권화의 새로운 경향은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약한국가'의 한계를 보정하고, 시민사회와 국가가 손을 잡고 개혁과 사회발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발전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중략)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겨놓을까 한다. "

박승우 교수의 말씀대로라면,
필리핀 정부가 지적받은 세가지 잘못을 깨우치고 민주화와 분권화를 이루는 것이 순조로운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라는건데,

저로선 쉽게 동의하기는 힘들군요.

------------------

# 이요한 연구원, 『ASEAN 경제협력의 발전과정: 성과와 한계』

이요한 연구원의 논문은, 그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 ASEAN 창설 이래 경제위기 이전까지 ASEAN 협력모델 또는 지역협력이 역내 교역 및 투자비중을 증가키시지 못했던 원인을 살펴보고, 동남아 경제위기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한계를 밝히고자 " 하는 것입니다.

이요한 연구원의 글은, 제가 앞서 비판했던 두편의 논문들에 비해 다소 낫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접근방식이 ASEAN을 비롯해서 동남아를 둘러싼 국제기구들에 대해서 일종의 세력지도를 그려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추진하던 세계화 방식은 큰 틀로 국가들을 묶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름도 라운드(round)였죠.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던 우루과이라운드 또한 국제적인 협정으로 무역의 자유화를 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양각색의 나라들이 하나의 협정에 동의한다는게 그리 만만하지 않은 법. 요즘은 FTA (Free Trade Area 맞나?) 라고 해서 국가간 협정이 더 인기인 모양입니다.

개별적인 무역협정을 하려면 이왕이면 가까운게 좋겠죠. 그러다보니, 일종의 블럭화가 이루어집니다.
북미대륙에서 한 집단, 유럽에서 한 집단, 아시아에서 한 집단.
(물론,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있는 한-칠레 FTA/한-일 FTA 가 보여주듯이, FTA 라는 것이 아무리 개별적인 무역협정이라지만 꼭 국지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NAFTA, EU, ASEAN, APEC, ASEM, 등등 수많은 협정, 회의들은 모두 그런 연유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ASEAN 은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협력체로 시작했죠.
그 시작은 1967년이라고 되어있는데, 67년이라는 숫자보다는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을 그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동남아 국가들이야 이 나라 저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던 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45년 이래로 각각의 진통을 겪고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시기이겠거니 생각해봅니다.

논문을 보면, ASEAN 의 시기적 협력모델이라 해서 특혜무역협정(PTA), 산업협력(AIP, AIC, AIJV), 등등 여러가지가 나옵니다만,
지금의 ASEAN 에서 보시듯이 잘 안됐다는게 중요합니다.

경제규모도 비슷하고, 산업구조도 비슷하고, 무역 또한 회원국 전체가 비회원국인 일본이나 미국에 의존적이었죠.
모여서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너무 고만고만했던겁니다. 그 왜 공부모임을 만들어도, 누군가 좀 뛰어난 한명이 있어야 하듯이.

물론, ASEAN 에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90년초 동구권 몰락과 함께 세계질서가 재편되면서, 95년에 베트남이, 97년엔 미얀마, 라오스가 가입을 했고,
때를 맞추어 경제협력이나 공동사업모델도 추진하게됩니다.

뭐 중요한건 또 잘 안됐다는겁니다.
때가 늦었다고 해야하나. 북미대륙엔 NAFTA 가, 유럽대륙엔 EU 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겁니다. ASEAN 은 갈등했겠죠.
그리고, ASEAN 의 고뇌와 선택이 새로운 기구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북미대륙과의 연계가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확한 명칭은 저도 모릅니다.) 으로, 유럽대륙과의 연계는 ASEM(아시아유럽정상회담?) 이 되는거죠.

참 그럴싸한 얘기 보따리입니다만,
중요한건 여기서부터입니다. ASEAN 을 둘러싼 APEC과 ASEM의 이해관계죠.
이쯤되면 연구원의 얘기도 참 재미가 있습니다.

ASEAN의 경우는 자블록의 산업에 그다지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ASEM, APEC 회의를 통해서 최대한 선진국들의 기술과 자본을 유치하려고 합니다.
반면, ASEM, APEC의 선진국들은 동상이몽. 모든 면에서 부족할게 없는 그들은, 관세없이 통과 가능한 새로운 시장을 찾을 뿐이구요.
그러다보니, 96년에 출범한 ASEM 은 아직도 사무국 하나 갖추지 못한 정상회담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APEC에서는 강경한 미국과 조심스런 ASEAN 국가들의 실갱이가 계속된다는겁니다.

이 대목에서 이요한 연구원이 그리는 밑그림은 ASEAN과 동북아의 협력입니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게 참 쉽지않죠. ASEAN 과 BRICs로 총칭되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과 같은 신흥 국가들, 그리고 한국, 일본까지.
이 국가들의 행보가 어찌될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습니다.

------------------

# 박번순, 『동남아 경제의 발전요인과 특성』

은 지금 읽는 중입니다.
사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자유무역'. 그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래 된 연인들을 보면 " 너희 어떻게 만나게됐어? " 물어보고 싶잖아요.

마찬가지로,
시대적 배경은 바야흐로 1970년대. 자국의 자본을 내보내야 했던 국가들과, 자본이 없어 경제개발을 하지 못했던 국가들의 '관계맺기'란 더할 나위 없이 궁금하고 중요한 얘기들인겁니다.

박번순 연구원께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지 조금 기대가 되네요.

--------------------

박번순 연구원의 논문. 아 상당히 재밌습니다.

가장 메인(main)이 되는 논문이니 만큼, 주제 자체도 명확하고 여타 논문에 비해 깔끔하게 쓰여졌네요.
얘기의 흐름이 명확하게 보인다고 할까요.

박번순 연구원의 논문은 순서적으로도 제일 처음입니다.
전 마음 가는대로 여기저기 찾아 읽다가 이제서야 박연구원의 논문을 읽었는데, 연구단의 다른 논문들을 관통하는 핵심의 논리는 가장 첫 논문인 박연구원의 논문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
비교학설이니 뭐니 하는 사회학의 방법론은 잘 모르겠지만,
'서론 - 동남아 경제의 발전 과정 - 동남아시아의 성장 요인 - 동남아 경제의 성장전략과 파생된 문제점' 의 순서로 전개되는 박연구원의 논리는 아주 표준적이기까지 합니다.
동남아 경제발전사에서 공통된 발전요인을 찾고, 거기서 꼽아두었던 문제점들을 모아서 정리하죠.

박연구원의 꼽는 동남아의 경제발전과정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학교-고등학교 거치면서 사회시간에 익히 들어온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수출지향적인 산업구조, 높은 저축률이 기반이 된 높은 투자율, 등등.

(저축율이 투자에 미친 영향을 읽다보면, 어렸을적부터 교육받은 저금통 문화가 생각납니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저금하는 영철이. 훌쩍)

여기에 한가지 추가된다면, 동남아 경제에 일본이 미치는 영향 정도일거구요.

물론, 이 부분은 두번째 목차인 '동남아시아의 성장 요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연구원이라는 직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죠.
박연구원은 여러 도표들을 예시로 전술(前術)한 공통점을 구체화시킵니다. 70년대 동남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보이고있는 상당한 규모의 수출량, 경상수지의 흑자와 외채, 등등.
한마디로 동남아 국가들은 '모두', 외국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노동자들 고용하고 상품 만들어 열심히 팔았다는거죠.

#
그런데, 여기서 잠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동남아의 경제발전사를 듣고서 동북아 국가 한국의 경제발전사를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동남아와 동북아 경제구조가 나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사실, 동남아와 동북아의 경제구조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죠.
박연구원 또한, 남과 북의 차이점으로 국가주도경제이나 시장주도경제이냐를,
남과 북의 공통점으로는 빠른 속도의 자본축적, 공업화, 해외시장의 활용을 꼽고 있구요.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서 박연구원에게 약간의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70-80년대의 동남아 경제발전과정을 통해서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 원인을 찾는 것이 논문의 목적이라면,
위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부각되어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경제위기라는 것이, 동남아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뿐더러,
동남아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여파를 동북아 역시도 전혀 막아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남아의 특징으로 꼽히고 있는 외국인 투자와 높은 금융개방도, 시장자유화의 병행이란,
동남아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90년 경제위기를 지난 후 동남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완성되어가고 있는 경향이고, 동아시아 뿐 아니라 남미, 러시아를 비롯한 소위 신흥개발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입니다.

굳이 차이를 들자면, '시기적인 차이'가 전부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동남아 국가들이 6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해외투자를 유치했다면, 동북아 국가인 한국의 경우는 90년대에 걸쳐서야 본격화되었으니까요.

하긴,
동아시아연구단이라는 컨소시엄 자체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배운 동아시아 성장전략이란 그리 눈에 띄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주목할 만한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동아시아 경제에 일본이 미치는 영향이 그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래지는 도표가 하나 있었으니,
53쪽에 있는 동아시아의 투자 및 무역관계 라는 그림도표입니다.

이 도표에서는,
미국-일본-NICs(동북아 신흥공업국: 한국, 대만)-ASEAN(동남아 신흥공업국: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이렇게 4개의 집단이 가지는 무역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연구원의 논문을 직접 들어보이겠습니다.

" 무역과 관련하여 동남아 경제의 1985년 이후 구조는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일본에 이어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들이 동남아에 본격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한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동아시아의 투자 및 무역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 시기에 NICs는 일본으로부터는 기술과 자본재를, 미국으로부터는 자본재를 수입하고 있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NICs의 對ASEAN가 시작되어 자본과 기술이 ASEAN 으로 진출한다.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NICs와 ASEAN의 생산제품은 미국, 일본, NICs로 수출되는 것이다. 미국과 동남아의 관계가 단지 동남아의 시장으로서 미국의 존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이 도표가 시사하는 바는,
박연구원이 세번째 목차인 '동남아 경제의 성장전략과 파생된 문제점'에서 꼽고있는 첫번째 문제이기도 합니다.

동남아가 미국과 일본에서 자본재를 수입하고, 그 자본재로 만든 상품을 미국과 일본, NICs로 수출했다는 사실을 두고,
" 와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네. "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 과정은 동아시아 경제가 일본과 미국이라는 큰 기업체의 하청기업 형태로 자리잡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연구원은 '하위구조'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원청기업과 생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하청기업이라고 합니다.
자동차 만드는 원청기업이 타이어/운전대/차체 이렇게 세가지 부품을 하청기업을 통해서 조달한다고 했을 때,
원청기업이 어려워 자동차 안만들면 하청기업은 당장 일감이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원-하청기업의 이런 이해관계를 두고,
원청기업이 하청기업 먹여살린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동남아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80년대 일본은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동남아 경제에 대규모로 생산 및 공정기술을 이전하고 자본을 공급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동남아에 고용이 창출되고 경제규모가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은 어디까지나 일본산업의 이해득실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동남아의 경제활성화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발전형태를 '안행형태(雁行形態) 발전'이라고 한다는군요.
일본은 선두에 서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쟁력이 저하되면 2선에 있는 국가가, 3선에 있는 국가가 이를 개발시키는 것입니다. 일본-한국, 대만-ASEAN 으로 산업이 이동해갔다고 하네요.

그 외에 박연구원께서 지적하고 있는 동남아 경제의 취약한 기술기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죠.

#
박연구원의 논문은 동남아의 왜곡된 경제구조들을 짚어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한 집안에서 대학은 맏이 한명만 갔던 개발시대 농촌의 풍경이 생각났습니다.

90년대 경제위기를 지난 발전과정을 토대로 검토하겠다던 박연구원이,
동남아 경제의 왜곡된 구조를 밝히는데 그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맏이 뒷바라지 한다고 대학 진학도 못하고 부모님 농사일만 도왔던 막내에게,
넌 왜 이리 멍청하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지는 않은지 생각해봤습니다.

막내가 늘 맏이가 입던 옷을 물려입었고, 맏이보다 달걀프라이를 하나 덜 먹었고, 맏이가 교복입고 등교할 때 경운기 몰고 논에 나갔느니 어쨌느니하는 신파적 얘기며,
농촌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부족해서 농촌엔 희망이 없었고, 신동 나서 도시 대학에 진학해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당시의 경제적 구조 때문에, 막내는 맏이의 대학진학을 위해 농사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매끄러운 분석까지는 좋았는데,

어째 마지막은,
그 동생 그래도 대학 졸업하고 넥타이 맨 맏이 덕분에 집안에 TV, 라디오도 들여놓았더라,
미적분도 못하고, 영어도 못읽고, 농사일엔 별로 희망도 없더라..

뭐 이렇게 끝맺는 것 같아서요.

#
아쉬움이 적지 않지지만,
동아시아 신흥공업국 개발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일본이나 미국경제의 개발상도 볼 생각입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야겠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04-12-0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요건 프린트해서 읽어 봐야겠네요. 퍼가겠습니다. 추천

sb 2004-12-05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족적인 마이리뷰인지라 쑥스럽네요. 감사합니다.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1.

제 고향은 전라남도 광양인데, 서울로 이사온 지는 스무해정도가 되었네요.
서울에 살면서도 학창시절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일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학교 부근이었던 청량리며,
영화를 보기 위해 나섰던 종로,
종로에서 밥을 먹기위해 찾았던 인사동,
학교를 휴학하고 다녔던 회사는 테헤란로에 있었고,
기획사 일을 하면서부터는 동대문과 영등포를 쏘다녔죠.

연극을 볼 때는 대학로를,
가끔은 친구 편의에 따라 신촌까지 멀리 나가기도 했고,
몇해전 생일엔 여의도공원도 한번 다녀왔네요.

종로보다는 한적한 강남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적도 있었고,
한강다리야 아무 생각 없이 수도 없이 건넜구요.

서울 사시는 회원분이라면 모두 익숙한 지명들일겁니다.
저에게 역시 익숙한 지명, 이곳에 대해서 좀 더 듣고싶었어요. 우연히 만나 친해진 친구의 어린시절 얘기처럼 궁금해지는겁니다.

2.

「현건축」소장이며 건축가인 서현씨의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은 그렇게 읽게되었습니다.
조경학을 전공한 누나의 책장을 염탐하다 슬쩍 꺼내본거죠.

코팅된 종이에 시원스런 활자들, 컬러로 된 사진들.
머리를 좀 식히자 했습니다.

그런데, 뛰어난 만남을 풀어내는 저자의 말쏨씨에,
저는 길거리 약장수에게 사기당한 마냥 머리 속이 더 복잡해집니다.

머리를 식히기에,
'인문적 건축이야기' 라는 저자의 얘기는 너무 흥미진진했습니다.

3.

위에서 제가 쏘다녔던 거리만이 있는건 아닙니다.
제가 몇번이가 스쳐지나갔을 뿐인 서울의 거리들도 몇몇 더 있고, 수원, 전주, 부산, 광주의 거리도 있습니다.

멀게는 조선시대 후기까지 거슬러올라가,
이 거리가 변해온 모습을 그려냅니다.

종로에서는 금난전권이, 세종로에서는 아관파천이, 수원 화성에는 조선임금 정조가 등장합니다.
역사시간에나 줄줄 외웠을법한 얘기들이 다소 지루해질 즈음이면,
건축가 서현씨는 파스텔톤의 삽화로, 선명한 컬러 사진으로 달래줍니다.

4.

만약, 이대로 흥미진진하기만 했다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끝났을 터.
가볍게 머리를 식히고, 기억에 남은 몇몇 얘기꺼리들은 여자친구와 그 거리를 걸을 때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폼나게 던져주면 되는겁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서현씨는 예의 재치있는 만남으로 덩치 큰 건물과 간판으로 가득한 오늘의 거리를 얘기해주는데요,
이 얘기라는게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주위무관심쟁이에게, 건축이라는 것이 그저 설계도면이나 그리고 돈 잘버는 직업이 아님을 가르쳐주었고,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돌이 제 생각마저도 구분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고,
재개발 사업엔 철거민들의 설움이나 야박한 투기꾼의 논리 외에 더 고민할 부분이 있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전통의 계승이라는 해묵은 주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건축으로, 음악으로, 미술로 머리를 식혀보겠다는 생각일랑 멀리 던져버려야 겠습니다.
누릴 수 있는 문화일지언정, 제 편견 만큼이나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닐테니까요.

5.

서현씨는 '시대의 정신을 거리에 아로새기는 것'이 건축가의 몫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도시에 침을 뱉고, 건축가에게 침을 뱉는 것이 거리를 거니는 시민들의 몫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이 생각난 사람.
저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연극 감상법>을 써낸 그 연극인.
그 연극인도 연극에 침을 뱉으라고 얘기했었는데.

책을 통해 하소연하는 연극인과 건축가의 얘기는,
40년만에 따라잡았다는 산업자본주의에는 뒤쳐졌지만, 정보화시대에는 뒤쳐지지 말자던 우리시대의 슬로건과 교차됩니다.

적절치 않을 것 같아, 더 긴 얘기는 그만 두도록 하겠습니다.
여튼,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경제리포트 - 2004년판
홍순영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경제리포트> (이하, 리포트) 생각보다 재밌네요.
예나 지금이나 도표나 수치는 좀 따분해서 대충 흘려버리고, 흐름만 잡으려고했습니다.

제가 잡은 몇가지 주제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할께요.

1. 고용없는 성장

'노동유연화'의 반대말을 꼽으라면? '철밥통'이라고 아시는 분들이 많으실텐데,
저는 이게 잘못된 인식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식에는,
'노동유연화'는 능력에 따라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운 것이고, '철밥통'은 능력에 상관없이 고용이 보장된다는,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사전적 정의가 강한 편견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리포트를 통해서 보면,
최근의 미국을 비롯한 한국의 노동시장에 대해서 - 사실,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생산활동 동맥혈이라면, 가계의 소비는 정맥혈과 같은데,
심장에서 피를 내보내기만 하고, 이 피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갑동이 엄마든 아빠든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아와야, 갑동이가 용돈을 받아 을동기업의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수 있죠.
을동기업은 수많은 갑동이들이 아이스크림을 팔아줘야 계속 기업을 유지할 수 있구요.

한참, 노동유연화를 선전할 때,
기업이 생산의 효율화를 추구할 수 있게, 우선 해고가 자유로워져야, 사업영역이 확장되고 또 새로운 고용이 창출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는데,
'고용없는 성장'이란, 해고만 자유로워지고, 고용은 창출되지 않는 노동유연화의 현실을 보여주는겁니다.

노동유연화와 고용에 대해서 좀 더 따져보죠.

고용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장사가 잘 되어야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사가 잘 되는 분야로 따지면,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조선 정도가 있을겁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석유화학, 철강, 섬유와 같은 2차 산업들은 그저 고만고만합니다.

그런데, 고만고만한 분야에서 새로운 고용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소세에 있다고 봐야겠죠.
크게 봤을 때, 제조분야나 서비스분야에서는 더 이상 경쟁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축성이 떨어지죠.

경쟁을 결정하는 것은 정보통신분야의 기술이나 마케팅입니다.
반도체나 무선통신기기들이 그렇고, 자동차의 경우는 제조업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자동차도 디자인이 있고, 설계가 있고, 제조가 있고, 마케팅이 있고, 다양한 제조과정이 있죠. 그 과정 중에서 제조분야, 서비스분야는 이미 경쟁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디자인이나, 설계, 마케팅 분야가 경쟁의 우위를 결정하죠.

결국, 장기적인 고용창출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는데,
이 고도로 발달한 분야에서 흡수할 수 있는 인력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겁니다.

정치 보고 경제 살려달라고 주문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고용의 문제는 정치보다 경제에 중점을 두고 바라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실제, 리포트에서 고용과 관련된 부분은, 공공정책 파트 보다는 경제, 기업경영 파트에서 비중있게 다루고있구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고용에 대한 영향력을 여실히 드러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50년에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5%만 있어도 지금의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기술의 혜택이란,
결국, 일할 수 있는 극소수와 일할 수 없는 다수로의 구분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기술은 죄가 없죠.
다만, 일하는 입장에서의 기술과, 기업하는 입장에서의 기술은 크게 다른겁니다. 일하는 사람이야 편하게 일하기 위해서 기술을 개발하지만, 기업하는 입장에선 다르죠.

2. 중국과 인도

중국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하고있는데, 그 속도로 말할 것 같으면 쉽게 느끼지 못할 정도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계의 원자재 값이 오르는 이유가 중국의 원자재 구매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하니 할 말 다했습니다. 중국의 섬유 철강 분야는 이미 과잉생산 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제조업 생산 세계 4위, 100여개 품목에서 세계 최대의 생산국, 연간 10%에 가까운 성장률.

우리나라와 중국을 절대비교 할 수는 없습니다만,
덩치 작은 우리나라가 3% 성장할 때, 덩치 큰 중국이 10% 성장한다고 상상하면 대충 짐작이 가실겁니다.

경제란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가 이루어져야 운영될 수 있는건데,
중국이라는 인구 10만에 달하는 소비집단이 생겨났다는 것은 큰 기회인셈이죠.
올 한해 내수부진의 여파를 수출로 막아냈다는 우리나라 경제에서 중국시장의 소비가 큰 몫을 했음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라는 나라 역시 소비 뿐만 아니라 생산도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내다보면, 앞으로 이 나라의 소비가 한계에 다다르고, 소비 만큼의 생산력으로 세계시장을 압박하기 시작했을 때의 효과는 그리 낙관하기 힘들죠.

인도는 어떻습니까.
미국에서 기업의 아웃소싱을 법적으로 규제하려고 하자, 인도에서 무역제재로 위협을 가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인도는 세계기업들이 아웃소싱을 하는 나라로 유명하죠.

이 나라 역시도 엄청난 인구를 가지고있는 데다가, 매년 7-8%의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도의 주력산업은 IT나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인데, 인도의 모 거리가 미국의 실리콘 밸리보다 더 호황이라고 하니 지레 짐작이 가실겁니다.

세계경제에서 인도의 비중이나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을 던져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빚의 경제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에 행사하는 막대한 영향력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두고 '미국이 강대국이어서' 라고 하면 조금 싱겁죠.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일종의 딜러와 같은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환율이라는 것이 달러를 기준으로 해서 결정이 되니까요.
보통 게임을 하면, 돈 대신 칩으로 게임을 하잖아요. 칩을 사용하는 이유는 게임의 진행이나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실경제에서 물물교역이 화폐라는 교환수단을 선택하고, 경제의 크기나 교역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 대신 수표, 어음, 신용카드, 전자화폐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한가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은,
세계경제라는 게임에서는 딜러를 맞고있는 미국 역시도 게이머의 한 사람이라는겁니다.
( 원래는 금본위제라고 해서 금을 사용했었는데, 71년에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이를 금지시켰죠. 이것을 변동환율제라고 합니다. )

이 경우, 미국이라는 게이머가 파산을 하면,
게임장에 있는 게이머 전체가 아무 쓸모가 없는 칩을 들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

실제, 미국은 쌍둥이적자라 해서 재정수지와 경상수지가 동시에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데,
경상수지 적자의 경우, 미국 GDP의 5% 약 5,000억 달러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미국이 이 적자를 메우는데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돈을 더 찍어내는 방법입니다. 게임장 딜러가 칩을 더 만드는거죠. 실제로는 미국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하는겁니다. 미국국민이나 해외투자가들이 채권을 구매하면, 그 돈이 미국정부로 들어가서 적자를 메워줍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돈을 찍어내다보면, 화폐가치가 떨어지게되죠.
화폐가치란 실물경제에 준하는건데, 실물경제는 그대로 있고 화폐량만 늘어나니 화폐가치가 떨어지는겁니다.

화폐가치가 계속 떨어지게되면, 게이머들이 '이러다가 칩을 돈으로 못바꾸는거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게됩니다.
이 의심이 현실화되어서 달러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면, 달러가 중심이 되어 연관을 맺고있는 세계경제는 붕 떠버리는거죠.

작년 한해 미국과 유럽국가, 혹은 중국간의 환율갈등은 이래서 발생합니다.

" 한편, 미국의 구조적 불균형 심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높아졌고, 이는 외국에 대한 환율절상 압력과 통상압력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미국은 자국에 대해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 일본 및 아시아 국가 등에 대해 '유연한 환율정책'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한, 유로의 달러에 대한 상승폭이 다른 나라 통화에 비해 높아, 수출경쟁력이 저하됨에 따라 미국과 유럽간의 환율 갈등도 고조되었다. " - 삼성경제연구원 <한국경제리포트 2004> 48쪽

미국의 달러발행이 늘자, 다른 나라들에서 더 적은 돈으로 칩을 사려고 하고, 미국에선 안된다 원래대로 하자라며 갈등을 일으키는겁니다.

4. 몽땅 외국돈?

금융 부문은 그동안 제가 관심있게 지켜본 세계화라는 이슈에 대해서 현실적인 감각을 보태줄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소유지분이 40% 정도 된다고 하네요.
작년이었나요? 소버린자산운용이 취득한 지분으로 SK하고 경영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냥 흘려듣는게 아니었습니다.
은행의 경우도 제일은행, 한미은행, 등 외국계로 넘어가는 것을 익숙하게 지켜봤습니다만, 보험ㆍ생명 분야까지 넓게 퍼져있는 줄은 몰랐구요.

SK경영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 기업이 외국계로 넘어가는데 대해서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해서 언론보도가 이루어졌던 것 같은데, 사실 기업의 국적, 돈의 국적 자체가 중요한 문제는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기업의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 운영의 목적이겠죠.
필요 산업을 육성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기타 등등의 것을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

그런데, 리포트에서 분석한 외국계 금융자본의 성향은,
장기투자성향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100%(95.7%) 매매차익을 노린 거래라는 점이라는데,
사실, 우리나라 투자자들이나 외국계 투자자들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으니까요.

뭐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주식이 아닌 실물자산에 투자했다는 통계도 있긴한데,
실물자산이래봤자 부동산이니까 큰 차이로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외국계 자본은 내수기업이 아닌 수출기업에 투자했을 뿐이고, 우리나라 자본은 주식이 아닌 부동산에 투자했을 뿐입니다.

5. 기타

글이 많이 길어져서 쓰긴 좀 뭣한데,
가계부채나, 문화산업 동향의 경우는 꼭 한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고,
자동차 산업과 백화점ㆍ할인점 업계의 세력 재편도 굉장히 흥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 외에,
사회ㆍ문화텀에서는 얼짱몸짱문화, 웰빙문화, 저출산고령화, 환경갈등, 등에 대해서,
공공정책텀에서는 노동정책과 농업개방문제, 평준화논란, 국민연금제도, 국가균형발전, 등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의깊게 살펴야 할 부분은 공공정책텀인데, 여기서 다루기는 다소 곤란스러운 내용들이 많이 있는 것 같네요.

조금만 더 부지런했더라면 꼭 구입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여튼 현란한 수치들만 무시할줄 알면 지극히 일상적인 얘기들의 순차적인 나열이니 만큼 연말에 어울리는 책은 아닐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1.
소설로 읽는 경제학이라.

조나단 B.와이트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소설로 읽는 경제학입니다.
폭우가 억수로 솓아지는 어느날, 리처드 번스 박사를 찾아온 의문의 한 남자 해럴드 팀스. 팀스가,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을 괴롭힌다면서 번스 박사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얘기는 시작됩니다.

리처드 번스 박사는 미국 유수의 경영대학과 MBA과정을 거친 유망한 경영 컨설턴트.
두달 후 세계 유수의 무역회의에서 러시아 알루미늄 시장의 민영화와 관련해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으로 발표를 하게되어있었고, 경제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라는 새뮤얼슨상을 수상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런 급박한 일정을 앞두고, 번스 박사는 해럴드 팀스의 몸을 빌려 영적대화를 행하는 애덤 스미스와 얘기를 시작하게 되죠.

자신의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 애덤 스미스와.

2.
수치나 그래프의 나열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따분한 경제학을 소설로 풀어낸다는 시도 자체에 의의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갑동이와 을순이가 등장하는 소설의 형식은,
경제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따분함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 일상 생활에 꽁하니 자리잡고있는 편견의 집합임을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경제학 풀이'에 집착한 나머지 소설 자체가 굉장히 따분해 질 수 있다는 점이겠죠.

그런 점에서,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 쓰여진 영적대화라는 방법은 다소 유쾌합니다.
특히, 애덤 스미스가 활약했던 1700년대 철학자, 경제학자들이 만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우면서도 웃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네바다주 올드 뒤랑고 살롱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 장자크 루소, 볼테르, 심지어 케네박사까지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거든요.

애덤 스미스가 잠시 몸을 빌린 해럴드 팀스는 리처드 번스 박사 일행과의 여행 중에 뜬금없는 이유로 사라지게 되고,
리처드 번스 박사가 그를 찾아낸 곳이 네바다주 올드 뒤랑고 살롱, 번스 박사가 찾아낸 애덤 스미스는 모조리 다른 이들의 몸을 빌린 유수의 할아버지 철학자 경제학자들과 여유로이 카드놀이를 하고있었고, 번스 박사는 이를 옅듣게 되는거죠.

상상해보세요.
장자크 루소가 카드를 집어던지며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 이 패로는 게임 못하겠어! 흄이 벌서 내 걸 다 봤다구. 나한테 잡혔어. "

3.
사설이 좀 길었군요.

여튼,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애덤 스미스는 자칭 그의 추종자라는 오늘날의 경영 컨설턴트와의 대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아담 스미스의 권위를 빌려 시장의 원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유쾌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용되고 있는 아담 스미스의 저작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국부론> 보다는 <도덕감정론> 입니다.
사실,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그의 별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가 <국부론>을 출간하기 이전에는 딱히 경제학이라는 과목 조차 없었죠. 그 역시도 논리학 교수로서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가 출간한 책이 바로 <도덕감정론> 입니다.
그런데, 이름조차 생소한 이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이, 실제로는 <국부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는겁니다.
다시 말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전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국부론>을 집필했다는거죠.
그런데, <국부론> 만도 아니고, 심지어 <국부론>에서 발췌된 일부분의 내용만이 그의 사상인양 사용되고, 아니 오용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습니다.

물론, " 넌 아담 스미스를 몰라. " 라고 얘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인용하는 경제학자들이 1,200여쪽에 달하는 <국부론>을 일독 조차 하지 않았다느니, <국부론>의 전제가 되는 <도덕감정론>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그저 웃고 넘어갈 얘기들입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를 알고싶은 것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경제논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고싶어하고,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내가 느끼는 경제적 갈증을 풀고싶은거니까요.

물론,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촉망받는 리처드 번스 박사의 갈등을 통해 오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스 박사가 두달 후 발표를 하게 되어있는 논문은,
러시아 민영화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리스크(risk, 위함)를 분산하는 법, 즉 러시아에서 한몫 챙겨보려는 기업들이 투자한 돈을 잃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렇게 화두는 기업 경영과 윤리로 넘어가는겁니다.

4.
조나단 B.와이트는 애덤 스미스의 저작과 논문을 주로 연구해 발표한 학자이지만,
사실,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기업 경영과 윤리.

물론, 기업이 비윤리적 경영이 아담 스미스에 대한 몰이해 때문은 물론 아닐겁니다.
어차피 경제학이란 중립적 일 수 없는 학문, 기업은 그들 나름의 생존논리를 아담 스미스의 권위를 빌어 정당화하는거죠.

오늘날 기업 윤리 수준의 심각성을 꼬집고싶었던 조나단 B.와이트는,
아담 스미스의 권위를 빌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 심지와 밀랍만 있으면 뭐 하나, 정작 산소가 없으면 양초는 탈 수 없지. "

자본주의의 시장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제도적 조직과 사회적 가치를 무시한 채 내달리는 시장의 몰락을 경고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얼마 전 주형씨가 독서후기를 올린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조지 소로스의 경우,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변동이 우여곡절 끝에 평형을 이룰거라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다른 이름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죠.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앞에는 구고전학파가 있었을테고, 구고전학파의 대표주자는 단연 아담 스미스.

재밌죠?
대부분의 경제학사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에게 붙여져있는 신고전학파라는 이름. 아담 스미스에 대한 평가는 의례 그와 같은 시장만능주의자 쯤으로 되어있던겁니다.

5.
여튼, 뭐 이런 분위기에서 해결은 기업의 자정능력으로 귀결되는 모양입니다.
여러 책들이 신랄하게 비판해놓고 결론에 와선 " 겁나지? 그러니까 잘하자. "라는 용두사미의 전개구조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 구하기>는 소설의 형식을 빌고있느니 만큼, 대안이란 것도 소설처럼 등장합니다.

여행을 떠난 번스 박사와 아담 스미스가 캠핑을 하던 도중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대목.
아닌 웬걸. 파도에 휩쓸려 갈 뻔 했던 이 사람의 이름은 피터. 그는 휴렛 팩커드니 인텔이니 썬, 시스코, 모토로라, 록히드 마틴과 같은 유수 IT 업체들이 결집해있는 실리콘 벨리에서 특수 반도체 공장을 경영하는 CEO 였던겁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 촉망받는 경영 컨설턴트 번스 박사, IT 산업의 CEO 피터.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후유증은 어디 갔는지, 그날 저녁 세사람의 화제는 기업경영으로 집중되고,
결국 여행중이던 번스 박사와 아담 스미스는 실리콘 밸리의 공장에 견학 아닌 견학을 가게되죠.

아직 아담 스미스에게 교육을 덜 받았는지 이윤에 따른 냉정한 구조조정이며 실리적 운영을 부르짖는 번스 박사,
그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 아니라, 직원 개개인의 발전이라는 피터 사장님의 의견에 발끈해 회사를 찾아가게됩니다.

어디 그런지 보자며 씩씩거리는 번스 박사의 견학일에, 공교롭게 피터 공장의 주고객은 공장의 회계직원에게 된통 못된 짓을 하죠.
피터는 번스 박사 보란듯이 회계직원을 위해 주고객과의 거래를 끊어버립니다.

6.
조나단 B.와이트가 일종의 대안모델로 제시한 피터공장.
하지만, 현실은 정해진 이상향을 향해서 직선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실제, 극중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죠.
" 피터가 직원의 높은 포부에 호소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리고 이건 물론 중요한거지만, 생산성에서 얻는 이득이 그의 비용을 능가한다면 이윤은 증가하겠지. 다른 회사들은 그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으면 큰 손실을 입게 될거야. "

결국, 문제는 '생산성에서 얻는 이득이 그의 비용을 능가하는 것' 이라고 자기고백을 하는겁니다.
<도덕감정론>의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에 찍었던 초반의 강조점이, 다시금 비용의 문제, 즉 시장의 논리로 회기하는 순간이죠.

자신있게 주고객과의 거래를 끊어버리고 회계직원과 뜨거운 포옹을 나눈 후 피터의 얘기는 한술 더 뜹니다.
" 어쩌면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직원에게 힘을 실어 준다고 말하는 건 좋지만 회사가 부도나면 의미가 없어지죠. 결국엔 직원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될 거구요. "

저는 이것이 유토피아 문학가가 아닌 경제학 박사 조나단 B.와이트의 솔직한 자기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책의 전면이 <도덕감정론>의 진정한 이해에 대해서 씌여졌다 하더라도, 경제학자는 현실의 이해를 반영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7.
언제나 제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책 표지의 온갖 홍보문구들.

" 부활한 애덤 스미스, 분노하다! "
" 시장경제의 필수사항인 신뢰와 도덕과 덕성을 강조하는 애덤 스미스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철학이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경제이론소설이라는 장르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다. " - 존 모톤, 미국경제교육협의회 부회장
"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와 함께 떠나는 뜻 깊은 경제학 여행! "

그러나 저는,
이 책을 두고 오늘날 필요한 철학을 제시해주었다고 매듭짓는건 책을 반밖에 읽지 않은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심지어 역효과가 날 수 있는 몰이해라고 생각해요.
책의 전면은 <도덕감정론>에 담긴 중요 철학을 서술하고 있지만, 숨겨져있는 현실적인 논리적 귀결의 공허함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철학이든 경제학이든 현실의 쓸모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장을 덮고 스스로에게 질문하죠. 애덤 스미스의 명예를 되찾았고, 우리 시대의 철학을 되찾아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보탬 하나]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함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으로 방향을 맞췄는데,
사실, 전면의 내용은 <도덕감정론>을 통한 아담 스미스의 이해인지라 그 부분을 빼놓은 것이 좀 아쉽네요.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하고싶은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회원분들하고 같이 얘기해보고 싶네요.

[보탬 둘]

그리고, 저도 몰랐는데, 이 책 사니까 책 한권 더 줬어요. (인터파크에서 샀음.)
이 책을 옮긴 분이 안진환님이신데, 같은 출판사(생각의 나무)의 책 중 그 분이 번역한 책이 한권 더 왔더라구요.
<젊을 때 시작하라> 는 책인데, 보나마나 재테크 관련한 책이겠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그때가 잠깐 이벤트 기간 이었을 수 있으니 한번 더 알아보시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존의 꿈
배일도 지음 / 위즈덤아카데미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1.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도둑이, 지하철에서 퇴근길 시민의 지갑을 여럿 훔쳤다.

이 때 누군가가 " 내 지갑! " 하고 외쳤고,
도둑은 열린 문을 박차고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간 자신의 지갑도 없어진 것을 깨달은 서너명의 피해자들이 도둑을 뒤쫓는다.

한참을 쫓아 따라잡은 도둑은 품에서 흉기를 꺼낸다.
그리고, 1:4 의 싸움이 벌어진다.

흉기를 가진 도둑이지만, 서너명의 협공을 당할 수가 없었고 땅에 쓰러진다.
지갑을 도둑맞은 피해자들은 도둑을 제압하기 위해 몰매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목격한 또 다른 시민이 나타나 싸움을 말린다.
비겁하게 4명이서 1명을 몰매하느냐는 것이다.
평소, 모든 싸움은 잘잘못 가릴 필요 없이 쌍방 모두의 과실이라고 생각해오던 이 사람은, 서로를 화해시키려 애를 쓴다.

2.
'21세기 새로운 문명 전환 시대의 생존법을 찾는 한 노동운동가의 자전적 에세이'라 선전된,
배일도씨의 <공존의 꿈>은 나에게 이런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 선배 노동운동가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공존의 철학'이란,
결국,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재판에 불과한 '민주적 시장주의'라는 도구를 가지고,
두 계급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신변잡기적인 에세이라지만,
그가 10년 가까이 고민했다는 노동운동의 미래는 몇줄에 불과하다.

정말 몇줄.
계급투쟁(그는 '대립구도'라고 표현했다.)은 비과학적이며, 현실적 대안이 사회복지제도에 기반한 '민주적 시장주의'라고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나머지 글의 대부분을 근거없는 '공존의 철학'이 뒤덮고 있다.

3.
물질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그저 공존의 가치가 가진 우월성만 나타내는 것이 공존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감정적 화해와 다를 바가 없다.

계급투쟁과 감정적 화해.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인 것이다.

유물론이니 관념론을 구분하는 현학적인 태도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 화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관념적 언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존의 철학'은 그가 진보라 규정한 '실천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계몽은 계급투쟁의 물질적 기반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배 노동운동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더욱이 그가, 오늘날 노동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관료'의 한 사람으로 상징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공존의 철학을 세웠다는 10년은,
남한 노동운동이 후퇴한 10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쉽다.
그가 공존의 철학을 실천하는 행위는,
계급투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