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너희들은 젊으니까 참 좋구나. 젊으면 뭘해도 예쁜거지!"라고 말씀하시면 전혀 공감하기 어려웠다. 청춘은 이렇게 외롭고 힘든데, 무엇이 멋지단 말인가.
그런데 시간이 흘러 청춘과 거리가 멀어지고 나니 이제야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눈이 뜨인다. 좌충우돌 살아오면서 아름다운 것들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서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하고 너그러워진 것 같다.
머릿속이 난마처럼 얽혀버린 시간, 어떤 위로도 불안한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는 시간. 그러면 나는 무작정 산책을 나간다. 대낮의 산책도 좋지만, 가장 매혹적인 산책은 역시 한밤중에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얼굴선이 자세히 보이지 않고,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희미한 실루엣이나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이 더 잘 보이는 시간, 외출복으로 갈아입지 않아도 되며 그저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간. 그런 한가로운 밤 산책의 여유는 의외로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건 그 사람과 맺은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는 안부를 물을 수 없다. 아무리 미칠 듯이 보고 싶어도, 죽은 사람에게는 안부를 물 을 수 없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지금, 안부는 인연의 절실함을 증명하는 가장 평범하고 아름다운 몸짓임을 이제야 알겠다.
무언가 더 '들이기'보다 '비우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힐링 스페이스 만들기의 첫걸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우리는 비로소 다급하게 달음박질쳐 사라지는 '시간의 뒷모습'이 아니라 황소의 걸음으로 느릿느릿 찾아오는 '시간의 앞모습'을 볼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어두운 삶을 밝혀줄 등대만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내가 직접 조용히 불을 밝히며 타인의 마음에 등대가 되어준적이 없다. 세상 바깥에서만 등대를 찾아다니지 않고,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작지만 소중한 등대가 되고 싶다. 지금 캄캄한 밤바다를 홀로 표류하고 있는 당신의 망므에 불현듯 등불을 밝힐 수 있는 따스한 온기를 지닌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는 무의식의 힘을 믿는다. 내가 조카를 예뻐하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네 자식도 아닌데 뭘 그렇게 예뻐하니?", "너도 어린 시절 기억 안나지? 네가 아무리 예뻐해도 조카는 기억 못할걸." 물론 조카의 의식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카를 껴안고 동화책을 읽어줄때, 아이가 동화의 문장을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못해도 이 순간에 오직 '우리'만이 공유하던 신비로운 따스함을 이 조그만 아기의 무의식이 기억해주기를 기도한다.
국적, 성별, 가족 등등.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따져보다 문득 '그래도 책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잖아!'하고 감탄해본다. 하지만 가끔 그것조차 나의 선택이 아닐 때가 있다. 어떤 책은 오히려 그 책이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서 읽어, 오랫동안 미루기만 해왔잖아. 왠지 내가 낯설지 않지? 네가 찾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야'라고 이렇게 말을 거는 책들이 있다. 내가 그 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고전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책이 내 영혼을 향히 진짜 제대로 된 질무늘 던져줄 때 나는 그 책에게 자발적으로 선택당한다.
병에 걸리면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지었기에...'라고 스스로를 단죄하는 환자의 무의식에 깔린 은유는 바로 '모든 질병은 신의 형벌'이라는 불합리한 은유가 아닐까. 수전 손택은 정의의 이름으로 활개를 치는 화려한 정치적 수사들 속에 숨은 응유의 파시즘과 투쟁하면서, 그 모든 차별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무엇, 즉 '생명'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통받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
수전 손택은 우선 타인의 고통을 목격할 때 반사적으로 느끼는 연민, 그 자동화된 연민의 감정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민'과 '공감'은 전혀 다르다. 연민에는 고통받는 타자의 아픔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난 아직 괜찮다' 혹은 '저들보다 나는 편안하다'고 느끼는 일종의 우월감이 깔려있다. 참혹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안방에서 지켜보고 얼마씩을 기부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감정이다.
내 삶의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 '연민'이라면,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태도가 공감인것이다. 즉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혹시 상황에 달랐다면 바로 내가 겪을 수 있는 고통임을 인정하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다.
요컨대 연민이 '귿르은 고통받지만 나는 안전하다'는 판단으로 타인의 고통을 머너먼 3인칭의 문제로 만든다면, 공감은 '당신의 고통은 바로 나의 고통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아파하는 뜨거운 2인칭이 문제다. 연민은 '그들'을 향하고, 공감은 '그대'를 향하는 것이다.
공감은 연민보다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마음을 뒤흔드는 고통스러운 화두로 다가와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감정이다. 내 작은 고통에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 타인의 커다란 고통에는 무감가해져버린 현대인은 어쩌면 집단적인 영혼의 불감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감은 지금 누군가 고통받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이다.
'꽃'이라는 선물 또한 본질적으로 교환이 아닌 증여의 원리와 맞닪는다. 꽃을 선물 받는 기쁨은 다른 선물과는 완전히 다르다. 상대방이 어떤 상품의 쓸모를 선물하려는 것이 아닌 '특별한 의미'를 선물하고 싶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 증여의 기쁨을 간직하는 또 하나의 비법은 생의 축복이 내리쬐는 모든 곳에서 '감사'의 대상을 찾는 것이다. 나는 강의를 열심히 들어주는 한 할머니의 촉촉한 눈빛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햇살의 따스함에, 휘영청 떠오른 달빛의 서글픔에, 만날수 없지만 어디선가 나를 응원하는 친구의 보이지 않는 미소를 향해,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정말 이상하게도, 눈물겹게 고마운 것들은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포스트잇 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마음에 드는 글들 추려서 페이퍼에 옮겼어요. 원래 이럴때는 필사를 해야 운치가 있을텐데... 제 손글쓰기 부끄럽고, 게으름에 그냥 키보드만 톡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