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소르의 이상한 가면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은 왕이 개최한 호화로운 가장무도회에 백성들 사이에 창궐하는 적사병(赤死病) 환자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무언의 도발에 분노한 왕은 돌아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즉사한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방한 줄 알았던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적사병 그 자체였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1860~1949)가 즐겨 그린 가면 쓴 인물들의 초상화가 오싹한 까닭도 그들이 가면을 쓴 인간인지, 가면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가진 인간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앙소르의 그림 속에서는 가면과 얼굴의 구분과 더불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도 희미하다.

 

 

 

 

 

 

 

 

 

 

 

 

 

 

 

앙소르는 어두운 도상과 가면 쓴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화가였다. 가면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자신을 비롯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앙소르에게 유희의 광기에 달뜬 이방인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데에 가면보다 자연스런 오브제는 없다.

 

 

 

 

 

제임스 앙소르  「이상한 가면들」 1892년

 

 

「이상한 가면들」에 도열한 가면들은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우연히 노출된 사람들의 진짜 표정처럼 보인다. 안면근육과 주름살,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한 가면들의 포즈는 초현실적이다.

 

 

 

 

제임스 앙소르  「음모」 1890년

 

 

가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인 「음모」는 앙소르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이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들을 드러내지 않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하듯 묘사해내고 있다. 그들 마음속에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은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괴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가면 모습은 또 다른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페터 파울 루벤스 「인동덩굴 그늘에서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화가의 자화상」 1609년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보면 중앙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앙소르 자신이다. 그로테스크한 가면들 사이에 커다란 깃털이 달린 바로크식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화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명한 화가의 얼굴과 상당히 비슷하다. 바로 루벤스다. 사실 앙소르는 이 그림에서 루벤스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대중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앙소르는 같은 출신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처럼 자신의 예술이 널리 인정받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암울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루벤스의 가면으로 변장하여 자기위안을 하고 싶었던 걸까.

 

 

 

 

 

 

 ♣ 우리가 만드는 가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였듯, 가면이 실제 얼굴보다 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가면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비굴한 얼굴, 짜증내는 얼굴, 남을 탓하는 얼굴.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은 맨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속 얼굴들일 수도 있다.

 

집에서 입는 옷과 거리로 나설 때 입는 옷이 다르듯 우리는 군중의 일원이 될 때 가면을 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개인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들의 가면만 본다. 도어즈는 노래했다. “당신이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굴고, 당신이 외로울 때 타인의 얼굴은 흉해 보인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고립은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이상에 종속되는 과정에서 자기 소외에 빠지며 정체성의 상실이 일어난다. 경직되고 냉소적인 군중의 가면은 자기실현에 빠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디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령 마릴린 먼로의 실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녀의 인격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가 아는 마릴린 먼로는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내리고, 케네디의 생일날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백치 미녀이지, ‘노마 진 모르텐슨 베이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미디어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페러프레이즈하면, 미디어를 통해 가면(persona) 자체가 곧 인격(perso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지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진중권 『미학 에세이』27~28쪽)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미지로 자신의 가면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SNS는 각기 다른 가면들의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덧칠된 이미지 속에서 연기를 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몰락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진중권은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연극”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실재와 미디어 사이의 간극이다. “가면 자체가 곧 인격”이 되어버린 시대 속에서 언제까지 허망한 가면을 쓴 채 현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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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무대 위와 무대 아래'가 너무 다른 수많은 광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자기 집 문턱만 넘어서면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놓는다'는 식으로(몽테뉴) '자기 집안에서는 엉망진창'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을지가 마침 어제 저녁 식탁 위에 올라운 '두드러진 화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말이지요...

* * *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cyrus 2013-10-23 18:41   좋아요 0 | URL
oren님이 인용해서 소개한 몽테뉴의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데 무척 피곤한 일인데 참고 지낸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오늘 김주하 앵커 이혼사유가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방송에서는 남편이 가정적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오랫동안 얼굴에 씌여있는 가면을 한번에 완전히 벗는 것도 쉽지 않고요.
 

 

 

 

 

 

 

 

 

 

 

 

 

 

 

 

 

 

 

 

경제가 어려운데 소비라도 줄여야지, 하지만 턱없는 소리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문화는 이미 소비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행에 종속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대의 광고와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선천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순간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중에서)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소비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현대인이 선택하는 건 상품이 아닌 이미지다. 현대인은 이미지에 열광한 나머지 이미지를 따라하고 이미지를 먹고 이미지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미지를 지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통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다다이스트 마르셸 뒤샹이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한 뒤 그걸 독립예술가협회전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으로 출품했다.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고 표절이고 어떤 미적 대상도 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출품되자마자 작가의 사전 동의 없이 작품은 사라졌다. 그러나 1964년에 다시 만들어진 복제본을 보고 그 누구도 “불경하다” “비도덕적이다” “표절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뒤샹이 직접 소변기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지저분한 소변기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 전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심어주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똑같은 이미지인데 사람들은 이제 그 앞에서 기념촬영하기 바쁘고, 콧대 높았던 미술관들은 전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태도다. 그리고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취향은 나날이 변한다. 싼 것을 찾다가도 기능과 디자인을 보고 또 친환경 제품인지를 따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에너지 효율이 어떤지 살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는가에 소비자들은 동전을 던진다. 이렇듯 소비는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특별한 행위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하며 여가를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소비대중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소비자의 특권이다. 이런 특권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점심을 사 먹는 일차원적인 소비를 넘어 특정 생각을 지지하고 특정 문화를 후원하는 소비에 이르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엇을 소비할까 고민하는 동물이 되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쇼핑을 즐기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흑백 사진의 오른손이 마치 신분증이라도 제시하듯 ‘I shop therefore I am’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인 붉은색 사각형 명찰을 들고 ‘저는 쇼핑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데요’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쇼핑을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우고 쇼핑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당대 여성을 비꼬는 동시에, 무엇을 소비하는가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해 버리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역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 소비와 해석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이미지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를 지배하는 해법은 아닐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통해 왕성하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가 바바라 크루거라면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예술가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건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 주는 이미지가 진정한 의미의 새 이미지다. 그리고 이 새 이미지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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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옐로 하우스에

 

 

 

 

 

 

 

 

 

 

 

 

 

 

 

 

 

 

 

 

 

 

 

 

 

 

 

 

반 고흐, 그리고 폴 고갱.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을 남긴 두 천재화가의 삶에는 교차점이 있다. 고흐가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시골 아를에서 자리를 잡은 뒤 평소 가장 이상적인 동료라고 생각했던 고갱을 설득해 시작한 약 60일간의 동거 생활이다. 바로 1888년 10월 23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일이다. 프로방스 시골 마을 아를에서 이들이 보낸 곳이 바로 고흐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옐로 하우스’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년

 

 

미술사적으로 이 60일은 가장 유명한 동거임에 틀림없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동거는 고흐와 당시 미술상이었던 동생 테오와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하나의 예술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했던 두 사람은 고흐가 동생 도움을 받아 아를에 터를 잡으면서 그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고흐에게 그 대상은 폴 고갱이었다. 테오에게 편지를 써 ‘혹시 고갱이 남쪽으로 올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내비쳤고 이런 생각은 일종의 집착으로 발전됐다.

 

고흐는 5월 말부터 다섯 달 동안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에 와서 자신과 함께 살 것을 종용했다. 자신을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있던 테오도 동원했다. 가난한 고갱이 옐로 하우스에서 자신과 같이 살면서 그림을 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고갱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도 출발은 계속 연기했다고 한다.

 

그 전 해 겨울 파리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이를 통해 훨씬 친밀해졌다. 편지 안에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두 사람 얘기도 나오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그런 과정 이후에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거의 이틀 동안의 여행 끝에 아를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방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그림 <해바라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6년 후 고갱은 이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나의 노란 방에는 해바라기들이 노란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노란 테이블 위의 노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화가의 서명인 ‘빈센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의 노란색 커튼을 통해 들어왔던 노란 해는 방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침대에서 깰 때면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너무나 달랐던 작품 성향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흐는 성격이 예민한 데다 작업 환경이 지저분하고 산만했다. 여기에 대해 고갱은 간섭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은 불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화에 대한 열정과 불굴의 신념을 갖고 있는 고갱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하며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때묻지 않은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고갱과 달리 자신을 중생구제를 위해 나선 수도자에 비유한 고흐는 불행한 사람들을 동정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시골농부들의 삶을 정열적인 붓터치로 그려냈다.

 

 

 

 나 이제 그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9년

 

 

고갱과 비극적인 이별을 하고 나서, 요양원에 치료를 받은 후 고흐는 이 때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그리게 된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고흐는 자신이 없는 방 안을 혼령처럼 쳐다본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은 주인이 방을 비우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음을 나타난다. 살짝 열린 환한 창은 고갱과 함께했던 따뜻한 여름날의 추억을 암시한다. 그림 속 많은 사물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양쪽 끝의 문, 두 개의 베개, 두 개의 의자, 두 짝의 창문, 두 개의 초상화 등. 그건 고흐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쩌면 고갱을 생각해서인지 그가 떠나간 쓸쓸한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색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8년

 

 

재미있게도 고흐는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이미 두 점을 그린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아를의 방 그림은 고갱이 아를에 오기 일주일 전 설레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고갱이 온다는 설렘도 있었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영감이 떠올리게 하는 고장에서 갖게 된 멋진 ‘자기만의 방’이었다.

 

1888년 12월, 무슨 마음의 심경이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귀를 자르게 했는지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당시 고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고갱에게 화가 나 있었고, 친구들은 일 때문에 아를을 떠나갔고, 동생 테오는 약혼을 한 상태였다. 고흐는 외로웠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 고갱은 바로 떠나 버린다. 고흐는 아를의 병원을 거쳐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옮겨진다. 요양원에 나온 이후 그는 자신의 방을 세 번째 그리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예전에 그 행복했던 옐로 하우스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쓸쓸한 고독만 남아 있을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 그리고 숨은 우정

 

 

 

 

 

 

 

 

 

 

 

 

 

 

 

 

고흐와 고갱은 신기하게도 평행선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화가로서의 삶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그리고 둘 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고 아를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고갱은 35세 때 주식 중매인에서 화가로 전업한다. 몇 년이 지나, 파리를 떠나 이곳 그림 같은 시장 도시 퐁타벤에 반해 동료 화가들과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황색 그리스도>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1889년

 

 

그리스도가 브르타뉴 주변의 가을 들판처럼 황색으로 그려져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들이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이 그림은 퐁타벤 근처에 있는 성당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십자가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리게 되었다. 고갱의 자화상 후경에 나타나는 <황색 그리스도>는 그림의 좌우가 뒤바뀌어져 있다. 자화상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9년

 

 

'자화상' 오른쪽에 고갱이 만든, 담배 넣는 항아리인 '괴물 형상을 한 폴 고갱의 얼굴'이다. 고갱은 그림뿐만 아니라 도기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 보들레르 같은 상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악마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신성과 악마성 가운데 자신이 있다. 자신과 오른쪽 항아리는 왼쪽의 그림에 대조적으로 어둡다. 그건 자신의 마음 속 모습과 갈등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방에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배치해 놓았다기보다는 자화상을 위한 의도적인 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고갱의 얼굴에 작은 빛이 머물고 있다. 고갱의 표정을 보면 진지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냘픈 그리스도의 몸에 비해 덩치 큰 모습으로 자신을 그린 것은 인간적인 자신의 욕망을 은유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고흐의 방과 고갱의 방은 사뭇 달라 보인다.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고흐의 방,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조로 살았고 원시주의적인 것에 경도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거칠었을 고갱의 방.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고흐와 비참한 결과로 헤어진 후이고, 그림의 완성은 고흐가 죽은 후다. 고갱의 마음에 고흐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있었을 테이고 혹시 이 '자화상'에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갱은 고흐가 귀를 자른 이후 자살할 때까지 편지 왕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보살펴 준 고흐와 테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으며 병마에 괴로워하는 고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은 있지만,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며 도움을 바라는 선량한 친구의 뜻을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다."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에 대해서 예술 전문가인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는 고흐의 귀는 그 자신이 자른 것이 아니라 펜싱을 했던 고갱이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사건 전날 밤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크게 다퉜으며 다음날 아침 고갱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고갱이 경찰에게 한 초기 진술에는 고흐 자신이 귀를 잘랐다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고갱이 사건 당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아니라 호텔에 머물고 다음날 파리로 서둘러 떠난 것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주장이 진실일지 명확하게 판단할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고흐와 고갱, 애증의 관계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과 증오와 우정이 숨어있다.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추리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미궁 속으로 엉뚱하게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며 과장 해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고흐와 고갱. 이 두 화가는 생애 마지막까지 서로를 의식하며 최선의 창작을 더해가며 예술혼을 불태웠으며 이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해주는 최고의 육상선수들처럼, 그들은 반세기 동안 상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하도록 서로의 예술관을 자극했다.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두 사람이 비슷한 연대에 출생하고, 작품 활동을 벌인 자체가 예술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장면이다. 그리고 고흐가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 사이에 한가람미술관을 들렀고 이번에는 고갱이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두 사람의 위대한 작품을 일 년도 채 안 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언젠가 다음에 또 한 번 한국에 찾아오게 되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꿈꿔본다.

 

 

 

* 2013년 9월 2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전시회가 열린다. <황색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고갱의 최고 걸작인 <설교 후의 환상><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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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교사』 1954년

 

 

저 끝으로 마을이 어슴푸레하게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들판 위에 한 남자가 홀로 서 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볼 수 없다. 차림새로 보아 세련된 도시풍의 중년 신사로 짐작된다. 검정 코트를 반듯하게 차려 입었고 코트에 어울리는 중절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달. 중절모의 머리 바로 위로는 그믐달이 교교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달빛의 기운을 받았는지 밤하늘의 어둠은 청색조로 온통 물들어 있다. 초저녁일까 새벽일까? 천지사방은 적막할 뿐이다.

 

얼핏 봐서 그림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다. 적어도 이상한 점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야릇한 의문과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우선 그믐 치고는 사위가 너무 훤하다. 중절모 위에 거의 내려앉은 듯한 달의 위치도 묘하고, 낮게 깔린 지상의 풍경과 대비된 남자는 거인처럼 커 보인다. 그리고 왜 저렇게 부동의 차렷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을까? 양복점 마네킹처럼 혹은 방부 처리되어 압정으로 고정된 곤충표본처럼 미동도 않는 모습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림 전체는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신비와 경이의 영역으로 우리를 몰입하게 만든다.

 

마그리트가 그린 ‘교사’(敎師)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제목과 그림 전체의 이미지와의 연관성도 수수께끼다. 그의 그림은 늘 이렇다. 불합리, 부조리, 불가해함. 더불어 시와 꿈과 환상이 배어있는 그림.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정확히 그려진다. 다만 그려진 내용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모습들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참이라고 믿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속성 때문에 참이라고 믿는 순간, 동시에 우리는 모순과 역설에 직면한다. 정작 그려진 건 도저히 참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술은 이때 발생하고 우리는 일상의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러나 그 헤매는 과정에서, 관성에 젖은 평범한 현실 너머를 호흡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우울증 속에서 은둔자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자신의 뒷모습이 연상된다. 실제 마그리트는 종종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절모 사나이와 비슷한 복장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할 때 작품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했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던 화가 자신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래도 마그리트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창하게도 세계 속 단독자의 절대적인 고독이 보인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존재. 그 존재의 황당함.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멸의 순간에 대한 예감과 더불어 살아간다. 누구나 간직한 이 예감의 능력은 곧 '천형(天刑)'이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이별이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무상(無常)으로서 곧 영원(永遠)을 구현한다. 그러나 그 끝없는 생성과 소멸의 질서 속에 사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다. 개별자의 삶이다. 그만큼 불만족스럽다. ‘산’의 질서를 수락은 하되 그 삶이 구족(具足)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꽃이 좋아서 산에 사는 새도 있다. 이것이 곧 삶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는 노래한다. 그러나 그 만족스러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꽃은 지고 또 진다. 별리(別離), 또는 영결(永訣)을 피할 수 없다. 산유화는 무상 속에서 영원을 구현하는 산의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개별자로서의 고독과 사랑과 비애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 받아들이면서 그 모순의 한가운데 담담히 서 있다.  

 

이 망 위를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에는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공포와 불안은 유보되거나 경감된다. 그러나 우리의 발은 망 사이의 틈새로 빠지기 일쑤다. 그때 절대 고독과의 대면은 불가피하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이 바로 그 불가피한 대면의 순간을 형상화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중절모를 쓴 사내는 저만치 혼자서 고독의 질서를 받아들인 채 서 있다. 무한한 세계와 유한한 인간의 적나라한 만남.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뒷모습이 누구인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척 외면할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고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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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6-04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프잖아 ㅠㅜ
 

 

 

 

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옛날 옛날에 가난한 젊은 화가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뒤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프란츠 나이스타인이었습니다. 두 화가는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궁핍한 삶을 연명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무척 돈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한 사람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이들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나이스타인이 일하게 되었고 뒤러는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이스타인은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드디어 뒤러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뒤러는 친구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미술학교에 보내서 그림을 배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했기 때문에 손이 굳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나인스타인은 화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친구를 위해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뒤러는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러는 자신의 친구가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친구를 위해서 희생한 그 손으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뒤러는 그 순간을 정성스럽게 스케치를 했습니다. 훗날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감동적인 그림입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잉크로 그린 이 스케치는 얼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손 마디마디마다 절절한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처럼 인간적 유대로 엮여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것이 진심일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진심이 없는 곳에서는 감동의 싹이 자라지 않습니다. 고귀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평탄한 곳에 피어나는 꽃이기보다는 역경의 가시밭길을 넘어선 곳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생과 감사와 신뢰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시 「가을의 나뭇잎」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동이 있는 삶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일생의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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