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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글을 아주 훌륭한 시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감동하는 어린이 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직관(바로 보고 곧 느끼는 것)의 지혜로움이 아무런 장애도 입지 않고 잘 나타난 시라고 본다. 어린이가 가진 이런 '바로 봄'과 '바로 느낌'을 방해하지 않고, 그것을 불러일으키고 꾀어내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시 지도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49)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이오덕(李五德, 1925 ~ 2003)의 <우리 글 바로쓰기 5>에는 좋은 어린이 시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진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어린이 시의 조건을 어린이 생각(지혜로움)이 잘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엉뚱해 보이지만, 좋은 시의 조건을 수식으로 표현한다면, '생각 * 표현 =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과 표현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0'이라면) 작품이 되지 않을테니 이들을 곱셈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서, '좋은 생각' 또는 '잘된 표현'을 '+1'로 '좋지 않은 생각' 또는 '서툰 표현'을 '(-)1'로 바꿔보자. 간단히 '+1'을 긍정으로, '-1'을 부정으로 표현했을 때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호의 법칙이 성립할까?


(1) (+)1 * (+)1 = (+)1 -> 좋은 생각의 잘된 표현이 갖춰지면 좋은 작품이다.

(2) (+)1 * (-)1 =(-)1 -> 좋은 생각을 서툴게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3) (-)1 * (+)1 = (-)1 -> 좋지 않은 생각을 잘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4) (-)1 * (-)1 = (+)1 -> 좋지 않은 생각을 서툴게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다.


 부호의 법칙 (1) ~ (4) 번까지는 일반적으로 수학의 세계에서 공리(公理, axiom)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번 명제에서는 내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번의 예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속할 것이고, (1)과 (2)의 법칙은 받아들이는데 굳이 크게 무리가 없다 생각된다. 


 자연을 이렇게 따스한 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훌륭하다. 읽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는 좋은 시다. 여기서는 자연이 인간이고 인간이 자연이다. 자연과 인간이 아주 하나로 되어 있는 훌륭한 시다.(p33)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그렇지만, 문제는 (3)법칙에서부터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우리 글 바로쓰기 5>에서 여기에 해당되는 예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글에 대한 김 씨의 의견은 "아이가 어른의 눈치를 계산하지 않고 솔직한 자기 생각을 쓴 용기가 좋다. 그렇지만 이 글을 두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썼기 때문에 좋은 글이라고 하며, 어른들의 잘못된 생활 태도를 지적하고 비판한 점을 칭찬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시작하여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길게 적어놓았다.(p156)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김 씨의 의견에 따르면 '좋지 않은 생각(-1)'을 '숨기지 않고 잘 표현(+1)' 했기에, '좋은 글이 아니다(-1)'가 성립한다. 이는 수학의 부호의 법칙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수학과는 달리 논란의 소지가 있기에.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도 이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이다.


  나는 김 씨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다.(p158)... 우리의 학교 교육은 자주성이고 자발성이고 창의성 같은 것은 철저하게 둘러막아버리고, 다만 지시와 명령만으로 아이들을 기계같이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의 마음과 삶을 잃어버리고 어른들이나 그밖에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슬픈 버릇을 몸에 익혀버렸다.(p160)... 많은 아이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하지만 이 아이만은 행동만 하지 않고 생각을 했다. 자기를 움직이게 한 사람의 태도에 대한 생각이다. 어쩌면 이 생각은 이 아이뿐 아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같이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이 아이는 확실히 붙잡았고 그래서 그것을 글로 밝혔다. 이것이 소중하다. 이것저것 다 살피고 계산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우러난 절실한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이것이 귀중하다.... 만약 교사가 참 교육자라면 학생의 이런 비판의 소리에 마땅히 반성해야 한다.(p163)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이 명제에서 부호의 법칙 (3), (4)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김씨의 생각을 요약하면,어린이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견을 숨겨야 좋은 작품이라는 것으로 이는 수학의 법칙에는 들어맞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저자의 반대 입장처럼 다른 의견도 존재할 수 있기에, 부호법칙 (3)과 (4)에 대한 맞고 틀림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현실과 이론의 세계는 다르니까. 

 

 법칙(-1)(-1) = 1은 음수의 곱셈에서 성립하는 법칙인데 이와 같은 법칙은 분배법칙a(b + c) = ab + ac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1) (-1) = -1이 성립한다면, 분배법칙에서 a = -1, b = 1, c = -1로 각각 잡았을 때, - 1(1 - 1) = -1-1=-2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1(1 - 1) = -1.0 = 0을 얻기 때문이다. 음수와 분수에 적용되는모든 다른 정의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과 ˝부호의 법칙˝ (3)을 수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p73) <수학이란 무엇인가> 中


 수학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책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 글 바로쓰기>의 저자 이오덕은 생각의 가치보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 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글의 내용에 무엇이 담겼는가에 대한 책임은 어른의 몫이고, 아이들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저자의 교육철학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이 시는 실제로 체험한 것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거짓스럽게 느껴진다. 자기의 마음과 삶을 정직하게 쓰려고 하지 않고 '이런 것을 써야 근사한 시가 되겠지'하고 썼으니 말이다.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상상으로 쓸 때는 바로 그것이 상상임을 읽는 이들이 알도록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른의 시와 어린이 시가 다른 점이다.(p37)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글쓰기는 인간교육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저마다 쓰고 싶은 것을 정직하게 쓰게 하지 않고, 교육을 잘 한 것처럼 윗사람이나 학부모나 사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이 될 때는, 이 글쓰기가 아이들을 아주 좋지 못한 사람 - 꾀부리고 거짓말 꾸며대고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게 한다.(p101)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의 <무지한 스승 Le Maitre Ignorant >에서 '보편적 가르침'과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강요가 아닌 해방이며, 이를 위해서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도와 교육의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여기에 정확히 해방이 대립된다.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식을 거꾸로 뒤집은 평등의 정식이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 주체를 코기토(Cogito)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진 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p33)...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p77) <무지한 스승> 中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어른)들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무조건 따를 것을 강요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배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따른 이들이 희생되었던 4.16 세월호 참사는 (비록 그것이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어른들의 일방적인 강요가 비극적인 결과의 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생각한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 무겁게 끝나게 되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 글 바로쓰기> <무지한 스승>을 통해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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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주제는 놀이와 문화의 관계이므로, 놀이의 모든 형태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놀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체화하는지 그것을 주로 다루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p41)...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이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p42)...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특정한 한계 속에서 "놀아진다(played out)". 놀이는 그 나름의 방향과 의미를 갖고 있다.(p45) <호모 루덴스> 中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는 <호모 루덴스 Homo Ludens>에서 인류 문화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다. 놀이가 단순한 심심풀이가 아니라 '문화 文化'  자체라는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의 특성을 위와 같이 자발성, 비일상성, 한계성으로 규정한다. 오랫만에 <호모 루덴스>를 꺼내든 것은 작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지난 한주 동안 외부 출장이 있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동안 아빠 얼굴을 못봐서였을까. 딸아이가 지난 주말 내내 함께 놀자고 졸랐다. 주말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출장 정리를 하려고 밤에 책상에 앉으니, 조용히 들어와 그림 한장을 내민다.


[그림] 아빠, 놀아주세요(by 연의)


 일요일 밤이라 할 일이 있어 내 마음도 울고 있었지만, 얼마나 함께 놀고 싶으면 이런 편지까지 쓸까 싶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 놀고 일을 마무리 한 후 아이와 놀이, 그리고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과 놀이. 프랑스 역사 학자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아동의 탄생 L'enfant et la vie familiale sous l'ancien regime> 에서 근대 유럽 교육제도의 발달이 가져온 가족 내 아이들과 어른들의 분화를 지적한다.

 

 가족과 학교는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켰다. 학교는 이제까지는 방만했던 아동기를 점점 더 엄격해진 규율 체제속에 가두었다. 이 규율 체제는 18~19세기에 아동기를 완전히 기숙사에 감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p648)... 근대의 가족은 공동체 생활로부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사를 박탈했다. 그것은 사생활과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감성, 습관, 그리고 생활양식에 의해 결합되었다.(p649)... 새로운 사회는 각자가 전용 공간 속에서 각자의 생활양식을 누리는 것을 보장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주요한 특징들은 존중되어야 했다. 그리고 각자는 관습적인 모델, 이상적인 유형을 따라 했으며, 결코 축출이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러한 모델에서 일탈하려 하지 않았다.(p651) <아동의 탄생> 中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표되는 근대세계는 개인에게 사생활(私生活)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족 내 구성원들을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가족 내 다른 사람들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진단이다. 전문화된 '학교(學校)'에서 또래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부모와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현실이라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도올 김용옥(檮杌 金容沃, 1948 ~) 의 <효경 孝經 한글역주>에서 찾아본다.

 

 어찌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만이 효가 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예운> 편에서 말하는 십의(十義)는 어디까지나 쌍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효의 원초적 본질을 아래로부터 위에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다. 효의 가장 원초적인 사실은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과 관련된 것이다. (p156)... 그러나 그 효가 도덕적 차원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부모의 자애이지 자식의 효도가 아니다. 부모의 자애 때문에 자식의 효도는 마땅한 당위로 인식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리적 코딩(coding)을 넘어서는 도덕적 "베품"이기 때문이다. 이 "베품"의 전제가 없이 아랫사람의 복종이나 희생,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강탈이요, 복종주의적 강압이다.(p157) <효경역주> 中


 <효경한글역주>에서는 효(孝)의 본질이 내리사랑임을 밝힌다. 갓난 아이가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손을 내밀 때, 이에 대한 대답이 '효'라면, 딸아이가 부모에게 함께 해달라고 조를 때 함께 해주는 것. 이것 역시 효의 실천이 아닐까. 한편으로 노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바라본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하위징아의 놀이해석에 따르면 아이들과의 놀이가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한 의식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종합하면 자녀와의 놀이는 효의 표현이자,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 수단이다.


 긴장의 요소는 놀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한다. 문제를 파악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가져온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이들은 뭔가 어려운 일을 착수하고 성공하여 긴장을 끝내기를 바란다... 놀이 그 자체는 선과 악을 초월하지만, 놀이에 내재된 긴장의 요소는 놀이하는 사람의 심성 즉 용기, 지구력, 총명함, 정신력, 공정함 등을 시험하는 수단이 되므로 특정한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p47) <호모 루덴스> 中


 늦은 밤, 뒤늦게 일을 마무리 하느라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놀이가 시간적/공간적 한계성을 가지는 것처럼, 효 역시 시간적/공간적 한계성이 있음도 생각해 본다. 나이들어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려고 하나 기다려주실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자녀들 역시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함께 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우리 품안에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작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나중의 그 어느 순간보다 필요하고 중요함을 깨닫는다. 비록,  그것이 유치하게 보이는 놀이일지라도.


 아이의 작은 그림 편지를 보면서, 가족과 효, 그리고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양육(養育)은 부모와 자녀를 함께 성장시키는 상호작용임을 다시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PS. 개인적으로 아이들과 놀이의 최고단계는 '역할놀이'라 생각한다. 아이의 생각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5분을 넘기기 힘든 놀이가 역할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역할 놀이를 잘 해 주는 아빠들을 보면 마음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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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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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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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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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0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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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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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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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의 기술
벤자민 프랭클린 지음, 조지 L. 로저스 엮음, 정혜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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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움을 극복할 때 종이를 반으로 나눠 한쪽에는 찬성, 다른 쪽에는 반대라고 적습니다. 3~4일 정도 생각을 하면서 여러 가지 동기에 따라 짧은 생각을 적습니다. 그렇게 찬성과 반대의 이유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면 각각의 무게를 생각합니 다. 그리고 서로 무게가 같은 것끼리 지웁니다. 찬성하는 이유 하나와 반대하는 이유 두 가지의 무게가 같다면 이 세 가지를 지웁니다. 반대하는 이유 둘과 찬성하는 이유 셋의 무게가 같다면 다섯 가지를 모두 지웁니다. 이렇게 무게가 같은 것끼리 지우고 나서 하루 이틀 정도 더 생각합니다. 새로운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면 결정을 합니다. 비록 이유의 무게를 판단하는 게 어려울 수 있지만, 각각의 이유를 비교해서 생각하다 보면 모든것이 확실히 보여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도 줄어듭니다. 실제로 나는 이런 등식에서 큰 장점을 발견했는데, 나는 이것을 ‘도덕의 대수학‘ 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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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는 평소에 말도 야무지게 하고 공부도 곧잘 하는 밝은 아이랍니다. 그런데 승부용이 강하고 예민한 편이라 조그만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툭하면 울고 삐치네요... 학기 초에 친했던 친구들마저도 멀어졌어요. 친구들은 벌써 끼리끼리 어울리는데 저희 아니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돕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들은 교우 관계가 더욱 힘들어지고 학습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고 속상합니다.(p285)


 아이가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때 부모 마음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특히, 저학년 때 친구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면, 학교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에 친구들과의 관계에 더 신경쓰게 됩니다. 이럴 때, 아이가 제대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이는 부모에게 큰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딸 아이가 엄마를 따라 다른 동네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동네에 살아서 방과 후에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과 함께 억지로 학원을 보내지 말자는 저희 부부 생각때문에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일까요. 가끔 학교에서 혼자 놀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A : 초등학교 2학년까지의 아이들은 교사와의 관계가 쭝요하고 아이들끼리 맺는 관계가 제한적이지만, 3학년이 되면 아이들끼리 맺는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이 무렵부터는 친구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 학교생활이 재미없어지고 왕따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p286)... 부모가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죠. 그렇다고 잘못한 것을 옳다고 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죠. 하지만 잘못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때 '같은 편'이 말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분야의 일을 하느라 자신이 없을 때, 게다가 실패하기까지했을 때, 내 친구가 또는 내 배우자가 어떻게 내게 말해주면 좋을까요? 그 순간에 내가 바라는 조언의 방식처럼 나도 지금 내 아이에게 이야기해줘야 합니다.(p288) <우리 아이 괜찮아요> 中


 <우리 아이 괜찮아요>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학교에서 아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부모가 채워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데, 집에서마저 아이가 문제가 있다는 방향으로 몰아붙인다면, 아마도 그 아이는 양쪽에서 눌려 고립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쪽에서 아무리 거세게 밀어 붙여도 다른 편에 더 잘 받아준다면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편하게 아이의 때를 기다려주는 것. 아마도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해야하는 최소한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와 함께 상의해서 이번 주부터는 주중에 아이와 엄마는 바이올린을 함께 배울 예정입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온 가족이 수영을 할 계획을 짜봅니다. 친구들과 학원가는 대신 부모와 함께 배우고 싶다는 말에 내려진 결정입니다.  저학년이라 아직은 부모가 친구들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으니 함께 배우는 것은 모두에게 좋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부모가 재미없다고 느껴진다면, 알아서 친구를 찾아 놀러나가고, 미래의 배우자를 만나 독립하겠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인생이 진행되리라는 짐작을 해봅니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고 했으니, 친구가 필요해진다면 더 적극적으로 잘 해내리라 기대해봅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면 가끔 혼자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이럴 때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제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기에,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나이 어린 부모님(?)의 모습을 상상하면, 당시에는 서운하게 느껴졌던 부분들도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육아 문제로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니, 자녀 교육 문제는 부모에게도 중요함을 느끼며, 두서없는 페이퍼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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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19-09-24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 키우기^^
정말 쉽지 않죠.
아이와 함께 행복한 경험을 택한 계획과 결정을 응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4 05:59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때로는 애가 저희를 키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커가는 과정이 육아, 양육일텐데 참 쉽지 않습니다^^:)

2019-09-24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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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09: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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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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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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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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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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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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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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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4: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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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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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4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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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25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이에게 원하는 바와
아이가 원하는 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수년간의 경험과 선이해가 상대방
을 이해하는 걸 방해하는 장애물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5 10: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부모의 것을 아이에게 담기보다 아이의 것을 부모가 담는 것이 진정한 양육이 아닐까 합니다. 아이가 성장해서 살아갈 세상은 부모가 아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 책의 과제는 희랍의 인간교육(paideia)을 희랍 고유의 특질과 역사 전개 가운데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 교육은 추상적 이념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체험된 운명의 구체적 현실 가운데 발견되는 희랍역사 자체다... 희랍인은 최고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을 그들 발전의 초기 단계엔 갖지 못했다. 하지만 앞을 내다보고 길을 걸어가면서 희랍인은 자신과 자신의 삶이 지향하는 목표를 점차 뚜렷이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더욱 훌륭한 인간의 조형이었다. 희랍인에게 교육사상은 모든 인간적 분투를 대표하며, 교육은 인간 공동체와 개인의 궁극적 존립 정당성이었다.(p20) <파이데이아 1> 中 


 베르너 예거(Werner Jaeger, 1888 ~ 1961)는 <파이데이아 1 Paideia: The Ideals of Greek Culture Volume 1>에서 고대 희랍의 문학, 철학, 정치 등의 작품에 담긴 교육의 대상과 내용을 분석하면서, 희랍 교육 사상안에 희랍 정신의 정수(精髓)가 담겨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림] Paideia(출처 : https://hellenicfaith.com/paideia/)


 희랍 교육사상은, 민족과 국가가 정신적으로 조형된 삶 속에서 외부로 뻗어 나가며 그 힘으로 타 민족과 타 국가를 빨아들이는 가장 숭고한 힘의 총체가 되었다. 인간교육의 이념 말고 희랍세계에서 아테네가 보여준 정치적 권력의지를 정당화해줄 근거는 달리 없을 것인데, 특히 아테네의 외적 좌절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인간교육의 이념에서 아티카 정신은 영원한 존속이라는 위안을 얻었다.(p588) <파이데이아 1> 中


 고대 희랍에서 교육(敎育)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기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예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귀족계층은 흥망(興亡)을 거듭하며, 때로는 권력을 내주기도 하지만 빠른 시간내에 권력을 획득하면서 중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귀족정신을 대표하는 덕목이 '탁월함(arete)'이라 해석한다. 


 귀족층은 민족교육의 정신적 원천이다.... 교육은 다만 점차 정신영역으로 옮겨간 민족적 귀족이념이다.(p39)... 지배와 탁월함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다. '탁월함(arete)'의 어원은 뛰어남과 월등함의 최상급인 '제일 뛰어남'이며, 복수형으로 늘 귀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p41)... 귀족교육은 각자가 평생 바라볼 이상(理想)에 대한 의무감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의무감을 '염치(aidos)'라고 하는데 이는 언제든지 귀족에게 촉구될 수 있는 것이며, 그 훼손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분노(nemesis)'를 다른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다.(p43) <파이데이아 1> 中


 예거는 호메로스(Homeros, ? ~ ? )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가 이러한 귀족정신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되는 <일리아스>와 트로이아를 파괴한 후 많이도 떠돌았던 오뒤세우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뒷세이아> 안에서 우리는 탁월한 귀족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일리아스>는 탁월함의 고대적 영웅정신이 거의 전적으로 지배하던 세대를 배경으로 하며, 탁월함의 이상을 모든 영웅에게서 실현한다. <일리아스>는 노래로 전승된 신화 속 옛 영웅들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이미 분명한 도시국가 생활을 익힌 헥토르와 트로이아의 모습에 담긴바 당대의 생생한 귀족전통을 통합하여 영원한 이상형을 제시했다.(p59) <파이데이아 1> 中


 <오뒷세이아>는 우리에게 옛 귀족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자료다. 물론 그것은 <오뒷세이아>가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이오니아 지방의 귀족문화겠지만, 이를 우리의 연구대상인 전형적 귀족문화로 간주할 수 있다.(p60) <파이데이아 1> 中


  호메로스가 귀족문화의 전형을 제시했다면, 헤시오도스(Hesiodos, BC 7세기 ?)는 민중의 삶을 노래하면서 영웅이 아닌 일반인의 삶을 노래한다. 헤시오도스가 <일들과 날들> <신들의 계보>를 통해 신화를 민중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면서 이제 시민계급이 새로운 교육의 주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이제까지 의식적 교육에서 배재되었던 민중계급은 헤시오도스 서사시에서 정신적 자기 형성을 완수한다. 이때 민중은 상류 사회의 문화가 그들에게 제공한 이점들, 특히 궁정문학의 정신적 형식들을 활용하고, 민중 삶의 근원에서 그들 고유의 내용과 정신을 길어 올린다.(p136) <파이데이아 1> 中

 

 <일들과 날들>의 근본사상, 정의와 노동의 관계가 바로 연결 고리였다. 평화로운 노동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선한 에리스만이, 대지에 질투와 갈등이 만연하는 것을 저지할 유일한 신성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힘겨운 강제이며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시인 헤시오도스는 세계 질서의 영원한 법칙 가운데 근거 짓고, 사상가 헤시오도스는 이를 신화의 종교적 표상 가운데 깨닫는다. 호메로스 사유는 신화전승을 이런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이르지 못했고, 반면 헤시오도스는 그의 다른 위대한 저작 <신들의 계보>에서 이를 최초로 시도한다.(p123) ... <신들의 계보>의 '인과적' 사유형식을 헤시오도스는 <일들과 날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통해 노동의 실천적/윤리적/사회적 문제에 적용한다.(p125) <파이데이아 1> 中


 이후 아테네의 솔론(Solon, BC 640 ? ~ BC 560 ?)은 입법자에게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하며, 이른바 '솔론의 개혁'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테네 민주주의는 한층 발전하지만, 통치 계급에 더 높은 수준의 '탁월함'을 요구하는 다른 기준은 후대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국가>를 통해 '철인(哲人)' 지배를 주장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계와 끝이라는 개념은 솔론과 동시대인들이 중요시했던 문제, 내면적 성찰을 통한 새로운 생활규범의 획득과 분명한 연관성을 가진다... 한계는 딱 잘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대중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법률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법을 만든 입법자에게는 어디에도 없는 좀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그에게 이런 기준을 찾게 만든 아주 특별한 것을 솔론은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늘 올바른 통찰과 확교한 실천 의지를 나타내는 "앎"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솔론이 가진 내면 세계의 통일성을 파악해야 하는 지점이다.(p246) <파이데이아 1> 中


 후대의 모든 교육이 고민했던 큰 사회 문제는 개인주의의 극복이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봉사라는 기준에 따른 인간교육이었다. 이런 문제의 실질적 해결방안으로 엄격한 규율의 스파르타 국가가 유력해 보였다.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의 사유는 스파르타 국가에 평생 매달렸다.(p149) <파이데이아 1> 中


 

도시국가는 각 형태마다 거기에 맞는 특별한 인간유형을 길러냈다는 플라톤의 말은 옳다.(p185)... 우리는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어 옛 희랍 귀족문화가 '보편적 인간교육'의 이념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새로운 도시국가의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p187)... 플라톤은 <법률>에서 모든 참된 교육 혹은 인간교육을, 상인과 장사꾼과 뱃사람 등 직업인의 특수 지식과 구별하여 "참된 교육은 법률의 토대 위에 통치하고 통치받을 줄 아는 완벽한 시민이 되려고 열망하는 인간을 그가 갖추어야 할 탁월함으로 이끄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초기 도시국가의 정신에 충실하게 '보편교육'의 근원적 의미를 천명했다.(p191) <파이데이아 1> 中


 고대 희랍에서 교육의 대상이 이처럼 귀족계층에서 시민 계급으로 확대되었다면, 교육의 내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예거는 이를 아이스퀼로스(Aischylos, BC 525 ~ BC 456),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7 ~ BC 406),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 ~ BC 406)의 비극을 통해 페리클레스 50년의 황금기 동안 고대 희랍인들의 인식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들의 주사위 게임의 말에 불과한 존재에 불과하다. 아이스퀼로스 작품 안에서 인간은 신에게 탄원하는 존재라면,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비로소 주체로서 생명을 부여받았다. 

 

 삼부작 형식은 아이스퀼로스 문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삼부작 형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인바 이때 운명의 담지자가 개인일 필연선은 없고 개인이 속한 가문 전체일 수도 있다. 아이스퀼로스 비극에서 인간은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고 운명의 담지자일 뿐이었고 문제는 운명이었다.... 극 전개의 주인공은 인간들이 아니라 초인간적인 신들이다. 신성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인간들의 싸움을 굽어보고 있고, 만물은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p383) <파이데이아 1> 中


 소포클레스의 인물에는 억지스러운 궤변이나 인위적 과대과장이 없다. 소포클레스의 기념비적 성과는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 비율에서 나타난다. 소포클레스의 인물을 아이스퀼로스의 인물처럼 불쑥 땅에서 쏟아난 땅딱막한 진흙형상의 인물과 달랐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모든 인물을 필연성에서 태어난다. 전형이라는 공허한 보현성에서도 아니며, 개별 인물의 일회적 특수성에서도 아니며, 오로지 비본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실체 자체에서 태어난다.(p407)... 소포클레스의 인물들은 미적 감각에서 탄생했는데, 그 출발점은 이제까지 전례가 없던 '영혼 부여'였다. 이로써 탁월함의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고 이때 처음으로 '영혼'을 의식적으로 모든 인간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415) <파이데이아 1> 中


 예거에 따르면 소포클레스 작품에 보이는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문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지식교사(소피스트 sophist)라 불리는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은 새롭게 조명되고, '만물의 척도'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짙게 영향을 끼친다.


 철학이 인간에 관심을 두고 점점 더 가까이 관심 대상에 다가갔다는 사실은 지식교사의 출현이 역사의 필연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다. 물론 지식교사들이 충족시킨 요구란 학문적/이론적 요구가 아닌 철저히 실제적 요구였다.(p436)... 지식교사들은 교육요소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 여러 종류의 잠언투 운문문학을 새롭게 산문화했고 이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식적으로 형식에서나 사상에서 운문문학과 경쟁했다.(p437)... 지식교사들의 공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놀라운 형식교육 기술의 독창성에 있다. 그들의 약점은 그들 교육의 내적 실질을 채워줄 정신적/윤리적 실체의 결함에서 유래한다.(p484) <파이데이아 1> 中 

 

소포클레스는 시대의 가파른 정점을 걷고 있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시대가 파괴할 교육비극의 계시자로 활동했다. 시대는 그의 정신사적 위치를 규정했고, 그의 문학을 오로지 시대적 표현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구속성을 그에게 부여했다.(p486)...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이 숨 쉬는 정신적 환경의 대기는 섬세하고 건조했다. 아이스퀼로스의 강력한 생명력에 비추어 다만 약점이었던 예민한 정신성은 이제, 새로운 주관적 공감 능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끝없는 대화를 요구하는 비극의 정신적 매체가 되었다.(p506)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에서 예거는 지식교사들의 교육이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은 정치교육'이라는 사상은 결국 사유(思惟)를 극한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한계점을 노출하게 된다. 여기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들을 비판하는데, 우리는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를 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진실로 '보편적인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보기에 오로지 정치교육 뿐이었다.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보편'인간교육이라는 개념 이해를 통해 희랍교육 역사의 발전 전체를 요약했을 뿐이다.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진정한 인간교육의 토대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순수 미학적 유형의 인문주의가 추가되고 혹은 이것이 기존 인문주의를 대체한다.(p443) <파이데이아 1> 中


 매우 강력한 요구와 함께 등장한 교육이념은 그만큼 더 철학과 종교의 단단한 토대를 요구한다. 기본적으로 플라톤 철학이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호메로스에서 비극에 이르는 옛 희랍교육의 종교적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지식교사들의 교육이념을 극복하면서 지식교사들 이전으로 회귀한다. 지식교사들에서 결정적인 것은 의식적 교육사상 자체다. 교육사상은 희랍의 모든 문학창작과 모든 사유 노동이 인간형상의 규범적 특징을 찾으려 애쓴 지속적 노력의 표현이다.(p446) <파이데이아 1> 中


 탐구의 활동은 "오로지 교육을 위해"이며 교육이 필연적인 한에서일 뿐이다. 이 표어는 페리클레스 교육을 상징하는데, 페리클레스 교육은 철저하게 실용적이고 정치적이었다. 토대는 희랍의 패권을 지향하던 아테네 제국이었다.(p469).... 번성하는 학문의 엄격한 제한적 향유를 지시하는 이 문구는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귀족 칼리클레스가 벌인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p468) <파이데이아 1> 中


 이번에는 역사학을 살펴보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 ~ BC 425)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두 세계의 격돌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했다면, 투퀴티데스(Tuchididdes, BC 465 ~ BC 400)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전쟁의 원인과 영향에 대해 분석한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이 전쟁의 원인을 형이상학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투퀴티데스는 인간 내부에서 이를 찾아냈다.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아이스퀼로스가 신의 뜻을 강조한 반면, 소포클레스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강조한 것을 연상시킨다.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처럼 민족학과 지역학의 통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중점은 인간들에게 두었다... 그의 내적 통일성은 상고기적 화려한 다양성을 수용하는데, 이에 희랍인들과 크로이소스왕이 이끄는 이웃 뤼디아인들 사이에 벌어진 확인가능한 최초 격돌로부터 페르시아 전쟁까지의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커다란 주제가 중심이 되었다.(p552) <파이데이아 1> 中


  투퀴디데스는 정치사의 창시자다. 창조과정에서 아테네가 보여준 정치적 사유와 의지의 놀라운 집중은 투퀴디데스의 작품에서 합당한 정신적 표현을 발견했다.(p553)... 아테네 국가의 비극을 기록한 역사가 투퀴디데스는 아테네 권력의 몰락을 오로지 내적 와해의 결과로 보았다. 이 순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을 펠로폰네소스 정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서 관심은,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고 더욱더 급격하게 진행된 사회 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위대한 역사가의 진단이다.... 투퀴디데스는 현행 가치 전체의 파탄을 말한다. 이는 심지어 언어에서 완전한 어의변화로 감지된다. 고래로 최고 가치를 표현하던 단어들은 추락하여 일상언어에서 사고와 행동의 경멸적 지시에 사용되었고 이제까지 비난을 표현하던 언어들은 출세하여 칭송의 수식어로 상승했다.(p489)... 대체로 경제발전 흐름과 패권정치 흐름에 집중되어 그려진 과거사 영상은 동시대의 희랍인들에 대한 투퀴티데스의 입장을 반영한다.(p558)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 >에서는 이처럼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polis)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정체(政體)를 고민했으며,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정체의 모습을 공유하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귀족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대되었고, 교육의 내용이 신(또는 자연)에서 인간으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국가정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가정체는 희랍에서 오늘날 우리가 국헌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국가정체가 규정하는 한에서 도시국가의 삶 전체를 포함한다. 비록 시민의 모든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스파르타 방식대로는 아니지만 아테네의 국가정체에서 국가의 영향은 보편정신으로서 모든 인간적 생활영역에 깊이 침투했다... 페리클레스가 그린 아테네 국가정체의 모습은 경제, 윤리, 문화, 교육 등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의 총체적 내용을 포함한다.(p587) <파이데이아 1> 中


 <파이데이아 1>은 고대 희랍의 교육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주요 문학, 철학, 역사서를 다루기에 결코 내용이 가볍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 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그리스 비극을 다루었으니, 그리스 희극은 부록으로 옮긴다. 투퀴티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모든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는 <헬레니카>를 추천한다. 

 

 희극도 비극의 영향으로 비로소 '주인공'이란 것을 도입했고, 서정시적 형식요소들도 마찬가지로 비극의 영향이다. 발전의 절정에서 희극은 비극으로부터 마침내 최종적 도야를 위한 영감을 획득했는바 비극의 교육적 소명을 받아들였다. 이는 희극 본질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예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동시대 비극과 대등한 창조물이라는 지위를 굳혔다.(p524).. 비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주 심호한 문제를 가지고 인간 내면으로 침잠했다. 반면 희극은 대중을 숨쉬는 공기로 삼아 대중을 통해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국가 미래와 정신 운명의 긴밀한 결합을 강조하고 대중 전체에 대한 창조적 정신의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희극은 그 교육적 소명의 정점에 도달한다.(p549) <파이데이아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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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25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교육 문제의 원류가 희랍에 있었군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7-25 22:30   좋아요 1 | URL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이 악용된 사례가 반드시 희랍에만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자본주의가 서양에서 자라난 제도이니만큼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25 22:32   좋아요 1 | URL
개인 행복이 아닌 항상 체제를 위한 교육이라는 말씀에 오뉴월 더위가 무척 섬뜩해 집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19-07-25 22:3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찰리 채플린가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담아냈듯 부속품화된 개인을 양산하는 체제가 그들이 지향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중장보병전술인 팔랑크스도 밀집대형으로 전체로서 싸우는 형태라는 사실도 떠오릅니다. 결국, 고대 희랍 사회는 거대한 파시즘 사회의 전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7-25 22:40   좋아요 1 | URL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바람직한지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25 22:53   좋아요 1 | URL
네, 사회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잘 심어주는 것이 바른 교육인지, 아니면 아이가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도록 주관을 심어주는 것이 가야할 길인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는 북다이제스터님과 저만이 아닌 모든 부모들의 고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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