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 갈무리신서 2
크리스 하먼 지음, 김형주 옮김 / 갈무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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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의 동독, 1956년의 헝가리와 폴란드, 1968년의 체코, 1980년의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노동자 투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68년의 체코는 '프라하의 봄'으로, 1980년의 폴란드는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 레흐 바웬사의 연대노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소위 사회주의 국가의 폐해 내지 침략상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크리스 하먼의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은 좀 더 폭넓은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위 사건들을 관통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동유럽의 이러한 격변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1985년의 뻬레스트로이카, 1991년의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 못지 않았던 격변들이, 다시금 '노동자의 국가'라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의 성격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 저자인 크리스 하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합니다. 이는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인데요, 크리스 하먼이 이를 동유럽 사회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것입니다.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이 1945~1983년 사이의 동유럽 사회를 분석한 글이라면,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은 1985년 소련의 뻬레스트로이카를 비롯해 1980년대 말의 동유럽 사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 국가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국가관료들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본주의를 뜻합니다.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기본으로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발전 초기단계나 전시(戰時)경제에서, 국가가 사적자본 대신 생산수단에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자본주의입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시적 혹은 전략적으로 나타났던 반면,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서는 50년 이상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 다릅니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혁명가들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당의 레닌 조차도, "이 혁명은 (그 당시 가장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고립되어 패배하고 말 것이다."라고 했죠. 하지만, 독일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19년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한 독일공산당의 소수가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독일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군인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 이제 혁명 러시아는 고립되었습니다. 많은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지만,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기존 기득권층과의 혹독한 내전을 치뤄야 했습니다. 혁명을 세계로 확장시키기는 커녕, 러시아에서의 혁명정부를 지키기에도 버거웠던 것이죠. 그리고, 내전의 와중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 100여년 전 러시아는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습니다. 아직도 인구 대부분은 농민들이었죠. 인구의 10%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산업화된 도시를 차지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당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며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뤘던 많지 않던 노동자들은 더욱 소수가 되었고, 1924년에는 급기야 레닌마저 사망하면서 볼셰비키당의 성격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 일국사회주의론, 즉 일국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는 가능하다는 주장이 등장하는 것이 이 즈음입니다. 이는 1924년 스딸린의 저작 <레닌주의의 기초>에 처음 소개되는데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와 레닌이 부인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국가 수립 가능성이 하루 아침에 뒤집어졌는데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던 러시아가,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경제 발전의 관건은 축적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과 봉건사회와 달리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공장과 같은 대규모적인 설비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런 설비를 마련하기 위한 폭력적인 축적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이런 축적은, 식민지 무역이나 엔클로우저와 같은 일방적인 자원과 토지의 강탈, 노예 매매, 아동 노동과 같은 극심한 노동착취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생산자들의 이해와는 괴리된, 경쟁적 축적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고 생산자들을 위한 경제체제를 만들자며 자본주의를 타도한 혁명 러시아가, 경쟁적 축적을 해야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경쟁적 축적이 존재하는 사회, 그것은 더 이상 사회주의가 아니었습니다.

- 스딸린은 “우리는 선진국들에 비해 50년에서 100년 정도 뒤져 있다. 그 간격을 우리는 10년 안에 없애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국사회주의의 선포와 함께, 주변국과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죠. 당시 스딸린의 고민은, 세계 자본주의에 합류하고자 했던 개발도상국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구요. 이 저개발 국가들은, 기존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사적 자본도 형성되어 있지 않고, 설사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대규모적인 축적을 위해서는 사적 자본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이 국가 경제계획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국가 주도의 경제계획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던 러시아가 신속했습니다. 그래서, 이 국가들은 적어도 초기에,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합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동유럽 국가들로 넘어가야겠군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 식민지 분할에 있어서, 소련은 서구 열강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했는데, 동유럽 국가 체제의 성격은 소련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습니다. 서유럽 국가 체제의 성격이 미국과 영국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듯이 말이죠.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각국 공산당들은, 연립정부의 형태로 집권하게 됩니다. 이 국가들에서도 전쟁 이후의 산업 발전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안정된 직후인 1947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를 시작으로 광범위한 국유화가 진행됩니다.

- 국가 주도의 산업 발전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산업은 1960년대에 이르자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자국 내에서의 축적은 무리 없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상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외와의 교역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여기에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까지 더해져, 필연적으로 국내 산업이 재편되었습니다. 중공업 분야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소비재 공급은 더욱 줄어들었고, 소비재 산업에 대한 투자 역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왔고, 불만을 촉발시켰습니다. 또 다른 방편으로 차관을 들여온 국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관을 통한 산업 발전 효과가 미미하자, 이것이 상환할 수 없을 정도의 채무로 바뀌면서 도리어 국가 경제를 발목잡기도 했습니다.

- 경제 위기와 함께 해결책은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 대신, 기업 스스로 계획하고,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두되었고, 이것은 곧 국가기구를 분열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체제의 변화가 단순히 그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 계획경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력구도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주창하는 세력이, 기존 권력구도에서 어느정도 비켜서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동유럽의 격변이란, 경제 위기에서 시작하지만, 이러한 국가관료들의 권력싸움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소련에서는 스딸린과 흐루시쵸프가, 헝가리에서는 라코시와 임레 나지가, 체코에서는 노보트니와 두브체크가, 폴란드에서는 고무우카가 그러합니다.

- 경제 위기와 암암리에 이루어진 국가관료들의 권력싸움은, 1953년 스딸린의 사망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스딸린 통치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소위 개혁파들에게 무게를 실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소련과 스딸린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통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각국의 국가관료들이 밀려나게 됩니다.

- 극심한 축적으로 인한 소비재의 부족과 경제위기로 고통받았던 대중들은, 기존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옛 집권세력들에게 분노했고, 임금 인상을 비롯한 소비재의 공급과 정권 교체(정치적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개혁파 국가관료들은 대중들의 '정권 교체' 요구에 실려, 자신의 집권을 추구합니다. 폴란드의 고무우카가, 헝가리의 임레 나지와 같은 개혁파 국가관료들이 이런 방식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 물론, 옛 집권세력들과 개혁파 국가관료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습니다. 개혁파 국가관료들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중앙계획경제를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고자 했지만, 국가관료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이 옛 집권세력들을 끌어내리자 마자 새로이 집권한 후, 약간의 양보조치(임금 인상, 언론의 자유)를 취하고는 입을 씻었던 것입니다. 소련 역시도 동유럽 각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때 마다, 어김없이 탱크와 군대를 투입했구요.

- 물론, 대중들이 한결같이 개혁파 국가관료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개혁파 국가관료들의 해결책(시장의 도입)이란, 경쟁적 축적의 필요라는 측면에서는 중앙계획경제와 한치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혁파들은 축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 축적 자체를 해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국가자본주의 정권에 대항한 동유럽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동유럽 국가들의 성격을 밝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느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투쟁 일반의 경험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체제 위기 아래에서 일어나는, 상층 국가기구의 분열과 대중기구의 수립이라는 하나의 정형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며, 거의 모든 노동계급을 포괄하는 강력한 대중기구라 하더라도 명확한 정치적 강령을 가진 정당과 결속되지 못한다면, 결코 정치적 대안으로 떠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60년대의 동유럽의 격변은,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소련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로 대변되는 개혁파들은 뻬레스트로이카라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 옛 집권세력을 겨냥한 글라스노스트를 실시했고, 이미 느슨해져있던 동유럽 국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극도로 약화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에는 또 한차례 격변이 일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고, 체코에서는 시민포럼과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대대적인 민영화와 외자 유치가 추진되었습니다.

- 하지만, 변화는 '변한 것은 없다'라는 역설적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국가관료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기업을 불하한 후, 기업가로 명함을 바꿔 스스로 불하받고 있습니다. 북치고 장구치는 이들의 행태 속에서 '동구권의 몰락'은 호들갑이 유난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국가관료가 독점하든, 자본가가 독점하든,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경제 체제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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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어떻게 읽을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6
박애경 지음 / 책세상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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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극단적인 이분법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그냥 즐기자."는, 음악평론가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입니다, 이것은 반쪽의 진실을 담고 있는 비난입니다. 음악은 분명 즐겨야 할 대상이지만, 평론이 쓸모없는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는 행위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반쪽의 진실로 나머지 반쪽을 왜곡하니 비난일 수 밖에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평론은 음악을 두배로 즐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것은 드라마의 NG장면이나, 기자들의 취재후기에 비유할 만 합니다. 음악의 앞과 뒤에 가려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시켜주고, 3~4분의 짧은 감흥 속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물론, 감추어진 이야기들만을 소개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평론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음악을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고, 두배로 즐길 수 있습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는 대중가요를 듣는 것 만으로 만족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곡이 발표되는 대중가요 시장에서 듣기 좋은 곡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루해질 만 하면, 새로운 곡을 들으면 그만이었죠. 변화는 이런 만족이 불만족으로 바뀌면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저와 다를 바 없이 하루 1시간 정도 음악을 듣지만 월등한 만족감을 느끼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음악을 저보다 더 즐기고 있었죠. 저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따라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김광석을 들었고, 정태춘을 들었죠. 노래 제목 보다 앨범 제목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방식은 변했지만, 만족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느닷없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하이텔 힙합동호회 사이트를 발견한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서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았던, 한국 힙합의 역사를, 그리고 그 속에서 몇몇 유명한 힙합가수들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네."로 시작된 호기심은, 결국 지난 유행가들을 다시 듣게 했고, 듣고 싶은 노래목록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힙합 음악은 이전에는 없었던 만족감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재밌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 서문에서 저자는, 90년대 들어 대중가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리뷰> <이매진> <이다> 에서의 대중가요 평론은 이러한 대중가요의 양적 질적 확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위문화로 불리우던 대중가요가 문예지에 실리면서, 기존의 고급문화-대중문화의 구분이 퇴색된 것이죠. 저자는 이런 전환기를 맞아, 대중가요의 개념적 정의를 통해서, 대중가요의 인기와 성장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고민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90년대를 통과해 온 힙합, 록, 포크, 뽕짝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 이런 저자의 노력은 교통정리에 비유할 법 합니다. '교통정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재미없는 주제이지만, 이 재미없는 주제는 결국, '어떻게 많은 자동차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필요를,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이미 마련된 제도 아래에서 별다른 불편 없이 교통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노력들이 잘 와닿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 가요 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가요평론가들의 노력 없이도, 대중가요를 거리낌없이 듣고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저자의 노력 덕분에 대중가요의 빛이며 그림자인 '통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여전히 통속적인 가요계 내에서도, "모든 가요는 통속적이야."라는 쓸모없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가요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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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 보고 듣는 클래식 이야기 04
애너 하웰 셀렌자 지음, 조앤 E. 키첼 그림, 이상희 옮김 / 책그릇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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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클래식은 '교양있는' 상류층 만의 음악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은 한 음악이 사회에 자리잡게 된 특정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지, 음악 자체로 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3~4분 정도의 길이인 대중가요에 비해 길이가 긴 것도, 클래식과의 거리를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음악과 영화를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대중적인 문화라는 측면에서 비교하자면) 우리는 3~4분 길이의 대중가요와 120분 길이의 대중영화에 모두 집중을 하니까요. 우리가 클래식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지, 클래식이 우리로 부터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 선입견은 또 있습니다. 보통의 문고판 보다 크기가 크다고 해서, 과장된 몸짓의 그림이 등장한다고 해서,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림은 글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좀 더 잘 표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하지만 이해력이 조금 부족한 아이들에게도, 이해력은 갖추었지만 선입견으로 둘러쓴 어른들에게도, 글과 그림으로 된 이야기는 클래식으로의 좋은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 보통 어떤 음악을 듣고 "좋다." 라고 표현할 때, 사람마다 만족의 내용이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음악의 선율이 좋아서, 어떤 이들은 음악의 가사가 좋아서, 어떤 이들은 가수의 목소리가 좋아서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수와 가사가 없이 연주로만 된 클래식은 만족의 폭이 좁을 수 있을텐데요, 책그릇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보고 듣는 클래식 이야기' 시리즈는 클래식에 대한 만족의 폭을 대중가요 만큼이나 넓혀줄 것입니다. 우리가 대중가요를 들으며, 가사가 연상하는 자신의 경험이나,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짧은 비디오 영상을 떠올리듯, 우리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카이제를링크 백작의 집에서 밤새 하프시코드를 연습하던 골드베르크를,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백작의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심하던 어린 소년의 열정을 떠올릴 것입니다.

- '보는 것'을 통해 곡에 담긴 사연을 알았다면,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듣는 것'을 통해 클래식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대중가요에는 없는, 클래식만의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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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삶과 전설 1
부사령관 마르코스 지음, 주제 사라마구 서문, 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윤길순 옮김 / 해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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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티스타 운동. 이들이 계승하고자 하는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911년 멕시코 혁명의 주역으로서, 원주민 자치권과 토지 개혁을 요구해 1917년에 헌법으로 제정시켰습니다. 100여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 벌어지고 있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곧, 헌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음을, 원주민의 자치와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 멕시코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영국을 시작으로, 봉건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모든 곳에서 토지 개혁의 요구는 있었습니다. 지주-소작농 관계에서 자신이 직접 생산한 생산물의 대다수를 빼앗겨왔던 이들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주기를 바랬던 것이죠.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졌고, 소작농과 소농들은 자신이 일구어온 토지를 분배받기는 커녕 빼앗긴 채, 생존을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1960년대 자본주의 한국이 그러했고, 오늘날 자본주의 중국이 그러하듯 말이죠. 땔감으로 쓸 나무 한 그루만 내 손으로 베어도, 가혹한 법적인 처벌을 받는 곳. 그곳이 바로 사파티스타 운동의 진원지인,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주입니다.

- 멕시코에서는 그 진통이 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도록 땅을 갈아 생계를 유지해왔던 원주민들은 1911년 멕시코 혁명 이래로 줄곧 토지 개혁을 요구해왔으나, 1992년 토지 개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토지 사유화가 결정됩니다. 종료된 토지 개혁과 강행되는 사유화 앞에서, 원주민 공동체들은 1993년 원주민혁명비밀위원회를 구성하고, 10년 가까이 무력 항쟁을 주장해 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인정하게 됩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NAFTA 가 시행되던 1994년 1월 1일, 그렇게 사파티스타 운동은 시작됩니다.

- 기실 사파티스타 운동이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100여년 넘게 지속되어 온 '원주민의 자치, 토지 개혁'이라는 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주목받았던 것 뿐입니다. 이들은 과거와 달리 인터넷을 이용해 전 세계로 자신들의 요구를 알렸고, 정치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1994년 8월에는 6,000여명이 참석한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개최했고, 1996년 4월에는 전 세계에서 참가하는 대륙간 엔쿠엔트로(encuentro)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70년간 집권해오며 행정 입법 사법을 독점하고 토지 개혁을 끝내버린 제도혁명당(PRI) 대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와 원주민 공동체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통해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자는 계획까지 제안했습니다.

- 하지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은 이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94년 2월 시작되었던 평화회담은 무위로 끝났고, 1년 후에 재개된 회담을 통해 '산 안드레스(san andres) 협정을 통해 일정한 합의에 이르렀지만, 법률로 제정되지 못하고 결국 협정이 폐기되기에 이릅니다. 2001년 무장을 해제한 사파티스타 원주민들과 20여만명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이행을 촉구했지만, 협정에서 협의된 내용은 몹시 후퇴한 채로 입안되었습니다.

- 사파티스타 운동에 국한되지 않은, 토지 개혁 운동의 근본에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있습니다. 봉건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규모 자본(토지)의 축적과 이를 바탕으로 한 규모의 경제가 그것입니다. 새로운 생산관계의 문제는 '규모의 경제'라는 월등한 생산력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어내기 위한 '생산관계'에 있습니다. 대규모 자본(토지)의 축적이죠. 자본과 토지를 축적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산관계는 합의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었습니다. 토지의 실질적인 생산자였고 소유자여야 할 이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소유권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 단지, 결정의 비민주성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제된 자본주의화의 혜택 역시도 올바르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방적인 약탈행위는, 오로지 축적된 자본(토지)을 독점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더 많은 자본과 토지,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계화를 하는 것이지, 그들이 내세우는 것 처럼 세계적인 경제 분업과 효율적인 생산이라는 경제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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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감시 권력인가 정치적 무기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1
조지형 지음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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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2004년 3월에 있었던 대통령 탄핵 사건을 즈음하여 쓰여졌습니다. 한국 헌법이 미국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해, 미국의 대통령 탄핵 사건들을 소개하며 탄핵의 의미와 절차상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닉슨, 존슨까지 모두 3명의 대통령이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클린턴은 소추되었으나 부결, 존슨은 소추 자체의 부결, 닉슨은 소추되기 직전에 사임을 했기 때문에, 탄핵이 결정된 사례는 없는 셈입니다.

- 탄핵 역시도 형사법과 같이, 탄핵안의 상정, 조사, 고발, 재판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탄핵안 상정이 '고소 고발'에 해당한다면, 상정된 안이 객관적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정식적으로 고발하는 과정은 '기소'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탄핵에서는 이것을 '소추'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추된 탄핵안은 재판을 거쳐 탄핵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죠.

- 탄핵 절차에서 미국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두가지로 보여집니다. 소추된 탄핵안에 대한 재판권과 탄핵 사유에 대한 규정이 그것입니다. 탄핵안에 대한 재판권에 있어서, 미국은 상원의회가 한국은 헌법재판소가 권한을 가지고 있고, 탄핵의 사유에 대해서는, 미국은 반역행위 뇌물수수 등과 같은 구체적 항목이 규정된 반면, 한국은 '직무 집행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을 위배한 경우'라고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추의 권한이 국회에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 저자가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과 같이, 탄핵이란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권력이자 감시권력이면서, 동시에 정당정치에서 다수당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겠죠. 입법부와 행정부의 상호견제를 위한 제도적 절차에 주목하는 것 보다는, 두 권력 자체의 민주적인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 '탄핵 반대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도 있었습니다.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지만 우익들의 정치공세를 방어하기 위해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과, 원칙적으로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대립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시기에 여당 우익 후보들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는 야당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와 원칙적으로 독자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독자후보' 논쟁과 비슷합니다.

- 짧은 생각이지만, 저는 후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싶습니다. 운동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세력화가 아닌 '정치'세력화에 있다면, 자신의 정치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서 정치활동을 해야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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