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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11권 28.38)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에게 '시간'은 인간의 개념이다. 하느님(神)의 시간은 영원이며 불변이다. '시간'과 '공간'마저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창조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 '현재'로 존재한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시간을 가지고, '미래->현재-> 과거'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통해,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는 시간의  확장을 통해 하느님께  영혼이 흘러간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시간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연속적으로 바라본다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 ~ 1997)에게 시간은 연속적이되 각자 의미를 가진 독특한 상황들로 정리된다.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에서 (의미있는) 시간이 가진 '카이로스'의 특성에 주목한다.


 상황들은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고, 의미도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상황에 대응해 뭔가를 할 가능성"도 각자가 역시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카이로스 Kairos"의 특성을 갖고 있다.... 상황이 부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만 한다면, 상황이 붙들고 있는 의미를 채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한번 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지속되고, 더 이상 일시성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p61)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카이로스는 주관의 시간이며, 기회(機會)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이 기회를 잘 살려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닌, 영원을 살 수 있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에서 흐로노스로의 전환. 이것은 순간의 영원으로의 전환이며, 주관의 시간이 객관의 시간으로 흐름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에서 흐로노스(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中


 빅터 프랭클은 각 시간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과거에 우리의 지나간 삶이 담긴 저장소라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속적 시간론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간(과거) 속에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아무것도 잃어버릴 게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거에 영원히 저장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시성의 그루터기가 가득한 황야만 본다... 의미들은 독특하고 유일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한다. 그러나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p62)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반면,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 ~ 1995)의 시간론은 철저한 분리를 전제 한다. 레비나스 초기 철학에서 자아는 현재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홀로서기(hypostase)'는 말로 표현하면서, 연속적인 흐름보다는 관계성(關係性)에 주목한다. 이는 레비나스 철학 중 '타자와의 대면'으로도 연결되겠지만, 리뷰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지금, 곧 현재는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현재라는 순간에 사람은 홀로 선다.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우리는 언제나 확인해야 한다. 홀로서기는 과거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p128) <시간과 타자, 해설> 中


 과거와의 관계를 끊음으로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자아(自我).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레비나스의 시간론은 단속적(斷續的)이라는 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프랭클의 연속적(連續的) 시간론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현재는 자기하고만 관계한다. 자유를 가지고 현재를 눈부시게 해야만 했던 이 관계는, 그러나 현재를 동일화 속에 가두어버린다. 과거에 관해 자유로우나 그 자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현재는, 현재가 연루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현재가 과거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력은 현재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재를 으스러뜨리는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에게 강요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현재는 탄생을 선택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p133) <존재에서 존재자로> 中


 이처럼 레비나스와 프랭클의 시간론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독일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가진 삶과 죽음의 극한(極限)을 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선(死線)을 넘어서 레비나스가 '존재와 존재자'를 발견했다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다. 같은 경험에서 나온 다른 깨달음. 이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로 넘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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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찾기 Recherche'에서 본질적인 것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鋪石) 안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 '찾기'는 단순히 추억해 내고자 하는 노력, 기억에 대한 탐색이 아니다. '찾기'는 '진리 verite 찾기'라는 표현에서처럼 그 말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한편 잃어버린 시간 le temps perdu은 단지 지나간 시간 le temps passe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낭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억이 찾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p2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내용을 '진리 찾기'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진리는 결코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기호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기호의 폭력이 난무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이것만큼 프루스트가 강조한 테마는 거의 없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外現的)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 sens 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마주침의 [속성인] 우연과 강요의 [속성인] 압력을 프루스트의 두 가지 근본적인 테마이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p4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리를 찾는 이는 누구인가? 들뢰즈는 사랑에 빠졌지만, 애인(알베르틴)의 거짓말로 고통받는 이가 진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교장, 공연장 등에서 수많은 기호들의 압력을 받으며 진리 찾기를 강요받는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았고, 나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그녀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날 떠난다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中 


 <누가> 진실을 찾는가?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가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가는 어던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친화성 affinite이나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선(善) 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게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들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p4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p238)...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p31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리 찾기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메제글리즈와 관념적인 게르망트. 이들은 배움의 두 측면이며, 주인공(혹은 화자)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배움을 펼친다는 것이 들뢰즈의 해석이다. 그리고, 진리 찾기의 방향은 미래로 향한다.


 이 책은 어떤 배움 apprentissage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다. 메제글리즈 Meseglise 쪽과 게르망트 Guermantes 쪽은 추억의 원천들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線)들이다. 그것은 수련 formation의 두 측면이다.(p22)... 이 배움은 배움의 목적들과 원리들을 통해서 [수단인] 기억을 넘어선다. '찾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放出 emettre)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p23)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p3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또한, 들뢰즈는 기호들의 세계에서 궁극적인 기호인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를 지망하는 주인공에게는 문학이 궁극적인 기호로 작용하며, 예술을 통해서만 진리는 비로소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깨달은] 그때부터,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먼저 거쳐 온]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감각적 기호들에 대해서 그렇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들은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한다.(p3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기호와 의미의 진정한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기호가 자신을 방출하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기호를 구성한다. 또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에게로 의미가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의미를 구성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최종적 결론 혹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시가 바로 본질이다.... 오로지 예술의 층위에서만 본질은 드러난다.(p68)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p15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그렇다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은 시간안에서 우리에게 인식되기에,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의 네 가지 시간 구조는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는 헛되이 보내버린 시간의 의미를 찾는 것. 예술을 통한 절대적인 시간의 획득. 이것을 들뢰즈는 배움의 성과로 해석한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섞여 버린다. 바로 이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구별은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구별이다. 되찾은 시간의 진실 못지 않게 잃어버린 시간의 진실도 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는 각기 저마다의 고유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 시간의 네 구조를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다.(p42)...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p4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뿐 아니라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고계의 기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함축한다. 또 사랑의 기호는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감싸고 있다. 감각적 기호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되찾게 해주며, 그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마지막으로 에술의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 이 되찾은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다.(p5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시간이란 이미 펼쳐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시간이 그에 맞추어 전개될 서로 구별되는 차원들은 아직 없으며 또 시간이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리듬들에 맞추어 분포될 서로 분리된 계열들조차 아직은 없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은 영원과 동일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p79)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p19)...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확실성이라는 착한 천사가 내 주위 모든 것을 고정해 나를 내 방 이불 아래 갖다 눕혔고, 어둠 속에서 내 옷장, 책상, 벽난로, 길가 쪽 창문, 두 문을 대충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p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들뢰즈의 주장을 요약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찾는 배움의 과정으로, 주인공이 맞게 되는 수많은 기호 중 예술이라는 궁극의 기호를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들뢰즈에게 (절대적) 시간은 진실이 표현되는 다른 차원이며, 진실 찾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추론은, 단지 '되찾은 시간'을 비의지적인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의 경험과 혼동하는 해석,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비의지적인 기억의 단편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에는 결여되어 있는 풍성함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 부여하는 기나긴 각성의 체득을 무시하는 해석들을 무너트릴 뿐이다... 예술 작품의 초시간적 extra-temporel인 차원을 발견하는 것은 기호의 체득에 비해 아주 독특한 경험이 된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비의지적인 기억이나 기호의 체득과 동일시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층위의 경험과 화자가 거의 삼천 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의 끝에서야 뒤늦게 베일을 벗기는 전대미문의 경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바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 말할 수 있게 된다.(p273) <시간과 이야기2> 中


 이에 반해,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 ~ 2005)는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e'cit>에서 들뢰즈와 의견을 달리한다. 배움의 끝에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들뢰즈의 의견과는 달리, 리쾨르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 주인공과 화자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되찾은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라는, 적어도 두 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세속적이고, 애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미적인 모험들을 그것이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 이야기한다. 여기서 언술 행위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결말을 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투사하는 "과거 속에서의 미래"라는 형태가 생겨났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화자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화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에 의해 이야기되는 경험에 되찾은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의미를 두게 한다는 것이다.(p279) <시간과 이야기2> 中


 초시간적 존재(l'etre extra-temporle)로 주인공을 내려다 보고 있는 화자,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 이들이 '되찾은 시간'에서 '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영원성이 시간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리쾨르는 해석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절대적 현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지게 되는 유년기의 추억은 바로 비몽사몽의 과거 속에 삽입되는 것이다. 그 추억들은 마들렌 과자의 경험이라는 독특한 삽화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삽화는 그 자체가 표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추억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p281)... 우리는 의지적인 기억의 취약함을 선언하고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을 우연에 맡기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 이 삽화의 표면에서 이면으로 옮겨가게 된다.(p282)... 화자가 유보시키고 있는 표지는 <되찾은 시간>에서 결말을 알고 다시 책을 읽을 때 그 의미와 효력을 갖게 된다.(p283) <시간과 이야기2> 中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9)...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무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에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되찾은 시간이라는 말은 때로는 초시간적인 것을, 때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로지 글을 쓰겠다는 결정만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가 갖는 이원성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p300)... 글을 쓰겠다는 결정은 이처럼 근원적 전망에서 비롯된 초시간적인 것을, 잃어버린 시간이 되살아나는 시간성으로 옮긴다는 효력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되찾은 시간이 갖는 한 가지 의미 작용에서 다른 의미 작용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p301) <시간과 이야기2> 中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므로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p84)... 영원히 죽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 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리쾨르의 주장을 요약하면, 화자와 주인공의 서로 다른 층위의 경험은 되찾은 시간 안에서 예술(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만나게 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처음부터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받게 된다. 초시간의 시간화. 결국,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실찾기'로 '근원적인 절대적 시간'을바라봤다면, 리쾨르는 '화자와 주인공의 시간속에서의 통합'으로 해석하며 '초월적 시간'의 '시간화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들뢰즈의 시간방향이 미래로 지향한다면, 리쾨르의 시간방향은 되찾은 시간의 이행을 의미하기에 과거로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진실찾기 끝에 도달한 결론인 반면, 리쾨르에게 (되찾은) 시간은 진실찾기의 출발점이 된다. 알파와 오메가. 
















이들의 해석은 이처럼 차이가 있음에도, 새로운 2020년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의 해석이 모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 삶을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의미 찾기 과정으로 본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고, 보내고 있으며, 맞이한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삶의 의미는 우리와 주변의 상황들에 의해 기호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각각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들뢰즈의 관점이라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며 삶을 재해석하는 것이 리쾨르의 방식이 아닐까.


 2019년과 그 이전의 시간들을 매 순간 정리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삶의 끝에서 바라본 모습과 의미는 또 다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9년을 보내면서 아쉬운 점이 많은 한 해로 기억하겠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에는 2019년이 내 인생의 분기점으로 기억될런지. 한 해를 보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관점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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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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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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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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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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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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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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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댕의 「국가에 관한 6권의 책」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었으나, 1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품절되어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평소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때마침 중고서점에 2권을 제외한 3, 4, 5, 6권이 나와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매우 기쁜 마음으로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런 마음도 잠시. 채 구하지 못한 2권 생각이 자꾸 머리에 남는 것이 사람 마음일까요.

단순 계산만으로도 제가 기뻐해야할 이유는 3, 4, 5, 6권의 4가지라면, 아쉬운 마음은 2권 1가지 뿐인데, 아쉬운 마음이 더 크게 자리잡는 제 마음을 지켜보며 여러 생각을 해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아쉬워하는 목자같은 마음이라고 스스로를 감싸보지만, 사실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쟁이겠지요... 사람 욕심이 끝없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고, 매사에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많은 순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행복은 없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란 외적으로 좋음도 충분히 구비하고 있으며 일정 기간이 아니라 평생토록 유덕한 활동에 전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1101 a 15 ~ 17) 「니코마코스 윤리학」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행복은 외적인 요소뿐 아니라 자신의 관점과 노력에 의해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국가에 관한 6권의 책」을 채 펼치기도 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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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9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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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9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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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0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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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1 0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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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1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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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브로긴 2019-12-21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댕 책 책세상에서 나온 발췌번역본만 읽었는데 거대한 규모의 책이었군요..^^

겨울호랑이 2019-12-22 00:3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Comandante님 말씀처럼 저 역시 전집 규모의 책임을 뒤늦게 알고 나니 더 욕심이 났습니다. 책욕심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Comandante님 편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2019-12-24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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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환자의 침실은 가정에서 병원으로 전이되었다. 이러한 전이는 의학적 기술을 빌미로 가족들에게 용인되었으며,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더욱 보편화되고 절차도 매우 간편해졌다. 이때부터 병원은 죽음이 공개성 혹은 그것의 잔재들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이렇게 해서 병원이 고립된 죽음의 장소가 된 것이다.(p1030) <죽음 앞의 인간> 中


 <죽음 앞의 인간 'homme Devant la Mort>의 저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20세기의 죽음을 '역전된 죽음'으로 특징짓는다. 죽음을 입에 담지 않고 '침묵'을 통해 회피하는 모습이 <죽음 앞의 인간>에서 그려진다.


 죽음이라는 말은 금기처럼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 되고 있어서 예의범절을 아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합당한 표현으로 완곡하고 정숙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수사학을 사용해서 발설할 수 없는 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면, 20세기에 와서는 침묵에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p1032) <죽음 앞의 인간> 中


 이러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에서는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노교수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시한부 삶을 남겨두었지만, 노교수는 아직 젊은 제자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내용을 중심으로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과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리 교수의 태도 안에서 우리는<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에서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0 ? ~ BC 50?)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린 죽음의 광경을 보는 걸 너무도 두려워하지. 저번에 책을 읽었네. 병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시트를 머리에 씌운 다음 바퀴 달린 침대에 주검을 싣고 통로를 지나 내려간다더군. 죽음의 광경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안달하는 거지. 사람들은 죽음이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곤 해. 자네도 잘 알듯이 죽음은 전염되지 않아. 삶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죽음도 자연스럽다네. 그것은 우리가 맺은 계약의 일부일 뿐이야.(p249)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830)...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수 없으리라.(839~840)...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대는 물론 죽음 속에서 잠든 것처럼, 그렇게 남은 온 세월 동안 괴로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 하지만 우리는 소름 끼치는 화장장 가까이에서 그대가 재가 된 것을 그칠 줄 모르고 애곡했노라, 그리고 그 어떤 날도 우리 가슴에서 영원한 슬픔을 없애지 못하리라.(904~908)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中


 살아간다는 것이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의 다른 이름임을 생각한다면, 모리 교수와 루크레티우스의 말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으로도 죽음을 받아들인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는 말과 사랑을 나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받는 것은  내가 죽어 가는 느낌을 준다네. 하지만 베푸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심오한 말이다. 그리고 과연 맞는 말이다. 받는 것, 소유하는 것은 살아 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마케팅, 영리주의, 광고계의 기본이겠지만, 모리는 '문화에 현혹되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새 차, 새 옷, 새 평면 TV를 소유하는 것. 이런 것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일시적인 흥분감이 있지만, 신제품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품질 보증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진다.(p30)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것을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한 상황에 처한 나보다 훨씬 더 불행해.(p83)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죽기 전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라는 모리 교수의 말은 쇠렌 키에르케고르(Sψ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의 '신(神) 앞에 선 단독자'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키에르케고르와 달리 모리교수는 유대교 신앙을 가졌기에 차이가 있지만, 유일신이며 인격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크게 무리한 해석만은 아닐것이다. 이에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øden>의 일부를 옮겨본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하고도 단순하다. 말하자면, 단독자가 스스로 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낳을 때 오직 그 때 비로소 진리가 그에게 존재하는 것이다.(p358)...  우리는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동정심은 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은 모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그리고 진지하게 인정할 때만 진실하다. 오직 그때에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다.(p186) <불안의 개념> 中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어떤 세속적, 육체적 질병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닌데, 왜냐하면 죽음은 사실 모든 질병의 끝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그 어떤 물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병은 곧 그 끝이 죽음이고 또 죽음이 그 끝인 그런 질병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다.(p63) <죽음에 이르는 병> 中


 죽음이 필멸의 존재인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과제라는 점에서 <불안의 개념>에서 말한 단독자가 가져야 하는 동점심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 선 단독자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며, <죽음을 이르는 병>에서 말한 죽음을 가져오는 절망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런지. 다소 기독교적인 해석이지만, 모리 교수의 태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그림자가 살짝 느껴진다.('살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리 교수의 이야기에서는 '원죄'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의 리뷰에서 다룰 계획이다.) 다시 돌아오면, 모리 교수는 키에르케고르의 동정심보다 더 나아가 사랑을 나눌 것을 강조한다. 


 내가 이 병을 앓으며 배운 가장 큰 것을 말해 줄까? 사랑을 나눠 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p104)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내 말을 믿게. 죽어 가고 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다 같다는 게 참말임을 알게 되네 . 우리 모두 출생이라는 걸로 똑같이 시작하지. 그리고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야? 인류라는 대가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네.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게.(p231).. 여기에 비밀이 있네. 아이 때와 죽어 갈 때 이외에도, 즉 살아가는 시간 내내 사실 우린 누군가가 필요하네.(p232)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사랑을 나누는 것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사선(死線)의 지평을 바라본 한 노학자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죽어서는 단독자로서 심판대에 서는 것은 동서양(東西洋) 모두에서 공통된 처지인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환생(環生)을 통해 업(業)을 소멸하는가 하는 점인 듯하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만일 그대가 애착심과 혐오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면 앞에서 말한 어떤 환영이 나타나더라도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에게 기도하라. 그리고 자비의 신에게 기도하라. 그대가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라. 모든 나약함을 버리라. 그대의 아들과 딸들 또는 두고 온 친척들에 대한 애착을 끊으라. 그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p447) <티벳, 사자 死者의 서 書> 中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의 이 라틴어는 고대 로마 개선식 때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인사로 사용되었다. 기쁜 날 사용된 이같은 말이 사용된 이유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절대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와 '기회', 'timing'을 의미하는 카이로스에서 이 또한 분리될 수 없음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카이로스)를 잘 살릴 때, 우리가 죽음 이후 시간이 소멸된 어느 지점에서 절대 시간(크로노스)를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통해 죽음의 의미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낸 지 20년이 흘러서야 마음 깊이 깨닫는다. 모리를 힘들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잊히는 것이었다.(p27)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잊히기를 두려워 한 이름이 '죽음'인 노교수를 위해서 '메멘토 모리'를 읊어보며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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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19-11-24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겨울호랑이님의 깊은 고찰에 경의를 표합니다.
죽음에 대해 잘 알 수 없어서 그저 카이로스적 시간의 소중함을 붙들고 살 수밖에 없는 저인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11-24 00:32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중 제가 아는 몇가지를 옮겼을 뿐입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시나이 산에 올랐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제 발끝만 보고 무작정 걸은 후 아침해가 떴을 때, 매우 높은 돌산 정상에 도착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삶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속에서 무작정 걷는 카이로스의 삶을 살다보면 크로노스의 결과는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2019-11-24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5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5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법의 체계란 실현된 자유의 왕국, 정신이 자기 자신에서 산출한 제2의 자연"에 다름아니다... 헤겔의 파악 배후에서 자유가 이미 사회의 제도들의 원리로서 뿌리 내리고 있다는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의지가 발전해가는 단계들이 추상법, 도덕성, 인륜의 각 단계인 것이다.(p147) <헤겔사전> 中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은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과 <법철학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을 통해 자유로운 의지가 변증법(辨證法) 체계를 통해 법(法), 도덕(道德), 인륜(人倫)의 단계를 밟으며 발전하고 있음을 말한다.


 법(法, Recht) : 헤겔이 말하는 법은 통상적인 용법과 비교하여 훨신 넓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본서에서 법이라고 말할 때 보통 법이라는 말로 이해되고 있는 시민법[추상법]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도덕성, 인륜 및 세계사도 의미한다. 이것들이 마찬가지로 법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란 사상을 진리에 입각하여 총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법철학> 33절 보론]... 헤겔에 따르면 법의 지반은 '정신적인 것'으로서 그 출발점은 의지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의지이다.(p147) <헤겔사전> 中  


 정신적인 존재가 단일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순수한 의식이며 개개의 자기의식이다.(p433)... 자기의식은 자기가 곧 이러한 실체를 자각하는 요체임을 알고 있으므로 법칙이 자기 안에 현존하는 데 근거하여 건전한 이성에게서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선한지를 직접 알고 있다는 표현을 한다... 더욱이 이것이 특정한 법칙으로 명문화될 때 사태 자체가 충실한 내용으로 채워지게 된다.(p435) <정신현상학 1> 中


 법(法)이라는 것은 어딘가 신성한 데가 있는데, 그 이유는 법이란 바로 절대적 개념인 자각적인 자유가 구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추상적이며 따라서 좀더 제한된 법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이념 속에 포함된 광범한 요소를 현실의 내용으로 하는 정신의 영역과 단계가 있는데, 이렇듯 더욱 구체적이고 내용이 풍부한, 참으로 보편적인 이 영역과 단계에는 바로 이런 까닭에 한층 고도의 법이 있게 마련이다.(p109) <법철학> 中


 자기의식은 의무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기의식은 의무에 의해서만 구속을 받는데, 의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기 자신의 순수한 의식이다(p172) <정신현상학 2> 中


 자유로운 의지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스스로 하나의 존재를 마련해야만 하는데 이 존재의 최초의 감각적인 소재는 갖가지 물건(die Sachen), 즉 외적인 사물이다(p116) <법철학> 中


 헤겔에 따르면 '법'이란 자기의식의 자각적인 자유가 특정한 법칙으로 명문화된 것으로 이는 자유로운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자유로운 의지는 처음에 추상적인 상태에 놓여있기에 아직 관념에 불과하다. 관념에 불과한 자유로운 의지가 보다 구체성을 갖춘 존재로 표현된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른다. 이러한 법에 대해, 헤겔에게 도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살펴보기 전 우리는 먼저 도덕적 세계관을 알아보자.


 도덕성(道德性, Moralitat) : 헤겔이 도덕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에 기본적으로는 칸트의 도덕론이 비판적으로 함의되어 있다. 즉 그것은 "대자존재와 개별성을 원리로 하는" 근대에 특유한 입장이며, 시민 또는 사인(私人)의 인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자연법 논문>2.504, 2.506 그것은 동어반복적인 무모순에서 성립하는 형식적 보편성을 '도덕법칙'으로서 정립할 뿐이기 때문에, 언제나 개인들의 특수성과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칸트적인 '도덕적 세계관'은 그 요청에서의 이율배반적인 사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도덕적 세계표상'에서 마치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위선'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정신현상학>3.441-463](p88) <헤겔사전> 中

 

 자기의식이 자유로워질수록 그만큼 의식에 맞서 있는 대상도 자유로워진다. 대상 세계는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자기완결된 세계(eine zur eignen Individualitat is sich vollendete Welt)이고 자기의 고유한 법칙이 지배하는 자립적인 전체인 동시에 법칙이 자립적으로 진행되고 자유로이 실현되는 세계이다... 이러한 규정에 입각하여 절대적인 도덕세계와 자기완결된 자연계의 관계를 둘러싸고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이는 의무만이 본질적이고, 자연은 전적으로 비자립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의식이다. 도덕적 세계관이란 이렇듯 전적으로 상호배치되는 자연과 도덕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이 관계 속에 있는 갖가지 요소가 전개되어 나가는 데에 성립된다.(p172) <정신현상학 2> 中 


 헤겔의 논리에서 자기의식에게 의무는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타자존재는 자기의식에게 무의미하고, 이로 인해 도덕세계와 자연계의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 '감각'으로도 불리우는 '자연'의 의지는 '충동'이나 '경향'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대립은 도덕과 자연을 분리시킨다. 이들의 통합은 '이성(理性)'에 의해 가능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존재를 헤겔은 '세계의 주인이며 지배자'라고 표현한다.


 이성과 감각이 압력을 밎는 마당에 이성이 취해야 할 태도는 대립을 해소하여 그 결과로서 양자의 통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나는 통일은 양자가 동일한 하나의 개체 속에 있는 본원적인 통일이 아니라 양자의 대립을 인식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는 데서 생겨나는 통일이다. 이러한 통일이야말로 마땅히 현실적인 도덕(die wirkliche Moralitat)이라고 하겠으니, 거기에는 현실의식으로서의 자기와 자기임에는 틀림없는 보편자로서의 자기와의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p175) <정신현상학 2> 中


 그리고, 헤겔에게 '도덕의식'이란 대립되는 이들이 합쳐진 완벽한 조화를 포함하는 것이다.  헤겔의 법이 '자유로운 의지의 구체적 실재'로 요약될 수 있다면, '도덕의식'이란 '자기와 대상 세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실재'라 할 수 있다. 다양한 기준을 가진 도덕은 다수의 법칙과 대립되는 도덕세계와 자연세계를 포함하고 있어 모순되는 힘 또한 내재하는데, 이러한 힘이 도덕을 새로운 단계, 곧 인륜(人倫)으로 이끌게 된다. 


 도덕의식이란 순수한 의무만을 단순히 알고 의욕하는 것이지만 일단 행동에 나서면 그의 단순성과는 정반대의 대상, 즉 다종다양한 현실 국면과 관계함으로써 여기에 다종다양한 도덕적 행태가 나타난다. 이로써 내용면에서는 다수의 법칙이 생겨나고, 형식면에서는 지력(知力)을 발휘하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힘이 생겨난다.(p178) <정신현상학 2> 中 


 그러나 이렇듯 단지 있는 그대로의 직접적인 존재는 자유에 합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러한 규정을 부정하는 것이 곧 도덕의 영역이다... 그러나 도덕 또한 그 이전의 형식적인 법이나 권리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추상체로서, 인륜성이야말로 비로소 이 양자의 진리이다. 인륜성에 이르러 개념의 틀 안에서의 의지와 개인의 주관적인 의지의 통일이 구체화된 것이다.(p116) <법철학> 中


 인륜(人倫, Sittlichkeit) : 헤겔은 추상법의 외면성과 도덕의 내면성을 하나로 종합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사회적제도들을 선의 이념이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역사 속에 구체화되고 축적되며 발전되어온 것으로 본다. 또한 개인이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사회적 연관들에 그렇게 하여 구체화되어 있는 선의 이념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서다... 인륜으로서의 사회적 제도들은 제도라는 객관적 계기와 자기 의식이라는 주관적 계기의 통일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그것들의 상호침투 속에서 발전해간다... 추상법, 도덕, 인륜이라는 전체의 구성 그 자체가 사회적 제도들을 인륜의 체계로서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나의 것으로 해나가는 정신의 발걸음을 제시하고 있지만, 나아가 이 '인륜'의 부분에서의 '가족', '시민사회', '국가'라는 구성 역시 가족에 있던 인륜적 일체성이 해체되면서 곧이어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국가에서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p328) <헤겔사전> 中


 인륜은 헤겔이 생각한 '법'이라는 정(正)과 이를 부정하는 '도덕'이라는 반(反) 을 통합하는 합(合)의 위치를 차지한다. 헤겔의 논리구조에서 인륜에 근거한 의식이 바로 진리이며, 진리 안에서 자기의식과 존재는 하나가 된다.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더이상 확신과 진리, 보편자와 개별자, 목적과 현실이라는 대립에 시달리는 일 없이 현실과 자기의식의 행위가 일체화되어 있는 그런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치 있는 사태라는 것은 인륜적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 바탕을 둔 의식은 인륜적 의식이다. 인륜적 의식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바로 진리인데, 이때 진리는 곧 자기의식과 존재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다.(p434) <정신현상학 1> 中


 인륜의 세계는 보편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와 개별적인 의식으로서의 실체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보편적인 현실체로는 민족과 가족이 있고 자연발생적인 자기이며 활동하는 개인으로는 남과 여가 있다. 이런 내용이 갖추어져 있는 인륜세계 속에 앞에서 본 실체를 결한 의식의 형태가 표방했던 목적이 달성되어 있다.(p37) <정신현상학 2> 中


 그렇지만, 인륜 역시 관념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때문에, 다시 구체화를 위한 '정'의 위치에 놓여지게 되고, 이제 새로운 '정-반-합'의 단계가 다시 시작된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이러한 헤겔의 체계를 통해 주역의 마지막 괘(卦) '화수미제(火水未濟)'를 떠올리게 된다. 주역 64괘가 미완성을 의미하는 화수미제로 끝나듯, 합(合)이 다시 새로운 정(正)이 된다는 헤겔의 변증법은 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순환이라면, 다른 한쪽은 상승구조라는 차이겠지만.


 인륜적 실체란 한낱 참다운 정신인 데 지나지 않으므로 개인은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확신하는 경지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륜적 실체로서의 정신은 보편적인 권능의 소유자로서 현실에 존재하지만 이 정신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공동체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만인의 자기존재이다.(p58) <정신현상학 2> 中


 <주역>의 저자는 모순, 투쟁의 종식은 일시적인 휴식에 불과할 뿐 모순의 진행, 운동이야말로 영원하므로 하나의 과정이 종결되면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는 이치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주역>이 '기제(旣濟)'가 아닌 '미제(未濟)'로 끝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죠. '미제'로 마무리한 것은 우주 만물의 변화는 끝이 없다는 지은이의 인식을 반영한 것임을 암시했습니다.(p927) <주역> 中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헤겔의 체계에서 '법', '도덕', '인륜'은 각각 정, 반, 합으로서 자리함을 알 수 있다. 헤겔의 체계에서 '법'과 '도덕'은 다른 것이다. 자기의식의 구체적 선택이 법이고, 법이 하나의 기준이라면, 도덕은 다양한 기준을 담고 있다.  이들은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충돌할 수 있음을 헤겔은 <법철학>에서 말한다.


 만약, 도덕/인륜과 법 또는 권리와의 대립을 논의할 경우, 이때 법 또는 권리로 이해되는 것은 다만 추상적인 인격성이 주축을 이루는 최초의 형식적인 법 또는 권리일 뿐이다. 도덕/인륜/국가이익은 저마다 하나의 독자적인 권리를 이루는데, 왜냐하면 이들 형태는 모두가 자유의 규정이 구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형태는 권리라는 동등한 선상에 놓여 있는 한 서로 충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충돌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요소를 안고 있으니, 즉 도덕은 제한된 것이며 따라서 또 어떤 하나의 권리는 다른 권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세계정신의 법 또는 권리만이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p109) <법철학> 中


 법과 도덕이 충돌했을 경우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도덕의 기준이 아닌 '세계정신의 법' 또는 완성된 인륜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헤겔은 지적한다. 최근 1개월동안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가족의 도덕기준과 관련한 수많은 보도가 언론을 장식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의혹제기였으며, 적어도 이 글을 쓰는 현재시점까지 죄로 결정된 것은 없다. 인사청문회도 거쳤지만, 후보자 본인에 대해서는 의혹조차 제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혹을 증폭시켰던 것은 감정이라는 이름의 충동과 경향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기준을 가진 감정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요구하는 것은 완성된 도덕성을 갖춘 '신성한 입법자'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헤겔에게 '신성한 입법자'는 신(神)을 의미한다.  

 

 도덕의식으로서도 역시 자기가 아닌 다른 의식에 의해서 무언가가 신성화된다는 것은 생각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도덕의식에게서는 자기 손으로, 자기 안에서 신성화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따라서 이 의식으로서는 자기와 다른 존재가 신성하다는 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p193)... 신성한 입법자라는 존재가 순수하게 완성된 도덕성을 보유하는 것은 그 존재가 자연이나 감각과 관계를 지니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도 또 순수의무가 실재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과 감각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p194)... 도덕이 실재하는 것은 신성한 입법자, 즉 신(神)이라는 또 다른 존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p195) <정신현상학 2> 中


 우리가 법무부 장관에 신을 임명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도덕기준은 결격사유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부언하면, 주관적인 도덕 기준으로 조국 후보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니 공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국 후보자의 가족의 위법과 관련한 논란도 살펴보자. 아직 검찰 조사 단계이므로 가족의 위법사실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2019년 9월 8일 현시점에서는 이른 일이다. 그렇지만, 가족이 법을 위반했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혼의 두 주체는 각각 개별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헤겔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헌법의 조문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통일은 실체적으로는 친밀함과 마음가짐일 뿐, 실제로는 그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두 주체로 분유(分有)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체성이 자녀들 속에서 여실히 눈에 보이는 대상이 되면서 부부는 그 대상을 자기들의 사랑이 실질적으로 구현된 존재로 여기며 사랑을 쏟는다... 이렇게 해서 유한한 자연성 속에 가신(家神)이라는 단일한 정신의 유(類)가 존재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p339) <법철학> 中


 제13조 3항 모든 국민(國民)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親族)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處遇)를 받지 아니한다.(p47) <헌법> 中


 우리가 조국 후보자의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 적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라면, 과거 자기의식의 선택으로 표현된 법이 오늘날 우리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그는 과연 우리 시대의 정신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법무부 장관에게 제시할 첫 번쨰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씨춘추 呂氏春秋> 중 거난(擧難)편은 인재 등용의 어려움에 대해 잘 말해준다.

 

 각이한 민족정신은 저마다 특수한 개체로 실재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객관적인 현실과 자기의식을 지니기 때문에 이들 민족정신의 원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로써 민족정신 상호간의 관계에서 본 그의 운명과 행동은 결국 정신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변증법 운동(die erscheinende Dialektik der Endlichkeit dieser Geister)을 행하게 된다. 이 변증법 운동에서 나타나는 것이 곧 무제한의 보편정신, 즉 세계정신으로(der Geist der Welt, als unbeschrankt), 이 세계정신이라말로 세계법정이라고도 할 세계사 속에서( in der Weltgeschichte, als dem Weltgerichte), 각이한 민족정신에게 그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법 - 즉 최고의 법 - 으로 군림하는 것이다.(p578) <법철학> 中

 

 사물은 본디 완전할 수 없으므로 완전한 것으로써 사람을 천거하기란 본디 어려운 것이 사물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요임금을 자애롭지 못했다는 것으로 헐뜯고, 순임금을 아비를 업신여겼다는 것으로 헐뜯으며, 우임금을 자리를 탐낸 의도가 있었다고 헐뜯고, 탕임금과 무왕을 (천자를) 내치고 죽인 모의를 했다고 헐뜯으며, 춘추오패를 침략하고 강탈한 것으로 헐뜯는다. 이러한 것들로 본다면 사물이 어떻게 가히 완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남을 책망할 경우에는 일반인의 기준으로써 하고, 스스로를 책망할 경우에는 도덕적 기준으로써 한다.... 남을 책망할 때 도덕적 기준으로써 하면 나무라는 일이 많게 되고 나무라는 일이 많으면 가까운 사람들을 잃게 된다.(p586) <여씨춘추> 中


 이제 길었던 페이퍼를 요약하며 마무리하자. 법과 도덕의 기준은 다르다. 도덕의 기준은 보다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 기준을 법무부 장관 임명의 판단 근거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근거가 있다면, 법과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법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가족 등 친족의 죄가 본인에게 미치는 것은 헌법의 정신에 위배된다. 이들은 각각 자기의지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에 더해 인재 등용의 어려움을 고려한다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은 유한한 자원으로 인한 제약 조건 하에서 최선의 선택이라 여겨진다...


 PS. 페이퍼와는 별도로 법과 도덕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 ~ 1832)의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통해 약 100여개의 페이퍼가 지난 후 살펴보려 한다... 상황에 따라 앞당겨 등판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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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9-08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국이 도덕성에는 일단 문제 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ㅠ

겨울호랑이 2019-09-08 18:02   좋아요 1 | URL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국 후보자의 의혹 많은 부분이 국민 감정을 자극했다는 면에서 본다면, 조국 후보자의 흠결은 도덕적인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후보자 의혹의 많은 부분이 가정과 관련된 부분이 이에 해당하리라 여겨집니다. 청문회에서 후보자 본인이 말했듯 자녀와 가정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부분을 생각해본다면, 아빠로서 완벽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다양한 도덕적 기준에 따른다면, 더없이 나쁜 아빠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굳이 도덕적 흠결을 따진다면 이 부분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 기준에 따른다면 21세기 초 한국을 살아가는 많은 아빠들 중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syo 2019-09-08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헤겔 입문서나 깨작거리는 저는 대체 언제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전 가끔씩 정말 호랑이님이 사람이 아니라 진짜 호랑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못 읽으시는 책도 없고 안 읽으시는 책도 없는 도통한 신선호랑이.....

겨울호랑이 2019-09-08 20:05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는 합니다만, 깊이있게 알지는 못합니다. 최근 syo님께서 읽으신찰스 테일러의 「헤겔」은 입문서가 아님에도 겸손의 말씀을... 쑥스럽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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