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은 모든 중국인에게 거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421년까지 이 도시는 명 왕조의 수도였다. 거대한 도시의 성벽은 2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20년 넘게 건설되었고 제국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진 뒤에도 도시는 훌륭한 건축물과 상인들의 품위 있는 생활양식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난징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 동안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1928년 장제스에 의해 중국의 수도가 되면서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국민당은 난징을 거대한 식민도시인 상하이에 필적하는 근대화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_ 래너 미터, <중일전쟁>, p139/477


 지금 남경(南京) 함락은 시간문제 아닌가. 장개석이는 벌써 천도를 선언하고 있어. 장학량이가 작년에 공산당하고 결탁해서 장개석이를 납치한 서안사건(西安事件), 그게 멸망의 징조였던 게야. 서안사건은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의 원인이지. 일본을 상대해서 중국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이제는 만주가 문제아니야. 멀잖아 일본은 중국을 손아귀에 넣을 거다. 이런 판국에 조선이 독립을 해?... 손끝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조선이 독립을 해? 그 희망은 죽은 나무에 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허망한 게야. 왜놈 밑에서 못살겠다 한다면 모를까 독립을 쟁취하자, 그건 잠꼬대나 매한가지 _ 박경리, <토지 15> , p451/710


 <토지 15>의 마지막은 1937년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殺)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당시 수도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이 6주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시민들을 향해 벌인 무차별적인 살상과 강간 행위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처참한 사건. 중화민국의 수도를 점령한 일본의 승리가 미친 영향은 컸다. 일본의 중국 점령은 마치 시간 문제처럼 보였고, 그에 비례해 조선의 독립은  멀어져간 듯 했다. 이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시기. 난징대학살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토지> 4부 3권에서 이뤄진다. 사실, 일제 강점 이전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 1909)이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당시의 이들의 만행을 본다면 우리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겠지만, 서방세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이 이러한 학살을 가능케 했는가. 


 "아무리 일본 인종이 극악무도하다 하더라도 일본인 전부가 악귀일 수는 없는 일. 군에 끌려나온 사내 모두가 짐승일 수는 없는 일. 한데 어찌하여 모두 악귀가 되고 짐승이 되었는가. 그런 만행은 다소간 정복자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오만의 군대가 삼십만의 비전투원을 학살하다니, 자네들은 일본 군부의 작전이라는 생각은 아니했다 그 말인가?" _ 박경리, <토지 15> , p460/594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내 물음에 대한 우노의 답변은 명료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p189/974


 패잔병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본병사의 심리에는 일본병사가 중국병사 혹은 중국민중을 향해 품은 도착된 적개심이 잘 나타나 있다. 예기하지 않고 발발한 중일전면전쟁에 끌려나와 상궤를 벗어난 남경진격 난행군을 강요당해 적당주의적인 작전지도와 탄약보급 부족으로 많은 전상자를 낸 사실로부터 느끼는 분노가 군/정부나 상급 지휘관에게 향하는 대신에 항전하는 중국군과 항일적인 민중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나 고생하고 있는 거야" "많은 국민이 울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도착된 적개심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더욱이 전사한 동료의 원한을 갚는다고 하는 복수심 등이 증폭되어 쉽게 중국군민을 살육하는 심리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_ 가사라하 도쿠시, <남경사건>, p128/195


 <토지>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해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1939 ~ ) 와 가사라하 도쿠시笠原十九司, 1944년 ~ )는 일본군 입장에서 학살의 문제를 바라본다. 사관학교 출신에 의해 장악된 군조직의 구조와 전투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의 안목 그리고 난징진입 직전에 이뤄진 상하이전투(1937)에서 중국군의 저항으로 큰 피해를 본 일본군의 감정이 전투 패배 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무제한적인 폭력의 형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이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본군 내부가 아닌 관점을 조금 올려보자.


 대학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비극의 중심에는 일본과 중국의 이념적 충돌이 있었다. 일본의 대동아주의는 190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변질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이웃들을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고 진심 어린 착각에 사로잡혔다. 반면, 중국인들의 관념은 일본과 서양 침략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민족주의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세계관과는 맞을 리 없었다. 서로의 인지적 부조화는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한층 경멸하도록 부채질했다. _ 래너 미터, <중일전쟁>, p160/477


 나는 일본의 들난 모습을 똑똑히 보아야겠어요. 처량하면 한 대로, 갈팡질팡하면 하는 대로 실체를 보아야겠어요. 눈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그래서는 안 되겠어요. 국민 전체가 완전히 천치가 돼 있단 말입니다. 무라카미상은 자존심 따위 논할 처지도 아니라 했지만 나도 자존심 따위 논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애당초 자존심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자만심이었지요. 그 강국이라는 환상의 자만심이 우리들 생존을 위협하고 국가 민족을 존폐(存廢)의 기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째서 지엽적인 문제겠습니까.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 하며 노닥거리던 그들이 이제는 전쟁은 장기(長期)의 건설, 중국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 하고 노닥거리고 있어요. _ 박경리, <토지 15> , p640/720


 래너 미터 (Rana Mitter, 1969 ~ )의 <중일전쟁-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은 이 사건을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일본의 변질된 대동아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의 충돌이 빚어낸 참상이라는 것이 그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본다면,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한 일련의 행위들 또한 함께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도쿄니치니치신문>(1937년 12월 15일)은 <대 전승! 환희의 열풍 / 드디어 왔다! 세기의 축제일 / 12월의 도쿄 거리에 17일 빨리 "설날" / 황성은 깃발, 깃발, 깃발의 물결>이라고 보도했다... '1억 국민대망의 <남경함락 공보>를 접한 14일 아침은 동아 東亞의 암운을 완전히 쓸어버린 듯이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청명한 날씨다. 새벽을 알리는 신문 배달하는 발자국소리가 각 가정에 들릴 때,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는 오전 6시 반, 유량한 나팔소리와 함께 임시뉴스를 발표하자 전 국민은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만세"를 외쳤다. 국기가 각 문은 물론 시전 市電, 시 버스에까지 휘날리고, 여기저기에서 명랑한 만세 소리, 크리스마스나 설날을 일축한 세기의 축제일은 아코의사赤?義士)가 숙원을 이룬 날처럼 도래했다.' _ 가사라하 도쿠시, <남경사건>, p120/195


 일장기 앞에서 기미가요가 제창될 때, 거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발성하는 힘이 있는 동시에, 제창한다고 하는 실천을 통해서 이 힘이 '일본인'이라는 공동성을 연출해 나가는 동력으로 배양되는 것이다. 이런 힘의 결집은 기미가요 가사의 의미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함께 제창한다고 하는 실천의 산물이다(p142).... 이렇게 상기된 기억은 새로운 공동성을 창출할 것이다. 기억에 근거한 이런 노래야말로 섬노래라는 이름에 부합할는지 모르겠다. 섬노래란 음계나 리듬으로 환원해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 함께 소리내어 부른다는 실천에 의해서 상기되는 기억으로서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로 함께 부르고 듣는다는 실천적 관계가 영위되는 장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할 터이다. _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 p143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1957~) 의 <전장의 기억>은 기미가요(君が代)가, 정확하게는 기미가요의 제창이 전장으로 나가는 이들에게 고취하는 공동체의식에 주목한다. 일찌기 메이지 시대 국가의례를 통해 신흥강국의 이미지를 자국민들에게 각인시켰던 전례의 연장선상에서 소와 시대에 일어난 난징함락은 전승일로서 일본인들을 단결시켰음을 우리는 <화려한 군주>에서 이미 확인했다.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Rising Sun)의 이미지는 이제 깃발로 형상화되었고, 이들의 진격은 이미지의 실현이 된다. 강한 공동체 의식으로 결합된 이들이 자기 동료의 죽음과 부상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처지를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 일어난 폭력. 그것은 난징학살의 성격을 설명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화로 인해 효율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피를 맛본 군중이 이제는 통제선을 넘어섰다는 데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협상하려던 일본군의 생각이 선조(宣祖, 1552~1608)의 발빠른 몽진으로 틀어졌듯, 중일전쟁에서도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빠른 난징 포기로 인해 전황이 일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 더구나, 선택된 정보의 제공으로 승리에 도취된 국민의 전쟁요구로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일본육군. 이러한 일본육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 해군의 작품이 진주만 공격(Attack on Pearl Harbor, 1941)로 이루어진 점을 생각해본다면, 난징 시민의 피로 행해진 예식으로 악(惡)을 성공적으로 소환시켰으나, 이 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악에 몸을 빼앗겨 죽음으로 이른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최후라 하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더 제기된다. 그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남경 함락 후 전선의 확대가 불가피해진 일본은 내심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띄운 것이 화평이라는 기구(氣球)였고 미국과 영국에 중재해줄 것을 은근히 요망했다.(p641)... 비연맹국(非聯盟國)이라는 이유로 일본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는 중국의 일본 침략 제소(提訴)를 받아들여 9개국 조약체결국회의(條約締結國會議)에 안건을 내놓는 등, 소련처럼 직접적인 군사원조는 아니했으나 분명히 중국 편에서 방자한 일본에 치를 떠는 영미를 믿을 수 없었던 일본은 중재 역할을 독일에게 가져가는데 문제는 상대, 장개석이 응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것은 원상복귀 이외는 없었다. 갖은 지랄을 다 한 일본의 모든 행동이 도로(徒勞)로 끝나는 그 조건이나마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의 사정, 그러나 그들이 첫째 봉착한 것은 정부나 군부 이상으로 전쟁열에 들떠 있는 국민에게 뭐라할 것인가, 총동원하여 전쟁의 열기로 몰아붙여놓은 국민들을 납득시킬 방법이 있는가. 남경함락 후 전승에 취한 국민들은 날이면 날마다 일장기행렬, 등불행렬로 법석을 떨고 있었으니, 그러는 동안 각 파의 반목과 대립은 오기를 자극하고 고조시키면서 화평조건은 차츰 강경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랬다. _ 박경리, <토지 15> , p642/720


 남경 거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수십만의 원혼이 통곡하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일 듯도 한데 심장에 철판을 깐 일본 정부는 도탄에 빠진 인민의 괴로움을 국민정부가 무시한다 하며 전가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남경 함락이 있은 지 한 달 가량이 지난 1938년 정월 16일, 실은 성명이 발표되는 그 시각에도 남경에서는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5> , p644/720


 일본군의 학살로 실체화된 악은 외부에서 온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재된 것일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Ein Bericht von der Banalitat des Bosen>에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지만, 그 평범성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아이히만)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p77)...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_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p349


  제임스 도즈의 <악한 사람들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다 Evil Men>는 악을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태도와 그들 내부에 내재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 모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관점은 문제를 시스템으로 치환해 가해자들을 인간적인 연민으로만 바라볼 수 있으며, 행위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희석시켜 결국은 반성과 성찰없는 상태로 이끌 수 있다. 반면, 악을 그들 내부에 내재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가해자들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몰아가는 이러한 시선 또한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켜 반성의 여지를 없게 만드는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외상적 사건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외상적 사건의 가해자들을 이해하려하는 것과 같다. 즉 그들을 신비화된 괴물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유사한 역설로 악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가해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있는 사람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도덕적 모욕이며, 가해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개념화화기를 거부하는 것도 도덕적 모욕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그들을 악마로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악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악마로 취급하면 안 되는데, 악마화하는 것은 곧 그들이 악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의 인간성 전체를 묵살해버리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요구를 응징에 대한 요구와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분개가 극단에 치우쳐 타인을 도덕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증오와 구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는 위험한 정치적 결과 뿐 아니라 깊은 내면적 결과 또한 초래한다. 타자를 악마화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에 전념하게 된다. 게다가 악마화하기는 악의 다름에 대한 시각을 조장해서 화해 가능성 뿐만 아니라 방지 가능성까지 차단해버린다. 악이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거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생각되면 악을 꾸준히 발생시키는 매우 평범한 상황적, 구조적 특징을 확인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악을 타자화하면 결국 타자를 악으로 만들게 된다. _ 제임스 도즈, <악한 사람들> , p44/239


 악의 타자성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철학적 구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행동은 이해 불가능하며 우리의 본성과 이질적이라는 느낌은 '단지' 느낌이 아니다... 게다가 악의 타자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면 증오 역시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상실이다. _ 제임스 도즈, <악한 사람들> , p45/239


 이와 같이 어려운 악을 바라봐야 하는 관점의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저마다 다른 결론에 이르겠지만,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 1937 ~ )의  '악'에 대한 정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악마란 호전적인 힘이 인간적으로 또는 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고, 이러한 호전적인 힘이 우리 의식의 밖에서 지각된 것이다. 이러한 힘 -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힘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듯하다 - 은 외경, 불안, 두려움, 공포와 같은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악마는 신들만큼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상당히 드러낸다(p37)... 악마란 기묘하고 한물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 또는 인간 정신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영원한 힘이 표출된 것이다... 악마는 이 세상이 겪는 고통 속에 진정으로 살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악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고, 그 각각의 악은 무자비한 고통을 가하면서도 진정으로 살아 있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The Devil> , p40


 러셀의 정의에 따르면 악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자리한다. 아렌트가 밝혀낸 '악의 평범성' 또한 이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전쟁 가해자들 또한 한 명의 인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이 갖는 수많은 가능태(可能態)로 악은 실현 이전에 내재해 있지만, 이같은 가능태가 개인의 욕망과 이데올로기의 실현이라는 휘발유를 뒤집어 쓴 상태에서 전쟁과 같은 발화점을 만났을 때 가능태는 '악마'라는 현실태(現實態)로 구현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문제는 이 발화점이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르다는 점은 아닐런지...


 인간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구. 모두가 그래! 잔혹행위, 침략, 도륙, 세계사는 그런 것들로 하여 피에 물들여져 있는 거라구. 방어와 공격은 숙명, 그건 인간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수렁이라구. 집단의식과 자유주의는 영원히 승부 없는 줄당기기란 말이야. 흥, 소속감도 본능이요, 자유 지향도 본능이다! 그래 다아 본능이다! 본능! 인간이라고 뽐낼 것 하나 없다구. 그래 맞어. 바로 뽐내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이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은 죄악의 진구렁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_ 박경리, <토지 15> , p576/594 


 일상은 전장을 준비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장은 전장을 준비한 일상의 의미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모멘트로도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전장에서 일상으로 (p38)... 전장 동원이 분명 죽음으로의 동원인 이상, 전장은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을 창출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동원은 의식과 정체성이 아니라 규율의 문제이며 신체적 실천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변용은 신체적 문제이며 차츰 의식의 문제, 의미의 문제로 이행한다. 무의식 속에 습관화되어 익숙해져 버린 실천이 전장에서의 신체의 변용에 이를 때,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임계영역이 이번에는 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피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 속에서 '외계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장 동원이 완수되려면 이 '외계인'의 말(잡음)은 봉쇄되어야 한다... 전장 동원은 '외계인'의 말을 봉쇄하고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을 내부의 적으로 죽임으로써만 수행되는 것이다. _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 p40


 인간이란 궁극적으론 이기주의니까 남보다 내가 잘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정할 순 없어. 그러니까 충용무쌍한, 천황의 적자(赤子)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국가의 이익,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약탈과 살상,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니 찬양을 한다 하더라도, 아니지 아니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자고로 전쟁이란 영웅들을 창출해낸 것만큼은 틀림없고오. _ 박경리, <토지 15> , p601/720


 난징학살 이후 중일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전쟁이 가열된 전쟁은 더 큰 자원의 소모를 가져오고 체제는 총력전(總力戰) 체제로 넘어간다. 여기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Pacific War 1941)까지 일어나면서 동원을 위한 독려는 더욱 확대되는데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바로 직전까지 타자(他子)였던 이들이 전선(戰線)의 확대로 공영권(共榮圈)안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 시점의 한국인들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 친일과 반일이라는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개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은 이때로부터 잉태되었다고 해석하다면 지나친 것일까....


 "오래가야 일본이 안 망하겠습니까? "중국이 손을 드는데도?" "남경을 내어주었다 해서 일본이 다 지배한 것도 아니고 중국인 전부가 항복한 것도 아니지요. 이미 장기전으로 들어갔고."(p514)... "장차 조선사람들은 어찌 될 것인지." "전쟁에 내몰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사람들 씨가 안 마르겠냐?"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사람에게 무장을 시킨다는 것은 일본으로서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요. 또 그런 만큼 일본은 다급해진 것이고 약화되었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_ 박경리, <토지 15> , p515/710


 <토지 15>의 마지막 난징대학살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30만명의 무고한 사람이 학살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의 보도가 가져온 외교적 파장은 전후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영향과는 또다른 부분이었다. 이 사건과 함께 생각해본 '악의 평범성'과 역사적 의미는 작품 속의 의미와는 별도로 작품 밖의 독자에게 다가온다...


PS. <토지>에서 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돌아오는 3부 이후는 이전 1, 2부와는 분명 다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1,2부에서는 악의 화신이 조준구라는 개인이었다면, 개인의 복수가 거의 마무리된 3,4부에서 악은 일본 제국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이전에는 개인 심리가 작품 내에 깊이 있게 묘사된다면, 3부 이후에는 사회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인물의 대사에 드러난 심리 대신 사회 분위기에 묻어난 시대 정신. 이같은 변화가 <토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깔딱고개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이번 주 독서챌린지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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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북평(北平)의 국민군을 내몰고 대원수가 되었으나 결국 북벌군 장개석(蔣介石)에게 패하여 봉천(奉天)으로 가던 열차에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관동군(關東軍)에 의해 폭사했는데, 패전한 장작림을 뒤쫓아 국민군이 만주로 진격해올 경우 일본은 매우 불리한 입장이므로 관동군의 고급 참모 가와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의 공작에 의해 장작림을 폭살하고 동북 삼성(三省)을 혼란에 빠뜨려 단숨에 그들은 만주를 장악한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1927년의 일이거니와 역시 만보산 사건을 이용하여 던진 미끼를 중국은 물지 않아 일본의 희망은 또 한 번 무너졌다(p207)... 그것이 바로 만주로 향한 진격,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군부의 관동군 스스로 봉천역 북방 팔 킬로 지점에 있는 유조구의 철도를 폭하한 뒤 장학량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공격을 개시한 각본은 관동군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작품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208/594


  인실과 오가타, 오가타와 찬하가 서로 이해와 갈등을 나누는 사이 <토지 15> 속의 시간은 1930년대를 지나간다. 이 시기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행보가 극단으로 치닫기에, 그 시점이 된 1928년 장쭤린 폭살사건(황고둔 사건 皇姑屯事件)과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을 통한 만주국(滿州國) 수립(1932)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를 살펴보려 한다. <쇼와 육군>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1939 ~ ) 역시 이후 일본 관동군 중심의 육군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에 대한 시발점과 압축점으로 장쭤린 폭살 사건을 해석한다.


 쇼와 육군을 검증할 때는 장쭤린 폭살 사건을 다각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이 무렵 중견 막료들이 육군 내부를 어떤 식으로 농단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장쭤린이나 장쉐량 張學良과 같은 중국 군벌에 대해 얼마나 모멸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등이 명확해진다. 게다가 이 사건에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보인 억지스러운 태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착오 등 훗날 쇼와 육군이 저지르는 잘못이 응축되어 있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69/974


  장쭤린 폭살 사건 직전의 중국 상황은 청조(淸朝) 멸망 이후 납립했던 여러 군벌(軍閥)세력들을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북벌을 통해 제압하고, 최종적으로 동북부의 강자 장쭤린(張作霖, 1875 ~ 1928)과 결전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이 지점에서 장쭤린과 일본의 이해관계는 충돌한다. 장쭤린이 베이징(北京)에서 결전을 피하고 랴오허강(療河) 동쪽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일본은 장쭤린의 효용가치가 없음을 파악하게 된다. 어쩌면 일본 군부는 과거 후한(後漢)의 원소(袁紹, ? ~ 202)가 관도 대전(官渡大戰, 200)에서 패한 이후의 멸망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장작림은 일본을 의지하면서 북경정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일본은 만주와 몽고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장작림에 대한 지지와 지원은 계속되었다. 1928년 봉계군벌이 북벌군에게 참패하는 순간 장작림은 만주와 몽고의 특수이익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본에게 이미 장애물로 전락되었다. 일본은 장작림이 동3성에서 참패하여 물러날 경우 북벌군이 관외로 군대를 내보내는 것을 가장 염려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은 장작림을 폭사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동3성을 점령한다는 정책으로 급선회하였다. _ 이건일, <군벌 1>, p88/515 


 다만, 분명한 것은 장쭤린의 패전으로 전장이 동북3성이 위치한 만주로 확대되는 것을 일본은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 내전에 개입하여 만주지역에서의 자신들의 우위를 놓지 않으려 했지만, 이러한 요구는 국제 조약에 위배된 것이었고 장쭤린, 장제스 모두에게서 거부되기에 이른다. 위기에 몰린 일본의 선택. 그것은 장쭤린 폭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산둥 출병에도 불구하고 북벌군의 황허 도하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일본은 다음 책략으로 장쭤린과 장제스 양쪽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제국 정부로서는 전란이 만주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적당하고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남군(북벌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에 평톈군이 산하이관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남군의 만주 진입은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남국과 펑톈군이 베이징-텐진 지구에서 교전하거나 양군이 함께 만주로 진입할 경우 양쪽을 모두 무장해제하겠다. _ 권성욱, <중국 군벌 전쟁> , p778/1080


 왜 일본은 장쭤린의 패배에 그토록 초조해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인과 군부, 군부 내에서 해군과 육군, 육군 내에서 관동군과 관동군이 아닌 비육군계의 갈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시대의 주역들이었던 사츠마, 조슈번의 출신 인물들이 실무에서 점차 손을 떼면서 새롭게 쇼와(昭和) 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때마침 1920년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 ~ 1925)라 불리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경제 호황으로 일본경제 역시 이 시기에 크게 부흥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획득한 원재료를 가공하여 일본 본토에서 가공하여 수출하는 기존의 방식에 더해 만주 지역의 면화, 콩 등 자원을 활용하려는 일본의 계획은 물류정책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지역에서의 철도를 만주철도에 위탁경영함으로써 대륙과 연결을 원활하게 하려는 1927년의 <조선철도 12년 계획>는 이러한 일본의 야심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만주철도가 바로 관동군의 배후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만주지역에 대한 장제스의 북벌군 진입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으며, 일본은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국내사정 역시 심각했다. 금융공황은 경제계를 휩쓸었고 급속한 공업화에 과도한 군비확장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물결은 드세게 일렁였다. 불경기는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으며 노동쟁의는 격화일로, 사회풍조는 퇴폐와 환란에 흠씬 젖어가고 있었다. 정계 또한 혼란의 연속이었다_ 박경리, <토지 15> , p208/594


 관동군은 만주사변 이전만 해도 고정 사단이 없고 본국의 여러 부대가 2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파견 근무했다. 인원과 장비는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했다.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시 출동하기 위한 실전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힘은 조선군보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발언권이 막강했다. 관동군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 滿鐵이 있었다. _ 권성욱, <중국 군벌 전쟁> , p783/1080  


 1927년도 이후 도문선 건설 및 개량공사를 실시하였고, 1933년 9월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북선 침 동북만주지역의 교통망 정비와 나진항 이용 개발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청진 이북의 북선선(北鮮線)을 만주철도에 위탁경영하게 되었다. (p118)... (만주철도는) 1936년 6월 동북 만주 일대의 화물을 일본으로 반출될 수 있도록 북선 3항을 병합하는 의미에서 조선총독부로부터 청진~옹기 두 항을 임대받아 나진과 함께 관리, 경영하게 되었다. 북선의 위탁 철도는 일본과 북선, 만주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확충을 의미하며, 조선과 만주 지역의 각 철도 및 동해 항로를 통하여 일본의 철도와 연계 협조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계약 내용에 특히 조선 내외의 교통 편리를 증진하고 조선의 지방 개발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었다. _ 센코가이, <조선교통사 1> , p119


 장쭤린 폭살 사건은 단순한 폭살 사건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정책 전반이 관동군에게 넘어갔음을 잘 보여준다. 만주철도의 이익을 위해 벌인 관동군의 무모한 행동이 견제받지 못하면서 이는 일본 패전에 좋은 선례를 남긴다. 이후 중일전쟁(1937) 등으로 폭주하는 일본 육군의 움직임에 자극되어 일본 해군 또한 진주만 공격(1941)으로 막나가면서 일본제국이 종말을 맞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쭤린 폭살 사건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일본 제국 멸망의 전조라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나카 수상은 철도대신 오가와 헤이키치의 보고와 외무성의 보고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이 보내온 보고서와 의문을 가졌을 법하지만 상세하게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이 키운 육군에 대한 신뢰를 중시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중견 장교가 조슈벌에 속하는 다나카와 시리카와(에히메 현 출신이지만 다나카의 직계)를 몰아 내는, 또는 메이지 유신 전후에 태어나 러일전쟁 때의 낡은 전쟁관을 갖고 있었으며 만주에 대해서도 군사에 의한 제압에 나서지 않는 세력을 내쫓는 교묘한 싸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나카는 이러한 계략을 충분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p87)...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만주사변에서는 제1막에 포함되어 있던 '실패의 교훈'이 교묘하게 되살아난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90/974


 만몽 지방에서는 원래 러시아가 동청 철도의 신징 이남 노선(만철)과 랴오둥 반도(관동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이 그 권익을 양도받았다. 더욱이 일본은 펑톈과 푸순 등 만철 연선 沿線의 주요 지역 행정권과 그곳에 관동군을 주둔시킬 권리(주병권) 등도 함께 획득했다. 결국 러시아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장악하고 있던 식민지의 권익을 더 크게, 비대화하여 이어받았던 셈이다(p112)... 위기감을 느낀 관동군 참모는 점과 선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몽 지구(동삼성)를 일본의 뜻대로 움직이는 국가, 즉 점과 선이 아니라 면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런 의사를 관동군 내부만이 아니라 일본의 국내 정치에도 끌어들였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112/974


 만주국 건설은 만주철도의 경제적 이해와 함께 '만몽 영유론'이라는 정치적인 구상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愛新覺羅溥儀,1906 ~ 1967)는 자신을 여진 히틀러와 같은 제3제국 - 금(金), 후금(後金, 淸)을 잇는 - 의 황제로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이시와라 간지( 石原 莞爾, 1889 ~ 1949)의 관념의 실현에 필요한 꼭두각시에  불과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을까. 


 1928년 10월의 이동으로 이시하라는 관동군 참모(작전 주임)가 되었다. 도쿄에서 육군대학 강의와 목요회에서의 '연구'를 현지에서 실행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1929년 7월, 15일간의 예정으로 이뤄진 북만주 참모 여행 기간 중 이시하라는 관동군 막료와 북만주 주재 무관에 대해 만몽 영유계획의 전모를 설명하였다. 또한 1930년 3월 단계에서 만철조사과원에게도 '만몽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만몽을 우리가 갖는 것이다'라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만몽의 진가, 만몽 점령이 우리의 정의라는 점, 미국에 대한 지구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121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만들어진 기틀 위에 아시아 여러 민족의 힘을 모아 서양 문명과의 충돌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시하라의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만주(滿州)와 몽골(蒙古)지역에 대한 점유가 필요했고, 이러한 바탕위에 만주국이 세워지게 된다. 만주국의 성립은 만주 지역의 일본 제국 내 편입을 의미하기에 이전 체제를 느슨하게 유지해온 시데하라 외교와 장작림은 폐기되거나 제거될 필요가 있었으며, 만주지역의 풍부한 자원은 경제공황 상황에서 경제 블록화의 밑바탕이 될 예정이었다. 


 관동군 막료들은 어떠한 경위로 만몽 영유론을 꿈꾸게 되었을까?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그때까지의 체제를 안정시켜온 몇 가지 전제조건이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전제조건이란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며, 신 4국 차관단 등에 의한 보증도 있으므로 누가 동삼성을 지배하든 누가 중국 정부의 중심이 되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취하고 있던 시데하라 외교이다... 두 번째로, 장작림(張作霖)을 통한 만몽 지배의 안정성이다.... 세 번째로 총력전 시대에 일본이 직명해야 할 전쟁 준비의 어려움이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83


 나는 제1차 유럽대전을 통해 전개된 자유주의로부터 통제주의로의 혁신, 즉 쇼와유신이 급진전된 것으로 본다. 쇼와유신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동아시아 각 민족의 힘을 종합적으로 발휘하여 서양 문명의 대표자와 싸울 결승전 준비를 완료하기 위함이다. 메이지유신의 주안점이 왕정복고, 혹은 폐번치현(廢藩置縣)이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쇼와유신의 정치적 주안점은 동아연맹(東亞連盟)의 결성이다. 만주사변을 통해 그 원칙이 발견되었고 오늘애야 비로소 국가의 방침이 되려하고 있다. _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 p77/300


 마치 우리가 메이지유신을 통해 번후(藩候)에 대한 충성을 덴노(天皇)에 대한 충성으로 되돌렸듯이, 동아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투쟁이나 동아시아 각국의 대립보다 민족의 협력과 화합(協和)을 통해 동아시아 각 국가의 진정한 결합이란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민족협화의 실현이다. _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 p78/300


 이런 구상에 대해 아버지를 잃은 군벌 장쉐량의 배일(排日)행보로 초조해진 관동군은 결국 만주사변(滿洲事變)을 통해 '만몽영유'를 현실화시키게 된다. 경제적 이권을 위해 세워진 괴뢰국가 만주국. 만주점령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상된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관념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만주국에서 '민족'을 기본으로 한 근대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울러, 만주국에서의 경제발전 모델을 이식한 조선에서의 근대산업화 모델 역시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역할에 다름아니기에 우리는 만주국의 관념적 공허성과 제국 내 의존성을 통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할 다른 하나의 자료를 추가하게 된다. 조선에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만주국에서의 오족협화, 태평양 전쟁 시기 동남아 제국에서 주장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은 이러한 관념과 같은 선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자.


 1930년대 초 만주에서는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張學良)이 국권회복과 배일운동을 적극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권익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에게는 관동군 철수, 남만주철도 회수 등을, 소련에게는 북만주철도 회수 등을 주장했다.(그 뒤에 소련군이 만주리에 침입). 게다가 간도(間島)에서 '만보산사건'(1931.7.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벌인 유혈 충돌 사태) 등 '만몽의 위기'가 거론되자 다시 일본 내에서 강경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은 중국 측이 조선인을 만주에서 추방하기 시작하자 '조선계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 지역에 파병했다. _ 서승원, <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 p87


 천진(天津)폭동을 유도하면서 교묘히 끌어낸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簿儀)를 내걸고 1932년 3월 1일 드디어 일본은 대망의 만주국 괴뢰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세계이 여론을 두려워하여 사변의 불확대를 성명했으나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신속하기가 질풍과도 같은 관동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일본 국민은 열렬히 만주침략을 지지하고 나섰다. _ 박경리, <토지 15> , p209/594


  평소대로라면 이시와라가 가장  열심히 다섯 민족(일본인,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이 조화를 이루는 만주국 건국을 주장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p93)... 만주국은 관동군 참모들의 정치 공작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였다. 그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괴뢰 국가로 일컬어지는데, 당시 일본의 국내 정세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새로운 국가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오족협화'의 이상향으로 고취되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원이 풍부한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개발에 공헌할 것을 강조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112/974


 국가 형식과 파시스트 체제의 특별한 조합은 만주국의 통치성을 특징지었다. 그것과 다른 근대국가들과의 차이는 그것이 한 민족의 정통성을 결여했다는 점이다. 통치성은 주권의 요구를 배제하지 않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에 주권은 점차 민족의  담론 속에 배태되었다. 국가 권리의 기초에서 국제연맹으로부터의 인정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만주국은 더욱 중국 내셔널리즘이 내거는 심오한 (역사적) 주장들과 맞붙어야 했다. 만주국의 스토리는 - 적어도 초기의 양상에서는 - 민족을 추구하는 국가의 스토리이다. _ 프래신짓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p157


 만주사변은 공황의 늪에서 헤매던 일본인들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다. 전쟁은 유효수요를 만들어냈으며, 원재료를 공급해 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일본인이라는 자부심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격렬한 투쟁에 지친 중도층에게 심어주었다. 전쟁이라는 더 큰 파괴와 혼란이 작은 혼란을 잠재우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 심지어 이러한 논리가 매우 유효하다는 비극을 유효함을 우리는 2021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도 확인한다.


 만주사변은 일본 사회 내부의 대립을 첨예화시키면서도 대립과 대항의 존재를 해소하고 소거시켜 버리는 논조를 만들어 냈다. '끓는 조국애의 피, 일본에 넘쳐 흐른다!' 는 <도쿄아사히신문>(1931년 11월 18일)의 표제어였다. 또 신문에서는 '눈 내리는 광야, 포탄 속의 참호에서 모국의 생명선을 사수하는 우리 파견군 장병에 대한 국민의 감격은 날로 커져 가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위문금이 1일 평균 1,500~1,600엔, 위문 보따리는 평균 3만 개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다. 그동안의 비판적인 발언은 보이지 않고 세 조류가 정립한 상황은 급격히 유동화되었다. _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 p215

 

 에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 뉴욕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전반으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 유흥가, 연예계는 구미(歐美)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인 남녀 혼욕(混浴)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p113)... 도시 뒤켠에는 그 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은 현실, 정쟁(政爭)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데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자 열 명의 이십 년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데 쓰는 나리킨이 있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일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 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113/594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_ 박경리, <토지 15> , p221/720


 <토지 15> 중반부의 배경이 된 장쭤린 폭살사건과 만주사변을 통해 우리는 제국의 정점에서 이제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일본제국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공황이라는 경제위기를 손해없이 돌파하려는 자본의 모습과 성장을 위한 고통을 피하려는 대중의 심리, 이를 덮으려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만들어낸 거대한 움직임은 다시 전쟁이라는 이정표로 흐르고 있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동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 루한스크주에서의 갈등과 NATO가입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위협을 바라보고 있는 현시점에서 과거 역사는 또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을 느끼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121/594


 미술을 좋아하는 환국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 ~ 1944)의 색채에 빠져있다. 아마도 환국은 칸딘스키의 색에 담긴 영혼을 움직이는 힘에 경도되었을 것이다. 칸딘스키의 말처럼 예술이 내부와 외부에서의 변화를 점(點), 선(線), 면(面)로 표현하여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일본제국은 1930년대 세계 공황의 위기를 중국에서 점과 선으로 연결된 자신의 영향력을 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벌인 것이 칸딘스키와의 차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파멸로 이른 것도 내적 필연성일지 모르겠다... 


[그림] Wassily kandinsky oben und links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ssily_kandinsky_oben_und_links.jpg)


 우리는 색들로 덮인 팔레트를 주시할 경우에 두 가지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순수한 물리적 작용을 받아들이게 된다(p57)... 둘째, 그리하여 우리는 색을 응시했을 때에 생기는 제이의 결과, 즉 색들의 심리적인 효과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색의 심리적인 힘이 생겨나고, 이 힘은 영혼은 동요시킨다. 그리하여 첫번째의 기본적이며 물리적인 힘은 색이 영혼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p59)...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건반을 두드리는 손과 같다. 그러므로 색의 조화는 오직 인간의 영혼을 합목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칙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이것은 내적 필연성의 원칙을 나타내고 있다. _ W.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p62


 점(點)의 크기가 변화하면 점은 상대적인 본질 내에서의 변화도 함께 일어난다. 이 경우 점은 그 스스로로부터, 즉 그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자라나는데, 이것은 점의 집중적인 긴장을 상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한편, 점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생겨나는 어떤 다른 힘이 있을 수 있다. 이 힘은 화면 속으로 박혀 들어가 있는 점에 의지하여 점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화면 위에서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인지 밀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점의 집중적인 긴장은 곧장 소멸되며, 동시에 점 자체는 생명을 잃게 되고, 따라서 이 점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자리적인 생명을 가진, 다시 말해 그 고유한 법칙에 따르는 하나의 새로운 본질이 생겨난다. 이것이 선(線)이다. _ W. 칸딘스키, <점, 선, 면> , p46


PS. 페이퍼가 산으로 가는 것을 보면, 가끔은 내가 <토지>독서챌린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페이퍼를 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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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2-13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분명 양질의 리뷰입니다.
언젠가 날 잡아 재독 삼독해야 할 호랑님의 글들이에요.
토지 이야기 더 써주세요^^

겨울호랑이 2022-02-13 16: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토지 독서챌린지가 4월말까지라 아직 10여편 정도 더 써야 됩니다. 아직 한참 남았네요ㅋ 책읽는나무님 좋은 오후 되세요!

페넬로페 2022-02-13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지가 인물사전까지 2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제 겨울호랑이님의 토지 읽기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동안 책 읽으시고 거기에 관련된 이렇게 방대하고도 훌륭한 글 쓰시는 것, 너무 대단하십니다^^
보람된 완독되시길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2-13 16:31   좋아요 2 | URL
가끔 페이퍼를 쓰면서 너무 옆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웃분들께서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행복한 오후 되세요.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2-02-13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공부하는 책읽기! 저는 이런식으로 책 못읽는데 겨울호랑이님 글을 읽다보면 아 진짜 공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건지를 배웁니다. ^^

겨울호랑이 2022-02-13 20: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관련 내용이 나오면 찾아가다 보니 진도는 더디고 옆길로 많이 새는 것같아 사실 좋은 방법만은 아닌 듯 합니다. 이번에 전체적인 배경을 챙겼다면 다음에는 내용에 집중해서 읽으려 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재임기간인 지난 5년, 서울 일부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2배 가까이 올랐다. 이런 결과는 문 대통령의 사회정의에 대한 약속과 부동산 정책을 실패로 이끌었다. 오늘날 서울의 부동산 가격은 주거 형태와 지역에 따라 m2당 약 9,500유로부터 2만 9,000유로까지 극심한 편차를 보인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된 한국의 부동산 위기> 中


 2022년 2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는 한국 대선 관련 기사2편이 다뤄졌다. 그 중 하나인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된 한국의 부동산 위기>는 수도권 특히 서울 표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 상황을 잘 분석한 글이라 여겨져 일부를 옮겨본다. 기사는 정부의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정책이 실패로 이어지면서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표심이반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전한다. 2021년 후반부부터 집값이 하향세로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아직 떠난 민심을 잡기에는 부족하다는 기사의 분석은 현재의 선거 상황을 잘 설명한다. 현 시점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정부의 실패는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책 방향은 잘못 되었는가?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한 18~30세 청년층에서 이런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임기 초반에 정부는 다주택자들이 보유한 주택의 일부를 매도하도록 보유세를 대폭 인상했다. 그러나 양도세도 인상한 탓에, 다주택자들은 양도세 부담으로 보유한 주택을 선뜻 내놓지 않았다... 정부는 부동산 세금을 올리고 은행이 대출규제를 강화하면, 자산가들의 대출이 줄고 나아가 투기가 억제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흘러갔다. 현금 보유액이 충분한 부유층은 굳이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출 금리 인상은 결국 서민들의 고통만 가중시킨 꼴이 됐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된 한국의 부동산 위기> 中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일차적인 원인이 통화량의 급증에 있다는 것과 시중 유동성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더해 문재인 정부 이후 이어진 경상수지 흑자 기조는 국외요인으로 유동성을 더욱 확장시켰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워보자.


 H : 국외적으로 경상수지 흑자로 인한 외환 공급의 과다로 인해 시장 유동성이 확장되었으며 이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확장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가계대출 등 경제주체들의 자금수요 증가에 따른 통화량 증가가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이러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한국은행, 한국부동산원 등에서 각각 '경상수지 및 무역수지' , '주택매매가격 동향', 'M2 통화량 추이(평잔)', '가계신용동향'의 시계열 자료를 확보하여 그래프로 정리해보자.(해당 자료는 e-나라지표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림1] 경상수지, 부동산지수, M2평잔, 가계대출 증가율(by 겨울호랑이)


 시계열 그래프는 경상수지 증가율, 부동산 지수, M2(통화량)평잔 증가율, 가계대출 증가율이 전반적으로 양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그림1]에서는 특히 2019년 이후 급격히 우상향하는 그래프의 기울기를 확인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관계가 양의 관계 있음을 확인 후 상관분석(相關 分析, Correlation analysis)을 통해 이들간의 관계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자. 상관분석은 EXCEL로도 수행할 수 있으나, 이번 분석에서는 통계 프로그램인 SPSS를 활용하여 실행하였다.



[표1] 경상수지, 부동산지수, M2평잔, 가계대출 증가율간의 상관분석 결과(by 겨울호랑이)


 상관분석 결과 전반적으로 이들 요인들 간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으며, 특히 수도권과 전국의 부동산 지수와 통화량 지표인 M2 평잔증가율 간에는 매우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함께 가계대출증가율과 부동산 지수, 통화량 간에는 뚜렷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나, 당초 가설과는 달리 경상수지 증가율이 부동산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상관분석만으로 이들간 인과관계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큰 틀에서 방향성만 확인하는 것으로 하자.


[그림2] 가계신용동향(e-나라지표)


 이상의 분석자료와 함께 최근 꾸준히 증가한 가계신용동향의 자료를 함께 참조한다면, 정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화량 증가가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으며, 통화량 증가에는 가계신용(대출) 증가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러한 분석 결과에 근거하여 정부는 강력한 부동산 대출 억제정책을 펼쳐나간 것이라 여겨진다. 여기까지 본다면 정부의 정책은 나름 합리적인 판단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보여진 시장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IS-LM모형에서 화폐시장의 균형 달성을 위해 대출이자율 규제를 통한 투기적 수요를 줄이려는 정부의 시도가 총수요(AD)측면의 압력이었다면, 이러한 압력이 주택시장의 총공급(AS)을 크게 줄이는 방향으로 시장은 반응했다. 양도세 인상을 통해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게 하겠다는 의도는 정권 후에 매도하겠다는 반발에 부딪히게 되고, 총공급곡선을 하향이동시켰으며 전월세, 매매 물량을 비롯한 전반적인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켰다. 이에 대해 정부는 주택시장안정을 위해 공공주택 공급을 몇 차례에 걸쳐 약속했지만, 실제적으로 해당 물량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현재의 시장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으로 정리된다.


 관련내용 :  https://www.korea.kr/special/policyFocusView.do?newsId=148883591&pkgId=49500748 일문일답으로 알아본 '역대 최대 규모 주택공급 대책'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서 지적하듯 현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현재시점에서는 실패했다. 또한, 과도한 가계부채 해결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 등의 대첵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은 지금도 실패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과도한 가계부채를 문제를 보고 이를 줄이려는 접근 자체를 정부의 실패와 무능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정리하자면, 현 시점에서 부동산의 실패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정책의 방향성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는 않을까. 부분의 최적화가 전체의 최적화를 의미하지 않았고, 전체의 최적화로 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실패가 전반적인 무능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런지.


 내 집 마련의 어려움이, 청년층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자가 주택 소유 비율이 56%에 불과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그러나 꿈조차 꿀 수 없게 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청년들의 대부분은 중산층 출신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빈곤층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 세대 때와는 달리, 이제는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거의 끊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은 세대 갈등을 유발하고 나아가 악화시킨다. "지금 한국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불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성세대를 향한 증오에 가깝습니다." 최항섭 교수가 덧붙였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된 한국의 부동산 위기> 中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정부재정지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관료들의 부처 이기주의라 여겨진다. 적극적인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가계부분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시점에 이를 외면하는 행정관료들의 행태는 여러모로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다만, 기술 및 행정 관료 문제는 민주주의를 통한 대리인 선출과는 다른 전문가 집단의 문제인 만틈 구분되어 판당해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학파인 루드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1881~1973)의 철학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관료제(Bureaucracy)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동질감을 갖기에 이를 옮기는 것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정부는 2022년 1월, 소상공인에게 손실보상금 500만 원을 선지급했다. 그러나 ‘비대면’의 일상화로 인한 손실은, 정부지원금으로 충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상인 교수는 “정부는 1회성 지원금의 형태 외에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지원금 제공은 꺼렸다. 대신 저금리 대출을 통한 간접적인 재정지원을 선호했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은 공공부채를 늘리는 것에 유독 민감하다. 대한민국 국민의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동안에도 공공부채는 OECD 국가 평균을 크게 밑돌았다. 대한민국의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2016년에 51.6%였고 2021년에는 58.8%였다. 참고로 프랑스는 146%를 기록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된 한국의 부동산 위기> 中


 선의의 공무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말자. 그는 민중의 이기심에 대항해서 자신의 우상을 위해 싸우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는 생각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다. 그는, 자기 생각에 영원한 신법(神法, divine law)의 옹호자다. 그는 개인주의의 옹호자들이 성문율로 작성한 인간의 법에 자신이 도덕적으로(morally) 구속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인간은 신, 국가의 진정한 법을 바꿀 수 없다. 개개 국민은 자기 나라의 법들 중 하나를 어길 때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범죄자다. 그러나 만약 공무원이 '국가(state)'의 이익을 위하느라고 정당하게 반포된 국법을 위반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반동적인(reactionary) 법원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는 기술적으로 위반의 죄를 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높은 도덕적 의미에서는 그는 옳았다. 그는 신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인간의 법들을 위반했다. _ 루드비히 폰 미제스, <관료제> , p142


 PS. 국가가 외국과 재화와 서비스를 거래한 결과 나타는 수입과 지출의 차액인 경상수지(經常收支, current account balance)의 증가율과 부동산 지수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약한 양의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듯 싶다. 하나는 부동산 이외 다른 시장(주식시장, 가상화폐거래소 등)으로 흘러갔거나 아니면, 사내유보 등의 형태로 저장(貯藏)되었을 수 있겠다. 그 중 일부는 지하경제로 유입되어 다시 일부가 조세피난처(tax haven)에 갔을 수도 있겠고.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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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2-02-10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책시차가 있어서 아직 평가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요..

겨울호랑이 2022-02-10 13:43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역사적 평가까지는 아니겠지만 부동산 정책에 있어 성과는 중기적 관점이상에서 평가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정책에 대한 평가가 선거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아 지나치게 실패했다는 분석 위주로 흐르는 것 같아 페이퍼로 올려 봅니다...

2022-02-10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0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2-02-10 14: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책이 안착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시민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는 부동산 정책라는 프레임으
로 선동을 하구요.

한정된 재화인 부동산에 대한 욕망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기재부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금을 더
걷었다는 건, 기재부의 명백한 실책인
데 기재부 수장은 아무런 책임도 느끼
지 못하고 당당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2-10 17:18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민주주의 틀 안에서 정책의 결과를 장기적으로 기다리는 동안 ‘선거‘라는 여러 중간평가가 자리하기에 구조적인 개혁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보여집니다. 장기적인 혁명을 위한 끊임없는 소통이 중요함에도 현재 언론 지형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를 위한 구조개혁은 수행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기재부 문제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다음 과제라고 보여집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만보산 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지방, 길림성의 장춘(長春)에서 서북방 삼십 킬로 지점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中日官憲)의 무력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p245)...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간에 땅을 빌린 자와 또다시 조선인이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p247)... 문제는 7월 2일 <조선일보> 호외로 만보산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자료를 받은 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 내 동포가 생명에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양이었다... 물론 만보산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5> , p248/720


  토지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토지독서챌린지. <토지15>를 읽고 있는 지금 시대적 배경은 어느새 1930년대인 것을 보면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구나 싶다. 물론 소설속의 등장인물에게는 소설 밖의 독자에게 몇 문장이 그들의 시간 속에서는 수 개월 또는 수 년의 흐름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중에서도 만보산 사건과 조선일보의 내용은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듯 싶다.  


 만보산사건의 진상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던 놈이면 그곳 실정쯤 파악하고 있어야지. 일본 기관에서 고의적으로 흘린 오보를 판단 없이 송고해? 의도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조선일보>는 어용지 <경성일보>와 함께 일본의 계략을 도운 셈이야. 함정에 빠진 것이라 해도 좋고. _ 박경리, <토지 15> , p236/720


 지난 칠월 초순의 일이다. 조선에서 일어난 배화폭동(排華暴動)이 날로 확대되고 격렬해진다는 신문기사를 찬하는 읽고 있었다. 만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 농민 사이에 벌어진 충돌사건이 <조선일보> 호외로 시작하여, 연이어 선동적인 기사로 사건이 보도되면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 습격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이 각처에서 자행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인의 어리석음과 일본의 사악함이 교묘히 맞아떨어지면서 저질러진 어처구니없는 만행이었으며 대만의 무사사건(霧社事件)을 연상케 하였다. _ 박경리, <토지 15> , p85/594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대표없는 곳에 과세가 없다면서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 식민지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또한, '투표할 수 있는 능력만이 시민이기 위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명제를 함께 생각했을 때 우리는 거칠게나마 시민의 권리는 투표로, 의무는 세금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이들을 묶어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회사법에 의해 인격(人格)을 부여 받은 법인(法人 Corporation)은 왜 세금만 내면서 이를 부당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까. 영업활동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이들이 의무만 수행하면서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이들은 전체 세금 중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의 권리를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1774년 4월 22일, 뉴요커들 또한 알렉산더 맥두걸 Alexander McDougall의 주도에 따라 모호크 족의 의복을 차려입고 '런던'이라는 이름의 영국 선박으로 몰려 들어가 차 궤짝을 바닷속으로 던져버렸던 것이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분노한 영국은 자신들의 미국 동포들을 더 이상 참아주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보복 조치들을 시행했다.(p114)... 자유로운 분위기의 해안 도시 보스턴에 이러한 조치들이 내려진 것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식민지인들 간의 통합은 거의 미미했었다. 하지만 영국의 조치들을 계기로 상황이 바뀌어, 이제 이들은 한목소리로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의회가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_ 론 처노, <알렉산더 해밀턴> , p115


 이런 의문에 대해 요즘은 그 답을 어느 정도 찾는 듯하다. 법인들은 투표권 대신 추천권(right of recommendation)을 통해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 함께 매트릭스 Matrix 안에서 살아가기보다 아키텍처 Architecture로서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은 아닐지. 이에 대해서는 낸시 매클린 (Nancy MacLean)의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Democracy In Chains>에서 상세하게 설명된다.


 몹시 가차 없고 영민한 프로파간다 전문가였던 [나치의]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는 이렇게 말했다. "엄청난 거짓말도 충분히 반복해서 하면 사람들은 곧 그것을 믿게 된다." 오늘날 코크가 돈을 대는 급진우파가 하는 엄청난 거짓말은 우리 사회가 '생산자'와 '탈취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생산자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탈취자에 대해 선악 이분법적인 투쟁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_  낸시 매클린,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p538/888


 과거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의 사주를 받아 여론을 호도한 조선일보의 모습에서 오늘날 검언유착, 광고주에 의해 좌우되는 언론의 모습을 본다. 동시에, 이처럼 왜곡된 언론의 역사가 오래된 것이라면 언론 개혁이 쉬운 일이 아님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일본의 만주 침략 의지와 조선일보의 오보가 빚어낸 1931년 7월의 만보산 사건.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에 이르러서야 알게된다. 언론에 의해 좌우되는 민심. 그리고, 이로 인한 행동의 결과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미리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대중이란 끝없이 인내하면서 변화에 대하여 성급하고 가슴에 맺혀 있으면서도 쉬이 체념하며 망각한다. 신출귀몰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고 인심이 소용돌이치던 도시에 여름이 찾아왔을 때 신출귀몰이라는 말은 퇴색해가고 있었으며 인심의 소용돌이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몸조심 말조심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주판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5> , p52/594


 1931년(쇼와6)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중국 동북부(만주), 요녕성(遼寧省)의 심양(봉천)에서 가까운 류조호(柳條湖)에서 남만주철도의 노선 일부가 폭파되었다.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등에 의해 1929년부터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온 작전이 여기서 실행된 것이다... 만주사변은 1)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2) 본래는 정치 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3)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4) 징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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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2-09 0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는 하여튼 일본식민지시대에도 현재와 다를 바 없네요. 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조선 동아를 통해 폭동으로 알고 있던 시대라… 조선 동아는 광주 민주화 운동때 오보내고 선동 한 거 진짜 사과 해야합니다!!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안 하고 있는데…조선 동아 꼭 해야한다고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2-09 08:1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조선일보는 1930년대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 1938년부터 급격하게 친일성향을 보이면서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사과가 쉬워보이진 않지만, 분명 꾸준하게 문제제기를 해야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거리의화가 2022-02-09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한 탄생부터 성장까지 다룬 책이 있습니다. 조선 동아일보의 탄생. 매체 자체에서 낸 역사에서 미화한 것과 달리 왜곡되고 포장된 부분이 많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2-09 09:29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조선일보의 경우 1920년대 조만식 선생 등에 의해 운영되던 초기 항일 시기의 역사를 자신들의 100년사에 포함시키면서 민족정간지 행세를 하며, 동아일보는 인촌 김성수의 행적을 고려대학교 설립으로 덮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이바지한 해직기자들의 항쟁을 자신들이 가져와 역시 정론지 행세를 합니다만.... 그들의 부끄러운 행적이 그들이 발행한 과거 신문 안에 박제되어 있음에도 부끄러우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오가타상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그 우정을 나는 믿습니다. 한데 어떻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당신, 천황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오가타는 당황한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 순간 어쩔 줄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 그거는, 네, 아직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 "그게 대부분 일본인들의 한계가 아닐까요?" 오가타 얼굴에 막연한 표정이 지나갔다. _ 박경리, <토지 14> , p593/708


 <토지> 독서 챌린지 28주차. 앞서 인실과 오가타의 대화에 조선과 일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실렸다면, 이번 주차 찬하와 오가타의 대화는 내용면에서 앞의 대화를 잇는다. 예정없이 명희를 만나고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반응에 쫓기듯 떠난 찬하와 오가타. 이들의 대화는 천황제(天皇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천황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찬하의 질문과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오가타. 과연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번 페이퍼는 이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천황의 기원은 멀리 오노 야스마로(太安萬呂, 660 ~723)의 <고사기 古事記> <천손강림 天孫降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아메노우즈메노카미(天宇受賣命)가 가서 물으셨더니, 답하여 "저는 국신으로, 이름은 사루타비코노카미(猿田彦大神)입니다. 나와 있는 것은, 천신이신 어자(御者)가 천강하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선두에 서서 모시려고 생각하고, 마중하러 올라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아메노코야노미코토(天児屋命), 후토타마미코토(天児屋命),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鈿女命),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石凝姥命), 타마노오야노미코토(玉祖命), 합하여 다섯 명의 부족장 신을 나누어 대동하고 천강(天降)했다...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는 "여기는 카라쿠니(韓國, 한반도)를 향하였고, 가사사노미사키를 똑바로 통해 와서, 아침 해가 바로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참으로 좋은 땅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대반석 위에 기둥을 굵게 세우고, 타키아마노하라에 이르게 용마루를 높이 세우고 사셨다. _ 오노야스마로, <고사기> , p310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거울(銅鏡), 옥(玉), 구나사기 검(劍) 등 3종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고천원(高天原)으로부터 내려와 신아다도히메(神阿多都比姬)라는 여인과 결혼하면서 천황가는 시작되었고, 끊김없이 현재에 이른다. 그렇지만, 실상 천황의 권세는 오랜 역사만큼 크지 못했고, 천황은 다른 실권자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명목상의 존재였다.. 작가는 찬하의 입을 빌려 천황을 '정신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실권자들에 의해 이러한 '정신적인 힘'이 맹목적으로 강요되면서 '철학이 없는 문화'로 일본 문화를 비판한다. 


 거의 대부분 천황은 권력 밖에 있었고 군주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 천황은 무엇이냐, 정신적인 힘, 여기 와서 애매해지거든요. 당신들 공격의 대상이 되며 조선의 식자들은 대개 이 문제를 거론하는데 현인신, 그 현인신으로 얽어두지만 사실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아니거든요. 그 세 가지를 때에 따라서 조금씩 필요한 만큼 치장을 해주지만요. 현재도 그렇지요. 국민들을 모조리,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천황에게 붙들어 매놨다가 물리적인 힘이 그것을 필요한 만큼 갖다 쓰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대단히 불경스런 얘기지만 국민정신의 저장고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그 어느 것이라 할 수 없는 애매한, 해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맹목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자기 기만을 할 수밖에 없고 긴 역사 속에 국민들은 자기 기만도 깨닫지 못하게 길들여졌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598/708


 일본 천황이 정신적 중심이라는 것은 앞서 살펴본 <고사기>의 내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학자들은 <천손강림>을 곡령의 풍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의 천황의 의미를 '곡식'으로 해석한다. '살아있는 곡식'으로 천황을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같은 벼농사 문명인 동남아 문명을 통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J. G.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1854 ~ 1941)는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에서 식물과 관련된 원시신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아마테라스오호미카미의 명을 받고 아시하라노나카쯔쿠니(葦原中國)로 천강하는 신이 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天之忍穂耳命), 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日子番能邇邇藝命)로 불리는 등 모두가 곡령의 풍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은 고대의 천황이 천강하는 곡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탄생한 신생의 니니기노미코토가 천강한다는 것은 천황의 즉위의례를 천신의 어자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으로 여긴 고대신앙의 반영이다. _ 오노야스마로, <고사기> , p312  


 생명의 원소를 일단 식물의 영혼이라고 해두자. 흔히 인간의 영혼이 그 몸에서 분리될 수 있는 생명의 원소라고 여겨지듯이 말이다. 모든 곡물의례는 바로 식물의 영혼에 대한 이론과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자死者에 대한 의례가 인간 영혼에 대한 이론이나 신화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같다.(p158)...  버마의 카렌족도 농작물의 풍작을 위해서는 벼의 영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붙잡아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벼가 잘 자라지 않으면, 벼의 영혼 kelah이 벼에서 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 영혼이 다시 벼한테 돌아오지 않으면, 그해의 벼농사는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_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2> , p160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벼농사문화권에서의 애니미즘(animism)에 대해 서술한다. 벼에 깃든 정령(精靈)을 숭배하던 사회집단에서 사회분화에 따라 주술사 계층이 세력을 얻고 왕권(王權)을 확립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었다면, 일본신화에서 <천손강림>의 내용 역시 농사와 관련된 일련의 지배층이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청동문화를 바탕으로 권위를 확립하고 이후 권세를 세웠다는 표현이 아닐까. 다만, 다른 문명권에서는 이들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형성했다면,  '신성왕가' 와 다른 별도의 세력가들이 있었음은 일본문명의 특수성이라 할 것이다. 정신적 중심점과 권력의 중심점의 차이. 마치 '두 점에서 거리의 합이 같은 점들의 집합'인 타원(Ellipse)과도 같은 일본문화의 독특한 성격은 19세기 후반 흑선(黑船)의 출현과 개항(開港)이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변곡점에 다다른다.


 원시사회에서 기능적으로 고만고만한 자들에 의해 수행되던 직능이 점차 상이한 계층들에 분할되면서 보다 완전하게 수행되었다. 아울러 특수 노동에 의한 물질적, 비물질적 생산물이 모든 사람들에게 분배되면서 공동체 전체가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하고 이런 분화과정이 계속되면서 주술사 계급 자체가 질병을 치료하는 주술사나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 등의 여러 계층으로 세분화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주술사가 추장의 지위를 획득하고 나아가 신성왕神聖王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주술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주술적 기능이 점차 퇴화하고, 대신 사제 직능 혹은 신적 직능이 나타나면서 종교가 주술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_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2> , p274 


 미 페리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세력을 회복하려던 막부(幕府)정권과 이에 대항하는 삿초 동맹(薩長同盟)세력간의 다툼에서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 ~ 1912)이 사쓰마-조슈 동맹에 손을 들며 이른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는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천황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양자의 구애에서 삿초군을 선택한 천황의 결정은 일본 천황이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와 같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적극적인 현실개입자, 또는 '천손강림' 이후 '현실강림'의 계기가 된다. 이후 천황은 일본제국의 정신적 중심에서 실제적인 권력의 중심으로 대중 앞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화려한 군주> 리뷰에서 자세히 다뤘으므로 넘기도록 하자. 


 하나의 복잡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양측 모두 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부인하지 않았고, 메이지 국가의 건설자들이 그들의 작업을 끝마쳤을 무렵 모든 행위자들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천황을 보호하고 강력한 존재로 만들기를 열망했던 것으로 기억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 투쟁에서 패한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고, 승자는 천황의 깃발을 앞세워 자신들의 야망을 미화할 수 있었다. _ 마리우스 B.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 1> , p488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친왕(小松宮彰仁親王, 1846 ~ 1903)을 정토대장군(征討大將軍)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금기의 절도(節刀)를 내렸다. 이것은 아키히토 친왕에게 적대하는 자는 조정의 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진작부터 전투 상대는 조정이 아니라 사쓰마 번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금기(錦旗)는 천황의 옹호자라는 정통의 자격을 사쓰마번에 주었다. 수많은 자료에서 막부군의 패배 요인으로 금기의 절대적인 효과를 들고 있다. 금기는 '관군' 삿초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조정의 적이 될까 주저하는 막부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_도널드 킨, <메이지라는 시대 1> , p169/556 


  근대화 과정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새롭게 체제가 정비되었던 것이지만, 세계대공황 이후 변화된 국제정세와 새롭게 등장한 이익집단은 1930년대 일본 체제에 변화를 가져온다. 서구화된 제도가 정착되고,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된 가치와 이익 추구는 일본을 군국화(軍國化)의 길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에 '너와 나'의 구별이 없었음을 <현대 일본을 찾아서>는 잘 보여준다. 잰슨에 따르면 일본의 전쟁 책임은 일본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1930년대의 수많은 성취는 사실 대중문화와 참여정치의 발전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군부의 득세와 지배가 근대 메이지 국가의 제도적 틀에 뿌리박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현상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권력의 축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변화를 조절하고 중재해줄 근대국가 건설자들의 영향력이 사라졌고, 이데올로기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창안한 통치기구는 이제 나름의 동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만든 제도는 반대를 일삼는 강력한 관료와 이익집단을 탄생시켰다... '군부'가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민' 정부의 평화주의자들이 군부의 준동에 시종일관 반대했던 것도 아니다. 다양한 집단이 제휴하여 침략을 획책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발달한 대중매체가 팽창과 전쟁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동했다. _ 마리우스 B.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 2> , p870  


 아니면 소가[蘇我]나 후지하라[藤原] 같은 권신이 왕이나 다름없는 실권을 쥐고 있어서, 그 이상의 칭호를 필요로 했는지 모르지요. 땅은 우리가 다스릴 터이니 당신은 하나님으로 있으라, 이전에는 오오기미[大王. 大君]로 칭했거든요.(p390)...  그것저것 다 아닐 거요. 실력자라기보다 실력군(實力群)이라 해얄 겁니다. 오오기미노 헤니코소 사나메에(대군, 즉 천황 곁에서야말로 죽을지어다)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참본(參謨本部) 중에서도 알짜, 비밀참본, 뭐가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를 그들 일군, 그리고 관동군(關東軍)일 게요." _ 박경리, <토지 14> , p393/708


 그렇지만, 이러한 전쟁 책임을 바라보는 일본 지식인의 입장은 조금 다른 듯하다. 대표적인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윤리21>에 언급된 천황제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한 글은 일본 지식인들의 입장이 잘 표현된 글이라 여겨진다. 고진은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일본인 개인에게 묻기 전 제도에 물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인식을 본문에서 말한다. 이 같은 말은 얼핏 옳은 듯 하지만 전후에도 천황은 존재했고, 욱일기(旭日旗)가 해상자위대에서 버젓이 사용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고진의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제 최근까지도 천황제를 유지해야한다는 일본인들의 찬성비율이 80%에 이른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고진의 말처럼 천황제도가 문제라 할지라도 - 일본인들의 전쟁 책임 문제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과거를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미묘하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먼저 최고책임자의 책임을 물은 후에야 비로소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본인에게 과거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황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정부는 여러 번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하고 천황 자신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죄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같은 천황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p160)... 천황 개인보다는 구조가 문제이기에 그것을 폐지하여 천황 개인을 인간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구조론적인 인식을 할 때 개인의 책임은 괄호에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책임'을 물을 경우에는 그 괄호를 벗겨내야 합니다.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62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현대사의 흐름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도쿠가와 체제로 가는 '죽음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공격충동이 가득했던 유기체인 메이지 시대로부터  무기질 상태인 도쿠가와 체제로의 회귀. 그것은 팽창정책에 대한 겸허한 반성으로 고진은 해석하지만, 일본의 극우화로 인해 헌법9조의 개헌 움직임이 점차 힘을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된 기억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언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진 본인은 천황제에 반대할지 모르겠으나, 반성없는 일본 사회 전반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을 경계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토지>에서 천황제에 대한 생각을 묻는 찬하의 물음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메이지유신으로부터 36년 후 러일전쟁이 있었고, 그로부터 40년 후 일본은 제2차 대전으로 패전을 맞이했습니다.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개시된 프로젝트는 77년 정도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전쟁 기피 반응은 단순히 메이지 이래의 전쟁 체험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좀 더 근원적으로 '도쿠가와의 평화'와 이어지고 있습니다.(p86)... 도쿠가와 체제는 오랜 전란 후에 만들어진 시스템입니다. 도쿠가와 체제란 '전후(戰後)'의 '국제(國制, constitution)'인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다양한 금지를 통해 공격충동의 발생을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의해 도쿠가와 체제에서 '무기질'적인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메이지 이후에는 개국(開國)을 하고 외부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공격충동의 발생입니다. 그것이 패전과 함께 자신의 내부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헌법 9조인데, 이는 동시에 '도쿠가와의 평화'에 있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하자면, 헌법 9조의 뿌리는 메이지유신 이후 77년 동안 일본인이 목표로 삼아온 것에 대한 총체적 회한에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 p87


 다시 <토지>의 찬하와 오가타의 대화로 돌아가자. 찬하의 천황제를 부인하냐는 질문은 단순한 왕조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신의 근원을 부정하고 진정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인가를 묻는 질문이며, 이것은 오가타에게 매우 강한 압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앞서 인실과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사랑은 민족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확신에 찬 대사를 읊었던 오가타지만, 구체적으로 정신적 구심점을 타격해오는 찬하의 말에는 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오가타의 한계가 아니라 전후 책임지지 않는 일본의 한계임을 고진의 글 속에서 답을 찾는다. 찬하가 묻고 고진이 답한 천황제의 문제. 


 사실 그것은 일본 근대화의 문제가 아닐까. 인간 이성(理性)의 힘으로 신(神) 중심의 체제를 극복하고 새롭게 인간 중심의 체제로의 전환, 종교에서 과학으로 체제를 지탱하는 힘의 전환이 근대화(近代化)라고 한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종교를 바탕으로 이전 시대의 마술을 부활시킨 역행(易行)적인 운동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키스 토마스 (Keith Thomas, 1933 ~ )의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Religion and the Decline of Magic and Man and the Natural World>에서는 17세기에 대중적으로 일어난 정신적 변화가 전근대적인 마술(점성술, 주술) 등을 극복하는 일련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일본의 근대화는 다분히 전근대적인 요소 위에 지어진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함도 함께 깨닫게 된다.(17세기의 전반적인 변화 이전에는 16세기 문화혁명이, 15세기 르네상스의 영향이 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하자.)


 17세기에 진행된 것은 기술적 변화라기 보다 정신적 변화였다. 이 시기에 다양한 활동영역들에서 인류의 사업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새로운 믿음이 출현했다. 빈곤을 통제하고 유랑민을 없애려 한 튜더 시대의 시도들은 지속되었고 확장되었다(p432)... 우리는 마술적 믿음들을 대체할 효과적 기술이 고안되지 않은 조건에서 그 믿음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사람들이 이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마술을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요, 그들 종교가 초자연적 존재에게 도와달라고 빌기 전에 스스로 할 일부터 찾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p436)... 해묵은 마술적 믿음이 쇠퇴한 것은, 도시생활이 성장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자조 이데올로기가 확산된 추세와 관련될 수 있다. _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3 >, p441


 일본에서 종교가 형식적인 것으로 사람들에게 밀착하지 못하는 이유, 철학과 사상이 없는 이유, 그런 것들의 영향이 약하기 때문에 아까 오가타상이 말한 대로 쾌락에 대한 관대함도 사람들 의식 속에 심어졌지만, 여하튼 그 이유는 바로 천황의 존재에 있는 겁니다. 천황에게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천황은 실상이지 가상은 아니지 않아요? 천황은 분명히 눈앞에 있고 분명히 인간이면서, 서로 다 납득하에 신격화하고 있거든. 거기서 일본인은 딱 걸음을 멈추어버린 겁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609/708


 찬하는 '천황제'라는 과거의 장벽 앞에 멈춰선 일본 정신과 일본 양심을 말한다. 고대 농경의 풍요을 바라던 소박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제도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과거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주변을 손절하는데는 익숙한 일본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를 거부하는 일본의 모습을 <토지> 속 찬하와 오가타 대화의 짧은 몇마디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한계로부터 생겨난 사상적 빈곤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움베르트 에코의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 그리고 <전설의 땅 이야기>와 연결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칼로써 힘을 빼는데 무한한 힘이 소요되는 창조에 바칠 힘이 있겠느냐, 일본의 문화적 빈곤은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고 칼을 삼가며 치지 않고 내 나라를 지키는 데 그친 조선은 당연히 창조에 그 힘을 살렸다, 전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p547)... 그야말로 야만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따라서 사람에 틀림이 없는 천황이 현인신(現人神)도 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가치전도, 전도된 진실에 순치(馴致)되어온 일본인은 비극이라는 감각도 없는 채 비극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 약탈의 도구며 장치예요. 보다 높은 곳을 향하는 이상이나 고매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와 같은 도구 장치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당신네 나라에 사상이 없는 거지요. _ 박경리, <토지 14> , p549/708


 일본의 무사들이 칼을 갈고 어느 길모퉁이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죽일 때 조선의 선비들은 글을 읽고 먹을 갈았습니다. 상무(尙武)정신이 당신들 나라의 오늘을 있게 했다면 성인군자의 길을 닦던 조선의 선비들은 당신네들 침약을 막지 못하고 오늘의 비운을 당하게 했어요. 그러나 당신네 손들은 피에 젖어 있어요. 악(惡)의 승리지요. 승리는 악을 지고선(至高善)으로 끌어올려 놨고 야만이 문명으로 둔갑합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54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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