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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소리 마마 밀리언셀러 클럽 4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그림은 내겐 즐거운 절망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1909~1992) -

    

 

 

  베이컨의 음울한 자화상   

영국의 추상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평생동안 그린 그림들 중에는 정상적인 형체라고 보기 어려운 얼굴들이 담긴 초상화와 자화상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 이 그림이 그의 자화상인지 분명한 출처를 알 수 없다. 베이컨은 평생 몇 점의 자화상과 자화상을 그리기 위한 많은 습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그림이 베이컨의 자화상이 확실하다면 그의 실제모습과 어느 정도 유사하게 그린 자화상일수도 있겠다. 불규칙한 형태 속에서도 그의 실제 얼굴의 실루엣이 남아 있으니까.     

일단 그의 그림들은 섬뜩하고 참혹하다. 베이컨 자신 얼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캔버스에 담아낸 모든 인간의 얼굴들은 눈, 코, 입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갰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왜 이런 끔찍하고 흉칙한 형상의 그림들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추측들이 낳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 프랜시스 베이컨 ' 이라는 대중들의 머리속에 쉽게 각인되게 하는 이름을 세계 미술사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화가에 대한 독특한 생의 이력일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름이 같아서 착각할 수 있겠지만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유명한 철학자의 후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동성애자 화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어린시절의 베이컨은 누이의 속옷을 몰래 훔쳐 입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크게 혼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 정신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베이컨에게는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지우고 싶은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알콜 중독자에다가 틈만 나면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그늘을 베이컨은 영영 벗어나지 못했다.   

훗날, 자신도 알콜 중독에 빠질 정도로 매일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폭음을 할 정도로 유별난 ' 괴짜 ' 였으며 유년시절의 우울한 기억들은 화가가 되어 ' 베이컨 표' 그로테스크적 아름다움을 창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회화의 괴물 ' 이 사랑했던 남자 

 

 


프랜시스 베이컨 <조지 다이어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 1967년 


 

 


<사랑의 악마> (원제: Love is Devil, 1998년) 

프랜시스 베이컨과 조지 다이어와의 동성애적 연애를 토대로 만든 영화. 

이 영화의 조지 다이어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분하였다.

 

그는 평생 4명의 남자들과 동성애적 관계를 맺었는데, 그 중에 조지 다이어와의 관계는 영화로 만들 정도로 유명한 미술사적 스캔들로 남게 되었다. 조지 다이어는 좀도둑이었지만 베이컨에게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며 자신의 피폐하고 암울한 삶을 지탱해주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에게 다양한 예술적 영감을 제공해주는 뮤즈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나머지 3명의 동성애자 애인들처럼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고 불행한 결말으로 끝나게 된다. 조지 다이어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정작, 베이컨은 자신의 절대적인 존재가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하여 자신의 곁을 떠나야했는지 알지 못했다.  1992년,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 회화의 괴물 ' 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그리움을 자신의 캔버스에 구현한 조지 다이어를 보면서 만족해야만 했다.

 

  

 

  ' 우리 사회의 괴물' , 아이코     

 

 


프랜시스 베이컨 <그림>, 1946년

 

프랜시스 베이컨이 다룬 그림의 주제는 ' 뭉개진 고깃덩어리' 같은 얼굴의 형상 이외에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질것만 같은 ' 진짜 ' 고깃덩어리를 그려넣기도 하였다. 그에게 고깃덩어리는 미술적인 영감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육식의 즐거움을 만족할 수 있는 ' 쾌락 ' 이었다.   

그래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 고깃덩어리 ' 그림들을 보게 되면 그의 미술에 대한 호불호가 쉽게 갈라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베이컨 특유의 그로테스크에 매료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수억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명화를 ' 끔직하면서도 다시는 쳐다보기 싫은 불쾌한 그림 '  을 치부하고 만다.  

이런 대중들의 평가는 기리노 나쓰오의 <아임 소리 마마>를 처음 읽게 된 독자의 반응과 평가에서도 볼 수 있다.  

작년에 군 복무할 때 처음 읽고난 뒤에 올해 들어서 기리노 나쓰오의 악명 높은 소설과 재회하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아이코의 살인 과정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 주인공들 중에서 최악의 인물일 것이다.   

내가 비위가 강해서 그런지, 아니면 베이컨의 그림을 선호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1년만에 다시 읽게 되니 아이코의 광기어린 아우라는 여전하였다. 하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명성을 알게 되어 처음 이 작품을 집어든 독자들에게는 읽는 내내 차례차례 살인을 자행하는 아이코의 모습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힘겹게 읽고 난 독자들에게 또 다시 읽어라고 권하면 또 읽을 수 있는 ' 강심장 ' 독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기리노 나쓰오 골수팬이 아닌 이상 이 책을 두 번 읽는 독자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프랜시스 베이컨의 ' 괴물 ' 같은 그림에는 화가가 경험한 어두웠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듯이, 그녀가 일삼는 살인, 거짓말 그리고 절도 뒤에는 ' 괴물 ' 이 되어야하는 남모를 고통스러운 과거의 흔적이 있다.   

유년시절의 베이컨에게 친아버지가 가한 잔인한 폭력은 평생 지울수가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된 것처럼 아이코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온갖 핍박과 정신적 모욕을 받으면서 자라야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창녀촌에서 몸을 팔아야했다. 아이코는 부모가 주는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야하는 일반적인 어린이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엄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코에게는 모성애를 느끼고 싶은, 따뜻한 사랑의 감정에 목말라 있었다. ' 사회의 괴물 ' 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을 낳아준 ' 마마 ' 라고 부르는 엄마였다.

결국, 진정한 인간다운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불신은 깊어져만 갔고, 낯선 남자와의 섹스가 유일한 사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붉은 고깃덩어리의 맛과 형태에 지나치게 탐닉했던 것처럼 아이코에게도 사랑이란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서도 자극적이면서도 강렬한 엑스터시였다.

아이코와 아담의 ' 특선 로스구이 섹스' 는 아이코의 광적인 성적 집착을 볼 수 있는것뿐만 아니라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문장으로 재현할 정도로 소설 속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두 형체>, 1953년  

 

아이코는 재미있어져서 아담의 대머리 위 고깃덩어리를 얹었다.

 " 봐, 어울려. 당신은 짐승이니까. "

아담은 고기에서 흐르는 피가 미간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내버려둔 채 웃었다.  
(중략)

아담이 고깃덩어리를 안고서 맹렬하게 달라붙었다.  
(중략)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고깃덩어리가 끼어 있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고깃덩어리가 찌부러지거나 비틀려서 지방과 피가 흘러나와 배가 질척거렸다. 


 - <아임 소리 마마> 기리노 나쓰오, 황금가지, p 83~84 -



 ' 섹스와 고깃덩어리 '  

동성 간의 섹스를 좋아할 정도로 육체적 쾌락에 탐닉했으며 세상의 모든 형체를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정신세계와 일맥상통하다.  베이컨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 즐거운 절망 ' 이라고 표현했듯이 아이코에게 살인 역시 아이코만의 즐거운 절망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재미있게도 ' 사랑 ' 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삶의 환경 때문에 스스로 '괴물' 이 되어야만 했다.  

한 남자는 미술사에 기억될 ' 회화의 괴물 ' , 또 한 여자는 독자들에게 기억될 ' 사회의 괴물 ' 로. . .  

 

   

  

 

  ' 봐, 어울려. 당신은 괴물이니까. '   

 

 


<두 개의 고깃덩어리를 들고 있는 F. 베이컨> 존 데킨의 사진, 1953년
  

시대의 ' 괴물 ' 로 살아야했던 프랜시스 베이컨과 아이코는 결국에는 그토록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한다.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를 포함한 자신의 동성 애인을 자살로 죽는 장면을 봐야만했었으며 아이코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만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독단적이며서도 기형적인 사랑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섹스를 통한 육체적인 쾌락에 지나치게 탐하는 베이컨의 사랑은 조지 다이어에게는 심적으로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이코도 사랑 없는 섹스를 통해서 쾌락을 느끼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면서 살인의 쾌락에도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자신의 친모마저 못 알아볼 정도로 아이코는 이미 섹스와 붉은 피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만약에 아이코가 그림 심리 테스트를 하게 된다면 그녀는 '사람의 얼굴' 또는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지 궁금하다.  분명, 베이컨의 초상화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된 얼굴을 그렸을 것이다.  초상화나 자화상은 그림으로 그려지는 대상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기도 한다. 베이컨과 아이코가 그린 얼굴, 즉 세상에는 평생 고치기 힘든, 단호하고 철저하게 세상을 암울하게 보는 그들만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프랜시스 베이컨와 아이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일반 대중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야말로 ' 괴물 ' 이라고 불러도 좋을 최악의 인간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누가 이들을 ' 괴물 ' 로 변하게 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조지 다이어의 자살은 베이컨이 죽인거나 다름없다. 자신의 비뚤어진 사랑에 대해서 베이컨은 죽을 때까지 반성과 죄책감이 들었는지는 알 길은 없지만, 아이코는 사랑하는 마마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통해서 늦게나마 ' 섹스를 좋아하는 살인 괴물 ' 에서 ' 진실한 인간 ' 이 되었다. 

아이코는 자신의 ' 괴물 ' 스러운 죄의 행위에 대해서 마마에게 사과를 하였는데, 정작 정신적 약자였던 아이코를 ' 괴물 ' 로 만들어버려 평생 괴롭혔던 사회는 그녀에게 따뜻한 사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못할 망정 아이코에게 ' 괴물 ' 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우리야말로 정신적 약자를 괴롭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닐까?  

과연, 지금 이 세상에는 아이코가 되고 싶어했던 ' 진실한 인간 ' 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캔버스에서 진짜 ' 괴물 ' 이 되어버린 프랜시스 베이컨은 지금 어디선가 자신의 고깃덩어리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비웃으면서 조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 1971년
 

 ' 이게 당신들의 얼굴이야. 봐, 어울려, 당신들은 괴물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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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1-1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 소리 마마'에서 이런 멋진 리뷰라니요~
근데 말이죠, 전 기리노 나쓰오를 읽어낼 비위는 아닌가 봐요.

이 밤, 좀 춥고 썰렁한가 봐요.
님 계신 곳은 따뜻하겠죠?^^

cyrus 2011-01-10 15:34   좋아요 0 | URL
집 안이라서 따뜻해요.^^;; 이번 소설을 통해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려고 하는데,, 이 소설은
그리 권할만한 책은 아닌거 같아요..^^;;

굿바이 2011-01-1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랜시스 베이컨의 자화상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공포가 떠오르네요. 아마 그 공포는 자화상의 모습이 낯익어서 느끼는 공포였을 겁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01-10 15:38   좋아요 0 | URL
베이컨의 자화상에서 뿜어져나오는 그로테스크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 상태를 정확히 그려냈다고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그의 흉측한
그림들에 열광을 하는가봅니다. 알고보니, 이 화가의 그림들이
나름 수억가치의 경매가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다더군요,,^^;;

마녀고양이 2011-01-1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이컨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묘하게 공감이 가네요.
많이 공감이 가요. 인간의 뒤틀어진 면과 방금 히어나우님의 페이퍼와 겹쳐서.

기리노 나쓰코의 아웃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 읽었어요.
그런데 아임쏘리마마가 이런 쪽 이었군요. 머랄까, 이런 책들은
인간의 악의 근원까지 쫒아가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요. 나름의 탐미적 부분이 있죠.

작가 미상인 프랑스 소설 'O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했을 때
야한 것도 그렇지만, 상식이라 배운 것을 몽땅 부정하려는데 충격을 받았어요.
토머스 해리스의 한니발도 마찬가지 맥락이죠. 나이 든다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던 사실을 하나씩 부셔버리는데 있나 봐요....

cyrus 2011-01-10 15:42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기에는 좀 그런 작품인거 같습니다.^^;;
19금 딱지를 붙여져야할 정도로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거든요.
하지만, 마고님 말씀하시는대로 이 소설은 인간의 악의 근원이
과연 어디까지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코뿐만 아니라
아이코 주위의 사람들까지도요.

starover 2011-01-1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그림이 좀 끔찍하네요.

cyrus 2011-01-16 19:43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베이컨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드물긴 하죠.
그림이 워낙 끔찍하고 무섭다보니, 가끔 베이컨의 그림을
악의 상징으로 왜곡되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몇 편인지 모르겠지만,(확실한 건 그 때 조커로 분한 배우가
잭 니콜슨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배트맨>에서 조커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제 글에서 소개된 <그림>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기담문학 고딕총서 9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진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토요일 밤의 공포  

13년 전이다.  토요일만 되면 항상 즐거웠다.  지긋지긋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일요일까지 실컷 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토요일이 오기를 간절히 바랬던 이유는 늦은 밤까지 TV를 실컷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어린 나에게 밤 12시까지 TV 보는 것을 금했지만 유독 토요일만은 눈 감아 주었다.   늦게까지 TV 보다가 내일 일요일 같은 날에 늦잠을 자도 상관 없는 것도 있었지만 항상 밤 10시가 되면 우리 가족이 꼭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S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토요 미스테리 극장> 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S 방송사는 서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지역방송이었지만 대구에도 지역방송이 생기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S 방송사의 프로그램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토요일 밤 10시에 무시무시한 제목의(?) 방송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초자연 현상을 겪은 사람들의 실제 경험담을 토대로 재연한 프로그램으로써 ' 미스터리 신드롬 ' 을 낳을 정도로 시청률 역시 잘 나온 걸로 기억하고 있다.  ' 미스터리 ' 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공포영화를 볼 때 느끼는 공포감을 전달해주는 포맷의 재연 프로그램은 아마도 <토요 미스테리 극장> 이 최초일 것이다.  (물론, 그 때도 금요일 밤, M 방송사에서는 하는 <이야기 속으로> 라는 <토요 미스테리 극장> 과 비슷한 포맷의 방송이 있었다.  하지만,  인지도 면에서는 S 방송사의 <토요 미스테리 극장>이 앞섰다)   

나는 항상 방송이 시작되는 토요일 밤 10시를 기다렸지만 초등학생에겐 밤 10시는 슬슬 잠이 몰려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방송하기 전 광고 중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아침 8시였다.  이런 경우 때문에 프로그램을 못 본적이 꽤 많았다.   가끔, 예기치 않은 편성방송 때문에 간혹 밤 11시, 심지어 12시부터 할 때도 있었지만, 졸림을 이겨서라도 꼭  ' 본방 사수 ' 하곤 했다.   

  ' 노약자나 임산부, 심장에 이상이 있으신 분들은 방영을 자제해 줄 것을 권합니다 . '  

이게 정확한 멘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항상 프로그램 시작 전, 그리고 방송 중간중간에 이 유명한 멘트가 나오는 것은 필수였다.

하지만, 아무리 제보자의 실제 경험이라고 해도 대부분 경험담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 시시한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밤잠을 설칠 정도로 아주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은 재연 속에 등장하는 귀신의 모습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 때만해도 적절히 등장하는 TV 속 귀신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간혹 어떤 사연은 TV를 보고 있는 나도 소름을 돋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내용들도 있었다.  

그러나, ' 미스터리 ' 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은 오랫동안 방영이 되지 않기 마련이다. 점점 떨어지고 있는 시청률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프로그램의 유해성에 대한 문제가 시청자들 사이에서 부각이 되자 토요일 밤만 되면 시청자들에게 간담이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를 선사하던 프로그램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렇게 폐지되고 말았다.  

   

 

  

 ' 미스터리 ' 로 살다가 ' 미스터리 ' 로 죽은 작가  

 

 

 ' 앰브로스 비어스 '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작가의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나름 호러영화 매니아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1탄의 흥행에 힘입어 제작된 <황혼에서 새벽까지 3> 에 나오는 극중 인물 에 소설가 앰브로스 비어스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출연하는 유명한 1탄과 뒤이어 나온 후속작은 봤지만, 3탄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흥행 영화의 후속작은 항상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2탄 역시 전작이 줬던 공포와 전율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1탄보다 선혈이 낭자하고 더 잔인한 영상으로만 가득했을 뿐이다. 3편 역시 2탄과 같은 아류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앰브로스 비어스는 1913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 때 실종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최후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앰브로스 비어스가 나오는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 3>가 소설가의 실종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H.P. 러브크래프트와 더불어 공포 문학을 확립한 작가로 재평가되었지만 앰브로스 비어스도 러브크래트프의 삶 못지 않게 지금까지도 그의 생애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것이 없으며 추측과 주변 지인들의 기록에 근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사람에 관한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의 작품들은 생전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 미스터리 ' 라는 주제로 소설을 쓰면서 먹고 살다가 최후 역시 ' 미스터리 ' 가 된, 아주 보기 드문 삶의 이력을 남긴 작가였던 것이다.  

 

  

  짧은 소설, 긴 여운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이 어떤가요? ' 라고 묻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의 소설을 읽게 되면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보는 거 같습니다. " 

앰브로스 비어스가 쓴 총 17편의 단편소설들을 모은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을 읽게 되면 (국내에서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 선집으로는 이 책이 최초일 것이다) 각 소설들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소설들 중에는 재미있는 것도 있고, 재미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13년 전에 했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다시 보게 되면 어설픈 재연 묘사에 재미없어하듯이 요즘 같은 시대에 앰브로스 비어스의 고전적인 고딕소설을 읽게 되면 재미없어 할지도 모른다.

앰브로스 비어스의 단편소설들은 대체로 짧은 분량이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화자인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자신이 겪은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경험담을 전해주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처럼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괴생명체가 등장하여 독자들을 놀래키는 것은 아니다.  

남북 전쟁이 종전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전쟁의 공포와 살육의 트라우마 그리고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대륙에도 발 딛은 세기말의 공포까지 미국 사회의 정신에 가득한 어두운 면들을 앰브로스 비어스는 날카롭게 포착하여 유감없이 자신의 소설로 재현하였다.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년

책의 표제작인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은 전쟁터에서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곧 처하게 될 교수형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필사적인 의지가 겹치게 되면서 혼란한 정신 상태를 경험하게 되지만,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모르게 죽음이 두렵지 않는, 안락한 분위기의 환각 상태에 이르게 된다. 

정치적 배경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했던만큼, 남북 전쟁 때 자행된 학살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일상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학살당하는 인간의 죽음을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암울한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의 공포를 실감나게 전달해주고 있다.    

<개기름>이라는 단편소설에서도 어두운 사회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를 포획하여 만든 개기름으로 인해서 부의 탐욕에 눈이 먼 어느 부부의 이야기는 흡사 최근에 일어난 일명 ' 쥐 식빵 자작극' 사건을 연상케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려고 하는 부부의 참혹한 결말은 결국, 자신의 업체의 이득을 위해서 제빵업체가 꾸민 자작극으로 밝혀져 문제의 사건이 일단락된 것처럼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믹슨의 걸작>과 <시체를 지키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이토 준지의 일러스트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호러 매니아들에게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아예 호러소설로서 취급을 안해줄 것이다.   

<믹슨의 걸작>은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볼 수 없는 기이한 존재가 등장하여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즘 시대에 재미있게 읽히기에는 너무 고전적이다.  <시체를 지키는 사람>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비어스의 짧은 소설답지 않은 진부한 전개의 시도 때문에 비어스 소설 특유의 공포의 묘미를 살리지 못하였다.   

그만큼, 소설 속 배경이 우리에게는 너무 오래된 구시대적이라서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들 중에는 호러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사건을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기게 하고 있다. 이 여운이라는게 특별히 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공포감에 미치지는 않지만, 한 번 읽으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소설 속 장면과 결과들이 주는 페이소스가 머릿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고딕소설계의 오 헨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15948 

때마침,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나오게 된 오 헨리의 단편소설 선집과 함께 앰브로스 비어스의 단편소설들을 읽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오 헨리와 앰브로스 비어스는 같은 동시대에 살았던 미국의 단편작가이다.

러브크래프트를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붙여줬으니, 안 그래도 러브크래프트의 명성에 가려져 있는 판에 앰브로스 비어스에게도 별칭을 부여하지 않으면 무척 섭섭해할 것이다.  

사실,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은 호러소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고딕소설에 잘 어울린다. 오 헨리가 19세기 말 미국 사회의 일상적인 풍경을 단편으로 따뜻하고 정감 있게 표현하였다면, 반대로 앰브로스 비어스는 차가우면서도 어둡게 그려내고 있다.   앰브로스 비어스를 ' 고딕소설계의 오 헨리 ' 라고 불러도 비어스 입장에서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 작은 고추가 더 맵다 ' 라는 말이 있다. 정말 집게손가락만한 풋고추를 먹게 되면 매운 것이 더러 있긴 하다.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들도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후세의 호러문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몇 편의 소설들 중에도 훌륭한 작품성도 갖추고 있다.   짧은 단편만으로 독자들에게 색다른 공포의 여운을 주고 있는 그의 소설들을 앰브로스 비어스답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 작은 고추가 더 무섭다 ' 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는 일상적이면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낯선 공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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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앰브로스비어스의 단편을 한번 읽은적 있는데,
정말 독특하고 신랄한 작가였어요. 매력적이었죠. 이 책도 그런가보죠?

토요일마다 하는 미스터리 극장이나, 케이블 방송의 심령, 외계? 이런 미드들
저는 진짜 열광하거든요. 새로 시작한 V도 열심히 보고, 뭐더라,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미래를 본 미드, 제목이 생각 안 나네요.. 그것도 엄청 열심히.. 맨날 노는 티 나네요! ㅎ

cyrus 2011-01-08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귀신, 유령 같은거 잘 안 믿는데,, 재미있어서(?)
본답니다. ^^;; 앰브로스 비어스 같은 경우에는
단편소설들이 드문드문 단편집에 끼여서 소개되어서
아마도 국내에서 작가의 이름을 내건 단편선으로서는 최초일거에요.
몇 몇 이야기들 중에서 좀 시시한 내용도 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1-0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고딕소설계의 오헨리 라고요?
그럼 마지막 잎새에 비견될만한 건요?
저에게 꼽으라고 한다면 아울크리크 다리 쯤.
근데 이 사람, 넘 들쭉날쭉이예요.
고딕은 아무래도 스티븐 킹을 빼놓을 수 없죠.

cyrus 2011-01-09 12:06   좋아요 0 | URL
이번 표현은 좀 무리수였나요? 제가 봐도 손발이 오글거리네요 ^^;;
저도 그나마 이 작가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아우크리크 다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1-09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 불쌍한 막시밀리안 황제...저는 처음에 어떻게 오스트리아 왕족이 멕시코에까지 와서 왕이 되었나 이상하게 생각했지요.역사는 정말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많이 일어나더라구요.

cyrus 2011-01-09 20:04   좋아요 0 | URL
정말 이 왕도 어떻게보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거 같습니다.
복잡한 정치적 투쟁에 본의 아니게 말려들게 되었으니 말이죠.
배경은 다르지만, 왕이 처형당하기 전의 모습을 그린
마네의 그림이 소설 속 장면과 유사한거 같아서 올려봤습니다.

꽃도둑 2011-02-1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축하드려요. 방금 발표 봤어요.
응모만 했다 하면 덜컥 붙어버리네요.
뭔일이데요?....^^



cyrus 2011-02-11 23:59   좋아요 0 | URL
먼저 축하인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꽃도둑님 댓글 보고나서
이제야 당첨사실 알게 되었어요. 기분 좋지 않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글,, 그렇게 잘 쓴 편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서 기분이 좋네요,,^^;;

2011-02-12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E-9 2011-02-1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도 축하드려요.
CYRUS님 댓글 보고 결과를 알았네요.
덕분에 저도 CYRUS님 서재도 알게되었고 겸사겸사네요^ ^
내일 서울 오시죠? 편안하고 무사히 잘 오시길 바라고
독서모임도 잘 하시길 바랍니다.^ ^

cyrus 2011-02-12 00:46   좋아요 0 | URL
빠르시네요. ^^ 헤르메스님도 모임 때 오시면
참 좋은텐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게스트로 참여해주세요,,^^;;
무엇보다도 펭귀맘님께서 더 좋아하실거 같아요. ㅎㅎ

starover 2011-02-1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이, 사이러스 님의 리뷰는 종합적인 장르(소설, 영화 등)를 통해 리뷰하는 책의 본질을 밝혀내려고 합니다. 그것을 밝혀내는 곳곳에 사이러스 님의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이러스님이 수상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1-02-13 10:31   좋아요 0 | URL
오~ 그런가요^^ 아무튼 축하 인사 남겨주셔서 고맙구요,,
어제도 독서모임 때 느꼈지만 책을 읽을때도 내용과 작가에 대한
본질만 알려하기보다는 내용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감정 이입하여
체험하는 거,, (말이 좀 어렵게 쓴거 같네요..^^;;)
어쨌든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stella.K 2011-02-1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게 그렇게 된 거로군요!
축하해요. 물만두님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지 않으실지.
전 게으르고 수상(따위ㅋ)과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아는 분이
수상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군요.
한턱 쏘세요!!ㅋㅋ

cyrus 2011-02-13 10:33   좋아요 0 | URL
기회만 된다면 저도 알라디너분들 위한 작은 이벤트나마나
기획을 해야봐야겠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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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퓨젤리 <악몽>, 1781년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  

- H.P. 러브크래프트 -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  

요즘 온라인에서는 ' 미친 존재감 ' 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이 단어는 주로 방송에서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수식어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적은 방송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외모, 스타일 등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방송 내용 전체 흐름에 큰 영향을 주는 연예인들에게 붙여진다.  그만큼, 특정 연예인들을 향한 대중들의 인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방송. 연예계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회나 스포츠 등 어디서나 사용되는 새로운 신조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다면, 호러소설 장르에서 ' 미친 존재감 ' 은 누구일까?     

 

최근에 신작소설을 들고 나온 '호러 킹(Horror King)' 스티븐 킹, 호러소설의 창시자이며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상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에드거 앨런 포우, 아니면 <피의 책>이라는 작품 하나만으로  인기 호러소설 작가로 급부상했던 클라이브 바커. 이 외에도 <나는 전설이다>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 일본의 교고쿠 나쓰히코 등은 지금도 수많은 독자층 팬덤 형성은 물론이고,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여기서 언급한 특정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들에게는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불릴만한 작가가 없다. 아니, 이들은 이미 대중적인 작가로 지금도 이들의 명성은 가히 높기 때문에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붙이기에는 ' 거장 ' 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퍽 섭섭해할 것이다.  특히, ' 호러 킹 ' 이라는 별명 하나로 호러소설의 제왕으로 상징되는 스티븐 킹에게는.    

  

 

  러브크래프트, 그는 누구인가?

  

H.P. 러브크래프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1890~1937)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생소하겠지만 호러소설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H.P. 러브크래프트.  그야말로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스티븐 킹, 클라이브 바커, SF호러 영화 <에일리언>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H.R. 기거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러브크래프트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러브크래프트의 프로필을 보게 되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의 일생 전반적으로 보면 어둡기만 하다.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불우한 유년시절을 경험했지만 그 시기에 이루어진 방대한 독서는 자신의 작품 집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작품 집필과 독서를 위해서 폐쇄적인 생활을 한 그는 그 이유로 괴짜 은둔자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처럼 호러소설을 쓰는 아마추어 작가들과 서한 교류를 할 정도로 그렇게 폐쇄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만해도 러브크래프트 문학을 알아주기에는 시대에 앞선 일이었으며 열심히 써내려간 단편소설들은 단지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일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H.R. 기거가 그린 에일리언 

러브크래프트가 묘사한 크툴루와 니알로토텝의 모습은 

H.R. 기거가 그린 에일리언의 모습과 같다고 주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은 H.R. 기거의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크툴루, 니알로토텝, 데이곤 등 이전에 보지 못한 괴기스러운 캐릭터들을 탄생시켰으며 그의 생애만큼이나 대다수 작품들에서도 뿜어져나오는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영영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뻔하였다.  하지만, 후세에 그의 문학은 호러소설이라는 장르를 구축한 공로로 평가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소설은 영화, 음악 등으로 변용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스티븐 킹 이외에도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한번씩 꼭 읽었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러브크래프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몽환적 리얼리즘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은 기존에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형식과 다르다. 무섭고 으시시한 호러소설을 원하면서도 러브크래프트를 처음 읽게 되는 독자들에게는 낯선 문장과 묘사 때문에 러브크래프트 문학의 묘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는 세기말 유럽 사회의 분위기와 고대에서 전해내려온 미신 그리고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몽환적인 오컬트가 공존하고 있다.  

 


페르낭 크노프 <버려진 거리>, 1904년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읽게 되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배경이 있기 마련인데 아컴, 미스캐토닉 계곡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핵심적인 배경들이다. 가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실제 지명인 프로비던스도 종종 등장하곤 한다.  소설 속  지명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가 살기에 딱 적당한 장소인만큼 대체로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 소설에서도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네크로노미콘이다. 네크로노미콘을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 악마의 책 ' 이다. 다시 말하자면, 금서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의 역사> 라는 일종의 픽션이 가미된 소품에서 이 책이 실제 존재하는마냥 묘사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네크로노미콘의 판본 중 하나가 아컴의 미스캐토닉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되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비록,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허구의 책이지만 ' 금서 ' 와  ' 저주의 책 ' 이라는 효과 덕분에 이름을 그대로 따온 위작들이 등장할 정도로 러브크래프트는 환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묘사에 탁월하였다.   

 

 


아르놀트 뵈클린 <망자의 섬>, 1880년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마치 꿈 속에서 겪은듯한 환상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독자들에게는 현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특히 <데이곤>에서  화자가 늪 속에서 흉칙스러운 괴생물체 데이곤을 피하기 위해서 낯선 곳에서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난파선까지 사력을 다하여 기어가다시피 하는 모습은 꿈 속에 있을법한 일을 더욱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늪 속 한가운데에 있다고 꿈을 꾸고 있다고 하자. 실제로 접하지 못한 낯선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꿈꾸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갖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괴이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다가온다고 해보자. 공포감이 한층 더 배가될 것이다.   

꿈이라는 현상을 겪게 되면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경험을 하게되지만 결국에는 꿈 속에서의 장소와 배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 중에는 작가 본인의 꿈을 토대로 오컬트적 분위기를 가미한 것들이 있다.  작가 본인 스스로도 꿈 덕분에 니알로토텝이 탄생할 수 있다고 밝힐 정도로 그가 꿨던 꿈 (어떻게 보면, 불길하고 괴이하기 짝이 없는 악몽이지만) 은 몽환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설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꿈꾸는 인간이 기록한 그로테스크한 일기  

 

 


<뵈클린에 대한 경의> H.R. 기거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을 읽게 되면 어떤 독자들은 작가의 정신 세계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의 아버지가 정신 질환 증상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작가 본인도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정신 질환의 유전적 징후가 독특한 작품들이 완성할 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화자들은 대부분 일기 형식으로 자신들이 겪은 괴이한 체험을 고백하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이번에 그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되면서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답게  미친 사람이 쓴 일기와 같은 느낌을 받곤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가 정진영 씨는 정신 질환과 관련된 생애 때문에 형성된 작가에 대한 그릇된 시각은 작가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데 요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는지 제대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무조건 작품 구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이 낯선 미지의 환경이나 장소 앞에서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처럼 러브크래프트 역시 분명히 그런 심리적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가 꾸었던 꿈들을 토대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 를 소설로 실감나게 반영하고 있다. 그가 은둔자라는 오명을 받으면서까지 평생 호러소설 ' 외골수' 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소설들을 지금까지 꿈 속에서 경험한 환상적인 체험을 기록하기 위한 자신만의 일기로 여긴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본다.  

러브크래프트의 일기 아니 소설 속에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섭고도 불쾌하게 만드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 한 편을 읽기 시작하게 되면 작품 전반 내내 흐르는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호기심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한 그의 소설들이 읽고 싶어지게 되는 이유가 남의 일기를 훔쳐보게 되면 더 읽고 싶어지게 되는 유희적인 욕구와 같은 카타르시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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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문구잖아요, 러브 크래프트의....
아, 갑자기 공포 판타지 읽고 싶당..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도 이런 분위기죠. 마찬가지로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인데.. 그런데, 리뷰가 거의 책 서평 수준인데요? 대단하세요, 사이러스님~

cyrus 2011-01-04 13:3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구 처음 알았어요. 저도 호프만의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데 나온지 오래 되어서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힘드네요^^;;
추리 리뷰 이벤트가 21일까지 진행된다네요.
마고님도 장르문학을 즐겨 읽으시는거 같은데 이번에 대회에
참가해보세요^^

감은빛 2011-01-04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부터 즐찾을 해놓고, 가끔 들어와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발자국을 남기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글 참 잘쓰십니다.
저는 이렇게 명쾌하게 쓰는 사람이 참 부럽습니다.

호러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왠지 많이 알게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러브크래프트 라는 작가 기억해두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1-01-04 22: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우연히 감은빛님의 글을 읽고나서 제가 님 서재를 즐겨찾기하고 난 뒤에
님도 제 서재를 즐겨찾기해놓으신 걸 알게 되었습니다.
미리 알았으면 제가 먼저 서재를 들려야했었는데, 자주 들리겠습니다.^^

반딧불이 2011-01-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영역이 참 다양하시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cyrus 2011-01-05 01:11   좋아요 0 | URL
긴 글인데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양철나무꾼 2011-01-05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요,cyrus님.
글 속의 내용이 잘리고 겹쳐요.
저만 그렇게 읽히는 건가요?

전 장르 소설은 두루두루 섭렵하는데...호러는 좀 그닥이예요.
하지만, 위에 언급하신 '미친 존재감'이라면 '러브 크래프트' 썸업 해줄 수 있어요~^^

cyrus 2011-01-05 18:07   좋아요 0 | URL
제가 올린 리뷰가 나무꾼님 모니터에는 이상하게 뜬건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서재에 글을 올리면 의도치 않게 글이 엉뚱하게
위치가 바껴있다거나 전체 글이 진하게 되어버려요-_-;;
오늘 올린 페이퍼도 원래는 신문기사만 하얀색 글상자에 넣으려고 했는데
쓰고 올려보니 문장 전체가 글상자 안으로 들어가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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