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론의 핵심적인 쟁점은 우주의 시작이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특이점은 단순히 물질의 시작이 아니다. 이것은 공간의 시작이자 시간의 시작이고 물리학 자체의 시작이다. 즉 모든 것의 존재의 시작이다. _ 니콜라스 하이엄 외, <프린스턴 응용수학 안내서 1> , p933


  제프리 R. 윅스(Jeffrey R. Weeks)의 <우주의 모양 The Shape of Space>은 위상수학의 곡면, 다양체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우주의 기원, 모양에 대해 설명하는 위상수학, 우주학 입문서다. 여러 그림과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자료 제공으로 최대한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 애쓴 노력이 담긴 책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위상수학은 낯선 분야이기에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저자는 에드윈 A. 애벗(Edwin A. Abbott, 1838 ~ 1926)의 전설적인 수학 소설 <플랫랜드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의 상황을 빌려와 설명하는데, 결론적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모형은 타원형 기하(a+b+c>180,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보다 큰 기하), 유클리드 기하(a+b+c=180), 쌍곡형 기하(a+b+c<180)로 압축시킨다. 그리고 이로부터 유력한 모형인 삼차원 토러스(3-torus)를 소개한다. 


[그림] 3차원 토러스(출처 : 위키백과)


 만약 우주가 타원형 기하를 가진다면 우주는 닫혀 있어야 합니다. 반면 우주가 유클리드 혹은 쌍곡형 기하를 가진다면, 우주는 닫혀 있을 수도 있고 열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_ 제프리 R. 윅스, <우주의 모양> , p231


 1890년에 클라인은 훨씬 더 일반적인 해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중연결된 우주입니다. 다중연결된 삼차원 다양체 중 가장 단순한 것은 바로 삼차원 토러스입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삼차원 다양체가 다중연결되었다는 것은 그 다양체 안에서 자신의 다중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닫힌 삼차원 다양체 중 삼차원 구를 제외한 모든 것은 다중연결된 것입니다. 유명한 푸앵카레의 추측은 더 이상의 예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_ 제프리 R. 윅스, <우주의 모양> , p240


 저자가 삼차원 토러스를 기본 모델로 설명한 것은 무한히 많은 방향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구조(다중연결)를 갖기 때문으로, 적어도 이러한 구조를 갖는다는 것은 '균질성'과 '등방성'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결론은 '우주의 모양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것으로 내려진다.


 관찰을 통해, 우주에서 적어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균질하며 등방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균질성은 우주의 어떤 두 지역도 기본적으로는 똑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상당히 큰 규모로 볼 때 말입니다... 등방성은 우리가 우주의 어디에 있든지 간에 기본적으로는 모든 방향이 똑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등방적인 우주는 반드시 균질합니다.(p224)... 다행히도 우리가 고려해야 할 균질하고, 등방적인 국소적 기하는 세 개밖에 없습니다. 즉, 타원형 기하, 유클리드형 기하, 그리고 쌍곡형 기하입니다. _ 제프리 R. 윅스, <우주의 모양> , p225


 중력은 전체적으로 우주를 지배한다. 충분히 큰 규모에서 관찰된 우주는 공간적으로 균일하고(공간의 어떤 점도 다른 점보다 선호되지 않는다) 등방성(어떤 방향도 다른 방향보다 선호되지 않는다)인 로버트슨 - 워커(Robertson-Walker)메트릭에 의해서 잘 설명된다. 메트릭은 시간에 종속적이다. _ 니콜라스 하이엄 외, <프린스턴 응용수학 안내서 1> , p931


 우리는 우주의 모양을 3개의 공간과 1개의 시간을 통해 설명한다. 이른바 시공간(Space-Time)은 빅뱅(Big Bang)과 함께 태어났고, 약 46억년 이전(빅뱅 이전)의 세계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우주는 무한(無限)이라 하겠다. (동시에, 우주의 나이가 46억년이라는 사실은 우주의 유한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우주의 온도가 충분히 내려간 탄생 이후 38만년 정도부터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관찰의 한계점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이상한 사건들이 빅뱅 직후 수 억 조분의 일 초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온도, 압력 그리고 밀도가 엄청나게 높았는데, 무한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중력이 양자의 특성을 띠게 되지만 중력에 대한 양자이론은 아직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빅뱅 직후의 우주가 어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_ 제프리 R. 윅스, <우주의 모양> , p237


 우주는 팽창하면서 식었습니다. 빅뱅으로부터 약 30만 년이 지나자, 우주는 뜨거운 플라즈마가 기체로 응축될 수 있을 정도로 식었습니다. 우주는 투명해졌고, 따뜻하지만 맑은 수소와 헬륨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_ 제프리 R. 윅스, <우주의 모양> , p251


  이러한 한계점은 왜 생겨나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알아내는 방식이 '빛'에 의한 '시간 안'에서의 관찰이기 때문이다. 관찰은 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빛은 결코 '광속 光速'이라는 '절대수치'를 넘어설 수 없다. 이로부터 우리의 관찰을 통한 우주 모형의 증명은 한계점을 갖고 출발한다. 시간적으로는 '시간 탄생 이전'을 규명하지 못하며, 우주 공간의 팽창 역시 설명할 수 없다. 몇 억년 이전 출발해 관측된 '빛'으로부터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허블의 법칙 - 우리은하에서 거리가 먼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우리은하에서 멀어지고 있다 - '를 확인하는 정도다. 또한, 관찰된 결과는 오히려 더 큰 수수께끼를 던져주는데, 천구의 모든 방향에서 거의 같은 온도의 빛이 관측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우주초단파배경복사'가 던져주는 이러한 의문은 기존의 빅뱅 모델이 갖는 한계점 - 지평선 문제 - 와 연결된다.


 실제 우주의 좋은 모형이 되기 위해서 우주 모형은 천문학적인 관측에서 옳은 결과를 예측해야만 한다... 우주론적 관측과 관련하여 핵심이 되는 물리량은 적색편이, 면적 거리(혹은 겉보기 크기), 거리의 증가에 대응하는 국소적 부피가 있다. 발산된 빛에 대한 관측된 빛의 비율이 모든 파장에서 같다는 점은 적색편이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_ 니콜라스 하이엄 외, <프린스턴 응용수학 안내서 1> , p933


 원래 우주의 온도는 기체로 응축하기 시작한 때의 플라즈마와 같은 약 3000K였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1100배로 팽창했고, 3000K의 적외선 광자로 파장이 늘어나서 차가운 2.7K의, 즉 절대 영도보다 2.7도 높은 초단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주초단파배경복사  Cosmic Microwave Background[CMB] radiation입니다. 그것은 현재 1세제곱센티미터 당 약 400개의 광자 밀도로 전체 우주를 채우고 있습니다. _ 제프리 R. 윅스, <우주의 모양> , p253


 이러한 '지평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인플레이션 (Inflation 급팽창)이론이 내놓으며1980년대부터 제기되어 현재 주류이론이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202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로저 펜로즈(Sir Roger Penrose, 1931 ~ )다.


 구조의 형성과 관측 환경에 영향을 주는 근본적인 성질 중 하나는 원인이 되는 영향이 빛의 속도보다 큰 속도로 전파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한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원인이 되는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은 과거 영원뿔에 의하여 경계가 만들어진다.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다는 것과 같이 고려하면, 위의 한계는 인과적으로 연결이 가능한 우주 영역의 경계가 되는 입자 지평선의 존재성을 알려준다... 지평선의 중요성은 두 가지이다. 지평선은 구조와 균일성의 근원과 관계되는 인과 한계성의 근본이 되고, 우주에서 실험할 수 있는 것의 절대적인 한계를 나타낸다. 우주의 초지평선 구조에 관한 현재의 많은 추측은 관측을 통하여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시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과 관련된 어떤 분명한 정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_ 니콜라스 하이엄 외, <프린스턴 응용수학 안내서 1> , p934 


 <실체에 이르는 길>에는 인플레이션 이론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근거와 함께 자세히 담겨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입장은 전체적으로 '대칭(對稱, symmetry'에 부정적인 그의 전반적 성향과도 맞닿아 보인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 ~  1900)은 '아름답움이 진실이고, 진실은 아름답다'고 했지만, 매끈한 대칭 보다는 복잡한 프랙탈(fractal)구조를 더 선호하는 펜로즈의 비판을 초끈이론, M이론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과학계에서 유행처럼 등장하는 새로운 이론에 비판적인 펜로즈의 입장은 <실체에 이르는 길>의 별도의 리뷰에서 다루기로 하자. 여기서는 펜로즈가 정리한 인플레이션 이론의 대강만 챙기자.


 구스(Alan Guth)의 인플레이션(급팽창) 이론이 알려진 후, 사람들은 우주의 '급팽창 시기'가 우주의 균질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는 놀라울 정도로 균질하며 매우 큰 스케일에서 공간적으로 평평하다. 이것은 우주론학자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표준모형에서 열화에 꼭 필요한 인과적 상호교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를 '지평선 문제'라고 한다.... 인플레이션의 또 다른 장점은 물질의 분포와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가 균일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끈함 문제 smoothness problem'로 알려져 있다. _ 로저 펜로즈, <실체에 이르는 길 2> , p389


 <우주의 모형>에서 언급한 우리 우주의 모형은 대단히 추상적이다. 추상적일 뿐 아니라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odel's incompleteness theorems)처럼 우주 안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우주의 한계 너머를 규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우주의 모양을 단적으로 아는 것도 좋겠지만, 이러한 이론 등을 배우는 과정에서 팽창하는 우주와 함께 우리 자신도 커나가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 역시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위상수학을 잘 알았더라면 <우주의 모양>을 더 깊이 있게 이해했겠지만, 일단 이 정도로 내용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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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9-05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급해주신 책 중에서 <플랫 랜드>는 읽어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9-05 22:38   좋아요 1 | URL
언제나 깊이있게 책을 읽으시는 초란공님께서는 <플랫 랜드>외에 다른 책들도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에 다른 책들이 초란공님의 관심을 끌어야 하겠지만요. ^^:)

초란공 2021-09-05 23:17   좋아요 1 | URL
이제 읽고 싶은 책이 많이 보이는데 노안이 와서 마음만 급해집니다~^^; 겨울호랑이님처럼 즐길 수 있으면 하고 바랄뿐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9-06 05:17   좋아요 1 | URL
저도 초란공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읽을 책은 많지만 이런저러한 상황이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네요... ㅜㅜ 그럼에도 놓지 않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초란공님께서도 여유로운 독서 되세요! ^^:)

scott 2021-10-08 15: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축!

항상 좋은글, 리뷰
고맙습니다 ^ㅅ^

겨울호랑이 2021-10-08 17:38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mini74 2021-10-08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양이 얼굴을 한 호랑이님 ㅎㅎ 축하드립니다. 어렵지만 항상 잘 보고 배우고 한답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08 17:39   좋아요 1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서니데이 2021-10-0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10-08 18:3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10-08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10-08 23:46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독서괭 2021-10-08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맷돌 밑부분에 쳐놓은 거미줄에서는 바야흐로 무서운 사투가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모기 모양이나 모기보다는 한결 완강하고 정력적으로 생긴 날벌레와 그 날벌레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와의 싸움이었다. 파득거리는 벌레의 날래에서 무시무시하게 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길상은 물 묻은 손을 뻗쳐 거미줄을 확 젖혔다. 거미는 몸을 움츠리고 가사상태를 위장하면서 다리 두 개를 뻗쳐 벌레는 잡고 놓질 않는다. 두 개의 다리는 흡반이 달린 문어 다리 같았다.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에서 길상은 거미를 문들어 죽이고 말았다. _ 박경리, <토지 5> , p336/670 


 토지 독서챌린지. <토지 5>에서 서희와 그를 따르는 평사리 사람들은 용정에 정착한다. 서희는 자신의 수완을 발휘해서 많은 재산을 쌓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점차 안정적으로 정착해간다. 서희와 함께 하는 길상 역시 집안일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이 본문에서 펼쳐진다. <토지 5> 중 일부를 읽은 이번 주 독서에서는 길상이 세수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거미와 날벌레의 싸움 장면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필사적으로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와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날벌레. 먹지 않으면 죽고 반대로 먹히면 죽는 치열한 삶(生)의 현장을 길상은 그야말로 하늘(天)이 되어 지켜본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큼은 길상이 하느님 또는 '신의 대리인'에 다름아니다.  


 중국 문자 가운데 이른바 하늘(天)에는 다섯 의미가 있다. 첫째, 물질지천(物質之天) 즉 땅과 상대적인 하늘이다. 둘째, 주재지천(主宰之天) 즉 소위 황천상제(皇天上帝)로서 인격적인 하늘이다. 셋째, 운명지천(運命之天) 즉 우리 삶 가운데 어찌 할 도리가 없는 대상을 지칭한 것이다. 넷째, 자연지천(自然之天) 즉 자연의 운행을 지칭한 것이다. 다섯째, 의리지천(義理之天) 즉 우주의 최고 원리를 지칭한다. _ 풍우란, <중국철학사(상)> , p61


 펑유란(馮友蘭, 1894 ~ 1990)의 <중국철학사 中國哲學史>에 나오는 천(天)의 의미는 소설의 인물들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거미의 생사를 좌우한 길상은 주재지천의 하늘을, 거미에게 다가운 갑작스러운 죽음의 손길은 운명지천의 하늘일 것이며, 거미와 운명의 싸움을 한 날벌레는 자연지천의 하늘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의리지천을 느꼈을까... 


 신변에 위기를 느꼈음에도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는 그만큼 기아선상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굶주린 것에게서 먹이를 빼앗고 죽이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처사였더란 말인가. 비를 바라보면서 길상은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손길이 벌레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심판은 과연 옳았던가? 인간의 경우에도. _ 박경리, <토지 5> , p336/670


 이러한 상황에서 길상은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올바른 행동이었는지를 돌아본다. 문단의 마지막 문장처럼 이번 페이퍼에서는 길상의 생각을 인간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려 한다. 날벌레를 구하려는 길상의 행동이 '측은지심 惻隱之心' 이라는 인간 본성 - 사단(四端) - 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이러한 판단이 거미에게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대상일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보편적 원칙이라는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법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거미는 인간이 아니므로 적용대상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길상의 생각 속에서 벌레는 의인화가 되어 있기에 적용시켜 본다.) 물론,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와 같이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답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순수한 이론적 원칙들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순수한 실천 법칙들을 의식할 수 있다."(KpV, A53=V30) 선의 이념을 가진 이성적 존재자는 선험적으로 도덕법칙을 의식하며, 이런 도덕법칙들의 최고 원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KpV, 7 : A54=V30)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GMS:4, 421) _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p370


 



이러한 보편적 법칙의 현실 적용과 관련하여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 ~ 1881)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된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알료나 이바노브나(전당포 여주인) 살해는 다분히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살해가 더 큰 효용(效用,Utility)을 가져온다면, 그 살해를 긍정할 수 있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과 주장은 스스로를 '주재지천'의 하늘에 앉힌다. 얼핏 논리적으로 보여지는 그의 이론이지만, 그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수 없다면 우리 모두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생명에 대한 근원적 존중 때문일까. 각자 나름의 논리가 있지만, 서로 부딪치는 논리에서 우리는 우리가 갖는 '정의(正義)'라는 개념이 흔들림을 느낀다. 이처럼 흔들리는 가치관 속에서 보편적인 행동원칙을 찾아 행동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 아닌가! 그 허약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노파의 삶이 사회 전체의 무게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와 이(蝨)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어떠면 그보다 더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_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상)>, p161/680


 그래, 바로 맞아! 그게 인간의 법칙이야...... 법칙, 소냐! 바로 그래......! 그리고 난 알아, 소냐. 머리와 정신이 견고하고 강한 사람이라야만 사람들의 주권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 많이 용기를 내어 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사람들 눈에는 옳아 보이는 것야.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고, 더 많은 일을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되는 거야!  _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하>, p351/838

 

다른 한 편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해는 역설적으로 탐욕의 화신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정화(淨化)시키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라르(Rene Girard, 1923 ~ 2015)의 <폭력과 성스러움 La Violence et le Sacre> 에 표현되듯 '살해'라는 폭력을 통해 '탐욕의 화신'이 '불쌍한 전당포 여주인'으로 전환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알료나 역시 자신은 성실하게 삶을 살았을 뿐이라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정도만 짚도록 하자.


 수많은 제의 속에서 희생은, 때로는 아주 무시하지 않는 한 느껴지기 마련인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때로는 그 반대로 아주 심한 위험에 처하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종의 <죄악>으로,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희생물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 희생물이 성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희생물은 죽임을 장하지 않으면 성스럽게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양가성 ambivalence>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순환논리가 들어 있다. _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 p10 


 라스꼴리니코프의 정의(正義)와 알료나의 성실함/생활력이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죄와 벌>이라는 한정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느 가치에 더 우선권을 주어야 할 것인가.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치와 이해당사자가 충돌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접점을 찾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논리를 알기쉽게 설명한 고병권의 <다시 자본을 읽자>를 통해 살펴보자. 


 '옳음 대 옳음' , '권리 대 권리'의 충돌이라는 겁니다. 둘 다 '노모스'(nomos)를 갖추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이율배반'(Antinomie)이 생겨납니다. 대립하는 주장인데 둘 다 옳으니까요. 이런 모순에서는 논리, 즉 로고스가 더는 기능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는 '힘'이 재판관으로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 p210/284


 고병권이 해설한 <자본론 Das Kapital>의 논리 중 하나는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둘 다 옳다고 했을 때 힘의 논리가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리바이어던, 사회계약이 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더 나가면 원래 출발점인 <토지 5>에서 가출해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테니 이만 멈추는 것으로 하되, <자본>을 관통하는 '착취'의 개념이 '모순'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까지만 담도록 하자. '필요노동'이라는 공통된 개념에 대해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이라는 상반된 해석에서 오는 차이. 이것이 <자본> 전체를 관통하는 '착취'의 시작이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의 일부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씨앗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내가 '모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앞서 이율배반, 즉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이 모두 옳은'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주장이 상반된 옳음을 동시에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paradox)' 입니다. 하나의 견해(doxa)에서 반대 방향 내지 다른 방향(para-)이 생겨나는 것이죠.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 p212/284


 '필요노동' 부분이 자본가에게 '필요한'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사회형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본이 가능하려면 노동자의 존속이 '필요'합니다. 노동력이 재생산되지 않으면 잉여가치는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자본이 가능하기 위한 토대로서 그것은 필수죠... 노동자에게 '필요'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 즉 노동일 전체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이때 필요노동에 해당하는 부분은 역사적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부분입니다. _ 고병권, <생명을 짜 넣는 노동> , p224/309


 <토지 5> 안에서 무심코 거미를 죽이고 고민에 빠진 길상의 옆에 앉아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이러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기도를 올릴 때 이를 들어야 하는 하느님의 입장은 참 대략 난감할 듯하다. 이를 잘 표현한 영화 <브루스 올 마이티  Bruce Almighty>를 떠올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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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4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4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4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토지의 한구절에서 몇 권의 책을 떠올리시며 페이퍼를 쓰신 건지! 그저 감탄에 입만 쩍 벌어지네요!! 저도 신의 입장이라면 곤란할 때가 많겠다 싶어요~ 신기하게 저도 토지 읽으면서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많이 했는데 길상이 옆에 앉아 생각하셨다니 다 느낌이 비슷한가 싶네요!^^

겨울호랑이 2021-09-04 23:04   좋아요 1 | URL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 내게 의미 있는 이는 얼마나 되는지.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구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한 구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장편인 <토지>를 읽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는데, 아무래도 많은 구절이 지나가서일까요. 더 다양한 관점을 찾게 되는 것 같아 좋네요. 붕붕툐툐님 말씀을 들으니 보편적 이성보다는 보편적 감성이 더 쉽게 공감되는 것 같아요. 붕붕툐툐님 평안한 밤 되세요! ^^:)
 

 

<고양이 여덟 마리와 살았다>는 길냥이 미미가 작가네 집에 들어와 새끼 일곱 마리를 낳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처 준비되지 못한 채 고양이와 함께 하게 된 작가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풋풋하게 다가온다. 어미는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다른 곳으로 떠나고, 남은 일곱 마리 중에서도 몇몇은 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가지만 길냥이들에게 '열린' 급식소로서, 그리고 급양사로서의 소소한 일상이 이어지는 <고양이 여덟 마리와 살았다 2> 까지 이어진다. 작가는 직접 고양이들 하나하나의 모든 것을 챙겨주는 집사는 아니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고양이들이 바람처럼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마련해 준다. 숨길 좋아하고 혼자 다니고 싶어하는 고양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그림 곳곳에 스며들어 흐뭇함을 안겨준다.

 

 <고양이 키쿠>는 늙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길냥이 입양기다. 사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짧은 꼬리 고양이 키쿠는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고양이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은 고양이를 입양하고서 고양이의 마음을 얻어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얼마전 서재 이웃이신 물감님께서 키우시는 고양이 사진들과 함께 고양이 페이퍼를 제안하셨습니다. 때마침 다른 이웃분이신 키치님의 글을 읽고 <고양이 여덟 마리와 살았다> <고양이 여덟 마리와 살았다2> <고양이 키쿠>를 구입했던 차라 책을 읽고 귀요미 이야기를 곁들여 봅니다...


 귀요미가 처음 집에 온 것은 2018년 11월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근무하시던 선생님께서 출근하시던 도중 길가에 벌렁 누워 있는 새끼고양이를 보셨다네요. 차에 치어 죽은 것으로 생각하시고, 묻어 주려고 근처에 가자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선생님 차를 졸졸 따라오더랍니다. 덕분에 차에 태워 학교까지 출근하신 선생님. 원래 아내는 키우려 하지 않았지만,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고양이를 키우자는 연의의 주장에 새끼고양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귀요미가 되었네요.

처음 귀요미가 유치원에 온 날


귀요미의 첫 바깥 나들이. 애늙은이 같다.


처음 레슬링 놀이.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인다.


이사 후 처음으로 캣타워를 갖고 득의양양한 귀요미


뭘 먹으란 거냥! 먹을 것으로 장난하지 마라냥!!


뭘 찍냥 


 동물병원에 가서 귀요미의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나니 생후 2개월된 암컷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미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해서인지 귀요미가 가족 모두와 가까워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야생의 눈빛을 한 '삵'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길냥이 시절의 모습을 찾기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집에 온지 이틀째. 침대가 생겼어요.


연탄 귀요미 선생은 일광욕 중... 


지긋이 뭘 찍냥?


 귀요미의 자랑이라고 한다면.... 네. 아마 세상에서 '간식'이라는 단어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고양일 겁니다. 츄르를 줄때마다 '귀요미, 간식?' 이 질문에 반응속도 0.001초로 대답하는 녀석. 가족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머리맡에 있다가 눈을 뜨면 쫓아다니며 조르는 녀석. 귀요미는 한국어 '간식'을 가장 잘 알아 듣는 고양이임이 분명합니다. 그 외에 집안에 있는 '그리마(일명 돈벌레)'를 참 잘 잡습니다. 새벽에 송충이같은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면 주변에 다리가 뜯겨진 처참한 사체가.... 


빤히 쳐다보기


 사실, 귀요미가 '그리마 킬러'가 된 것도 사연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다른 고양이들은 쥐를 잡아 온다던데, 귀요미 너는 뭘로 보답할래?' 라며 놀리듯 말했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때부터 돈벌레를 잡더군요. 생각보다 고양이들은 사람말을 참 잘 알아듣는 듯합니다.


 아이와 함께 잘 자라던 귀요미를 작년에 이사하면서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다른 페이퍼에서 자세히 썼기에 그 뒷 이야기를 붙여봅니다. 귀요미는  아주 잘 자랐습니다. 여전히 컴퓨터 작업할 때 무릎에 앉아 잠자기를 좋아하는 녀석, 이제는 제법 무겁기도 하지만, 어릴 때 제 어깨 위에서 놀던 때 기억을 떨치지 못해서인지 몸을 뻗어 날라올 때는 가끔 기겁하기도 합니다.


귀요미 구출 직후. 쳇! 모양 빠지는구만.



 이제 귀요미 나이가 벌써 3살이네요. 고양이 수명이 평균 15년이니 귀요미는 사람으로 치자면 한창인 20대 아가씨가 되겠네요. 이렇게 시간이 가다가 머지않아 제 나이를 추월해서 먼저 할머니 고양이가 되겠지요. 갓난아기에서부터 딸로, 친구 나이로, 나중에는 먼저 늙어 할머니가 된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집니다.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요. 오래 계속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떠나보낸다 생각하면 매 순간이 참 소중해 집니다.





언니 연의와 함께


2019년. 집사 무릎 침대에서 


집사 무릎 침대에서 2. 오늘 아침 페이퍼 작성 중.... 


 이런 감정이 불멸(不滅)의 삶이 아닌 필멸(必滅)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작은 선물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다소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딸아이 연의와 함께 자라고 있는 귀요미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많이 느낍니다. 굳이 그리마를 잡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보답하고 있음을 귀요미에게 전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Ps. 연의 사진도 몇 년 전 사진인데 지금과는 또 많이 다르네요. 아빠 머리에 느는 흰 머리만큼 세월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반려동물과 함께 자란다는 것은 분명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될 듯 합니다. 어릴 적 저의 경험처럼 연의에게도 그럴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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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29 10:5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예뻐라. 사랑 듬뿍 받는게 느껴집니다. 모자 쓴 연의언니도 무지 귀여워요 ~고양이관련 책들은 그냥 다 좋은거 같아요. ㅎㅎ그리마. ㅎㅎ그래도 고양이가 낫네요 저희 집 개는 벌레만 보면 발벌 떨어요 ㅠㅠ 잡아달라며 ㅎㅎ고양이키쿠 재미있겠어요. 저는 고양이와 할아버지란 만화책 좋아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29 11:18   좋아요 6 | URL
감사합니다. mini님. 강아지와 고양이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저 어릴 적에 강아지와 함께 자랐는데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든든함은 강아지만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면, 귀요미는 언제나 (간식 먹고 싶을 때만) 함께 하지요... mini님 좋은 일요일 보내세요! ^^;)

scott 2021-08-29 11:19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연의 너무너무 사랑스럽게 크고 있네요
제가 키웠던 냥이는 무려 19년을 살다 갔는데
마지막 전날까지 동네 황제로 살다 갔어요(14살 무렵부터 치아가 빠져서 송곳니 두개만 남음)

귀요미 벌레 잡을 정도면 집중력이 뛰어 난것 같습니다.ㅎㅎ
귀요미 연이랑 오래 오래 행복하게 ~*

겨울호랑이 2021-08-29 11:33   좋아요 5 | URL
아 그렇군요. scott님 냥이는 장수냥이었네요. 오래 잘 산 것을 보면 scott님과 함께 한 날이 분명 행복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귀요미가 먹을 거에는 참 뛰어난 집중력을 보이지요... 그러고 보니 연의도...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8-29 11:2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귀요미가 벌써 세 살이나 됐군요. 아깽이 시절부터 하나씩 사진 보니 더 감회가 새롭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8-29 11:34   좋아요 6 | URL
네 저도 이번에 페이퍼 올리면서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참 많이 컸구나 싶었습니다. 잠자냥님 감사합니다^^:)

물감 2021-08-29 11: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끄악 귀요미 너무 이뻐요... 페이퍼 감사드립니다^^ 자세히보니 저희집 둘째처럼 콧가에 카레묻은 비주얼인데요?ㅎㅎㅎ사진만 봐서는 얌전한 쪽 같아보이는데 어떤 성격인지 궁금해요😀

겨울호랑이 2021-08-29 11:35   좋아요 8 | URL
물감님 덕분에 성장하는 귀요미의 모습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감사드립니다. 평소에는 얌전한데, 츄르 앞에서는.... 투사가 되버립니다. 줄 때까지 울부짖기 등등.... ㅜㅜ

페넬로페 2021-08-29 12: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넘 귀엽고 사랑스러운 귀요미의 모습입니다. 20대 아가씨답게 초롱초롱하고 발랄한 모습도요^^
자라나는 연의에게도 좋은 관계가 될것 같아요~~간식에 빠른 반응을 보이는것도 사랑스러워요^^

겨울호랑이 2021-08-29 22:10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연의에게 좋은 동생이지만, 간식에 촉각을 세우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귀요미 매력이기도 합니다만. ^^:)

막시무스 2021-08-29 12:1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귀요미 구출작전 페이퍼 본게 얼마되지 않은것 같은데 그간 많이 크기도하고 더 귀욤귀욤 해진것 같네요!ㅎ 즐건 주말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1-08-29 22:12   좋아요 3 | URL
그게 작년 11월이니 벌써 10개월 정도 되네요. 참 시간이 빠릅니다. 그 사이 살도 제법 오르고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막시무스님 행복한 한 주 되세요!

파이버 2021-08-29 12: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귀요미 진짜 털이 너무 곱고 예쁩니다ㅎㅎ 가르쳐 주지 않은 돈벌레를 잡는걸 보면 정말 천재냥일지두요?

겨울호랑이 2021-08-29 22:14   좋아요 3 | URL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요미가 천재냥까지는 못 되도, 호기심 많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노력하면 천재냥도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

얄라알라 2021-08-29 14: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그저 물끄러미 계속 보게 됩니다. 감동을 뭐라 말해야하나요.

겨울호랑이 2021-08-29 22:17   좋아요 3 | URL
예전에 함께 술래잡기도 하고, 동네 탐험을 다니던 친구로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어린 시기에 언제나 함께 하던 친구가 있어 행복했던 기억이 나서 올렸습니다. 북사랑님 감사합니다 ^^:)

독서괭 2021-08-29 17: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예전에 처음 귀요미 데려오셨을 때 쓰신 글 본 기억이 나요! 마르고 꼬질했던 아가길냥이가 좋은 집사 만나서 살이 오르고 편안해지는 거 보면 참 좋더라구요. 귀요미도 좋은 묘연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네요. 넘나 사랑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29 22:20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께서 귀요미가 밝아진 것으로 봐주셨다니 다행입니다. 항상 같이 있다보면 크게 변화를 잘 모르겠더라구요. 연의가 쑥쑥 자라듯, 귀요미도 길냥이에서 함께 하는 가족으로 잘 자라왔음을 사진과 이웃님들 글을 통해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 ^^:)

오후즈음 2021-08-29 22: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캣타워에 앉아있는 귀요미 너무 귀엽네요. 행운의 삼색이라니~ 저도 한마리 동거하고 있어서 고양이 나오는 책들은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겨울호랑이 2021-08-29 22:23   좋아요 4 | URL
귀요미 성격인지 아니면 삼색이들이 전반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애교도 많고 낯가림도 별로 없어 마치 강아지를 키우는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 면에서 행운의 삼색이라는 말이 맞는 듯해요. 오후즈음님께서도 키우신다고 하니 반갑습니다.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가세요! ^^:)

물감 2021-08-29 23:22   좋아요 3 | URL
오후즈음님도 고양이 페이퍼 써주세요🙂🙂🙂

오후즈음 2021-08-29 23:39   좋아요 3 | URL
저도 고양이 페이퍼 준비해보겠습니다. ㅋㅋ

붕붕툐툐 2021-08-29 23: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머, 겨울호랑이님도 집사님이셨군요! 작년에 북플 활동을 안했어서 귀요미 구출 사건을 못 읽었네요! 그나저나 아가 때가 더 예쁘기 마련인데, 귀요미는 크면서 더 예뻐지네요~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완전 귀족묘 같아요. 귀요미도 연이도 넘 사랑스럽지만, 오늘의 킬포는 맨 아래 동네 최고 미남이 강아지를 강렬한 눈빛으로 제압하는 사진인 거 같습니다!ㅋㅋ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8-29 23:24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어릴 때 귀요미는 야생성이 강해서 나무도 잘 타고 동네 산책도 잘 다녔는데, 함께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아이가 되었네요. 저희 가족도 귀요미가 더 예뻐졌다고 생각하지만, 귀요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귀요미도 지금의 삶이 더 행복하게 느꼈으면 합니다. 맨 아래 사진은 제가 4살 때 사진이었던 것 같아요.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곳곳을 다닐 때 함께 했던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네요. 함께 있어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공쟝쟝 2021-08-31 23: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귀요미 안뇽?! 네가 소문의 그리마를 잡아오는 천재냥이로구나?? 오래오래 건강하게 자라렴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뽀송해지는 귀요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봄 볕을 닮은 고양이 예요!!

겨울호랑이 2021-09-01 04:5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공쟝쟝님 ^^:) 앞으로도 돈벌레 사냥꾼 귀요미와 좋은 시간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라로 2021-09-02 1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알라딘에서 지기님들이 자꾸 올려주시니 제 트라우마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 들어요. 귀요미 다시 돌아온 것을 알지만, 이후로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도 되고 보기 좋습니다. 가족의 사랑이 느껴져요.^^

겨울호랑이 2021-09-02 13:24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귀요미가 라로님의 트라우마에 작은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귀요미를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지만, 그 기간을 통해 소중함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귀요미도 그렇게 느끼면 좋겟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라로님 감사합니다.^^:)
 

  개념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하는 집단을 고려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착취당하는 계급의 특징과 경멸받는 섹슈얼리티의 특징이 조합되어 있는 혼종 양식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이 '이가적 bivalent'이다. 이 집단이 집단적으로 차별화되는 원인은 사회의 정치 - 경제 구조와 문화 평가 구조 양자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은 정치경제와 문화에 동시적으로 그 원인이 되는 부정의에 시달리는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42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1947 ~ )의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Adding Insult to Injury: Nancy Fraser Debates Her Critics>는 그의 정의론과 이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박이 실린 책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비판자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아무래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간의 치열한 논쟁이 이 책을 펼쳐든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쟁을 이번 페이퍼에서 다뤄보려 한다. 


 먼저 낸시 프레이저는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에서 '젠더'와 ' 인종'을 혼종 양식인 '이가적 집단'이라고 규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정치 - 경제' 구조와 '문화 평가' 구조에 모두 위치한 젠더는 이들 구조에서 다른 위상을 갖지면서 모순이 발생한다. 즉, 전자에서는 '재분배' 후자에서는 '인정'이라는 서로 다른 개선책을 요구하면서, 일종의 모순이 혼종집단에서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겨난다.


 요약하자면 젠더는 이가적 집단 양식이다. 젠더는 재분배의 범위 안에 속해 있는 정치경제의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인정의 범위 안에 속해 있는 문화 평가의 측면도 포함한다. 물론 이 두 측면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측면은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얽혀 있다... 그 결과 문화적인 종속과 경제적인 종속의 악순환이 생겨난다. 따라서 젠더 부정의를 개선하는 것은 정치경제와 문화 모두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젠더의 이가성은 딜레마의 원천이다. 여성이 적어도 두 가지 종류의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부정의에 시달리고 있는 한, 여성들은 적어도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개선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개선책은 서로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이와 유사한 딜레마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도 발생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44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두 가지 방안인 긍정적 개선안과 변혁적 개선안 중 변혁적 개선안의 손을 들어준다. '재분배 - 인정'의 문제에 있어 현 체제를 인정하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집단 간 갈등을 양산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무리없는 변혁적 재분배가 사회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다.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 ~ 1950)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말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 속에서 2010년대 초반 사회이슈였던 '선별 급식'과 '무상 급식' 문제를 연상케 된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구도와 해결안을 '젠더', '인종'에서 나아가 '경제정의'문제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집단 분화에 대한 서로 다른 논리를 발생시킨다. 긍정적 개선책이 뜻하지 않게 계급 분화 촉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변혁적 개선책은 분화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른 인정 역학을 발생시킨다. 긍정적 재분배는 박탈이라는 손상에 무시라는 모욕을 덧붙이면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에게 낙인을 찍을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변혁적 재분배는 몇 가지 형식의 무시를 개선하도록 도우면서 연대를 촉진시킬 수 있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56


 기존의 틀을 깨버리자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 <젠더 허물기>에서 보여주듯 양성에 의한 기존 구조를 벗어나자는 그의 주장과도 통할 듯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버틀러는 프레이저가 문제의 틀을 정치 -경제와 문화 구조로 이원화(二元化) 시키고, 젠더 문제를 문화 구조로 밀어넣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마치 라캉(Jacques Lacan, 1902 ~ 1981) 의 '미끄러짐'에서 기표(signifier)가 기의(signified)에 채 닿지 못하듯, 버틀러가 바라본 프레이저의 틀은 젠더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갖는다. 


 그녀(낸시 프레이저)는 분리를 재생산하는데, 특정 억압들을 정치경제의 부분에 위치시키고 다른 억압들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영역에 귀속시킨다. 정치경제와 문화 사이에 걸쳐 있는 스펙트럼을 가정하면서 그녀는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문화적 극단에 레즈비언과 게이 투쟁을 위치시킨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동성애 혐오는 정치경제적 뿌리를 갖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동성애자는 노동 분업에서 구별되는 지위를 점하지 않고, 전 계급 구조에 걸쳐 있으며,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변혁하는 운동이 왜 정치경제가 기능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가?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0


 

이로부터 버틀러의 비판이 시작된다. 맑스주의에 기반한 프레이저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섹슈얼리티'의 다른 기능 - 단순히 문화의 산물이 아닌 사회적 재생산에서 갖는  기능 - 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음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버틀러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유물론과 교환관계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 주의와 선을 긋는다. 본문에서 하부구조를 강조한 유물론과 교환단계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 Karl Marx, 1818 ~ 1883)의 통찰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을 공부한 버틀러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문제의 이원론적 인식과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을 프레이저는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두가 '물적 생활'의 일부가 되는 이유는 이것들이 성적 노동 분업에 복무하는 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규범적 젠더가 규범적 가족의 재생산에도 복무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의 요점은 프레이저와 반대된다. 즉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장을 변혁 시키기 위한 투쟁이 정치경제의 핵심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투쟁들이 무급 착취 노동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재생산과 재화의 재생산 양자를 포함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영역 자체를 확장시키지 않고서는 이 투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p83)...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생산이나 재분배 내에 근본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왜 최근의 맑스주의 혹은 네오맑스주의 논의에서는 섹슈얼리티가 '문화'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걸까?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6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전용했는데, 모스에 따르면 증여는 유물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모스에게 경제는 다양한 문화적 형식을 전제하는 교환의 한 부분일 뿐이며, 경제적인 영역과 문화적인 영역의 관계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명백히 구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p88)... 레비-스트로스는 교환관계가 문화적인 동시에 경제적이라는 점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는 교환 관계가 그 구분을 부적절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도 드러냈다.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9


 프레이저는 친절하게도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해 자신과 버틀러의 관점이 어떻게 차이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자신이 '젠더' 문제를 구분해서 파악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자신 역시 젠더 문제를 어느 한 구조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분배'와 '인정' 모두가 똑같이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버틀러를 베버(Max Weber, 1864 ~ 1920)에 빗대며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나의 틀에서 핵심적인 것은 분배의 부정의와 인정 부정의 사이의 규범적 구분이다. 나는 인정을 '단지 문화적인' 것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나의 핵심은 도덕적으로 옹호할 만한 사회 질서라면 반드시 근절시켜야 하는 두 개의 똑같이 주요하고 심각하며 실질적인 종류의 손해 harm가 있는데, 이를 개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p94)...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무시당한다는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온전한 파트너 full partner로서의 지위를 거부당하는 것이고, 사회 생활에 동료로 참여하는 것에서 배제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관점에서 무시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적 관계이다... 무시는 잘못된 분배에 수단되든 아니든 근본적인 부정의가 된다. 그리고 이 점이 정치적 결과와 연관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95


  내 입장에서 무시 부정의는 분배 부정의만큼이나 매우 심각한 것이며 무시 부정의는 분배 부정의로 환원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문화적 손해가 경제적 손해의 상부구조적 반영이라고 주장하기는커녕,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손해가 모두 근본적이며 개념적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애 중심적 무시가 '단지' 문화적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버틀러는 사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유사-베버적인 이원론을 정통 맑스주의의 경제 일원론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96


 프레이저는 이들(재분배-인정)의 문제는 두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해법으로 해결 가능함을 지적한다. 문화 평가 구조에서의 인정관계를 바꿈으로써 정치 - 경제 구조에서의 잘못된 배분 문제를 해결하자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문제 해결방안의 선후(先後)관계이지, 관계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성애 중심주의의 어떤 형식이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경제적 손해를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맑스주의자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파악하는 것처럼 이러한 경제적 손해를 사회 경제 구조의 직접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버틀러가 승인한 듯이 보이는 이런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이 겪는 경제적 취약함은 생산관계에 결박되어 있아. 이의 개선은 이런 관계의 변혁을 요구한다. .. 또 다른 가능성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이성애 중심주의가 초래하는 경제적 손해를 더 근본적인 무시 무정의의 간접적인 (잘못된) 분배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이성애 중심주의의 뿌리는 '인정 관계'이다. 즉 이성애를 규범적인 것으로,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긋으로 구성하는 제도화된 해석 및 평가 패턴이 바로 그것이며, 그럼으로써 게이와 레즈비언은 참여 동등을 거부당한다. 인정관계를 바꿔라, 그러면 잘못된 분배는 사라질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0


 

 이와 함께 프레이저는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 역공에 나선다. 섹슈얼리티에 의해 발생한 경제적 문제를 모두 자본주의 문제로 귀속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적이라는 것이다. 여러 현상으로 나타난 문제는 하나의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며, 이들간에 관계를 맺으며 확대재생산 되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해체주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2 ~ 2004)의 해체주의를 연상시키는 해결안에 이어, 프레이저는 젠더의 수행성이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는 버틀러의 주장을 '관념적인 생각'으로 비판한다. 이와 같은 프레이저의 글을 읽다보면 헤겔 사후 헤겔 우파의 관념론적인 목소리를 비판하는 헤겔 좌파의 모습을 스치듯 느끼게 된다.


 기능주의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버틀러는 내 생각에 1970년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녔던 최악의 측면 중 하나를 부활시켰다. 즉 서로를 완벽하게 강화하는 맞물려 있는 억압 구조들의 일원론적 '체계'로 자본주의 사회를 과잉 전체화 overtotalized 바로 그 시각이다. 이 관점에서는 '간격'이 포착되지 않는다... 기능주의를 무엇으로 대체하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은 나의 재분배/인정 틀에 대한 세번째 주장과 관련된다. 이 주장은 해체주의적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5


 역사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이 사회 구조적으로 분화되고 역사적으로 특화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한 반기능주의적 계기, 즉 대항 체계적 행위자성 agency과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위치 지을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은 언어의 추상적인 초역사적 특성 안에서, 즉 '재의미화'나 '수행성' 등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사회 관계의 실제적인 모순적 성격 속에서 나타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8


 

낸시 프레이저는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마무리하지만, 프레이저와 버틀러의 논쟁은 치열하고도 독자들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전체적으로 '정치- 경제 구조와 문화 비평의 구조'에서 시작된 이들의 논의 안에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이원론(dualism)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 문제의 상호연관성을 인정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 차이는 동일성 안에 수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 앞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듯 석학(碩學)들의 오가는 논리와 논리 속에 담긴 대가(大家)들의 사상을 찾는 것은 흥미도 감동도 없었던 도쿄 올림픽 시청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들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패배의 그림자가 어느 학자의 눈을 감겼는지는 독자들마다 다른 결론을 내리겠지만 ...


 오늘날 사회 정의는 결국 재분배와 인정 모두를 요구한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확신컨대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 버틀러와 나는 동의한다. 그녀가 사회 정의의 언어를 상기시키는 것을 꺼려하고, 우리가 이론적으로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정치의 최상의 요소들을 되살리고 그것을 '신사회운동들' 정치의 최상의 요소들과 통합시키고자 노력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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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을 하나 이상 낳아만 준다면 김훈장은 날로 퇴락해가는 집만 남아 있는 김진사댁의 대도 이어줄 생각이었다. 생각이라기보다 간절한 희망이었다. 마음을 놓아서였던지 며느리를 본 후 김훈장은 며칠을 앓았고 앓고 난 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더욱더 희어졌다. _ 박경리, <토지 4> , p21/672


  <토지 4>의 처음은 러일전쟁(日露戰爭, Russo-Japanese War 1904 ~ 1905)이라는 상황을 바라보는 김훈장과 조준구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유학(儒學)을 따르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위해 노력하는 김훈장과 어른 없는 최참판댁 자산을 노리는데 여념이 없는 조준구. 이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당대 지배층들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이들 중 김훈장을 살펴보자. <토지인물사전>에 '봉건제적 질서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로 설명된 김훈장. 가문의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그의 강박관념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신유학(新儒學) - 성리학(性理學)'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에서 '신유학'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가 부계 중심 사회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장자(長子) 중심의 승계는 얼핏 유럽 중세의 봉건제도와 연계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유럽에서는 차남(次男) 이하 다른 자녀들은 성직자, 기사 등 다른 직업으로 진출한 데 반해 조선 시대의 엘리트 층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은 듯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資本主義'와 관련한 다른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넘기자.  


 장자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버지 쪽 조상과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서 장자만이 선조들의 유일한 후사로서 후손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를 받는 '정체 正體'를 가졌던 것이다. 장자는 형제자매 집단을 대표하면서 세대를 잇는 이상적인 고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장자가 법적, 의례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장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17세기이다. 이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주자의 개념을 기초로 한 부계친 사고의 절정을 나타낸 것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241


 <토지 4>에서 김훈장은 가문을 잇는다는 가문의 책무를 완수한 후 자신의 시선을 비로소 나라로 돌린다. 이러한 그의 행동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안에서 김훈장은 어느정도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그는 지배 엘리트 층으로서 문제를 자각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오롯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붉은 마음(丹心) 때문일까. 김훈장의 처지를 생각하면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라나 한 집안이 망하고 흥하는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인화가 없고 신의가 없고 예절을 잃으면 그것으로써 마지막이야. 지금 나라 꼴이 어떠한가? 동가숙서가식하는 천기보다 못한 지조 잃은 인사들이 황공하게도 임금을 볼모로 삼아서 오늘은 아라사요 내일은 왜국이요, 해서 자신의 영달에만 급급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p22)... 가통을 이어야 한다는 골수에 박힌 사상은 이 나라의 꽃이요 정기요 하며 의병의 항쟁을 흐느끼듯 칭송해 마지않던 감정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p25)... 가통을 잇는다는 집념과 정열의 성취를 본 지금, 이제 그 정열과 집념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아니 갈 곳이 없다기보다 차디찬 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31/672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다른 책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에서 향촌의 양반인 향반(鄕班)이 지방에서 영향력 유지를 위해 종법(種法)에 기초한 네트워크가 구성되었음을 말한다. 중앙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사회권력으로서 향약(鄕約)에 근거한 김훈장의 힘은 바로 지방민들의 지지와 존경으로부터 나왔기에 '평사리의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기 위해서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엄청난 내구력을 부여했다.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727

 

  한편으로는 중앙으로부터 갈수록 소외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능하지만 결코 간섭을 멈추지 않는 국가의 압력에 시달리면서 엘리트 신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향촌의 양반(향반 鄕班)'은 점차 '지역주의 전략'에 기대어 본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향촌 지배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구사한 가장 효과적인 장기 전략은 종족제도의 체계화와 강화였고, 이 제도는 17세기에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473


  <토지>저자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는 당대 서민들의 생각이 동학(東學) 사상에 잘 드러난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드러난 민의(民意)는 동학교도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로부터 대표성을, 표영삼(1925 ~ 2008)의 <동학>에 나타난 일본상려관에게 보낸 글을 통해 도덕성과 반외세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자는 무위하고 후자는 종양(腫瘍)으로써 왕실 붕괴, 국가 파탄의 촉진제가 될 것이지만 수구 사상에서는 정예한 근위병(近衛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두 줄기를 타고 뻗어난 들판, 그 들판을 메운 서민들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이들은 모두 수구파다. 수만 동학이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시초부터 그들은 인륜 도덕을 강렬하게 내포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기치는 위국진충(爲國盡忠)이며 소파왜양(掃破倭洋)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5/522


 일본 상려관은 펴보아라... 천도란 지극히 공평하여 다만 착한 사람은 음덕이 있게 하고 악한 사람은 벌이 있게 했다. 너희들은 비록 변경에 살고 있으나 받은 성품은 하나의 이치임을 또한 알지 못하는가... 아직도 욕심 많은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자리잡고 앉아 공격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어떤 마음이며 필경 어찌 하자는 것인가... 우리 스승님의 덕은 넓고도 가없어 너희들에게도 구제의 길을 베풀 수 있으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듣을 것인가 안 들을 것인가. 우리를 해칠 것인가 아니 해칠 것인가... 스승님은 이미 훈계하였으니 평안하고 위태로움은 너희들이 자취하는 것인 바 죽도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다시 말하지 않으리니 서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계사 3월 초2일 자시 조선국 삼사원우초 _ 표영삼, <동학 2>, p276 


 인내천(人乃天)에 기반한 반외세(反外勢)를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삼대조(三代祖)가 미관밀직에 있었으며, 등과를 못한 향반으로 살아가야 했던 김훈장은 마을에 연고가 없는 경화사족(京華士族)인 조준구와는 달리 앞장서 움직여야할 이유가 있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이유가 김훈장을 의병장으로 떠밀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의 양반 출산 의병장들의 동기도 이같은 요인이 부분적으로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덧 김훈장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의병장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츰 전설적인 인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의 소이였다. 왕시, 김훈장을 두고 화심리에 사는 장암 선생 수제자로서 학식이 깊다고 믿었으며 자랑으로 생각했던 그 심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마을 사람의 공통 심리였다. 꼭히 믿는 것도 아니면서 즐거움을 위해 믿어보는 것이다. 희망이 적은 그들의 감정적 사치였을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245/522


  작가는 작품 안에서 지배층의 두 움직임 수구(守舊)와 개화(開化) 모두를 비판한다. 김훈장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움직임은 물론, 조선 후기의 변혁 움직임 역시 제대로 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무너지고 말았음을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작품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한 인물을 지적한다. 반계 유형원.


 중국의 정신문화, 그 속에서도 유교를, 유교 중에서도 철학과 인륜 도덕의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였던 이조 오백 년 동안 그 이지적이며 귀족적인 사상을 골육으로 한 절도 높은 선비들과 왕실에 밀착된 명문 거족들은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며 또는 외향적 기득권을 주장하며 지금도 수구(守舊)를 고집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참으로 부수기 어려운 거대하고 준엄한 조선의 산맥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_ 박경리, <토지 4> , p73/522


 하기는 햇볕 안 드는 뒷방에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을 시조로 하는 경세학파(經世學派)의 불우한 사류(士類)들과 현실적인 중인 계급의 일부가 있어 진실한 개화에의 꿈을 기르고 있었으나 이네들은 일본을 업고 재주를 부리는 정치적 무대도 능력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라는 낯선 장단에 춤을 추며 백성들을 모아보는 주변도 없었고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수구파들이 열어놓은 혈로(血路) 아라사에게도 줄이 닿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네들은 조선의 토종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6/522


 작품 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유형원(柳馨遠, 1622 ~ 1673)이다. 조선 후기 반계의 경세사상(經世思想)이 갖는 한계점을 작가는 지나가듯  말했지만, 제임스 버나드 팔레 (James Bernard Palais, 1934 ~ 2006)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 후기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on and the Late Choson Dynasty>에 의하면 그 영향력은 스치듯 지나갈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한 중화(中華)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청일전쟁 후 방향성을 잃었지만, 도덕성에 근거한 윤리사상은 조선 후기 변화되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모색했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토지>에 드러난 박경리 작가의 비판은 다소 매섭게도 느껴진다.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악화되었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유교의 기준에 따른 도덕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유지됐다. 농업의 우위와 상업 및 이익 동기의 비도덕적 결과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중요하게 간주됐지만, 유교적 관원과 학자들은 경제적 활동의 어떤 이점을 인식했다.... 경세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전에 서술된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현실적 경세론의 실천에서 주요한 지혜의 원천은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서술한 방대한 방대한 문헌이었으며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주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였다. _ 제임스 B. 팔레,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후기 2> , p589


 이와 함께 <토지 4>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배경은 러일전쟁이다. 청일전쟁 후 대만과 요동반도를 점령하려던 일본의 계획이 삼국간섭(三國干涉 Tripartite Intervention)이 무산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대화 속에서 설명된다. 1885년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에서 드러나듯, 극동지역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일본 동맹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일부였으며, 삼국간섭이 전쟁의 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 일본이 러시아보다 한 수 아래의 전력으로 여겨졌던 만큼 전쟁 이전 여러 타협안이 오고 갔음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의 <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어주기로 한 청나라 얼빠진 위정자들은 차치하고 늑대같이 한반도도 먹고 싶고 만주 땅도 먹고 싶고, 그도 유유자적하게 노리고 있던 아라사가 어찌 되었겠소? 그러니까 아라사는 기고만장했던 일본에게 찬물을 끼얹었던 게요. 당사자인 청나라도 아닌 아라사가 독일과 불란서라는 나라에 충동이질하여 협박을 했단 말씀이오. 아무리 일본이 전승국이라고는 하나 대국 아라사와 불란서 독일의 삼국을 상대하여 이길 재간이 있었겠소? 문명이 앞서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그네들을 말이오. 게다가 영국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부지리나 얻을까 싶어 관망하는 상태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부터 일본은 아라사에 대해서 보복의 칼을 갈았던 게지요. _ 박경리, <토지 4> , p60/672


 일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라사는 숙적이요 영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각처에 저희들 식민지가 있는 만큼 아라사가 한반도로 만주로 하여 바다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미련한 곰 같은 아라사가 그런다고 밀려나겠소? 한술 더 떴지요. 그러니까 지난 오월 우리 땅 용암포(龍岩浦)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몰고 왔으니 일본이 콩 튀듯 할 수 밖에요. 이러니 일본과 아라사는 전쟁으로 판가름을 할 수." _ 박경리, <토지 4> , p66/672


 러시아의 만주 지배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상호 인정하자는 타협안이 대한제국의 중립화 정책과 부딪히면서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직전의 치열한 외교전의 상황 속에서 개항 이후 여러 외교 문서에 등장했던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조항이 얼마나 무의미한 조항이었는가를 우리는 <러일전쟁>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또한, '청일전쟁', '러일전쟁' 두 전쟁 직전에 맺은 조선과의 협약을 통해 조선의 물자, 식량 등을 마음껏 징발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그네들의 모습 속에서 '근대화 近代化'라는 껍질가 실상은 과거 무사도(武士道)가 군국주의(軍國主義)로 변신한 '제국주의 帝國主義'에 다름 아님을 실감한다.


 

 청일전쟁은 열강을 자극했다. 야심가인 신 외무장관 무라비요프도 황제의 뜻을 존중해, 러시아 해군이 원하지도 않는 부동항 뤼순, 다롄의 획득이라는 모험을 적극 시도했다.(p1195)... 일본은 러시아의 랴오둥(遼東)반도 조차(租借)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신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일본도 러시아의 만주 전면점령에 이르러서는 일본에게 조선을 전면적으로 양도하라는 만한교환론을 정면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 황제는 한국이 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하는 노선을 처음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에 교섭하자고 요청했다. 1901년 1월 일본정부의 가토 외상은 주청 공사 고무라의 의견을 듣고,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무라의 의견은 이미 단순한 만한교환론이 아니었고, 한국의 확보가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견제하는 거점이 될 것이라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주장은 완전히 어긋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러일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_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2>, p1196 


 <토지 3>에서는 초반부의 주요 인물들이 한번에 퇴장하면서 작품의 전개가 빨라졌다면, 이번 주부터 들어간 <토지 4>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으로 급격하게 국운(國運)이 기운다. 급류처럼 빨라진 쇠망의 역사 속에서 이와 함께 읽을 좋은 책들이 많지만, '독서 챌린지 페이퍼'라는 글의 성격 상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페이퍼에서 잠시 언급한 <한국의 유교화 과정>, <조상의 눈 아래에서>,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러일전쟁>은 별도의 리뷰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 주 <토지 4>는 개인적으로 유교 사상에 투철한 김훈장을 통해 조선 후기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충효(忠孝), 반계 유형원을 통해 후기 개화 사상의 한계와 러일 전쟁의 배경 등을 정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조준구를 통해 친일(親日)이라는 부분도 다뤄볼 수 있겠지만, 이는 후반부의 인물인 배설자와 함께 종합적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져 다음으로 넘긴다.  어쨌든 독서 챌린지의 끝은 지금 당장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으니까...


 Ps. 개인적으로 <토지>  후반부의 인물인 친일파 배설자의 모습에서 실존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의 양녀 배정자(裵貞子, 1870 ~ 1952)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느낀다. 이름의 유사성, 친일 행적 등이 이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듯한데, 배정자와 다른 배설자의 비참한 최후에서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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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21-08-21 14: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 책에서 언급된 도이힐러의 주장에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은 장자 중심 상속과 부계 사회 구현이 성리학 이념 안에 본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저는 언급된 <조상의 눈 아래에서> 인용문과 같이,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조건 하에서, 기득권층이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신분 질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에서 그러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8-22 08:16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저 역시 베텔게우스님 말씀처럼 도이힐러의 논조에 다소간 차이를 느꼈습니다. 조금은 다르긴 합니다만... 저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는 여말선초에 새로운 정치이념인 성리학 도입이 부계 중심의 구조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는 반면,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관계와의 역사적 대립에서 결국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저자의 결론에서 논조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차이는 전자가 여말선초, 후자는 신라~조선을 분석 대상으로 하는 ‘단기‘와 ‘장기‘라는 분석 시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베텔게우스님께서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해서는 두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이기론(理氣論)‘에 따라 중국을 모든 사물의 근원인 ‘이‘로 보고 전통문화의 측면이 강한 조선을 ‘기‘로 해석하여 부계 전통에 강한 중국을 단순히 따라가려 했는지, 아니면 이러한 목적이 아닌 기존 ‘불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위한 ‘성리학‘ 도입에서 오는 여파 때문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직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지 못해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텔게우스님 덕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