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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0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이쯤에서 제인 에어가 왜 내 인생의 책인지에 대해 써야겠다.
처음 제인 에어를 읽은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까지도 집에는 그 흔한 세계문학전집 하나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어느 기사에서 진중권이 어렸을 때 ‘강소천 아동 문학 전집’ 읽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남편이 자기도 그거 집에 있었다고 해서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중학교 1학년 봄, 우리 반 반장(언니가 둘)이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아직도 ‘제인 에어’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반장이 깜짝 놀랐다. 진짜야? 야… 너 진짜 그거 아직도 안 읽었어? 그 친구가 책을 빌려다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문고판이라 하기에는 두껍지만, 완역은 아닌 듯한 빨간 표지의 책이었다. 모범생 아니지만 모범생 무늬의 내가, 책상 밑에 책을 펼쳐놓고 이리저리 눈을 굴려 가며 읽었다. 그 때 처음으로 제인 에어를 만났다.
1. 미친 집착의 남주
그전까지는 남녀간의 사랑이 이토록 극명하게 격돌하는 장면을 읽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완전히 그 소설에 사로잡혔는데, 무엇보다 남자주인공 로체스터를 좋아하게 됐다. 한참 연상에, 고집쟁이이며, 거짓말쟁이인 이 로체스터를 말이다.
나는 사랑의 배타적 성격에 대해 긍정하는 편이다. 미친 집착을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에 그러한 측면이 존재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남녀간의 즉 이성애적 낭만적 사랑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예닐곱 명의 사람이 모였다. 이들은 친구 사이일 수도 있고, 알라딘 오프 모임일 수도 있고(진짜요? @@ 거기 어디예요?), 어느 초등학교의 1학년 엄마 모임일 수도 있고, 직장 내 부서회식일 수도 있다. 일곱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을 때도, 빛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기에게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다. 만약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자체발광하고 있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에게로 향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내가 선망하는 그 사람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 내가 선망하는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싶은 열망 자체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러한 열망 이면에는 그 사람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존재한다. 그가 나만 바라봐주기를, 그에게는 나만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말이다.
나는 고집쟁이이고, 거짓말쟁이이며, 막무가내인 로체스터의 내면에 자리한 그런 사랑을 소중히 생각한다. 미친 집착이라는 감정과 행동에서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따라갈 수 없겠지만, 로체스터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미친 집착’이 나는, 좋았다. 중학교 1학년이었다.
2.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여주
하인보다 겨우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 가정교사 제인이 말 그대로 주인님, 사장님, 성주님, 왕자님을 흠모하게 되었다. 천사 같은 외모의 신부와의 결혼을 앞둔 로체스터를 더 이상 눈 앞에서 볼 수 없어 이직을 결심한 제인.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자신의 진로를 이야기하는데, 평소에도 이상한 이 사장님이 돌연 다른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 숀필드를 떠나기로, 로체스터와 영영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던 제인은 로체스터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그에게서 청혼을 받는다. 하지만, 결혼 직전 그들 사이의 진짜 신부, 버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제인은 다시 한번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자, 승낙하라! 그의 비참한 꼴을 생각하라. 그가 직면한 위험을 생각하라. 그가 혼자 남게 되었을 때의 상태를 생각하고 그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성질을 명심하라. 절망에 뒤따르는 무모함을 생각하고, 그를 달래고 구원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너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의 것이 되겠노라고 말하라. 세상에 너를 걱정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너의 행동으로 해를 입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걱정한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존경한다. 나는 하느님이 내려 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 (159쪽)
제인은 숀필드를 탈출한다. 로체스터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빈털털이로 살더라도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숀필드를 걸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No’라고 말했다. 가장 소중한 사랑조차 끝내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켜냈다. 이렇게 강하고 이렇게 다부진 여주인공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겠다.
3. 못생긴…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녜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 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 (32쪽)
여남 주인공의 감정이 폭발하는 이 명장면,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 장면에서 나는 이 단어, ‘못생긴’에 완전히 꽂혔다.
하얀 피부에 예쁘다는 말을 가끔 들었던 나는, 청소년기에 모두 다 한 번쯤 지나간다는 ‘흑역사’의 시대로 진입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흑역사 뒤에는 찬란한 부활의 시간이 존재해야 하는데, 내게는 그런 약속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 미운 오리 새끼임을 알게 됐는데, 백조가 될 운명의 오리 새끼가 아니라, 오리가 될 운명의 오리 새끼라고 할까. 나는 곱슬머리인데 정도가 심해서 어느 미용실에 가든지 원장님들에게서 ‘강력한 곱슬이다’ 혹은 ‘악성 곱슬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세상이 좋아져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24세(처음으로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를 함) 이후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강한 곱슬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그때는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의 매직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나는 단정한 교복을 입고 ‘이상한 나라의 폴’의 버섯돌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한 명의 서글픈 여중생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여드름이 났는데, 엄마 아빠 두 분 모두 여드름 대잔치를 겪으신 분들이라, 나 역시 심한 편에 속했다. 피부과 약이 독하기도 하고 또 자연스레 없어지려니 하는 생각도 있어 따로 치료를 받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은 종종 나의 ‘상태’를 걱정해 주어 내 피부가 얼마나 심한 상태인지를 도리어 내게 알려 주었다. 아, 피부가 이래서 어떡하니. 아, 진짜… 아이고, 아프지는 않아? 돌이켜보면 나는 여자 아이 중에 나보다 여드름이 심한 아이를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는, 내가 극강이었던 셈이다. 여드름 최극강.
몸은 그냥 몸이 아니다. 몸은 내 자아의 경계선이다. 65도의 기울기로 경제가 급성장하던 대한민국의 1980년, 90년대를 어린이와 여자 청소년으로 자라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만족하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거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책 속의 여자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이라는 만능열쇠를, 나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 열쇠가 없다면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인 에어>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예쁘지 않다’는 표현이 ‘예쁘지 않은’ 여자 청소년이었던 내 마음을 아주 강하게 흔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제인과 나를 동일시하지도 못했다. 내가 제인처럼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곳에서는 ‘못생긴’ 여자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내가 좋아했던 책의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예쁘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근깨가 많은 캔디에게는 귀여운 매력이 넘치고, 빨간 머리 앤은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어떤 방식으로든 ‘예쁘지 않은’ 여자 주인공은 제인 에어뿐이었다. 그래서, 소중했다. 예쁘지 않은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아서 기뻤다. 그걸 발견했다는 게 기뻤다.
계속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비겁한 변명입니까?)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만 읽었는데, 너무 슬프고 아프다. 잠자냥님이 리뷰 기대하신다고 했는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슬프고 아프고 안타깝다. 울고 싶다. 우리 집 식구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츠바이크를 싫어하게 됐다. 내가 하도 이야기해서 그렇게 됐다.
이제 진짜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돌아간다. 식탁에 앉아 책을 읽기 전에 가끔씩 핸드크림을 발랐더니 빨간 표면에 손자국이 생겼다. 그래서! 책에 옷을 입혔다. 선물 받은 포장지로 곱게곱게 입혀 드렸다. 읽지 않고 간직만 하려는 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제 진짜 다시 시작. 시작 전에 잠시 브레이크 타임.
여기, 나의 지극정성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