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어깨를 감싸쥐다가 임이는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 상근이 멱살을 잡았다. 뼈뿐인 손이 상근의 뺨을 갈겼다. 상의가 달려들었다. 상조도 달려들었다. 삼 대 일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상조는 임이 손등을 물었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격투였고 늙은 고모와 어린 조카들이 뒤엉킨 광경을 비극이라 해야 할지 희극이라 해야 할지,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두 아이와 함께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 호야네가 겨우 뜯어말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임이는 임이대로 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임이는 말을 못하고 입술만 실룩거렸다. 그러더니 드디어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음산한 겨울 해는 졌다.(P179)... 지갑을 꺼낸 상의는 돈을 다 털어냈다. "고모 이거 받아요." 어리둥절해하는 임이 손에 돈을 쥐여준 상의는. "고모 미안해." 하면서 눈물을 닦고 급히 달려나왔다. _ 박경리, <토지 17> , p206/572


  <토지> 독서챌린지 33주차. 이번 주에 읽은 <토지 17>에서는 홍이와 보연 부부는 보연이 사두었던 금(金)으로 인해 체포되어 끌려가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한순간 엄마와 아빠를 잃어버리게 된 아이들은 임이를 의심하고, 결국 임이와 조카들은 몸싸움을 벌인다. 큰 불행 앞에 생겨난 내분은 가족 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가족이기에 이러한 갈등이 물에 씻은 듯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아이들은  외삼촌 삼화가 나타나자 안심을 하고, 오랫만에 만난 외삼촌을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따라나선다. 오랜 친분보다 앞서는 혈연(血緣)을 <토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일 부부는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지만, 진화심리학의 관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아이들의 선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들 얼굴에는 이미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스런 것이다. 삶에의 의지는 영악하고 핏줄을 당기는 힘은 불가사의하다. 천일이 부부가 혼신으로 아이들을 감싸왔지만 저토록 스스럼없지는 않았다. 신뢰하고 의지하면서도 아이들은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두려워하며 자신들을 숨기려 하고 방어하려는 기색이 늘 있었다. 그랬는데 한두 번 본 외삼촌에게 모든 긴장을 풀며 기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천일 부부는 다소 서운했다. _ 박경리, <토지 17> , p199/572


 데이비드 M. 버스(David M. Buss)의 <진화심리학 핸드북The Handbook of Evolutionary Psychology>에는 유기체들이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사실로부터 정서적으로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담겨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 또한 평상시가 아닌 위기 상황(비용이 큰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가까운 친척들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졸지에 부모를 잃게된 홍이 부부네 아이들의 선택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천일부부의 서운함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다.


 생물종으로서 우리의 생활사에는 혈연선택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왔다. 혈연선택은 미성년 양육, 값비싼 투자, 식량과 노동의 배분, 정치, 일상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부터 유언과 유서를 통해 유산의 수혜자를 지정하는 최후의 이타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가친척은 근연도에 따라 감정적 근접감을 느끼고, 다른 이의 안녕을 염려하며, 큰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그들을 돕고자 한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47 


 현대의 환경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필요한 지원을 친구들에게 의존하면서 균형을 엄격히 유지하지만, 비용이 클 때는 친족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때는 반드시 균형을 맞추거나 보답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많은 연구가 밝혀냈다. 사람들은 비용이 적고, 만성적이고, 쉽게 추적 가능한 이타주의에 대해서는 상호 이타주의를 활용하는 반면에, 비용/이익이 큰 이타주의의 경우에는 혈연선택을 활용한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48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 1938~2018)는 <양육가설 The Nurture Assumption>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영향보다 또래집단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래집단을 단순한 친구들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본다면 오랫동안 함께 봐온 천일부부도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온 집단의 소속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 부부의 서운함 또한 자연스러울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친척으로부터 느끼는 아이들의 안도감과 소속집단의 일원으로 천일부부가 느끼는 서운한 감정. 모두 독자로서 공감가는 부분이다. 


 양육가설은 아이들이 하얀 백지 같은 뇌를 갖고 태어나며 부모들은 그 백지를 멋진 그림으로 채울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로부터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의 대부분은 후천적으로 학습하는데, 몇 가지 진화론적 사실ㄷ르은 부모가 학습을 독점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_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 p299/1096


 집에서 획득한 지식과 기술, 의견이 또래집단이 선택 사항으로 간주하는 영역이 있다면, 즉 동질성이 강요되지 않고 개별성이 허용되는 영역에 있다면 아이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할 것이다... 공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집에서 배울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또래집단에서 배운다. _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 p763/1096


 친족 비유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사람들을 대할 때 피를 나눈 가족들처럼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 밑에 깔린 전제를 이해한다. 친족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만, 비친족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친족들은 비친족들보다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그래서 유전자가 유기체로 하여금 친족에게 유익한 행동을 만들면, 자기 사본에게 이익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이득 때문에 친족을 돕는 유전자들은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개체군 내에서 증가하기 마련이다. _ 스틴븐 핑거,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p662


 이와 함께, 현대 진화심리학은 '혈연 이타주의는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내리사랑'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큰 것 또한 당연하겠지만, <토지>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무정한 부모의 모습 또한 함께 그려낸다. 인실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자신이 받은 지원을 적합도로 전환하는 수혜자의 능력은 이타주의 배분의 결정적 인자다. 현재와 미래의 필요성, 표현형의 질, 다른 친족의 투자 활용 능력, 번식 가치 등 많은 요인이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연령은 번식 가치를 드러내는 대략적인 지표로, 연구자가 연령을 고려할 때마다 지원은 연상의 개인으로부터 연하의 개인을 향해 흐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49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오가타와 자신과의 핏줄을 버리면서 인실은 자기 자신을 땅속에 묻어버렸다. 깡그리 묻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면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용정, 해란강 강가에서 중학교에 갓 들어간 밤송이 같은 소년들이 강물에 돌을 던지며 모래밭을 뒹굴며 목이 터져라 부르던 선구자의 노래였다. 인실을 오늘 존재하게 한 것은 항상 죽음과 맞선 시간 때문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228/572 


 오가타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버리고 떠난 인실. 본능(本能)에 앞선 인실의 선택은 바로 민족(民族)이라는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본능에 앞선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관념 - 민족 - 을 과연 근대(近代)라는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유기체가 아닌 문화적 존재로서 또하나의 유전자 - 밈 Meme - 로 읽어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찬하는 알았다. 인실에게 생명보다 더한 것이란 조국과 내 겨레를 배신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260/572


 우리는 전근대 시대, 심지어 고대 세계에서도,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지 않거나 그들의 도시국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보는 방식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누비아인과 아시아인들을 보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백성들' 사이에 그어진 메소포타미아와 성서에서의 구분에서, 민족정체성과 민족성이라는 '근대적' 개념과 아주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족들과 민족주의를 순전히 근대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말 정당화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민족적 유대와 정서는 '역사의 질료이고 인류의 보편적 속성'이라는 오래된 견해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_ 김원중, <민족주의와 역사> , p415/927


 근대적인 민족단위 및 정서들과 스미스가 '족류(공동체)'라고 이름 붙인 이전 시대의 집단적 문화단위 및 정서들 사이에 차이와 유사성이 존재함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분석의 필요성이 도출되고, 그와 같은 분석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들이 형식/정체성/ 신화/상징/커뮤니케이션 기호체계라고 주장한다. _ 김원중, <민족주의와 역사> , p416/927


 인실은 '민족'의 관점에서 아이 문제를 고민하고 결단했지만, 그 마음까지 정리하지는 못한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이것은 인실이 봉인(封印)한 본능이다. 찬하가 자신의 아이를 키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실의 마음은 격류에 둑이 무어지듯 허물어져 가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 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의 점(點)에 불과해. 시간 역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_ 박경리, <토지 17> , p37/572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인실이 내린 결단은 흐르는 시간 속에 무너져 가고, 시간 속에서 인실의 굳은 마음도 풀려가면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었을까. 인위적인 제도나 관념에 따른 선택이 아닌 물 흐르듯 본능에 맡긴 자신의 감정 속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인실. 이러한 인실의 모습을 읽으면서 생물의 본성(本性)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자기 자식을 눈앞에 두고 친구의 자식이거니 생각하고 있는 오가타를 볼 때 나는 과연 인실 씨하고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내 이성이 마비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죄악이다! 하고 생각하곤 하지요.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_ 박경리, <토지 17> , p220/572


 그 순간 인실은 막연했던 것이 손에 꽉 잡히는 것을 느낀다. 고아원에도 가지 않았고 이름 모를 남의 손으로 건너가 생사조차 모르게 되지도 않았고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주었다는 사실, 그것이 얼마만 한 축복인가를, 인실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것도. _ 박경리, <토지 17> , p261/572


 이와 함께 아이를 보지 않기로 한 오가타의 선택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선택 또한 본성에 반(反)하는 결정이다. 단순히, 부성(父性)이 모성(母性)보다 진하지 않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은 모성과는 다른 '부성의 발현'으로 읽힌다. 자신과 인실 사이의 아이를 다시 거둬야겠다는 마음과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내려진 오가타의 선택은 인실과는 또 다른 선택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뒤로 미루는 모습. 아이를 안 본다는 점에서는 인실과 같지만, 과정에서는 자신의 본성보다 아이의 양육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접었다는 점에서 오가타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러한 오가타의 선택을 통해 단순히 인간을 생물/유기체로만 해석할 수 없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어젯밤 꼬박이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앞날을. 그 아이를 만주까지 끌고 와서 홀아비인 내가 기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정으론 그 아이와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제부터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정 내 인생이지...... 그 애는 다정한 부모와 누나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파괴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내일을 알 수 없는 떠돌이같은 아비를 따라서 겪어여 하는 새로운 세계, 물론 이와 같은 전시가 아니라면 나는 결코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산카상이 원한다면 성장하기까지 그대로 두는 게 어떨까 싶어서."  _ 박경리, <토지 17> , p316/570


 포유류 번식의 생물학적 특징을 고려할 때, 전 세계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녀에게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자녀와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번식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많은 아버지들이 직간접적으로 자녀에게 일정 수준 이상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78

 

 이번주 독서 챌린지를 통해 홍이네 아이들과 천일 부부, 인실과 오가타의 아이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단순한 유기체, 또는 시스템 어느 일방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다는 정리를 하게 된다. 인간이 유기물들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육체와 함께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마음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 함께 고려해야 할 사항이 아닐까. 물리적 흐름에 역행하는 생명의 약동(Elan Vital)이 있다면, 이러한 '생명의 약동'에 저항하는 또다른 움직임 - 밈 Meme 등 - 이 인간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복합적임 힘으로 함께 작용하기에 이들을 한데 묶어 또다른 통일장(unified field)에서 하나의 이론이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유기체의 작용으로 해석하는 환원주의나 사회적 구조의 산물로 생각하는 사상 모두를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모든 특성은 유전적이다"는 약간은 과장되었지만 그리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물론 가정이나 문화가 제공하는 내용에 의존하는 구체적인 행동 특성들, 가령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어떤 종교를 믿는가, 어떤 정당에 가입하는가 등은 유전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재능과 기질에 반영되는 행동 특성들, 가령 언어에 얼마나 능숙한가, 얼마나 종교적인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인가 또는 보수주의적인가 등은 유전적이다. _ 스틴븐 핑거, <빈 서판> , p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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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밭 갈고 파종하는 법은 아주 일찍 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니, 아주 일찍 한다면 바람과 가뭄을 견딜 수 있다. 대저 곡식의 종자는 땅 기운의 선후의 영향을 받으므로, 실로 일찍 심었는지 늦게 심었는지에 따라 손해를 보기도 하고 이익을 보기도 한다.  _ 서유구, <임원경제지> <본리지1>, p363 


 이번 선거에서 최대 유행어는 아마도 '밭을 갈다'라는 용어가 아닐까 싶다. 대화를 통해 주변 지인들에게 투표독려를 넘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적극적인 정치행위를 말하는 '밭갈기'. 선거 기간에 임박해서 행한 '밭갈기'도 중요하지만, 사실 농사의 시작은 흙을 보고 경작지를 선정하고, 좋은 씨앗을 고르고, 농사의 시작을 선정하는 것에서 이미 대부분이 결정되지 않을까.  5년이라는 시간은 겨자씨가 자라고 숲을 이루는데 충분한 시간이고, 숲을 이룰 수 있다면 '반성 없는 승리'보다 의미있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감정을 추스리고 허탈감을 당장 씻기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각자에게 필요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일어나보면 분명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만약, 할 일을 발견한다면 시작은 빠른 편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문제 없었고, 이번 대선은 우리가 가야할 길의 과정에 불과하니까...




 제때에 심은 작물은 흥성하고 제때를 놓친 농작물은 쇠한다... 제때에 심은 작물은 냄새가 향기롭고 맛이 달며 기운은 현저하게 드러난다. 백일을 먹으면 눈과 귀가 밝아지고 생각이 지혜로와지며, 사지가 튼튼해져서 해로운(凶) 기운이 침입하지 못하고 몸에는 병이 없게 된다.(p362)... 백곡은 파종하고 모종 내는 데에 각각 알맞은 때가 있다. 만약 제때를 한 번이라도 어기면 그 해 농사를 만회할 수 없다. 또 망종(芒種)이라 이르는 것은, 사람의 힘이 넉넉하지 못하여 비록 모두 일찍 심지 못하였더라도, 이때에라도 심는다면 오히려 가을의 결실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 _ 서유구, <임원경제지> <본리지1>,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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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소년 2022-03-11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농사꾼의 기분을 느끼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겨호님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윤석열 당선인은 매우 잘 할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신 것 처럼 윤석열 당선인 또한 믿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2 11:04   좋아요 2 | URL
저도 윤석열 당선인이 잘 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정책의 방향성과 제가 생각하는 방향성이 차이가 있기에 걱정하는 부분 또한 있습니다. 방향성에 차이가 있다면, ‘잘함‘이 다르게 보여지겠지요... 그는 당선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펼칠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방향이 공익과 국익에 초점에 맞춰 나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만, 솔직하게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런 제 생각(또는 편견)을 윤 당선인이 깨주길 바랍니다. 논리야놀자님에 대한 제 생각과 믿음이 시간을 통해 쌓여왔고 또한 쌓이는 것처럼, 당선인에 대한 제 믿음은 임기동안 보여줄 그의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정부의 부족함을 채우되, 잘한 부분은 계승발전하는 새로운 정부가 되길 기원합니다. 몰론, 그 기준은 사적인 기준이 아닌 공익의 기준에서 판단되어야 겠지요... ^^:)

꼬마요정 2022-03-12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밭갈기라는 용어가 신천지에서 왔다 하더라구요. 신천지에서는 사람의 심령을 밭으로 비유해서 포교하려고 사전작업 하는 걸 밭갈기라고 한다는데(제가 왜 이런 걸 아는건지ㅠㅠ) 그래서인지 안 쓰게 되긴 하더라구요. 하지만 너무 좋은 말이라 그냥 써야겠어요. 일베가 ‘-노’를 쓸 때마다 사투리 쓰기 진짜 민망했거든요. 너무 싫었어요. 여기 사람들 말투가 그냥 ~노 로 끝나게 하니까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2 14:1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도 모르는 사이 신천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군요. 저는 ‘밭갈기‘가 밭을 갈 때 밭이랑이 ‘일(一)‘자로 나기에 1번을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너무 열심히 갈면 11번 조원진 지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더랬습니다.ㅋ) 꼬마요정님 덕분에 배워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긴 밤이 지나고 오늘도 해가 떴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아쉬움이 많지만, 지난 대선기간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이 사건(event)의 진정한 의미는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겠지만 그 때까지 같은 여울목에 서 있다는 깨달음은 아니길 바라본다...

ps. 《자치통감》을 쓸 때의 사마광 심정을 절절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지금 당장의 작은 소득이다. 책을 더 깊게 읽을 수 있겠구나...






역사상 민주주의적 조류는 연속적인 물결을 닮았다. 그들은 항상 같은 여울목에서 부서진다. 그것은 항상  새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계속되는 모습은 격려가 되기도 동시에 좌절을 주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어느 발달  단계에 이르면 민주주의는 점차 변질되어 귀족정의 정신을 받아들이게 되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귀족정의  형태도 또한 받아들인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출발 당시에 격렬하게 싸웠던 대상이다. 이제 새로운 비판자가 배반자를 공격하기 위해 일어선다. 영광스러운  투쟁의 시대와 불명예스런 힘의 시대가 지난 후 그들은 구시대 계급과 결합한다. 그 후, 이번에는 그들이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새로운  반대자들의  공격에 직면한다. 이 잔혹한 게임은 끝없이 계속될 것 같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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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3-10 08: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밤사이 뜬눈으로 보낸 분들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저도 결과가 아쉽지만 어쨌든 앞으로의 5년을 어찌 끌고 갈지 잘 지켜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2-03-10 10:18   좋아요 4 | URL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앞으로 해야할 과제가 바뀌었네요... 차차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상심되지만, 새로 집권하는 대통령이 위로의 마음을 담아 재산세를 감면해주겠지요... 큰 불행에는 작은 행복이 따를 듯 합니다.

필리아 2022-03-10 08: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통선거가 지닌 민주정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게되는 과정이었죠. 귀족정의 정신, 미국 헌법 제헌 과정에서 일반 시민의 선거권에 대한 불신의 정체를 떠올리게 됩니다. 한편으론 드러난 표상이란 실재와 같지 않으리라는, 그리고 맹목적 의지의 세계에 대해서 관조하게 되기도 합니다. 추신으로 달아주신 문장에 공감하며....

겨울호랑이 2022-03-10 08:59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길고 힘든 과정이기에 많은 이들이 실망감으로 좌에서 우로 자리바꿈을 한 것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개인의 의지와 마음대로 되는 게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면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5년만 살 것도 아닌걸요. 필리아님 감사합니다^^:)

별족 2022-03-10 09: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그래도 잘 이끌어주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요.

겨울호랑이 2022-03-10 09:03   좋아요 2 | URL
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잘못 하면 고생하는 것은 국민들이니까요.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Cinema Paradiso 2022-03-10 10: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는 마음을 많이 비우고 있었지만. 검찰 공화국이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겨울 호랑이님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0 10:15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시네마님. 우리 모두의 불행이라 여겨지지만, 달리 생각하면 벌써 ‘정권교체‘ 공약 100%를 이행하고 출범하는 정부이니만큼 ‘기대 이상의 성과‘를 5년의 시간 동안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꿈과 같은 오늘 일이 생각만큼의 큰 불행은 아닐지도, 또는 이후 더 킁 행복의 약속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네마님 좋은 하루 되세요! ^^:)

초란공 2022-03-10 1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떤 선택이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짊어지고 가야겠지요. 제게는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좀더 배우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또 재검토하는 시간이 필요할 듯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0 10:17   좋아요 3 | URL
초란공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누군가의 탓을 하기보다 제 자신이 오늘의 결과를 낳게 한 원인임을 저 또한 인정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겠습니다. 아픔없이 배웠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만.... 감사합니다.^^:)

mini74 2022-03-10 10: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밤새 뒤척이다 여기서 호랑이님 글과 댓글들 보먀 위로빋고 갑니다. 아자아자

겨울호랑이 2022-03-10 10:33   좋아요 3 | URL
그럼요, 앞으로 5년 동안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주 건강하게 악착같이 먹을거야, 아주 ... ㅋㅋ 미니님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 2022-03-10 10:3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새벽까지 잠 못 이루다가 거의 결과가 나왔을 때 오히려 담담해졌습니다.
그리고 먼저 이런 결과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 보기도 했고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지만 비대해진 자본주의의 폐해는 아닐지도 생각해 봤어요.
어쨌든 잠시 기대도 해 보지만 결국은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비관에 빠집니다^^
겨울호랑이님께서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0 10:44   좋아요 5 | URL
페넬로페님께서 좋은 말씀 해주셨네요. 저도 공감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점의 중요성에 대해 알면서도 긴급성에서 뒤로 밀려 처리를 안하다보니 생긴 문제인 듯도 하구요... 긴급하다는 주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이 날 것인지는...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도 중요하겠지만, 그 일 후에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가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된다면, 먼 훗날 2022년 3월 9일은 1987년 6월 10일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10 10: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서로에게 토닥토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ㅠㅠ

미국이 건국 당시 대의민주주의가 귀족정, 엘리트주의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받아드릴지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유는 다음 <철학 vs. 철학>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주권 논리란 선거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 정치 권력을 한 사람 혹은 다수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대의민주주의 이념을 말한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이 없는 존재, 즉 글자 그대로 노예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양도받은 대표자는 과잉된 권력을 가진 존재, 즉 새로운 형식의 군주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자발적인 권력 양도가 논리적으로 ‘자발적인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행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서 기능한다.
데이비드 흄은 그의 논문 <원초적 계약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결코 자유롭게 계약을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난한 농민들과 장인들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계약이든 달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어진 국가나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점이 바로 흄이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사회계약론은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공격하게 했던 핵심적 근거였다.
나아가 그는 인간이 어떤 사회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비자발적이라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국가나 사회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주어진 국가나 사회에 맹목적으로 던져지면서 훈육되는 존재일 뿐이다.”

겨울호랑이 2022-03-10 12:22   좋아요 2 | URL
북다이제스터님 글을 읽으며 민주정과 공화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은 서로 대립되는 모순된 개념의 합 일수도 있겠습니다.... 최초 국가 성립 시에는 자발적인 구성원의 동의에 애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수립되었을 지 모르지만, 다른 세대들은 이전 계약에 자연스럽게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보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지점에 선 느낌입니다. 북다이제스터님도 기운나는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10 21:29   좋아요 1 | URL
세싱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공화국 혹은 공화제인 거 같습니다.
그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에 우린 살고 있는 거 같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3-11 07:34   좋아요 1 | URL
^^:) 이번에 더 깊게 민주주의와 공화제 그리고 다른 정체에 대해 고민할 동기가 생겼네요. 진지하게 성찰할 과제라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11 08:03   좋아요 1 | URL
저는 ‘민주공화국’보다는 ‘자유민주공화국’에 관심이 더 많고 이 단어의 방점 혹은 문제는 ‘자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2-03-11 08:08   좋아요 0 | URL
^^:) ‘자유민주공화국‘에 대한 북다이제스터님의 좋은 글을 기대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2022-03-10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1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민들은 법을 잘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뿐,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처음부터 법률문제는 '포기가 곧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법률문제에 시달려본 구술자 중에는 판검사들이 변호사를 통해 돈을 받는다고 믿고 변호사에게 거액을 건넨 사람도 있습니다.(p233)... 시민들이 이런 고통을 겪는 동안 법조인들이라고 해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실비, 휴가비, 전별금 등이 관행이었던 시절에도 판검사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신성가족의 일원이 된다 해도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p234)... 의사소통이 단절된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브로커라는 직업도 애환이 많았습니다. 법대 졸업생으로 청운의 꿈을 품고 또는 가정형편 땜누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건만, 기본급으로는 생활이 너무 어렵고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5/276


 내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고, 그중에서도 사법개혁은 언론개혁과 함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지만, 문제점만 깊이 인식했을 뿐 아직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사법부 문제, 이 문제를 이번 페이퍼에서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 핵심 엘리트 집단에 소속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법조인들, 언제 잡힐지 모르면서도 살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브로커 집단들을 묘사하며, 법의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불행한 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나라 법조계의 제도적, 물적/인적 토대는 모두 일제시대에 마련되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법과 제도는 대한민국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일본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제도와 개념이 식민지에 제대로 정착할 리 없었다. 개념과 현실의 틈새에서 고문, 조작, 과장, 각종 뒷거래가 독서벗처럼 자라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모든 기반이 허약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75/526 


 김두식의 다른 책 <법률가들>은 사법부 문제의 기원을 찾아가는 책이다. 일제 하 이른바 근대제도의 정착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과 갑작스러운 제도의 이식은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혼란이 가라앉기 전 더 빨리 찾아온 해방은 사법부를 비롯한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일본이 남기고 황급히 떠나고 남긴 자산이 남한 내 부의 불평등 시초였다면, 사법부에서 이법회 문제는 학문과 권력에서의 불평등 시초였다.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된 조선변호사시험 응시생 전원에게 합격증을 배부한 '이법회'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공정성 문제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이들 수험생들이 시험에 응시해 합법적으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동안 자격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의 문제는 법조계에 대한 일반의 '불공정'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적산(敵産)은 점령지대 안에 소재하는 적국 소유 또는 적국국민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승전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은 모두 미국 것이었다. 승전국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귀속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적산'은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탈한 우리 재산이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한동안 적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적산 처리는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리는 첫 분기점이었다. 정치적 힘이 곧장 경제적 힘으로 연결된 계기이기도 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163/526


 일제시대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법원에서 내쫒는다고 해서 일제유산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법조계만큼 해방전후 구분이 의미없는 분야도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경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몇차례 운을 띄운 이법회 문제다. 이법회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말하는 '열패고(劣敗苦)'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6/526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 하자는 의미였고, 자신들의 문제를 법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보인 작명이었다. 이법회 회원들의 요구사항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이렇다. "이법회원들은 변호사시험 중단의 책임은 일본국 정부나 조선총독부나 시험위원회에 있다는 것이고, 만일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응시자 전원이 합격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하여, 조선 불성취의 책임을 수험생 측에 전가시킨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고집하며, 응시자 전원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하라고 요구하였다 한다."(p438)... 이들의 실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숫자 때문이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8/526


 이와 함께, 해방 직후 한국전쟁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온다. 1961년 위청룡 검찰국장의 죽음에서 드러나듯, 조금이라도 북한과의 연계성을 의심받을 경우 좌익으로 몰려 인사상의 불이익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법률가들. 한국전쟁 이후 이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한 군사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군사정부에 협조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위청룡의 죽음에 대해 완벽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위청룡의 인생은 크게 보면 두가지 이유로 망가졌다. 첫째는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해방후에 너무 늦게 남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 지방법원에서 서기로 일했고 거기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만식 선생을 흠모해 북한 검사가 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밀려났다. 남쪽 사람들은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위청룡은 북한의 무모한 대남공작과 그에 맞서는 남한의 무리한 수사 사이에 끼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억울한 법률가였다. 별이 저절로 굴러 손에 들어오던 시대였으나 동시에 누구도 안정하지 못한 시대였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28/526


 그렇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군사정권의 압력에서도 과거의 사법부는 자신들의 사찰에도 너그러운 그들의 후배들과는 달리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사법파동을 위해 양심을 가진 판사들이 사직서를 던져가며 저항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법부는 인혁당 사건(1964), 동백림 사건(1967) 등을 거치며 서서히 몰락해 갔음을 우리는 한홍구의 <사법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홍성우, 김공식 등이 법원을 떠나고, 1973년의 법관 재임용 심사로 평소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던 법관들이 다 잘려 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대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69/384 


 한홍구는 같은 책에서 박정희의 유신 정권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해온 사법부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를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으로 바라본다. 여러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파면과 사임, 제명을 당한 이 사건을 통해 판사와 검사는 독립된 사법부가 아니라 안기부의 통제를 받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굴욕의 역사가 1980년대 사법부의 역사였다. 


 1983년 1월 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부하에게서 상납을 받은 '전' 철도청장 안창화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때 검찰은 유태흥 대법원장의 '전' 비서관 강건용(이사관)이 "구속 중인 형사피고인을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피고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뇌물 액수가 크다는 데 있지 않았다. 강건용이 구속될 때만 아무도 이 사건이 일파만파 번져가 검사 두 명의 파면, 서울지검장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의 인책 사임, 부장판사 두 명의 사임. 변호사 세 명의 제명 등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파문을 낳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확실한 힘의 우위를 과시했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147/384


 <법률가들>, <사법부>에 서술된 사법부의 지난 역사는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법조인들과 사법파동 이후 남은 판사들의 권력지향적 모습, 1987년 민주화 이후 국정원으로 축소된 권한을 대신한 검찰권력의 대두로 요약된다. 그 사이 진정으로 시민과 법 앞에 공정성을 위한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움직임은 '잔 속의 태풍(A Storm In The Teacup)'에 불과했던 것이 민과 법조인들 사이의 채울 수 없는 틈을 만들지 않았을까. 자신의 눈을 '무지의 베일'이 아닌 선글라스로 가린 법조인들의 모습은 정의로운 판관(判官)이 아닌 기름부음을 받은 왕(王)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법에 기댄 권위자에 의한 통치.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면 '아주 많이' 좋아진 것은 재벌과 검찰이었다. 과거에는 독재자가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고 재벌의 힘도 상당히 통제했다. 그러나 철저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공화국 대신 삼성공화국과 검찰공화국을 불러왔다. 재벌의 불법행위를 단속해야 할 검찰은 재벌에 의해 관리되는 '떡찰'이 된 지 오래다. 통제받지 않는 두 권력, 삼성과 검찰의 결탁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검찰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의 존망을 가름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354/384


 플라톤(Platon, BC428 ? ~ BC348)은 초기에 <국가 정체 Politeia>를 통해 철인(哲人)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지만, 후기에는 <법률 NOmoi>에서 법률에 의한 지배로 그의 통치철학으로 사상의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변화가 사람에 의한 이데아의 실현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법률(法律)이라는 시스템의 구축으로의 변화라고 한다면, 오늘날 스스로 권력화한 사법부의 모습은 법률에 근거한 법률가의 정체에 다름 아니다.


 5권 473d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 : ho philosophos)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 권력자'(dynastes)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dynamis politike)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 philosophia)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kakon paula)은 없다네. _ 플라톤, <국가 정체> , p365


4권 712a 일체의 권력(dynamis)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원칙)이 마찬가지로 타당합니다. 곧, 최대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로움(phronein) 및 절제 있음(마음이 건전함)과 한데 합쳐질 때, 그때에 최선의 정체(나라 체제 : politeia he ariste)와 그런 법률의 탄생이 실현을 보지, 그 밖의 방법으로는 결코 그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315)...  722e 정말로 nomoi(법률)인 것들, 바로 이것들을 우리는 국법이라 말하는데, 이것들의 전문(前文 : prooimion)은 일찎이 아무도 말한 적이 없으며, 설사 그걸 지은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게 햇빛을 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참주적 지시로 언급되었던 것, 즉 자유롭지 못한 자들로 우리가 말한 의사들의 지시들에 비유되었던 것, 이것은 절대적인 법(nomos akratos)으로 여겨지고요. _ 플라톤, <법률>, p246


 스스로 신성가족화하고, 이러한 신성가족에 저항했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 지는 우리는 지난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과거와는 달리 올림푸스로 가는 길이 '사법고시'라는 외길이 아닌 '로스쿨 law school'이라는 여러 길이 났음에도 이 여정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최소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선택된 이들이라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이러한 사법부의 문제에 대해 장단기적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법부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다음 문제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이 문제를 풀게 될 지 아니면 시험지까지 도로 빼앗기게 될 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우리의 못다한 숙제를 마저 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3월 9일 선거와 선택은 우리에게 중요할 것이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이 되러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좊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17/276


 이 거대한 가족구조 안에서 혼자 깨끗한 척해봐야 검찰 분위기가 바뀔 리가 없고, 싸가지 없다고 찍힌 검사 꼴만 될 뿐입니다. 그 검사가 싸가지 없는 이유는 이 거대한 신성가족을 무시하고, 그저 '현재 검사인 사람만 검사'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가치를 무너뜨린 사람에게는 호적에서 파내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신성가족은 프리미엄도 누리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준수해야 합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30/276


이 모든 문제는 변호사와 의뢰인, 변호사와 판검사들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변호사와의 안면이 왜 중요합니까? 판검사들이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오가는 공식적인 이야기에는 신경을 덜 쓰고, 뒤로 안면 있는 변호사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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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말의 '향연'에서 촛불의 문제 부재는 심각한 문제다. 촛불을 들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어디 먼 곳으로 가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광장을 떠난 이후 다시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가 자신이 속한 정당과 관련해 어떤 경력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정당의 전신(前身)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파란만장한 한국 정당사에서도 초유의 일이다. 이는 지속 중인 촛불혁명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어떤 수단도 다 동원할 수 있다는 결의의 표출이기도 하다. _ <창작과 비평 195호>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 中


   현재 대선 정국이라는 현 상황때문인지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먼저 시선이 머무는 곳은 대선과 관련한 책머릿글이다. 정책보다 네거티브가 더 기억에 남은 이번 선거에서, 5년 전 박근혜 퇴진과 3년 전 검찰 개혁을 외쳤던 촛불혁명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 자리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촛불을 들었던 마음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바뀌면서 점차 정권교체 여론이 고개를 들면서 '촛불'도 이제는 더이상 말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창작과 비평 194호>에서 언급된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완전히 실패한 정부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지나친 비판을 경계한다. 


 현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정부와 비교해 지금 한국정부가 특별히 부정적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한반도 군사 긴장과 북미 대립, 코로나 19팬더믹 등의 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했을뿐더러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도 여러모로 높아졌다. 그럼에도 정치적 반대자들만 아니라 촛불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내에서도 비판적 시선이 적지 않다... 그렇다해도 촛불혁명의 성과를 다 부정하거나 현재 진행되는 선거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일부의 태도는 큰 문제이다. 나라의 주인이라면 촛불의 한계까지도 자신이 감당할 몫으로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다. _ <창작과 비평 195호>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 中


 일부에서는 이러한 <창작과 비평>의 논평에 대해 '대깨문' 식의 주장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퇴임하는 문재인 정부를 돌아보는 Economist지에서 지난 2월 26일자 기사로 다룬 내용의 일부를 원문과 번역본을 함께 옮겨본다. 


 Judged against his own high standards Moon Jae-in, South Korea's outgoing president, is a failure.... With just over two months left of Mr Moon's single five-year term, none of this has come to pass... Yet when it comes to how Mr Moon is likely to be remembered, all this may matter less than it first appears to. South Korea has weathered the covid-19 pandemic more successfully than any other rich country, at least partly thanks to his government. Mr Moon's tenure also coincided with a huge jump in South Korea's global cultural clout. And he has, in a quiet way, strengthened his country's still-young democracy and begun to make life a little less stressful for its people...The legislative supermajority his party won in the elections to the National Assembly in 2020 helped the government swiftly dole out generous pandemic relief, minimising economic disruption. That victory also allowed Mr Moon to advance another goal: to improve the work-life balance of overworked South Koreans. _ <Economist FEB26TH 2022> <K-popular Why South Korea's outgoing president is less unpopular than most>


 자신의 높은 기준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퇴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실패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5년단임제 임기가 불과 두 달 남짓 남은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대통령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가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처음보다 덜 중요할 수 있다. 한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정부 덕분에 다른 어떤 부유한 국가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성공적으로 이겨냈다. 문 대통령의 임기는 한국의 글로벌 문화 영향력이 크게 향상된 도약기와도 맞물렸다. 그리고 그는 조용하게 아직은 덜 성숙한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국민들의 삶에 대한 압박을 조금 덜기 시작했다... 또한 민주당은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면서, 정부를 신속하게 도와 관대한 전염병 구호가 제공되어 경제적 혼란이 최소화되었다. 이러한  승리로 인해 문 대통령은 과로한 한국인의 일과 삶의 균형을 개선하는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_ <Economist FEB26TH 2022>


The parliamentary supermajority also helped Mr Moon fulfil his promise to strengthen South Korean democracy. He curbed the power of the public prosecutor's office by diverting some of its powers to other agencies.  Yoon Seok-youl, Mr Moon's former chief prosecutor and now the conservative candidate for president, has threatened to go after his former boss if he wins the election. If he does, the result will be a test not just of Mr Moon's probity, but also of the resilience of his reforms._ <Economist FEB26TH 2022> <K-popular Why South Korea's outgoing president is less unpopular than most>



 의회 다수당(민주당)은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를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검찰의 권한 중 일부를 다른 기관(공수처)로 이관하면서 검찰 권력을 억제했다. 윤석열 - 문 대통령의 전 검찰총장이자 보수 대통령 후보 - 은 대선에서 승리하면 전직 상사(문 대통령)를 추적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이는 문 대통령의 성실성뿐 아니라 그의 개혁의 회복력에 대한 시험이 될 것이다. _ <Economist FEB26TH 2022>


Bong Joon-ho, who was one of thousands of artists and intellectuals blacklisted by Ms Park for his left-wing views, won a Best Picture Oscar for "Parasite", a dark satire about inequality. "Squid Game", a gory television show directed by Hwang Dong-hyuk, also offering a crude critique of capitalism, topped the Netflix charts and produced countless memes now lodged in the global imagination. That both directors are now treated as national icons rather than enemies of the state suggests South Korea's democracy has indeed grown stronger under Mr Moon. That both shows depict a world hopelessly stacked against the little guy suggests that Mr Moon's promised egalitarian revolution still has a long way to go. _ <Economist FEB26TH 2022> <K-popular Why South Korea's outgoing president is less unpopular than most>


 봉준호 감독 - 그의 좌파적 관점으로 박근혜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수천 명의 예술가이자 지식인 중 한 명- 은 불평등에 대한 무거운 풍자 영화인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황동혁 감독의 잔인한  TV 쇼 "오징어 게임"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제공하며 넷플릭스 차트 1위에 올랐고 현재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밈을 만들어 냈다. 이들 감독이 이제 국가의 적이 아닌 국가의 아이콘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문 대통령 아래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작품 모두 절망이 쌓인 세상에 맞선 약한 사람들을 그린다는 것은 아직 문 대통령이 약속한 평등주의 혁명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암시한다. _ <Economist FEB26TH 2022>


 국내에서는 부동산 문제가 문재인 정부 실패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지만, 외부에서 바라본 문재인 정부의 5년은 분명히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또한 인정하기에 퇴임을 눈앞에 둔 정부의 지지율이 거의 50%에 육박하는 것이 아닐까.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는 이러한 성과에 더해 촛불이 만든 정부에 대한 책임감을 유례없는 임기말 지지율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임기말 지지율도 대통령 한 사람에 대한 호감도 때문만은 아니다. 촛불혁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든 안 하든, 현 정부에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생각할지라도 촛불항쟁을 거치며 시작된 이변화가 멈춰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간접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의지는 촛불항쟁 때까지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의제들, 특히 성평등, 기후위기 대응, 불평등 극복 등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핵심 의제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_ <창작과 비평 195호>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 中


 이제 사전투표가 막 끝난 시점. 아직 본선거는 시작도 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시대와 시대를 맞이하는 태도를 말하기에는 어렵다. Economist에서도 지적하듯 선거 결과에 따라 그나마 쌓아 올린 것도 무너지는 5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갈림길에서 아직 선택이 끝나지 않았기에 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본선거를 기다리게 된다. 


 어쩌면, 지금 문재인 정부의 성과가 작아 보이는 것은 지난 5년동안 우리의 의식이 더 깊어지고 넓어졌기에 5년 전의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시대 정신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이전 사용하던 그릇이 불량품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당 후보도 촛불정신에 비추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재의 선택이 우리나라가 앞으로 가야 할 길과 무관하다는 식의 시선, '모두까기'에 안주하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주인의 자세가 아니라 구미에 맞는 상품을 선택하는 '소비자'에 가깝다. 이러한 행태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택이 나라의 주인이 온전하게 제 역할을 하는 쪽에 가까워질수록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촛불 항쟁을 거친 우리는 그 길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와 있다. _ <창작과 비평 195호>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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