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는 그리기에서 발달해 나왔다. 아마도 모든 민족은 색칠하기나 그리기, 긁기, 깎기 등의 수단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다른 효용성을 일단 제쳐두면, 이들 그림은 메시지나 메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기록과 메시지는 흔히 '그림문자'라고 불리지만, 이 용어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기록과 메시지에는 표기처럼 항구적이고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언어형식과 어떤 고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따라서 언어형태의 미묘한 조절 기제를 공유하지 못한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2


 레너드 블룸필드(Leonard Bloomfield)의 언어학 입문서인 <언어 Language>에서는 그림에서 시작된 문자가 어떻게 변천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사물, 현상에 대한 사용된 그림이 보다 널리 사용되면서 '표준화'되고 점차 일반적인 표현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자(漢字)의 상형(象形)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문자 표현을 요구했고, 이른바 육서(六書) - 상형(象形), 회의(會意), 지사(指事), 형성(形聲), 가차(假借), 전주(轉注) - 라는 원리로 발전되었음은 익히 아는 바다.  


 그림에서 실제 문자로 넘어가는 전이과정에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국면은 서자와 언어형식과의 연상관계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상황에는 그림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자질이 담겨 있다.... 그림의 사용자가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 그는 실제로 자기 자신한테 말을 하면서 고민스러운 메시지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언어화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언어는 결국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사물을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한 방식이다. 이런 전제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림의 사용자가 차라 말을 하는 순서대로 일련의 서자를 배열하다가, 구어 발화의 각 부분(각각의 단어)을 모종의 서자로 표시하는 관습을 개발해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적인 문자표기는 이러한 단계를 전제로 한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5


 레너드가 말한 중요한 국면 - 서자(書字)와 언어 형식과의 연상관계-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고비'를 만났을 때, 중국어는 개선(改善)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면, 우리 글인 한글은 '그림 - 문자'라는 전통적인 관계를 끊고, '소리 - 문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혁신(革新)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의 결과 일부에게만 열려있던 정보(情報)의 독점 체제가 무너졌기에 3.1운동을 비롯한 조선 후기와 근대의 여러 투쟁에 민중의 참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쓰기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쓰기는 소수의 언어공동체에서만 어느 정도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이들 소수의 언어공동체 안에서도 아주 최근까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활동이었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1

 

 허웅 선생의 국어 운동은 국민의 글자생활은 한글만으로, 언어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말글의 가치를 높이 받드는, 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선생이 주창한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은 글자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신이다. 한글만 쓰면 모든 국민들이 모두 편하게 글자생활을 하며 모두가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한자를 섞어 글자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_ 허웅, <우리 옛말본> 서문 ,p16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종교개혁(宗敎改革)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역사의 평가를 볼 때, '인쇄기'라는 하드웨어가 아닌 '문자'라는 소프트웨어가 후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설명할 수 없을만큼 클 것이다. 아마도 그 영향력은 개인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철기 혁명'에 버금가지 않을까. 한글날은 맞아 우리글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독일 전역에서 하급 사제들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승들에 의해 루터의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이들이 개신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에 의한 모든 것은 70여년 전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종교 개혁은 서적 출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18년에 독일에서는 단지 200여 권의 책이 출판되었으나 1519년에는 무려 900권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1521년 제국 회의에서 루터의 저서를 모두 불태우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50만 부 정도가 팔려나간 후였다. _ 마틴 키친, <케임브리지 독일사>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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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말아놓았던 지나간 세월은 풀어지고 연못가 그 자리로 돌아온 서희와 봉순이는 한 사내를 의식 밖으로 몰아내 버린다. 공동의 기억이란 순수한 것이다. 특히 어린 날의 그 공동의 기억 때문에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이라는 의식의 유대가 지속되는지도 모를 일이라면, 이들이 비록 혈육이 아니요 신분의 도랑이 깊다 하여도, 서희가 남다른 아집의 여자라 하여도 이들의 해후가 슬프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7> , p153/514


 토지 독서챌린지 13주차. <토지 7>의 처음에서 간도로 떠나올 때 서희네와 헤어지게 된 봉순은 다시 이들과 만나게 된다. 혜관 스님과 함께 나타난 봉순. 오랫만에 만난 이들이지만, 흐른 시간이 적지 않았던 만큼 이들 사이에 놓여진 간격 또한 너무도 멀었다. 예전에 아기씨 서희를 지키기 위해 호위무사로 의기투합한 길상과 봉순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기녀(妓女) 기화(紀花)가 된 봉순. 서희의 남편이 된 길상. 애기씨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의 아내가 된 서희. 봉순은 이들과의 만남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봉순이...... 하인하고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거는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야. 이곳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본다. 고향 사람들은 힐난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외면한다. 모두들 나를 격하하려 들고 있다. 봉순이 그 아이는 더욱더 그러하겠구나. 최참판네 가문이 시궁창에 던져졌다 생각할 게 아니냐? 시녀였던 그 아이가 사모하던 하인이 지금은 내 남편이야.' _ 박경리, <토지 7> , p173/614


 봉순의 생각을 서희도 모를리가 없기에 서희 역시 봉순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다. 은연중에 가졌을 봉순에 대한 미안함, 과거 자신을 돌봐주었던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애써 뭉개며 자존심을 세우는 서희. 이러한 서희의 모습에서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1775 ~ 1817)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샬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자신의 깊은 사고력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_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 p22/438


 모든 것을 다 갖춘 이가 자신의 자질에 대해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오만. 샬럿의 말에 따르면 여러 면에서 서희는 오만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거기에 더해 메리의 말처럼 오만한 것이 일반적인 성향이라고 한다면, 봉순과 대면하는 서희가 가졌을 오만함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거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시피 간도로 건너온 서희. 이제는 재산을 쌓아 과거 최참판댁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된 그는 누구보다도 오만할만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이 권리가 되어 남들에게 '허영'으로 보여졌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 날개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조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 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는데.  _ 박경리, <토지 7> , p171/514


 물론, 부부간의 문제가 어느 한 편의 문제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한때 '아씨- 하인' 관계가 이들 부부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면에서 오만한 서희와 '콧대 센 아기씨'라는 편견을 가진 길상 내외는 다른 면에서 한국판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들이 아닐까 한다. 다만, <오만과 편견>에서는 오만한 피츠윌리엄 다아시와 그에게 편견을 가진 엘리자베스 베넷이 결혼을 하면서 신데렐라와 같은 동화같은 결말로 나아가지만, 후자는 극적인 결혼 이후 점차 식어가는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판이 보다 현실적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토지>의 또다른 커플 '윤이병 - 금녀'는 다른 의미에서 이루어지지 못한다. 어린 시절 서로 좋아했고, 그 결과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으나 현실에서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깨진 사랑의 전형을 이들 사이에서 떠올리게 된다.


 아무튼 금녀는 이제 윤이병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핀 꽃이었다.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한층 요염하게 핀 꽃이었고, 욕망으로써도 꺾을 수 없는 꽃을 방편으로 어찌 꺾을 수 있을 것인가.(p202)... 금녀를 좋아한 건 사실이야. 금녀의 집안이 망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했을지 몰라. 처가의 후원을 받아서 일본으로 유학하고, 결국 금녀도 나도 불운했던 거야. 교회당에 나오는 처녀 중에 금녀가 젤 예뻤지. 감히 김두수 같은 놈, 언감생심이지. 찬송가를 부를 때 금녀는 천사 같았어. 그런 금녀가 점박이 병신을 좋아해? 아닐 거야. _ 박경리, <토지 7> , p207/514


 이처럼 이번 주에 읽은 <토지 7>에서는 과거와는 달라진 이들의 사랑 이야기들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과 같이 여러 사연을 가진 이들의 사랑이 모두 같은 밝기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어둡고 힘든 시기에 이들이 겪는 사랑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_ 박경리, <토지 7> , p17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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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10-10 0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 읽었던 토지에서는 길상과 서희의 관계가 식어가는게 이해가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너무 잘 이해돼서 좀 슬퍼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10-10 08:14   좋아요 0 | URL
저는 뒤늦게 읽어서 그들의 관계가 잘 이해되었지만, 만약 저도 결혼 전에 읽었다면 안타깝게만 느꼈을 듯 합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왜 멸종했으며 어떻게 해서 해부학적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대신 그의 성공 역사를 전세계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p66)... 모든 생활의 중심은 사냥, 도살, 도축이었다. 동물은 생존에 필수적인 고기, 지방, 골수를 제공했고 거기에 더해 가공해 사용할 수 있는 털, 힘줄, 뼈, 뿔도 제공했다. 요컨대 동물은 식량으로, 또 도구로, 의복으로, 나아가 집을 짓는 자재로 남김없이 이용되었다. _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p78/962

 얼마 전 대통령의 지시로 '개 식용 금지 검토'가 보도되면서 오랜 한국 사회의 논쟁 중 하나인 '개를 먹어도 좋은가'가 잠시나마 이슈가 되었다. 찬반의 여러 논리가 있지만, 크게 묶어본다면 '개는 다른 가축과 다른가?'에 대한 물음으로 돌릴 수 있을 듯하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얇게나마 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공존했던 시기로 약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헤르만 파르칭거(Hermann Parzinger, 1959 ~ )는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Die Kinder des Prometheus: Eine Geschichte der Menschheit vor der Erfindung der Schrift>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원인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저자는 기후, 종족의 특성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에 특정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책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하듯 이 시기의 중심이 '수렵(狩獵)'이었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사피엔스의 생존과 관련된 어떤 관련성을 추측케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유럽의 후기구석기시대 현생인류는 그 이전의 인류종과는 달리 투창가속기라는, 사냥 성공률을 확실히 높일 수 있는 일종의 기계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인류는 자연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이 그때그때 사냥 운과 같은 우연적 요소에 덜 좌우되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계획적으로 목표의식을 갖고 사냥 도구와 기술을 개선시켰다. _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p126/962


 후기구석기시대를 공존하던 인류의 두 종(種)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개발된 여러 개발된 사냥도구들은 이러한 노력의 성과물로. 두뇌의 용량도 비슷하고 같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던 이들의 결과물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러한 새로운 도구의 개발이 생존의 견인차가 되지는 못할 듯하다. 그렇다면, 사피엔스가 해냈고, 네안데르탈인이 하지 못했던 일 - 가축화 -가 수렵 생산성에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었을까.  


 당시 인간이 개를 길렀던 것은 시간이 더 지난 후 다른 가축을 기르게 됐을 때 가졌던 목적과는 아주 다른 이유에서였다. 다른 가축들의 경우 고기와 젖 그리고 털을 공급받기 위한 목적이 주였다. 이에 반해 갯과 동물은 가장 환영받는 사냥 조력자였다. 추정컨대 갯과 동물은 처음에는 인간이 사냥하고 남은 것을 주워 먹기 위해 야영지 근처에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과 더욱 친밀하고 지속적인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었을 것이다. _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p74/962


 파르칭거가 인간과 개의 공생을 '사냥 조력-음식 제공'이라는 경제적 교환관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The First Domestication: How Wolves and Humans Coevolved>에서 저자들이 보여준 관점은 한 단계 나아간다. 늑대 중 일부가 자신들의 무리 대신 인간을 동료로 택하고, 인간(호모 사피엔스) 역시 늑대집단의 특성을 받아들이면서 생존을 위한 보다 나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으로 이들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통해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렌시스를, 개는 늑대보다 생존에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생인류와 조우한 최초의 늑대들은 사자와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인간과 상호작용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 늑대들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심지어 호모 에렉투스 같은 호모 속의 다른 구성원들 옆에서 수천수만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과 친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늑대는 이들과 사회적 유대를 맺거나 장기적인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늑대 표현형의 분명한 변화를 이끈 유대조차 없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몸집이 크고 더 육체적으로 강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유럽과 아시아 전체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사피엔스가 늑대를 파트너로 가졌던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Coren 2006 ; Shipman 2015) _ 레이먼드 피에로티외 ,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 p119


 인류가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퍼져나가면서, 인간 집단의 사회성은 영장류 모델을 더 이상 닯지 않고 갯과 동물 모델의 요소를 반영하기 시작했다.(Schleidt and Shalter 2003)... 최상위 포식자인 늑대는 순록, 말, 들소 같은 유제류처럼 떼를 지어 이주하는 동물을 먹고 산 '최초의 목축업자'이기도 하다. 마지막 빙하기 동안 인간 집단은 늑대의 목축 생활과 집단행동방식을 받아들였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아마도 아시아 동부의 호모 에렉투스 같은 시간적으로 더 앞선 다양한 호모 속이 현생인류에게 일을 내주고 개가 늑대로부터 분리되면서, 두 종 모두 종안과 종 사이에서 더 협력적으로 상호작용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_ 레이먼드 피에로티외 ,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 p123


 이런 관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수렵시대부터 시작된 '개'는 다른 가축과는 분명 다르다. 고기와 젖을 얻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소, 양과 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동물이 아니었으며, 인류와 비즈니스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는 고양이와 같지만, 농경시대 이후로 가축화된 고양이보다 이른 시기에 손잡은 혈맹(血盟)이라고 본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이런 역사적인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개는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주장이 단순히 반려견을 집안에서 키우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개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와 개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문제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된다. 다만, 법을 통해 관계 회복을 강제하는 것보다는 우리들 스스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바람직할 것은 물론일 것이다. 서유구 徐有榘, 1764 ~ 1845)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정조지 鼎俎志>에는 '개'고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위장의 기운을 보하고,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북돋는다는 효능도 소개되지만, 이와 함께 해(害)로운 점도 많은 것을 보면 전통적으로도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은 아닌 듯하다. 


 <본초강목 本草綱目> 개고기는 그 성질이 상륙(商陸, 자리공뿌리)과 상반되고, 살구속씨를 꺼린다. 마늘과 함께 먹으면 몸을 해친다. 마름과 함께 먹으면 전간(癲癎)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개는 구워 먹어서는 안 되는데, 구워 먹으면 소갈병에 걸리게 한다. 임산부가 먹으면 아이가 말을 못하게 된다. 열병이 있은 후에 먹으면 사람을 죽인다... 야윈 개는 병이 있고, 미친개는 발광하고, 저절로 죽은 개는 독이 있고, 발굽 뒤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 개는 몸을 해친다. 넓적다리가 붉고 부산스러운 개와 누린내가 나면서 눈이 붉은 개는 모두 먹어서는 안 된다. _ 서유구, <임원경제지> <정조지1>, p302 


 이번 페이퍼를 쓰면서 가축화된 동물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냥 친구 개, 창고 지킴이 고양이, 경작 도움이 소 등등. 이들 모두 인류 문화가 바뀌면서 전통적이 역할에서 벗어나 귀염받거나 아니면 고기를 제공하는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역사 안에서 바라본다. 이와 같이 사회, 문화가 바뀌면서 관계가 다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우리 가치의 중심을 인간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 인류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물음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다음주제는 '노동가치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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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10-08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담번 주제도 몹시 기대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08 11:55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마침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읽고 있습니다만, 그 전에 먼저 토지 독서 챌린지 페이퍼를 올려야 할 것 같아요. 참 한 주가 빠르게 지나갑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북다이제스터 2021-10-13 08:59   좋아요 1 | URL
존 로크가 처음 제시하고 애덤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자신들 경제이론의 바탕으로 삼은 노동가치론은 자체의 모순을 가진 듯 보입니다. 마르크스도 노동가치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듯 합니다. 그들은 노동가치를 주장했으나 결국 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13 09:05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마르크스는 <자본>과 <잉여가치론>에서 기존의 경제학자들이 가졌던 노동가치론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당시에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제시한 사상은 분명 기존 경제학자들보다는 앞서 나간 것이겠습니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1-10-14 19:27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글 기다리고 기다리다 제가 먼저 정리해 봤습니다. 제 이해가 맞는지 한 번 봐주세요. ^^

노동은 가치 있을까?

 

인류의 모든 이론이 그렇듯 ‘노동가치론’도 역사에 따른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이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탄생 배경과 전승 과정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동양도 그렇지만 서양 경제사는 ‘땅 소유자(지주)와 화폐 소유자(상인)’ 간 다툼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투쟁 역사는 농촌과 도시 사이에서 벌어졌다고 지적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제 역사였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토지를 보유한 귀족[士]이 상인[商]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념 지표를 2000년 동안 유지했던 것도 그렇고, 중세 유럽에서 상업이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었던 것도 그렇다. 또한 부르주아(상인)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지주)을 상대로 세상을 바꿔보자고 일으킨 프랑스혁명도 그렇다. 땅 소유자가 지배하는 시스템을 ‘봉건주의’라 한다면, 상인이 지배하는 시스템을 ‘자본주의’라 할 수 있겠다.

 

잠시 예를 들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이념을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표현한다면, ‘자유’는 경제 관념을, ‘민주주의공화국’은 정치 관념을 의미한다. 이렇듯 경제와 정치 관념을 서로 때어내어 국가 체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두 가지 정치경제 사상이 있었다. 땅 소유자가 내건 정치 슬로건이 ‘귀족정’이고 화폐 소유자가 내건 슬로건은 ‘민주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정은 자본주의와 잘 어울린다. 아무튼 고대 그리스 이후 귀족정과 민주정 다툼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동지중해를 석권하여, 군사적인 토지 세력이 해상 상업 세력에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고대 세계는 로마의 토지 세력 아래 통일되었다. 이후 1500년 간 유럽에서는 토지 세력이 지배하는 봉건 시대가 지속되었다.

 

봉건 시대를 종결하고 자본주의 시대, 즉 상인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정신이 새로운 이론을 요구했고 존 로크가 이에 응답했다. 칼 폴라니가 지적했듯이 화폐가 지배하는 상인 시대 특징은 “부(富)의 모든 형식 중에서 오직 돈만이 정해진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용을 위해서 궁전 다섯 개를 짓기 원하는 상인도 궁전 5000개를 짓는 일에는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상인은 궁전 5000개 가치를 돈으로 축적할 수 있고 또 그 돈을 보유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상인이 그 만큼 많은 자신 돈을 권력이 있는 왕이나 귀족, 반란 민중 등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고 안전하게 보유할 수 있는 ‘소유권,’ 즉 재산의 배타적 권리가 중요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을 지배하던 일반적인 생각은 ‘만일 지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쓰도록 주어진 특정 자연물을 어떻게 몇몇 개인이 독점할 수 있는가?’였기 때문이다.

 

존 로크는 ‘소유권이 당연하다’는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천부인권설’을 대전제(공리)로 끌어들인다. 천부인권이란 개인 신체는 자신 소유이며, 자신 몸을 소유할 권리는 천부적 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수행한 노동으로 획득한 대상도 자신 소유가 된다는 노동가치설을 만들어 낸다. 아래 자세한 이유를 언급하겠지만 토지나 생산 도구로 만든 가치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로크가 모든 소유권을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로크는 내가 소유하고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소유할 것이 남아 있는 한에서만 나의 소유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로 로크는 자연과 달리 화폐에 한계가 없기에 화폐를 근거로 자본의 부 축적과 소유를 정당화한다.

 

정치경제학에서 노동가치의 ‘가치’란 ‘의미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어떤 상품 가격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 있다. 즉 가치가 서로 다른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척도 또는 매개가 있어야 한다는 가격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기 위해 생산 과정에 투입된 것은 생산 수단과 노동력이라는 두 요소다. 여기에 토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토지는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신의 이름으로 토지소유를 불법화 했으며, 우리나라 경우 ‘왕토’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토지는 국가 소유로 남았다. 왕토사상은 토지의 유일한 소유자가 왕이니 토지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 넘겨줄 수 없다. 물론 사고 팔 수도 없다. 그러므로 관리를 임용해도 급료로 토지 자체를 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급료는 줘야 한다. 절묘한 해결책이 있다. 관리에게 토지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를 내주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18세기까지 대부분 땅은 매매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땅은 소수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거나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었다.

 

생산 수단은 일반 상품처럼 특정한 노동에 의해 이미 생산된 상품으로 구입되어, 그 가치가 생산 과정에 그대로 이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노동력뿐이다. 노동력은 로크 말처럼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거나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 애덤 스미스는 처음에 로크 이론을 받아들였다. “모든 물품의 진정한 가격은 그것을 얻기 위한 노동과 수고다. 노동은 최초의 가격, 곧 모든 사물의 대가로 지불되는 최초의 구매 대금이다.” 즉 노동을 제외한 땅의 천연자원이나 생산 수단은 단지 인간 노동이 만들어낸 수많은 결과물로서, 최종적으로 사용 가능한 형태를 위해 변형된 자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노동가치가 이윤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상품 가격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는 가치 근원이 노동에 있다는 존 로크 출발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노동 가치설을 전개했지만, 나중에 노동에 의한 가치 결정은 자본가와 지주가 없는 세상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노동가치론을 포기했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서는 상품 가격에 자본가 이윤과 토지 사용 대가인 지대, 노동자 임금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하된 노동 시간에 따라 상품 가치가 결정된다면 상품 가치는 투하된 노동만큼, 즉 임금을 받고 일한 만큼 생산된 가치에 의해 결정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윤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가와 지주가 상품 가치 형성 과정에 이윤과 지대라는 가격 형태로 참여한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자본가 이윤 획득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점은 로크가 노동에 근거해 소유권을 정당화한 것과는 정반대 논리로 나아간 것이다. 스미스는 소유권을 근거로 이윤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로크 논리에 비추어 보면 스미스 주장은 명백하게 모순적이다. 소유가 노동에 의해 정당화되면서도, 노동하지 않고 거두어 들이는 이윤이 소유에 의해 정당화되는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분명 알고 있었을 리카도도 자본 입장에서 이윤을 설명하기 위해 스미스 주장을 받아들여 상품 가격을 ‘고정 자본 임금(유동 자본) 평균 이윤’이라고 규정했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는 등가 교환의 법칙을 전제하기에 생산 가격의 구성 요소로서 기계류와 같은 고정 자본 뿐 아니라 임금과 평균 이윤을 미리 전제하는 논의를 전개했다. 하지만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 가치는 가격에 의해 설명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올바른 방법은 가치로부터 가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치 차원에서 이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잉여가치율 개념을 만들었다. 잉여가치율은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잉여노동을 뽑아내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 측정하는 공식이다. 만약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 노동 시간이 4시간이고, 이익을 창출하는 추가 잉여노동이 4시간이라면, 잉여가치율은 4:4, 즉 1백 퍼센트다. 잉여가치란 한마디로 잉여노동인 것이다. 이는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착취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가 생기는데 노동력 또한 상품이기에 등가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등가 교환이면서도 부등가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생산 체계가 문제다. 결국 노동가치론의 문제는 ‘등가 교환’을 전제로 삼은 데 있다.

 

그럼 상품 거래에서 ‘등가 교환’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에서는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각자 자신이 응당 얻어야 마땅한 몫(due)을 얻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경제적 거래가 그러한 원칙하에서 이뤄질 때 비로소 경제 현상이 폴리스의 약화와 같은 사회 변동을 가져올 모든 가능성이 차단될 수 있으며, 성원들 간의 경제적 거래가 폴리스 결속과 화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질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얻어야 할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중간’ 즉 적절한 수량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정의로운 거래는 정확한 등가(equivalency)로 이뤄져야지 어느 한쪽이 이익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근대의 프루동도 이를 뒷받침한다. “A가 B에게서 이익을 취한다면, 경제원리에 따라서 B는 C에게서, C는 D에게서 다시 그만큼의 몫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이러한 일은 결국 Z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면 Z는 누구로부터 회수할 것인가? 만일 그가 최초 수혜자 A로부터 회수한다고 하면, 이미 누구에게도 이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거대한 사회도 같은 것이니, 한 사람이 이윤으로 부자가 되려면 다른 한 사람이 가난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A에게 이익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Z가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나 리카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가 상품 교환의 유통 과정이 아닌 생산 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찾은 이유는 상호 평등한 존재로서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나는 유통에서 잉여가치가 생겨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품의 등가성을 엄밀히 재기 때문이다. 단순한 상품유통이든 노동력을 포함한 확대된 상품유통이든, 유통에서는 잉여가치가 생길 수 없다고 믿었다. 상품교환의 기본 공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을 교환한다. 하지만 교환할 때의 가치는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상품유통에서는 가치 증식을 해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갈리아니의 말을 인용했는데, ‘평등이 있는 곳에는 이익이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로 보면 총가치는 총생산 가격과 일치하고 총잉여가치는 총이윤과 일치’한다는 점을 <자본론> 3권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이 개별 상품이 아니라 사회 전체 차원에서 적용되며 총가치의 분배 차원에서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만일 교환 속에서 가치 증식이 이루어진다면 사회 전체 가치 총량은 일정하게 유지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가치 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노동가치론은 무너지게 된다. 노동가치론은 등가 교환이라는 법칙을 유지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생산에서 이것이 무너진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경우로서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로봇에 의해 생산할 수 있는 그러한 기업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여기서 가변 자본(노동력)은 제로이고 잉여가치도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이윤율이 확보된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총자본의 총잉여 가치가 생산 가격을 통해 배분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회사는 노동자를 직접 착취하지는 않지만,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간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총잉여 가치가 개별 자본에 배분된다는 마르크스 생각은, 잉여 가치가 개별 자본에서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자본에서의 생산 과정에서 잉여 가치가 착취되는 것이 아니다. 유기적 구성이 높은 자본, 예를 들어 자동화가 진행되어 노동자가 거의 없는 기업, 노동자가 착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이윤율이 얻어지는 것은 다른 자본 아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 자본의 생산 과정에서만 착취를 말하는 것은 곤란할 뿐 아니라 종종 유해하기까지 하다. 개별 자본이 얻는 이윤에는 다른 부문의 자본 노동자나 독립 소생산자로부터 얻어진 잉여 가치가, 또한 한 나라의 총자본이 얻는 이윤에는 해외 노동자로부터 얻어진 잉여 가치가 배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꿰뚫어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의 교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다. 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인간 노동 일반으로 추상화된 가치가 사회적 관계 아래서 결정될 때, 즉 교환가치가 될 때 그 것은 더 이상 노동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교환가치량은 투하된 노동 가치량과 같지 않고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의 양’으로 결정된다. 교환 가치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표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임금노동과의 교환 속에서 모든 노동자의 노동을 수량적인 단위로 환원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은 양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질을 갖고 있다. 자본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등가 교환이다. 자본에게 임금노동은 또 하나의 상품이며 상품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부등가적이다. 노동자에게 임금노동은 자신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전개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생명적 욕구를 갖고 자기 활동을 전개하는 한, 항상 양화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본의 내적 논리, 즉 이윤 추구라는 체제 안에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책상 1개 = 바지 2개’라는 표시에서 “좌변인 1개의 책상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주어 내지 주체고, 바지는 그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다. 따라서, ‘책상 1개 = 바지 2개’는 양적 동일함(등가성)을 표시하는 수학적 기호가 아니기에, 수학적 습관에 따라 양변을 바꿔놓으면 안 된다. ‘책상 1개 = 바지 2개’의 식에서 “애덤 스미스는 ‘기회비용’의 동등성을 찾아냈지만, 마르크스는 이 관계에서 양적인 등가관계를 끄집어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상이한 물건들의 크기는 동일한 단위로 환원된 뒤에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양적 비교를 위한 동일한 단위가 없으며, 따라서 양적인 관계로서 가치를 정의할 수 없다.˝ 즉 단순한 가치형태는 양적 관계를 표시하는 수학적 도식이 아니라 ‘질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논리적 도식이다. 하지만 화폐의 탄생을 통해서 질적인 등가 가치가 양적인 등가 가치로 변화되었다. “사실 좌우변 교환 도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심연이나 비약이 있으며, 그 심연 속에 경제학적 가치 개념과 연관된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여러 생산물이 단 하나의 등가물(화폐)을 통해 비교된다고 할 때, 비교하는 방법은 그 등가물의 양을 비교하는 것이다. 등가물의 질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기에, 질의 차이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고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노동가치론’이 의미 없다면, 문화 차원에서 노동은 가치(의미)가 있고 ‘신성’할까? 노동이 중요하다고 여겨지게 된 계기는 18세기에 자본가가 노동을 통한 성과에 집중하면서, 자신 삶을 귀족들과 의도적으로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생적으로 남의 노동에 의지해 살고 있는 귀족에 비해 자본가 자신이 더 청렴하고 도덕적이며, 교양 있고 유용하며, 덜 부패하고 덜 극단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자본가 계층이 절약과 금욕, 부지런한 노동의 미덕을 실행한 것은 그들이 프로테스탄티즘이나 공리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체계가 이윤을 낭비하지 않고 투자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규율은 타자에 대한 규율로 전환되어 완성된다. 자신에게 혹독함은 ‘비생산적이고 게을러터진’ 노동자를 가차 없이 대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초창기 노동자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려고 했다. 그런 사람은 현재보다 더 잘살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생각했던 정도의 수당을 받는다면 더 일하려 하지 않고 그냥 일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직 자본주의 정신이 다수 사람을 지배하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임금을 몇 배 더 올려주더라도 노동자들을 더 많이 일하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스스로 일하고 싶어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어졌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노동의 미덕과 노동하는 태도였다. 학교에서의 사회화 리듬은 생산 리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 아이들이 종소리에 반응하도록 가르쳤으며, 시간에 늦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도록 강요했으며, 신체적 태도와 동작을 교정하고 모든 태도를 훈육시켰으며, 아주 작은 이탈이나 소홀함도 육체적 처벌과 모욕으로 벌을 주었다. 기능적 지식을 주입하여 머리를 식민화시켰고 육체를 노동 도구로 만듦으로써 육체마저 식민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은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이 함께 작용해 결국 노동을 인간의 이차 본성으로 만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사회화가 임금노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태도를 통해 매개되는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다만 수입원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 장소와 사회적 실존, 사람들과 교제와 관계를 상실하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자아 유지 메커니즘을, 허약한 자아를 지탱하던 외적 지지대를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외되고 또한 소외시키는 노동에 종속된 삶을 지칭하는 급진적 표현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람직한 노동은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 차원에서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 점은 헤겔 사상과 다르며 오히려 마르크스 사상에 부합한다. “헤겔에게 노동이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이다. 그는 노동을 목적성에 따라 자신 의지를 밖으로 드러내는 활동으로 일반화한다. 비를 막으려는 목적성이 지붕을 만들고, 바람을 피하려는 목적성이 벽을 만들듯이, 정신 안에서 형성된 목적성은 정신 외적인 존재로 변화된다. 이로써 노동은 정신의 활동방식인 ‘외화(外化)’가 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생각은 다르다. “노동이란 일반적인 합목적 활동이 아니며, 정신 활동이 외화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이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고 노동력의 사용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하는 행동이 노동이라는 통념을 깬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이 노동이며, 그런 사용 때문에 노동력의 판매자는 비로소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노동이란 이처럼 노동력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정의되는 것이지, 정신 활동의 본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노동의 가치 여부는 우리가 어떠한 것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 참고도서

<경제인류학 강의>

<노동가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노동을 거부하라>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트랜스크리틱>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소유란 무엇인가>

겨울호랑이 2021-10-14 20:08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댓글로 쓰기에는 너무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제가 아직 정리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제가 생각했던 범위보다 더 깊고 넓게 노동가치론을 정리해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다만, 존 로크 이전에 이븐 할둔이 이미 <역사서설>에서 노동가치론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존 로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사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상황에 따라 재발견된 사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잉여가치론 1>에서 마르크스는 말씀하신 애덤 스미스, 리카도 이외에도 존 스튜어트 밀, 케네를 비롯한 중농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에 대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들은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논의를 중단한 실패한 사상가인 듯 합니다. 큰 틀에서 자본 역시 과거 노동의 결과물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한계점을 말하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를 위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어 분석을 수행한다는 것이 그의 ‘가치론‘의 한 부분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러한 그의 분석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을 먼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의 정리로 부담이 늘어났네요^^:)

북다이제스터 2021-10-14 20:17   좋아요 1 | URL
아 마르크스의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을 분리하여 한 분석의 의미를 전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저도 제 글을 좀 더 수정보완 하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10-14 20:43   좋아요 1 | URL
제가 이해하기로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을 ‘과거 노동의 결과로 이미 체현된 노동‘(즉 죽은 노동)으로, 현재의 생산 기간에 지출된 노동을 ‘산 노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불변자본‘은 이미 노동이 체화된 부분이기에 새로운 가치를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정 후 생겨난 상품의 잉여가치에 청구권을 내미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 듯 합니다. 이는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독점하기에 생기는 현상으로 가변자본에게 지불해야 하는 필요노동에 대한 대가를 최소한으로 지급하면서 자신의 몫을 키우려는 의도가 착취의 형태로 나가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거칠게 이렇게 정리가 될 듯 합니다만.... 중간에 이빠진 부분이 많네요^^:)

북다이제스터 2021-10-14 20:49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백퍼 이해 되었습니다.
제 글에도 반영하여 다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14 20:51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항상 감사합니다. 저도 곧 정리하겠습니다^^:)

mini74 2021-10-08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초의 가축. 이거 우리 똘망이 역사수업 시간에 교재로 써야겠어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21-10-08 14:11   좋아요 2 | URL
^^:) 개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책이라 여겨집니다. 미니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추석 연휴를 1주를 쉬고 다시 시작된 토지 독서챌린지. 개인적으로 독서감상평보다 더 어려운 3행시 과제지만, 그래도 지난 번보다 제시어가 길지 않아 어찌어찌 끝냈다. 3행 시 과제물은 페이퍼의 마지막에 슬며시 끼워 넣으며 일단 글을 시작하자.


* 2021.09.27 ~ 10.03 SNS 미션 (10월 03일 자정까지) '한가위' 3행시를  포함한 감상평을 아래의 조건을 충족하여 신청서에 적어주셨던 개인 SNS에 남겨주세요..

 

<토지 6>을 마치는 시점에 <토지>2부가 1부와는 성격이 다소 달라졌음을 느낀다.인물들간의 대화에 '역사의식', '민족의식'이 보다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일상의 모습을 다뤘던 이전 <토지>에서는, 마치 펄 S.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이 <대지 The Good Earth>에서 왕룽 일가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최(崔)씨 가문의 흥망에 초점을 맞췄다면, 2부에서는 서희의 간도 이주와 함께 공간적 배경과 의식이 민족 차원으로 함께 넓어진 느낌이다. 이러한 이유가 <토지>를 역사소설로 분류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이처럼 2분에서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장면이 점차 많아지는데, 서의돈과 상현, 명빈의 대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무속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 한 것은 그 속 검은 왜놈들이 저희들 미신은 뒤로 감추고서 야만이야, 미개다 하는 수작을 뻔히 알기 때문이라구. 그것이 다 이 나라 문화를 깡그리 없이하자는 수작이거든. 그러니 내가 보존하자는 것은 미신을 보존하자 그거는 아니라구. 무속도 우리 백성들이 살아온 자취요 풍속이라면, 그걸 아주 싹 지워버릴 수는 없어." _ 박경리, <토지 6> , p323/482


 작품에서는 술에 취한 취객(명빈)의 주사(酒邪) 정도로 표현되지만, 담긴 내용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을 미신(迷信, superstitio)으로 취급하고 계몽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식민통치의 한 수단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생각이 멈추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방침은 당시 총독부 촉탁이었던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1891~1968)의 저서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귀신(鬼神)을 믿으며 행복을 기원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수동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동성이 조선 민족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그의 논리는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흐름과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총독부 뿐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도 주장되며, 미신타파는 근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속(巫俗)을 수동과 미신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귀신신앙의 파지 把持와 원시종교인의 무격류의 활동이야말로, 요컨대 조선민중의 인생관이 자기 이외의 힘, 불가사의한 힘의 정령에 의하여 그 생활을 좌우할 수 있다고 하는 신앙 관념에 입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외력 外力에 의하여 그 생활을 지배당한다고 하는 관념은, 결국 자기의 생활은 다른 외력과 외물의 존재에 의하여 결정되고, 그 결정된 대로 이끌려 간다고 하는 숙명관념, 운명관념의 주요한 내용을 형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p6).... 민간신앙은 민중이 품고 있는 생활의식의 표현이다... 이것의 소위 말하는 정신적, 본질적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개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이 기력이 성하지 못하므로 전통의 힘에 속박되어 운명관, 숙명관의 인생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까닭은 아닐까. _ 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점복과 예언> , p7


 생각건대 조선의 귀신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재화 災禍를 주는 일이 많아 인생에 있어서 재화의 태반은 이 귀신의 소행에 의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귀신신앙은 마침내 양귀신앙이 되었다. 요컨대 조선에 있어서의 귀신신앙은 양귀로써 재화를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행복을 누리려는 소극적 생활 유지의 욕구에서 출발, 발달하여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욕구가 왕성할수록 그만큼 귀신의 활동을 왕성케 하고 있다. _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귀신> , p14


  이에 답은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 1986)의 설명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아데는 아시아의 샤마니즘 속에서 세계 문화의 혼합을 발견한다. 중앙 아시아를 비롯한 북부 지역의 애니미즘, 샤마니즘, 텡그리l( Tengrism)로 대표되는 '하늘' 숭배 의식 등이 남방 불교 문화와 혼합되면서 독특한 문화양식이 창출되었다는 것이 엘리아데의 시선이다. 특히, '텡그리'의 경우 발음의 유사성을 근거로 일부에서 '단군 檀君'과 관련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너무 길어지게 되니 다른 글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고 일단 넘기자. 


 샤마니즘의 특징적인 요소는 샤만에 의한 "영신"의 체현이 아니라, 샤만의 천계상승 혹은 지하계 하강에 의해 야기되는 접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p425)... 인도의 영향이 중앙 아시아로 미치는 과정에서, 그것을 실어다준,  말하자면 수레 역할을 한 것은 주로 불교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인도가 중앙 아시아와 북아시아에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이 영향이 중앙 아시아나 북아시아가 경험한 유일한 남방으로부터의 영향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이다. 아득한 선사시대부터 남방 문화 그리고는 그 뒤로는 고대의 근동 문화가 중앙 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온갖 종류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 p426


 우리는 아시아적 샤마니즘을, 그 원초적 바탕 이데올로기 - 인간으로 하여금 천상계 상승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천상계의 절대신에 대한 신앙 - 가 불교의 침투를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기나긴 외래 문화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온 고대의 접신술로 이해 해야 한다. 외래 문화와 함께 들어온 신비스러운 죽음이라는 개념은 조상신 및 "영신"과의 관계, "빙의"에서 단절되었던 이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들었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 p430


 이처럼 알레아데의 <샤마니즘>은 명빈의 주장을 지지한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검은 왜놈들이 저희들 미신은 뒤로 감추고서 야만이야'라는 그의 말은 인도의 힌두교만큼이나 많은 가미(神)을 모시는 일본 종교의 실상을 알고 나면 조선의 무속 신앙이 비(非)과학적이라는 비난은 적어도 일본인들이 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식민지 하에서 우리의 무속을 탄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굿에 담긴 대동(大同)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군도(群島)로 이루어진 일본은 오랜 기간 문화적 고립을 경험해왔으며, 그러한 고립은 정치적으로 강요된 측면도 있었다. 때문에 일본은 아주 독특하고 고유한 종교적 전통이 발전할 수 있었는데, 두 가지 주요 전통인 신도와 불교는 교리에서 대중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신도(神道)는 고대 샤머니즘 관습에서 유래한 일본 고유의 종교다... 생활종교로서 신도는 탄생, 결혼, 출산과 관련된 통과의례를 주재하고 죽음과 같이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멀리한다. 그러나 고인들 중 조상과 전사자들은 가미(神)로 간주한다. 가미는 또한 산, 강, 야생동물, 심지어 돌 속에도 내재한다. 신도는 주로 의식을 통한 정화의 종교지만 대중적 차원에서는 인자함과 악의를 동시에 보여주는 가미에 대한 화해, 길조와 흉조 같은 운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다양한 주술적 종교관습을 중시한다. _ 프랭크 웨일링 외, <종교> , p80

 

 정수미의 <한국의 굿놀이>는 '굿'으로 대표되는 무속이 단순히 개인의 길융화복을 비는 성격을 넘어서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개인을 넘어서 마을, 나라 굿을 통해 만나고 어려움과 걱정. 기쁨을 나누는 현장인 '굿놀이 장(場)'은 식민지배계층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과학'이라는 명목으로'집합금지명령'을 행한 것이 아닐까. 물론, 무속 안에 미신적 요소 나 샤먼(무당)의 탐욕, 혹세무민 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일제 식민 지배 계층에게는 불온 세력 척결을 위해서,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세 확장을 위해 우리나라 무속은 양쪽의 공격을 받아 점차 소멸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했을 때 우리에게 남겨진 명절 한가위, 추석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제 과제 제출 시간이 된 듯하다...


: 없이 높고 푸른 

: 을 하늘을 바라보며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 로받는다.


 글을 마무리 하기 전에 <토지 6>의 다른 대목을 소개하며 마치려한다. 지난 주에는 이 상(李箱, 1910~1937)의 시(詩)와 관련된 책을 주로 읽다보니, 이 상의 <날개>를 떠올리게 되는 <토지 6>의 아래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이 있는 것을 본다던 말을 새삼 실감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날개는 무신 날개고?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니요. 날개가 돋쳤소. 탄탄한 날개가요. 그러니께 나는 훨훨 날아댕길라요. 구만리 장천을 훨훨 날아댕길라요. 훨훨, 훨훨-훨-훨-.' _ 박경리, <토지 6> , p383/482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_ 이 상,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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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2 2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제잔재가 남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해 더 억압받은 거 같아요. 무속의 한 담긴 노래들 바리데기 영동할매 등등 알고보니 구구절절 재미있고 이승과저숭을 오가는 판타지*^^*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

겨울호랑이 2021-10-02 21:19   좋아요 2 | URL
일제 강점기 당시도 암울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들이 저지른 전통과의 단절과 식민사관의 이식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움직여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미니님 말씀처럼 우리가 외면했던 우리 옛것에 대한 재발견이 최근 이루어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듯 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10-03 17: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 잘 쓰시는 겨울 호랑이님이지만 3행시 내공은 좀 갈고 닦으셔야 할듯요. ㅎㅎ
너무 평범하옵니다. ^^
한달동안 제가 게을렀는데 잘 지내셧죠? 굿이나 무속에 대해서는 저 자신이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안보게 되는데 겨울 호랑이님 글을 통해 굿의 다른 의미들을 또 생각해보게 되네요. ^^ 남은 연휴 잘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10-03 17:41   좋아요 3 | URL
^^:) 그렇지 않아도 3행시 과제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ㅜㅜ 본문 쓰는 것보다 더 고민하지만 잘 안 되네요 ㅋ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연휴 되세요!
 

 본 논문에선 '삼차각'이 상대론의 주 배경인 4차원 공간상에서 물체의 물리적 위치를 초구면좌표계로 나타날 때 필요한 세 개의 각도값임을, 그리고 '육면각'이 삼차각의 적분으로 얻어지는 초입체각인 동시에 4차원상에서 한 점에서 만나는 여섯 개의 면이 이루는 각임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신범순이 '삼차각'에 대해 "더 높은 차원"을 지향하는 공간기호학적 기호"라 지적한 것과 상통하는 바이며, 또한 앞서 언급한 권희철의 아이디어, 즉 "육면각체"가 한 꼭지점마다 여섯 개의 면이 만나는 4차원 초입방체'라는 아이디어와 일부 궤를 같이한다. 마지막으로 <삼차각설계도 - 각서1>과 <건축무한 육면각체 - AU MAGASIN DE NOUVEAUTES>에 나타난 차원 확장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11


 얼마 전 서재 이웃인 mini74님의 글 중에서 이상(李箱, 1910~1937)의 시(詩)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일부 내용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개인적으로도 다른 이상의 작품 안에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이론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기에 더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운동>에 담긴 상대성 이론 관련 페이퍼 :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9364036#Comment_9364036


 바로 논문을 찾아 읽고 싶었지만, 때마침 프로젝트 완료일이 맞물려 며칠이 지난 후에 겨우 논문을 읽을 수 있었고, 페이퍼를 통해 해당 내용을 정리한다.


 사실,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다룬 선행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이상 전집에도 작품에 담긴 차원(次元)의 문제에 대해 해설되고, 차원 확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분명하게 언급된다. 물리/수학적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기존연구(권영민)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또한,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 두 연작시 내에서는 관련성을 찾지만, 전체적으로는 별개의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작품의 큰 제목은 '삼차각설계도'로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과 건축>(1931,10)에 김해경(金海卿)이라는 본명으로 발표된 <선에관한각서 1-7>이라는 일곱 편의 작품이 묶인, 일종의 연작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작품들은 모두 수학적 또는 물리학적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우주 공간, 태양과 광선, 과학과 시간 등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을 동원하여 인간의 존재에 관한 다양한 상념을 해체시켜 기표화한 것이 특징이다. _ 권영민, <이상 전집 1> , p272


 이 방법(데카르트 좌표계)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고, 또한 3차원에서 일반적인 n차원으로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같은 해석기하학의 원리는 뒤에 기하 도형의 평면적 2차원적 위상을 입체적이고 공간적인 3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대수 기하학의 원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_ 권영민, <이상 텍스트 연구>, p103


 이에 대해 오상현은 이번 연구를 통해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시를 접근하면서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각각의 연작시들을 통합하고 있다. 차별화된 접근법은 '삼차각'이라는 용어에서부터 드러난다. 기존 연구에서는 '삼차각'을 3차원에서 용어를 정의하려 했기에 부정확한 용어의 사용으로 해석해왔다.


 연작시의 내용과 의미를 이해해보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 되어야 하는 작업 중 하나는 시에 드러난 물리학적 개념과 용어들에 대해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연작시의 제목에 나타난 용어인 "삼차각"과 "육각면체" 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연작시 전반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할 것이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09


 여기서 제목으로 내세운 '삼차각설계도'라는 말 가운데 '삼차각'은 수학 용어로서는 부정확한 말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각(角)'이라는 것은 3차원 이상의 공간에서도 언제나 2차원 평면에서의 '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삼차각'이란 수학적 개념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세 모서리가 만나는 각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_ 권영민, <이상 전집 1> , p272


 반면, 오상현의 연구에서는 이를 4차원에서 삼차각을 정의하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위한 근거를 이어지는 <선에관한각서 2>에서 찾는다. 1+3을 1개의 시간과 3개의 공간으로 해석하며 자신의 논증을 뒷받침한다.


선에관한각서 2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중략)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삼차각이 4차원 공간에서의 3차원 각도값이라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학적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였다. 이를 고려할 때, '삼차각설계도'의 의미는 4차원 공간상에서의 설계도로 해석된다. 이때 이상이 설계한 4차원 공간이란, 1개의 시간축과 3개의 공간축이 결합된 4차원 시공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16


 논문에서 저자는 '삼차각'이 4차원 공간에서의 3차원 각도값으로 정의한 후 두 연작시의 관계를 설계-건축의 프로세스로 정의한다. <삼차각설계도>가 4차원 상의 설계라면, <건축무한육면각체>는 그것의 건축과정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설계와 건축이라는 행위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 그리고 <삼차각설계도> 발표 1년 후 <건축무한육면각체>가 발표됐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삼차각설계도>에서 설계한 대상은 '무한육면각체'이며, <건축무한육면각체>는 그것을 건축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17


 다만, 결론을 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다중선형사상(multilinear map) 또는 텐서(tensor), 벡터(vector)를 먼저 알아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벡터, 텐서를 통한 차원 확장의 이해는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 사각형 중심 결합을 통한 차원 확장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차원확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오상현은 '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이라는 시구에 주목한다. 삼차각의 크기는 사차원에서 최소 6개의 면이 만나 정의되는데, 시구에서는 '사각'이 4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각 중의 사각'(편의상 띄어쓰기함)을 사각형의 중심결합으로 4번 반복을 하지만, 4번째 반복을 마지막으로 중심결합을 중단하면서 4차원 이상 고차원인 5/6차원으로의 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리며, 이상 시의 배경이 4차원으로 한정됨을 논증한다.



[그림] 벡터공간(출처 : 위키백과)


 

민코프스키는 허수의 시간 변수를 도입하여 4차원 연속체에서의 불변량이론을 3차원 유클리드공간 연속체에서의 불변량이론과 아주 닮은 형태로 만들었다. 따라서 특수상대성이론의 4차원 텐서이론은 3차원 공간의 텐서이론과 비교할 때 실수성과 차원의 수에서만 다르다... 성분들 가운데 첨자에 4가 한 번 들어간 것들은 순허수이고, 이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수이다. 3차 이상의 고차텐서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수이다. 3차원 이상의 고차텐서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_아인슈타인,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 p96


 정리하면, '삼면각체'란 3차원에서의 임의의 각진 도형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n-삼면각체란 n개의 점을 가진 3차원에서의 임의의 각진 도형을 의미함을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논리로, 무한-삼면각체란 3차원에서 무한한 점을 가진 삼면각체이며, 3차원상의 (각질 수도, 매끈할 수도 있는) 임의의 도형을 말함을 알 수 있다.(p123)... 3차원에서는 최소 세 개의 면이 만나 이차각 크기가 정의 되어 그것이 '삼면각'이라 불리듯이, 4차원에서는 최소 6개의 면이 만나 삼차각 크기가 정의되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육면각'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25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은 무엇일까? 3차원상에서는 더이상 xy-xz-yz 사각형 결합체의 중심에 또 다른 사각형의 중심을 온전히 결합할 수 없다. 때문에 새로운 축, 즉 4차원의 축(w축)을 도입하여야하며, 여기서 논의영역이 3차원에서 4차원으로 확장된다.(p145)... 이상은 4개 평면(xy, xz, yz, xw)의 사각형 중심 결합은 활용하지 않았다. 즉, 시에서 논의하는 공간을 4차원으로 확장시키자마자 사각형 중심 결합이라는 도구의 활용을 중단하였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46


 이러한 논의 끝에 내려진 저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마치 3D프린터에서 출력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이는 모습(stacking prints)처럼 작가 이상은 자신이 작품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고자 하지만, 차원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에서 느끼는 절망과 대안이 두 작품에 표현되었다는 것이 논문의 내용이다. 그 절망은 결핵에 걸린 환자 이상, 식민지 지식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작가 이상의 한계에서 오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시간(time)을 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절망이기도 할 것이다. 빛 조차도 광속(光速)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하기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1930년대의 '현재'에서 그가 느낀 절망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육면각체'란 4차원에서의 임의의 각진 도형을 말하는 것이며, '무한육면각체'란 4차원에서의 임의의 도형을 말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인정할 경우, 이상이 언급한 '무한육면각체'란 4차원 시공간에서의 임의의 도형(즉, 3차원 물체의 시간에 따른 움직임을 4차원 시공간에서 본 것)을 말하는 것이며,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의미는 3차원 물체의 시간에 따른 변화까지 4차원 시공간에서 설계하고 건축함이라 볼 수 있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20


 건축가는 3차원 물체를 설계하고 건축하지만, 3차원 공간에 직접 설계를 진행할 수는 없다(절망). 대신 2차원 도면에 설계를 진행하고, 거기에 3차원 정보를 담기 위해 여러 투상도와 정보를 기입하여 2차원 도면의 한계를 극복한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28


 이처럼 오상현의 이번 연구는 육면각체가 일반적인 인식차원인 3차원이 아닌 4차원에서의 개념이라는 용어정의를 통해 개별 연작시로 받아들여지던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가 실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논문의 내용은 여기까지이지만, 이상 연구에 있어 이들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작품(또는 삶) 전체가 연계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과 그의 난해한 시가 실은 치밀하게 설계된 의도적인 작품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분명 뜻깊은 논문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연작시 <선에 관한 각서 1~7>은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결국은 시각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시상의 결말에 도달한다(p120)... 이상은 먼저 인간의 감각 가운데 시각은 빛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삶의 모든 과정이 빛을 통한 시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며, 모든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이라는 것이 결국 시각의 표현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_ 권영민, <이상 텍스트 연구>, p121


 이번 이상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피라미드 설계자' 이상을 생각하게 된다.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꾼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피라미드 내부를 복잡하게 설계한 이들. 그들처럼 작가 이상 역시 자신의 내면 깊은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암호처럼 숨겨 놓은 것은 아닐런지. 그의 삶이 채 30년이 안 된 짧은 시기였지만, 한문(漢文) 파자(破字)에 능하고 많은 작품이 일본어로 씌여졌으며, 공학적 지식이 담긴 작품이 많기에 접근하기에 쉽지는 않지만, 드물게 '가슴'이 아닌 '머리'를 노래한 시인 이상의 매력은 90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재밌는 주제를 던져주신 미니님께 감사드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논문원문을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KCI 논문 URL을 첨부한다. 본문에서 보다 충실한 저자의 설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5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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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1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무심코 던진 돌이 이렇게 멋진 다이아몬드가 돼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열독했지만 1/10쯤 뭔가 이해한거 같습니다. 겨울호렁이님 하옇튼 멋지십니다*^^* 하지만 이상이 시에서 담고자 했다는 시간을 넘어서지 못하는 본연의 한계 지식인으로서 식민지국민으로서 또 개인의 삶에서 느꼈을 한계와 절망 등에 대해선 뭔가 어렴풋이 알듯말듯, 겨울호랑이님덕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01 19:35   좋아요 2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제가 미니님 덕분에 모처럼 즐겁게 이상 시집을 읽었네요. 좋은 화두를 던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부족해서 더 쉽게 풀이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부분은 좀 아쉽네요... 좋은 저녁 되세요!^^:)

mini74 2021-10-01 21:22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호랑이님. 남편 아이도 포기한 접니다 ㅎㅎ 이정도 알아들은건 다 겨울호렁이님 글솜씨니 가능한 것. 제가 모자란 게 아니라 울 남편과 아이가 친절하지 않았음을 알게 됐습니다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10-01 21:41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미니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