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재생산 유토피아 - 인공자궁과 출생의 미래에 대한 사회적·정치적·윤리적·법적 질문
클레어 혼 지음, 안은미 옮김, 김선혜 감수 / 생각이음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번 페이퍼를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는 '재생산권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전제는 '재생산권을 통제한다' 혹은 '재생산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출산율, 이제는 출생률로 부르고 있는, 재생산 비율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획기적인 대안이 도출되지 않고 있음을 고려하면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는 하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길어야 100년 사는 우리가 고민하는 지구의 미래에 대해 나는 좀 회의적이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더 좋거나 더 나쁜 재생산 후보로 분류하고 서열화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재생산을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부분적으로는 좌파, 진보적 사상가, 선의를 지녔다고 인정되는 개인, 국가 또는 기관이 이행하기만 한다면, 그런 관행은 허용될 수 있고 심지어 유익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념 때문에 우생학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런 발상은 어떻게 아직도 할데인이 상상한 인공 자궁에 대한 잔재가 실현 가능한지,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아가야 체외발생이 화를 재촉하는 데 쓰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시사한다. (109쪽)

폭력으로부터 임신한 사람을 보호해 줄 자원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저 이들의 몸에서 태아를 적출하여 '더 안전한' 장소에서 자라는 편이 더 낫다는 발상은 지극히 충격적이다. 이런 주장은 태어난 어린이와 동등한 권리를 태아에게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임신한 사람이 임신에 최적화되어야 할 '환경'이자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면서 이들의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이런 각각의 주장들은 인공 자궁을 우생학의 실현 도구로 활용하려는 과거의 잔재를 이어간다. (115쪽)

배아에 대한 실험적, 물리적 통제가 14일이었지만, 이제 그 기한은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초극소 미세아에 대한 돌봄 혹은 관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경우, 두 개의 기술은 반드시 결합할 것이다. 의료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인공 자궁에 들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테고, 그 이후에는 '편리함'을 이유로 인공 자궁을 이용해 아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기술의 적용에는 후진이 없다고 생각한다.

뒤쪽을 읽어갈 때는 '조산아'의 인종, 계급, 사는 지역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보건 의료 자원을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에는 임신한 사람, 엄마, 영아들의 건강 불평등이 인종차별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있다. 미국의 경우 임신한 흑인 여성들의 사망률은 임신한 백인 여성들의 3~4배에 이른다. 또 임신 및 출산과 관련하여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신체적 손상이나 합병증으로 후유증을 겪을 확률도 실질적으로 더 높다. 원주민 여성들이 임신이나 출산과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할 위험은 도시에 사는 백인 여성들보다 4.5배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사는 흑인, 하와이 원주민, 미국 본토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아기들은 미숙아로 태어날 위험이 더 크고, 생후 일 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도 더 높다. (144쪽)

적은 비용으로 치료가 가능한데도 건강 불평등 때문에 흑인, 원주민의 아기들이 목숨을 잃는 반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얻어진 최신 과학 기술 덕분에 생명을 '연장'하게 된 백인 아기들이 존재한다. 이는 명백히 자원의 배분과 연관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당연히 서열화일 것이다. 누가 누구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정치를 넘어 문화의 영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용인될 때, 사람들의 잘못된 신념은 구체적인 통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강제적' 평등이 강조되었을 때,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를 막을 수 없게 된다. 로이스 로이는 소설 『기억 전달자』에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sameness'로 치환하려 했을 때, 그러한 강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준다. 요는 '차이'를,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상을 우열로서가 아니라 차이로서 인식하는 것. 인류 문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부분에 재생산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두 아이를 낳아본 입장에서 낳는 것보다 키우는 일이 몇 배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뱃속에 아이를 열 달 넣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을 1인분으로 키워내고, 그 모든 과정에서 가능한(혹은 최대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나 자신을 반추해 나 자신이 먼저 성숙한 인간, 좋은 부모에 가까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부터라고 다락방님이 이야기해 줘서야 알았다. 같이 읽기를 시작했던 그 순간의 대화들도 기억이 또렷한데 7년이나 지났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 선정에서부터 리뷰와 페이퍼 쓰기, 완독 독려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을 이끌어주신 다락방님께 특히 감사드린다. 함께 읽고 함께 쓰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었던 모든 이웃님들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도 배웠다.

완독의 기쁨을 5월 31일, 오늘 이날에 즐겁게 담아둔다.

기술로 만든 장치 안에서 자라는 아기의 경험은 인간의 자궁안에서 겪는 경험과는 어떻게 다를까? 또 우리가 결국 이런 계획을 추진해야 할 이유에 설득되어 동의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미래의 일을 넘겨짚는 대신, 1923년과 케임브리지의 북적북적한 학술모임에서 ‘체외발생‘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짚어보면서 가능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자. - P85

달리 말하면 인공자궁은 ‘우월한 자‘만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오늘과 내일》 시리즈의 다른 저자들도 우생학이 완전히 실현된 미래가 더 나은 미래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 P102

헉슬리가 전체주의와 우생학이 지배하는 체제를 상상한 시기는 나치의 그야말로 극단적인 우생학 정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헉슬리는 영국, 유럽, 북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시행되고 있는 정책과 법률, 관행에서 정보를 얻었다. 이 책이출판된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 인종법Nuremberg RaceLaws으로 홀로코스트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불임화와 분리정책을 정당화할의도로 법규를 통과시켰듯이,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 로마인, LGBTQ, 흑인, 장애인, 혼혈인을 인간 이하로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 법은 이들 중 누구도 ‘아리아‘ 독일인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명시하고 사람들이 결혼 전에 건강적합인증서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각각의 조치들은 미국에서 통과된 법규와 영국 우생학자들의 권고 및 저서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 P110

국가나 기관이 몸 안에 아기를 지니면 안 된다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서 결정한다면, 이것은 우생학이다. 임신한 사람이 알코올이나 마약을 사용했든, 암 치료를 받았든, 학대에 희생되었든, 이런 행동 때문에 임신한 사람의 몸에서 아기를 적출되는 편이 아기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결할 권한이 판사에게 주어진다면, 이것도 우생학적이고 반페미니즘적 관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이 같은 판결을 마주한 사람이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 P12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5-06-02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5월 도서 완독을 축하드리고요 읽고 글까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같이 읽어주셔서 더 감사드리고요. 단발머리 님 덕에 이 같이읽기가 오래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같이읽기를 하게 된다면 꼭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님이 게셔야 힘이 납니다.
감사했어요!!

단발머리 2025-06-03 11:20   좋아요 0 | URL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좋은 책과 알라딘 이웃님들, 그리고 다락방님이 계셔서에요.
안식년 야무지게 잘 보내신 후 또 좋은 계획 있으면 공지해 주세요^^
우리도 더워요, 한국도요 ㅋㅋㅋㅋㅋ치앙마이도 덥겠죠? 땀 많이 내고 오세요!
 
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컴북스 이론총서
박만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을 읽었다.

'문화'에 대한 여러 정의 중, 근대적 사고와 실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에서 시작해, 언어, 문학,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어디까지나 저자 박만준씨가 이해한 '윌리엄스 론'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읽는다.

노동자계급 출신의 윌리엄스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수련의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교수의 자리에 올라서도 한결같이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았다. 당시 영국은 물질문명의 발달과 소비주의가 확산되는 분위기였는데, 윌리엄스는 자신의 지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해석이 사회 현실에 대한 '보고'가 될 수 있도록 좌파적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윌리엄스는 의미를 생산하거나 의미 생산의 근거가 되는 것을 그 주된 기능으로 하는 텍스트나 문화적 행위를 문화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구조주의자들과 후기구조자들이 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실천 행위(sygnifying practive)"와 동일하다(7쪽)

이를 문학이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할 때,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발간한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윌리엄스의 문화유물론적 관점에서 문학은 해석되고 감상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러 관계와 조건들을, 가치와 의미들을 구성하고 만들어 주는 하나의 행위로 존재하게 된다."

고정되고 확정된 형태로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 삶의 관계와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행위로서의 문학. 문학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을 읽는, 감상하는, 작품 밖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작품을 읽을 때, 읽어낼 때, 그 작품을 읽는 과정, 그 작품을 읽어내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가치와 의미들을 구성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읽기가 연대라고 믿어요."라는 정희진쌤의 말씀이 이런 의미라고 나는 이해한다.

윌리엄스의 주요한 주장 중 하나인 헤게모니에 대한 이론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정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헤게모니는 단순히 위로부터 강요되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결과고 저항과 합병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다. 한 마디로 헤게모니는 '사회의 전 과정'으로서의 문화며,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를 통해 그들의 삶 전체를 정의하고 규정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의미와 가치체계는 그 어떤 것이든 헤게모니를 통해 특정 계급의 이해를 표현하거나 투영하게 마련이다. (54쪽)

푸코의 권력에 대한 설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단순히 힘으로 강요되고, 위에서 아래로 강제되는 방식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타협과 저항, 합병, 그리고 일련의 협의의 과정을 통해 헤게모니가 작동한다는 주장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실제 그 계급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지배를 정상적 현실 혹은 상식으로 받아들이도록(52쪽) 하는데, 그것이 바로 헤게모니에 의한 지배를 가리킨다.

사실과 픽션,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이원화는 부르주아적 문학 이론이 글쓰기의 형식을 통제하고 특수화해 왔다는 증거이자 이론적·역사적 단서인 것이다.(80쪽)

사실과 픽션, 객관적인 것의 주관적인 것의 이원화, 이러한 부르주아적 글쓰기 행태에 대항하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은 페미니즘 글쓰기에서 유독 도드라진다. 마리 루티의 책에서 정확한 문장과 표현을 찾아내려 기억을 더듬어 루티의 책 두 권을 뒤져 보았으나,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읽고 있는 책 『재생산 유토피아』는 이원화 글쓰기의 반대 예가 될 수 있겠다. 체외수정에서부터 시작해 '인공 자궁'의 완벽한 실현이 다가오고 있는 즈음에, 지금까지 '부분 인공 자궁'의 역사를 살펴보고, 기술 발전과 나란히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쓴 책인데, 임신하고 있는 저자의 상태와 맞물리면서 '태아와 산모의 상호작용',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잘 어우러져 있다. 이론과 실제의 이상적 결합, 객관성과 주관성의 치열한 경합을 다룬 글쓰기의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에 없는 책이라 구입해서 읽었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라 몇 시간 만에 읽었는데, 내용 자체가 흥미로워 재미있게 읽었다. 스물셋에 읽었던 윌리엄스와 그의 이론, 특히 토대와 상부구조와 관련해 마르크스를 인용한 부분이 아직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나는 아직 어리고, 아직 철들지 않았으며, 생각보다 많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나를 빼고, 이 책만 두고 이야기할 때, 좋은 책이었고, 좋은 읽기의 시간이었음은 확실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언어는 물질적이며, 사회적 관계로서 표현되는 물질적 생산의 인간적 양식은 처음부터 언어라는 실천적 의식을 필연적 요소로 내포하고 있다. 세계와 세계를 이야기하는 언어를 분리하거나 실재와 의식을 분리해 버리면 언어의 물질성은 단지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될 뿐 결코 물질적인 행위로 파악될 수 없다. - P16

윌리엄스에 의하면, 공통 문화는 아무도 상속할 수 없으며 인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야만 한다. 공통 문화의 토대는 평등한 사회이며, 윌리엄스가 성취하려 한 유일한 평등은 존재의 평등이다. - P24

한마디로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학과 전체적인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를 화해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 혹은 창조적 문학 생산과 현실 사회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불가피하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 P25

각각의 생산양식은 생필품을 획득하는 방식이 다르고, 노동자와 생산양식을 통제하는 자들 간의 관계가 다르며, 문화제도를 포함한 특수한 제도가 다르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생산양식이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 P4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5-27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대, 상부구조, 헤게모니 너무 오랫만에 읽는 단어들. 그냥 오래전에 눈이 닳도록 봐서인지 왠지 정겹고 고향에 온 듯한 그런 리뷰입니다. ^^아직 어리고 철들지 않은 인간 여기도 한명 있어요. ^^

단발머리 2025-05-27 20:49   좋아요 1 | URL
옛 추억에 빠져들게 하는 리뷰라니.... 바람돌이님, 격정의 20대를 보내셨던 것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윌리엄스 배웠던 그 학기의 그 책이, 정확히는 교재죠. 아직도 있습니다. 책 많이 버렸는데 못 버리겠더라구요. 한 페이지 옮겨 적고 싶었는데 귀찮니즘 발동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리고 철들지 않은 우리 모든 어린이들~~ 오늘밤도 평안하시길!!

수이 2025-05-27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의 리뷰로 선정하겠습니다. 제일 공감 가는 부분은 역시 마지막 태그 두개 :)

단발머리 2025-05-27 20:49   좋아요 0 | URL
애정어린 선정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아직 철들지 않은 저를 부디 어여삐 여기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님, 굿나잇!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 1월 6일은 미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혼돈의 상황을 화면으로 접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제46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증하기 위한 117차 미국 의회를 저지하기 위해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 의사당에 난입, 국회 의사당을 짓밟았다. 많은 의원들의 사무실이 폭도들의 침략으로 약탈, 파괴되었고, 트럼프에 반대하던 민주당과 공화당의 유명 정치인들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하지만, 폭력 사태 이후에도 공화당은 이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옹호했고, 공화당은 트럼프를 중심으로 더 결속하는 양상을 보였다.

2021년 1월 6일, 전대미문의 폭력 사태는 1934년 2월 6일,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폭도들의 국회 의사당 습격 사건과 유사하다.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쳐 있던 재향군인회, 우파 민병대, 청년 애국단 등의 폭도들은 국회 의사당을 부수고, 의원들을 협박했다. 많은 프랑스 정치인들이 2월 6일의 폭동에 분노를 표하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주류 보수주의자들 일부가 폭력 사건을 옹호하고, 폭도들을 공화국을 구하려 했던 영웅적인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이런 폭도들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다. 1934년 2월 6일 폭동 직후, 그리고 2021년 1월 6일 폭동 이후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구별이 가능해졌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묵인, 방조하고, 그들의 폭력 행위에 동조했다. 주류 중도 우파 정당을 표방했던 공화당 의원들 다수가 트럼프의 등장 이후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공화당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암시가 되고 말았다.

4년의 공백기를 보내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럼프의 공화당은 현재의 정치 제도를 백분 활용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확장하고 있다. '정치적 소수가 계속해서 거대 다수를 이기거나 정책을 강요하는(247쪽)' 상황은 미국의 독특한 정치 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건국 당시 지역 엘리트 사이의 이해관계에 근거해 인구가 적은 주들은 여러 가지 이익을 보장받았고, 인구수가 적은 주와 많은 주 사이의 불균형, 그동안 진행되어온 도시화로 인해 현재는 인구수가 적은 주들이 지나치게 커진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로는 선거인단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선거인단 제도의 '승자 독식 시스템'과 '작은 주 편향'으로 인해, 2016년 선거에서 미국의 민주당은 보통선거에서 더 많은 수를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배함으로써 공화당에게 승리를 빼앗겼다. 패자가 이긴 것이다(254쪽). 소수 지배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상원 제도'를 들 수 있다. 민주당은 1996~2002년 전국 보통선거에서 과반의 표를 얻었지만, 인구수가 적은 주, 시골의 작은 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공화당의 상원 장악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의 상원이 미국 인구 다수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수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통선거에서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들이 다수 여론과는 반대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지배하는 상태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건국과 이후의 재건 시대 동안 '다수결주의와 반다수결주의'의 대립 상황에서 소수의 권리가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숫자의 게임(248쪽)이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쪽이 더 많은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하다. 건국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민주적인 헌법 체계를 갖췄던 미국의 헌법에서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인다. 그 핵심은 '3/5 타협안'과 '상원 시스템'이다. 즉, 노예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남부 주들의 의회 의석이 확대되고, 모든 주가 정치 시스템 안에서 평등한 대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 국민들의 지지와 투표권 행사가 정치 현장에 투명하게 반영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많은 수의 미국 건국자들은 주들 간 평등한 대표라는 개념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다. 주를 구성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영토가 아니라 인간'이라 주장했던 해밀턴은 모든 주에게 평등한 대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이 '다수에 의한 지배'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1세기 현재에도,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그의 염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떤 현실이 우리의 현재인가.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어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내란 또는 외환의 경우 합법적인 절차인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통해 탄핵이 가능하다. 2024년 12월 3일. 불법적인 계엄령 선포,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국회 봉쇄와 야권 주요 인사 및 언론인들에 대한 암살 및 살해를 지시했던 대통령과 일부 국무의원의 행태에 대해 여당은 '줄탄핵에 대한 경고성 계엄'일뿐이라며 애써 그들을 비호했다.

꺼질 듯한 민주주의의 불꽃을 다시 살려낸 건 시민들이었다. 잠옷에 패딩, 슬리퍼를 신고 집을 뛰쳐나가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였던 사람들. 패딩에 방석, 얇은 은박지를 덮어쓰고 '내란 종식'을 외쳤던 사람들. 멀리 살고 있어 집회 현장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김밥을, 커피를, 국밥을 선결제한 사람들. 아이돌 콘서트장에서 흔들던 형형색의 응원봉을 흔들며, '다시 만날 세계'를 부르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고, 이 나라의 주인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지배, 다수에 의한 민주적 통치가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둠을 비추는 촛불 하나 하나가 정권 교체와 정치 세력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투표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국민 주권과 헌법 수호 정신이 광장의 구호를 넘어 우리의 현실이라 꿈꿀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 다수의 대의가, 더 많은 국민의 뜻이 선거와 투표라는 정치 참여를 통해 반영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의 알맹이 없는 합의와 법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한가한 말장난, 자신의 이익에만 함몰되어 있는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오직 않는다. 민주주의는 사람에게서 온다. 연대하는 시민들의 응집된 힘을 통해서 온다. 국민, 오직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통해서만 온다. 추운 겨울의 매선 바람을 밀어내는 새봄의 따뜻한 햇살처럼 온다. 환하게 온다. 어김없이 온다. 그렇게 온다, 우리에게로.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5-06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06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5-05-19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05-19 21:39   좋아요 0 | URL
크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 부끄럽군요. 축하 인사 감사해요, 건수하님! 🥰

2025-05-20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0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0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0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5-05-20 0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라면 대놓고 자랑했을텐데 겸손한 단발머리 님.. ♡.♡

단발머리 2025-05-20 08:5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그건 아니지만.. 사실, 저 아직 엄마한테도 말 안 했음요 ㅋㅋㅋㅋㅋ대신 일기장에 썼어요. 프로 2등러의 삶이란ㅋㅋㅋㅋ
 
젠더와 역사의 정치 딕테 시리즈 3
조앤 스콧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례대로 읽었기 때문에 옮긴이 후기를 맨 마지막에 읽었는데, 먼저 읽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의 문제를 역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성별 체계와 이를 둘러싼 지식의 구조 자체의 변화 과정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380쪽)

남성과 여성의 노동 정체성 확립 과정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대부분 봉제사였던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는 명확히 '임금 소득'이었던데 반해, 남성 노동자들, 남성복 재봉사들의 요구는 숙련 기술에 기반한 집단적 정체성(195쪽)의 확정이 중요했다. 이는 단순 임금노동자, 즉 여성 봉제사들을 배제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

가정에서 일하는 경우에라도 남성들은 노동자로 호명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성들의 가정 내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에 더해 남성 임금과 여성 임금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남성들에게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되는 '가격'에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남성의 임금에는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태생적 의존자'인 아이와 아내의 생계비가 포함(254쪽)되어 있었지만, 여성의 임금은 생활에 턱없이 부족한 정도여서 다른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미혼 여성은 도덕적 비난과 성적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일하는' 여성에 대한 고의적인 저임금 정책 때문이었다.

여성의 가정 내 부불 노동, 재생산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상태로 '무한 공급'될 것을 요청받으며, 사회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저임금의 현실에 내몰리기 쉬웠다. 이제 여성도 남성처럼 고소득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남성들이 '사적 영역'으로 과감하게 진출하지 않는 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중, 삼중 노동을 의미할 뿐이다.

'여성'이 당당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와중에, 나는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일'에 대해, '노동'에 대해 생각했다.

여성은 '사실상 노동자'다. 인류 역사 내내 여성들은 일해 왔다. 남성들은 일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도 남성만큼 일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성의 가정 내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기에 '일'로 인정받지 못했고, 여성이 '사회'에서 일하는 것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제 여성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적인 영역은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어 여성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난 형국이다.

'일'에 대한 낭만화를 거부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마리아 달라 코스타의 말을 빌려보자.

우리가 원하는 건 공동 급식소도, 그와 같은 종류의 놀이 시설이나 어린이집도 아니라는 점을 그들이 알기 바란다. 우리는 공동 급식소, 어린이집, 세탁기, 식기세척기를 원하지만, 몇몇 사람들과 원할 때 방해받지 않고 식사할 수 있는 선택권, 아이·노인·환자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선택권도 갖고 싶다.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건, 노동을 줄이는 것을 뜻한다. 아이·노인·환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이들을 잠시 맡겨둔 차고로 뛰어가 잠깐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가장 먼저 배제 당한 우리 여성들이 투쟁을 주도하여 다른 모든 배제 당한 이들, 즉 아이, 노인, 환자가 사회적 부를 재점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의 투쟁』, 45쪽)

우리가 '일'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른 정의를 포함시킨다면, 돈을 버는 것만이 '일'이 아니고, '일', '노동'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가 '생산성'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로봇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물리적' 일들을 훨씬 더 빠르게,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다. 로봇은 이미 인간이 하던 노동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고 있으며, 대체 가능한 노동을 제공하는 인간은 앞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상을 그려봐야 한다. 이를테면.


노래하는 인간.

춤추는 인간.

이야기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

듣는 인간.

돌보는 인간.

책 읽는 인간.

소리 내어 책 읽는 인간.

그리고

노는 인간.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25-03-3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맞은듯 마지막 문장 🙃 억

단발머리 2025-03-31 17: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그래여? 다른 인간상을 그려보자고요! ☺️😆🤗

수이 2025-03-31 18:20   좋아요 1 | URL
노래보단 춤으로 가볼까 했으나 고관절이…… 🥺

단발머리 2025-03-31 19:41   좋아요 0 | URL
춤 괜찮죠~~ 각종 댄스 환영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5-04-0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04-01 1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햇살과함께님~~
4월 4일 11시 헌재가 선고한대요! 🎉🎊🥳

햇살과함께 2025-04-01 11:04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저도 방금 봤어요 제발!!

단발머리 2025-04-01 11:05   좋아요 1 | URL
국민의 염원이 드디어 통했네요!
좋은 결과 나올거라 믿습니다! 🙏

책읽는나무 2025-04-01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동 부분을 읽었을 때…오래 전 여성의 노동의 대가와 처우가 억울할 정도여서 그나마 내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 있는 게 감사한 일이구나! 싶다가도 그래도 지금 세상도 그닥?! 그런 생각을 했죠. 늘 답답한 부분들이에요. 이제 정권이 교체된다면 좀 바뀌려나요?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봅니다. 저는 요즘 너무 괴팍하고 심술이 늘어 ‘좋은 인간‘ 그런 거 좀 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ㅋㅋㅋ

단발머리 2025-04-01 22:31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딱 책나무님 표현이 맞아요, 답답한 부분이요.
저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욕하면서 임금은 정당하게 주지 않고, 그렇게 매춘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그 여성들을 비도덕적이라고 욕하고... 그런 상황들이 너무 암담하더라구요.
지금 완전히 좋아진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진 면이 있다고는 생각해요.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책나무님 다정하고 친절하신 분인데 심술이 느셨다고 하니 제가 믿을 수는 없지만.... 이미 ‘좋은 분‘이세요, 책나무님!!

독서괭 2025-04-03 1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노는 인간 할래요.. 놀다가 가끔 책 읽는 인간 ㅋㅋㅋㅋ
˝남성들에게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되는 ‘가격‘에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포함˝ 되어 있다는 거, 너무 열받더라고요!
늦었지만 완독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04-05 10:24   좋아요 1 | URL
노는 인간에 도착하신 3번째 분이십니다. 일단 제가 글 쓰면서 노는 인간 ㅋㅋㅋㅋㅋ 두번째는 마지막 문장에 칼 맞으신 분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우리 독서괭님~~~

저는 저.... 문장.... 말했을 때 제 친구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놀라더라구요, 무척....
완독 축하 감사합니다. 이제 홀가분하게 4월 책으로 고고!
 
친밀한 착취 : 돌봄노동
알바 갓비 지음,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제적 이성애와 무성애의 섬 (feat. 수하님)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27166)

[젠더 트러블] 젠더는 반복된 일단의 행위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808169)

이성애와 성 범주와 관련해 이 글과 연관이 있는 예전 글의 링크를 올려둔다. 먼댓글이 없어져서 많이 아쉽다.

평소에는 자주 못 만나던 교회의 구역 식구들이 연말에 한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착하고 순한 엄마들 중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야무진 집사님 1인이 그러는 거다. 아침에 아이들 깨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10분만, 5분만. 딱! 5분만. 5분 뒤를, 그리고 10분 뒤를 말할 때, 그 시간에 맞춰 아이를 깨워야 하는 사람인 나는, 그 시간 동안 '대기'할 수밖에 없고. 대기하는 동안 내 시간은, 그렇게 그냥 흘러가 버리니, 그렇게 잃어버린 내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 그녀의 토로였다. 어느 집이든, 어느 집의 엄마든 겪어내는 일이기에 모두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 맞아요, 진짜! 진짜 그래요. '엄마, 나 5분 뒤에 깨워줘요!'의 상황이 이 책이 말하는 바로 그 '상황', 그 situation이다.

아침에 제시간에 착실히 일어나 작업장으로 착착 걸어 들어가는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가장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맡는다. 전통적인 핵가족 모델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중산층에 속하는 백인 여성은 돌봄노동을 주로 맡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여성의 일'로 여겨진다. 돌봄노동의 핵심은 '감정노동'일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인정을 원하는 우리의 정서 욕구를 채우는 데 무임금 재생산 노동이 필수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무임금 재생산 노동은 개별화된 욕구 충족을 통해 개개인의 차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한없이 복잡하다. (100쪽)


나는 인간이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그런 시도 자체가 모순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입속으로 무언가를 넣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에게 생존을 의탁한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 식물'만이 올곧이 존엄하고 완벽한 자존이 가능하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출생 직후 극도로 유약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신생아 뿐만 아니라, 성인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얻는 정서적 지지, 정서적 도움이 생존에 필요하다. 생필품이라 할 만한 것들은 국가의 범위를 넘어 다른 국가의 사람들,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통해 얻어진다. 아침에 먹은 바나나는 스미후루 감숙왕 바나나.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이다.


요는 이러한 도움, 이러한 돌봄이 여성의 것, 여성'만'의 것으로 강제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있다. 그것이 왜 여성의 일인가. 왜 여성만의 일인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곧 여성만의 영역이었던 출산에서 여성은 비로소 탈출하게 될 것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예언했던 바로 그 해방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출산은 여성, 가임기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출산을 제외하고 다른 영역에 있어서 여성이 할 수 없는, 즉 남성에게 가능하고 여성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여성이 할 수 있는데 남성이 할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없다.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 아이 목욕시키기와 밥 먹이기, '어린이집 데려다주기'와 '자전거 뒤쪽 잡아주기'의 어느 지점이 '여성적'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건 '여성의 성역할'로서의 돌봄노동을 의미한다. 이를 '여성적'인 일로 규정함으로써 남성 집단 전체가 받게 된 이익, 남성으로써 누리는 특권에 대한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면 이제는 이런 인식이 상식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 압력과 문화의 이름으로 '여성적인 일'에 복무한다. 복무할 것을 요청받는다. 요청받은 수행을 반복한다. 평생에 걸쳐.

이 지점에서 이성애 로맨스가 중요하다.

여기에 이성애 로맨스와 가정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홍보가 따랐다. 이성애 결혼이 곧 좋은 삶이 되었고, 모두가 핵가족이라는 규범적 재생산 제도를 원하는 듯 보인다. 이성애는 무임금 노동의 자연화다. 이성애를 통해, 젠더화된 노동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며 좋은 것이 된다. 로맨스 이데올로기는 감정노동을 일이 아니라 보상으로 보이게 한다. (120쪽)


왜, 왜 이성애가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는가. 될 수 있는가. 여성이 남성을,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잠깐. 누가 여성인가? 누가. 누가 남성인가. '누가' 남성이 될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여성'이라고 혹은 '남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모니크 위티그가 주장한대로, "성 범주는 남성이 여성의 재생산과 생산을, 결혼 계약으로 실제 여성 개인을 전유하는 이성애 사회의 생산물이다(<스트레이트 마인드>, 51쪽) 즉, 일방을 남성으로, 다른 한쪽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인간의 성을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 한정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인위적으로 범주화된 두 종의 인간,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고, 이성애만을 긍정하며, 또한 이성애 결혼을 권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공고화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젠더 관계를 이념적으로 재정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던 “여성 논쟁”에서는 두 개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 첫째로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형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 지은 새로운 문화적 규준이 구축되었다. 둘째로 여성은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욕망이 넘치며 자기통제능력이 부족한 만큼 선천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의 통제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명제가 확립되었다. (『캘리번과 마녀』, 164쪽)




They call it love.

사랑이라 부르며 요구되는 착취 속에 여성들은, 대부분의 여성은 이 명령을 내재화했다. 자신을 희생하라는 요구, 규범적 여성성의 핵심적 요구에 부응했다. 오랜 기간 그것이 여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를 거부한 여성은 폭행당했고, 살해당했고, 미친년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가 온다.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순응하기를 거절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재생산을 거부하는(182쪽), 자주적으로 살기로 결정한 새로운 세대가 온다.


돌봄 노동에 관한 부분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 다루어야 하는 기본 전제를 정연하게 정리한 책이어서 1독을 권한다. 논의는 돌봄 노동 거부를 넘어 가족 해체까지 나아가는데, 4인 핵가족의 한 사람이며, 정형화된 삶의 규준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가족', 다른 '공동체', 다른 '그 무엇'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에 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표지에 속으면 안 되는데, 읽다 보면 사실 이렇게나 예쁜 분홍분홍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니, 우리가 요구받는 그 무엇, 친밀함과 다정함, 그리고 사랑이 이렇게 분홍분홍한 것은 사실이니, 그런 측면에서 제대로 된 선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책, 실비아 페데리치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페데리치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좋은 모델이자 레퍼런스가 된다는 건 신나는 일일 것 같다. 페데리치님, 그거 아세요? 알바 갓비가 페데리치님 좋아한대요. 분홍분홍하대요!





즉 노동 행위가 주체를 존재하게 한다. 주체는 기억, 욕망, 습관을 통해 안정된 실체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어떤 유형의 노동을 능숙하게 반복하면서 내면화된다. 주체는 사회적으로 성립된 자아를 사회보다 앞선 진정한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감정노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 P45

이성애는 재생산 노동의 자연화고, 재생산 노동에는 자본주의의 자연화가 따른다. 페미니스트는 이런 자연화에 도전해야 한다. - P125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맞서 투쟁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본과 국가의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지속적으로 늘 리는 주거와 보육 서비스의 무상 지원같이 새로운 사회적 욕구를 만드는 것이다. - P130

사회학자 디무트 엘리자베트 부벡DiemutElisabet Bubeck이 말하듯, 모든 여성은 직접 착취당하지 않아도 젠더에 기초한 착취에 취약하다. 이성애 제도는 자본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이로운 방식으로 착취한다. - P141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 노동은 자주적 주체성과 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이런 유형의 노동이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보다는 그러한 욕구가 노동 주체를 순응시키는 힘이된다. 따라서 자주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재생산 노동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 P182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5-03-1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자본주의에 찌들어 살고 있지만 그러나 자본주의가 무찔러야 할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우리 여성들이 고통스러운건 자본주의 탓이다. 이성애 역시 자본주의가 강제했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걸 어떻게 쳐부수지? 이러다보면 다시 굴레에 빠지게 되고.. 여하튼 자본주의 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책을 읽기를 매우 좋아하는바, 이 책도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제목이 좀 음... 저같은 꼴페미에겐 순하게 느껴졌거든요. 이미 다 아는, 속터지는 내용일 것 같다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면 매운맛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도전합니다!!

단발머리 2025-03-13 15:2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에 공감됩니다. 결론은 자본주의로 가는데 이걸 이길 힘이 우리 문화에, 우리 시대에 가능할까 생각할 때 저는.... 불가능하다 쪽이거든요. 근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현재에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파국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매운맛이긴 한데, 우리가 전에 읽었던 책들(페데리치, 달라코스타, 크리스틴 델피)이 있어서 그래도 잘 넘어갑니다.
도전은 항상 환영이구요!

다락방 2025-03-12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이 글의 도입부에 교회 집사님 얘기요, 아이들을 5분후에 깨워주고 또 깨워주는 일. 이것 자체는 사실 어느 집에서나 일어나는 일상이잖아요. 그런데 ‘그렇다면 아이를 깨워야 하는, 대기하는 나의 그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나‘ 에 대해서는 제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서, 그 부분에 대해 큰 깨달음 얻고 갑니다. 아마 저는 누군가를 깨워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 식의 생각은 마땅히 언젠가 나와야할 것이었고, 그 집사님께 베티 프리단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어쩐지 잘 맞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3-13 15:29   좋아요 0 | URL
그 집사님은 전업주부의 이상이며 소임(?)으로 여겨지는 자녀 교육에서 ‘세속적‘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시고 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자기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아주 잘하던 분이라 다시 공부하는데도 잘하시더라구요.(부럽네욬ㅋㅋㅋㅋㅋㅋㅋ)
베티 프리단 좋은 선택이네요. 책을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신데 독서 모임도 하시고 그러거든요^^

수이 2025-03-12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182쪽 문장들 소리내어 방금 읽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이혼한 까닭에 접해서 다시 읽어보았고 지금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읽어보았어요. 저는 한 번도 그런 투사로 살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주입받은 그대로 충실한 이성애에 사로잡혀 멋진 왕자랑 비스무리한 경제력 있고 근사한 남자와 가정을 이루면서 알콩달콩 펭귄새끼들보다 더 어여쁜 새끼들을 내 품 안에서 온전하게 보다듬으면서 따뜻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었던 거 같아요. 물론 이게 시나리오대로 딱딱 갈 수가 없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건 구남편 덕분이긴 하지만요. 동시에 저게 내 욕망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아 내 시나리오대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걸 정확히 알았고 어떤 욕망의 결로 흐르건 간에 돌봄노동과 주체성을 병합시키도록 하자. 이대로 살다간 미쳐 죽건 속터져 죽건 둘 중 하나다 그렇게 일단 내질렀던 거 같아요.

단발머리 2025-03-13 15:32   좋아요 0 | URL
저는 모든 사람이 투사로 살아야한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요. 일단 제가 투사가 될 기질이 약한 사람이고요. 소시민적 이상을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우리가 내내 읽는 페미니즘의 교훈은... 그런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건데, 설사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그 억압과 무게를 감당하는 여성은 많지 않으니까요.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 같은 분투의 시간이 필요하죠.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수이 2025-03-12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비아 페데리치 언니도 그렇고 알바 갓비도 그러하긴 한데 저는 완독 후 좀 더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혀서 아 내 한계는 여기까지로구나 그걸 명확하게 알았어요. 돌봄노동에 사로잡혀 정신 없이 살아가는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가까이 하게 되면서 더 주체성과 돌봄노동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됐고 여자가 아무리 똑똑해봤자 결국 한국 여성의 삶은 정해져 있는 거 같아, 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또 곰곰. 어딘가에 해방의 길이 있으리라는 건 알겠는데 이걸 병행해가는 여성들(물론 돌봄노동하는 남성들도 마찬가지고)이 만족할 수 있는 때가 다다르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를 후_일 거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결국 욕망의 결이 아닐까 싶어요. 둘 다 운 좋게 해나가리라 여겼는데 그 친구(유학간 친구)도 그렇고 지난 제 삶을 봐도 그렇고. 지금 카페에 말린 장미 다발이 데코로 놓여져 있는데 말린 장미로 살아가고픈 이들은 아무도 없겠죠. 17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를 낳아 키웠고 그것만 따지고들어도 아쉬울 건 없는데 17년 동안 말린 장미로 집 안에서 살았던 거 같아요.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 싶어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단발머리 2025-03-13 15:41   좋아요 1 | URL
해방의 길이 생각보다 멀리, 저기 저 길 끝, 골목 돌아가면 나오죠. 나이가 40대는 지나서야...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서. 지난 일을 후회하는 건 의미 없지만, 사무치는 후회와 원망과 회한이 없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테고요.

한편으로 저는... 전업 주부 엄마에게 요구되는 그 무게. 아이의 공부와 진로와 관련된 압박(이 책에 소개된 감정노동, 즉 다정함으로 아이를 다독이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하는 것)이 상당하니까요.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대치맘의 라이딩 생활 같은 거요. 오늘 기사에는 어떤 연예인이 아이 사교육비를 공개했는데(물론 어마무시한 금액) 사람들 반응이 또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고요. 이런 것들을 엄마들에게 요구하면서, 자유롭게 살아라, 제 자신을 찾아라,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요.
이건 전교 1등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 아닌가 말입니다. 공부에, 예체능에, 아이 체력도, 아이 교우 관계까지 관리할 것을 ‘요구‘하면서 ‘너 자신을 살아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가능하냐고요. 우주 최강 슈퍼맘이라도 힘들겠단 말입니다.

2025-03-12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