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신주를 처음 만난 날
[@좌절, 열공] - 우리 시대 멘토 9인이 전하는 좌절 극복과 진짜 공부 이야기
2012년 1월,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우리 시대 멘토, 정확히는 진보적인 성향의 멘토 9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싶은 생각은 당초에 없었고, 나는 '조국 교수님'이 쓰신 부분이 읽고 싶어 이 책을 대출했다. 시작은 '조국'이었으나, 치유의 심리학자 정혜신 교수의 이야기, 만화를 못 그려 좌절한다는 만화가 강풀의 이야기, 타워크레인의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마음에 와 닿았다. 현재를 뜨겁게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 열기를 전해주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동양철학자'라 소개된 강신주의 글을 읽게 되었다.
철학 뿐만 아니라 시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사랑해야만 하는 나 자신, '나의 온몸'입니다. 며느리의 몸이 아니라 바로 나, 절대적인 나입니다.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여러분 자신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올해 핀 벚꽃은 작년의 핀 벚꽃이 아닙니다. 나는 여자고 나는 며느리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겪어야 될 것, 이겨야 될 것, 행복해야 될 것을 여러분이 찾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주시지 않습니다. (188쪽)
책 속의 글자가 튀어나와, 나를 확 밀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급하게 책을 덮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난 뒤, 조심스레 책을 다시 펴 이 부분을 읽었다.
"여러분이 겪어야 될 것, 이겨야 될 것, 행복해야 될 것을 여러분이 찾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주시지 않습니다."
나는 모범생이었다. 정해진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난 가출한 적이 없고, 엄마 아빠와 크게 다툰적이 없다. 성적이 지난번보다 떨어졌다고 아니면 지난 번에 비해 조금 밖에 오르지 않았다고, 55명 전원을 혼내시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혼난 일을 제외하고는 선생님들께 혼난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나는 모범생이었다. 삼위일체 모범생, 쓰리쿠션 범생이.
대학생활도 무난했다. 1학년 때, '정권타도' 데모 종로에서 한 번 참가했을 뿐이고, 4학년 때 학교 축제 불꽃놀이 신고 늦게했다고 관할 경찰서 경찰관 아저씨 한 번 만난 일, 그것 빼고는 난 얌전하고, 착한 예의 여대생이었다.
회사에서도 처음에는 일을 잘~~하지는 못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다른 사람만큼은 해냈다.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몫은 해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새로운 가족 관계가 편성되었다. 난 어디서나 모범생이었고(삼위일체와 쓰리쿠션), 칭찬을 먹고 사는 바른 생활 소녀였는데, 결혼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식 날 내 신부 화장이 너무 연했던 것도, 내 키가 너무 큰 것도, 내가 채시라처럼 생기지 않은 것도 모두 못마땅해하셨다. 나는 당황했다. 나는 어디서나 칭찬 받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어디서나 모범생이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이런 대우를 받고 있나.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그 다음엔 억울했다. 신랑이 잘나기는 했지만 (난, 진짜, 뭐냐.... 혹시, 어머니께 세뇌?), 내가 '못난이'로 여겨질만큼 잘나지는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부족한가. 신랑이 그렇게 잘났나? 여러 가지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들은 자신의 며느리를 못마땅히 여긴다는 것을 말이다. 말이 많으면 말이 많아서, 말이 적으면 말이 적어서, 키가 크면 키가 커서, 키가 작으면 키가 작아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들은 자신의 며느리를 못마땅해 한다. 이건 며느리가 말이 많거나, 말이 적거나, 키가 크거나, 키가 작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과 함께 사는 며느리, 완벽해 보이는 아들 옆에 선 며느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건간에 완벽한 자신의 아들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해 보인다는 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어머니는 다른 시어머니들에 비해 증세가 심한 편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생각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거였고, 나는 시어머니를 가만 두었다. 다만, 나는 시어머니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런 놀라운 지혜를 얻기 전, 그러니까, 내가 시어머니의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하지 않으면서도,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는 않기로 한 이런 균형잡힌 자세를 갖추기 전, 나는 강신주를 만난 거다.
내 인생 유일한 태클, 내 인생 유일한 난관, 내 인생 유일한 허들, 시어머니.
"여러분이 겪어야 될 것, 이겨야 될 것, 행복해야 될 것을 여러분이 찾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주시지 않습니다."
바로 그거였다. 나를 못마땅히 여기시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는 나는 진짜로 행복해질 수 없는 거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시어머니 마음에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행복해져야만 했다. 그건 내 스스로, 겪어내고, 이겨내고, 그리고 찾아야만 하는 거였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강신주가 말했다.
나는 너무 놀라 책을 덮었다.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듯, 강신주는 책 속에서 걸어나와 나의 제일 약한 부분에 대해 큰 소리로 말했다. 강신주를 처음 만난 날, 나는 그렇게 깜짝 놀랐다.
2. 나를 흔드는 사람
한마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 이것만큼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증표가 또 있을까?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78-9쪽)
나는 강신주를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물론 직접 만난적이 없으니, 얼굴 보고서는 못 했다. 사실 만나면, 진짜 만나게 된다면, '사랑합니다'는 조금 어려울 것 같고, '선생님, 존경합니다." 요 정도 선에서 생각하고 있다. 연습 한 번 해봐야겠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는 그의 말은 옳다. 그리고 그 말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강신주를 읽은 후,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정신'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당당하게 사는 것, 자본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 종교의 힘에서 독립하는 것. 세 가지 모두 다 어려운 일이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종교'에 대한 부분이다. 사람이 책 한 권 읽고, 바뀔 수 있을까. 책 한 권 읽고 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물론, 어느 시기, 어느 시절에 책 읽는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책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책이 단 한 권이라면, 겨우 두세권이라면 그것 또한 난감한 일이기는 하다.
강신주의 책 몇 권을 읽고, 내 생각이 크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용기 없는 사람이고, 감성보다 이성의 지배에 길들여진 사람이고, 그의 표현대로 '하다가 어려우면 기도로 퉁쳐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한데, 그건 그가 나를 흔들고 있다는 거다.
강신주는, 나를 흔드는 사람이다.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고, 내 삶을 활기차게 해 주었고, 내 삶의 작고 소중한 것들을 다시 일깨워준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신주는, 나를 흔드는 사람이다.
그는, 나를 흔드는 사람이다.
3. 담담하게
알라딘서재 블로그 종합 1위, 인문학 1위에 빛나는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의 저자 이유경님, 닉네임 '다락방'님의 서재에서 심규선을 알게 됐다. 나는 가요를 많이 듣지 않는데 (생각해보니 팝송도, 힙합도, R&B도 안 듣는다), 심규선은 처음에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감탄이 절로 나왔다. 키햐~~ 목소리가 예술이다.
다락방님은 심규선의 노래 중 이런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다.
담담하게, 부디, Savior, 그대의 고요, 5월의 당신은, 신이 그를 사랑해, 버라이어티, 보통
나는 심규선의 노래 중 이런 노래를 좋아한다.
담담하게, 부디, 선인장, 오늘, 소중한 사람, 어떤 날도 어떤 말도,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건가요
같은 사람의 노래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노래는 약간 다르다. (약간만 다르다고 믿고 싶다^^)
나는 '담담하게'를 100번쯤 들었고, '부디'를 80번쯤 들었다. '선인장'을 70번쯤 들었고, '오늘'을 120번쯤 들었다. 요즘엔 '소중한 사람' 100번 듣기에 나섰다.
심규선의 노래 중 처음 알게 된 노래, '담담하게'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어떤 사람이 자꾸 생각났다. 가사를 음미할수록 더욱 그랬다.
그대 맘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대가 말한 온갖 작품을
가슴 속에 새기고 듣고 보고 외워도
우리의 거린 좀처럼 좁혀지질 않네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대는 내게
너무나 자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아, 나로 하여금 노래부르게 만드는
사람이 그대라는 걸 나는 알고 있지요
알아요
강신주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강신주가 말한 작품을 읽고, 쓰고, 보고, 외워도 강신주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강신주는 말한다. 너무나 자주, 너무나 쉽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로 하여금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드는 사람이 강신주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만 알고 있다.
나만, 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