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다. 어느 경우에서든 쓰기가 읽기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내 마음속 최고의 일타강사 정희진쌤도 진정한 '공부'란 다름 아닌 '쓰기'라 하시지 않으셨던가. 그러나.
어떤 책들은 읽는 것만도 벅차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를 뿐 아니라, 쓰기를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리뷰를, 페이퍼를 쓸 수 없다. 그런 책들을 기억하자면,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등이다. 거기에 이 책 한 권을 더할 수 없어서, 간단하게라도 기록을 남긴다.
나는 비교적 최근에 『왓 이즈 섹스』를 읽었다. 하지만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라는 이 단순한 문장을 쉽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알게 됐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사실, 나의 무지와 내 무지의 확인은 변동될 수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챗GPT를 가끔 이용하는 큰아이에게 말했다. **야, 이거, 걔한테 좀 물어봐. 10초도 안 걸려 찾아낸 해답. 그 결론.
남성과 여성(혹은 두 주체)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완전히 소통하거나 충족될 수 없다. 인간은 상징계(언어와 문화)의 제약 속에서 욕망을 표현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항상 결핍이 남는다.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성적 관계"를 이상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결핍과 욕망의 비대칭성을 감추려는 환상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환상을 통해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환상은 결코 실재계(the Real)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혹은 주체와 주체) 사이에 "완벽한 관계"나 "상호 완전한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관계는 없다.
아, 챗GPT의 문장을 읽고 나니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 것 같애. 그 책을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도 모르겠더니.
이런 나를 슬퍼하며, 이 두꺼운 책을 이어 읽는다. '성관계는 없다', 이렇게 써놓고.
그런데, 그 없다던 성관계가 있단다. 있다고 한다. 없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알겠다 했는데, 있다고. 성관계는 있다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반복하겠다. 신의 여자가 되어, 신에게 안겨, 말씀인 신의 아이를 낳는 것. 즉, "세계"를 낳는 것. 그것이 "여성의 향락=대타자의 향락의 극점이다. "성관계는 있다." 그렇다. "성관계는 없다"란 '이 세계에는 마리아가 없다. 따라서 예수가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다. 한 사회를, 한 정치체를, 한 "세계"를 새로 낳지 않는다. 그래서 "성관계는 없다"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이다.(210쪽)
신의 여자가 되어 세계를 낳는 건 여성의 향락이며 또한 대타자 향락의 극점이다. 이를 사사키는 글쓰기의 향락이라고 부른다.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고, 남성이 종교를 지배하던 시절, 그건 지금도 이어져 오는 시간이기는 한데, 여성이 자신의 향락을 극점으로,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건 바로 '글쓰기'라는 것. 페미니즘 초기 역사에서 '신과의 합입'로 남자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위치, 신의 여자가 되는 위치에 다다른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거다 러너의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일단 잠시 미뤄두고.
나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챕터가 인상 깊었다. 죽음-영혼-영생 류의 생각은 언제나 나의 주된 관심사이다. 죽음과 관련된 책, 그것만으로 승부한 책들을 읽어보아도 '뾰족한' 정답은 없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논증은 이렇게 전개된다. 1) 죽음은 피할 수 없다 2)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건 진정한 죽음이었다기보다는 일시적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경우다. 3)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여 왔다 3.1) 과학적 노력에 의해 조만간 죽음을 피할 방법이 발견될 것이다 (비용은 천문학적 수준이니 당신과는 상관없다) 4)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엥?) 5) 죽음을 받아들여라.
나는 우주에 대한 의문과 삶에 대한 회의, 그리고 인생사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죽음'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외면하고 대면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이란 없다. 하지만, 인문, 교양, 사회심리학 등의 영역에서는 '죽음'을 위의 논증으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물론 과학은 좀 다르게 말한다. 나는 별의 일부, 우주의 먼지로써 치열한 진화의 과정에 등장한 '찰나'의 혼합물이며, 그런 '나'의 의식을 포함한 나의 육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산산이 부서진다. 흔적 없이. 나는 이 책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건 '시체 인형'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완료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부가 아니다. 죽음, 그것에서 폭로되는 것은 너의 진리는 없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나의 죽음"을 지켜보고, 받아들이고, 완수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이다. 내가 죽었는지 여부조차 "이 나"는 모른다. 절대적인 비진리, 비-확실성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이 내가 없는 세계의 "타인"이다. "전부"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은 타인, 죽어가는 내 몸을 끌어안고, 그 시체를 애도하는 타인뿐이다. (231쪽)
너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는 '너'가 아닌 타인이며,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 역시 '너'가 아닌 '타인'이라는 설명이다. 죽음은 내 문제가 아니라, 네 문제다. 죽음은 나의 슬픔이 아닌, 너의 슬픔이며, 나의 한계가 아니고, 바로 너의 한계다. 나는 그 죽음과 '상관'이 없다. 내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을 이미 완수했으므로. 나는 그때 존재하지 않음으로. 그때 등장하는 것이 '시체 인형'이다. 숨, 마지막 숨이 떠나간 뒤, 이 사람, 이 육체는 내가 사랑했던 '그'가 아니다. 시체 인형 속에 갇혀 있는 '그 무언가'는 떠나간다. 그 이후는 '그'는 내가 알던 '그'가 아니다.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쓸려고 했던 거 아닌데, 어쩔 도리가 없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살펴보자. 그녀는 가장 최근에 출간한 소설에서 이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녀(죽은 자)는 어디로 갔지? 그녀는 바로 저기 있었어. 그런데 이제 그녀는 가버렸어.'
AT THREE O'CLOCK that morning Bob was woken by a phone call from Jim. "She's gone," Jim said.
JIM HAD BEEN sitting beside Helen's hospital bed in the living room when he heard her take her last breath. Jim was not aware that he was waiting for any breath at all, but then her breathing stopped. It just stopped. And he was absolutely stunned. He kept staring at her, and her eyes were partly closed, and she did not take another breath. Where was she? She was right there, but she was gone. He could not believe it.(『Tell me Everything』, 139p)
이제, 푸코. 물 한 잔 마시고. 가성비의 측면에서 볼 때, 『감시와 처벌』은 그 어떤 책보다 가성비가 높다. 푸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더라도(나였음) 1독 해봄직 하다고 생각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감시와 처벌』을 중심으로 푸코의 이론을 정리한다. 그걸 더 간단히 정리해 보자.
<제55절 세 가지 풍경>에서 사사키는 『감시와 처벌』이 "주권 권력의 신체형에서 규율 권력에 의한 교정·관리로" 요약된다고 소개한다. 첫 번째 '신체형'은 신체에 직접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주권을 확증한다. 신체형은 의례(483쪽)로서 현장에서 이를 목도하는 민중을 통해 잔인한 의식이 완성된다. 두 번째는 '형벌의 기호학'(489쪽)으로서 죄인의 신체에 영속적인 인쇄(인상)을 새겨넣는다. 이는 '처벌의 기호 기술'로 일컬어지는 '표상'의 처벌로서, 노동형을 통해 완성된다. 세 번째가 '감옥'이다. 이러한 처벌은 기호가 아니라 '훈련'으로 작동한다. 시간표, 일과시간 할당표, 의무적인 운동, 규칙적인 활동, 혼자 하는 명상, 공동 작업, 정숙, 근면, 존경심, 좋은 습관 등의 기술(493쪽)이 "복종하는 주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제일 흥미로운 지점은 503쪽이다. 권력이 시간을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직선적인 시간의 탄생을 가져왔고, 진화, 진보의 시간이 탄생했다고 본다. 이것이 규율 권력의 동일화, 동질화, 균질화를 촉진했고, 감옥의 운영 매커니즘이 학교, 병원, 군대, 공장과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밝혀낸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규율적이다. 그 무기는 규율의 성능, 규율의 효능이다"(521쪽)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자본주의의 무한 자기 계발과 자기 착취의 철학적 근간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그러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이렇게 책 3권을 찜해 둔다. 집에 2권이나 있어서 나도 놀랐다.
푸코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게 된 듯한데, 르장드르나 라캉에 대해서는 아직도 오리무중, 깜깜무소식이다. 110쪽이 남았는데, 다 읽고 나면 쓰지 못할 것 같아 아쉬운 대로 감상을 남겨둔다. 내가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는 그 무엇을 쓰는 이 과정조차 배움의 과정이 될 거라 믿고 싶지만, 그게 항상,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래도 사사키의 이런 문장을 만나서 기뻤다.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예를 들어도 좋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쓴다. 이 막막하고 어떤 결론에 이를지 전혀 모르는 작업, 저 새벽의 작업, 신앙과 무신앙 사이에 있는 저 잿빛 공간의 작업을 그녀는 어찌어찌 마무리하게 된다. 믿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이 자기가 쓴 것이 그 순간 "돌연"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된다. 이를 읽은 타인 또한 당연히 그녀가 이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써 있으니까. 그리고 불현듯, 돌연 그녀는 깨닫게 된다. 어느새 자신도 믿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자기가 쓴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말았음을! (417쪽)
내가 쓴 것을 의심의 여지 없는 신념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내가 믿는 것은 내가 쓴 것,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어찌 마무리했다.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