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없는 대안 원자력 발전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22
신부용 지음, 황주호.이임택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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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2003년 여름에 시작되어 한해가 넘도록 지속되었던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 유치 반대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부안 사태', 혹은 '부안 민란'이라고 지칭했을 정도로, 방폐장 유치를 둘러싼 정부와 부안군민 사이의 갈등은 깊었고 격렬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군민들이 모여 촛불시위와 상경집회를 벌였고, 정부와 부안군청을 향한 분노는 전․의경들과의 마찰로 번져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4년 1월 정부가 주민투표법을 공포한 이후로도 1년 여간 계속되었다. 결국, 새로운 방폐장 부지를 선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 갈등은, 농사를 짓거나 구멍가게를 하던 평범한 시민 43명이 구속되고, 지역 공동체가 분열하는 상처로 계속 이어졌다.

부안의 갈등은 이제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우리 국민들 사이에 핵과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방폐장 설치를 둘러싼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1990년 안면도, 1995년 굴업도를 비롯해 20여 년간 무려 8차례나 시도했으나 실패한, '숙원의 국책 사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니, 상처가 아물어가는 지금이야 말로, 허심탄회하고 진지하게 핵과 원자력, 그리고 에너지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이다.

이런 노력에 갈등의 두 주체였던 정부, 국민과 더불어 에너지 전문가들의 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어떤 지역에 방폐장을 설치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현재 전체 에너지 소비의 15%에 불과한 원자력 발전의 향후 전망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며, 그에 앞서 "핵과 원자력 발전은 안전한가? 그리고 필요한가?"라는 국가의 에너지 전략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부용 박사의 <대안 없는 대안 원자력 발전>이 놓여진 자리가 이곳이다. 저자는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선정위원으로 활동한 분으로서, 전문적 지식과 더불어 일선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방폐장 설치의 첫 번째 쟁점은 시기였다. 국책사업을 20여 년간 미뤄왔던 정부에게도, 하루  아침에 방폐장 유치 결정을 접한 부안군민들에게도 시기 문제는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안군 내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은 논외로 하더라도, "방폐장 설치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찬성측과 반대측의 의견은 달랐다.

하지만, 시기와 관련한 문제를 살피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우선, 에너지란 공기와 같아서,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고도 먼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루도 전기나 석유와 같은 에너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에너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은 월말의 사용료 고지서를 받아볼 때가 고작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의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전기와 석유는, 우리가 사용하기 쉽게 가공한 최종적 형태의 에너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1차 에너지는, 45%가 석유, 24%는 석탄, 원자력과 LNG가 각각 12%와 14%, 물이 나머지 1%를 차지하고 있다. 한눈에 석유와 석탄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석유와 석탄 같은 1차 에너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원들을 거의 대부분 수입하고 있으며, 그중 석유의 수입량은 세계 4위에 달한다.

시기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에너지 자원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이상, 한국의 에너지 전략 역시, 세계 에너지 상황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에너지 확보 경쟁이야말로, 석탄과 석유 자원의 고갈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석유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으며 중동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고, 중국 역시 러시아와 합심해 중동에서의 석유 확보에 들어갔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장들까지 나서서 시베리아,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세계 4위에 달하는 한국의 석유 수입량은 단지,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70%가 총성 없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머지 30%만이 우리 스스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 이것이 바로, 30%의 절반(14%)을 차지하고 있는 원자력 발전 전략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자력 발전의 시기 문제는, 단지 원자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속가능한 에너지 공급 전략에 관한 문제이며, 해외 의존 비율을 줄여 좀 더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청정에너지․그린에너지와 같이 '환경 친화적' 이라는 수식어를 독차지하고 있는 에너지 발전 역시, 환경의 영역에서 벗어나, 에너지 공급 전략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쟁점은 안전성이었다. 안전성은 시기 문제 보다 더 뜨거웠던 쟁점이자 중요한 쟁점이었다. 부안군민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는 것이 무시하지 못할 사실이었고, 여기에는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과 1986년 구(舊)소련의 체르노빌과 같은 원전사고의 기억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물론, 국민들의 여론이 절대적 다수라 해서 그것이 곧바로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불신이 전적으로 무지로부터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원자력 발전은 방사능 누출 위험이 있으며, 폐기물은 방사능이 약한 것조차도 최소 300년을 관리해야 하며, 수명이 다한 발전소를 폐기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란 드럼통에 새겨진 검은색의 방사선 심벌마크가 주는 인상과 달리, 그것은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핵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우리 생활과 극단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사선의 강도이며, 우리는 이미 일상적으로 약한 강도의 방사선을 쬐고 있다. 우리는 방사선의 강도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X선, CT 촬영에서와 같이 의료 보조용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갑상선 치료, (방사성 물질인) 라돈 목욕탕, 등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방사선을 이용하는 기관은 전국에 걸쳐 2,500여개에 달할 정도이다.

물론, 원자력 발전에는 의료용 이상의 강도가 사용되며, 높은 강도의 방사선은 신체에 여러 가지 악영향과 더불어 사망에 이르게 할 위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의 원료로 사용되는 순도 2~5%의 우라늄235 그 자체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터질 수가 없다. 이는 마치 맥주와 같이 알코올 함량이 낮은 술에 불이 붙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따라서, 스리마일 섬이나 체르노빌과 같은 원전사고에서도 사고의 원인이 된 것은 원료 자체가 아니라, 원료를 발전하는 원자로의 결함이며, 흔히 오해하는 바와 같이, 방사선에 과다 노출되어 사망한 이들에게서 유전에 따른 기형출산과 같은 사고는 없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조사 발표이다.

이렇듯 쟁점이 되었던 '시기'와 '안전성'의 문제는, 좀 더 면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나무를 석탄이, 석탄을 석유가 대체했듯이, 원자력이 석유를 제치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떠오를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원자력 역시, 19세기와 20세기를 풍미했던 석탄 석유가 그러했듯이, 과거의 에너지원이 가진 단점을 보완하면서 더 높은 효율을 제공하는 기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자력 에너지의 광범위한 이용과 특성을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기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개발했고 이용하는 사회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기술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 이득이 될 수도 손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자력 발전이라는 인류가 발명한 기술을 한국 사회의 소통 구조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저자 역시, 방폐장 설치를 둘러싼 논의 구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타국의 에너지 경영 사례들과 반핵운동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스웨덴의 사례를 강조하고 있는데, 한국과 같이 지하자원이 부족하고 동시에 공업국이라는 점에서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스웨덴에서는 탈(脫)원자력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대체에너지가 개발될 때 까지는 한시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운용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화력과 대규모 수력 발전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 현재 50%를 원자력이 40%를 수력이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정당과 국민 사이에 충분한 논의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국민들은 고비용의 청정에너지 사용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갈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들은 스웨덴의 사례를 인용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GDP를 비롯한 양국의 경제적 능력은 물론이며, 국가 예산의 쓰임새를 비롯한 국민 복지의 차이가, 스웨덴과 한국을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국민들이 국가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 청정에너지 사용에 따르는 고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의식수준과 더불어 우선적으로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당이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해 정책으로 입안, 시행하는 것은 분명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한국 정부 역시, 오랫동안 원자력 발전의 안정성과 보완대책을 강구해왔다면,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민들의 가치관과 에너지 발전은 한가지만을 선택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의사소통 채널을 마련하고, 저자와 같은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도록 권장해주어야 한다.

저자가 비판해 마지않는 반핵운동 단체 및 환경운동 단체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사법처리 운운하기 보다는, 끌어안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국가 에너지 전략의 로드맵은 정부와 시민단체, 국민과 지방자치단체까지 광범위하게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옛 격언이 있다. 치열해지는 국제사회의 에너지 경쟁에 패배해 암흑천지가 될 것이라는 극단적 위기론 보다는, 합리적인 의사소통 구조 속에서 국민적인 에너지 경영의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야 말로, 2003년의 부안과 같은 국가적 갈등을 줄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에너지 선진국이 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저자의 노력이 빛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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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의 쿠바 - 체 게바라와 함께 한 혁명의 현장
그레고리 토지안 지음, 홍민표 옮김, 오스왈도 살라스.로베르토 살라스 사진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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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기자이자 사진작가인 그레고리 토지안 이지만, 책의 절반은 오스왈도 살라스, 로베르토 살라스 부자(父子)의 사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아버지 오스왈도와 아들 로베르토는 1959년 쿠바의 민주화(저는 이 글에서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하고자 합니다.) 이후 쿠바로 돌아와, 새 정부의 신문이었던 <레볼루씨온> (Revolucion, 혁명) 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해왔습니다. 이들의 사진이 곧 쿠바의 사진이라고 할만큼, 이들은 새 정부 이후의 모든 변화들을 사진으로 담아내었습니다.

- 쿠바 보다는 카스트로에 좀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정치혁명 이후의 쿠바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만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은 혁명을 전후로 한 카스트로, 그리고 체 게바라의 활동에 맞추어져 있지요. 그나마, 사진은 글을 풍부하게 하지만, 글을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 하지만, 이를 두고 불평하는 것은, 직접 책을 고른 독자로서의 도리가 못됩니다. 카스트로는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오랜 군부독재로 고통받았던 쿠바를 민주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고, 망명자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던 '726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살라스 부자 역시 726운동을 통해 카스트로와 민주화 운동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이들은 운동가이기 이전에 자신들의 조국을 사랑했던 사진작가였을 뿐입니다.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쿠바에도 있다. 나는 눈먼 박쥐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도시의 거리를 걷더라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뉴욕? 5번가에서 쇼핑을 하는 여자는 뉴욕이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럼가에 사는 사람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옳다."

- 물론, 아들인 로베르토 살라스가 아직까지 사진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그의 사진에서 쿠바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떨어진다는 아쉬움마저 지울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쿠바 정부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레볼루씨온>이 이전만큼 넉넉한 필름과 지면을 그에게 허락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 <레볼루씨온>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레볼루씨온>은 새 정부의 기관지로서, (책에 등장하는) 살라스 부자의 사진을 통해 쿠바의 기층 민중들에게 새 정부의 활동을 홍보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신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것과는 달리 사진 일색의 신문이었죠. 그것은 오랜 독재 아래에서의 쿠바 민중들의 교육율이 무척 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민중들에게, 사진으로 닿고자 했던 새 정부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 우리가 알고있다시피, 쿠바는 새 정부 이래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지정책의 한편으로 생필품의 부족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쿠바의 새 정부는 1959년의 정치혁명 이후에 곧바로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미국의 농업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면서 경제제재와 금수조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무역으로부터의 단절이란, 사탕수수 무역을 통해 경제를 일으키고 싶었던 쿠바인들에게 꽤나 절망스러운 것이었죠.

- 그것은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인한 원조의 중단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고 오늘의 쿠바에 이르렀습니다. 살라스 부자의 사진에는, 1961년 일주일에 한번 자발적인 노동일을 지정하고 앞서 실천했던 체 게바라와, 1965년 국민 누구나 사탕수수 제배에 동참시키고자 했던 카스트로가 있습니다. 이제 쿠바의 새로운 사진작가들이 바통을 넘겨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1959년의 카스트로는 여전히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카스트로의 쿠바를 넘어 쿠바인의 쿠바를 조명해주길 기대합니다.

※ 스페인어를 번역하는데 있어 몇가지 문제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발음 그대로 한국어로 쓰되, (괄호 등을 덧붙여) 원래의 표기와 뜻을 동시에 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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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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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알라딘 회원 로쟈님의 서재를 통해서 안건모씨의 인터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식인들의 어려운 글쓰기와 <좋은 생각>의 나쁜 글쓰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비판' 보다 '통렬한'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구나 비판을 하지만, 그 처럼 통렬하게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었죠.

"<작은책> 작업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지 아나? 철학사상연구회에서 항상 글을 연재하는데, 원고를 받아서 쉽게 고치는 게 제일 어렵다. 엄청 어렵게 쓰니까, 무식한 노동자들도 그냥 술술 읽을 수 있게 애를 쓰는데 힘들다."

"<좋은 생각> 같은 잡지도 있는데, 그건 전혀 아니다. 그 잡지는, 내가 '조선일보하고 비슷하다'고 욕을 할 정도다. 그 책에 따뜻한 글들이 많지만, 거기에는 현실이 없다. 내가 양보하면 세상이 다 따뜻해진다는 게 결론이다. 그렇게 사람 생각을 마비시키는 글이다. 그런 잡지는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많이 나오고 잘 팔린다. 그런데 그 책들은 결론이 없고 현실이 없다. 아빠가 택시기사인데, 아빠가 어렵고 힘들고 고생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왜 힘들고 고생하는지는 안 나온다. 비정규직 엄마가 일하는데, 비정규직이 만들어지는 그 구조가 있지 않나. 그런 건 안 나온다.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행복했다, 그런 내용이다. 저런 책이 널리 퍼지면 안된다고 본다."

-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를 통해, 그가 그동안 <작은책>과 <한겨레21>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두어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20년간 줄곧 시내버스를 몰아온 한 노동자의 인생과, 내림과 동시에 잊혀져버리던 시내버스 안의 사람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시내버스 회사의 부조리, 또 그것을 바꾸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 그는 아무런 기교 없이도, 유쾌하지 않은 일상을 유쾌하게 써냅니다. 20년간의 소외된 노동도, 막히고 덥고 짜증나는 시내버스 안의 풍경도, 불법과 합법의 폭력이 난무하는 노사 대립의 현장도, 어둡고 외로운 노동자로서의 외침도, 그의 글 안에서 만은 어둡고 칙칙하지 않습니다.

- 그 모든 일상에 저자 안씨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온갖 공장과 노동일을 전전긍긍하다가 시내버스를 만나 비로소 안착했다는 버스 노동자 안건모, 당골 손님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정겹게 인사하는 안건모, 회사의 불법적인 착취와 부당노동행위, 게다가 뒤통수까지 때리는 어용 노동조합 앞에서 "내일부터 월차 적치하세요."라고 던지고 나와버릴 수 있는 안건모, 불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버스일터 모임을 통해 동료들의 목소리를 모으고자 노력하는 안건모. 그런 안씨가 있기 때문에, 일상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 이제는 <작은책>의 편집장이 된 안씨. 그가 더 많은 '안씨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쉽고, 자신있고, 당당한 '안씨들'의 목소리가 더욱 울려퍼지도록, <작은책>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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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쓴 안건모입니다. 리뷰를 쓴 분들에게 뒤늦게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 책을 좋게 평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읽으신 분 같습니다.
저는 지금은 월간 <작은책>이라는 진보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에서 언론 운동, 문화운동으로 바꾼 셈이지요. 노동자들 소식을 전하는 책입니다. 사이트에도 들어 오셔서 구경하시고 작은책도 널리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www.sbook.co.kr
02-323-5391
 
사회주의와 노동자 정치
오세철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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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에 예의 빠지지 않는 정치 얘기.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냅니다. 좀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논쟁이 무르익는 것과 함께 막차 시간이 다가오면, 소소한 일상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옮깁니다. 그리고는, 시간에 맞춰 터덜터덜 집으로 향합니다.

- 이것이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는 국민 일반의 정치 참여는 아닐까요. 정치인의 그것과 국민들의 소소한 일상이 서로 떨어져있지 않을진데, 우리는 늘 이것을 분리합니다. 전자에는 격렬한 논쟁으로, 후자에는 한숨섞인 자조로 대합니다.

- 정치가 청와대나 여의도에만 갇혀있을 때, 우리는 4년 내지 5년에 한번 정치에 참여할 뿐입니다. 물론, 좀 더 적극적인 방법도 있습니다. 의회정치 내에서는 정당을 만들 수 있고, 바깥에서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정부와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의회민주주의 아래에서, 정치가 국민들의 뜻을 올바르게 대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정당이 국민에게 다가오던지, 국민이 정당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술자리 정치 얘기는, 이 두가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공허합니다.

- 과거를 돌아보건데, 두 가지 방법 바깥에 술자리 정치 얘기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중적인 시위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중적이라 꼽히는 60년 419, 87년 610 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419는 대통령을 하야시켰고, 610은 대통령 직선제를 따냈습니다. 결코 무기력하지 않았습니다.

- 술자리 정치 참여와 대중적인 시위를 통한 정치 참여. 전자에 비해 후자는 무기력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인데요, 그것을 비제도적 정치 참여의 한계라고 일반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제도적 정치 참여는 접근성이 떨어지고, 비제도적 정치 참여는 일상적이지 못한 것이죠.

- 사회주의 정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합니다. 정당이라는 책임있는 정치적 결사체로서의 장점과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참여라는 장점을 한번에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죠. 직업적 정치인이 아닌 국민들로 구성되는 정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 물론, 사회주의 정당이 기본시하는 위와 같은 명제는, 자본주의 정당도 얼마든지 추구하고 있는 목표들입니다. '진성당원제'가 대표적인 경우가 되겠죠. 소수 몇몇이 내는 거액의 후원금이 아니라, 다수 당원이 모은 소액의 당비를 통해 당을 운영하겠다는 것이 기본적인 취지입니다.

- 따라서, 이러한 형식만 가지고 사회주의 정당을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내용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이어야 합니다. 자신을 포함한 어떤 정당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우리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이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 내용입니다. 이러한 정당의 정치적 목표가 활동 형태를 규정합니다. 이 정당에게 집권은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 사실, 우리에게 '사회주의 정당' 보다 더 익숙한 것은 (그나마 최근의 일이지만) '진보 정당'입니다. 우리는 기존 정당과의 차별성을 '표방'하는 정당들을 뭉뜽그려 진보 정당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기준에 따르자면, 아직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정당은 아직 한국에 없는 셈입니다.

- 물론, 그동안 사회주의 정당을 조직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시도가 있어왔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결실이 없었던 것 뿐이지요. 사회주의 정당의 내용과 형식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그간의 얘기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저자인 오세철 교수가 말하려는 바가 그것입니다.

- 오세철 교수는 정년을 5년 남겨두고 그가 오래도록 몸담았던 연세대학교 교정을 떠나왔습니다. '좀 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는 1975년, 3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연세대 교수가 되었지만,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의 유신반대 투쟁을 보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자 故이한열의 죽음을 보면서 직접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 그는 먹고사는 문제의 궁극적 표현이었던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정치 활동의 궁극적 표현인 정당 조직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정치연합, 민중당,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정치연대, 노동자의 힘, 사회주의정치연합(준)에 이르기까지, 20년에 가까이 그는 사회주의 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 2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은 무게와 더불어 무기력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며, 동시에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단체와 조직의 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처음에 말씀드렸던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은, 그가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내용과 형식에 입각해서만 정당을 조직하려는 그의 노력은 오늘도 '사회주의정치연합(준)'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각각의 길을 걸어온 사회주의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조성해, 정당을 조직하기 위한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토론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동시에 한국 사회주의 정치 운동사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한 (가칭)사회과학대학원을 설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사회주의와 노동자 정치>는 지난 20년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회고하는 그의 문제의식이 담긴 칼럼 모읍입니다. 다소 일관성 없이 난삽한 면이 있지만, 그가 좀 더 체계적이고 일관된 작업으로 미래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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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 - 한 권으로 끝내는 언론사 입사
안수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 제가 지금껏 보아온 실용서에는 두 종료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방법만을 강조하는 실용서, 두번째는 철학을 강조하는 실용서입니다. 첫번째이든 두번째이든, 방법과 철학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방법에는 철학이 담겨있고, 철학은 곧 방법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죠. 안수찬 기자의 <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에서는 방법과 철학이 사이좋게 지면을 나눠갖고 있습니다.

- 우선, 방법을 보겠습니다. 저자는 서류전형, 필기시험, 논술 작문 르포, 실기시험, 면접으로 이어지는 언론사 시험의 구체적인 과정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고 있고, 각각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요소와 실제적인 준비방법에 대해서 꼼꼼하게 알려줍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언론 아카데미' 강좌를 맡아왔던 저자이기에, 언론사 지망생들의 정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고, 또 응당 그에 따를 고충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책은 4장에서 14장에 이르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통해, 독자를 언론사 입사 시험의 한복판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 이제, 철학을 보겠습니다. 저자가 자신의 철학을 드러내는 방식은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구체적인 경험이고, 두번째는 저자 자신의 직접적인 고백입니다. 첫번째는 매장의 사이에 담겨있는 '기자로그인'입니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자로그인'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않는 언론사 지망생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출퇴근, 낮술, 월급과 촌지, 취재의 실제, 취재원 관리, 데스크와의 갈등, 등 합격의 기쁨을 누릴 독자에게 다가올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담하게 소개합니다. 담담함은 독자에게 어떤 환상도, 어떤 좌절도 안겨주지 않습니다. "좀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직장은 기자 외에도 많다." 라는 저자의 조언은, 단지 독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 '기자로그인'에 담겨있는 저자의 철학은 보다 직접적인 고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기자의 실존적인 고민, 이것이 취업사이트의 그것이 따라올 수 없는 이 책만의 매력입니다. 1장 부터 3장까지를 할애한 "기자가 왜 되려고 하느냐?"는 물음, 기자로그인 7장과 8장에 나와있는 "기자로 살 것인가 월급쟁이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언론인이 되려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질문이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언론인이 되고 난 뒤에도 계속 등장한다. 때로는 정답이 없는 질문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살아가면서 그 답이 조금씩 바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이 질문을 놓지 않는 일이다. 당신은 왜 언론인이 되려 하는가. 복잡하게 생각하고 깊이 고민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각자의 답을 하나씩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 월급받는 기자와 월급쟁이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시장 위에 존재하고, 특종과 발행부수를 위해 경쟁하며, 실적과 직위에 따라 연봉을 지급받고, 주주와 경영진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매일같이 출 퇴근을 반복, 데스크의 작업지시를 받아 취재노동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월급받는 기자는 월급쟁이와 한치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구분하고, 또 차별합니다. 같은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차별받아야 할 정당한 이유는 내용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직업인의 내용이라면, 직업정신,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죠.

"언론인은 시민사회에 뿌리를 둔 비판자다. 시민사회 대신 국가권력이나 시장에 뿌리를 두거나, 비판 대신 홍보와 선전에 매달리는 일은 기자의 몫이 아니다."

- '시민사회' 저자가 주장하는 기자로서 정체성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갈등이란 곧, 물질적 뿌리인 자본과 정신적 뿌리인 시민사회에 사이에서의 갈등이죠. 물론, 독자 모두가 시민사회에 정신적 뿌리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정신적 뿌리가 자본이 아닌 이상, 독자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동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등의 구체적인 표현은 데스크 또는 언론사주와의 갈등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취재 보고와 지시를 받아야 하는 평기자에게, 정체성의 갈등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죠. 기자로그인 8장에서는 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의 언론사 동향을 통해서, 데스크와의 갈등을 둘러싼 언론계 전체의 구도까지 접근하고 있습니다.

- 너무나 당연하게도, 노동은 즐거워야 합니다. 여가 이전에 노동에서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노동의 물질적 뿌리와 정신적 뿌리 사이의 갈등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데스크와 언론사주 앞에서 당당하고자 하는 언론인들도, 기계에 매달려 하루 10시간씩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생산직 노동자들도, 노동의 정신적 뿌리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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