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 체제의 비범한 부분이자 이 체제가 전 세계에 확산된 이유는 이 조약의 규정들이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절차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기본 요건들을 받아들인 국가는 국제 체계 덕분에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으면서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치, 종교, 국내 정책을 유지할 수 있는 국제 시민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p38)....  베스트팔렌 개념은 다양성을 체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 사회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다양한 다수의 사회들을 공동의 질서 추구 작업에 끌어들였다. 이 체제는 현재 국제 질서의 기반으로 남아 있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39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Kissinger, 1923 ~ )의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World Order>에서 30년 전쟁의 결과물인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1648)에 기초하여 국제 정치를 바라보는 책이다. 본문에서 키신저는 근대 유럽의 출발점이기도 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규칙'과 '세력균형'을 특징으로 집어낸다. 규칙이 국제질서의 출발을 의미한다면, 세력균형은 국제질서의 유지/존속을 의미한다. 


 질서의 두 측면인 힘과 정당성 사이에서 절충을 이루는 일은 정치가의 능력의 핵심이다. 도덕적 차원은 생각하지 않고 힘만 계산하면 모든 의견 충돌이 힘의 시험으로 바뀔 것이다. 야심은 쉴 줄을 모르고, 국가들은 변화하는 힘의 배치에 관한 힘든 계산을 하느라 고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편 균형 상태를 무시하는 도덕적 금지는 십자군이나 도전을 부추기는 무능한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410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정자가 필요하다. 유럽 중부에 대해서는 통일 독일제국 등장 이전의 프랑스, 유럽 대륙에 대해서는 영국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조정자로서 기능했고, 이 역할은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넘어갔다. 다만, 세력균형에도 불구하고 체제 내에서의 움직임이 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세력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신흥국(프로이센, 러시아)의 등장으로 새로운 균형점으로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이러한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베스트팔렌조약은 유럽 정치에서 하나의 체제로 작동했고,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통해 이는 세계질서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다만, 여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은 동맹국들 간의 구체적인 협정이나 유럽의 영구적인 정치 구조를 지시하지 않았다. 정의에 따르면 세력 균형에는 이념 상의 중립과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적응이 필요하다. 19세기의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은 이 개념의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영원할 뿐이며, 그 이익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39


 키신저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이 세계 원칙으로 적용되기에는 체제의 걸림돌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한다. 힘과 도덕성이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 했을 때 중국 문명은 과도한 도덕성의 강조로 폐쇄적인 면을, 이슬람 문명은 지나친 힘의 강조로 지나친 팽창주의를 펼치는 등 차이가 있었기에 국제질서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특성을 직접 이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세계체제에 걸맞게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은 적용될 필요가 있었다.


  유교는 중국문화에 가까운 정도에 따라 정한 위계질서 상의 속국들로 세계를 분류했다. 이슬람은 평화의 세계, 즉 이슬람의 세계와 이슬람의 세계와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전쟁의 세계로 세계를 나누었다. 따라서 중국은 자신들이 이미 질서 정연하다고 생각하거나 도덕성의 함양 정도에 따라 내부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정돈된 세계를 찾으러 해외에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반면, 이슬람은 이론적으로 정복이나 전 세계적인 개종을 통해서만 세계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실제로 두 방법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406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세계질서에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은 민주주의를 통해 힘과 도덕성을 함께 완비한 조정국으로서 1970년대 폐쇄된 중국을 개방으로 이끌고, 전쟁 직전의 중동을 세력균형의 상태로 만들었음을 키신저는 강조한다. 이처럼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는 세계 질서를 위해 희생하는 국제조정자로서 미국의 모습과 미국 정치인들이 인식하는 국제정치의 틀이 잘 담겨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지만, 그것이 과연 객관적 인식인가 하는 물음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세력 균형의 절차상의 측면, 즉 경합 중인 당사자들의 도덕성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방식은 위험할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었다. 민주주의는 가장 훌륭한 통치 방식인 동시에 영원한 평화를 보장해 주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했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293


 국제 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추구하는 과정에 새로운 차원을 보탰다. 대의제에 의한 자유로운 통치라는 개념 위에 설립된 미국은 자국의 발흥을 자유 및 민주주의의 확산과 동일시하면서 이 요인들이 이제껏 세계가 성취하지 못한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403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주위 국가들의 호의에 근거하여 외교 정책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운명을 저당 잡힐 거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기본 원칙은 모든 핵심 국가들이 그 질서를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힘과 정당성을 결부 짓는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닉슨이 생각하는 국제 질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을 자극한 것은 바로 그러한 국제 질서에 대한 비전이었다. _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 p342


 여기서 한 권의 책을 더해 보자. 찰스 킨들버거(Charles Poor "Charlie" Kindleberger, 1910 ~ 2003)는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를 통해 세계평화, 안정, 성장 등 '공공재(公共財, public goods)'를 공급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갖춘 '경제적 선두'를 말한다. 킨들버거는 같은 책에서 경제적 선두는 내외적 요인에 의해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교체되어 왔음을 말하지만, 미국 이후의 경제적 선두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한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자리를 이어받기를 원하는 국가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지만, 미국 또한 물러나길 원치 않을 것이다. 국제질서의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지만, 심판이자 동시에 선수로서 국제 질서에서 달러와 석유로 결합된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규칙과 현 상태의 세력균형을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국제적 리더십의 부재. 이것이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제외한 주변국들이 느끼는 세계질서의 공감대가 아닐까. 

 

 경제적 선두는 국민소득, 성장률, 기술혁신의 수와 그것이 장차 개화될 가능성, 생산성 증가율, 투자 수준,  원료 및 식량과 연료의 통제, 각종 수출시장 점유율, 금 보유고와 외환 보유고, 자국 화폐가 다른 나라에서 교환수단, 계산단위, 가치의 축적 수단으로 쓰이는가의 여부 같은 것 중 어느 하나로 어느 하나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것들과 함께 또 다른 경제적 기준들이 혼합되는 가운데 경제적 우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경제적 선두는 최상의 경우 지배나 헤게모니보다는 세계경제의 리더십에 따른 공공재(公共財, public goods)가 된다. 즉 지도자가 명령하듯이 타자에게 어떻게 처신할지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지시하고 또 그를 추종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설득하는 것이다. _ 찰스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 p28 


 킨들버거는 리더십의 공백, 부재 이후 움직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조정자의 무력을 가지고 베스트팔렌조약의 조약국 간 상호평등의 원칙 아래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경우, 극점체제는 단극(單極)에서, 양극(兩極)으로 다시 다극(多極)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법칙은 아닐런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에서 보여지는 미국 정치인들의 인식과 주변국들이 느끼는 세계질서의 흐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페이퍼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금본위제 시기 영국의 경우에서와 같은 강한 리더십, 최소한 1970년대 초까지의 IMF와 세계은행(미국), 또는 GATT의 보복 위협은 그러한 장애물들을 뚫거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적절한 힘과 목적을 가진 효율적인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 체계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변형되어, 유용한 방향으로 처음 발을 내딛는 자가 무임승차하는 다른 이들에 의해서 희생된다. 자비로운 전제주의가 가장 효율적인 체계라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평등한 국가들 사이의 다원적 협력체계 혹은 세력균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엔트로피에 종속된다. _ 찰스 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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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론 개략 후쿠자와 선집 1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성희엽 옮김 / 소명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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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일본국 사람을 문명으로 나아가게 함은 이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일 따름. 나라의 독립은 목적이고, 지금의 우리 문명은 이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다. 지금의 우리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명의 본지가 아니라, 우선 일의 첫걸음로서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그 밖의 것은 두 번째 걸음으로 남겨서 다른 날에 이루려는 취지이다. 생각건대 이와 같이 논의를 한정하면 나라의 독립은 곧 문명이다. 문명이 아니면 독립을 지킬 수 없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535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1835 ~ 1901)가 <문명론 개략 文明論之槪略>에서 말하는 문명(文明)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문명,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후쿠자와는 서두에서 문명을 우열(優劣)에 따라 구분하고, 앞선 문명인 서구 문명을 따라가는 것을 지식인의 과제로 정의한다. 


 지금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합중국을 최상의 문명국이라 하며, 투르크 土耳古, 지나,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반개화국 半開國이라고 말하고, 아프리카 阿非利加 및 오스트레일리아 墺太利亞 등은 야만국이라고 일컫는다(p108)... 사물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아는 자는 그 이치를 더 깊이 앎에 따라 점점 더 자기 나라의 형국을 분명히 알게 되고, 더 분명히 알게 됨에 따라 서양 나라들에 미치지 못함을 점점 더 깨달아 이를 걱정하고 비관하며, 때로는 그들에게 배워 모방하려 하고 때로는 스스로 노력하려 이에 대립해보려고도 하는 등 아시아 나라들에서 식자 識者들의 평생 걱정은 오직 이 일 하나에 달려 있는 것 같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09


 이 책 전체에 걸쳐 논하고 있는 이해득실은 모두 다 유럽문명을 목적으로 정하여 이 문명을 위해서 이해가 있고 이 문명을 위해서 득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학자들은 그 큰 취지를 그르치지 말지어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17


 그렇다면, 반개화국이나 야만국의 지식인들은 왜 문명화 - 서구화 -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국체 國體 - 나라 - 를 지키기 위해서다. 보다 앞선 과학기술을 앞세워 무력을 갖추고 일본을 위협하는 외세 - 외부문명 - 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명론 개략>의 주된 내용이다. 


 일본 사람의 의무는 오직 이 국체를 지키는 일 한 가지뿐, 국체를 지킨다 함은 자기 나라의 정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의 지력 智力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항목은 매우 많지만, 지력을 계발 發生하는 길에서 첫 번째로 급한 일은 고습 古習에의 혹닉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서양에 널리 퍼져있는 문명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50


 국체 國體. 체 體는 합체 合體라는 뜻이고, 또 체재 體裁라는 뜻이다. 사물 物을 모으고 이를 온전하게 하여 다른 사물과 구별할 수 있는 형체 形를 말한다. 따라서 국체란 한 종족 一種族의 인민이 서로 모여 고락 憂樂을 함께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보다 따뜻하며, 서로 상대방에게 힘을 쏟음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보다 열심이고, 한 정부 아래 살면서 스스로 지배하고 다른 정부로부터 제어받음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복을 함께 감재하며 스스로 독립함을 말한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36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 개략>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해야하는 이유를 국체를 보존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지식인들은 반개화상태에서 벗어나 선진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러한 기풍을 전체 인민으로 학장시켜 마침내 문명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함을 강조한다. 


 전국 인민의 기풍을 일변 一變하는 것과 같은 일은 지극히 어려우며 하루아침 아루저녁의 우연으로 공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 하나의 방법은 인간의 본성 天然에 따라 해 害를 없애고 장애를 멀리하며, 인민 전체가 스스로 지덕을 계발하도록 하여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고상한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있을 뿐. 이와 같이 천하의 인심을 일변하는 실마리가 열리면 정령과 법률의 개혁도 차츰 이루어지고 장애도 사라질 것이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23


 천 번을 갈고 백 번을 단련하여 겨우 한 때의 이설 異說을 누르고 얻은 것을 국론 혹은 중설 衆說이라고 이름할 뿐, 이것이 바로 신문, 연설회가 성행하고 다중의 입 衆口이 떠들썩한 까닭이다. 인민은 분명 나라의 지덕에 의해 편달되기 때문에, 지덕이 방향을 바꾸면 인민 또한 방향을 바꾸고, 지덕이 파당으로 나뉘면 인민 또한 파당으로 나뉘고, 진퇴와 이합집산 모두 다 지덕을 따르지 않음이 없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236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 개략>을 통해 단순히 피상적인 주장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정치, 종교, 과학의 역사와 일본 역사의 비교를 통해 나름 치밀하게 서구화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끌어낸다. 그러한 저자의 논리를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갔고, 후에 제국주의를 거쳐 군국주의로 나아갔음을 알고 있는 독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발견되는 위험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서구 계몽주의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옮겨온 것과 같은 오리엔탈리즘 등의 요소는 책의 논리를 약화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문명은 서양문명보다 뒤처져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명에 앞뒤가 있다면 앞선 자는 뒤처진 자를 다스리고 制 뒤처진 자는 앞선 자로부터 다스려지는 게 이치다(p485)... 무릇 문명이라는 것 物이야 지극히 광대해서 대개 인류의 정신이 도달하는 것은 모조리 그 이 범위 區域 안에 들지 않는 게 없다. 외국에 대하여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는 것 따위는 본래 문명론 중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개 항목에 지나지 않지만, 문명의 진보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므로, 진보의 단계에 따라 그에 맞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486


 개인적으로 <문명론 개략>을 읽으며 개화기 일본 지식인들의 사상과 함께 일본 근대화의 한계 등을 함께 엿보게 된다. 생존을 위한 이른바 문명화. 서구화를 이루기 위해 전통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서구 문명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빠르게 제국주의 열강으로 올라서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근대화는 과연 제국주의를 넘어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는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몰락으로 끝난 일본의 문명화 노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영원히 거북이를 이기지 못하는 아킬레스, 제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서양 인민의 권력은 쇠와 같아서 이를 팽창시키기도 아주 어렵고 이를 수축시키는 것도 또한 결코 쉽지 않다. 이에 반해 일본 무인의 권력은 고무와 같아서 그들이 서로 접하는 곳의 물질에 따라서 수축과 팽창의 형태가 다른데, 아래와 접하면 크게 팽창하고, 위와 접하면 갑자기 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이처럼 치우쳐서 수축하고 치우쳐서 팽창하는 권력을 한 덩어리 一體로 모아서 이를 무가의 위광 威光이라고 이름하며, 그 한 덩어리의 위광으로부터 억압을 받는 자가 무고한 소민 小民이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449

감히 한 마디 말을 내걸어 천하 사람들에게 묻겠다. 지금 이때를 맞아 앞으로 나아갈 進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설 退것인가, 나아가 문명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물러서서 야만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오로지 진퇴 進退라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 P107

덕의의 도에 관해서는 마치 옛사람 古人에게 전매 권한을 빼앗겨 후세 사람은 그저 중매인 같은 일이나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공자 이후에 성인이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덕의에 관한 일은 후세에 이르러 진보할 수가 없다. 개벽한 처음 때의 덕 德이나 오늘날의 덕 德이나 그 성질 性質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지혜는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지혜의 항목이 날로 증가하여 그 발명의 수가 많음은 예로부터 일일이 거론할 겨를이 없으며 앞으로의 진보 또한 가늠할 수 없다. - P290

사람의 정신이 발달함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으며, 조물주 造化의 장치 仕掛에는 법칙 定則이 없을 리 없다. 무한한 정신으로 유한한 이치를 궁리하여 끝내는 유형, 무형의 구별 없이 천지 사이의 사물을 모조리 다 사람의 정신 안에 포괄 包羅하여 빠뜨리는 게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P333

최종 목적을 자국의 독립으로 정하고 마침 지금의 인간만사를 모두 녹여 하나로 되게 하고 이 모든 것을 다 저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에는 그 수단의 다양함에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제도든, 학문이든, 상업이든, 공업이든, 하나같이 이 수단이 아닌 것은 없다. - 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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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 葉公語孔子曰 :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섭공이 공자에게 일러 말하였다. "우리 무리 중에 대단히 곧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아들인 그가 그것을 입증하여 유죄가 되었습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우리 무리 중의 곧은 자는 당신네 곧은 자와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줍니다. 곧음이란 그 속에 있는 것이외다." _ 도올 김용옥, <논어 한글역주 3> , p358


 용산 대통령실이 미국 CIA에 의해 기밀 문건이 도청되었다는 뉴욕타임스(NYT) 기사에 대해 정작 대통령실은 가짜뉴스이며, 국익을 해지는 거짓 선동과 정치 공세라고 맞서고 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많이 답답했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논어 論語>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미국 언론인 NYT가 같은 무리(미국)의 정부의 잘못을 비판한 것은 곧음(直)이 아니기에, 국익(國益)이 아닌 정치적 올바름을 선택했다는. 이제야 정부의 행태가 조금은 일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무리 공자가 위대한 스승이라도 훔쳐간 양이 공자의 양이라도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안보면에서 미국이 전략적 동맹관계에 있다지만, 이와는 별개로 경제면에 있어서는 IRA법안 등을 구실로 국내 반도체, 자동차산업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훔쳐간 것이 우리 기밀이어도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손자병법 孫子兵法>의 <용간 用間>편에서 첩보 활동은 적에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 중 하나다.


 현명한 군주와 어진 장수가 군대를 움직여 적을 이기고 적보다 공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그들보다] 먼저 [적진의 상황]을 알았기 때문이다. 먼저 안다는 것은 귀신에게 기댈 수도 없으며 일의 표면에 의지할 수도 없으며 추측에 시험해볼 수도 없으며, 반드시 사람에게서 취해서 적의 상황을 알아내는 것이다. _ 손자, <손자병법> , p313


 [관련기사] :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677 대통령실, "미국 도청 거짓... 민주당 국민 선동 급급"


 이미 상대는 우리에게 적(敵)을 대하듯 경제면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데 그들을 감싸면서 '불순한 세력' 탓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미국에 대한 굴종은 사대(事大)고, 송양지인(宋襄之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마저도 인식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그들은 일광(日光)횟집 앞에서 도열하는 것을 의(義)로 아는 무리들에 다름 아니다...


 양공은 말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북을 두드리지 않는 법이다." 자어[司馬子魚]가 말했다. "전쟁이란 승리하는 것을 공으로 삼아야 하거늘, 어찌 일상적인 말을 하십니까? 당신 말처럼 하면 [틀림없이]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될 뿐이니, 또한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십니까?" _ 손자, <손자병법>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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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은 그런 ‘이익‘ 추구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모든 정치 이념들이 최소한의 토대적인 공공성에 대해서 동의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즉, 나의 직접적인 이익과 관계없이, 또는 나의 직접적인 이익이 단기적으로 침해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회 공동체의 정상적인 구성원이라면 동의해야만 하는 합의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_ 폴 슈메이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p29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의 저자 폴 슈메이커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관점 차이를 철학적 가정과 정치적 원리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는 결론에서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  pluralist public philosophy'이라는 진보와 보수의 합의점을 도출해 내지만, '보수와 진보의 합의점'이라는 결론이 한국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조금 회의적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유권자 또는 정치인의 성향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이들은 거칠게나마  '우파=보수=민족주의자', vs '좌파=진보=계급주의자'라는 등식과 구도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위에서 앞서 말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기본 전제와 우리의 현실은 차이가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는 현실을 중시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며 미래지향적 성향을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이념을 강조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모순이 나타난다.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자신과 다른 세력을 '이념'으로 적대하며 '빨갱이'로 호칭하고,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계급주의'적인 투표를 한다는 점에서 좌파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은 계층보다 오히려 민족차원의 접근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적인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들이 체감하는 정치 피로감은 이론과 실제의 차이에도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애국을 외치는 이들이 오히려 외세 의존적인 모순은 한국정치만의 특성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한국정치의 특질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 원인을 찾는다면 한국만의 체제 '분단체제'로 부터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며, 분단의 원인이 된 '일제 식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의 기원이 일제 식민 시대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부분 식민 시대에 기원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지금의 혼란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식민시대와 분단 체제의 극복에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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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리뷰] <역사의 종말> : 자유민주주의, ‘패기‘를 통해 불멸의 정체가 될 것인가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4318713 에 글을 남겨주신 김민우님의 글에 답변입니다. 글을 정리하던 중 내용이 길어져 별도의 페이퍼로 정리해 봅니다. 아래는 김민우님께서 남겨주신 글입니다. 


김민우 : 네 하비 맨스필드는 thumos를 즐겨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의하는 thumos는 동물이 위협에 직면하여 털을 곤두세우듯이 인간도 자기의 것(정체성, 소유, 명예)에 대한 위협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념을 지칭합니다. 그 분노가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맨스필드는 말하는데,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을 본 것에 대한 의분은 아님 셈이죠. 후쿠야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 그래서 맹자의 수오지심과의 대응은 말그대로 엉뚱한 생각이라는 의견입니다(아 저는 맨스필드를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해서 그의 글을 즐겨 읽었습니다 ㅋㅋ)


 제가 이해한 바로 김민우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에 언급된 '패기' thumos(thymos)와 관련하여 1)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학문적으로 같은 위치에 서 있는 하비 맨스필드의 정념에 대한 정의 - 자기의 것에 대한 위협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념 -와 2) 이로부터 tumos는 분노이고, 도덕적 기준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 :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과 thumos의 연결이 엉뚱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김민우님께서 지적하신 이들 세 부분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tumos는 자기의 것에 대한 위협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념인가?


 사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후쿠야마의 'thymos'와 맨스필드의 'thumos'가 같은 것인가 하는 부분은 단정하기 어렵다 생각합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맨스필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후쿠야마는 같은 책에서 'thymos'에 대한 최초의 기원을 플라톤에서 찾고 있으며, 플라톤은 <국가 Politeia>에서 이성, 욕구, 격정(thymos)를 각각 혼을 구성하는 3요소로서 설정합니다. <역사의 종말>에서 맨스필드가 언급되지 않았고 플라톤이 설명되었다면, 사상의 원류인 플라톤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생각되어 이하 논의에서는 플라톤을 인용하겠습니다. thymos를 처음 사용한 플라톤에 의하면 이는 감정에 가까운 정념과는 분명 구분되는 혼을 구성하는 또 다른 부분입니다.


439d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 되는 부분(면)을 혼의 헤아리는(추론적, 이성적 : logistikon) 부분이라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이며(alogiston)이며 욕구적인(epithymetikon)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 않을 걸세... 439e 그러면 이들 두 종류가 우리의 혼 안에 있는 것들로서 구별된 걸로 해두게나. 그러나 격정(thymos)의 부분이며, 그것으로써 우리가 격하게도 되는 부분은 제3의 것인가, 아니면 저들 둘 중의 어느 하나와 같은 성질의 것인가" 내가 물었네. _ 플라톤, <국가 제4권> 中


 플라톤은 <국가>에서 격정(thymos)이 '이성'과 '욕구'와 분리되는 별도의 요소이며, 때로는 이성과 때로는 욕구와 결합하여 인간의 여러 행동을 끌어내는 것으로 서술합니다. 격정이 이성과 결합할 수 있다는 <국가>의 내용은 격정을 단순히 분통과 같은 감정의 폭발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 thymos와 이성과 결합 - 에서 사단(四端)을 이(理)로 봤을 때의 기개를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발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440a 이는 다른 경우에도 종종 목격되는 게 아니겠는가? 가령 욕구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림(logismos)을 거스르도록 강요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꾸짖으면서, 자기 안에서 그런 강요를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분개하는데, 이런 사람의 격정(기개)이, 마치 분쟁하고 있는 두 당파 사이에서처럼, 이성(logos)과 한편이 되는 경우 말일세... 440c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겠는가? 이 경우에는 그의 격정이 끓어오르며 사나워질 것이고,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것과 한편이 되어 싸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거나, 죽기까지는, 또는, 마치 개가 목자(牧者)에 의해서 진정되듯, 자신에게 있는 이성(logos)의 불러들임에 의해서 진정되기 전까지는 고귀한 행동을 중단하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_ 플라톤, <국가 제4권> 中


2) thymos는 도덕적 기준을 가지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 철학의 전문가 숀 세이어즈의 해설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자아의 세 부분들에 관한 이론과 심리적 조화로서 정의에 관한 설명이 플라톤의 도덕사상의 주요 개념들이다' . 숀 세이어즈에 따르면 thymos는 도덕적 기준이며 혼을 구성하는 세 요소 - 이성, 욕구, 기개 - 중 기개는 이성을 도와 욕구를 통제하는 보조적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플라톤의 <국가>에서 기개는 다른 욕구에 비해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홉스와 로크에 이르러서는 더 강해져 이성과 욕구만이 강조되었음을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지적하고, 플라톤의 '패기'와 헤겔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끌어내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격상시키고 있습니다. 맨스필드의 경우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개(또는 좀 더 정확하게 자아의 기백이 있는 부분)는 자아의 수많은 단호하고 능동적인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인격의 야망과 경쟁심을 유발하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정의로운 분노와 의분을 이끄는 자아의 부분이다. 플라톤의 영혼론에서 기개는 자아의 다른 두 구분들보다 비교적 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또한 현대 심리학적 연구에서도 미소한 반향을 가질 뿐이다. 플라톤은 사실상 자아에 대한 이중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설명 속에 기개는 욕구들을 통제하는 전투 속에 이성의 단순한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론이 몇몇 정당화를 통해 제시되었다(p141)... 플라톤은 자아의 다양한 부분들 간에 존재하는 본성적인 불평등과 위계질서를 가정하고 있다. 이성은 '좀 더 고상하고' 또한 '좀 더 훌륭한' 부분이며 기개의 도움을 통해서 욕구들을 반드시 통제해야만 한다. 인격의 '좀 더 낮은' 부분이 '좀 더 고상하고' 또한 '좀 더 훌륭한' 부분에 의해서 통제될 때 사람들은 자기 훈육의 덕을 보여 주게 된다(p143)... 자아의 세 부분들에 관한 이론과 심리적 조화로서 정의에 관한 설명이 플라톤의 도덕사상의 주요 개념들이다. _ 숀 세이어즈, <숀 세이어즈의 플라톤 <국가> 해설>, p144 


 3) 수오지심(羞惡之心)과 thumos의 연결은 엉뚱하기만 한 것인가?


 이상에서 thymos는 혼의 구성요소이며, 정념과는 다른 도덕기준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이성-욕구-기개'라는 구도에서 '기개'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이 구도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말한 혼의 세 부분과 관련한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같은 측면에서 저는 이성으로서의 이(理), 욕구로서의 기(氣) 그리고 이들과 결합하는 기개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상이 다소 엉뚱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리뷰에서 언급한 이러한 제 생각, 추측이 정확하게 플라톤, 맹자의 사상을 짚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수오지심=패기/기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인간의 본성을 크게 이성과 욕구로 보고 이들로부터 논의를 진전시킨 동서양의 철학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플라톤(BCE 428 ~ 348)과 맹자(BCE 372 ~ 289)라는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던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이성과 욕구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화두로 던져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사상에 사용된 용어의 정의가 정확하게 일치되지 않았고, 이들 사상이 철학자 자신의 생각이기보다 후대의 해석이 반영된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만.


 이상으로 <역사의 종말> 리뷰 하단의 판단 근거를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이와는 별도로 개인 서재에 올린 글에 대해 엉뚱하다고 지적하신 부분은 위의 논의와는 또 다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개인 서재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고, 타인에게 상처와 같은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이러한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의 근거와 관계없이 개인의 서재에서 이러한 생각의 월경(越境)이 크게 지적받을 부분은 아니지 않나 여겨집니다. 물론, 학문의 정합성을 요구하는 학술지에서 이러한 상상은 곤란하겠지만요. 리뷰에는 다 올리지 못했지만, '이-사단'을 연결시키고 '기개-수오지심'을 연결시키면서 '과연 사단(四端)을 이(理)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봉과 퇴계의 오랜 논쟁을 먼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내용을 긴 답변 끝에 참고로 올려봅니다.


 너무 글이 길어졌습니다. 김민우님 덕분에 글을 쓰면서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정치사상가 하비 맨스필드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의 사상 특히 thumos에 대해  플라톤, 후쿠야마의 그것과 비교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김민우님, 좋은 하루 되세요!



 니체의 말처럼, 하나의 민족을 선과 악의 개념을 공유하는 도덕적인 공동체로서 정의한다면 민족과 민족이 만들어낸 문화는 혼 속의 '패기' 부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인정받기 원하는 욕망은 종교와 민족주의라는 매우 강력한 두 가지 정열의 심리적 기원이기도 하다. 종교와 민족주의는 '패기'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정열에는 커다란 힘이 주어져 있다. _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 p320


 맹자가 말하는 인간은 그 애초의 출발점 자체가 생리적 인과체계가 아니라, 선의지로 충만되어 있는 도덕적 인간 Moral Man이다. 어린애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무 전제 없이 출척怵惕하는 심사가 심사가 생겨 반사적으로 달려가는 것은, 이미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도덕적으로 단련되어온 인간이다. 유자입정을 바라보는 인간은 사회화된 인간이며 언어화된 인간이며 역사회된 인간이며 도덕화된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유자입정의 순간에 비공리적, 무전제적 선의지가 발동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無惻隱之心 非人也). _ 도올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상)> <공손추 상>, p256


 "측은지심 惻隱之心'은 '측은함'이라는 감정을 노출시키는 심적 현상일 뿐이다. 측은지심이 곧 인 仁이라는 덕 德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덕의 '단 端, tip'일 뿐이다. 따라서 '단 端'은 인이라는 덕이 표현된 심적인 현상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단 四端'은 기 氣가 아니라 리 理라고 말하는 후대의 논설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_ 도올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상)> <공손추 상>,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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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2-03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humos에ㅜ대해 더 자세히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라톤의 thumos는 계속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덕분에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제 비아냥거림에 이렇게 생산적이고 친절하고도 품위있는 답변을 남겨주신 겨울호랑이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비 맨스필드의 thumos에 대해서는 국내 번역된 글ㅇ 중에는 제대로 다룬 것이 없을 겁니다. 저도 How to Understand Politics 이라는 에세이를 읽고 알게 된 것인데, 저도 thumos와 관련해 그의 의미 있는 언급을 인용하는 게 겨울호랑이님의 수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아 옮겨놓겠습니다.

Redman 2023-02-03 10:46   좋아요 1 | URL

기개는 본성상 복잡하다. 때때로 기백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고유한 자아를 좋음과 연결시키는 영혼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기개는 동물의 신체를 지닌 인간이 고유의 특색을 지키려는 맹렬한 방어를 드러내며, 실제적 혹은 잠재적 위협에 직면하여 동물이 발끈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일 경우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변화를 향한 갈망보다는 차라리 경계의 반응에 가깝다. 동물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공격할 경우 이성은 선을 넘는다.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기개의 역설이며, 명백한 모순을 보여준다. 인간 동물로서, 당신은 자신의 삶을 비난할 수 있으며 사과하고 수치를 느낄 수도 있다. 수치는 기개로 인해 느끼기 때문이다.

Thumos is by its nature complicated. Sometimes tranlsated as spiritedness, it names a part of the soul that connects one‘s own to the good. Thumos represents the spirited defense of one‘s own characteristic of the animal body, standing for the bristling reaction of an animal in face of a threat or a possible threat. It is frist of all a wary reaction rather than eager forward movement, though it may attack if that is the best defense. The reason ofthen goes too far when the animal risks its life in all-out attack in order ro preserve itself. To risk one‘s life to save one‘s life is the paradox of thumos, the display of an apparent contradiction. As a human animal, you can condemn your life and say you are sorry and ashamed, for shame is due to thumos.
(중략)
기개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동물성을 본다. 왜냐하면 인간(특히 남성)은 종종 개가 짖고 뱀이 쉿쉿 거리며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여기서 우리는 또한 인간적 동물의 인간성을 본다. 인간은 위협에 발끈할 뿐만 아니라 분노하기도 하는데, 다시 말해 근거, 심지어는 원칙, 원인에 대해서도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분노한다. 당신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다면, 그 행동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는다. 당신은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깊이 숙고하였든 당연하게 받아들였든 근거가 없다면 억울하다고도 느낄 수 없다.

In thumos we see the animality of man, for men (and especially males) often behave like dogs barking, snakes hissing, birds flapping. But precisely here we also see the humanitu of the human animal. A human being not only bristles at a threat but also gets angry, which means reacts for a reason, even for a principle, a cause. Only human beings get angry. When you lose your temper, you look for a reason to justify your conduct; thinking out the reason may take a while after the moment of feeling wronged is past, but you cannot feel wronged without a reason - good or bad, well considered or taken for granted.

Redman 2023-02-03 10:51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맨스필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thumos를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마키아벨리의 animo도 thumos로 연결짓죠. 레오 스트라우스를 사숙한 제자이니 아마 이건 스트라우스의 견해를 모방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겨울호랑이 2023-02-03 10: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김민우님께서 하비 맨스필드의 내용을 알려주신다면, 후에 그의 책을 읽을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민우님, 즐거운 하루와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2-03 10:54   좋아요 0 | URL
하비 맨스필드와 관련해서 좋은 소개와 번역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도 김민우님으로부터 많이 배워갑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Redman 2023-02-03 14:35   좋아요 1 | URL
하비 맨스필드를 읽어보신다면 먼저 <정치철학 공부의 기초>를 권합니다. 맨스필드를 위시한 스트라우스주의자의 정치철학 관점이 유려한 문장으로 잘 서술된 책입니다.
그리고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와 토크빌로 중요한 연구를 많이 남겼는데, <마키아벨리의 덕목>(제가 서평도 썼습니다) <Machiavelli‘s New Modes and Orders> 꼭 읽어볼 책입니다. VSI 시리즈로 나온 토크빌 입문서인 <Tocqueville>도 좋습니다. <남자다움>이란 책은...마사 누스바움이 쓴 서평을 읽어보니 굳이 안 읽어도 되겠다 싶어서 권하지는 않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2-03 17:11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김민우님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