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사에서 이상(李箱)이 차지하는 위상은 자신의 시, 소설만큼이나 독특하다. 무엇보다 이상 시의 접근을 막는 것은 특유의 난해성이다. 예컨대 이상이 일본어로 쓴 조감도(鳥瞰圖)-LE URINE[1]은 악명 높은 연작시 오감도(烏瞰圖)보다 먼저 나온 시인데, 이 작품 또한 난해하다.

 

 

 불길과같은바람이불었것만불었건감얼음과같은수정체는있다. 우수는DICTIONAIRE와같이순백하다. 녹색풍경은망막에다무표정을가져오고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의명랑한색조로다.

     

  들쥐와같은험준한지구등성이를포복하는것은대체누가시작하였는가를수척하고왜소한ORGANE을애무하면서역사책비인페이지를넘기는마음은평화로운문약이다. 그러는동안에도매장되어가는고고학은과연성욕을느끼게함은없는바가가장무미하고신성한미소와더불어소규모하나마이동되어가는실과같은동화가아니면아니되는것이아니면무엇이었는가.

     

  진녹색납죽한사류는무해롭게도수영하는유리의유동체는무해롭게도반도도아닌어느무명의산악을도서와같이유동하게하는것이며그럼으로써경이와신비와또한불안까지를함께뱉어놓는바투명한공기는북국과같이차기는하나양광을보라.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하여비늘을질서없이번득이는반개의천체에금강석과추호도다름없이평민적윤곽을일몰전에빗보이며교만함은없이소유하고있는것이다.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장에는설탕과같이청렴한이국정조로하여가수상태를입술위에꽃피워가지고있을즈음번화로운꽃들은모두어데로사라지고이것을목조의작은양이두다리를잃고가만히무엇엔가귀기울이고있는가.

     

  수분이없는증기하여온갖고리짝은마르고말라도시원치않은오후의해수욕장근처에있는휴업일의조탕은파초선과같이비애에분열하는원형음악과휴지부, 오오춤추려므나, 일요일의뷔너스여, 목쉰소리나마노래부르려무나일요일의뷔너스여.

     

  그평화로운식당또어에는백색투명한MEMSTRUATION이라는문패가붙어서한정없는전화를피로하여LIT위에놓고다시백색여송연을그냥물고있는데. 마리아여, 마리아여, 피부는새까만마리아여, 어디로갔느냐, 욕실수도콕크에선열탕이서서히흘러나오고있는데가서얼른어젯밤을막으렴, 나는밥이먹고싶지아니하니슬립퍼어를축음기위에얹어놓아주려무나.

     

  무수한비가무수한추녀끝은두드린다두드리는것이다. 분명상박과하박과의 공동피로임에틀림없는식어빠진점심을먹어볼까-먹어본다. 만도린은제스스로포장하고지팽이잡은손에들고자그마한삽짝문을나설라치면언제어느때향선과같은황혼은벌써왔다는소식이냐, 수탉아, 되도록이면순사가오기전에고개숙으린채미미한대로울어다오, 태양은이유도없이사보타아지를자행하고있는것은전연사건이외의일이아니면아니된다.

 

 

이상 시는 주석과 보충 설명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독자와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자기 정신과 폐병으로 삭은 몸을 학대해가며 빚어낸 사유의 뼈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상의 시는 강골(强骨)이다. 이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자기 세계를 고집했다. 이상(李箱/異常)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문학인들이 도전했다.

 

이상 문학의 정본을 새로이 만들려면 이상이 생전에 발표한 텍스트의 원전(原典)뿐만 아니라 유고, 습작 노트까지 수집, 꼼꼼히 분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원전을 기존에 나온 이상 문학 전집들과 대조하는 작업도 진행된다. 연구자는 원전에 오식이 있는지 검토한다. 왜냐하면, 오식을 바로 잡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와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 문학을 연구하는 다음 사람을 위해서 이상 문학 정본을 만들려면 원전과 우리말로 풀이한 시, 그리고 주석 및 보충 설명 순으로 편집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상 문학에 접근하기 어렵다.

 

 

 

 

 

 

 

 

 

 

 

 

 

 

 

 

 

 

 

 

 

 

 

 

 

 

 

 

 

 

 

 

 

 

 

 

 

 

 

 

 

 

 

 

 

 

 

 

 

 

 

 

 

 

 

 

 

 

 

 

 

 

 

 

 

 

 

 

 

 

 

 

 

 

 

 

 

 

 

 

 

 

 

 

 

 

 

 

* 김종년 주해 이상 전집(가람기획, 2004)

* 김주현 주해 정본 이상 문학 전집(소명출판, 2005)

* 김주현 주해 정본 이상 문학 전집 (증보판)(소명출판, 2009)

* 권영민 주해 이상 전집(, 2009)

* 권영민 주해 이상 전집(태학사, 2013)

    

 

 

국내 최초 이상 문학 정본이 무엇인지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김주현 교수는 1956년에 임종국이 엮은 세 권짜리 이상 전집을 가장 먼저 언급했고, 권영민 교수는 1949년 시인 김기림이 엮은 한 권의 이상 전집을 임종국이 선보인 이상 문학 전집보다 앞서 언급했다.

 

 

 

 

 

 

 

 

 

 

 

 

 

 

 

 

 

* 조해옥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소명출판, 2001)

 

 

 

이상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1950년대이다.[2] 오식을 바로 잡고 믿을 만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이 정본의 일차적 조건이. 물론 임종국의 <이상 전집>도 오류가 있긴 하나, 이상 문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촉매 역할을 한 정본으로 볼 수 있겠다.

 

 

 

 

 

 

 

 

 

 

 

 

 

 

 

 

 

 

 

* 이승훈 주해 이상문학전집 1(문학사상사, 1989)

* 김윤식 주해 이상문학전집 2(문학사상사, 1991)

* 김윤식 주해 이상문학전집 3(문학사상사, 1993)

 

 

 

임종국의 <이상 전집> 출간 이후로 이어령(1977~1978), 이승훈과 김윤식(1989, 1991, 1993), 김종년(2004), 김주현(2005), 권영민(2009)으로 이어지는 이상 문학 정본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이어령, 이승훈, 김윤식 <이상 전집>은 절판되었다. 이상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절판된 책을 구할 필요는 없다. 김주현과 권영민 <이상 전집>은 앞서 나온 <이상 전집>들의 오류를 검토하기 위해 정확한 원전 비평과 판본 비교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실, 김종년 <이상 전집>정본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책에 원전은 없고, 우리말로 풀이한 텍스트로 편집되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풀이한 텍스트는 원전보다 가독성이 나은 편이므로 이상 문학을 처음으로 접근하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적합하다. 반면, 김주현 <이상 전집>은 원전과 주석으로만 구성된 책이다. 따라서 정확한 원전을 알고 싶으면 김주현 <이상 전집>을(이상 문학 전공자를 위한 책), 깊이 있는 주석을 중심으로 이상 문학을 이해하고 싶으면 권영민 <이상 전집>을 고르면 된다.

 

 

 

 

 

 

 

 

 

 

 

 

 

 

 

 

 

 

* 신범순 주해 이상 시 전집 1 : 원전 주해(나녹, 2017)

* 신범순 주해 이상 시 전집 2 : 수정 확정(나녹, 2017)

 

 

 

필자는 김주현 <이상 문학 전집 1 : >와 권영민 <이상 전집 1 : >(뿔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를 같이 읽고 있다. 최근신범순 교수가 엮은 <이상 시 전집>이 출간되었는데, 아마도 김주현, 권영민 판본의 오류를 비교 · 검토했을 거로 짐작해 본다. (이 책을 아직 안 읽어봤다) 김주현, 권영민 판본을 더듬더듬 번갈아 읽으면서 두 판본에 수록된 원전 텍스트의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 파편의 경치

 

 

나는遊戲한다

의슬립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떠하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김주현 판본, 35)

 

 

 

나는논다

의슬립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떠하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권영민 판본, 190)

 

 

 

김주현 판본의 원전에는 나는遊戲(유희)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권영민 판본은 우리말로 나는논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나의 生涯는 원색과같하여 豐富하도다.

 

(김주현 판본, 47, 띄어쓰기 허용)

 

 

 

나의 生涯는원색과같하여豐富하도다.

 

(권영민 판본, 47, 띄어쓰기 없음.)

 

 

 

띄어쓰기를 거부하는 글쓰기는 이상 문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상은 띄어쓰기를 지키면서 문장을 쓰다가도 갑작스럽게 띄어쓰기를 무시한 문장을 쓴다. ‘기인다운 글쓰기다. 정확한 원전을 공개하려면 띄어쓰기가 된 문장띄어쓰기를 무시한 문장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 거울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만은

또꽤닮앗소

 

(김주현 판본, 83)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마는

또꽤닮앗소

 

(권영민 판본, 34)

 

 

 

 

* 오감도-시제 3

 

싸훔하는사람은즉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훔하는사람은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훔하는사람이싸훔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훔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훔하는구경을하든지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훔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김주현 판본, 88)

 

 

 

싸홈하는사람은즉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홈하는사람은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홈하는사람이싸홈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홈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홈하는구경을하든지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홈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권영민 판본, 34)

 

 

 

김주현 판본은 싸훔’, 권영민 판본은 싸홈으로 표기되어 있다. ‘싸움의 옛말은 싸홈이다. 국어사전에 싸홈은 있지만, ‘싸훔은 없다.

 

이상의 글을 읽는 일은 장님 코끼리를 만지는 상황과 같다. 연구자와 독자 모두 이상의 작품 앞에만 서면 장님이 되고 만다. (이상 : 아니, 종이에 문자가 있는데 왜 읽지를 못하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이상의 작품을 더듬더듬 읽어야 한다. 이렇다 보니 하나의 텍스트에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정리한 <이상 전집>을 여러 번 읽어도 이상의 문학 세계를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상과 관련된 새로운 텍스트 자료들이 발굴된다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확장 범위는 넓어진다. 지금도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다는이상에게 도전하는 비평적 탐험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언어와 기호로 만들어진 이상의 텍스트 미로는 자가 번식하는 세포처럼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상이라는 기존의 미로에 새로운 미로들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1] ‘LE URINE’의 바른 표기는 L’urine이다. 이 단어는 오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권영민, 이상 전집 1236, 2009)

 

[2] 조해옥,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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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 연구서가 의외로 많이 나와있구나.
시는 정말 난감해. 이상이니까 봐주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이 저렇게 썼다고 하면 단박에
뭐라고 하지 않았을까?ㅋ
그만큼 그의 내면이 예사롭지 않다는 얘기겠지.
그나마 소설이나 산문이 낫긴한데 말야.

cyrus 2017-12-21 17:13   좋아요 0 | URL
네, 이상 연구서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학술논문까지 포함하면 자료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이상 연구서를 찾기 어려워요. ‘이상’을 검색하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이상심리학’, 이상 문학과 무관한 책들이 나와요. 그런 검색 결과 내용 속에 이상 연구서를 찾기가 힘들어요. 소설, 수필은 읽을 만해요. 물론, 주석이 달린 가정 하에서요. ^^

붕붕툐툐 2017-12-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빵 터졌는데, 내용은 이상 문학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있어 감탄했네요!

cyrus 2017-12-21 17:15   좋아요 0 | URL
눈치를 챈 분들이 있겠지만, 제목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속 김첨지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상 연구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서 깊이는 없어요. ^^;;

sprenown 2017-12-21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의 시가 미친 놈의 헛소리 같지만 그게 우리 문학의 근대성에 있어 단초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달려드는 형국이네요..도대체 이상본인조차도 어떤의도로 썼는지 모를것 같은데..해설서나 연구서가 더 난해해지는것 같아요.^^.

cyrus 2017-12-21 17:18   좋아요 0 | URL
이상의 시가 얼마나 난해했으면 애초에 이상은 ‘의미 없는 시’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로 이상이 아무 생각 없이 시를 썼다면 해석에 매달린 문학인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져요. ^^;;

2017-12-2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1 17:25   좋아요 0 | URL
자신의 글을 해설한 이상의 자필 메모가 발견된다면 국문학 전체를 뒤흔들 획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국문학자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고, 수험생들은 수능 언어영역 시험에 출제될 이상의 글을 부담스러워할 것입니다. 이상의 글을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라서 시 <거울>, <오감도>, 단편소설 <날개>, 수필 <조춘점묘>를 제외한 작품들은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출제될 확률이 적어요. 나머지 작품들이 완전히 해석 가능하게 된다면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출제될 거예요. ^^;;

겨울호랑이 2017-12-2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셜록 홈즈 번역본 비교 페이퍼 때의 예리한 분석이 이번 이상 페이퍼에서도 진가가 드러나고 있네요^^:

cyrus 2017-12-21 17:26   좋아요 1 | URL
홈즈 전집을 완독하지 않은 상태인데, 잊힐 뻔한 책을 언급하셨군요.. ㅎㅎㅎ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그냥 즐기면서 읽을 생각입니다. ^^;;
 
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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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가을은 시방 절정이다. 가을이 얼마나 성큼 다가왔는지 산성의 성곽 뒤로 바람맞은 나무들은 잎을 땅바닥에 떨군다. 산길에는 낙엽이 제법 폭신하게 깔렸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굴욕의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가 청 태종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이다. 산성이 완성된 지 10여 년 만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타협하자는 주화파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로 갈렸다. 조선은 침략군과 대치하여 방어전을 펼쳤지만 47일 만에 항복했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짚은 역사소설로 알려졌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한국사전연구사, 1998)에 따르면 역사소설은 실제의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특정의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창조 또는 재현한 소설이다. 역사소설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소설의 논점은 역사적 사실성작가적 상상력사이에 놓여 있다. 역사가 잊히거나 흩어진 사실(또는 사료)을 모아서 정리하는 것이라면, 역사소설은 그것들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일 때 극적 재미는 떨어질 수 있지만, 상상력에만 의존할 때 역사적 사실성이 간과된다. 대부분 독자는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우선한다. 역사소설은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과 해석능력이 더욱 중요시되는 창작품이지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교훈만 찾으려는 독서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간직하고 있어 후세에 길이길이 호국의 교훈을 주는 장소이다. 독자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남한산성을 읽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처럼 의도가 뚜렷한 해석에 초점을 맞춘 독서는 재미없다. 남한산성에 평점을 적게 준 독자 리뷰 몇 편 봤다. 이 리뷰들의 공통점은 남한산성지루한 소설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김훈의 문체를 비판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말처럼 아득한 뱀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 문장을 쫓아가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남한산성2007년에 첫선을 보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SNS은 우리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방식까지도 변화시켰다. SNS에 길든 독자들은 긴 이야기를 압축한 짧은 글을 좋아하고 명료한 표현이 있는 짧은 문장에 열광한다. 종이 위를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김훈의 문어체는 가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소설을 읽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을 위한 독서법은 독자의 눈을 지치게 한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Nabokov)는 인간이란 큰 담론보단 세밀한 잡담에 집착하는 존재라고 했다. 김훈은 남한산성이 역사 담론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1] 남한산성에서 역사라는 큰 담론을 찾으려다가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둘러싼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설전을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또 그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비추어보는 것도 진부하다. 사실 이런 작업은 역사소설이 아닌 역사책을 보면서 해야 하는 일이다.

 

김훈은 말과 사물이라는 에세이[2]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세계속에서 불완전한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라고 썼다. 남한산성은 대화의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세계를 압축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 백성과 지도층은 입으로 싸우고 또 싸운다. 이것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세밀한 잡담이다. 그들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불완전한 언어, () 먼지는 목표가 있는데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화살과 같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성안에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 대립은 계속된다. 언관(言官: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관원)들이 최명길이 청과 밀통한 역적’, ‘왕을 미혹하는 자라고 비난하면서 결사 항전을 고집한다. 그러나 언관의 주장은 의견과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명길은 본래 이적의 무리와 밀통한 자이옵고, 이제 귓속말로 전하를 미혹하고 적의 말을 옮겨서 전하를 협박하는 자이옵니다. 명길이 사직을 헐어서 적의 마구간을 짓고, 백성의 나락을 거두어 적의 말먹이 풀로 내주려 하니 명길이 과연 누구의 신하이옵니까.

 

지금 성 안의 백성들은 명길을 빗대어 용골대의 아들 용골소라고 부르고 있으니, 민심은 이미 명길이 누구의 신하인지 가린 것이옵니다. [3]

 

 

인조에게 전하는 언관의 말은 의견이 사실을 압도하는 형태이다. 사실과 먼 의견은 편견과 배척과 단절을 낳고, 불신을 부른다. 이것이 김훈이 말과 사물에서 지적한 불완전한 말의 폐해이다. ‘불완전한 말은 사실과 의견이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다.[4] 인조는 언관들의 말이 대의(大義)를 밝힐 수 있어서 아름답다고 했지만, 심히 가파르다고 말했다. 의견과 사실을 구분할 수 없는 말 먼지는 소통뿐만 아니라 의사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보이는 크고 작은 말과 언어의 부딪힘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불협화음이다. 따라서 인조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허탈과 절망 속에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성안에 말 먼지가 자욱할수록 백성들의 삶과 국운은 기울어만 갔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은 합리적 언어 전달 행위의 불가능성을 바로 보여주는 중요한 묘사이다. 인조는 투항을 포기하고 화친을 원한다는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항복 문서를 쓰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왕이 보는 앞에서 나라를 팔아먹는 굴욕적인 일이다. 글을 쓰도록 명령받은 신하들은 쓰지 않으려고, 아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정육품 정수찬은 항복 문서를 작성할 자격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지병과 남루한 계급에 대해 호소했다가 곤장을 맞았다. 정오품 정랑은 미친 척하고 간택되지 않을 글을 써서 바쳤다. 결국, 신하들의 폭탄 돌리기끝에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하게 됐다. 그러나 (Khan)은 내용의 의미를 바로 확인하기 힘든 최명길의 항복 문서에 격노했다. 최명길의 항복 문서는 소통 불가능한 불완전한 말이다. 명분을 내세워 던진 말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필자가 언어 전달이라고 하지 않고, ‘합리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가 있다. 작가는 전반적인 소통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말과 언어가 합리적인 도구로 활용된 소통의 한계를 주장하고 있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으며 적들의 비웃음에 짓밟힌다. 소설은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다른 언어와 문화 외에도 권력의 위계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은 불완전한 의사소통에서 비롯된 인간들의 무기력한 방황이 어느 정도 필연적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절망스러운 현실에 위안을 주는 단서가 있을까? 나는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훈은 자신의 소설 속에 아무런 위안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5] 아마도 작가가 말한 위안이 없는 몇 편의 소설남한산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완벽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에 괴로워했다. 이것이 말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은 독자들을 불편하기에 충분하다. 소설 속 남한산성에 갇힌 인물들처럼, 우리도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

 

 

 

 

 

[1] [김훈 남한산성’ 100모호한 관념의 말이 현실 발전 막아”] 한겨레, 201767

 

[2] 김훈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 2008)에 수록되어 있음.

 

[3] 김훈 남한산성(학고재, 2007) 183

 

[4] 사람이 말을 하거나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다의 기별147)

 

[5] 김훈 바다의 기별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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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1-12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이 ˝꿈이라는 것이 희망같지만 알고보면 위안이 아니더냐˝라는 대사를 했었는데요. 역사에 대해 반성을 한다는 것은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 기대를 아우르는 것일테니 희망도 있고 위안도 없지는 않아 보여요..

cyrus 2017-11-13 14: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

임모르텔 2017-11-1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먼지 .............!! 뇌리에 박히네요. 말때문에 허탈한 경험들이 다 있다고봐요.

cyrus 2017-11-13 14:34   좋아요 0 | URL
‘말 먼지‘는 제가 만든 단어가 아니에요. 김훈 작가가 만든건데 소설에 나옵니다. ^^

2017-11-12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13 14:37   좋아요 0 | URL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죠. 여러 모로 아쉬운 역사의 장면들이 많아요.

겨울호랑이 2017-11-12 2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말씀처럼 역사소설도 목적 지향적이 되면 문학적인 매력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의 생각이 없는 글은 또 산만하게 전개되어 읽을 가치가 없을 것 같기도 하구요.. 둘 사이 균형을 잡는 일이 작가에게는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7-11-13 14:39   좋아요 1 | URL
작가 입장에서 보면 역사소설 한 편 쓰는 일이 제일 어려울 거예요. ^^

풀꽃놀이 2017-11-13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동안 김훈의 문장들이 너무 아프고 그 위안 없음이 견딜 수 없이 미워서 그의 모든 책을 내다버린 적이 있어요. 지금와서 많이 후회가 됩니다. 제가 이제 상처를 직시할 수 있을만큼 성숙한 것인지...체념에 익숙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요새는 종종 아득한 뱀 같은 그의 문장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의 책을 다시 갖추려해도 제가 기억하는 초판본과는 만듦새가 달라져서 아쉽더군요. 새삼 깨닫습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모질게 이별하면 못쓴다는 것을...

cyrus 2017-11-13 14:44   좋아요 1 | URL
저는 김훈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해요. 에세이를 읽으면 좋은 문장들을 발견해요. 그래서 헌책방이나 중고서점에 가면 절판된 김훈의 에세이집을 구입해요.

sprenown 2017-11-13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깊이있고, 분석적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사이에서의 균형있는 조화‘라는 역사소설에 대한 정의도 훌륭하고요..김훈작가는 기본적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또는 그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이냐, 거기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라는 관점에서 언어의 한계를 얘기하는 것 같더군요. ‘공터에서‘에 와서는 그분도 이제 기력이 거의 다 소진된 듯한 느낌입니다. 더이상 단행본으로서의 장편소설작품은 나오지 않을 듯...감히 예측해 봅니다.ㅎㅎ

cyrus 2017-11-13 14:47   좋아요 0 | URL
저는 《공터에서》의 실망감 때문인지 《남한산성》을 읽었을 때 느낌은 그저 그랬어요.. ^^;;

표맥(漂麥) 2017-11-13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문체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번 더 읽었습니다. 김훈의 건조한 듯 느린 문체를 전 별로 안좋아하지만 그 만의 ‘의식의 흐름‘은 확실하다고 전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른 독자들이 ‘문체‘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 귀가 쫑긋해 집니다...^^

cyrus 2017-11-13 14:51   좋아요 1 | URL
작가가 늘 좋은 문장만 쓸 수 없어요. 독자가 보기에 어리둥절한 반응이 나올만한 문장도 있어요. ^^

sprenown 2017-11-13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으로는 김훈작가의 건조하면서도 비장미 넘치는 문체는 단연 ‘칼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또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는 ‘자전거 여행‘이 최고이고요... 이후 소설이든, 산문이든 이 두 작품을 뛰어넘지는 못한 것 같더라구요..사실 ‘공터에서‘는 마치 소설과 산문을 뒤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서사가 빈약해서..스스로 겨우 쓴다고 밝히기도 하였고..

cyrus 2017-11-14 13:24   좋아요 1 | URL
저랑 취향이 비슷하군요.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은 넘사벽이죠. ^^

캐모마일 2017-11-2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 수상 축하드립니다. 항상 양질의 서평과 정보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cyrus 2017-11-21 19:07   좋아요 2 | URL
댓글 덕분에 기분 좋은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축하 인사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

sprenown 2017-11-21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라는 것도 있었나요? 암튼, 축하드립니다! cyrus님은 충분한 수상자격이 있지요..

cyrus 2017-11-21 1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입상하지 못한 리뷰 대회 횟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1등으로 수상한 리뷰 대회 횟수가 적어요. 더 노력해야 합니다. ^^

서니데이 2017-11-2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리뷰대회 응모가 되었나요?
위의 댓글 읽고 알았어오.
축하드립니다.^^

cyrus 2017-11-22 14: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정해진 리뷰대회 기간에 리뷰를 작성하면 됩니다. ^^

표맥(漂麥) 2017-11-2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랬구나... 보통 때의 글보다 뭔가 났다 싶었더니...^^ 축하하옵니다...^^

cyrus 2017-11-22 14: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리뷰대회 응모 글을 쓸 때 정말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리뷰대회 글 한 편 다 쓰고 나면 기가 빨려나간 기분이 들어요.. ㅎㅎㅎ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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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를 내 마치 인형이 말하는 연기를 복화술이라고 한다. 남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복화술이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당대 남성 작가들은 겉으로는 여성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발언하게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남성 작가의 복화술은 여성의 발화를 원천 봉쇄한다.[1] 주체적으로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여성은 가부장제가 만든 울타리에 갇힌 채 ‘메아리 없는 절규’를 외친다. 조남주《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이 시대 텅 빈 여성의 잃어버린 목소리, 그 메아리 없는 절규를 받아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삶을 깨뜨리는 냉소적인 담화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이라면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담담한 문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네 살의 기혼 여성 김지영이다. 이름만 보면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지영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시작한다.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친정엄마로 빙의해 가슴 속으로 꾹 삼켰던 말들을 쏟아 내뱉는다. 때에 따라 죽은 대학 동아리 선배가 되거나 어렴풋이 아는 다른 여성이 되곤 한다. 기이한 언행을 하는 아내가 걱정된 남편은 그녀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생활, 회사 업무 그리고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영의 삶의 궤적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김지영이란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이해할 수 없던, 그녀 주변의 남성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비감(悲感)이 느껴진다.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현실이 아닌 자신들의 여성 판타지에만 공감하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무시해버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화돼 있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성범죄는 곳곳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십 년 전에도 그러했고 어제도 그랬다. 스마트폰이나 초소형 카메라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진 · 영상을 촬영하는 ‘몰카(몰래카메라)’ 성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몰카 성범죄는 공중화장실, 사우나, 수영장, 탈의실 등 특정 장소는 물론이고 출퇴근길의 지하철이나 버스 안처럼 많은 사람이 밀집된 공간에서 자신이 찍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이 되어, 불특정한 수많은 피해자를 낳는다. 몰카 성범죄 경우 다른 성범죄인 강간이나 강제추행보다 가벼운 혐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영이 다니는 회사의 여자 화장실에 설치된 몰래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남성 직원들은 몰카 성범죄를 ‘가벼운 일탈’로 생각한다.

 

 

“조사받은 남자 직원들이 우리한테 너무했대. 자기들일 몰카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좀 본 거 가지고 성범죄자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사진 유포했잖아. 범죄를 방조했잖아. 근데 그게 잘못인 줄도 몰라. 완전히 개념이 없더라니까.” (155쪽)

 

 

남성 직원들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남자 보안 요원이 찍은 사진을 돌려 봤다. 그들은 야동을 보며 멋대로 키워오던 성적 판타지를 실현했다. 그들의 말과 의식 속에 성범죄는 따로 있다. 성범죄는 너무나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것이기에 정신병자의 소행이 분명하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이 ‘가벼운 일탈’을 성범죄로 문제 삼는 피해자가 신경과민이다. 따라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결론을 낸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익숙한 남성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남성 직원들은 성범죄의 방관자 혹은 공모자다. 이런 주장 뒤에는 남성들의 반발이 아우성칠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두려움과 선입견을 품고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피해의식 프레임과 결합하여 반남성주의적 담론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82년생 김지영》이 ‘물 만난 고기’처럼 잘 팔린 책이 되었다고 말하여 어떤 이는 ‘여성의 피해의식으로만 가득한 최악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평가하는 것과 아예 안 읽은 상태에서 평가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남성 독자들이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읽어보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있잖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중간부터 읽던 계속 읽어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차별과 편견이 보이리라.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붕어빵 기계로 찍어놓은 듯 ‘판박이 남성성’에 맞춰 살아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성’을 비판할 뿐, ‘남성’ 자체를 악의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스트가 ‘평범하고 착한 남성’들을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로 매도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착한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착한 남성’은 여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만든 ‘남자다운 남성성’의 변형이다. ‘착한 남성’ 프레임은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상 속 성차별, 성범죄를 묵인한다.[2] 짝꿍인 남자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영은 이미 어렸을 때에 ‘착한 남성’ 프레임이 여성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 방해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던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41쪽)

 

 

이 장면을 잘 살펴보면 데이트폭력을 당사자 간의 애정 문제로 가볍게 치부하는 인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학교는 그릇된 성차(sexual difference)를 재생산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착하다고’ 믿는 부모는 자식이 여자아이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을 단지 여자아이를 ‘좋아해서 시작한 아이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아이에게 괴롭힘당하는 여자아이와 남자친구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맞는 여자는 그 행위가 ‘폭력’이라고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의 표현이고 과한 애정 때문이라는 생각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성차에 기인한 젠더 폭력(gender violence)이 ‘착한 남자’ 프레임에 가려지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비단 남성이 저지르는 착각의 제가 아니다. 여성도 프레임의 덫에 한 번 빠져버리면 성차 문제에 둔감해진다. 혼자 귀가하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남학생에게 봉변당할 뻔한 지영의 곁에 있어 준 여자의 위로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69쪽)

 

 

이 ‘좋은 남자’라는 표현은 자신을 ‘착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단어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 혐오와 폭력 앞에 서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착하고 좋은 남자’들은 여성 문제를 몇몇 나쁜 남성, 예외적 남성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본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표방한 소설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온건적 페미니즘)’에 위치한다. (물론, 내 주장이 옳다고 볼 수 없다. 책과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성공을 가로막는 관습적, 법적 제한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의 원인으로 보고 줄기차게 비판한다. 작가는 이야기에 각종 도서, 신문 기사, 통계 보고서 등 객관적 자료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부각하는 작가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작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암시하는 복선이나 결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작가는 여성을 억압하는 그릇된 사회 구조를 직시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개인의 자아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3]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이것이 ‘급진적 페미니즘’ 관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의 한계다.

 

김지영의 잃어버린 목소리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여성’의 것인가.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 귀화 여성도 여성 혐오 대상이 되고, 가정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아내는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 문제로 한국인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외국인 아내의 취약성(발화불가능)을 담보로 한 불평등한 부부관계가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망하기 사흘 전에 스물두 살(1986년생, 그녀가 현재 살아있다면 서른 한 살이 된다)의 베트남 여성 쩐타이란 씨는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한국에 온지 1주일 만에 이혼했다.[4]

 

 

“자기들이 필요해 베트남으로 와서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국적만 다를 뿐이다.”

 

 

여성이 살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냉혹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도식화된 이분법에 익숙한 남성중심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여성의 목소리이자 '정당한 무기'다. 하지만 이 ‘여성의 무기’를 손에 대지 못한 채 소외되는 여성들도 있다. 과연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김지영’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공감한 사람들은 ‘우리 모두의 김지영’이 된다. 조남주 작가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86년생 쩐타이란 씨도 ‘우리’에 포함되는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섹슈얼리티 이슈와 얽힌 고민의 끈을 계속 부여잡는 일이다. 페미니스트는 인종과 계급을 넘어 여성이 연대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 여성=김지영’이라는 도식적인 형태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김지영 신드롬’이 진지한 성찰 없이 ‘한국 여성들만의 공감과 분노’에 그친다면 《82년생 김지영》은 실패한 페미니즘 소설이다.

 

 

 

 

 

 

[1] 엘리자베스 D. 하비 《복화술의 목소리》 (문학동네, 2006)

 

[2] 토니 포터 《맨 박스》 (한빛비즈, 2016)

 

[3]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4] [죽거나 죽이거나 ‘이주여성 잔혹사’]

(시사인, 2009년 3월 5일 / '북플'에서 링크 기능 X)

이 기사에 언급된 '쩐타이란'은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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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7-09-15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방금 이 책의 리뷰를 썼습니다. 비슷한 내용인 듯합니다. 남녀는 공존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욕먹을 남정네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일반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9-16 15:00   좋아요 0 | URL
리뷰로 쓰기 어려운 책이었어요. 왜냐하면 이 책을 읽고 느낀 독자들의 생각이 거의 비슷하거든요.

북프리쿠키 2017-09-16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모임에서 전 주로 이 책의 한계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는데요.
싸이러스님께서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셨네요^^
하지만 많은 남성들이 거부감없이 접근할 수 있게 마케팅한 부분은 성공적이라 생각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러한 담론들이 차근차근
많은 남성들에게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구요.
대결구도가 아닌 좀더 성숙한
방향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아쉬움 또한 크답니다^^














cyrus 2017-09-16 15:06   좋아요 1 | URL
페미니스트 입장에서는 말로 해도 귀 담아 듣지 않는 남성들이 답답해 보일 겁니다. 그래서 공격적인 ‘미러링’을 시도하게 되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미러링을 시도하게 만든 가장 큰 일차적 원인이 페미니즘을 무시했던 남성들의 태도입니다. 그래도 미러링의 역효과를 지적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독자들의 공감을 유도하는 책이라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블랙겟타 2017-09-1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 저는 페미니즘운동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이 많은데요. cyrus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고 갑니다.

cyrus 2017-09-16 15:06   좋아요 1 | URL
목표점은 같아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갈 수 있는 길이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학문이 페미니즘입니다.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싸울 필요 있나요? 이 길도 가고, 저 길도 가보면서 살아야죠. ^^

yamoo 2017-09-1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모 중고서점에서 천원 코너에 있었는데..아니다, 굿윌 양천점이었구나...구매할까하다가 한국소설책드을 처분하는 마당에 구매하면 바로 나가야해서 구매안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작가 작품은 안 읽는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얻는 요즘입니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 널렸는데...한국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 같은 느김이 자꾸들어서요.

그럼에도 사이러스 님은 이런 소설을 읽고 이리도 정성스런 리뷰를 써 주시네요~ 재밌든 없든 꾸준히 한국작품을 읽고 리뷰 쓰시는 사이러스 님이 존경스럽습니다!

cyrus 2017-09-16 15:09   좋아요 1 | URL
제가 외국 소설만 읽게 되니까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모르게 되더라고요. 국내 문단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아요. 그런 문단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국내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내 소설을 잘 안 읽던 독자가 국내 문단을 까면 설득력이 떨어져 보여요. ^^;;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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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셰익스피어)

 

    

 

우리는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주 작은 것에서조차 행복을 찾아내는 마음가짐이다. 마음을 다친 상처가 고통, 수치심, 절망, 불안을 낳고 이러한 것들을 거부하다 보면, 무력이나 분노, 경멸, 실망 등의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형성된다. ‘진짜 나를 무시한 채, 열등감에 휩싸인 자아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감정들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상처만을 남긴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해보면 나의 문제점을 무엇인지 되돌아 살펴볼 수 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은 시급히 개선할 수 있으며,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까지 생기게 된다.

     

글쓰기는 삶을 더듬어가는 여행이다. 우리 앞에 마련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생 앞에 항상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다. 공지영월춘 장구(越春 裝具)맨발로 글목을 돌다를 통해 우리는 희망이라는 실체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두 편의 작품 모두 작가가 주인공 겸 화자로 등장한다. 월춘 장구는 자신의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가의 세밀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월춘 장구봄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장비를 뜻한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소설을 쓰였다. 삶의 역경을 뜨거운 인내로 녹여낼 때 거기서 싱싱하고 힘차게 자라나는 희망의 새싹이 돋아난다. 작가는 어둡고 쌀쌀한 계절을 의지로 넘길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블라인드 포인트, 라고 산에 오르던 친구는 말했다.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무슨 죽음과 무슨 삶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에서 산악인들은 언제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대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을 준다고. 거기서 주저앉는 사람이 참 많이도 있다고, 그러나 그 공포를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그 정상을 허락한다고. (17~18)

 

 

이 대목에서 맨발에서 글목을 돌다맨발글목의 의미를 재확인할 수 있다. ‘글목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을 의미하는데 작가가 만든 단어다. ‘맨발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상처 받는 존재를 가리킨다. 월춘 장구맨발에서 글목을 돌다의 유사성은 삶의 상처를 진솔하게 묘사하는 글쓰기다. 자기 상처를 드러내며 세상과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작가의 성숙함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소설집의 표제작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조금은 과장되고 웃음이 섞인 블랙코미디다. 6개월째 사망 선고를 받고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할머니를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소녀인 화자와 그 가족들의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할머니의 재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가족들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못한다.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미음 대신에 흰 쌀밥과 갈비를 먹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감정 상태를 읽을 수 있다.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 슬퍼지기보다는 평소보다 행복해진다. 자기 죽음에 관한 생각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행복감을 찾거나 유발함으로써 자각적인 고통에 자동으로 대처하게 된다. 어쩌면 할머니는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평소에 좋아하는 갈비를 입에 댔을 거고, 의도치 않게 생명이 연장된 것이다. 할머니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로부터 심신의 안정은 물론 죽음의 공포를 최소화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은 할머니의 생명 연장을 지켜보면서 공포를 느낀다. 다음 장면은 인간의 삶과 죽음, 공포와 웃음, 비극과 희극의 양면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외삼촌과 막내외숙모는 다시 할머니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그들의 젓가락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갈빗살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가 웃으면 함께 웃고, 할머니가 호통을 치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들의 얼굴에 눈에 띄게 공포가 어렸다는 것이고, 그 공포를 감추려는 듯 표정은 더 딱딱해지고 있었다. (76)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절망인 죽음을 마주쳐야 하는 할머니가 생의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블라인드 포인트의 공포를 이겨낸 할머니의 의지인 걸까, 아니면 더 살고 싶어서 살아있는 자들을 억지로 붙잡으려는 집착일까.

    

 

 

 

Trivia

 

* 12

걸레를 빨다 말고 키다리 아저씨를 쓴 오스카 와일드를 생각했다.

 

→ 「키다리 아저씨의 작가는 진 웹스터(Jean Web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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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9-03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라인드 포인트‘의 공포를 이겨낸 할머니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지를 잡아당긴 것은 희망의 새싹이구요.^^
‘글목‘이란 말 앞에서 한참 생각이 머뭅니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나 종이 앞에 섰을 때마다 긴장이 되거든요. 발상이 떠오를 때 시작을 하지만 제 글이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게 될 지 처음부터 알 수는 없거든요. 다른 이들이나 저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다만 가보는 거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맞닥뜨리는 미지의 감성에 대한 스릴이 있습니다. 이 마음 역시 희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글이 도달하게 될 곳이 썩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

cyrus 2017-09-04 09:08   좋아요 2 | URL
저도 논쟁이 될만한 주제의 글을 쓸 때면 긴장됩니다. 합당한 비판을 받고 싶어서 제 생각을 소신있게 밝힙니다. 그런데 쓰다 보면 ‘비난‘받을 만한 엉터리 내용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비난 받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제 글쓰기의 원칙입니다. 그 글은 실패한 글입니다. ^^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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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은 단 한 번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이 역행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스티븐 호킹 경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처럼 바꿀 수 없는 시간은 회상과 상상을 통해 재생되고 변형된다. 시간을 복원하는 문학적인 시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는 무심코 지나쳐버린 범속한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누구나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그 이면의 진실들을 건져 올린다. 그 문학적인 시도의 결과물이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이다.

 

김애란이 2000년대 젊은 소설의 대표 명사로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평론가 유종호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다고 했다. 이청준 선생은 김애란의 첫 번째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라고 평가했다.[1]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그녀를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이 있었다면 이번에 출간된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유종호 평론가와 이청준 선생은 그 당시 국내 문단의 샛별이나 다름없던 김애란의 포텐(poten, 잠재력)이 얼마만큼 터질지 몰라서 성급한 평가를 했다. 나는 김애란에 대한 두 분의 표현이 지금으로선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애란 소설의 본령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명민한 시선과 탁월한 조망에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 그녀의 소설에 우리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시간의 모순과 같은 묵직한 소재도 녹아 있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 살일까.”,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디 살까.”,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찌될까.”[2] 침묵의 미래는 자기 자신을 향해 끈질기게 묻는 걸까. 침묵의 미래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진다. 독자들은 이야기 중간중간마다 나오는 질문 공세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독자는 끝도 없이 대답을 준비하거나, 혹은 혼잣말로 그때그때 질문들에 응수하면서 침묵의 미래와 대면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금사는 사람들에게 언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뭇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직선적인 시간은 그저 미래를 향하여 순차적으로 흐르다가 어느 순간 멈춘다. 우리는 그 시간의 소유자를 라고 부르게 된다. 그 시간의 소유자가 세상에 종언을 고하는 순간, 로는 독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고독에 갇혀 버린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 산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쩌렁쩌렁한 모어(母語) 한복판에, 우주 한가운데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뒤늦게 울어 봐야 소용없었다. 다 죽고 살아남은 건 오직 자기 자신과 엄청나게 아름답고 어마어마하게 정교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그 뿐이라는 걸…‥ 결국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127~128)

 

마지막 화자는 소수언어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나는 이 대상을 좀 더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마지막 화자죽음 앞에 한발 짝 다가선 인간이다. 인간이 사라지면서 남게 된 언어는 사어(死語), 즉 생명력이 없는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고독 앞에 선 인간은 대화가 단절된 외로운 고아와 같다. 죽은 인간은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고, 살아생전 입안에 맴돈 언어가 씻겨 내려간다. 그렇게 강물에 떠내려간 언어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고, 새롭게 태어난 시간의 소유자가 잊힐 뻔한 언어를 건져낸다. 하지만 소수언어박물관의 전시장에 갇힌 언어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시간의 모순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과연 기억하기 위해서 보존이라는 목적으로 전시장에 갇힌 언어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죽어서 박제가 된 언어들이 레테의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기억해야 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억의 보존성을 비판한다.

 

죽음과 상실의 경험. 오늘을 살아가는 그것과 같은 불안함과 공포를 느껴 본 것이 언제였을까. 우리는 충격적인 공포 경험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있다. 살면서 겪을 일이 많지 않다. 우리는 대개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애란은 잊을 만하면 이 어려운 질문을 독자에게 재차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편을 잃은 명지가 스마트폰 인식음성 프로그램 시리(Siri)에게 던지는 질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즉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화두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259)

 

사실 이 질문은 익숙하다. 일상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본질적인 낯익은 질문, 그러나 이 문제는 늘 죽음에 대한 불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풍경의 쓸모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사진기의 플래시 불빛은 평온한 일상에 묻힌 죽음에 대한 불안을 살짝 비춘다.

 

햇빛이 충분치 않은 공간에서 이따금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기는 펑! !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 낙하산 퍼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 (150)

 

죽음의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에 의한 상실은 마음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불안과 공포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인간은 누구나 늙을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음을 맞게 마련이지만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가리는 손는 자신이 일하는 곳인 요양병원에서 자신이 늙은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늙은 엄마의 모습을 회상한다. 보통 늙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러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늙어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신체 증상을 직접 겪거나 눈으로 보게 되면 노화를 두려워한다.

 

죽을 때까지 우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마시고, 먹고, 느낀다. ‘인생이라는 이 소중한 시간이 그러한 행위의 끝없는 반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사람의 기분에 따라 어떨 때는 짧게, 어떨 때는 길게 느껴지게 한다. 기분이 나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반대로 기분이 고조돼 있을 때는 주변의 일에 집중하는 탓에 시간의 신호에 신경 쓰지 않는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불편한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이유다. 입동에서의 시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거대한 소용돌이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는 삶에 대한 의욕마저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흘러 보낸다. 부부의 시간은 빨기 감기한 필름처럼 확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버린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20~21)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허무 의식을 드러낸다. 매일 자연스럽게 행하던 일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억지로 해야 하는 짐처럼 느껴진다. 깊은 슬픔은 일상생활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든다. 소중한 존재를 잃을 때 오는 상실감이 특히 혼자 극복하기 힘들다. 노찬성과 에반 의 노찬성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견 에반의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다. 상실감에 빠질 땐 죄책감이란 감정도 끊임없이 괴롭힌다. 마음이 여린 에반은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 혹은 살아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자의 고통과 슬픔이 강할수록 세상과의 단절을 부를 위험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부부의 시간, 그리고 에반과의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찬성의 모습이 독자의 명치 끄트머리를 아프게 찔러온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로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와 가리는 손를 닮았을 것이다. 김애란 소설을 읽으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출구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작은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게는 바깥은 여름의 다소 아쉬운 측면이기도 하다. 만일 작가가 이런 작은 선물이라도 독자들에게 허여하지 않았다면, 나는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바깥은 여름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얽매이고, ‘죽음에 묶여 버린 인간의 내면 심리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깊이 사유하도록 한다. 어쩌면 김애란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틀에 박힌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애란이 그려내는 일상 풍경의 기저에 잠재적 불안의 근원이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자면 당연해 보인다. 우리가 체감하는 삶과 죽음의 간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1] 커버스토리-‘달려라 아비의 김애란(주간경향, 200767)

[2] 침묵의 미래123, 125,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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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7-21 17:49   좋아요 1 | URL
어머니가 사고로 한 달 간 입원한 적 있습니다. 그때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내심 불안했고, 걱정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이후부터 사고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표맥(漂麥) 2017-07-2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를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이 있었다면... (순간 헉! 어찌 알고...) 이번에 출간된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소설 잘 안읽지만 이 책은 읽어봐야겠구나...) ^^

cyrus 2017-07-22 14:01   좋아요 0 | URL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신인 작가에게 대하는 반응이 기대 반 의심 반입니다. ^^;;

페크pek0501 2017-07-27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려라, 아비》를 읽고 김애란 작가의 진가를 본 듯했어요.
개그 같은 면이 있어서 재미있으면서도 깊음이 있었어요.

cyrus 2017-07-30 09:52   좋아요 0 | URL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다 읽고나서 한국 작가의 소설에 무관심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