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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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명 두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조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키친)-9쪽

어둠 속에서 비에 젖은 밤풍경이 번져 있는 커다란 유리창, 에 비치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세상에, 나와 핏줄이 닿는 인간은 없고,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모두 가능하다니 아주 호쾌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 깊고, 그 한없는 재미와 슬픔을, 나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 손으로 이 눈으로 만지고 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왔어, 라고 나는 생각한다.(키친)-16쪽

이 엄마가 죽은 후에, 에리코 씨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린 나를 안고, 뭘해서 먹고 살까 생각하다가,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대요. 더 이상 아무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아서.(키친)-22쪽

암울하고 쓸쓸한 이 산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가 빛나는 것이란 걸 안 때가 언제였을까. 사랑받으며 컸는데, 늘 외로웠다. - 언젠가는 모두가 산산이 흩어져 시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키친)-30쪽

할머니가 죽자, 이 집의 시간도 죽었다.(키친)-32쪽

어째 우리 주변은 죽음으로 가득하네. 우리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유이치를 낳은 어머니, 그런 데다 에리코 씨까지, 정말 굉장하군. 우주가 넓다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없을거야.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거, 우연치고는 굉장한 우연이지. ... 참 잘도 죽는다. (만월)-69쪽

나는 다 읽은 편지를 원래대로 살며시 접었다. 에리코씨의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가슴이 저렸다. 언젠가는 아무리 편지를 펼쳐도 이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가장 고통스럽다.(만월)-73쪽

사랑이란 그런것이다. 그것이 나한테 받은 특별한 것이라 해도, 그가 바르게 자라 다른 사람한테 받은 물건을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해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한 태도에 나는 상당히 호감을 품었다. 그리하여 방울은 마음을 통하게 했다. 만날 수 없는 여행 내내, 서로 방울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는 방울이 울릴 때마다 나와, 내가 있었던 여행 전의 나날을 알게 모르게 떠올렸고, 나는 먼 하늘 아래서 울리고 있을 방울과, 방울과 함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지냈다. (달빛 그림자)-144쪽

무엇보다 밤이면 잠들기가 무서웠다. 아니 눈뜰 때의 충격이 감당할 수 없었다. 퍼뜩 눈을 뜨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 때의 깊은 어둠에 떨었다. 나는 항상 히토시와 연관된 꿈을 꾸었다. 숨막히고 옅은 잠 속에서 히토시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면서, 항상 이건 꿈이고 실제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 속에서도 눈을 뜨지 않으려고 애썼다. 몸을 뒤척이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 토할 듯한 우울 속에서 멍하니 눈을 뜨는 추운 새벽이 몇 번이었던가. 커튼 너머가 밝아지고, 파르스름하게 숨쉬는 시간 속에 나는 방치된다. 이럴 거면 차라리 꿈속에 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만큼 외롭고 춥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홀로 꿈의 여운 때문에 허덕이는 새벽이다. 항상, 그 시간에 눈으 ㄹ뜬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지칠 대로 지치고, 아침의 첫 빛을 기다리는 길고도 광기처럼 고독한 시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나는 달리기로 마음 먹었다. (달빛 그림자)-146-147쪽

지금은 잘 안다. 그의 세일러 복은 나의 조깅이다.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만큼 유별난 인간이 아니라서 조깅으로 충분할 뿐이다. 그는 조깅 정도로는 전혀 효과가 없고 자신을 지탱하기에 부족하여 변주로 세일러복을 선택했다. 양쪽 다 시든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 수단에 지난지 않는다. 기분을 다른 데로 돌려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달빛 그림?-157쪽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장소에서는 영구히 시간이 정지한다. (달빛 그림자)-162쪽

그는 말을 걸면 웃는 얼굴이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걸어가는 그에게 말을 걸기가 왠지 미안한 기분이었다.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몹시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똑바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억이 추억으로 보이는 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 길은 멀고, 앞 길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외로웠따. (달빛 그림자)-174쪽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 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달빛 그림자)-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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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요시토모 나라 그림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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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 가장 무섭다. 살아 있는 인간에 비하면, 장소는 아무리 소름 끼쳐도 장소에 지나지 않고, 아무리 무서워도 유령은 죽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일 무서운 발상을 하는 것은 늘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14-15쪽

나는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길은 어디와도 이어져 있지 않고, 이 여행은 끝이 없고 아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유령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이런 시간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게 아닐까.-20-21쪽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시간은, 늘어났다 줄어든다. 늘어날 때는 마치 고무처럼, 그 팔 안에 사람을 영원히 가두어둔다. 그리 쉽사리 풀어주지 않는다. 아까 있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아도 1초도 움직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사람을 내버려두곤 한다.-26쪽

그 여자의 외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구나, 일부러 자기가 약을 많이 먹은 것이로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에게 조금 먹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의 인상이 허망한 것이다.-63쪽

마침 가로수의 가지가 보이고, 젊은이들이 즐거게 떠들어대며 헌옷 가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채소 가게가 있어, 온갖 색의 채소가 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예쁘게 보였다. 감의 색. 그리고 우엉과 홍당무의 색.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신이 만든 색이다.-110쪽

옛날에 읽은 어떤 책 속에, 길모퉁이에서 아주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죽을 때에도 그 음악이 흐른다는 내용이 있었어. 주인공이 어느 화창한 오후에 길을 걷고 있는데, 건너편 레코드 가게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와서, 그는 앉아서 그 음악을 들어. 그의 정신적인 스승은, 인간 생활의 어떤 측면에든 죽음이 현재한다는 증거라고, 그의 운명이 그에게 보여준 증거라고 말하지.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트럼펫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지.-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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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자신이 또 한 가지 놀란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름만 가졌지 그건 좀처럼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저 ‘무당딸’이었을 뿐이다. "그래요, 우리 두 사람의 운명도 저 레일 같은 거요. 저 레일은 두줄로 뻗어갈 뿐이지 영원히 만나지도, 합해지지도 못하게 돼 있소. 정하섭이 손을 잡은 채 한참 만에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너무 황감하면서도, 마디마디가 돌멩이가 되어 가슴을 쳤다.
-23쪽

"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 무당딸이 됐는지 몰르겄다." 남자애는 불쑥 말하고는 비파 껍질을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그 말에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바라 소리가 친친 얽혀 감기고 있는 대청을 향해 뛰었다.-26쪽

그려, 다 이 못난 애비 죄여. 이 애비 원망을 속 풀릴 때꺼정 혀. 근디, 불쌍헌 내 새끼야. 니 팔자는 애비를 원망헌다고 풀리는 것이 아녀. 피 타고남스로 매듭매듭 맺힌 한인디, 고걸 워째야 쓸끄나. 한은 맺히기만 혔지 풀리는 것이 아닝께 한인 법인디, 고건 풀라고 발싸심허먼 헐수록 헝클어진 실꾸리맨치로 얽히고 설키다가 종당에는 지 명꺼정 끊어묵는 법인디…-31쪽

어둠 속이어서 그런지 담배 끝에 매달린 불꽃의 색깔이 갓 피어난 아침꽃의 색깔처럼 싱싱하고 선명했다. 그는 무슨 예시나처럼 그 두 가지 색깔이 지니는 공통점을 문득 깨달았다. 그건 생명감이었다. 불꽃, 타오르는 불꽃이 지니는 생명감, 그는 서둘러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연기를 삼키지 않았고, 두 눈동자는 빠알갛게 타드는 담뱃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투명한 밝음과 싱싱한 색깔로 타는 불꽃에서 그는 염상진을 보고 있었다. 불꽃을 물고 타는 한 개비의 담배, 어쩌면 그건 바로 염상진인지도 모른다. 불꽃이 타오르는 정열로, 불꽃이 타오르는 생명력으로 자신이 신념하는 세계를 위해 타오르는 사나이. 그러나, 불꽃이 다 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건 회색빛 재일 뿐이다. 그것만큼 완전한 허무가 또 어디 있을까. 그것은 불꽃의 현란한 생명력 때문에 더 완전한 허무가 되는 것이다.-55쪽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 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방의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다.

-66쪽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 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지배술수에 말려든 것일 수 있었고, 군정이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만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폭력이 상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할 때 그건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폭력의 생리이고 법칙이다.-67쪽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야 했다. 학병에 끌려나가면서도, 버마의 정글 속에 동료의 무덤을 계속 파면서도, 후퇴하는 자동차를 쫓아오며 경상도 사투리로 부르짖다가 끝내 길바닥에 나둥그러지던 정신대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그렇게 기막히지는 않았었다.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 받는 핍박보다 기대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이 열 배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였다.-79쪽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땅과 우리 민족입니다.-84-85쪽

정하섭은 글을 마치며 코허리에 매운 바람이 찡하니 맺히는 걸 참아내느라고 잠시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어머니는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다. 혁명의 열기가 정열마저도 어머니라는 이름은 눈물로 녹이려 든다.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자만이 갖는 것인데 정작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다. 어머니, 그 슬픔 이름의 항시 새로운 그리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103쪽

가을 햇살이 후원 가득 차고 있었다. 여름 햇살의 열기가 다 바랜 가을 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힌다면 가을 햇살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내려앉는다. 노릇노릇 변색한 잔디 위에 가을 햇살은 골고루 내려앉는다. 후원에 가득한 온기가 노란 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랍고 아늑했다. 그런데 그 보드랍고 아늑한 온기 그 어딘가에 스산한 슬픔이 있다. 그게 조락을 주도하는 가을 햇살의 체취인지도 모른다.-105쪽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머신디.

-155쪽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 찜질 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허구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헐디ŸR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면 지주 다 쳐ŸR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156쪽

세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세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사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면들의 존엄성보다 세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 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물론, 어떤 유식한 자가 무심코 쓴 비유법이라 간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무심코’에 있어. 영국인들으 자기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 비유에 ‘무심코’ 만족을 느낀 것이고, 자기네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으로 세익스피어를 세계화시키면서 또 그 비유를 ‘무심코’ 써먹은 거야. 세익스피어가 분명 봉건 왕조시대의 작가지만 자기의 작가정신이 그처럼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으로 비유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좋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을 테니까. 세익스피어는 후대를 잘못 둔 셈이지.-233쪽

정치폭력의 역학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따귀 갈기기’의 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241쪽

들몰댁은 엉겁결에 어머니를 부르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들몰을 보자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울컥 솟았던 것이다. 언제나 홍태거리에만 다다르면 어디에선지 어머니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상스럽게도 그 냄새는 언제나 싱싱했고 언제나 슬픔이었다. 자식을 낳아 기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냄새는 진한 그리움이었다. 가난을 이기고 살아온 어머니의 고생을,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기르며 겪었을 어머니의 마음 아픔을 깨달아가면서 그 그리움은 진해져가는 것이었다.-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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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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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이미,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불길한 일의 중심은 언제든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다리오 아르젠트가 말했었다.-14쪽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영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고마워요, 하치, 그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준 일, 평생 잊지 않을게요. 설사 사이가 나빠져서 말조차 걸지 않게 되더라도, 서로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 일에 대한 감사는 지우지 않을게요. 열다섯 살 나는 굳게 결심하였다.-26쪽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사냥감을 노리는 동물은, 사냥감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보장받기 위하여 저금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로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고 싶지 邦?때는 먹지 않고, 자고 싶지 않을 때는 자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은 부조리한 것, 노력한 만큼 되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엉터리 같은 이 세계에서는 머리를 써서, 필요한 것만 생각하며 산다.-27쪽

<기분 나빠, 부엌 선반에 놓아둔 양파에서 어느 틈엔가 싹이 돋아난 것처럼 비려>라고.-32쪽

완벽한 이미지란 것이, 마음의 어두운 바다 속을 희붐하게 떠다니고, 보려 하면 할수록 어두워진다. 하지만 그 감촉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서 물 속으로 내려가 잡으려 한다. 수영을 잘하면 좀더 빨리 잡을 수 있고, 자신의 움직임의 이미지가 분명할수록, 완성형으로 향하는 길에서 해야 할 일을 안다.
-48쪽

나는 말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질 때까지 떨어져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하치가 말했다. "이 세상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잖아? 아무리 해도. 물구나무 서기를 해도 안되는 사람." ,"그래서", "하지만 그 사람도 죽잖아. 똑같이,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사람도 좋아했다가, 죽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용서해 주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할 수 없게 되잖아. 그건 멀리서 본다는 거야. 저 파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하고 구름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도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상쾌하면, 용서하잖아? 그럭저럭 좋아지잖아?"-55쪽

떨어져 있는 거야. 문제는, 마음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경우. 그러니까 가능한 한 못 들어오게 하고, 거리를 두는 게 좋아. 정말이야.-56쪽

실은 이 세상에는 장래성 따위 있지도 않은데, 생의 시간에 매달리는 나의 근성은 날마다 내일 들어갈 감옥을 만들어낸다.-65쪽

운명론은, 그것을 믿는 당사자가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만약 산으로 가지 않는다면, 하치는 <확실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 힘과 <똑같은 분량의> 힘에 짓눌려, 인생을 망칠 것이다.-79쪽

나는 커피를 끓이고, 그리고 커피가 아침 햇살 속에서 마침 향긋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무렵, 하치는 울고 있었다. 이른 햇살에 알몸을 드러내놓고 다이내믹하게 울기 시작하였다. 바보같이, 라고 생각하면서 감동한다. 나도 울고 싶어진다. 그 광경이 아름다워서. 하치는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도록, 서슴없이 감정을 발산하였ㄷ. 지금의 슬픔을 지금으로 끝내기 위한, 산 테크닉이었다.-80쪽

그 집에 신세를 지는 것도, 의외로 괜찮으œ 모르겟다고 생각했다. 매일 겁탈당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사는 편이, 그나마. 다시 또 그 집에 틀어박히는 것보다는. 그 같은 과거로 돌아가느니보다는.-97쪽

아아, 일본의 산은 우리 할머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그맣고, 동그랗고 결코 유명하지 않은데, 완벽한 형태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117쪽

정말 마음에 든 사람끼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타이밍은 영원히 맞지 않는다. 그러는 편이 낫다. 둘이서 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둘이서 웃는다면 몰라도.-123쪽

우리 둘이 나이가 들어서도 영원히 잊지 말자, 약속을 기다리는 설레는 기분을. 비슷비슷한 밤이 오는데 절대로 똑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 둘의 젊은 팔, 똑바른 등줄기, 가벼운 발걸음을. 맞닿은 무릎의 따스함을.-129-130쪽

그 모든 것, 바람과 빛의 여운, 1초도 놓칠 수 없었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과정. 신은 있다고 얼마나 생각했던가. 기적은 있다고 얼마나 생각했던가. 숨을 죽이고, 얼마나 그것을 기다렸던가.
그 과거의 느낌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서, 그 기분을 뜨겁게 가슴에 간직하고, 검푸른 초원 같은 추억의 향에 질식해 죽고 싶다. 타오르는 햇볕 속, 온통 보리밭을 상상하며, 걸어 사라진다. 끝없이 하치에게로 이어지는 길을. 친밀했던 모두에게 성실하게 작별을 고하고, 마침 적당한 어느 여름날에, 나는 죽고 싶다-136-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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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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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36쪽

나는 그 진공 세계에 두 명의 우주인이 첫발을 딛고, 달 표면에서 장난감처럼 뛰어다니며 자욱한 먼지 속에서 골프 수레같은 것을 밀고, 한 때는 사랑과 광가의 여신이었던 달의 눈에 깃발을 꽂는 것을 보았다.. 빛나는 달의 여신이라는 이미지가 이제는 모두 우리의 마음 속에서 어두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49 쪽

남자들의 옆구리에는 청동성기가 매달려 있지요. 17세기 프랑스 남자들이 칼을 차고 다니던 것과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어떤 달 사람이 어리둥절해진 시라노에게 설명해 준 말은 이런 거였습니다. 살상의 도구보다는 생명의 도구를 존중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62쪽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77쪽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142쪽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7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구에서부터 달까지의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178쪽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자으이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벽돌이라도 절대 같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대기와 추위와 더위의 영향을 받아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지면서 마모되고 비바람을 맞아, 만일 누군가가 몇 세기에 걸쳐 관찰을 할수 있다면 마침내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모든 무생물은 분해되고 있었고, 모든 생물은 죽어 가고 있었다. 격렬하고 열광적인 분자들의 운동, 물질의 끊임없는 폭발과 충돌, 그리고 모든 사물의 표면 밑에서 끊어 오르는 혼돈...-179쪽

똑같은 숲, 똑같은 달, 똑같은 정적. 그 작품들에서 달은 언제나 똑같은 보름달이었다. 캔버스 한복판에서 창백한 흰색으로 빛나는 조그맣고 완벽한 둥근 원. 그런 그림들을 댕섯 점 보고 나자 그 달들은 차츰차츰 배경으로부터 분리되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달리 볼 수 없었다. 그 달은 캔버스에 뚫린 구멍, 다른 세상을 내다보는 하얀 구멍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블레이크록의 눈일 수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은 것들을 내려다보며 우주에 떠 있는 텅 빈 원.-205쪽

누구든 자기가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끼면 고함을 지르고 싶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가슴에 응어리가 지면 그것을 몰아내지 않고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숨에 숨이 막힐 것이고, 대기 그 자체가 그를 질식시킬 것이다.-243쪽

비 냄새가 나. 빗소리가 들려. 아니 비의 맛까지도 느껴져. 그런데 우리는 하나도 젖지 않았어. 그게 바로 물질에 우선하는 정신이야. 포그, 우리는 마침내 그 일을 해냈어.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깨뜨렸어' 나는 마치 에핑의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들로 통하는 뚜껑문으로 기어들어가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신비로운 경계선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단지 그의 미묘한 계략에 굴복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자유를 확인하는 궁극적인 몸짓을 보였다는 뜻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나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죽게될 것이지만 살아있는 한에는 나를 좋아할 것이었다.--- pp. 307, 311-311쪽

어느날 나는 4번가에 있는 중고 서점에 들러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테슬라의 자서전인 '나의 발명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은 원래 그가 1919년 <전기 기술>이라는 잡지사에서 출판한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문을 서너 페이지쯤 읽다가 거의 1년전쯤 달의 궁전의 쿠키에서 나온 점괘와 똑같은 문장을 보게 되었다. <태양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고 달은 미래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쪽지를 지갑에 넣어 두고 있었는데 그 말이 테슬라, 에핑에게 그처럼 중요했던 바로 그 테슬라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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