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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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및 교열 20년의 내공이 확인해주듯 책 속 틀린 문장의 예들이 아주 구체적이다. 실제로 내가 자주 쓰는 문장들이 틀린 문장의 예로 등장한다. 아주 자주.

제일 먼저 피해야 할 표현은 ·의를 보이는 것·이다.(18) ‘을 뺀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한다‘-, 따위를 붙이면 무슨 간접 화법처럼 보이는데(실제로 사랑한다라는 것은이나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몹시 어색하다.

사랑이란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라고 써도 문제는 없다. 일부러 것은것이다를 반복해 써서 강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습관처럼 반복해서 쓰면 문장이 어색해진다. (34)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아주 기본적인 사실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주격 조사 ,가 붙는 낱말은 문장 안에서 주어의 자격을 갖게 되고, 보조사 , 이 붙는 낱말은 문장 안에서 주제, 곧 화제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가령 모두가 예전 그대로였다라는 문장에서 모두는 주격 조사 가 붙어 주어의 자격을 갖는 반면, ‘은 예전 그대로였다라는 문장에서 은 보조사 이 붙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80)

 

산 너머 산. 편리함 때문에 로부터를 고집해서 사용하다 보면 이런 문장을 쓰게 된다.

몇몇 죄수들이 담 한쪽에 난 구멍으로부터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몇몇 죄수들이 담 한쪽에 난 구멍을 통해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아무데도 없었다).

그들이 정보원으로부터 얻어 낸 것은 허위 정보였음이 밝혀졌다.

그들이 정보원에게 얻어 낸 것이 허위 정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07)

 

첩첩산중. 두 번 당하는 말도 자주 쓰고 있다.

둘로 나뉘어진 조국

둘로 나뉜 조국

그때 그 사건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그 사건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생존자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환호성과 한숨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생존자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환호성과 한숨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123)

 

설상가상. ‘-는가역시 자주 쓰는 표현이다.

‘-는가현재의 사실에 대한 물음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있다’, ‘없다’, ‘계시다의 어간, 동사 어간 또는 어미 으시’, ‘’, ‘뒤에 붙어 막연한 의문이 있는 채로 그것을 뒤 절의 사실이나 판단과 관련시키는 데 쓰는 연결 어미는가가 아니라 는지이다.

나는 이 도시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이 도시가 내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그 힘이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나는 이 도시의 정체가 무엇인지, 내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이 도시의 힘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았다. (177)

 

점입가경. ‘시작하다역시 즐겨하는 표현이다.

놀람, 슬픔, 어색함, 민망함처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시작과 끝을 명시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작하다를 붙이면 어색하다.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놀랐다.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슬퍼졌다.

 

마음에 들거나 후회하거나 알아채거나 하는 심리적인 변화는 시작하다와 어울리지 않는다.

소개받은 여자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소개받은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벌써 그 일을 한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나는 벌써 그 일을 한 걸 후회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챘다. (185)

 

나는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히도록 한쪽에 소설 같은 이야기를 곁들인 형태로 구성되었다.(10) 각 장 앞부분에는 이메일을 통해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고 물었던 함인주라는 가상의 인물과 물음에 답하는 저자의 답변이 교차로 등장한다. 문장과 문장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신경전 내지는 문장에 대한 정의와 이해, 그리고 오해에 대한 대화가 흥미진진했다. 중간에는 호러적장치도 준비되어 있어 쉽게 놀라는 나 같은 사람은 아주 작게 엄마야!’를 부르기도 했다.

문장의 시선과 내가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나 자신의 거리에 대해, 그들 사이의 긴장감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문장을 생각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었다.

 

나는 여기 있고 내가 가야 할 곳이 저기 빤히 보이는데

나는 왜 저곳에 가지 못하는가. 내가 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아는가? 아니면 모르는가? 안다고 하면 내 의지는

위선이 되고 모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 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죠.

마음으로는 이미 수도 없이 건너가 버린 그 거리를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만 있는 겁니다. ...

문장의 시선은 결국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의지와

당겨지지 않으려는 풍경 사이의 긴장감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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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8-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어서 사봐야겠어요 :-) 서평만 봐도 부끄러워지네여

단발머리 2016-08-25 10:08   좋아요 1 | URL
제가 자주 쓰는 문장들이 자주 나와요. ㅎㅎ
저도 부끄러운 시간을 이겨내야했습니다.
더위도 이겨내야 했는데 ㅠㅠ

다락방 2016-08-25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보고 싶은데 제가 이 책을 샀는지 안샀는지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요 ㅠㅠㅠ

단발머리 2016-08-26 15:4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방에 가서 책장과 책탑을 헤치고 직접 찾아보고 싶은 이 마음~~~~ ㅎㅎㅎ
 

 

 

 

 

 

 

 

 

또 소설을 읽지 않고 소설가의 에세이를 먼저 읽는다. 위화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 했고, 위화의 책으로는 첫번째다. 제일 흥미로운 부분을 옮겨본다.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결심하게 했던.

 

매큐언은 다른 작가들이 자기에게 미친 영향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5, 6주 시간을 들이면 필립 로스를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가 나쁘지 않다면 그다음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에 나는 문학은 마치 길과 같아서, 양쪽 방향으로 모두 향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의 독서 여행은 이언 매큐언을 거쳐 나보코프와 헨리 밀러, 필립 로스 등의 정거장에 이른다. 반대로 나보코프와 헨리 밀러, 필립 로스 등을 거쳐 이언 매큐언의 정거장에 도착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이언 매큐언의 서사가 우리의 독서와 여러 가지로 교차되는 이유다. (121)

 

5, 6주 시간을 들여 필립 로스를 모방하는 게 가능한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필립 로스라는 길을 거쳐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겠다는 매큐언의 말은 한편으로는 결연하고 또 한편으로는 웬지 모를 편안함을 준다. 매큐언이 열어둔 길로 필립 로스에게 갈 수 있고, 필립 로스와 함께 있다 보면 매큐언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다.

위화의 말이 옳다. 문학은 마치 길과 같아, 양쪽 방향으로 모두 향할 수 있다.

매큐언에게서 필립 로스로, 필립 로스에게서 매큐언에게로.

 

<속죄>, <칠드런 액트>, <첫사랑, 마지막 의식>

 

 

 

 

 

 

 

 

<유령 퇴장>, <포트노이의 불평>, <에브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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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08-2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에 관한 책인줄 알고 골랐다가 위화작가의 에피소드가 많아서 잠깐동안 놀랐던 책이에요. 절반정도 읽다가 뒀는데 마저 읽어야겠어요. 책 읽게 만들어주는 책 이었어요~

단발머리 2016-08-25 10:01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절반 정도 읽고 이 페이퍼를 썼어요.
위화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작가소개를 읽어보니 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작가인것 같더라구요.
전 아직 작품을 안 읽어봤지만,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네요. 위화^^

기억의집 2016-08-2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이언 매큐언도 필립 로스도 불편해요. 특히 저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재밌기는 한데, 소설속 장면이 이게 뭐지 하는 게 간혹 있어요. 예로 칠드런 액트 읽는데, 맨 마지막 장면에서 그 청년이 백혈병 재발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 남편이 부인에게 그 아일 사랑했냐고 다그치는 장면에서 이게 뭐지 이랬다니깐요. 저도 나이 사십 후반 좀 있으면 오십 바라보지만, 주인공이 육식 가까이 되는 나이였나 그럴 겁니다.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 나지 않지만, 보통 그 나이에 그 아일 연민으로 바라보지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진 않지 않나요? 그 장면 정말 웃겼어요. 너무 오버해서. 나이가 젊든 늙든 저런 관계조차 사랑으로 보다니, 이언 맥큐언의 남자의 심리가 늙던 젊던 그렇다는 걸 보여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나 싶더라구요. 분명 그 판사가 그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이 맞는데... 이건 뭐지 싶었어요. 제가 읽었던 책중에서 아마 최악의 장면이지 않나 싶습니다.

다락방 2016-08-25 14:32   좋아요 1 | URL
크- 기억의집님께서 말씀하신 그 마지막 장면, 저는 참 좋아했어요. 좋아하고요.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었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연민이 아닌 사랑이 찾아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그 질문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무엇보다 그 아이에 대한 얘길 남편에게 다 했다는 것, 그 얘길 다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이야길 다 듣고 잠드는 아내 곁에 있어주는 남편이라는 게, 그전에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바닥까지 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함께한 시간이 오래된 관계라는 건 다시 이런 식으로 회복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저는 이언 매큐언 소설을 네 권정도 읽었는데, 그 중에 [칠드런 액트]가 제일 좋았어요. 병이 재발하고 다시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에서는 `와 이 아저씨 정말 세구나` 생각했고, 자신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르는 감정에 소년이 집착하는 걸 보면서 `인간이란 정말 너무나 불안정한 존재` 이며 `서투른 연민은 정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구나` 라고도 생각했거든요. 종교와 사회와 개인과 사랑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그 한 권에 썼다고 생각했어요.

단발머리 2016-08-26 16:09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안녕하세요^^

저도 이언 매큐언과 필립 로스가 불편해요. 불편해요. 그런데도 좋아요. 자꾸 끌리고.
저는 제가.... 더 정확하게는 필립 로스에게 매혹되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저를 불편하게 하는 필립 로스를 좋아합니다. ㅎㅎㅎ

제가 어제.... 기억의 집님 댓글을 봤을 때 도서관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게 맞는 건가 책을 찾아 확인해봤어요.

˝입술을 완전히 맺댄 채로 담백한 키스가 가능하다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한순간의 접촉이지만 키스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 어머니가 장성한 아들에게 하는 입맞춤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초 정도, 아니 어쩌면 삼 초 정도의 접촉, 말랑한 입술의 부드러움 안에서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모든 세월, 모든 삶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

저는 피오나가 그 아이에게 가졌던 감정이 연민이 다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연민에 근거한 감정이지만 연민만은 아니었고.... 일부러 피오나가 그 아이를 피하는 과정 전체가 두 사람이 갖게 될지도 모를 관계의 위험성에 대해 미리 감지한게 아니었나...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좀 더 정교하게, 세련되게 그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랬다면 남편의 버럭도 이해될 수 있었을 테고요.
그런 면에서는 저도 최악의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16-08-26 16:19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안녕하시어요~~^^

저는 피오나가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꼭 하지 않아도 됐었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자기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이잖아요... 나쁜.... 그런데도 피오나가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한 건, 피오나가 그 키스의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서로의 삶과 시간을 꿰뚫은 키스라는 걸 피오나는 느꼈던 것 같구요. 남편은 피오나랑 함께한 시간이 기니까, 피오나가 짧게 말했을 때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것 같아요.
당신.... 진짜로 그 애를 사랑했던 거구나.... 그래서 버럭!! 했던 거고요.

저는.... 그 아이도 약간은 느끼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아이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피오나가 연민 이상의 감정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아이는 더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니까 어디까지나 피오나의 반응을 살필수 밖에 없는데,
피오나는 말하지요... 넌 가야돼....

그래서, 자살이라고 생각해요. 피오나처럼 저도, 그 아이는 자살한 거라고 생각해요.
보답받지 못한 사랑의 무게 때문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매큐언의 작품은 <속죄>예요. ㅎㅎ
 

 

  

 

 

 

 

 

 

 

제일 큰 잘못은 휴가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대출한 일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먼저 접한 독자라면 그 둘을 아우르는 흥미로운 프리퀄로 읽는 재미 또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407)

 

 

 

 

 

 

 

 

내가 그런 독자다. 줄리언 반스의 책 중, 이렇게 두 권을 읽었다. 최근에 읽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는 일평생 사랑했던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너무나 애달팠다. 이 책은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죽음에 대한 해석이 좀 더 유쾌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애를 많이 먹었다.

서서히 찾아든 아버지의 죽음, 자기중심적이고 당당한 어머니의 죽음, 가족에 대한 어릴 적 기억들과 철학교수인 형과의 대화, 죽음을 키워드로 수집한(?) 예술가들의 일화와 인용문들이 교차 등장한다. 종교예술 애호가로서 신자들에 대한 부러움과 미래의 인류에 대한 과학적 예측들도 이어진다. (옮긴이의 말, 404)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았지만 그런대도 쉽지는 않았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와 달라서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전망이 너무 암울해서이기도 하고, 일면 그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따라가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구절은 이렇다.

 

라디오에서, 인간 의식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인간의 뇌에도, 컴퓨터상의 뇌에도 중심이 없다(자아가 있는 곳도 없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우리가 영혼이나 혼에 대해 생각하는 개념은 분산된 뉴런의 절차개념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299)

    

당연하지! 틀렸다. (틀려도 이만저만 틀린 게 아니라) 늘 틀렸었다. 그런 데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위협적으로 중대한 것을 지금껏 생각해보지 않았다니 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가. 60억 년 후에 멸종될 존재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를 훨씬 뛰어넘는 어떤 존재, 그렇지 않다 해도 아무튼 우리와는 완연히 다른 존재가 멸종될 것이다. ... 최고의 존재니 가장 똑똑한 존재니 하는 건 잊어버려라. 진화가 모종의 웅대한, 비인간적인,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버전의 우생학이라는 말도 잊어버려라. 진화는 우리를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를 데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진화는 엉성한, 적응하기엔 역부족인 원형인 우리를 저버릴 것이며, 그런 후 우리(와 바흐와 셰익스피어와 아인슈타인)’를 고작 박테리아와 아메바처럼 여기게 될 정도로 까마득하게 다른 새로운 형태들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348)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음-영혼-내세의 문제를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하지 못 하겠다.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고, 분해와 변형의 과정을 거치게 될 육체와 달리 영혼은 불멸의 존재라 믿는다. 물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혼이 속해 있을 특정한 공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세 시대 유럽 사회에서 ’, ‘천국그리고/혹은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일은 모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징벌에 가장 극한 형태가 출교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 믿었고, ‘내세에 대해 확신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21세기, 지금 이 시대에, ‘천국’, 그리고/혹은 지옥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희극적인 일이라 여겨지지 않겠는가.

  

  

 

 

 

 

 

 

 

리처드 도킨스의 생각을 읽자의 설명은 이렇다.

 

왜 모든 인류 문화가 종교를 지니고 있을까? 도킨스는 이것을 바로 (문화유전자)’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 투자하는 유전자만을 선호하는 냉혹한 자연 선택 속에서 너무 낭비적이고 사치스럽고 파괴적인 종교가 살아남은 이유는,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인지 모른다고 말이다. ....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는 연대감과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이점 때문에 종교는 모든 부족에서 각자 다른 형태로 진화해 왔다. (154, 156)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게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인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98)

 

종교는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여러 가지 제도들 중 최고로 정교한 형태라는 뜻일테다.

 

 

 

 

 

 

 

 

책은 도끼다에서 박웅현은 말한다.

그러니까 긴 흐름으로 봤을 때 제가 칠십 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그만큼의 박웅현이라는 객체는 객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수억 년의 흐름에서 칠십 년인 건데요. 끊임없이 이어진 기다란 띠에서 점 하나 찍는 정도도 안 되는 순간을 제가 사는 겁니다. 큰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제 몸뚱이는 잠깐 동안 뭉쳐졌던 덩어리죠. 어느 순간 생겨나서 칠십, 팔십 년 살다가 죽고, 죽으면 썩을 거예요. 땅속에 묻어두면 벌레들이 먹을 거고 누군가의 자양분이 되겠죠. 그러면 나란 실체, 존재는 없어지죠. 이렇게 흩어져버리는 게 죽음이고 이게 큰 기의 흐름이라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가 바로 이 얘기인 것이죠. 그렇게 보면 소유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삶에 의미가 있을 겁니다. (336)

 

아직도 서성이는 사람에게는 역시 도킨스가 쐐기를 박는다.

철 좀 들어라,라는 것이 도킨스의 요지다. 신은 가상의 친구다. 당신은 죽으면 끝인 거다. 어떤 영적 경외감을 느끼고 싶은 거라면 망원경으로 은하수를 찬찬히 관찰하면 된다. 바로 지금 당신은 아이의 만화경을 빛에 비춰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색색의 마름모꼴들이 신이 집어넣은 거라 둘러대고 있는 것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149)

 

그래서, 요약을 해 보자면. 거친 산문을 쓰듯이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뇌는 우리 몸의 다른 부분처럼 고깃 덩어리일 뿐이고, 자아는, 정신은, 영혼은 그 어디에도 없다. 종교란 인간 세계의 결속을 위해 지어낸 가장 세련된 거짓말이며,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철 좀 들어라. 당신은 죽으면 끝인 거다.

사람의 생각이란 쉽게 변하는 게 아니고. 물론 나도 그렇다.

 

불가지론자인 그가 신을 믿지 않음에도 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다. 철학자인 그의 형은 그런 그가 질척하다고 일갈하지만, 그는 자기와 달리 내세를 믿고, 그래서 르 레베일 모르텔’(죽음의 엄존성과 삶의 필멸성에 눈 뜨는 계기)에 시달릴 일 없는 신자들(구체적으로는 기독교도들)을 부러워한다. (옮긴이의 말, 405)

 

질척한 정도가 아니라, 풍덩 빠져 사는 나로서는 크게 반응할 일도 없지만... 다만...

죽으면 모두 끝이라는 이야기,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믿게 된다면, 현재 삶의 의미 없음, 그 끝없는 무의미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기는 하다. 나로 말하자면 생명과 죽음에 대해, 그 시작과 끝, 과정과 결과에 항상 감탄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더욱 솔깃해지는 스타일이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각 정자와 난자의 주인들이 이처럼 무작위하게 서로를 선택하여 한 아이가 탄생하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 아이가 지니게 되는 유전정보의 고유성은 10²²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유함이 곧 여러분들 각 사람이 지닌 정보의 정체성입니다. (정용석, <나는 이미 기적이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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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때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일이 어려워요. 읽고 싶어서 어떤 책을 골랐는데 휴가지에서 읽으면 재미 없어요. ㅎㅎㅎ

단발머리 2016-08-22 21: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는 이번 휴가 때는 책선택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집에서 읽기엔 괜찮았겠지만, 휴가지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네요^^

잠자냥 2016-08-2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스를 좋아해서 신간이 나오자마자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참 진도가 안나가더군요. ㅎㅎ 반스는 국내에서 <예감은...>으로 널리알려졌지만 그의 진면목은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플로베르의 앵무새> <내말 좀 들어봐>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기회되시면 꼭 한번 읽어보세요!

단발머리 2016-08-22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조금 힘들더라구요. 진도가 안 나가서요~~~
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익숙하네요. 읽어보지는 않았구요. 제목만 익숙해요^^
추천하신 다른 책들도 구경해봐야겠어요. 추천 감사해요. ㅎㅎㅎ

icaru 2016-08-2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키워드로 대여섯권의 책을 엮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분 많지 않아요 와!! 짱이어요!!! ㅎ ,, ㅎ
저는 음... 읽은 책 한 권 나와서 반색한 얼굴 하고 있네용

단발머리 2016-08-24 23:36   좋아요 0 | URL
진심으로..... icaru님께 재차 말씀 드리지만 제 방에 자주 좀 오세요~~~~
icaru님 칭찬에 기쁨의 몸이 된 단발머리의 부탁입니다^^
엮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는 없구요. 생각나는 구절만 모아봤어요.
읽으신 책 한 권은 무엇이었을까요? ㅎㅎㅎ
 
팻걸 선언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13
수잔 보트 지음, 김선희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제이미는 뚱뚱한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팻걸(THE Fat Girl)이다.

핫칙스(Hotchix) 매장에서는 맞은편 부인복 매장으로 가보라는 점원들의 차가운 응대와 맞서야 하고, 학교 연극반에서는 서쪽 마녀를 비롯한 모든 악녀를 도맡아한다. 대학입학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장학금을 타기 위해 학교 신문에 <팻걸선언>이라는 새로운 연재기사도 써야 해서 바쁘고 빡센 고3 생활이 눈앞에 선하다.

뭔가를 감추려는 듯한 남자친구 버크를 으르고 협박해서 듣게 된 소식은 변심했다는 말보다 더 청천벽력. 팻보이 남친이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체중 감량을 위해 위 접합수술을 받기로 한 것이다. 뚱보 뚜엣으로 남자친구를 믿고 의지했던 제이미는 버크의 수술을 기다리며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위험한 수술로 버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버크처럼 수술을 받고 싶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뚱뚱하게 살 권리에 대한 <팻걸선언>은 지역신문에도 소개되는 인기를 누리게 되고, 전국 단위의 방송사에서도 인터뷰 요청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차고 야무진 그녀의 주장은 건강의 위협 요소인 비만을 옹호한다는 방송국의 악의적 방송으로 오해를 받게 되고 제이미는 위기에 처한다.

 

선택.

내가 뚱뚱하기로 선택했던가?

아주 어린 소녀 시절부터 평생 비만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했단 말인가?

매일매일, 의식적으로 뚱뚱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무얼 먹을지 선택한단 말인가?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선택에 대해 더 잘 자각하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초래한 파문이 나를 익사시키려 할 때, 투덜거리며 낑낑거리지 않아야 한다. 물살을 더욱 잘 헤쳐 나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은밀하게 선택하는 나 자신을 파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77)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뚱뚱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비만으로 살기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선택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 삶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자신의 선택 때문에 무시당해서는 안 되고, 경멸 받아서도 안 된다. 제이미를 위한답시고 의사들이, 가족들이, 친구들이, 선생님들이 하는 말들은 모두 제이미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이다. 건강을 위해,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 대학 입학을 위해 살을 빼라, 살을 빼려고 노력하라,는 사람들의 말은 제이미에게 가해지는 명백한 폭력이다.

이제는 변해버린 모습, 날씬해진 자신의 모습에만 관심을 갖는 버크에 대해 제이미는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고, 채찍을 휘두르며 서쪽마녀 에블린을 연기하는 그녀를 보러온 히스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한다.

날씬해진 남친 버크, 좋은 냄새 편집부장 히스.

다정한 남친 버크, 매력적인 남자 히스.

사랑해~라고 말하는 남친. 너 정말 멋져~라고 말하는 히스.

제이미의 선택은?

 

키스를 끝낸 뒤에도,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동굴은 하나의 섬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섬에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모든 마감시간과 옳고 그름 따윈 지옥에나 가라지.

이제, 이제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나는 욕을 먹을 거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난 싸가지가 되지 않을 거다. 노노처럼 귀여워질 거다. 프레디처럼 각선미 있는 몸매를 가질 거다. 이상적인 제이미...... 온순하고 부드럽고, 받아들이기 쉬운 사람. (270)

 

이 책은 딸롱이 필독도서 목록에 들어있는 책이다. 필독도서를 찾아서 읽히지는 않았는데, 1년에 40여권 내외의 초등학생과는 달리, 중학생은 1년에 9권 정도라서 찾아서 읽어보라, 독서록도 좀 성의있게 써 보라, 잔소리를 하다가 나도 읽게 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뚱뚱해서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만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팻걸, 부당한 대우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불편한 비행기 여행을 감수하는 팻걸,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팻걸.

그녀는 정말 멋지다.

 

평생 처음, 피곤하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해졌기 때문일지도.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일지도.

히스 때문일지도.

또는 내 선택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내 선택을 믿고 끝까지 가보는 거다.

난 팻걸이니까.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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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8-18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팻걸❤️ 당당하게 살래요~

단발머리 2016-08-18 20:37   좋아요 1 | URL
그대는 팻걸은 아니지만~~~
당당하게 사는게 멋져요~~~ ㅎㅎ

다락방 2016-08-19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제가 읽어야 하는 책이군요!

단발머리 2016-08-19 08:17   좋아요 0 | URL
청소년도서라 주제를 무겁게 다루지도 않았고 통통 튀는 주인공 제이미가 매력적이기는 합니다.
다락방님은 자신이 원하는 걸 아는 멋진 사람이니까 패쑤하셔도 될듯요~~ ㅎㅎㅎ

cyrus 2016-08-1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너무 뚱뚱하다, 너무 말랐다, 다른 사람의 체형 가지고 수군거리고 쓸데없이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ㅠㅠ

단발머리 2016-08-21 22: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해요.
저는 다른 사람 외모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그치만....
급.... 혼자 반성 모드....
 

 

 

 

 

 

 

 

 

  

드디어 입...를 만났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21)

    

얼마나 오랫동안, 선의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질문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결국에는 남자도 차별받는다는 얼토당토없는 주장에, 순순히 대답해 왔던가. 공손하고 바른 태도로 임하려 애썼던가. 행복한 삶 정도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릴 정도로 심각해진 여성 혐오현상 앞에서, 얼마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애썼던가

 

...는 말한다.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이해는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다.

 

그 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은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 밖에 없는 문제는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27)

왜 이렇게 예민해?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래?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라고 말한다. 가해자, 힘 있는 사람들의 말이다. 이게 바로 다른 혐오발언보다 더 위험한 뭘 또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차별은,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구체적으로 조직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여성의 삶을 억압하며 지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차별에 대한 여성의 경험은 쉽게 무시된다. ‘경험의 정당성을 이런 차별을 경험해 보지 않은 남성이 결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아닌데.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데. 요즘 많이 나아졌잖아,는 모두 같은 말이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차별을 받는 집단에서만 나올 수 있다. (49)

 

그렇게 똑같이 혐오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려면, 남성혐오가 생겨나기 이전에 그토록 만연했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과 제재가 있어야 했고, 그것을 재밌다고 소비하거나 묵인 혹은 방관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 있어야 했고, 남성혐오 직전까지 여성들이 수없이 제기해온 온건하고 지적인 비판에 반응을 했어야 합니다. 여성이 더 나은 수를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남성이 저급하고 의미 없는 수에만 반응한 겁니다. (113)

 

이 책의 저자 이민경은 대학에서 불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외대에서 통번역을 전공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이런 훌륭한 책을 출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 일 이후로 자신은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7) 많은 여성들이, 특히 전체 여성들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여성들이, 남자들로부터 사회로부터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 2-30대 젊은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섰다. 여자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당신이 바로 나라고... 포스트잇에 애도의 메시지를 붙이고, 함께 서고, 함께 울었다. 매순간 여성으로서의 삶,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협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혼자만의 것 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한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무지한 남자들의 말에 맞서다 각개전투에 지친 친구들을 보고 그녀는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원치 않는 대화는 애초에 끊어내고, 논쟁을 시작할 땐 기존의 흐름을 바꾸는 것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무례한 말에 지고 싶지 않을 때 통쾌하게 한 방을 먹이고, 기꺼이 대답해주고 싶을 때엔 적절하고 멋진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페미니즘 말하기 실전편으로 말이다.(9

 

  

 

혐오를 혐오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는냐,는 물음에 그녀는 답한다.

여성이 더 나은 수를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남성이 저급하고 의미 없는 수에만 반응한 겁니다. (113)

여성을 향한 온갖 부당한 조롱에 그토록 오래 눈감아 왔으면서, 애초부터 만연했던 조롱의 대상이 자신이 되자마자 치를 떠는 모습이 사실 우습습니다. (114)

 

지난 메갈리아 티셔츠 논쟁 앞에서, 힘없는 계약직 여자 성우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인증사진 하나 올렸다고 벌떼처럼 일어나 그녀를 직장에서 내쫓는, 왕자는 아닌 것이 확실한 찌질한 남성들의 단결된 힘 앞에서, 내놓았던 논평조차 취소하며 원치 않게 정체성이 폭로되어버린 어떤 정당의 실망스런 모습 앞에서, 나는 그냥 정희진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http://m.hani.co.kr/arti/society/women/754513.html)

정확하고 절제된 언어로 말하는 여성주의를 보고 싶다면 정희진을 봐라.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지 않는 우아한 문체를 보고 싶다면 정희진을 봐라. 이민경이 있고 정희진이 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있고 페미니즘의 도전이 있다.

  

 

 

 

 

 

 

 

2005년 출간된 페미니즘의 도전2013년판이 개정판이다. 20167, 독립출판사 봄알람에서 클라우딩 펀딩으로 4000만원이 모금되어 출판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펀딩 참여 독자들과 독립 서점 판매만으로 초판 7000부가 모두 팔렸다. 8월 12일에 구입한 내가 가진 책은 22쇄다. 각개전투의 지원군이 필요한 여성들과 여성이되 남성의 마인드로 살아가는 여성들, 열린 마음으로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기 원하는 남성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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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6-08-16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해는 시키는게 아니라 하는 것이다.
끄덕끄덕!!!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맞아요
모순이지 싶네요!!
또 답답해지네요ㅜㅜ

말복이네요~~여긴 어제 소나기가 내린이후 기온이 좀 내려간 듯합니다??
그래도 죙일 선풍기를 틀고 있었지만요ㅜ
이젠 더위도,답답한 세상도 그만 물러갔음 싶네요^^


단발머리 2016-08-19 08:21   좋아요 0 | URL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해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했는지.. 착하게 성실하게 예의바르게...
그렇게 애쓰고 듣는 한 마디..
내가 보기엔 안 그런것 같은데.... @@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이야기가 제일 솔깃했어요~~~

오늘도 아침부터 덥네요. 15일까지만 더울거라 하더니만 올해 기상청 예보는 완전 청개구리 예보예요~ 개굴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