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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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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그리고 삶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간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49쪽

<아무것도 없어>

당신을 위해 스튜를 만들고 싶은데 /
내게는 냄비가 없어 /
당신을 위해 머플러를 뜨고싶은데 /
내게는 털실이 없어 /
당신을 위해 시를 쓰고 싶은데 /
내게는 펜이 없어-149쪽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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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3월
구판절판


"거기엔 정말 책이 많았다네. 난 그 책들을 읽을 수 있었지."-30쪽

"나는 나 자신의 반을 잃었다. 나는 그녀의 영혼을 위해 존재해왔다."-100쪽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른에 있는 한 대학에서 3학년을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지원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동안 써왔던 논문들과 함께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던 상대성 이론의 논문을 제출했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얼마 후에는 교사가 되기 위해 한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다른 지원 서류와 함께 자신의 공식을 봉투 안에 넣고 밀봉한 다음 학교로 보냈다. 21명의 지원자 중 3명이 면접에 올랐는데, 아인슈타인은 그 중에 끼지도 못했다.-113쪽

'독일 사람들은 나를 자랑스러운 독일인이라고 부르고 영국사람들은 스위스 국적의 유대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나의 예측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면, 독일 사람들은 나를 스위스 국적의 유대인이라고 했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287쪽

1945년 히로시마를 덮친 폭발의 섬광은 달의 궤도에까지 미쳤다. 일부는 지구로 되돌아왔고, 나머지 대부분은 태양에 이를 때까지 계속 여행하면서, 저 너머 무한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그 반짝이는 빛은 목성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깜빡임이었다. 태양만 해도 매초마다 원자폭탄 수백만 개에 버금가는 폭발을 한다. E=mc2은 지구상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모든 특공대와 초조해 하는 과학자들과 냉철한 관료들, 이 모두는 공식이 가지는 어마어마한 힘 앞에서 그저 하나의 물방울이었고, 아주 미약한 속삭임에 불과했다-229쪽

『프리미어』라는 잡지에서 여배우 카메론 디아즈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자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디아즈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했다. 디아즈의 대답은 이랬다. '글쎄요, E=mc2이 도대체 무슨 뜻이죠?' 그리고는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디아즈는 '농담이 아닌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그 기사를 큰 소리로 읽자, 모여 있던 친구 중 하나가 '디아즈가 그걸 정말 알고 싶었을까?'하고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으나 방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 건축가, 프로그래머 두 명, 그리고 역사학자인 내 아내까지도 모두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디아즈에게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 역시 그 유명한 공식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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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필립 K. 딕의 SF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유영일 옮김 / 집사재 / 2002년 6월
품절


사라 벨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닐니시 보눔(Nil nisi bonum)."
그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해져서 그녀를 으시했다.외국어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대학 출신이었다.
사라벨은 다정하게 미소를 띄면서 말했다. "텀버 래빗의 말을 인용한 거예요. 좋지 않은 이야기는 아예 입밖에 내지 말라는 뜻이죠. 옛날 영화인 <밤비 Bambi>에 나오는 말이에요. 매주 월요일 밤마다 근대 예술 박물관에서 하는 강의에 당신도 참석했더라면..."-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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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품절


이것은 체사레가 싸움터에서 그의 잔인성을 거리낌없이 표출시킨, 처음이자 마지막 예다. 그는 피로 손을 더럽힐바에야 차라리 온몸을 피에 담가버리는, 그런 사나이였다.-166쪽

체사레 곁에서 대담하고도 빛나는 삶을 같이하는 것. 이 생각이 아스토르를 매료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동안, 만프레디 가의 어린 형제는 체사레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체사레는 파엔차 민중의 아스토르에 대한 충성심의 강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파엔차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있어 아스토르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다. 1502년 6월 9일, 파엔차가 함락된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 로마의 테베레 강에 목에 밧줄이 감긴 형제의 시체가 떠올랐다-152쪽

역사상, 이렇게도 재능의 질이 다른 두 천재가 만나, 서로 재능을 살리면서 협력하는 예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레오나르도가 사고의 거인이라면, 체사레는 행동의 천재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의 피안을 유유히 걸어가는 인간이라면, 체사레는 현실의 강에 태연하게 말을 몰고 들어가는 인간이다. 다만 이 두 사람은 그 정신의 근저에서 공통되는 것이 있었다. 자부심이다. 그들은 자기 감각에 맞지 않는 것은, 그리고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를 절대시하는 이 정신은, 완전한 자유와 통한다. 종교로부터도, 윤리 도덕으로부터도 그들은 자유다. 궁극적으로 니힐리즘과 통하는 이 정신을 그 극한에서 유지하고, 더욱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렬한 의지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있었다-197쪽

"FIDES PRAEVALET ARMIS"
즉 "신뢰는 무기를 이긴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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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1999년 11월
구판절판


보고 있는 내 쪽의 눈길이 문득 뒤로 물러나 신의 시선이 되는 것 같은, 행복도 우울도 하나로 녹아드는 여원 같은 저녁 풍경이었다.-10쪽

"N.P 라니, 그게 뭐예요?"
"노스 포인트의 약자."
"무슨 의미?"
"그런 제목의 오랜된 곡이 있어."
"어떤 곡인데요?"
"음, 아주 슬픈 곡이야."-11쪽

꿈속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맑고 깨끗한 꿈의 강에서 사금을 채취하여 돌아온 것 같은 감촉이 남아 있었다.
'슬퍼서 운 건지, 아니면 슬픈 일로부터 해방되어 운 건지, 어느 쪽이 됐든 아직 깨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 멍하니 생각했다.-18쪽

바깥으로 나오니, 정말 모든 것에 가슴이 설레었다. 강렬한 햇살, 반짝이는 아스팔트, 정지되어있는 나무들의 짙은 초록.
호흡을 하는 나에게,
"지금 가슴이 콩콩거리지?"
라고 하며 사키가 활짝 핀 해바라기 같은 웃음을 보인다. 햇빛 안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웃음이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여름이 오고 있었다.-55쪽

"그렇게 시큰둥한 표정 짓지 마, 살아 있으니까. 하나 하나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실화니까.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하고 제 아무리 닮았어도, 지금 여기에, 너만을 향하고 있는 살아 있는 언어니까."-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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