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는 각 예술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로 네 명을 설정하는데, 소설가 베르고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뱅퇴유, 여배우 라 베르마, 그리고 화가 엘스티르로 각각 문학, 음악, 연극, 미술을 대표한다. 이들과 직접 대화하며, 혹은 그들의 작품 앞에서 마르셀은 점점 예술 세계에 눈을 뜨고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간다. _ <프루스트의 화가들>, p89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 지망생인 화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작품의 방향성과 주 무대인 19세기 프랑스 사교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등장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약 작품 안에서 예술과 관련된 부분을 드러낸다고 하면, 화자의 첫사랑 질베르트와 실패한 사랑 알베르틴의 이야기만 앙상하게 남을 것이기에, 이들 가지 위에 피어난 예술과 감각의 이야기는 어렵지만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프루스트의 화가들>,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은 19세기말 낯선 유럽의 문화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음악가 뱅퇴유는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사중주를 통해 마르셀에게 음악 작품 속에 스며 있는 작곡가 고유의 서명과도 같은 악절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뱅퇴유는 딸과 그녀의 동성애자 애인에게 무시와 푸대접을 받는 대상이다. 화가 엘스티르는 은유를 통해 사물을 해석함으로써 마르셀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붓을 놓았을 때의 그는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시시한 농담을 일삼는 인물이다. 라 베르마라는 대여배우는 무대 위에서는 라신의 비극이 마치 그녀를 위해 특별히 쓰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뛰어나게 작품을 해석하지만 어머니로서 그녀는 딸과 사위로부터 버림받는 존재일 뿐이다.  _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p193


 

 두 권의 내용은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여러 미술작품을 통해 시각적으로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해 알려주는 엘스티르와 작가 프루스트의 작품관(소설이라는 최종 선택과 문학에 대한 깊은 사유)을 보여주는 베르고트 덕분에, 화자는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작가와 작품은 분리된 존재이며,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작은 일상이나 미세한 부분, 작은 악절 하나로도 대작이 나올 수 있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종착역까지 어떤 영향이 있었는가를 두 권의 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엘스티르라는 인물은 유일하게 프루스트가 창조해 낸 가상의 화가이다. 허구의 인물임에도 엘스티르가 모네, 마네 등의 현존했던 화가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이유는 이 인물이야말로 프루스트의 미술론, 작가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_ <프루스트의 화가들>, p88

 프루스트가 베르고트라는 인물을 창조하고 그에게 소설가라는 직업을 부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프루스트는 시, 평론, 번역 등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다가 결국은 소설이라는 형태의 문학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데 베르고트는 문학과 그것을 창조하는 작가에 대한 프루스트의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_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p182


 화자는 작가인 베르고트가 아닌 화가인 엘스티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방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작가가 된다. 반면, 작가인 베르고트는 화자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작가 프루스트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감각적인 시각에서 추상적인 문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 일종의 도약이라면, (휘슬러의 미술에 대한 음악적인 해석 같은) 순간은 예술의 영원성과 접합을 통해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감각의 교차, 시간의 접합이 만들어 내는 예술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는 분리된다는 것은 또다른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마르셀은 엘스티르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의 임무와 역할을 깨닫고, 그의 그림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즉 엘스티르가 붓으로 표현한 진리를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소명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_ <프루스트의 화가들>, p89

 프루스트의 예술론을 이루는 주된 특징 중 하나가 보들레르에게 영향을 받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혹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Correspondance)으로 대표되는 상징주의인데, 프루스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형시켜 인간이 가진 오감이 서로 교감하여 비의도적 기억으로 이어지는 예술론을 펼친다. _ <프루스트의 화가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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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국회의장은 비서관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동이 트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
출근길 시민들이 계엄군을 만나게 되면 자칫 흥분하고 그러다 유혈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둘째는 동트기 전에 계엄을 해제하되 흠이 잡히면 안 된다는것. 우리 절차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저쪽에서 무효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절차를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죠." - P10

2024년 12월3일 밤, 국회는 분명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다. 폭거가 문턱까지 쳐들어왔지만, 끝내 정의를 지켜냈다.
비상계엄 발령부터 해제까지 6시간이 걸렸다. 유례없이 신속하고 빠른 대응이었다. "짧은 순간 가장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조오섭)" "긴박한 순간에 각자가 있어야 할 위치를 지켰다(이시현)" "빠듯했지만 절차적 정당성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했다(이관후)"
등 저마다 평가가 조금씩 달랐다.  - P15

윤석열은 이후 오전 0시32분부터 이진우에게 1~2분 간격으로 연달아 세차례 전화를 걸고, 오전 0시48분 조지호에게 전화를 했다. 내란 특검은 윤석열이 이때 이진우에게 ‘아직도 못 들어갔어? 본회의장으로 가서 4명이 한 명씩 들쳐업고 나오라고 해‘ ‘문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고 지시하고, 조지호에게 ‘국회로 들어가는 국회의원들을 포고령 위반으로 전부 체포해‘라고 지시한 것으로 파악했다. - P19

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압수수색 영장에는 뇌물죄를 적용한 적이 몇 차례 있지만, 최종적으로 김건희씨에 대한 뇌물죄적용 여부는 지금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재판 단계에선 더 엄격한 증명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김건희씨와 윤석열, 두 사람이 모의했다는 게 인정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입증해야만 김건희씨가 공동정범으로서 공범이 된다. 부부 공모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건 윤석열의 인지 여부다. - P24

핵잠수함은 더 강력한 핵억지력과 역내 군사적 영향력을 한국에 줄 것이다. 더 큰 역할은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핵잠수함 보유국으로서 한국은 미국의 군사안보적 압력에서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할 것인가? 핵잠수함이라는 ‘선물‘이 미국주도 ‘전략적 유연성‘의 수단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떤 외교적 안전망을 마련할 것인가? 핵잠수함 추진 승인은 이런 질문의 시작이다. - P28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인공지능을 사용했음을 밝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성형 AI 사용을 막을 수도 없고, 막는 게맞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막을 수 없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는 방법을 레퍼런스 삼아 학생들과 다시 합의해야 한다. 결국 생성형 AI 활용을 금지하기보다 가이드라인을 두고 투명하게 사용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P33

그렇기에 고운사 사찰림과 같은 자연복원이 가능한 숲은 우리에게 축복이다.
이런 자연을 우리는 지금 "돈이 되는 자연으로 만들자"는 구호로 다시 깎아내리려 하고 있다. 산불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새로운 개발의 명분이 되는 순간, 이 축복은 되돌릴 수 없는 손실로 바뀐다. - P36

사람들이 말하는 ‘안락사‘란 무엇인가. 생애 말기에 병원(요양원 포함)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 통증 없이 죽고 싶다는 희망, 병원보다는 집에서 죽는 것이 더낫다는 믿음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 주목할 것은 환자가 생애 말기에 어디서든 (집이든 시설이든) 통증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의료시스템이다. 그리고 연명의료결정제도의 확충이다.  - P40

결국, 서양이 성공한 것은 유럽이 가진 지리적 이점과 서유럽인의 독특한 문화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지리적 이점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고, 특별한 문화역시 로마시대 교회가 우연히 결정한 가족제도 개혁에서 기원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모두 우연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제 동양은 지리적으로 불리하지만은 않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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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_ <이방인>,  P7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의 죽음. '나(뫼르소)'는 두 죽음을 통해 사회와 연관된다.

 서로 다른 두 사건. 그렇지만, '사회'는 두 사건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뫼르소와 연관된 하나의 사건. 하나의 죽음(엄마)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는 또 다른 죽음(아랍인)에 대한 뫼르소에 대한 판결을 결정짓는다. 그런 면에서 두 사건은 별개이면서 동시에 긴밀하게 연결된 사건이다.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P74) ...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_ <이방인>,  P78


 엄마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는 뫼르소의 태도는 사회가 그를 인식하는 기준이 된다.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반(反)사회적 성향이 있다는 이유로 뫼르소는 외부인, 이방인으로 규정된다. 사회,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이러한 인물들은 위험 인물로 낙인찍힌다. 곧 뫼르소는 반사회적 인물로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될 것이다...


 여기 물음을 던져본다. 이 판결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것이 그에게는 다른 방식의 사랑 표현일 수도 있었다. 눈물로 드러나지 않은 슬픔,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상실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냉혈한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의 슬픔은 무의식의 심연 아래서 끓고 있을지도 모른다. 외부인이 볼 수 없는 내면과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감정을 '없다'고 단정짓는 것은 사회가 그에게 가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아닐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엄마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살인 사건의 평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당한가? 어쩌면 그는 단순히 무관심한 인물이었고,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조금 특이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냉혹하기 그지없다.


 이에 반해 살라마노 영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사뭇 다르다. 평소 자신의 개를 괴롭히다가 잃어버린 후에 슬픔을 표현한 노인에 대해 사회는 매우 관대하다. 끝이 좋으면, 아니 '보여지는 슬픔'이 있다면 다 좋은 것인가. 죽음의 순간에 애도의 모습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가 과연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 이렇듯 사회는 우리에게 자신의 관점이 아닌 사회의 관점으로 연기하며 살아가길 요구한다. 카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부조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_ <이방인>,  P137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남들이 뭐라 하든, 너 자신이 되어라.


 책을 읽으며 가수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을 계속 떠올린다. 남들과 다른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고 살아가는 쿠엔틴 크리스프(Quentin Crisp)를 모델로 한 이 노래를 들으며, 나에게 주어진 '사형'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은 그에게 모순된 부조리의 종말이자 해방이라면, 그에게 내린 판결을 지켜본 사회는 부조리 안에서 사는 모순을 지속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뫼르소(개인)는 죽어서 진정한 (모순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얻은 반면, 사회는 모순의 굴레에서 서서히 진정한 자아를 죽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어서 얻은 삶과 살아가면서 얻은 죽음.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이것은 또다른 모순이다. 모순은 모순을 낳고, 이는 끊임없이 꼬여간다. 개인과 사회는 이처럼 여러 겹 꼬인 관계 속에서 중첩된 모순을 채 깨닫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불안정한 동거를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여운을 느끼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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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이렇게 팔딱거리는 것은 이 맛과 연결되어 맛을 따라 내게로 오려고 하는 장면이나 시각적 기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멀리서, 너무도 희미하게 몸부림치고 있어서 나는 뒤섞인 색채들의 포착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반사된 불분명한 상만 겨우 지각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형태를 분명히 알아볼 수 없고, 단 하나뿐인 번역가에게 하듯 그 상에게 그것과 동시대에 태어나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인 미각에 대한 증언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할 수 없으며, 그것이 내 과거의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어떤 시기를 말하는지 알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 P48

그때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객관적인 요소로 환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 이후로도 배운 적이 없었으며, 눈동자의 색깔에 대한 개념을 끄집어내는 소위 ‘관찰력‘이 없었으므로, 여자아이가 금발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오랫동안 그 아이를 생각하면 빛나는 그 눈동자의 추억이 선명한 푸른 빛깔로 떠올랐다. 여자아이의 눈동자가 그렇게 검지 않았다면 그 아이를 처음 본 사람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그 눈동자가 푸른색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에 빠지진 못했을 것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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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P7

아마도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 P74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 P78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특권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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