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6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권 서장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불현듯 심재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략) 나이에 비해 똑똑하고 진중했고, 당당하고 정직한 군인이었다.그래서 그는 벌교땅을 떠나야 했다.-29쪽

강원도는 산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전라도와 달랐다. (중략) 그 심한 차이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손승호가 진작했던 말이 열쇠가 되어주었다. 그것은 소작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논밭이 넓은 땅에 살면서도 거의가 소작인이었고, 강원도 사람들은 비록 산골의 비탈밭이나 돌투성이밭을 일구어도 그것이 자기네 소유였다. 빼앗기며 사는 사람들과 빼앗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그처럼 현격했던 것이다.-87쪽

전라도 소작인들이 좌익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감추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강원도 산골 사람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적 감정으로 좌익을 대하는 것이었고, 전라도 소작인들은 좌익이 세상을 뒤바꿔주기를 기대하며 공범의식을 느끼고 있는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빼앗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과 빼앗기고 사는 사람들이 보이는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89쪽

"계산얼 안혀봤응께 똑떨어지게야 몰르겄제만, 좌우당간 쩌 총알 한 개 값이 보리쌀 한 됫박값이야 넘을 것이구만요. 저것이 결국은 다 인민의 핀디, 저리 헛방질로 쏴제끼는 걸보자니께 속이 뒤집어질라고 허느만요."
"그렇지요, 인민의 피지요." 안창민은 그 분명한 인식에 하대치를 새삼스럽게 쳐다보며, "아마 저 자들은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를 겁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을 거구요." 그는 다정하게 웃었고, 하대치도 따라 웃었다.
-150쪽

해방이 되자마자 너 같은 놈 하나를 죽이고 나도 죽었더라면 얼마나 의미있는 죽음이었을 것이냐. 너 같은 종자들이 백오십만,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백오십만이라면 이 땅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냐.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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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5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그건 글줄이나 읽었다는 자들이 저지르는 가당찮은 착각이고 자만이고 오해야. 인생살이 전체를 놓고 생각해볼 때 유무식의 차이란 글줄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가 아닐 것이네. 그건 인생살이의 진실이나 고통을 얼마나 아느냐, 모르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네. 농민들만큼 인생살이의 쓰라림과 아픔과 슬픔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 또 누가 있나. 그리고, 세상의 잘못 짜여진 구조에 대해서, 그것이 배웠다는 자들이 꾸미는 집단횡포라는 것에 대해서, 배운 자들의 교활과 위선과 자만에 대해서 그들은 다 느끼고 판단하는 이지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은 그들이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바보나 천치들인 것으로 취급하려 들어. 그거야말로 큰코 다칠 일이지. 배웠다는 자들이 번드르르한 말로, 그럴싸한 이론이라는 것으로 발라맞추는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치고, 몸으로 깨닫고, 몸으로 말하네. 소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말을 배웠다는 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야. 농민들은 인생살이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세상판세 돌아가는 잘잘못이 무엇인지 환히들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식자라는 것들처럼 소리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말을 해도 그들끼리만 낮게 말하고, 그들끼리만 통하는 몸으로 하는 말을 해. 배웠다는 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지 동냥 주는 식을 한다는 ‘농촌계몽’이야.-26쪽

이거 참, 세상이 갈수록 쑥밭이오. 온통 사바사바에 빽이면 안 통하는 일이 없고, 미운 놈은빨갱이로 몰아치면 깨끗하게 제거되고, 이거 볼장 다 본 세상이오.-153쪽

그 사람도 군대생활 해나가기는 어려울 게요. 군부에서도 벌써 광복군 출신이나 학병 출신들은 한직이나 난직으로 밀리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분야에서나 그레샴의 법칙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잖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183쪽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은 극형처단해야 하는 근거가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일본놈들이 삼십육 년에 걸쳐 직접 살해한 우리 동포의 수가 얼마며, 착취를 해서 굶어죽게 한 간접살해는 또 얼만가를 따져보세. 수백만 명 아닌가. 민족반역자들을 대략 백오십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동포의 수를 삼백만으로 줄여잡더라도 그놈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을 죽인게 아닌가 말야. 그런 살인자들을 어찌 그냥 살려둘 수가 있겠나. 그런데 우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오늘날과 같은 엉망진창의 꼴이 되고 말았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만써도 좌익으로 몰아 붙이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지 않았나.-188쪽

당신은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으려 하고, 민기홍은 한사코 역사를 피하려 하고 있어. 그러나 당신 조심해, 국회의원도 빨갱이로 잡혀들어가고, 특위도 빨갱이 소굴로 몰아치는 세상이야. 기자라는 게 방패가 못돼, 구타도 당했잖아. 왜 당신을 보고 염상진 선배 생각이 날까, 염상진…… 염상진……-191쪽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손승호는 앞이 콱 막혀버린 것 같은 암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패로 갈라진 거대한 편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으깨져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목숨을 지탱하려면 그 것에 굴복해야 했고, 목숨을 포기하려면 그것에 대항해도 좋았다. 두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실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의 구차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196쪽

그분을 존경했거나 아끼고, 정치적으로 무슨 기댈 걸었던 사람들이라면 거의가 그런 비슷한 심정들 아니겠나. 어쨌든 이런 분단현실 속에서 그분의 죽음은 민족적 손실임이 틀림없지. 그러나 말야, 개인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극적인 죽음도 없을지 모르네. 민족이 필요로하는 상황에서, 그 어떤 오류도 저지르지 않고, 가능성만을 남겨놓은채, 정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분은 일제하의 투쟁경력과 더불어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 것이네. 우남은 정적을 제거했다고 편안한 잠을 잘지 모르지만 오히려 정적을 역사 속의 영웅으로 만드는 일을 거들었고,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은 역사 속의 죄인으로 만드는,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손해를 보는 어리석고 아둔한 짓을 저지른거야.-218쪽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조작에 있어서 우남이 백범보다 한 수 위라고 하고,백범은 정치가라기보다 혁명가라는 통설을 만들다시피했는데, 내가 보기엔 절대 그렇지 않네. 우남은 정치를 현실 자체로만 파악하는 단견의 소유자고, 백범은 정치가 현실이면서 곧 역사라고 파악하는 거시적 안목의 소유자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네. 그러니까 그 정책에도 현격한 차이가 나서, 우남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 단정수립이다, 친일반역자들과 야합이다, 특위 습격명령이다, 백범 피살이다, 하고 역사에서 비판 받을 짓만 계속 하는 거고, 백범은 그와 반대로 민족 전체의 삶을 전제로 외세배격이다, 민족통일이다, 친일파 척결이다, 남북협상이다, 분단획책의 단선 거부다, 하고 객관적 명분의 길을 걸은게 아니겠나.-219쪽

죽은 자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관대하고, 죽음을 계기로 생전의 모든 잘못을 해결지으려 하고, 죽은 자에 대한 비판을 죄악시하는 우리네의 소박하고도 단순한 인정주의적 윤리관과, 굿 좋아하고, 구경 좋아하고, 흥 좋아하는 우리네의 꾸밈없는 즉흥적 생활관을 굳이 끌어들여 그 많이 몰려든 사람들이 가진 조의의 순수도를 감점한다 하더라도 역시 백범은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얻고 있었던 인물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고 손승호는 생각했다.-234쪽

절대자유란 날아가는 새에게도 없는 법입니다. 새는 자연의 통제를 받아야 하니까요.-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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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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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냉담해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이중 삼중으로 덧칠이 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어디까지가 위대한 열정이고 어디부터가 지독한 감상인지. 난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위대한 열정에 대한 가능성을 비웃고, 진실하고 심오한 감정을 감상이라고 치부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프란체스카 존슨과 로버트 킨케이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요구되는 따스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런 상투적인 태도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인 콜리지가 말했듯이, 의심의 먹구름을 걷우고 다음의 이야기에 다가선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심했던 당신의 가슴 안에서 다시 춤출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프란테스카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14-15쪽

렌즈통을 내려다보면 그 끝에 당신이 있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소. 당신에 대해서 말이오.-38쪽

세대는 굴러야만 한다. 구르고 또 구르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의 것만이 필요하다. 남녀의 끌어당기는 힘. 그 힘은 무한하고도 아름답다. 이런 힘이 작용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조금도 어긋나는 법이 없이 단순하고 또렷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복잡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뿐. 프란체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그 힘을 느꼈다. 세포 속속들이 자석과도 같은 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그녀를 영원히 변하게 하는 일이 시작되었다.-45쪽

‘분석하는 것은 전체를 망쳐 버린다. 무언가 신비로운 것들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한다. 조각조각을 보면 신비는 사라지고 만다.’ 바로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56-57쪽

"어릴 적 내가 꿈꾸던 생활은 아니에요."
마침내 고백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묵혀 두기만 하고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지만, 정말 하고 싶던 말이기도했다. 프란체스카는 지금 초록색 픽업 트럭을 타고 워싱턴주의 벨링햄에서 온 어떤 남자에게 그 말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60쪽

"사진은 찍는게 아니라 만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일요일에 스냅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와 사진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프로의 차이가 그거지요. 오늘 우리가 본 다리 촬영을 끝내면 부인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사진이 나올 겁니다. 렌즈를 선택하고, 카메라 각도나 일반적인 구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조화로 내 나름대로의 장면을 만들게 될 겁니다. 사물을 주어지는 대로 찍지는 않습니다. 뭔가 내 개인적인 의식이 정신이 반영되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이미지에서 시구를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중략)"
-69쪽

모르는 사람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그와 함께 순무를 다지고, 그러다보니 낯선 느낌이 스러져 버렸다. 낯선 느낌이 없어지니, 친밀감이 들어설 공간이 생겼다.-72쪽

프란체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초지와 초원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 하늘 색깔에 흥분하는 사람, 시를 약간 쓰지만 소설은 그다지 많이 쓰지 않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기타를 치는 남자, 이미지로 밥벌이를 하고 장비를 배낭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남자. 바람 같아 보이는 남자. 그리고 바람처럼 움직이는 남자. 어쩌면 바람을 타고 온 사람.-79쪽

"시대에 낙오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피를 몸에 지닌 사람 말이에요. 세상은 조직화 되고 있어요. 지나치게 조직화되어서 나 같은 사람은 끼여들 여지가 없죠.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고, 모든 것이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죠. (중략)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 수는 없어요. 어떤 사람은 다가오는 세계에서도 잘 적응하겠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 몇몇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중략) 우린 자유를 포기하고, 점점 조직화되어 가면서 우리 감정을 하찮게 여깁니다. 효능과 효율성, 지성적인 기교 같은 것만 강조하죠. 자유를 상실하면서 카우보이가 사라졌죠. 아메리카 라이언도, 얼룩이리도 함께 사라졌죠. 이젠 방랑자들이 설 자리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마지막 카우보이 중의 한 명이죠.(중략)"-125-126쪽

추억을 절제하는 것,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추억의 조각들이 세세한 곳에 이르기까지 자주 밀려들긴 했지만, 이제 그녀는 문을 열었다. 그녀의 마음 속으로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울타리를 치워 버렸다. 이미지는 분명하고, 현실적이고, 늘 현재 같았다.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인데도. 22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일인데도. 추억 속의 이미지들은 이제 다시 그녀의 현실이 되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이었다.-129쪽

아침이 밝을 무렵, 그는 몸을 약간 일으키고,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이 혹성에 살고 있는 이유가 뭔 줄 아시오. 프란체스카? 여행하기 위해서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도 아니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혹성에 살고 있는 거요. 이제 그걸 알았소. 나는 머나먼 시간 동안, 어딘가 높고 위대한 곳에서부터 이곳으로 떨어져 왔소. 내가 이 생을 산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그리하여 그 많은 세월을 거쳐 마침내 당신을 만나게 된 거요."
-134쪽

"당신이 내 안에 있는지. 또는 내가 당신 안에 있는지. 내가 당신을 과연 소유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어. 적어도 난 당신을 소유하고 싶지는 않아. 우리 둘은 우리가 ‘우리’라고 새로 만들어낸 다른 존재의 안에 있다고 생각해. 물론 우리는 그 존재 안에 있는 것도 아니지. 우리가 바로 그 존재니까. 우리 둘 다 스스로를 잃고 다른 존재를,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얽혀들어 하나로만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창조해낸 거요. 맙소사. 우린 사랑에 빠졌소. 더 이상 어찌할수 없이 가장 깊고. 가장 심오하게.-140쪽

"할 이야기가 있소. 한 가지만.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을거요. 누구에게도. 그리고 당신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거요."-143쪽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느끼지도 않고, 대신. 당신을 발견한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소. 우리는 우주의 먼지 두 조각처럼 서로에게 빛을 던졌던 것 같소. (중략) 하지만 결국, 나도 사람이오. 그리고 아무리 철학적인 이성을 끌어대도, 매일, 매 순간, 당신을 원하는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소. 자비심도 없이, 시간이.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 소리가, 내 머리 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소. 당신을 사랑하오. 깊이, 완벽하게, 그리고 언제나 그럴 것이오.
마지막 카우보이. 로버트

-170-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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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4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민심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건 바람 같은가 하면 안개 같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물 같기도 했다. 바람처럼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으면서 어느 순간마다 언뜻언뜻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결정적인 경우에는 폭풍으로 몰아쳐오는 것이었다. 양조장 정 사장 사건을 처리하면서, 평소에는 있듯만듯하던 그들 민간인들의 힘이 네 소작인을 구해내는 연판장으로 일시에 뭉쳐졌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작은 힘들이 모아져 폭풍으로 돌변하는 모습이었고, 전에는 전혀 경험해본 바 없는 힘의 섬뜩함이었다. 어느 길목에서 갑자기 맞닥뜨릴 때 황급히 옆걸음질치며 피하는 그들은 흐릿흐릿 흩어지는 안개발에 지나지 않았고, 장날이면 호의를 가지고 말을 걸어도 잔뜩 주눅이 들어 말더듬이가 되는 그들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에 한 발 앞도 분간 못하게 하는 진한 안개로 뭉쳐지고, 어떤 계기에는 강둑을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성난 물줄기로 한덩어리가 될 수도 있었다.-11-12쪽

그 여자는 가엾고 불쌍한 피해자일 뿐인 것이다. 나라 잃어버린 남자들의 밍충맞음으로 여자들이 당한 수난이었다. 그렇게 고통받은 여자들이 도대체 몇 명일까. (중략) 분명 해방이 되었는데도 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한번도 거론된 일이 없지 않았는가. 심재모로서도 그건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22-23쪽

새야 새애야 파아랑 새애야아
녹두우밭에에 앉지 마라아
녹두꽃이 떨어어지이며언
청포장수우우 울고 간다아아
-56쪽

그나마 뻘밭에서 꼬막을 캐낼 수 있는 것은 빈한한 사람들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꼬막이라는 것이 빈한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꼬막이 자갈밭의 자갈처럼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꼬막을 캐는 뻘밭일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꼬막은 찬바람이 일면서 쫄깃거리는 제맛이 나기 때문에 천상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을 잡아야만 하루 목숨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인네들은 살을 찢는 겨울 바닷바람에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려 맨살을 드러낸 채 뻘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중략) 겨울바람 속의 여인네 모습은 그대로 극한에 달한 빈궁의 표본이었고, 모진 목숨의 상징이었으며,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이었다. 아니, 그것은 눈물이고, 아픔이고, 한이었다.-82쪽

가난이란 육신을 배고프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굶주림을 모면할 길이 없는 빈한 속에서 배움을 얻을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봉건사회의 착취계층은 그 상관관계를 교활하게 이용함으로써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까지 대대로 향유할 수 있었다.-100쪽

동백은 남도지방의 꽃이었다. 동백꽃은 질 때도 그 빛깔도 모양새도 변하지 않은 채 꽃잎 하나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꽃술만 남겨놓고 본래의 모양 그대로 뚝뚝 떨어져내리는 것이다. 마치도 핏빛의 눈물을 떨구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동백꽃을 한 많은 처녀 넋의 환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또는, 한 많은 청상의 환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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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3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절판


어쩌면 하늘이 저리도 맑고 푸르고 끝도 없이 깊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하늘의 깊이를 따라 눈길을 길게길게 뻗치고 있는 들몰댁의 가슴에는 까닭 모를 서러움이 차츰 차오르고 있었다. 서러움은 가슴을 채우고 목을 채우고, 입으로 넘쳐올랐다. 추수를 끝내서 더 넓어보이는 고읍들이 서러움으로 차고, 산들도 서러움 속에 잠기더니 마침내 하늘까지도 서러움으로 뒤덮였다. 그 하늘이 차츰 흐릿흐릿 변하고 있었다. 들몰댁은 무심결에 눈을 훔쳤다. 손등에 눈물이 묻어났다. 그때서야 들몰댁은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 가슴에서 일기 시작한 서러움이 하늘을 덮은 것이 아니고 하늘의 그 끝없이 푸른 색깔이 바로 서러움으로 자신의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늘의 푸름이 그대로 서러움이었고, 서러움의 색깔이 바로 그 끝없는 하늘색이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고생길도 저리 끝이 없을 것이다.-11쪽

어머니는 이제 억지로라도 강해지고 억세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첫번째 표현이 바로 자신의 서울 유학을 계속하게 한 것이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앞으로의 생애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앞으로의 어머니 생애에는 여자로서의 삶은 없고 어머니로서의 삶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한 삶인가.-67쪽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느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서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아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승무)-74-75쪽

어느 서양여자는 ‘단아하고 정갈하게 흰 수건을 머리에 쓴 말수가 적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서 ‘조선인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그러나 빨면 빨수록 희어지다 못해 하늘빛을 닮아가는 무명이라는 천은 천년에 걸쳐 이 땅에 이음하여 내려온 가난과 배고픔의 색깔인 것이고, 그 흰 천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여인네들이 정작 흰색을 경원해 마지않는다는 사실을 그 여자는 몰랐을 것이다. 한평생 흰 수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자기네의 신세를 여자들은 한스러워했고, 누구나 마음속에는 언젠가 그 지긋지긋한 흰 수건을 벗고 비단 치마저고리에 머리에는 동백기름 자르르 바르며 살게 되기를 한 가닥 소망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십중팔구 시집올 때 한번 그리고 죽어서 다시 한번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을 뿐이었다.-142-143쪽

이 세상 일이란 시작 없는 끝이 없는 법이고, 나무는 괜히 흔들리는 법이 아니지.-177쪽

아부지는 얼굴도 몸도 뻘건 디는 하나또 ŸR는디 워째 사람들은 아부지보고 빨갱이라고 헐까?-252쪽

빼앗긴 자가 빼앗으려는 욕구나, 빼앗은 자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구가 본능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본능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빼앗긴 자의 본능이 생존권 선언이라면, 빼앗은 자의 본능은 재산권 옹호였다. 빼앗긴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은 공격적일 수밖에 없고, 빼앗은 자는 어쩔수 없이 방어적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 대립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고, 그 피해자인 선우진 같은 사람들은 감정적 반공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290쪽

손승호는 심재모에게 잔을 권했다. 그의 음성이 약간 격해진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술기가 감돌았다 심재모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라도 사람들은, 이거 경솔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딘지 억센 것도 같고, 거친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주눅든 것 같고 경계하는 것 같고 그런 인상입니다.", "그렇게 보이던가요? 그렇다면 상당히 정확하게 보신 거군요. 그게다 대대로 이중적인 착취를 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관찰이지요. 그 사람들 가슴에는 끝없는 회한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한이 맺혀 있는 거지요. 전라도나 경상도 땅은 옛날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이 깊게 서린 땅입니다. 동학란이 전라도에서 일어나고, 경상도로 번져간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겁니다. 욕으로 화풀이하며 견디고, 육자배기로 신세 한탄하며 견디고, 그러다가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어 폭발한 것이었지요."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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