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게 아니라, 영광은 자신이 늘 우울해 있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신의 의식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기분이 어둡든 밝든 세상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담의 말대로 울든 웃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영광은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바다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고 신선한 것을 미처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다. 조촐하고 청정하고 마치 내 집 안마당같이 아늑해 보이는 바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모두 이 강산에 태어난 사람들의 땅이요, 바다는 내 조국 내 민족의 보금자리며 요람이며 삶의 터전 아닌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민족의 생명이다. 명경 같은 바다 위에 꿈과도 같이 전개되는 섬, 가고 오고 겹쳐서 나타나고 연이어져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섬, 한결같이 섬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처음으로 영광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자기 내부에 진한 소속감이 굽이치고 있는 것을 느낀다. _ 박경리, <토지 17> , p389/572


  [토지 독서 챌린지] 34주차. 이제 5부 2권 <토지17>도 이번 주차로 마무리된다.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오가타와 인실이 그들의 아이를 찬하가 길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내용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난 주 독서챌린지에 이미 다뤘기에 넘어가도록 하자. 대신 이번 주에는 영광이 바라본 바닷가의 풍광과 생각을 함께 살펴보려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토지>의 상황만큼이나 어수선한 20대 대선 직후의 어지러운 지금 상황에서 영광의 마음이 더 잘 이해되었기 때문일까. 평소 자신을 짓누르는 우울감 속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본 영광. 시원함과 드넓은 바다와 시원한 파도의 움직임과 소리는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준다. 영광이 바다에서 느낀 생명의 신비와 소속감은 부둣가에서 빨래터라는 그의 공간으로 오면서 구체화된다. 구체화된 이미지들이 영광에서 시(詩)로 변화하여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빠져드는 영광. 


 빨갯방망이 소리 여자들의 웃음소리 부서지는 햇빛, 영광은 어제 부둣가에서 그 신선한 삶의 활력을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삶의 의미, 가능성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영광은 다음 순간 그것은 남의 인생이라는 강한 부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남이 바라보는 자신의 있는 모습이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선에서부터 출발하여 영광은 빨래터에 다시 시선을 던진다.

 '그렇다, 바로 내 시계에 저들 모습이 들어왔고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시(詩)가 아닌가. 한다면 시는 진실인가!'

 '한 위인이 살다 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 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영광은 밑도 끝도 없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념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448/572  


 바다와 빨래터라는 외부 공간에서 민족과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영광의 흐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다루어지는 시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시적인 구상에 맞는 내용에 관해 보면, 우리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 자체, 즉 자연 사물들을 배제할 수 있다. 시문학은 태양이나 산, 숲, 풍경, 인간의 외적인 형상, 피, 신경, 근육 따위가 아닌 정신적인 관심사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시문학은 그 안에 아무리 직관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요소를 띠고 있더라도 역시 정신적인 활동으로 머물며, 정신 가까이 있으면서 구체적인 감각성을 띠고 현상하는 외부사물들보다 정신에 더 적합한 내적인 직관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이다.(p589)... 이런 측면에서 시문학의 주요 과제는 정신적인 삶의 위력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의 열정과 감정 속에서 부침하고 물결치거나 고요히 관찰되며 지나가는 것, 인간의 모든 표상, 활동, 행위, 포괄적인 운명의 영역, 이 세상에서 추진되는 일들, 그리고 신이 다스리는 세계를 의식하게 하는 일이다. 시문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폭넓은 가르침을 주는 교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_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p590


 영광이 바다를 통해, 빨래터를 통해 떠올렸던 정신적 관심사. 이를 포괄적으로 '한민족의 민중의식'이라고 거칠게나마 묶을 수 있을까. 민중의식을 만약 시적으로 느꼈다면, 그것은 영광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의 <미슐레의 민중 Le Peuple> 또한 혁명기 프랑스 민중의 고통 속에서 시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힘에게 질식당하는 고통. 그것은 아직 시가 아니다.  미슐레는 민중 자체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투박하고 소박하다. 시원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프랑스 민중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중들의 핍박받는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영광이 발견한 민중 속의 시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모두가 고통을, 진부한 통속성을, 노예제의 추악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예컨대 가장 행복하게 태어나 즐거운 프랑스 남부의 거주자들조차도 슬프리만큼 일로 허리가 휘었다. 오늘날 최악은 허리만큼이나 영혼도 휘었다는 것이다. 고통, 곁핍, 빚쟁이나 세리에 대한 두려움, 이보다 덜 시적인 것이 있을까?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 p114/254


 민중 자체는 덜 시적이며, 그를 둘러싼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사회에는 그들이 음미할 만한, 생생하고 감동적인 세부에 대한 신랄한 묘사를 포함하는 시가 거의 없다. 이 사회에 있는 시라고는 때로는 아주 복합적인 조화를 말하는 고상한 시로서, 숙련되지 않은 눈으로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렇듯 방대한 대상과 거대한 집단적 힘에 둘러싸여서 스스로가 나약해지고 모독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는 이전에 개인의 창의성을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줬던 자존심이 조금도 없다. 만일 그에게 해석을 할 창의력이 없다면 그는 이 강력하고 현명하며 학식 높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사회 앞에서 용기를 잃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빛의 중심이라는 곳에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생각보다는 그 빛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선택할 것이다. 그 지혜 앞에서 민중의 작은 뮤즈는 물러서서 숨조차 쉬지 못할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 p114/254


<토지>에서 영광이 의식한 민중의 아름다움은 '차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상황에 따라 독립투사와 친일파를 오가는 지식인들과는 달리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 내부에서 울려올라오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친일파나 지식인 등 다른 계급들과는 구분된 민중들만의 본연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러한 순결함이 '질박(質朴, 質樸)'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외부 이미지로부터 이러한 질박함을 아름다움으로, 문학적 형태로 표현한 것인 시적으로 표현된 민중의식이 아닐런지. 어쩌면 영광은 이를 시적 감정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민중'이란 개념이 자신도 모르게 계급적 함의를 띠게 될 경우 그것은 필연코 관계적인 것이 되며, 그 재현의 장 속으로 다른 계급들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반드시 다른 계급들과의 대비에 의해 정의되며,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그 계급들과의 투쟁 관계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 현상 또는 서사의 이음새를 파열시킬 뿐만 아니라, 원래의 구도를 초월하는 단계, 즉 '민중'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자아비판과도 같은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전개 과정은 '민중'이라는 개념의 '타자성'을 피할 수 없게 만들며, 그 개념이 특권적이지만 제자리는 갖지 못한 관찰자, 이 서사의 원재료를 편안하게 그러나 열정은 없이 수집하고 있는 관찰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강조하게 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 p247


 누가 압니까? 순수한 친일파들이 독립군의 뒷돈을 대주고 있는지, 형세 보아가며 대한독립만세! 하고 외치며 나왔다가 몇 달 구류 살고 그런 뒤 조선이 독립될 그날 길이 좁아라며 활보할 궁리를 하고 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가장 지혜롭고 영악하게 사는 사람들, 어디든 적응하는 식물같이 끈질기게, 본시 생물은 다 그렇게 하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다! 해봤자 별무소득이지요. _ 박경리, <토지 17> , p300/572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운동으로 알게 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修飾家)가 태반이었으며 학식은 처세요 의복 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 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 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不知不識)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경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은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_ 박경리, <토지 17> , p427/572


 이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大地)이며 생명이다.  _ 박경리, <토지 17> , p469/572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에서는 영광의 생각과 <토지> 안의 대화 안에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시에 담긴 시대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 때문에 영광의 혼란과 생각에 함께 몰입하게 된다. 영광의 마음으로 읽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시 중 한 편을 옮기는 것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문학적인 감성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의 <시적 정의 Poetic Justice: The Literary Imagination And Public Life>는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영롱한 목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나는 오늘부터 지리교사모양으로 벽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노쇠한 선교사모양으로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 만한 강인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표는 극장 의회 기계의 치차(齒車)

 선박의 삭구(索具) 등을 주저(呪詛)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 서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희의 사기사(詐祈師)뿐이 아니겠느냐

 모든 관념의 말단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이기는 법이다

 새로운 목표는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역을 떠난 기차 속에서

 능금을 먹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희열 위에서

 40년간의 조판 경험이 있는 근시안의 노직공의 가슴속에서

 가장 심각한 나의 우둔 속에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더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_ 김수영, <김수영 전집, 시>,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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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주인이 알바 면접을 보고 알바생에게 내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말했다.

알바생이 출근 전 편의점을 둘러보고, 자신이 앉아서 업무를 볼 카운터에 수맥(水脈)이 흐른다(정확하게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주인 상의도 없이 일하기 전에 인테리어 업자에게 연락해서 내부 인테리어를 맡긴다고 했을 때 이를 잘했다고 할 편의점 주인이 있을까... 그 편의점 주인이 "Apprentice"의 트럼프라면 이같이 말했을 것이다. "you're fired!"


윤당. 그는 정녕 진보의 불안요소일 뿐 아니라, 보수의 불안요소이기도 한 것인가...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전달된다...


PS. 윤당의 '정신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에 그나마 가까운 것이 아래의 구절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의미인 것인지, 아니면 풍수(風水)가 중요하다는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 듯하다... 


 공간은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투쟁과 행동의 주요 쟁점이 된다. 공간은 자원의 장소이며, 전략이 실행되는 환경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공간은 무심한 극장이나 무대, 행위를 담는 틀 이상 가는 무엇이다. 공간은 천연자원에서부터 가장 세련되게 정제된 생산물에 이르기까지, 기업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적 줄다리기의 다른 재료들과 자원들을 제거한 적이 없다. 공간은 이 모든 것을 집결시키고, 스스로가 별개로 떼어낸 이들 각각을 포함하면서 대체한다. 여기서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생겨나며, 그 움직임 속에서 공간은 스스로를 본질, 즉 '주체'에 있어서, 주체 앞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대상, 자율적인 논리의 지배를 받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 공간은 스스로를 결과, 산물, 다시 말해서 과거, 역사, 사회가 경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결과물로도 안주하지 못한다. 공간은 점점 덜 중성적이고, 점점 더 적극적이며, 도구인 동시에 목적이자 수단인 동시에 목표가 된다. _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 p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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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2-03-20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두려운 것은 ‘5월 10일‘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것이죠

겨울호랑이 2022-03-20 11:11   좋아요 2 | URL
예방주사를 단단히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얼마나 맞아야할 지 감이 잘 안 오네요...

페넬로페 2022-03-20 10: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썩은 외나무 다리를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
정말 불안합니다.
풋내기의 행동의 결과가 모든 국민들에게 되돌아 올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0 11:12   좋아요 3 | URL
모든 예상을 빗나가는 행동을 보면서 트럼프를 겪었던 당시 미국인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벌써요... ㅜㅜ

북다이제스터 2022-03-20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만화를 본적이 없어서
무식한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요. ㅠㅠ
강백호가 결국 잘 하지 않았는지요? ^^

겨울호랑이 2022-03-20 20:05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저도 <원피스> 같은 유명 작품도 다 못 읽은 걸요... ㅋ 강백호 성장이 작품의 큰 줄기다보니, 우승은 못했지만, 나름 행복하게 끝납니다 ^^:)
 

 역사적 자본주의는 구체적이며, 시간적/공간적으로 한정된 그리고 통합되어 있는 생산활동들의 장(場)인바, 그 안에서는 끝없는 자본축적이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지배 또는 통제해온 경제적 목적 혹은 '법칙'이었다. 그것은 이런 규칙에 따라 움직여온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아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그밖의 사람들도 그런 행동방식을 따라야지 그러지 않았다가는 여기에서 오는 불리한 결과를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을 조성해온 그런 사회체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19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Historical Capitalism, with Capitalist Civilization>은 그의 세계체제론 전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세계체제론에 주목해야 하는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시장(market)에서 이루어지는 상품(product)과 노동(lobour) 그리고 잉여가치(surplus value)의 발생과 귀속 관계 안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했다면, 월러스틴은 이러한 분석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윤의 문제 대부분이 '제품-완제품' 사이의 교환 단계에서 발생되고, 교환 시 발생하는 구조적인 불균형 문제가 월러스틴이 바라보는 세계체제의 핵심이다. 중심부와 주변부 문제가 그것이다.


 역사적 자본주의 아래서 시장터에서 이루어진 거래가 전체 거래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늘 낮았다. 대부분의 거래는 긴 상품연쇄 곳곳에 자리잡은 두 중간생산자들 사이의 교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구매자는 자신의 생산과정을 위해서 어떤 '투입물'(input)을 구입했으며, 판매자는 '반제품'(semi-finished product)을 판매했는데, 이때 반제품이란 그것을 개인적으로 직접 소비하는 최종 사용자의 견지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중간시장들'에서 벌어지는 가격에 관한 투쟁은, 상품 연쇄의 전과정에 걸쳐 앞서의 모든 노동과정에서 실현된 이윤의 일부를 판매자측으로부터 짜내려는 구매자측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31


 핵심-주변의 관계다. 이를 부연하자면, 손해를 보는 지역을 '주변부'라 부를 수 있으며, 이익을 보는 지역을 '핵심부'라 부를 수 있다. 이런 명칭은 사실 경제적 흐름의 지리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p34)... 핵심부의 생산자들은 기존 생산품의 생산경쟁에서 한층 더 유리해지고 더 나아가 더욱 새로운 희귀 생산품들을 계속 개발해냄으로써 같은 과정을 새로이 시작할 수가 있었다. 핵심부지역으로 자본이 집중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기구들이 창출될 재정적 기반과 정치적 동기가 만들어졌는데, 이런 국가기구들의 여러 능력들 가운데에는 주변부지역의 국가기구들을 상대적으로 더욱 약하게 만들거나 약한 채로 그냥 있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서 핵심부 국가들은 주변부 국가구조들에 압력을 가해서, 이들 주변부지역이 상품연쇄 계서제의 밑바닥 일에 한층 더 전문화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것을 촉진하도록 할 수 있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고 또 이러한 저임금 노동력의 생존을 가능케 해줄 만한 가계구조들을 창출(강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자본주의는 세계체제 내의 여러 지역에 따라 그처럼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된 이른바 역사적 임금수준들을 실제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 과정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35


 핵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분업체계는 불평등하지만, 안정적인 체계다. '민족국가'라는 근대이데올로기의 산물로 국가권력은 정치적으로 체제를 안정화시키고, 경제적으로 '국가간 체제'는 이들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구조로 작동된다. 


 역사적 체제로서 자본주의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부등가교환을 은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같은 주요 메커니즘을 은폐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 자체에, 즉 (모든 통합된 생산과정들이 끊임없는 자본의 축적을 위해 작동하는 세계적 규모의 사회적 분업체계인) 경제의 장(場)과 (표면적으로는 각자의 관할영역 안에서 제각기 정치적 결정들에 대한 자율적 책임을 지고 있으며 자체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제각기 군사력을 행사하는 개별적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진) 정치의 장이 외견상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체제 내부의 그같은 분리구조 속에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34


 상품연쇄는 지리적으로 아무 방향으로나 제멋대로 뻗어 나간 것은 아니었다. 모든 상품연쇄들은 지도 위에 그려 넣는다면, 그것들이 구심적인(centripeta)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출발지점은 여러 군데지만 그 목적지점은 한두 지역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주변부(periphery)에서 중심부(centre) 또는 핵심부(core)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왔다.(p32)... 여러 생산과정의 구조 안에서 나타난 공간적 계서제(階序制, 계급서열제)화는 세계경제의 핵심지대와 주변 지대 사이의 양극화를 점점 더 심화시켜왔는데, 이러한 현상은 분배의 기준이라는 측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이 자본축적의 장소 안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33


  역사적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중심부와 핵심부는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안정적 체제이며, 체제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 때문에, 역사 속에서 이러한 혁명(革命 revolution)을 제어하려는 움직임은 국가외부에서도 작동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반체제 운동의 힘은 전세계적인 연대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는 1848혁명과 1968혁명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구조는 이러한 기존 여건들을 일부 변화시켰다. 국가들이 국가간 체제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반란이나 봉기가 실제로 일어난 정치적 관할 영역의 경계 밖으로 그 영향이 종종 아주 급속하게 파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외부' 세력들로서는 직접 공격받고 있는 국가기구를 돕겠다고 나올만한 강한 동기를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반란은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p70)... 이같은 지나친 긴장관계로 말미암아 역사적 자본주의 안에서 발전된 반란의 방식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같은 혁신이란 바로 항구적인 조직체를 갖추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역사상 두 종류의 커다란 저항운동, 즉 노동-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에서 지속적이며 관료화된 구조가 형성됨을 보게 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71


 이러한 세계적인 체제의 움직임과 그 밑의 구조에서 움직이는 작은 체제의 움직임 중 하나가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갈등이 있을 것이며, 백낙청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관련하여 '분단체제'를 '세계체제-국가체제' 사이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분단체제'는 '세계체제론'의 재해석으로 읽힌다. 이처럼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은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론의 전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대작 <근대세계체제>를 읽기 전 필독서라 생각된다. 이제, 전반을 훑어보았으니, <근대세계체제 1>부터 정리해보자...


 생산자의 목적이 자본축적이라고 하는 말은, 생산자가 특정 재화를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해서 가장 큰 폭의 이윤이 돌아오도록 그것을 판매할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생산자는 이른바 '시장 내에' 존재하는 일련의 경제적 제약들 속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의 총생산량은 원료의 투입량, 노동력, 고객 그리고 그의 투자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자금력 등과 같은 것들을 얼마나 이용할 수 있는가 그 정도에 따라 한정될 수밖에 없다. 생산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양과 그가 요구할 수 있는 이윤 폭은 동일한 품목을 더 저렴한 가격으로 내다팔 수 있는 경쟁자의 능력에 따라서도 한정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21


 생산적(임금) 노동은 일차적으로 한 성인 남자, 즉 아버지의 몫이 되고, 이차적으로 가계 내의  다른 (좀더 젊은) 성인 남성들의 몫이 되었다. 비생산적 (생계) 노동은 일차적으로 한 성인 여성, 즉 어머니의 몫이 되고, 이차적으로 다른 여성들 및 어린이와 노인들의 몫이 되었다. 생산적 노동은 가계 밖의 '작업장'에서 행해졌고, 비생산적 노동은 가계 안에서 행해졌다.(p26)... 다른 체제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각기 특유한 (그러나 정상적으로는 평등한) 과업을 수행한 데 비해, 역사적 자본주의하에서는 성인 남성 임금소득자가 '빵을 벌어들이는 자'로 분류되었으며, 성인 여성 가사노동자는 '가정주부'로 분류되었다. 이래서 전국적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했을 때 빵을 벌어들이는 자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활동적인 노동력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었으나 가정주부는 그렇게 간주되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해서 성차별주의가 제도화되었던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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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의 <동국여지지 東國與地誌>에는 서울 용산(龍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용산(龍山) 도성 서남쪽 9리에 있다. 무악산의 남쪽 줄기가 서울을 감싸고 돌다가 강변에서 끝나는데 용산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아래가 용산포(龍山浦)가 된다.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에서 "용산은 도성의 한강 동쪽에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p158)... 용산포(龍山浦) 도성 서남쪽 10리 용산(龍山) 아래에 있다. 한강 물이 여기에 이르러 두 줄기로 나뉘는데, 한 줄기는 용산포, 마포, 서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곧장 금천현(衿川縣) 경계에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된다.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용산> 시에 "두 물이 넘실넘실 제비꼬리처럼 갈라지네.(二水溶溶分燕尾)"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다의 조수와 통하여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집합한다. _ 유형원, <동국여지지 1>, p162


 <동국여지지>의 내용을 보면, 용산과 용산포를 합쳐 봤을 때, 무악산의 줄기를 뒤로하고 한강변에 인접한 곳이며, 조선 사도(四道)의 물산이 모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明堂)임이 분명하다. 때마침 천시(天時)를 얻은 자가 지리(地利)를 살펴 옮겨가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다음 문장에 이어지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을까. 이와 관련한 기사를 정말 외람되지만, 아래에 링크해둔다.


관련기사 :  윤석렬 천시(天時)를 받들다  https://news.v.daum.net/v/20210311100015749


 이인로(李仁老)의 시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갈라져 화(和)를 얻지 못한다면, '천시'와 '지리'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맹자왈(孟子曰) :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사방 3리의 내성 內城, 사방 7리의 외성 外城으로 둘러싸인 아주 조그만 성읍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에워싸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경우가 있다. 그러한 성을 에워싸 공격할 때 반드시 천기의 증후가 공격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지 못하다는 이치를 입증하는 것이다.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며, 해자가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무기와 갑옷이 날카롭고 단단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군량미가 많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모든 조건을 구비한 견고한 성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사람들이 도망가 버리는 것은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는 이치를 입증하는 것이다. _p265<맹자(孟子)> <공손추(公孫醜하 > 2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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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2-03-16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용산에 대하여.. 참으로 시의적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6 21:33   좋아요 2 | URL
참 그렇지요... 시작부터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로마는 이전 해(기원전 217년)에 집정관과 그의 병력을 트라시메네 호수에서 잃었고, 이젠 그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 강도는 훨씬 더 큰 참사를 당했다. 두 집정관의 군대가 전멸했고, 두 집정관도 전사했다. 로마는 전장에 내보낼 병력이 없었다. 지휘관은 물론 병사 한 사람도 없었다. 아풀리아와 삼니움은 한니발의 손에 떨어졌다. 이제 거의 모든 이탈리아가 그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참사를 연달아 겪으며 압도당한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311/1584


 칸나이의 대패가 이전 패배들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건 이후 로마의 동맹이 보인 행동에서 드러났다. 운명의 날 전만 해도 그들의 충성은 확고했다. 하지만 이젠 그 충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이 앞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335/1584


 그런 상황에서 등장했던 젊은 청년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235~BC183)였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고국에서 젊은 청년 스키피오는 체제를 정비하는데 앞장서고, 히스파니아(Hospania, 현재 에스파니아)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대신해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Hasdrubal Barca, ? ~ BC207)을 견제하고, 훗날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202)에서 한니발을 패퇴시키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마무리한다.


 만장일치로 지휘권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무척 젊은 청년인 스키피오에게 돌아갔다. 네 명의 천인대장은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어떤 조처를 해야 할지 논의했는데, 이때 전직 집정관의 아들 필루스가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그는 많은 귀족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툴루스를 따라 바다로 눈을 돌려 이탈리아를 버리고 타국 군주에게 도망칠 계획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모든 걸 잃었기에 희망을 간직하는 일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장차 고통과 절망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307/1584


 그때까지 시민들은 막중한 지휘권을 충분히 맡을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입후보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자 전사한 두 장군의 공백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들이 겪었던 패배의 고통이 되살아났다(p797)... 그런 분위기가 팽배할 즈음에 갑자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즉 스페인에서 전사한 푸르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이자 24세 가량의 젊은이가 자신이 사령관에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평민은 함성을 지르며 만장일치로 입후보를 허락하며 행운이 함께할 것이며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성원했다... 하지만 일이 끝나서 갑작스러운 충동이 사라지고 머리를 식힐 여유가 생기자 어색함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건전한 상식보다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일을 저지른 게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스키피오의 나이가 시민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798/1584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2030의 표심이 모처럼 정치권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표심에 따라 대선의 결과가 크게 요동친 것을 보면서 젊은 세대들을 배제한 정치는 이제 자리잡기 힘들다는 인식이 점차 퍼져나가는 듯하여 반갑다. 일찌감치 젊은 당대표를 선출하여 선거에 임한 국민의 힘과 선거 패배 이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에 '불꽃' 박지현을 비롯한 청년들의 참여가 대거 이뤄졌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정치 역량 등에 대해 정치전문가들의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 관점에서 대선패배가 선거 후폭풍으로 당권을 장악하려는 내부싸움 대신 새로운 인재 영입과 청년정치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면, 보다 더 의미있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한가지 우려되는 지점은 대선으로부터 불과 2개월 남짓 후에 치뤄질 선거의 패배를 이들에게 지우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 비대위의 청년 정치인들이 스키피오처럼 극적인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은 분명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이번 지방선거에서 숨지 않고 전면에 나선 젊은 청년들에게 다음 선거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자리가 되고, 변화의 출발점이 되길 정치전문가가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기원하고 그들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스키피오의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무모했던 것이, 당시 스키피오도 잘 알고 있던 바, 하스드루발 바르카스는 정부로부터 갈리아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스키피오의 귀환이 지체된다면 이베르강에 남았던 군대로는 카르타고 공세를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사령관이 기습 공격을 위해 긴급한 임무를 방기한 채 뛰어들었던 위험한 장난은, 스키피오와 넵투누스 신이 합작하여 거둔 전설적 성공 덕분에 가려졌다. 기적에 가까운 페니키아인의 주요 도시 함락은 비범한 청년에게 걸었던 기대 전체를 정당화했거니와 다른 말은 있을 수 없었다. _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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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2-03-14 16: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침에 했던 걱정을 정말 깊이 풀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거의 승패여부를 떠나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유능한 청년들이 기성정치속에서 선거용이 아니라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자리 잡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2-03-14 16:36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께서 같은 생각을 해주시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어쩌면 이번 선거에서 0.8% 차이로 이겼다고 하더라도 청년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고 그들만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더 큰 비극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아쉬운 선거결과지만, 결과가 가져온 영향이 긍정적일 때 훗날 정치사에서 의미있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시무스님 행복한 저녁 되세요! ^^:)

레삭매냐 2022-03-14 16: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를 통해 386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시절이 지나갔음을
받아 들이고, 말 그대로 쿨하게
용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청년들에게 문호
를 개방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를
외친 그들이 신예 정치인들을 양
성하지 않은 후과에 대해서도 반
성하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4 16:42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386의 결집이 노무현을 만들었고,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이제는 586이 된 세대들의 공과라 생각됩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과제를 넘겨주고 역사의 주역이 아닌 조연의 자리로 내려가야 할 시기임을 이번 선거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치인 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