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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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에 빨간색으로 강조된 '급진적 다양주의자' 라는 단어가 눈에 띄인다. '다양주의'라. 형용 모순이 아닐까? 무릇 '주의' 라 하면, 사회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니던가. (물론, 이것과 다른 맥락에서 쓰이는 '주의' 들도 있다.) 예컨대, 민족주의는 분단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는 주장이고, 자본주의는 시장경제가 희소한 재화를 분배하는데 최적의 방법이라는 주장이며, 사회주의는 계획경제가 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주의라니. 소수자에 대한 연대를 의미하는 다양주의는, 의미와는 별개로, 적어도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

- 형용모순인 수식어를 표지에 써놓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나 무슨무슨 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고, 현실의 문제점을 나열하는 것과 현실의 해결책을 탐구하는 것은 개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전자에 가깝고, 그저 그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유쾌하고 즐겁게 사회를 비춘다. 굳이 후자를 흉내낼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 첫번 째 장 '사회(SOCIETY), 대한민국 1퍼센트의 뒷담화' 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비판이자, 반대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변론이다. GNP를 국민총생산을 나타내는 경제적 지표 이상으로 활용하는 GNP 인종주의, 민족의식으로 치장한 북한 여성 응원단에 대한 관음증, 공영언론 사영언론을 가리지 않는 민족주의, 반 한나라당 정서, 대마초 흡연에 대한 금지, 반 동성애 정서, 등 사회 구성원 다수에 의해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통념' 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한국 사회의 다수자 정서, 집단적 정서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주장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글쓴이의 재치로 읽힐 수 있는, 유행어나 영탄적 표현으로 마무리하는 글쓰기 역시, 그가 비판이나 자조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티브이 프로그램과 영화에서 읽히는 사회적 통념과 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세 번째 장, '문화(CULTURE), 쇼쇼쇼, 채널을 돌려라.' 에서도 비슷하게 읽힌다.

- 글쓴이의 일상과 취향에 대해 쓰고 있는 두번 째 장, '취향(TASTE), 아저씨의 브로크백 드리밍' 은 이러한 글쓴이의 솔직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동남아 여행 이야기, 이태원 클럽 이야기, 티브이 시청기, 운동이나 쇼핑에 대한 이야기들은 즐겁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상' 일 뿐이다. 
하지만, "'운동(movement)'에서 '운동(exercise)' 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신의 10주년을 축하합니다.」) 거나, "여전히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늙어가는 꿈을 선선히 포기하지는 못한다." (「블루밍 데이즈」), 머리가 빠져 고민인 자신을 두고 "마침내 차별에 눈 뜬다." (「마침내 차별에 눈 뜨다」), "소비로 제3세계 인민을 돕는다." (「아저씨의 브로크백 드리밍」) 와 같은 농담 섞인 자조의 행간에서 글쓴이의 쓸쓸함과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만의 생각일까?

- 다양주의 같은건 없다. 다양함에 대한 인정은 '추구해야 할 가치' 이지 '추구하는 가치를 실제로 이루어내기 위한 방법' 은 아니다. 혹시나, 다양함에 대한 인정을 하나의 주의로 포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자기 위로 이상이 되지 못할테니까.

- 그의 글은, 다양주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무사하게 다루어지는 소수자들의 모습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동성애자 천국과 나쁜 어린이의 향연」은 '내가 생각하는 인권 운동' 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는데, 소수자는 다수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와 내 주변에 있는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글쓴이 덕분에 동성애를 다루었다고 알려진 영화들을 사랑 영화 목록에 끼워넣었고, <발레교습소>가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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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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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조선의 과거시험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치루기 전까지 선비들이 치뤄야 하는 시험은 모두 세 번. 이 세 번의 시험을 통해 전국에서 서른 세명을 선발합니다. 이 시험을 위해서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키 보다 높이 쌓인 수 권의 책들을 독파해야 했습니다. 시험의 시기나 방식, 내용이 오늘날의 고시와 무척 비슷하더군요.

- 정약용 선생은 이런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합니다. 서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계열을 등용했던 정조의 정치전략도 한 몫 했을겁니다. 여튼, 정약용 선생은 서른 가까운 나이에 정조의 초계문신제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정조의 화성 건립에도 기여합니다. 이후 경관직 뿐만 아니라 외관직으로도 근무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천주교에 나름대로 관대했던 정조 사후에는 노론 벽파에 의해 강진으로 유배됩니다.

- 강진에서 선생은 200여권이 넘는 책을 지었습니다. 저술한 책도 있지만, 편집한 책도 많이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의 저작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는 것인데요, 이미 잘 알려져 있는<목민심서> <흠흠신서>와 같은 정치 분야나 <아방강역고>와 같은 지리 분야 외에도, 교육, 토목, 의학, 자연에 이릅니다. 여러 편의 시도 썼고, 경학 예학 등에도 박식했습니다. 닭을 기르다가 <계경>(닭 기르는 방법)을 저술했다는 일화가 인상깊었습니다.

-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났을 때는, 머리와 이가 다 빠졌다고 합니다. 오직 건강에만 소홀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의 엄청난 저작에 당시 선비들도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일본 알기 열풍이 불고있었다고 합니다. 북학의 태동기이기도 했지요. 조선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적지않은 책들이 저술되고 필사되어 유통되었습니다. 물론, 선생은 그 이상이었죠. 저자인 정민은 당시 선비들의 연구와 저술 활동 자체에 관심이 있는 분 같습니다. 저자는 선생의 엄청난 활동력에 놀라는 것과 동시에 저술 방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방법 그대로 이 책을 지어냈습니다. 목차가 무척이나 깔끔합니다.

- 중복되는 부분이나 방법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들을 제외하고,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초 학습에 충실한다. (2) 무엇을 공부하고, 왜 공부하는지를 명확하게 한다. (3) 주제가 정해지면 목차를 먼저 정한다. (4)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한다. (5) 수집한 자료를 충분히 읽고 중요한 내용을 초서(카드작업)한다. (6) 목차에 맞추어 카드를 분류한다. (7) 문제의식은 끝가지 쫓아간다. (8) 저술한다. 인데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공부" 라고 선생은 여러 번 강조합니다.

- 편집 외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1) 수시로 메모하라. (2)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정돈하기 위해 서면 토론을 활용하고, 두 세명의 논평을 입체적으로 활용하라. (3) 작업을 하기 전에 조례를 정하고 작업을 분담하라. (4) 동시에 여러 작업을 병행하라. 등입니다. 공부하는 자세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학문 외적인 일에도 공부의 방법을 적용하라던지, 주기적으로 주변 정리를 하라던지, 일상에 운치를 곁들이라던지, 인간의 기본도리를 벗어난 공부는 쓸모가 없다던지 하는 조언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은 효용성이 없는 공부, 현실에 쓸모없는 공부, 공부를 핑계로 온 식구들을 배곯리며 고고한체하는 학문을 가장 혐오했다고 하네요.

-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생의 방법일 뿐입니다. 실제, 자신의 공부 방법, 습관에 적용하는 것은, 분명 한 권의 책을 짓는 것 만큼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자 역시, 논문을 쓸 당시의 저자의 경험을 살짝 들려주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하실거에요. 저 역시 꿰지는 못한 채 담고만 있는 수 개의 개인 블로그의 구슬들을 되돌아봅니다. 목적도 쓸모도 없이, 번듯한 분류에 갈무리만 해놓은 후에 거들떠보지도 않은 자료들이죠.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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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윤종찬 감독, 장진영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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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하나. 조선 땅에 일본 군대가 입성한다. 어른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직 민족 의식 따위가 없는 아이들에게, 일본 군대는 식민 지배를 위한 무력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문화일 뿐이다.

- 장면 둘. 소녀 박경원은 아버지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말했다가 혼줄이 난다. 울며 뛰쳐나온 그녀가 밀밭에서 본 것은 (안창남의 것으로 짐작되는) 경비행기이다. 아직 민족 의식 따위가 없는 아이들에게, 조선은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 가난과 여자라는 이중 굴레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나라일 뿐이다.

- 장면 셋. 일본비행학교에 입학한 박경원. 비행 기술을 배우는데 있어서 자동차 정비가 필수적이라는걸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아무튼 그녀, 밤에는 택시 회사에서 일을 한다. 학비도 벌고, 자동차 정비도 실습하고, 일석이조. 다만, 아쉽다. 실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있는 그녀의 자취가 영화에서 생략된 것이. 무척이나 겸손해보이던 감독이 영화적 재미 때문에 생략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문제였겠군.

- 장면 넷. 벚꽃비행이 있는 날. 승객은 참의원인 한지혁의 아버지, 조종사는 이등비행사가 된 박경원, 시설과 장소는 일본군의 기상장교가 되어 돌아온 한지혁이 마련한다. 그리고 박경원과 벚꽃비행을 취재하기 위해 건너온 조선의 신문기자까지, 벚꽃비행이 이들은 한 자리에 모은다. 조선의 신문기자는 갑자기 카메라 대신 총을 꺼내어 들고, 참의원들을 쏜다. 이내 총구가 한지혁을 향하는 듯 하다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눈다. "조선적색단 만세! 조국독립 만세!" 그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 장면 다섯.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있는 후원회장. 박경원은 허탈해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이 도와줄 것으로 알았다."며 말끝을 흐린다. 실제, 재일 조선인들은 그녀의 고국비행을 유사 친일행위로 생각했고,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추측하건데, 조선인들의 냉담한 반응은, 그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고위관료들을 만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 장면 여섯. 박경원에게 전해진 한지혁의 유해와 편지. 한지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 의식없이 편한대로 세상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 좀 엉뚱하긴 하지만, 이 두 장면에서 일제 시대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우리가 배워 알고있는 일제 시대의 풍경은, 대부분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일어났던 사건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테라우치나 사이토, 이승만이나 김구, 안창호, 김좌진, 신채호, 박헌영, 안중근 보다 박경원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뚜렷한 정치적 행위가,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좀 더 무게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삶들도 충분하게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지주가, 교장과 선생이, 사장과 관리자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사람들은 농사는 짓고, 학교에는 가고, 세끼 밥을 먹고, 일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나는 이들의 삶에도 관심이 있다.

- 장면 일곱. 박경원은 조선적색단 사건으로 감옥에 갖힌 한지혁을 면회한다. 한지혁은 박경원에게, 비록 일본의 전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더라도, 고국비행을 하라고 격려한다. "조선이 네게 해준 것도 없잖아.." 하지만, 애국심 따위가 아니더라도, 전쟁의 선전은 고민거리가 된다.

- 마지막으로. 초반부에 소녀 박경원이 하늘을 나는 꿈 장면만 제외한다면, 제작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비행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을 영화화 하는 데 있어서 무척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던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아쉬운 점, 물론 있다. 굉장히 여러 번 수정된 시나리오라고 하지만, 박경원의 내면에는 그다지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나 처럼 평범한 관객에게도, 고작 술에 잔뜩 취하거나,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에서 한 사람의 내면을 짐작하는건 꽤 익숙하다. 더구나, "하늘에는 남자, 여자, 조선, 일본, 그런게 없잖아."라는 대사는, 지나치게 적극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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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2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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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은 늘 주변 풍경과 함께,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시대와 함께 기억된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이효리의 <텐 미닛>이 손바느질한 이등병 계급장에 구겨진 빵모자를 쓰고 들어서던 내무반을 떠올리게 한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가 유난히 햇빛이 창창하던 중학교 등교길을 떠올리게 한다면, 최도은의 <혁명의 투혼>은 어수선했던 동아리방과 저기 종로 한복판을, 피타입의 <돈키호테>는 굉음의 자동차 공장 생산라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 한때, <7080 콘서트>가 성황리에 열렸던 것이나, 요즘 <젊음의 행진>이 재방송을 준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겝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모아놓은 음악 프로그램들이,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연도나 연령대를 제목으로 묶여서 공연되고 있지요. 음악이 한 시대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시대적 배경이 없는 음악이란 얼마나 심심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해줍니다.

- 고전음악 혹은 클래식이라면 어떨까요? '클래식'이라는 이름은 꽤나 거리감 느껴지는 장르를 표현하고 있지만, '고전음악'이라고 달리 부른다면 그저 시간적 거리감일 뿐입니다. 어제와 오늘, 인기가수 양파의 <사랑.. 그게 뭔데>를 들었던 누군가가, 지난 주말 <7080 콘서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게 이해하지 못할 취향의 변화가 아니듯, 100여년 전의 고전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아주 대단한 시도는 못된다는거죠. 다만, 자신이 살아온 햇수 만큼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도, 그 이상이 좀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함께 기억될 주변 풍경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7080 콘서트> 보다는 <SBS 인기가요>가 더 보고싶은 조카에게 "이 노래가 어떤 노래냐 하면.." 이라며 운을 띄우듯, 금난새 선생님의 <클래식 여행> 시리즈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드보르작, 스메타나, 말러, 브루크너, 시벨리우스, 그리그, 소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비제, 생상,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까지, 이름 외우기도 만만치 않은 쟁쟁한 옛날 인기스타들은, 다행이 나 아닌 조카에게는 안치환이나 김민기 만큼만 어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 금난새 선생님의 여행 안내는, 읽다보면 음악 대신 음악가의 위인전과 별 다를 바 없었던 여느 책들에서는 반 발자국 비껴 서 있습니다. 이것은 유러시안 필하모닉과 같은 명성높은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도, 해설음악회 학교음악회 거리음악회와 같이 "대편성의 교향곡을 마치 자전거 분해하듯 연주하여 청중들이 곡의 구성을 이해하게 하고, 오페라의 명장면을 모아 성악가들의 연기와 해설을 곁들이는" 그간의 선생님의 노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 잠자코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100여년 전 유럽의 어느 극장에 앉아 연주자며 관중들의 모습을 아리송하게 지켜보고 있자면, 이내 사진 속의 촌스러운 복장의 아저씨들이 그 곡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소개받게 될 것입니다. 좀 더 관심이 생긴다면, 한 장을 더 넘겨 이들의 어릴 적 모습과 대음악가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마저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곳곳에, 결국 음악가라는 신분을 감추지 못하는 여행 안내자의 연주 후일담이 숨어있다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 하지만, 여전히 갈증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화려한 사진과 삽화를 넣은 설명이라 할지라도, <서편제> 만큼 판소리를 소개할 수 없었고, <왕의 남자> 만큼 남사당을, <아리랑> 만큼 아리랑을 설명할 수 없었듯이,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모르고 드보르작과 스메타나의 국민음악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미국의 독립 1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모르고 쇼스타코비티와 프로코피에프를 이해하기는 어려울테니까요. 체신 공무원 출신이었던 무소르그스키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음악까지 찾아서 들어야 할 바에야.

- 어떤 음악적 감흥도 설명으로 채울 수는 없을겁니다. 이제 고전음악도, 스스로 시대와 분리해 '클래식 입문서'라는 폼나는 명찰로 자신을 '설명하려' 애쓰기보다는, 자신이 풍미한 시대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느껴져야' 하지 않을까요. 시대와 분리된 음악은 너무나 심심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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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 - 행복한 돈 이야기
제윤경 지음 / Tb(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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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모집하는 서평단에 운좋게 선정되었습니다. 처음 받아본 책 제목이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 표지를 멀뚱히 쳐다보며, 그렇고 그런 재테크 안내서이겠거니 내심 실망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지껏 복권 한 장 사본 적도 없으며, 그저 한 달에 15만원 씩 넣고있는 적립식 펀드에 만족하며 재테크는 먼 미래의 일로 미뤄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기 싫은 책 안읽어도 되는 세월 좋은 서평단은 어디에도 없기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 하지만, 충분히 오해할 만한 제목을 붙이고 있는 이 책은, 재테크를 하고 있지 않거나,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재테크란, 준비된 누군가에게 특별한 수익을 가져다 주는 기교(technic)가 아니라, 평범한 누구나가 응당 해야할 지극히 일상적인 계획과 준비라는 것이죠. 어디에 얼마를 어떻게 투자해서 얼마만큼의 차익을 남겼느냐 이전에, 현재 자신의 수익은 얼마이고 앞으로 얼마만큼의 돈을 어떻게 쓰려고하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준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뭐 그렇다고 해서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게 돈'이라는 분들에게 설교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올라 상당히 만족하고 있는 아무개 씨와 전매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자 상가를 분양받은 아무개 씨는, 쉽게 더 많은 이익을 노렸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혼나고 있습니다. 크게 오른 아파트 가격은 보이지만, 관리비 공과금 재산세 인상분에 종부세의 부담은 보고싶지 않은 법이죠.

- 대다수 재테크 안내서에는 반면교사로 반짝 등장하고 퇴장했을 무능력한(?) 아무개 씨도, 우리 재무주치의에게 줄곧 앉아 혼줄이 납니다. 계획과 준비란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죠. 째째하게 돈 따위 연연하고 싶지 않았던 아무개 씨, 그야 말로 "돈에 대한 강박관념이 많은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고맙니다. 심지어, 사업실패의 여파로 신용회복을 해가며 부채원리금상환에 빠듯한 아무개 씨도, 예외는 되지 못합니다.

- 자, 이제 한바탕 혼줄이 났다면, 정신 차리고 돈 안드는 재테크 계획 한 번 세워볼 일입니다. 우리 재무주치의가 돌팔이 의사가 아니라 양심에 따라 환자와 대화하는 히포크라테스인 이유도 바로 이 대목부터입니다. 무릇 의사의 역할이란, 병을 치료하는 것이지, 만병통치약에 불로초까지 소개해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3장 「금융맹 극복은 똑소리 나는 금융소비부터」을 읽다보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은행 뿐만 아니라, 평소 멀리하던 보험 증권회사 창구에 거침없이 드나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겁니다. 물론, 든든한 우리 주치의와 함께. 은행 보험 증권회사 직원들의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합니다.

-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소위 '냉철한 판단'이란, 옷이며 가전제품을 살 때 판 발품의 반만 파는데에서 시작됩니다. 옷은 크고 작은 판매자가 끝도 없이 많은 독점적 경쟁시장이니 적절한 비교가 아니라고 해도, 가전제품이야 몇 개의 판매자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과점시장이라는 점에서, 금융상품하고 별 다른 점이 없지요. 가전제품 구입할 때 가격 비교 한 번 없이 덜컥 구입하거나, "알아서 잘 만들었겠지.. 냉장고 하나 주세요!" 라는 용감무쌍한 소비자도 있나요? 용도며 크기, 가격, 기능, 심지어 에너지 효율까지 전부 따져봐야 안심이 되는 상품 구입, 금융상품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 물론, 금융시장에서 소비자들의 낮은 위치가, 단지 금융기관이나 금융상품에 대한 오해와 낡은 선입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냉장고 100대씩 갖춰놓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통장의 액수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판매자와 소비자가 동등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완전시장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해야 하는 것이, 금융소비자, 금융소비자가 모인 소비자단체(시민단체), 정부의 역할이겠지요. 착한(?) 금융회사 직원도 끼워줄까요? 아무튼 우리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금융시장에 대한 얘기야 다른 선생님들의 몫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소비자들의 대오각성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습니다.

- 아무튼, 금융주치의 제윤경 선생님은 앞으로도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재무설계>에서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풀어나가실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직까지 창구 앞 1m 전에서 망설여지는 분이라면, 선생님의 계속 진료를 받으시면 될 것 같아요. 치료는 끝났어도 의사 선생님하고 한 마디라도 더 하는게, 우리 의료서비스 소비자의 권리니까요.

[참, 선생님] 현장감 넘치는 예시는 좋지만, 등장 인물이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연형 돈맹은 시민단체 활동가 귀찮이형 돈맹은 공무원이라고, 선생님께서 다 말씀하시면, 어떤 독자들은 지레짐작할 재미를 뺐기고, 어떤 독자들은 "아.. 원래 그런가보다." 할지도 모르니까요. 또, 금융소비의 현명하지 못함을 신체적인 불편함인 '맹'에 비유한 것은 적절치도 않고, 배려가 필요한 대목인 것 같아요. 맹인들이 지팡이에 의지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는 삽화도 아쉽구요. 물론, 우리 선생님의 마음이야 200쪽 넘게 읽었으니 오해하지 않지만, 더 좋은 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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