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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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호 개발 기술자들의 말 못하는 고민    

 

나로호 2차 발사가 실패한 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발사체가 하늘 위로  

솟아올라갈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서 많은 시민들이 전남 고흥군에 있는 나로우주센터로 

모여들었다. 나로호 개발 기술자들은 작년에 있었던 1차 발사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또 다시 10개월 동안 연구에 매진했다. 그들에게는 우리나라의 우주 연구 발전을 위해서하는  

임무이지만 사실은 임무로 의한 그들만의 고충도 있기 마련이다. 기술자들에게는 연구소 안에서 

의 생활이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연구소에 갇혀서 하나의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니 수면 시간은  

부족하고, 보고 싶은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지게 된다. 

나호로 2차 발사 하루 전에 개발에 참여한 러시아 기술자가 자해 소동을 일으킨 것도 스트레스로
인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몇 차례의 발사 연기 발표도 있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2차 발사가  

시작되었다. 이번만은 한국 국민의 꿈과 희망을 담아 우주로 뻗어나가길 바랬건만, 발사 이후  

공중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나로호우주센터로 모인 사람들은 이번 발사도 실패를 하지 아쉬움  

속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나로호 발사 실패에서 제일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한 사람은 나로호 

개발 기술자들이었다. 우리나라의 기술로 구성된 독자적인 우주 발사체를 만들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연구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다. 이전에 발사 실패를 많이 겪다보니 이번 나로호 발사 2차  

실패 자체에 대해서 많이 아쉬워하지 않았다. 1년도 채 안 되는 연구 기간은 기술자들에게는
심신을 힘들게 시간이었지만 2차 발사의 성공을 위한 연구 기간치고는 충분치 않은 점에 대해서 

크게 아쉬워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우리나라 우주 개발의 현실에도  

안타까워했다. 3차 발사 날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오늘도 나로우주센터의 기술자들은 

나로호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과학의 나락(那落)호가 되어버린 나로호

나로호 개발 기술자들 입장에서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과학에 대한 우리나라 대중들의  

인식과 시선일 것이다. 하필이면 나로호 발사 다음날이 남아공 월드컵 개막이라서 나로호 열기는 

금방 식어버렸다. 그러나 만약 나로호가 2차 발사에 성공하였더라면 나로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이어졌을까? 대중들은 나로호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길래 굳이 나로호우주센터로
모이는 걸까? 몇 몇 사람들은 나로호가 단순히 우주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주 연구를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즉, 인공위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나로호가 우주 어디에 날아가든 말든 대중들은 우리나라의 16강 진출 여부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냄비 근성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차례의 나로호
발사 실패 소식에 대해서 대중들은 기술자들의 실력 부족 탓으로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나로호 하나만을 위해서 고생한 기술자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말이다. 우주 개발 기술자 

들의 실력이 곧 우리나라 우주 산업의 현실이라고 결부하기 쉬운데 꼭 기술자들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들 위에 지배하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과학 인식 부족에도 문제가 있으며  

그들에게도 발사 실패에 대한 잘못이 있다. 이번 나로호 개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 기술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다. 하지만 과학 육성  

정책은 정부의 집권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펼친 산업화 육성 정책은 우리나라 과학 기술 육성에도 기여를 했으나 단기간 내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성과주의가 우리나라 과학 발전을 저해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실험에 대한 탐구 정신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과학 발전은 진전되기는커녕 영영 노벨상을 탈만한 과학자들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기득권자인 엘리트 계층의 경직된 사고는 과학에 무관심한 대중들을 만들게 되었으며  

지금의 이공계 기피 현상까지 오게 되었다. 나로호의 추락은 나락(那落)으로 빠져버린 우리나라 

과학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열악한 현실 속에서 나로호가 발사에 성공하길 바란다는  

것은 꿈도 야무진 일일 뿐이다.   

 

 

 거기 진짜 천문학자 좀 바꿔 봐요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엘리트 계층의 무지함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칼 세이건이 살아있을 당시 미국은 1977년부터 보이저 계획이라는 거대한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돌입하게 된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이저 계획은 현재 진행형이며 지금도  

보이저  1호와  2호는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물들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 우주 개발 사업이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미국의 사례를 보게 되면 미국의  

대중들도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미국도 꼭 그렇지만  

않은 거 같다.

『코스모스』에는 칼 세이건이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천문대에서 일을  
하고 있던 칼 세이건은 한밤중에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이었는데 천문학자를 바꿔달라고 하였다. 취객이 평생 한 번 갈까 말까 할 천문대에 전화를  
걸었던 이유는 밤하늘에 알 수 없는 빛이 나는 물체를 봤는데 그것의 정체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칼 세이건은 그것이 혜성일 것이라고 말하자 상대방은 혜성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칼 세이건은 혜성은 밤하늘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라고 간략하고 상세하게  
대답해줬다. 이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취객이 다시 하는 말.  


 “거기 진짜 천문학자 좀 바꿔 봐요.”    


진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의 입장에서는 취객의 말에 참으로 황당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에피소드에 대한 칼 세이건의 결(結)이 의미 심장하다. 

  핼리 혜성이 1986년에 다시 나타난다면 정치인들 중에 크게 겁을 먹는 이들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질까 자못 궁금하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홍승수 역, p 180 -

1910년에 핼리 혜성의 꼬리가 지구를 스쳐 지나갔을 때만 해도 자신들이 세계의 지배자라고  

자처한 미국과 유럽과 같은 제국의 사람들은 지구 종말의 초래에 호들갑을 떨었지만  

칼 세이건이 그렇게 궁금해 하던 우스꽝스러운 일은 다행히도 디지털 시대에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몇 몇 사람들은 혜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혜성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혜성이 얼음 덩어리라는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칼 세이건은  

혜성 에피소드를 통해서 과학을 모르는 대중의 무지함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학 앞에서  

대중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은 정치인들까지 꼬집고 있다.    

 

 

 엘리트 지배계층과 과학의 불편한 만남   
 

칼 세이건은 사람들이 과학을 기피하고 무지하게 된 원인을 고대 역사 속에서 찾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자연계의 질서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탈레스를 비롯한 이오니아 지역의 자연철학자 

들은 우주의 구성요소와 조화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주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은 관측과 실험이라고 주장하였다. 세계 최초로 일식(日蝕)과 피라미드의 길이를 측정한  

탈레스부터 시작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한 에라토스테네스까지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체계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과학이란 신성한 지식이며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험  

자체를 부정했다. 그의 학문은 학파로 발전하게 되면서 오랜 세월 축적되어 온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제목인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고대 그리스 지배 체제에까지 영역 활동을  

넓힘으로써 과학을 소수 기득권자들만의 지식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부유한 재산을 가졌으며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어쩌면 과학 발전이 한걸음 빨라지지 않을 것이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머리로만 하는 일을 좋아했을 뿐이지 몸으로 하는 일은 싫어했다.  

과학 실험과 측정은 하나의 육체노동으로 생각했으며 결국 그런 육체노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노예라고 알리는 셈이다. 그러니 귀족이 누가 자신보다 낮은 노예의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귀족들은 과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지 몰라도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대 중국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의 과학사를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의 상황과  

유사하다. 독자적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만든 채륜이 등장하였으며 곽수경이라는 사람은  

중국의 천문학 발전에 기여를 했다. 그러나 서양의 문물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중국  

과학사에도 잘못된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마테오 리치, 아담 샬을 대표로 하는 크리스트 교  

신부와 수도자들이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소개 

하였다.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양의 학문들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뭐든지 검열하려는 중국의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사대부들은 서양의 학문으로 인해서 국가 체제가 전복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들의 권력은  

청나라가 망할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과학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그리고 강대국으로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과학에 무지한 지배계층들 

때문에 말이다.    
  

 

 대중, 과학 기술자 그리고 과학 기술 관리자 

 

나로호 2차 개발하기 전,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금성을 관측할 수 있는 첫 우주 범선  

‘이카로스’를 하늘에 쏘아 올렸다. 우주 범선은 태양광과 태양풍 등을 이용해 우주를 떠다니는  

미래형 우주선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번 일본의 우주 범선 발사는 세계 최초라는 점과  

일본이 자력으로 개발해 발사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카로스 발사 이전에 일본도 여러 번의 발사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과거에 우주선 발사 실패했을 때 우주선 관련 관리자들은 이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의 의사를 표했으며 원인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은 우주선 발사 실패에 대해서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또 다시 재발사가 되어  

성공하기를 빌었다. 그들의 올바른 자세와 태도가 있었기에 당연히 이번 우주 범선의 발사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코스모스(Cosmos)'의 뜻은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우주를 뜻한다. 우리나라의 우주  

연구, 즉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대중, 과학 기술자 그리고  

기술 책임을 담당하는 관리자. 이들의 삼각관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은 이웃나라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의 우주 개발의 성공 사례나 다른 나라의 잔치가  

되어버린 연말 노벨상 시상식을 보면서 시샘한다거나 우리나라 과학 산업이 미흡하다고  

한탄하지 말고 우리나라 과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굳이 학창 시절처럼 과학 법칙을  

달달 외울 필요는 없다. 신문이나 TV에 과학 관련 기사나 소식을 통해서 우리나라 과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으며 과학계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현상과 트렌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과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해서는 대중적으로  

출간한 과학 관련 도서를 읽는 것도 좋다. 칼 세이건의 책뿐만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과학도서가 

많이 출간되어 있다. 과학 기술자들에게는 과학적 성과를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성과에 급급하다보면 제대로 된 기술이 개발되지 않는다. 기술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위에 있는 관리자들의 임무도 중요하다. 관리자들도 성과에 눈을 멀게 되면  

우리나라 과학의 현 수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관리자들의 성과주의가 밑에 있는  

기술자들을 부추기게 만든다. 결국에는 ‘개미구멍에 공든 탑이 무너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지나치게 성과에 매달려 만든 나로호에 조그마한 결함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실패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철저한 원인 규명에  

노력해야 한다. 과학 발전은 오랜 시간동안 관련 지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축적되어 완성되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과학의 수준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준에  

걸맞은 현실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대중, 과학 기술자, 담당 관리자가 코스모스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여 그 결실로 나로호 발사 성공과 ‘과학 강대국’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코스모스 꽃이  

피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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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 산문집 을 보면, 이 책을 5번이나 읽었다고 하더군요.

장하준도 영문으로 5번 한글로 6번 중딩때 읽었다고.....

저도 이 책 구입은 했는데 앞 부분은 찔금 봤는데 진도를 못 빼고 있어요. 에휴

cyrus 2010-11-06 16:07   좋아요 0 | URL
<코스모스>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명사들이 꼭 읽어봤던
책이었군요. 분량이 두껍고, 예전에 나온 대형판에 선보인
컬러 화보가 아니라서 중간에 지루함도 들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하루에 한 챕터씩 읽어서 완독했는데,,
시간 날 때 이렇게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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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47] 베니스에서의 죽음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 예술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화가와 음악가들. 

우리는 그들을 통틀어 Artist. 즉, 예술가라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거나 ‘거장’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  

예술가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거나 식음전폐까지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집중력을 쏟아낸다. 예술적인 집중력이 발휘하게 되면 예술가들은 신경이 예민해지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성격은 괴팍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심리상태는  

전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하게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되면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지속되는 영감(靈感)의 부재,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 자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별나면서도 정상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에게는 별도로  

‘기인(奇人)’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기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는 남다른  

행동과 성격으로 인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게 마련인데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격과 행동을 가지고 ‘기인’이라고  

불러주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인 예술가들은 그런 자신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자신 스스로 떳떳하게 인정하고 다니는 정말  

‘기인’다운 기인 예술가들 더러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런 삶을 보면  

불가사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예술에 대해서 집념이 아닌 집착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우리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다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만 짊어져야 하는 특수한 운명인 것일까?  

 

 

 토머스 만, 소설가 아센바흐, 예술가로서의 기질

유명한 문학 작가들은 독특한 예술가들의 실제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작품을 쓰거나 그런 그들의  

삶과 예술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도 예술가이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작가들도 상상력을 요하는 문학이라는 예술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라면 가지게 되는 독특한 기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며
그들에게 이런 주제가 참으로 흥미로웠을 것이다. 작가, 위대한 예술가, 독특한 기질. 이런 삼박자 

를 고루 갖춘 문학작품이라면 아마도 토마스 만의『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일 것이다.  

토마스 만은 세계대전 당시 양심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던 독일의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센바흐 또한 소설가이다. 그리고 작품 속  

소설가는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의 소유자이다. 아센바흐는 미소년 타치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런 행동과 기질은 흡사 동성애자와 같다. 재미있게도 아센바흐라는 독특한  

인물을 가공한 토마스 만도 동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토마스 만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동성애를 즐긴 예술가들이 많이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세계 문학사 사상 동성애 커플로 유명한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서 말년에 불우하게 산 오스카 와일드 등이 유명하다. 음악가들은  

동성애자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생상(피겨 선수 김연아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연기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던 <죽음의 무도>의 작곡가)은 서양 음악사상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이다. 특히 생상은 스스로 ‘남색꾼’이라고 자처했으며 토마스 만처럼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을 통해서 작곡의 영감을 얻기도 하였다. 예술가들 중에서 왜 동성애자가 많은지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동성애적 코드도 예술가들에게만 드러날 수 있는 독특한 기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간과하기 쉬운 아센바흐의 예술가다운 기질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아센바흐가 타치오에게 매혹되어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던 베네치아에서 

까지 따라와 결국에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설 제목인 ‘베네치아에서 

의 죽음’은 주인공 아센바흐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 전체상 동성애적 코드가 다분히  

드러나 있지만, 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동성애적 예술가의 일생이었다면 굳이 이 작품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문학사적으로 유명한 중편소설, 그리고 독일의 위대한 지성이라는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센바흐를 동성애자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비약이 심한 주장일  

뿐이다. 원래 그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자신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숨겨진 동성애적 본능이 

타치오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자칫 동성애자라는 오명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 

나타나있는 아센바흐의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놓칠 우려가 있다. 특히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아센바흐의 성격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화자의 서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사실 조숙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전체는 명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중략) 그는 고등학생일 때 벌써 명성을 얻었다. 10년 후에 그는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 명성을 관리하는 법을 익혔고, 짧은 편지글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신뢰를 주는 작가인 그에게 많은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호의를 베풀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익혔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298 -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운명이 예술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명망(名望) 있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의 삶을 택하게 된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명령을 하고 이에 대해 고통을 안기는 행동이 미덕의 진수라고 여긴다. 자신이  

생각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즉,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엄격한 자기통제를 건다.

  그가 그러한 재능에서 비롯된 과제를 가냘픈 두 어깨에 떠안고 앞으로 계속 나아 

  가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극도의 규율이 필요했다. (중략)  그는 가슴과 등에  

  찬물을 끼얹으며 아침 일찍 일찍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원고지 머리말에 놓인 은촛대에 한 쌍의 기다란 초를 밝히고, 오전에 열정적이고도  

  양심적인 두서너 시간 동안의 수면으로 비축해 둔 힘을 예술에 전부 쏟아 부었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300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다  

하지만 아센바흐도 너무 과한 예술가적 기질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작품 창작에  

대한 엄격한 자기통제 뒤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포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하늘의 뜻을  

알고 있다는 ‘지천명(知天命)’ 50세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젊음의 혈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처럼 인간 아셴바흐도 점점 나이가 들면 예전의 예술적 재능이 퇴화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이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의 전, 중반기 작품들이 후반기 작품보다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와 대표작들은 대부분 재능의 물이 올랐을 젊은 시절 때에 쓴 것이 많은 것도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 작품 구상이 이전보다 진전이 없다는 것은 예전보다 창작 능력이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이미 상실해버린 젊음, 즉 혈기왕성했던 창작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를 통해서 갈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에 대한 집념이 결국에는 집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베네치에에 오면서까지 타치오를 쫓았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걸지도 못한다. 즉, 타치오는 고차원적인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아셴바흐는 

눈 앞에 그토록 좋아하던 타치오가 있으면서도 말을 걸어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타치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게 되는데 결국에는 예술가들이 가지게 되는 열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젊었을 때의 예술적 재능을 찾기 위해서 지나치게 집착을 보인 아센바흐는 

도리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게 됨으로써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재능의 불씨마저 꺼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예술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좌절감과 동시에 작품에 대한  

집착이 낳은 괴로움 끝에 자살하는 예술가와 다름없는 자살 행위인 것이다.   
 

 

 아센바흐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시 중에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작품이 있다. 작가와 내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백수광부(白首狂夫, 뜻풀이를 하면 하얀 산발의  

미친 사내)가 물에 빠져 죽자, 백수광부의 아내도 따라 죽는 것을 본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여옥에게 가서 알려주었더니 여옥이 공후라는 악기에 맞추어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 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 속에 빠져 죽은 임.
  아아, 저 임을 언제 다시 만날꼬.

  -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전문, 출처: 위키백과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은 아센바흐의 넋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딱 알맞다. 아센바흐는  

타치오를 보기 위해서 기어코 곤돌라를 타고 죽음의 땅 베네치아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리고  

원통하게도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센바흐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비록 이상적인  

예술의 실현을 이루지 못한 부질 없는 집착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의 마지막 여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여정은 예술가인 아센바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며  

아센바흐는 심장 속에 숨어 있었던 예술적 본능을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도 ‘위대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여도 어색하지가 않다.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  

그는 미소년을 쫓아다니는 동성애적 소설가가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고자 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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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과학으로 보는 별자리와 우주 뉴턴 하이라이트 Newton Highlight 19
뉴턴코리아 편집부 엮음 / 아이뉴턴(뉴턴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그대를 비춰주는 별이 될게 

 ♬ 내 사랑을 꼭 기억해줘요 
    내 눈물을 그댄 듣고 있나요
    기억할께 십년이 지나도 나 약속해
    그대를 잊지 않을께 
 

    그대를 비춰주는 별이 될께 ♬ 

    - 작사. 작곡 오성훈, 노래 디셈버 <별이 될께> 가사 엔딩 부분, 출처: 네이버 뮤직 -  

 

세상을 떠나고 만 연인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가사의 노래이다. 비록 연인은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했던 기억들은 영원히 간직할 것이며 연인을 환하게 비춰주는 별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낭만적인 내용이다. 노래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별’은 사랑의 상징으로 비유되고  

있다. 7080세대 연인들 사이에서 ‘별을 따다줘’라는 말이 유행했다. 주로 여성들이 이 말을  

사용하는데 사랑하는 남성이 자신을 진짜로 사랑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쓴다.  

비록 밤하늘에 있는 별을 따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말을 들은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따올 수 있을 듯이 말한다. 그런 반응에 여자들은 

그런 남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즘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또 다른 노래 가사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지 않게 밤하늘의 별을 따서 주겠다는 내용이 있다. ("밤하늘의 별을" 

-양정승, KCM, Nonoo 노래)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을 따다 바치는 것. 지금도 들어도  

참으로 낭만적인 사랑의 관용어구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말을 사용하게 된다면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다. 별은 사랑 확인의 상징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서도 사용한다.  

디셈버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비춰주는 별이 되어 수많은 사랑의 기억들이 영원히
빛나게 하고 싶은 것이 연인들의 소망일 것이다.  

 

 

 별의 일생: 암흑성운에서부터 초신성까지

밤하늘의 별은 인간의 수명보다 더 오래 빛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별빛도 유한성을 지니고  

있다. 별의 수명은 100만 년 정도인데 인간이 정해진 수명에 따라 죽는 것처럼 별에게도 죽음이  

있다. 

 

별이 맨 처음 탄생되는 곳은 암흑성운이다. 그곳에서는 중력이 작용하여 우주에 떠도는 가스와  

먼지들을 끌어 모으는데 새로운 아기별이 탄생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수정을 거쳐서 아기가 완성되는 것처럼 암흑성운은 별들의 자궁인 것이다. 탄생한 수천 개  

이상의 아기별들은 불규칙적으로 모여 있게 되는데 이것이 산개성단이다. 어리고 젊은 별은  

처음에는 푸르스름한 색을 띄게 되는데 시간에 따라 점차 변하게 된다. 별의 내부에는 수소의  

핵융합 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별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그래서 별의 온도가 높다. 내부 작용 

으로 인해서 색깔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크기가 변하게 된다. 인간은 활동하면서 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면 지치게 되듯이 별도 수소의 핵융합 작용이 활발히 일어나고 난 뒤에는 밝기와 내부 

온도가 점차적으로 떨어지며 예전과 같지 않게 된다. 그리고 별의 색깔도 청색에서 적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수소를 다 태우고 재만 남은 적색 거성이 된다. 적색 거성을 사람으로 치자면  

노년기로 비유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핵융합 작용은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마지막 남은  

강한 핵융합 작용을 이용하여 적색 거성은 폭발하고 마는데 바로 이것이 초신성이다. 일반적으로 

초신성이라는 단어만 듣게 되면 새로운 별의 탄생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별의 탄생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별의 탄생 배경에는 적색 거성의 죽음이 있다. 즉, 초신성은 별이  

죽어가는 과정이면서도 새로운 별의 탄생 과정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신성은 우주  

형성 과정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무수히 흩어진 초신성의 잔해는 다양하고도 새로운 우주  

현상을 형성하는데 사용한다. 암흑 성운 구성에 필요한 성간 가스가 되어 새로운 별의 탄생에  

재활용되기도 하거나 강한 전자파와 X선을 방출하는 펄서(중성자별)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별은 초신성의 잔해로 시작해서 끊임없는 핵융합 작용이라는 순환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죽는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별들이 탄생한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셔서,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

비록 별도 인간처럼 죽게 되지만 백년해로(百年偕老)의 상징성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결혼식  

주례 단골 멘트인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남녀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 혼(魂)이 되더라도 인연의 끈은 영원히 이어져있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소망이기도하다. 작가 미상의 고려 가요 

『정읍사』중에는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셔서,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작품 속 화자는 사랑하는 임을 향해서 달이 비춰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항상 우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는 현상을 절묘하게 임을 향한 사랑으로 묘사했다. 

사실 달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지평선과 달까지 이루는 각이 항상 일정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착시 현상일 뿐이다. 이런 현상을 광행차 효과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달의 재미있는 특징은 항상 앞면을 지구로 향한 채 떠오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구에서 망원경 

으로 달을 관측하더라도 뒷면을 절대로 볼 수 없게 된다. 이유는 신기하게도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주기와 자전 주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달의 자전주기와 공전주기는 똑같이 27일이다. 

‘별을 따다 바칠게,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할게’와 같은 말은 이제 고전적인 사랑 멘트가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영원히 사랑할 것임을 은유적으로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싶다면 별이 아니라 이제는 ‘달’로 표현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앞면으로 지구를 향하는  

현상과 광행차 효과를 비유삼아 항상 사랑하는 그대만을 바라 보고, 항상 그대 곁에 있는 달이  

되겠다는 멘트는 어떤가?  이 멘트도 너무 식상하다, 닭살이 돋는다고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곁에 있는 사랑하는 연인만 바라보고 영원히 비춰주는 달과 같은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오랫동안 

사랑의 감정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할 뱀꼬리   

 

리뷰를 살펴보면 '별이 될께' , '기억할께' , '않을께' 라고 되어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잘못된 언어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을 정도로 고착화되어 그렇게 표현하고 있으며  

노래 제목과 가사에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어서 리뷰 작성에는 편의상 그렇게 썼다.  

사실은 '별이 될게' , '기억할게', '않을게' 가 올바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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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에 사는 즐거움 - 이황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8
이황 지음, 김대중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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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퇴계 이황 
 

퇴계 이황과 관련된 것 중에서 뭐가 떠오르는가? 1000원짜리 지폐 속에 간지 나는 소지섭 

눈빛을 발산하는 할아버지라고 맨 처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조선 유학자, 도산서원이라고 

떠올렸다면 학창 시절 헛되이 보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만약에 이기호발(理氣互發) 

,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고등학생  

시절, 윤리 시간에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에 대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서양 철학 사상에는 막힘이 없었고 이해를 했었으나 동양  

철학 사상 쪽에는 유독 약했었다. 특히 이황과 이이의 사상은 ‘이(理)’‘기(氣)’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모의고사에는 항상 이런 문제가 출제되곤 했었다. 

간략하게 두 이론을 설명하자면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인간과 자연은 각각 이의 발현과  

기의 발현으로 구분되어 이루어져 있는데 ‘이’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반면 이이는 이는  

하나로 통해 있지만 기는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이는 ‘기’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공부했을 때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해를 했지만 막상 모의고사 시험 문제를 풀면 가끔 틀리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또 다음 모의고사 문제를 풀다보면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이이가 주장한 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몇 몇 사람들 중에서도 1000원짜리  

지폐 속 인물이 이이인지 이황인지 구분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이황과 이이에 

대해서 헷갈려한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면서도 얼핏 이름도 서로 엇비슷하다 

보니 한 번은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황이 단순한 성리학자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벼슬을 지낸 정치가였으며, 시인이면서도 인문주의자였다.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 하리라

우리나라 문학 교과서나 각종 문제집에 그나마 많이 실려 있는 퇴계의 작품이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이다. 참고로 과거 수능 시험 지문으로 출제되기도 했었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도산서원 주변의 자연 경관을 보고 감상한 것을 적은 총 12곡의  

시조로 구성된 작품이다. 전반부를 이루고 있는 6곡은 도산 서원 주변의 경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도산십이곡의 시작을 알리는 1곡은 자연에 대한 퇴계의 지극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떠하랴 
  하물며 자연을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쳐 무엇하랴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도산십이곡> 제1곡 전문, p 69 -  


퇴계는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 사는 삶을 권유하지만 그들은 

그런 퇴계를 시골에 묻혀사는 어리석은 사람 (초야우생)이라고 무시한다. 하지만  

퇴계는 주눅이 들지 않는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고질병(천석고황)이라고 말하면 

 세속적인 삶에 물든 그들에게 굳이 정신적으로 좋은 병을 고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한다. 
 

후반부를 이루는 나머지 6곡은 학문과 수양에 임하는 의지와 자세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전반 6곡에서는 자연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다가 후반부의 시작인 7곡부터는  

학자로서의 퇴계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1곡은 후반 6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이다. 전반에서 강조한 자연에 대한 예찬과 후반에서 강조하고 있는 학문  

수양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도산십이곡> 제11곡 전문, p 80 -

푸른 산은 오랜 세월(만고)동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밤낮(주야)을 가리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즉, 청산과 유수는 자연의 영원성을 뜻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는 그런 자연의 

영원성을 본받아 학문 수양에 정진함으로써 영원히 푸른 존재(만고상청)가 되겠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11곡에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간 세상에도 자연의 영원한 질서와 

조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퇴계의 도학(道學)적 이상을 볼 수 있다.   

 

 

 

 퇴계의 한시를 읽는 3대 키워드, 매(梅). 송(松). 죽(竹)

퇴계의 생애 전반에는 학문적 칭송을 얻음과 동시에 왕도 인정할 성공적인 정치 생활을  

누려왔지만 말년은 전반과 비교하면 어두운 시절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퇴계의 

몸은 약해져만 가고 결국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병든 몸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벼슬자리에 물러나게 되었다. 왕은 퇴계의 능력은 높이 사고 있어서 그의 은퇴를  

만류하였지만 퇴계는 왕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홀로 속세와 떨어져
있는 자연이 있는 곳에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속세에서 지내면서 가지고 있었던 왕에  

대한 충신(忠臣)적인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퇴계는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명(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왕에게 어필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 

었다.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상의 태도에 퇴계로서는 무척 섭섭하면서도 외롭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퇴계는 한시를 읊으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였는데 대부분  

매화(梅), 소나무(松), 대나무(竹)를 주제로 한 작품이 남겼다. 퇴계가 자연을 좋아하는 

성격인 만큼 한시에서도 매화, 소나무, 대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 자연물 중에서 퇴계는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에게 매화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화를 통해서 속으로 담아두고 있었던  

왕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였다.  


   매화가 봄을 맞아 찬 기운 좀 띠었기에
  꺾어다 마주했네 옥창(玉窓) 사이로
  천산(天山) 밖 벗님이 길이 그리워
  향기가 축나는 것 못 견디겠네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매화가지 꺾어두고(원제: 折梅揷置案上  

     절매삽치안상)> 전문, p 41 -  

 

시 속의 화자는 ‘벗님’을 향한 정(情)이 담은 매화를 꺾어 사랑하는 벗님에게 바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벗님은 ‘천산 밖’에 있다. 화자와 벗님이 천산으로 인해서 서로 단절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벗님’은 한양에 살고 있는 왕이며 화자는 퇴계인 것이다.  

벗님에게 바치지 못한 채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왕에 대한 그리움이다. 퇴계는 자신에게  

힘든 시련이 찾아오거나 고독감을 느끼게 되면 소나무와 대나무를 통해서 고통을  

이겨내려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꾼은 쑥대처럼 천시하지만  

   산옹(山翁)은 계수나무처럼 사랑하누나. 
  푸른 하늘까지 우뚝 솟아오르려면 
  풍상을 몇 번이나 겪어야 할지.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소나무를 심으며(원제: 種松 종송)> 전문, p 34 - 

 

작품 속 산옹은 화자, 곧 퇴계 자신을 뜻한다. 나무꾼으로 표현되는 속세 사람들은 소나무 

를 무시하지만 오히려 퇴계는 오랜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계속 자라는 소나무를 사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퇴계와 소나무는 동등한 존재로 부각시키게 된다. 퇴계는 자신과  

소나무가 겪어야 할 미래의 시련(풍상)에 대해서 걱정한다. 결국 퇴계의  걱정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퇴계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은 병이었던 것이다.    

 

 

  사흘 동안 한양에 눈이 내려서               
  찾아오는 사람 발길 뚝 끊겼지.              
  얼마나 쌓였나 병석에서 물으니
  싸늘한 이불이 쇠붙이 같네.

  (중략)
  나무 끝이 눈에 묻혀 보이질 않고
  가지마다 꾹꾹 눌러 꺾이려 하네.
  참으로 기특하네 한두 줄기가
  천길 높이 솟아올라 꼿꼿함 보여주니.

  (하략)

  -『도산에 사는 즐거움』김대중 역, <눈 속의 대나무(원제: 雪竹歌 설죽가)> 중에서,  

     p 28 -   

 

 

이 작품을 쓰고 있을 당시 퇴계는 병을 앓고 있었다. 하필이면 전국적으로 눈이 내리게 되어서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에 눈이 많이 쌓이다보니 육체적인 고통에 혼자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노학자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나보다. 병 져 누워있는 퇴계의 방은 병문안 찾아오는 사람들의 

따뜻한 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차디찬 공간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퇴계는 ‘싸늘한 이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정말 아프면 서럽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시의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퇴계의 마음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그는 눈에 쌓여 반쯤 뒤덮인 대나무를 보게  

된다. 가지에도 눈이 쌓이다보니 꺾일 우려가 있지만 줄기는 쌓인 눈 사이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음으로써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략에 생략되어 있지만 퇴계는 그런 눈 속의 대나무를 

통해서 강인한 삶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지연합일의 세상을 꿈꾸다

 

퇴계가 남긴 글들은 400여 년 전에 쓰여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글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들은 현재까지도 그 가치가 유효하다.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는 바다 건너 일본 

과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퇴계에 대한 이미지가 깊이 인식되어 

있다 보니 문학적 가치는 많이 가려져 있다. 대부분 자연을 예찬하는 작품들은 단순히 혼자 

서 자연 경관을 즐기려고만 하는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퇴계는 현실을 도피하 

기 위해서 자연을 혼자 즐기지 않았다.『도산십이곡』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을  

즐길 것임을 권하기도 하였으며 자연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으려고 하였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은 지식 획득에는 행위를 합일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퇴계의 도학적 이상인 지연합일 

(知然合一) 은 유학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지행합일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도산십이곡』뿐만 아니라 자연을 노래한 한시들도 진일보된 퇴계의 유학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연구 대상이다. 한시와 시조 작품들이 퇴계의 유학 사상에  

대한 연구 자료에 활용을 하는 것은 퇴계의 문학적 가치를 한층 더 빛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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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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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는 자아 성찰의 기록 
 

모든 내용의 한 구절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정독(情讀)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비록 양은 많지 않았지만 가볍게 읽혀지는 내용도 아니었고 문장 하나하나는 

그냥 스치기에는 아까운  주옥같은 명언들이었다. 황제인 아우렐리우스가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기록한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전쟁 중임에도 그는 자계(自戒)의 말을  

꾸준히 기록하였다. 그는 인간을 지키고 인도하는 것은 오직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철학은 스토아 철학을 가리킨다. 스토아 철학에서 주장하는  

삶의 기술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명상록』을 이루고 있는 내용에는 스토아 철학의  

사상이 물씬 풍긴다.  

 

  네 몫으로 주어진 사물들에 적응하고, 운명이 정해준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라   

                                                -『명상록』천병희 역, 제6권 p 101-


 밑줄 그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라서 중요한 구절을 마음대로 좍좍 밑줄 그을 수 없었다. 

『명상록』은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씩 읽고 나면 인상 깊었다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썼다. 내용이 너무 좋아서 그냥 눈으로 한 번 읽고  

반납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나는 도서관에서 정말 좋은 내용으로 구성된 책을 만나면  

두 번 정도 읽는 편이다. 하지만 또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시간은 많이 남아있지만 시간은 급류라는 표현처럼 무엇이든지 금방 휩쓸려간다. 

(『명상록』천병희 역, 제4권 p 66)  12권 전체 내용을 한 번 통독하고 나면 구절들을  

기록하기 위해 또 한 번 읽어야 했다. 가끔 번거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반복적으로  

읽으니깐 처음에 읽었을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숨겨진 문장들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가면 갈수록 기록 작업량이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야간 아르바이트가 

남긴  피곤함을 억누르고 얼마 남지 않은 자격증 공부의 중요성을 제쳐두면서까지 5일  

동안 『명상록』기록에 매달렸다. 지금도 생각하면 미련했던 5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통독을 통해서 제대로 내 자신에 대해서 명상할 수 있었던  

기회라고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포장한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는 전쟁 중에도 시간이 

나면 틈틈이 기록을 하였는데 나라도 못할쏘냐.  사족일지도 모르겠지만 『명상록』의  

구절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빌려서 읽는 것보다는 구입하는 것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만큼 소장 가치도 있으며 여러 번 읽어도 좋은 책이다. 

   

 너무나 겸손한 안니우스 씨   

아우렐리우스의 생애를 살펴보면 요즘 시대의 엄친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세 번이나 지낸 사람이다. 집정관은 로마 공화정 최고 관직이다. 그리고 그의  

인척은 왕족이었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지 전에 원래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할아버지에게 입양되어 개명된 이름)이다. 그는 친가 쪽 할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아우렐리우스와의 핏줄이 연결되어 있으며 당시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런 젊은 아우렐리우스 

에게 ‘안니우스 베리시무스(Annius Verissimus, 진리를 좋아하는 안니우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별칭과 소년 시절을 통해서『명상록』에서 표현하고 있는 삶의  

진리들은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공부의 결과가 세월이 흘러 와인처럼 숙성된 것이다.  

라틴 어 Verissimus의 뜻에는 ‘진리를 좋아하는’ 뜻 이외에도 ‘진실한’, ‘진지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명상록』천병희 역, 옮긴이 서문 p 5~6) 천성인 진실하고 진지한 

성격 덕분에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놓은 자기 성찰의 기록을 남겼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권에서는 가족들, 소년 시절의 스승부터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철학자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들 덕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좋든 나쁘든 아우렐리우스는 항상  

신에게 감사했다.  

 

우리나라 서적과 다르게 외국 서적의 머리말이나 서문을 살펴보면 항상 감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글로 마무리된다. 그 내용 기록에 할해하는데에 기본으로  

1장 이상이다. 저자의 가족들의 이름과 저술에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까지 보는 독자들이 

지나치게 생각할 정도로  열거한다. 그리고 저자가 크리스트 교이면 하느님에 대한  

감사도 빠지지 않는다. 목차로 들어가기 전 여백에는 저자가 존경했던 사람이나 친한  

가족의 이름을 넣어 자신이 쓴 책을 그에게 바친다는 식으로 짤막한 헌정사를 남긴다.  

외국 서적에는 그런 공통적인 서술이 보이는데 그런 서술 방식을 맨 처음 시작한 사람이  

아마도 아우렐리우스일 것이다. 그래서 1권을 읽게 되면 서론을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 아니랄까봐 그와 만났던 인물과 신에 대한 감사를 세부적으로  

기록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아우렐리우스가 철학을 공부하게 된 것과 왕이 된 것 등  

자신이 이룩한 성과와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는 것 모두가 신의 덕분이라고 언급한  

문장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1권에는 자신이  

잘났으며 위대하다는 로마 황제다운  기질이 보이지 않는다. 아우렐리우스는 안니우스  

베리시무스인 것뿐만 아니라  안니우스 베르쿤디시무스 (Annius Verecundissimus, 

'겸손한‘이라는 뜻을  가진 Verecundus의 최상급)였다. 즉, 겸손한 안니우스였던  

것이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그런데 1권에서 그의 가족을 언급하는 내용 중에는 너무 겸손한 안니우스 씨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진지하고 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명상록』천병희 역, 제1권 p 30 - 
 
아우렐리우스의 아내는 그다지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아내도  
아우렐리우스처럼 왕족 출신이지만 아우렐리우스와의 반대로 정숙하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아내와 아우렐리우스 휘하의 장군과의 염문설이 떠돌았음에도  
불구하고『명상록』에는 그녀와 관련된 좋지 않은 언급과 그녀에 대한 악평은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고대 로마에도 자신의 아내의 행동을 눈감아주는 처용과 같은 대인배가  
있었다니..... 상상하건데 아우렐리우스의 아내는 소크라테스의 마누라 크산티페  

버금가는 악처(惡妻)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의 바가지 긁기 덕분에 자신의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부인도 너무나도 착해빠진 남편에게 바가지를
분명히 긁었을 테다. 하지만 정숙하지 못한 악처를 둔 덕분에『명상록』이라는 훌륭한  
스토아 철학 작품이 탄생되었기에 아우렐리우스 입장에서는 이런 아내를 만나게 해준  
신이 고맙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공평했다. 신은 아우렐리우스에게 엄친아의 능력을 부여해줬지만 아들에게는 
그런 혜택을 주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아들 3형제가  
있었다. 하지만 장남과 막내는 요절하고 그나마 남은 둘째는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철인(哲人) 정치인

그는『명상록』, 이 단 한 작품으로 인해서 ‘철인(哲人) 통치자’로 지금까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황제로서의 정치적 활동에 별 도움은 주지 않았지만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  

터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조선의 왕들은 유교 경전을 통해서 학문 수양을 꾸준히 하였다. 그들의 일과에는
경전 읽기와 학자들 간의 대화는 빠지지 않았다. 왕들에게 공부란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왕도정치의 실현 목적이라는 동시에 왕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수양할 수  

있는 정신적 훈련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의 왕들뿐만 아니라 좋은 정치를 베풀었던  

외국의 유명 정치가나 황제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체 정치를 펼침으로써  

프로이센의 영광을 확고히 다졌다. 독서라는 습관을 가지지 않았다거나 볼테르라는  

걸출한 사상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훌륭한 위인으로 칭송받는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  

그리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과 같은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갑자기 독서로 빠져버리게 되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갖추기의 중요성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단순히 지적 사고를 형성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이며 하나의 문제 현상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가는데 인문학 공부는 필요하다. 

가끔 미디어에서는 정치인들이 읽고 있다거나 그들이 추천한 책이 소개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읽고 추천한 책은 읽어야 할 훌륭한 책들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인문학 관련 책을 찾기란 드문 일이다. 어쩌면 인문학이 정치 활동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에게는 자기 수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국민들에게 올바르고 곧은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자기 수양이 제대로 되지  

않게 된다면 아무 생각 없이 성적 발언이나 막말을 해대는 수준 이하의 정치인이 나오기  

마련이다. 가끔 정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책과 관련된 언급을 하게 되면 유심히  

지켜본다. 그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인문학 책 한 권이라고 읽었는지  

확인한다. 지금까지  내가 각종 미디어에서 본 정치인들 중에서는 인문학 책을 읽었다거나 

추천한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인문학 책 한 권이라도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인문학의 인기가 낮은 분위기를 감안하면 인문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정치인이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자신의 조국인 슬로베니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처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정치인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과연 ‘철인(哲人) 정치인’이 등장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앞으로  

두고 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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