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이미,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불길한 일의 중심은 언제든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다리오 아르젠트가 말했었다.-14쪽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영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고마워요, 하치, 그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준 일, 평생 잊지 않을게요. 설사 사이가 나빠져서 말조차 걸지 않게 되더라도, 서로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 일에 대한 감사는 지우지 않을게요. 열다섯 살 나는 굳게 결심하였다.-26쪽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사냥감을 노리는 동물은, 사냥감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보장받기 위하여 저금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로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고 싶지 邦?때는 먹지 않고, 자고 싶지 않을 때는 자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은 부조리한 것, 노력한 만큼 되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엉터리 같은 이 세계에서는 머리를 써서, 필요한 것만 생각하며 산다.-27쪽
<기분 나빠, 부엌 선반에 놓아둔 양파에서 어느 틈엔가 싹이 돋아난 것처럼 비려>라고.-32쪽
완벽한 이미지란 것이, 마음의 어두운 바다 속을 희붐하게 떠다니고, 보려 하면 할수록 어두워진다. 하지만 그 감촉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서 물 속으로 내려가 잡으려 한다. 수영을 잘하면 좀더 빨리 잡을 수 있고, 자신의 움직임의 이미지가 분명할수록, 완성형으로 향하는 길에서 해야 할 일을 안다. -48쪽
나는 말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질 때까지 떨어져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하치가 말했다. "이 세상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잖아? 아무리 해도. 물구나무 서기를 해도 안되는 사람." ,"그래서", "하지만 그 사람도 죽잖아. 똑같이,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사람도 좋아했다가, 죽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용서해 주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할 수 없게 되잖아. 그건 멀리서 본다는 거야. 저 파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하고 구름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도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상쾌하면, 용서하잖아? 그럭저럭 좋아지잖아?"-55쪽
떨어져 있는 거야. 문제는, 마음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경우. 그러니까 가능한 한 못 들어오게 하고, 거리를 두는 게 좋아. 정말이야.-56쪽
실은 이 세상에는 장래성 따위 있지도 않은데, 생의 시간에 매달리는 나의 근성은 날마다 내일 들어갈 감옥을 만들어낸다.-65쪽
운명론은, 그것을 믿는 당사자가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만약 산으로 가지 않는다면, 하치는 <확실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 힘과 <똑같은 분량의> 힘에 짓눌려, 인생을 망칠 것이다.-79쪽
나는 커피를 끓이고, 그리고 커피가 아침 햇살 속에서 마침 향긋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무렵, 하치는 울고 있었다. 이른 햇살에 알몸을 드러내놓고 다이내믹하게 울기 시작하였다. 바보같이, 라고 생각하면서 감동한다. 나도 울고 싶어진다. 그 광경이 아름다워서. 하치는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도록, 서슴없이 감정을 발산하였ㄷ. 지금의 슬픔을 지금으로 끝내기 위한, 산 테크닉이었다.-80쪽
그 집에 신세를 지는 것도, 의외로 괜찮으 모르겟다고 생각했다. 매일 겁탈당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사는 편이, 그나마. 다시 또 그 집에 틀어박히는 것보다는. 그 같은 과거로 돌아가느니보다는.-97쪽
아아, 일본의 산은 우리 할머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그맣고, 동그랗고 결코 유명하지 않은데, 완벽한 형태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117쪽
정말 마음에 든 사람끼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타이밍은 영원히 맞지 않는다. 그러는 편이 낫다. 둘이서 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둘이서 웃는다면 몰라도.-123쪽
우리 둘이 나이가 들어서도 영원히 잊지 말자, 약속을 기다리는 설레는 기분을. 비슷비슷한 밤이 오는데 절대로 똑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 둘의 젊은 팔, 똑바른 등줄기, 가벼운 발걸음을. 맞닿은 무릎의 따스함을.-129-130쪽
그 모든 것, 바람과 빛의 여운, 1초도 놓칠 수 없었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과정. 신은 있다고 얼마나 생각했던가. 기적은 있다고 얼마나 생각했던가. 숨을 죽이고, 얼마나 그것을 기다렸던가. 그 과거의 느낌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서, 그 기분을 뜨겁게 가슴에 간직하고, 검푸른 초원 같은 추억의 향에 질식해 죽고 싶다. 타오르는 햇볕 속, 온통 보리밭을 상상하며, 걸어 사라진다. 끝없이 하치에게로 이어지는 길을. 친밀했던 모두에게 성실하게 작별을 고하고, 마침 적당한 어느 여름날에, 나는 죽고 싶다-136-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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