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진왕(秦王) 부견이 그를 예로 대하여 연인(燕人)들의 희망을 거둬들이고, 그를 가까이하여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다하게 하였으며, 그를 총애하여 연의 무리들을 기울게 하고, 그를 믿어서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맺도록 하였으니 아직은 허물을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왕맹이 어찌하여 모용수를 죽이는데 급급하여 마침내 시장에서 죽 파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 마치 그의 총애를 질투하여 그를 참소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었겠습니까?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9/92


 조금씩 읽던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도 100권을 넘어섰다. 매권이 얇긴 해도 100권이면 적지 않은 분량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전체 책이 294권이니 전체 분량의 30% 정도에 불과하여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읽고 있는 시대는 오호 십육국시기로(五胡 十六國時代, 304 ~ 439)의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7 ~ 385)의 치세로,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 ~ 384) 때 불교를 전파한 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부견은 재상 왕맹(王猛, 325 ~ 375)의 보좌를 받아 전진을 강국으로 만들었는데 독자들은 후한말부터 이어지던 극심한 혼란기에 태평성세의 빛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 이 시기를 읽던 중 저자 사마광의 논평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그의 말에 끌려서가 아니라 그의 논지에 반(反)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이 나온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왕맹은 자신이 멸망시킨 전연의 잔당인 모용수(慕容垂, 326 ~ 396) 일족을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지만,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왕맹은 모용수의 숨겨진 실력과 야심을 알아보고 진언을 하지만, 부견은 천자란 모든 이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를 거절한다.


 관중(關中)의 병사와 백성들은 평소 모용수 부자(父子)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흠모하였다. 왕맹이 부견에게 말하였다.  "모용수 부자는 비유하자면 용과 호랑이 같은데,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만약에 바람과 구름이 끼는 기회를 빌게 된다면 장차 다시는 제압할 수 없을 것이어서 일찍 그를 제거함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영웅을 거둬들여서 사해를 깨끗이 하고자 하는데 어찌 그를 죽인단 말이오? 또한 그가 처음 왔을 때 내가 이미 정성으로 그를 받아들였으니, 필부(匹夫)라도 오히려 자기가 한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마물며 만승(萬乘)의 경우에야?"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0/92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왕맹의 조언이 뛰어난 모용수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깎아내리면서, 부견의 행동이야말로 군주(君主)의 도(道)에 맞는다며 그를 두둔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전투였던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전진이 패배한 후 모용수는 자신의 일족을 거느리고 멀리 떠나 후연(後燕)을 건국하며 왕맹의 통찰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결국, 역사는 사마광이나 부견이 강조한 인(仁)이 송양지인(宋襄之仁)임에 불과했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모용수는 은밀히 연(燕)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의 복록(福祿)을 회복시키려는 모의를 하는데, 때마침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병사를 일으켜 진(秦)을 배반하여 예주목(豫州牧)인 평원공(平原公) 부휘(符暉)가 있는 낙양(落陽)을 공격하려고 모의하자 진왕(秦王) 부견이 역참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 모용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p29)... 모용수가 형양에 이르자 많은 부하들이 굳게 존호에 오를 것을 청하자 모용수는 마침내 진(晉)의 중종(中宗) 고사에 의거하여 대장군, 대도독, 연왕(燕王)이라고 칭하고 승제(承制)하여 업무를 시행하고 이를 통부(統府)라고 하였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34/103


 이해 11월 겨울, 송양공이 초성왕과 홍수에서 교전했다. 초나라 군사가 미처 강을 다 건너지 못했을 때 목이가 건의했다. "초나라는 병사가 많고 우리는 병사가 적으니 이들이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기회를 이용해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송양공이 듣지 않았다... 송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송나라 백성 모두 송양공을 원망했다. 송양공이 변명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 목이가 말했다. "전쟁을 하면 승리를 얻는 것이 공적입니다. 어찌 실제와 동떨어진 말만 늘어놓는 것입니까? 군주의 말씀대로라면 노비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어찌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_ 사마천, <사기 세가> <송미자세가>, p234


 진(秦)의 군사가 비수(肥水)에 가까이 가서 진을 치자 진(晉)나라 군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진(秦)의 제장들이 모두 말하였다. "우리들은 많고 저들은 적어서 그들을 막아 그들이 올라올 수 없게 하여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다만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나게 해서 그들에게 절반 쯤 건너게 한 다음 우리들의 철기(鐵驥)로 그들을 쫓아 죽이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1/103


 잠시 이야기가 엇나가지만, 전진의 부견을 보면서 송양공의 모습을 계속 연상하게 된다. 송양공이 자신의 신하 목이의 조언을 거절하며 분수에 넘치는 자비를 베풀다가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나, 부견이 왕맹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나라가 분열하게 되는 모습은 기시감(旣視感)을 안긴다. 여기에 곁들여, 두 군주 모두 강을 두고 벌일 싸움에서 패배한 점, 각각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다 실리를 놓친 점도 그러하다. 다만, 이에 대해서 사마광은 별다른 평을 하지 않는다. 사실, 송나라 시대를 살았던 사마광이 부견이 모용수를 놓아준 일이 어떤 보답으로 돌아왔는가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그런 평을 <자치통감>에 남겼을까.


 권익(權翼)이 간하였다. "모용수의 용맹과 지략이 보통사람을 능가하고 대대로 동하(東夏)의 호족으로 잠시 화를 피해 왔으나 그 마음이 어찌 관군(冠軍)의 장군 노릇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 두십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이미 그에게 허락하였으니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만승(萬乘)인 경우에야! 만약 천명(天命)이 폐하고 흥함을 갖고 있다면 진실로 지혜와 힘으로써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고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이 보건대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관동의 혼란은 이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6/103


 그것은 <자치통감>이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서를 통해 정치 라이벌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을 경계하려는 사마광의 의중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법(新法)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왕안석과 이를 막으려는(捍) 사마광.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마광은 <대학 大學>에서 '격물(格物)'을 '막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사마광은 왕맹의 모습 속에서 라이벌 왕안석의 모습을 발견하고 왕맹에 대한 직접 비판을 통해 왕안석을 우회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자치통감>의 사마광 평을 보면서 <자치통감>에 자리한 역사관을 깊이 느끼게 된다...


 왕안석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사마광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신종은 사마광에게 <자치통감>의 편찬 작업을 하게 하고, 한 시대가 끝나면 바로 올리게 하고, 또 경연에서 이를 진강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사마광은 자기의 정치철학을 신종에게 말할 수 있었다.(p89)...  사마광이 왕안석의 정책을 '장사꾼이 마지막 이익을 강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서는 왕안석이 새로 만든 기구인 삼사조례사로 와서 근무할 것을 요구하자 돈과 곡식에 관해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했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과 유서의 생각이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눈앞의 이익보다는 도(道)를 추구하여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162/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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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3 23: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심으로 겨울호랑이님의 읽기가 부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03 23:39   좋아요 5 | URL
아닙니다... 진득한 면이 부족해서 마음가는대로 읽는 제 멋대로 독서인걸요... ㅜㅜ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 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77/196


 어젯밤에는 몸도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도 병이 난 것처럼 한속이 나는가 하면, 다시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밤새 내내,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아침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5/196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 ~ 2008)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수용소에 수감된 슈호프의 '어느 평범한 하루'를 배경으로 한다. 대체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이룰 수 있었던 운 좋은 하루. 수용소 밖의 사람들 시선에는 행복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는 만족해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슈호프가 마음 편하게 잠을 자고 난 후에도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온다. 그가 눈을 뜬 다음날에는 '운수 나쁜 날'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10년이라는 기간을 매번 운수 좋게 지낼 확률은 '동전 앞 면'이 3,650번 연속으로 나올 확률보다는 분명 낮을테니까. 아마 슈호프는 그렇게 평균적으로는 '그렇고 그런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수용소 군도>는 '그렇고 그런' 많은 날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저자의 다른 작품 <수용소 군도>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작품이다. 전자가 하루의 수용소 생활을 다룬다면, 후자는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거쳐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수용소 군도>의 축소판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될 수 없듯, <수용소 군도>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담고 있지 않은 부분을 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10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자부심 넘치던 인간이 반복되는 수용소의 나날을 거치면서, 제로(0)가 되고 출소의 즈음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본인은 원치 않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람의 변화가 아닐까. 


 혁명 후 첫 10년 동안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단지 좁은 계급적 의미만을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원 노릇을 단호하게 거부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모조리 가차 없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1> , p60/341


 <어떻게> 하여 인간은 악인이 되고, <어떻게> 하여 선인이 되는지, 젊어서 성공에 도취된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 절대 옳다고 믿어서 잔혹했다. 지나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살인자였으며, 탄압자였다. 가장 나쁜 행동을 할 때,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형무소의  썪은 짚단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최초의 선(善)의 태동을 느꼈다. 차츰 나에게 분명해진 것은, 선악을 가르는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는 곳은 국가 간도, 계급 간도, 정당 간도 아니고, 각 인간의 마음속, 모든 인간의 마음속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이동하고 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들 마음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 악을 가진 마음속에도 선은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아무리 선량한 마음속에도 근절되지 않는 악의 한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세계의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이해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4> , p227/290


 한 인간의 미래를 더 명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석방 때 느낀 <마음속의 변화>다. 이 변화는 영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위병소의 출입구에 서면, 비로소 감옥인 동시에 고향을 떠난다는 감회가 솟구친다. 자신은 여기서 정신적으로 거듭났고, 그 감춰진 마음의 일부는 영구히 여기에 남기고 가는데, 당신의 발만이 <사회>라는 말도 없고 반향도 없는 공간을 향해 가는 것이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6> , p108/220


 수용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법칙 - 밀름의 법칙, 노동의 법칙 - 등은 그들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몰아 넣고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 모습이 수용소의 하루에서 보여지지만, 10년의 수용소 생활에서는 이들이 서로에 대한 투쟁상태를 어느 정도 종식시키고, 수용소의 부당한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 다함께 단식투쟁을 하는 '사회계약'에 의한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수용소 생활에서 인류 문명의 진보를 찾는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도 맞지 않고 무리한 논지가 될 것이다. 다만, 적어도 연속된 게임의 법칙에서 '이기적' 행동보다 '이타적' 행동이 보다 더 이롭다는 시행착오를 통한 공감대의 형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일의 기간은 <그 일에 의해서> 결정된다. - 요컨대 그 일이 완료된 때가 노동일이 끝나는 것이다. 만약 일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에는 숙소로 돌아가지 못한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3> , p56/437


 "이봐,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의 법칙이라는 것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 가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는 놈들이고,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놈들, 그리고 정보부원들을 찾아다니는 놈들이야."(p5)...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75/196


 죄수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옆의 죄수다. 만일 모든 죄수들이 서로 시기하지 않고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에이!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29/196


 수용소 안의 밀고는 수용소의 가장 강력한 투쟁 형식이 된다. 즉, <너는 오늘 죽어라, 나는 내일 죽겠다!> 하는 식으로.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4> , p9/290


 저자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통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삶 속에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먼저 자유를 포기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잊어버리는 삶을 강요받는다. 수용소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을 살아야 하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극한에 내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삶을 강요받는 것은 죄수들 뿐이 아니라 수용소의 간수를 비롯한 구성원 전체라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현재'의 삶을 잘 그려낸 것이 바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고 생각된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에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43/196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 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젠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슈호프가 자유를 그리워한 것은 오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단 한 가지 희망에서였다. 그런데,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174/196


 그렇지만, 이와 함께 반복되는 '현재'는 우리를 알게 모르게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하루에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는 <수용소 군도>를 통해 발견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마치 바로 물이 빠지듯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콩나물 싹이 움트듯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용이 독자들이 <수용소 군도>에서의 10년에서 깊이 느낄 수 잇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집단 단식 투쟁은 혼자 하는 것보다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가장 강한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맞춰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단식 투쟁은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결행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의가 없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2> , p207/403


 "하루 중에 제일 추울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야." 부이노프스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밤새껏 내려간 기온이 마지막 고비에 이를 때거든."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p38/196 


 이런 점에서 단기(短期) <이반 데니ㅅ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장기(長期) <수용소 군도>는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온전하게 수용소의 삶을 보여주는 두 작품은 2개의 직선이 교차해서 하나의 점(點)이 맺히듯, 독자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비로소 작가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2개의 직선이 교차해야 점 하나가 생기듯이, 어떤 사건이라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개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p143)... <선을 그을 때, 직선과 곡선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직선을 긋기 위해서는 기구가 필요하지만, 곡선은 술 취한 사람이 한 발로도 그을 수 있지. 인생의 선도 이것과 같아.>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소용소군도 3> , p287/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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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8-02 16:4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비교해서 보여주는 글 너무 좋아요. 이반데니소비치는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요. 수용소군도 양이 너무 엄청나서 눈길만 주고 있다는.... 지금은 이것말고도 읽을 책이 쌓여 있는지라, 올 겨울쯤에 한번 도전해볼까 싶네요.

겨울호랑이 2021-08-02 16:47   좋아요 6 | URL
저도 책을 덮고 나면 대부분의 내용을 반납하는 편이라... 가끔은 제가 영화 ‘메멘토‘ 주인공의 증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보곤 합니다 ㅜㅜ. 읽은 책의 내용은 잊어버리고, 읽을 책들은 끝도 없고... 저야말로 ‘현재‘를 사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만, 어쩔 수 없겠지요.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독서괭 2021-08-02 16: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흑흑 <수용소 군도>랑 <이반~> 다 집에 있거든요. <수용소 군도>는 한동안 알라딘서재에서 구매열풍(?)이 불어서 느닷없이 샀는데.. 둘다 못 읽고 있습니다 ㅜㅜ
겨울호랑이님도 읽은 책 내용을 잊으신다니 위로가 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08-02 17:00   좋아요 6 | URL
저도 읽은 책은 쌓여있는 책 중 일부에 불과해서 독서괭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한 권 읽고 열 권을 사는 형편이다보니... ㅠㅠ 한 권 읽고 한 권을 사겠다고 다집을 해봅니다만 지키기 쉽지 않네요. 이젠 그러려니 하고 삽니다.ㅋ 독서괭님 좋은 하루 되세요! ^^:)

미미 2021-08-02 17: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수용소 군도>읽기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북플의 하이클라스인 겨울호랑이님과 같은 책 읽었다는 점도 기쁘고요!!😊

겨울호랑이 2021-08-02 17:32   좋아요 4 | URL
^^:) 저야말로 미미님 덕분에 <수용소 군도>를 읽게 되었어요. 좋은 책을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등급이 ‘안녕(hi)‘ 등급으로 자주 글쓰는 클래스에 속하는 줄도 미미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

mini74 2021-08-02 17: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반 데니소비치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ㅠㅠ 불합리한 상황과 대우에도 묵묵히 노동하며 스프를 휘저으며 건더기를 찾던 인물들ㅠㅠ 그래서 수용소 군도도 읽게됐는데 ㅠㅠ 혈압이 올라서 ㅠㅠ

겨울호랑이 2021-08-02 17:27   좋아요 5 | URL
저는 못 읽었습니다만, 「피에 젖은 땅」을 읽으신 mini님을 비롯한 다른 이웃분들은 더 깊이 내용에 몰입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mini님의 분노도 그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1-08-02 18: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로 이 두 권의 책을 꼭 읽고 싶습니다. 작가의 글로써 이 모든것을 이해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글로써 어떤 삶들을 알 수는 있을것 같아요.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8-02 19:12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께서 직접 읽으시면 부족한 제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도움이 되어 저도 좋네요. 페넬로페님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붕붕툐툐 2021-08-02 2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반~>은 ‘하루‘라 부담 없이 읽었는데, 수용소군도는 아직 엄두가 안나네요~ 비교해 주신 거 참 좋네요~~ 읽어야 하는 리스트가 늘어났습니디~👍

겨울호랑이 2021-08-03 04:43   좋아요 0 | URL
<수용소군도>가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이반~>을 읽으신 붕붕툐툐님이라면 좋은 독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보복 때문이다. 서희가 얼굴에 침을 뱉었을 적에 귀녀는 보복의 칼을 갈았다. 이제는 그 칼을 내려침에 주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죽일 것을 주저했던 귀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귀녀는 만석꾼 살림보다, 아니 백만석의 살림보다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이 더 강하였다. _ 박경리, <토지 2>, p556/688


 개인적으로  <토지 2>에서 가장 긴박감이 넘치는 부분은 최치수의 죽음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도망간 구천이를 잡기 위해 신식총도 구입하고, 수동이와 강포수를 데리고 근처로 인간사냥을 나가기도 한 그였으나, 정작 덫에 걸린 것이 그 자신이었다는 것은 비극이자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치수를 직접 목졸라 죽인 사람은 평산이었으나, 평산을 조종한 이는 귀녀요, 귀녀에게 보복감을 심어주어 결행하게 만든 이는 서희였다는 인과관계를 따지고 보면, 서희가 치수의 죽음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봐야할 것인가. 그런 면이 없진 않겠지만, 아버지 죽음의 계기를 어린 서희에게 묻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게도 느껴진다. 서희의 거친 행동이 방아쇠를 당기긴 했을 지언정 자신을 '욕망'이라는 화약창고로 만든 것은 귀녀 자신일테니까.


 비단과 누더기를 구별하는 따위의 자존심, 야수 같은 강포수에의 허신과 인간쓰레기 같은 칠성이와의 동침을 거치면서 마지막까지 최치수에게 여자 대접을 받고자 하는 희망은 애정일까 허영일까 또는 집념일까. 악업(惡業)을 쌓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동자불 앞에서 도움의 기도를 올리던 귀녀, 모든 것은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귀함도 염원도 사랑도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2>, p556/688


 만석꾼 집의 대를 잇는 아이를 낳겠다는 귀녀의 욕심은 제프리 버튼 러셀 (Jeffrey Burton Russell)의 <메피스토펠레스 mephistopheles>에서 소개된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888 ~ 1948)의 작품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치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규정할 수 없는 귀녀의 욕망의 끝은 시작부터 이미 어둠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는지.


 악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범주만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특성이 무와 부동성인 실재하는 것이다. 악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근본적으로 이해 불가능하다. 악의 중심은 공허이다. 이러한 무는 우리들의 정신에 침투해서 지옥에 동참할 것을 유혹하면서 덩굴 같은 손을 뻗치는 무한한 차가움이다. 인간의 악이 비밀스런 원천으로서 무는 신에 대한 증오와 죽음에 대한 사랑이 스며나오는 의식의 가장 깊은 부분에 숨어 있다... 무에 대한 욕망은 우리 안 깊은 곳에 심어져 있고, 그러한 영향 하에서, 우리는 시선을 빛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돌려서 어둠만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자체를 위해 어둠을 택할 수 있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메피스토펠레스>, p447


 그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귀녀는 멈추지 못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형식을 만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처음에는 치수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를 감정이 자신의 욕망과 결합하면서 작가는 '악마'의 모습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악마를 보았다.


 한 개인은 살면서 수없이 악을 지각하게 된다. 그 각각의 경험은 이전에 축적된 지각들(Pn)에 의해 부분적으로 형성된 새로운 P를 하나하나 추가하면서 사건과 구조가 이전과 같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생겨난다. 각각의 새로운 지각은 이미 가지고 있는 축적된 지각을 수정하거나 강화한다. 정신 속에 일반적인 악의 형식(F)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 개인의 지각은 여러 해 동안 결합되어 하나의 집합이나 저장소가 된다. Pn -> F. 사람은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심리학적인 지식이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환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들 - 신화, 시, 그림, 도덕 신학, 사회적인 용어 등 - 로 형식화한다. 악에 대한 지각은 종종 악에 어떤 패턴이나 통일설이 있다는 생각을 초래하기도 하면서, 악의 인격화라는 생각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p55


 "귀녀를 강포수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하는 날에는 만사는 휴다. 야망은 모래무덤같이 허물어지고 말 것이며 배속의 아이는 쓸모없는 핏덩이, 숲 속에나 내다 버릴 물건밖에는 되지 못한다. 수동이를 나귀 등에 싣고 돌아오던 날, 그 황망한 중에 돌아왔다는 인사를 올린 후 아직 한 번도 최치수 모자는 상면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강포수에게 귀녀를 주겠다는 말을 했을 리 없고 그렇다면 때는 늦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귀녀의 이빨 사이에서 무서운 소리가 새나왔다. 악마의 얼굴이요 악마의 미소요 악마의 희열, 복수의 화신. _ 박경리, <토지 2>, p432/540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향한 귀녀의 의식(儀式) 속에서 경건함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일시적인 속된 행동을 통해 남은 여생이라는 영원의 평안함을 위한 귀녀의 행동. 속(俗)에서 성(聖)을 향한 경건함이 '목욕재계'라는 의식으로 나타났다면, 그러한 성(聖)의 속성이 선(善)일수도 때로는 악(惡)일수도 있겠다...


 악마는 신들만큼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상당히 드러낸다. 사실, 악마를 경험해서 생긴 감정은 선한 신을 경험하고 얻어진 감정만큼이나 엄청난 것이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p37


 지난 주에 읽은 부분 중에서 귀녀의 욕망만큼이나 시선이 머물렀던 부분은 김평산의 부인 함안댁의 죽음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함안댁의 죽음 직후 보인 사람들의 행동에 의식이 멈춘다. 이웃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 빠르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 속에서 자신 이외의 죽음에는 무감각한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과 함께 민간신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함안댁이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 어느새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바우랑 붙들이, 마을의 젊은 치들도 덤비듯이 쫓아왔다. 모두 엉겨붙어 나뭇가지를 꺾어 간수하기에 바쁘다. 순식간에 나무는 한 개의 기둥이 되고 말았다...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마는 그 중에서도 하늘병(간질)에는 떨어지게 듣는다 카더마."...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藥物)이 된다는 믿음에서 모두들 덤벼들어 꺾은 것인데 죽은 나무여서 과연 정기가 통하겠느냐는 아낙의 의심이다. 병에 효험이 있기로는 목을 매단 끈이나 새끼줄이 제일이라는 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었다._ 박경리, <토지 2>, p652/688


 목매달아 죽은 이가 사용한 나무가 간질에 효험이 있다는 민간신앙(民間信仰). 이를 우리는 일제 식민시대 학자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1891 ~ 1968)의 <조선의 귀신 朝鮮の鬼神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간질과 관련한 여러 민간 치료법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치료법들이다. 


 간질에는 지진동이 있을 때 문창호지를 잘라두었다가 발생 당시 그 종이를 태워서 물에 복용하면 발병하지 않는다.(p384)... 간질에는 남자에게는 여음을, 여자에게는 남근을 잘라서 먹인다. 목매어 죽는 데 쓰인 적이 있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달여 마신다. 매장된 시체를 파내서 먹는다. (사람이 알게 되면 죽는다.) 인육을 먹는다. 인분을 건조시켜 달여서 마신다. 인골을 분말하여 음용한다. 사람의 정액을 마신다. 열흘에 한 마리씩 잡은 모기 세 마리를 말린 후 분말하여 복용한다. 어린아이가 이 병에 걸렸을 때는 닭의 볏에서 나오는 피를 마시게 한다. _  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귀신 > , p391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위와 같은 방법이 만약 효능이 있었다면 위약(僞藥, placebo)효과 정도나 있었을까. 같은 상황에서 민간요법의 치료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것이 과학(科學)덕분이라는 생각까지는 쉽게 미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는 과학이 우리에게 던져준 다른 과제 때문일 것이다. 과학, 자본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 인간소외 문제에 대한 답을 이제는 동양사상에서 찾고 있는 현실 때문이 아닐까.. 앞서 조르주 베르나노는 무(無)에서 허무, 악을 발견했지만, 노자(老子, BC 604 ? ~ ?) 는 무에서 유(有)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찹은 것처럼 분명 '달의 뒷면'을 보여주는 통찰이 동양사상에는 있으니까 말이다.


 고묘 顧墓는 불안한 상태에 놓인 유해의 영혼이 직접 그 자손에게 재액을 준다는 신앙이다. 바꾸어 발하면 각종의 재액과 질병의 원인이 좋지 못한 곳에 매장한 유해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 불량상태를 개량함으로써 그 병원을 근절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받아야할 것을 받지 못하여 생기는 재액/질병이다. 이 양자에게 공통되는 받아야 할 것은 생기이다. 만물은 생기 生氣에서 생겨나고 이 생기를 받는다는 것은 번영을 뜻하며, 이것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망한다는 의미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된 생기신앙으로서, 고묘법은 이 생기신앙와 귀신신앙이 연결되어 나타난 예이다. _  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귀신> , p412


 우리는 치료를 위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있어 조선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생각하게 되지만, 루신(魯迅, 1881 ~ 1936)의 소설 <광인일기 狂人日記> <약  藥>에서 보듯 식인 풍속이 우리 문화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과 굶어죽을 위기에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어느 문화권에서도 전승되는 소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를 반드시 미신(迷信)이나 후진 문화로 치부할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그렇다고 비극의 깊이가 얉아지는 것은 아니겠고, 이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은 분명하다) 다만, 오늘날의 의학(醫學)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닌만큼 보다 나아지려는 문명(文明)화 과정 중 일부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할 수 없네. 4 천 년 동안 수시로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도 여러 해 동안 그 속에서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명백히 알았다. 큰형님이 바로 집안일을 관리하고 있을 때에 마침 누이동생이 죽었으니, 큰형님이 밥이나 반찬 속에 섞어 우리에게 몰래 먹였음에 틀림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고기 몇 점을 먹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내 자신의 차례다... _ 루쉰, <루쉰 소설 전집> <광인일기>, p48/1006


 "이봐! 돈 내고 물건 받아요!"

 온몸이 시커먼 사람이 라오수안 앞에 불쑥 나타났다. 두 자루 칼날 같은 눈초리에 라오수안은 질겁을 하여 몸이 반으로 오그라드는 듯했다. 그 사람은 커다란 한쪽 손은 그를 향해 벌리고, 한쪽 손에는 시뻘건 만두를 움켜쥐고 있었다. 시뻘건 것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누구의 병을 고치려는 거요? _ 루쉰, <루쉰 소설 전집> <약>, p68/1006


 요약하자면, 지난 주에 읽은 <토지>독서 내용은 악(惡)과 무지(無知)로 정리될 듯하다. 우리가 자각하는 악(惡)과 마찬가지로 무지(無知) 역시 절대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인지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실체 속에서 '절대선' 또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보다 선함'과 '보다 참됨'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삶의 과정이고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를 <토지 2>의 치수와 함안댁의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악마란 호전적인 힘이 인간적으로 또는 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고, 이러한 호전적인 힘이 우리 의식의 밖에서 지각된 것이다. 이러한 힘 -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힘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듯하다 - 은 외경, 불안, 두려움, 공포와 같은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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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구월 동학군은 남접과 북접이 호응 합세, 항일구국의 대전선을 결성하여 또다시 일어섰으나 십이월에 들어 연이은 패전으로 동학군이 완전 붕괴되고 농민전쟁이자 민족전쟁인 갑오 동학란의 비극의 막이 내려졌을 때 살아남았던 환이는 추적의 눈을 피하여 방랑하다가 백부인 우관선사를 찾지 아니하고 최참판댁 문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윤씨는 김개주가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는 말을 문의원으로부터 들었을 때, 무쇠 같은 이 여인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_박경리, <토지 2>, p100/540


 <토지 2>에는 여러 인물들의 죽음이 나온다. 최치수, 윤씨 부인 등등 대하소설의 초반부에 서희를 둘러싼 여러 어른들이 빠르게 퇴장하면서 서희가 독립적인 인물로 성장했겠지만, 개인적으로 인물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 중 서희의 할머니 윤씨 부인은 여러 면에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집안인 윤씨 가문은 서학(西學) 천주교로 인해 풍비박산나고, 자신은 동학(東學) 군 장수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해 죄의식 속에 살아야 했다는 점에서 윤씨 부인은 근대시기 조선시대의 비극을 한몸에 진 인물이라 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윤지충(尹持忠, 1759 ~ 1791)의 본관이 해남(海南)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윤씨 부인의 본관이 해남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잠시 해보지만, 별 근거는 없다. 해남 윤씨 가문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제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살펴보도록 하고([토지독서챌린지]는 장기 프로젝트이니만큼 조기에 소재를 고갈시켜서는 안된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윤씨 부인에게 개인적인 불행을 안겨 준 김개주라는 인물에 집중해 보자.


[사진] 김개남(출처 : 위키백과)


 사실, 김개주는 김개남(金開南, 1853 ~ 1894)이라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다. 전봉준(全琫準, 1855 ~ 1895), 손화중(孫華仲, 1861~1895)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당시 3대 지도자로 꼽힐만큼 뛰어난 인물인 김개남은 매우 과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남원(南原)을 주로 거점으로 한 그의 행동은 <토지>에서도 냉혹한 농민군 장수의 모습으로 잘 재현되었다. 과감한 농민군 장수였던 김개주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역사 속 인물 김개남은 이상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

 

김개남은 김학진의 화약 제의가 미지근하다고 여겨 거절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왕 노릇을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임금처럼 받들게 하면서 왕의 제복을 입고 왕에 걸맞은 호칭을 썼다 한다. 김개남은 남원부사를 죽여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p241)...  전라도 김개남포에서 지휘하는 집강소의 경우 이런 폭력적 방법이 자주 동원되었다. 그들은 부호들에게 동의나 협조를 구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군수품을 모아들였다. 남원은 양반 부호의 수난이 가장 심했던 곳으로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죽일 정도였다. 김개남은 남원부사 이용헌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그를 죽여버렸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p283


 뒤늦게 삼례로 나온 김개남은 전봉준의 후원이 되어 뒤따라 은진으로 올라왔고 청주병영 공격에도 나섰다. 하지만 김개남의 독자적이고 과격한 태도는 연합전선 형성에 차질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p101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 안으로 들어가서 국왕 고종과 대면하고, 다음과 같이 구두로 전했다... 국왕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은 조선병 일소와 무장해제를 완료하고, 궁전 주위에 초병을 세웠다. 이렇게 오전 9시가 지났을 즈음 국왕과 왕비는 확보되었고, 경복궁은 일본군이 완전히 제압했다. 통상적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라 부르는 전쟁은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_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1>, p218


 갑작스럽게 모인 농민군에게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지도자가 요구되었을 것이고, 김개남은 이러한 농민군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왕을 참칭(僭稱)하는 오만한 모습은 다소나마 동학농민군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중도/지배층에게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실제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에는 동학농민군에는 농민뿐 아니라 중간 계층의 지주,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분노한 유생, 관리들도 일부 합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개남의 과격하고 오만한 행동이 요즘말로 중도층의 이탈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을까. 보다 폭넓게 외연 확장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그는 분명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동학은 이 나라의 마지막 힘이었소." "오합지졸이었지요." "식자들은 그 이유를 왜 깨닫지 못했을꼬?" "살생과 약탈이었지요. 왜적에게 대항하겠다는 기특한 생각 말고는."_박경리, <토지 2>, p163/540


 다른 한 편으로, 과감함을 넘어서 오만함까지 느끼게 하는 김개남의 행동은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의 동왕 양슈칭(東王 楊秀淸, 1821~1856)을, 젊은 나이에 죽어 민가에 영웅이 된 익왕 스다카이(翼王 石達開, 1831 ~ 1863)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김개남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 혁명 사이에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까운 시일에 조너선 스펜스 (Jonathan D. Spence)의 <신의 아들 洪秀全과 太平天國>로 정리할 예정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넘기겠지만, 두 혁명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간략하게 짚고만 넘기자. coming soon. 


 봉건 모순에는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불균형한 토지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신분 차별과 일부 특권층의 토지 소유 및 농업생산의 독점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이런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제도를 타파하려는 민중 봉기는 역사의 추진 동력이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이를 개혁하지 않고는 평등과 인권을 추구하는 근대를 지향할 수 없었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 p7


 김개남은 이후 동학농민혁명 말기에 친구의 배반으로 붙잡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당하게 되면서 삶을 마감한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새야 새야'의 녹두장군이 전봉준이 아닌 김개주라는 의견도 있지만, 진위 여부는 알기 힘들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가 사랑받았던 농민군 지도자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때문에, <토지>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흘렸던 윤씨 부인의 눈물은 반드시 한 남자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윤씨 부인만의 눈물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개남은 이 마을에 사는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다. 한 사람은 옛부하, 한 사람은 옛친구의 밀고로 12월 2일 한날에 잡혔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었다.(p316)... 개남이 잡혀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호남에서는 김을 진으로 발음한다. 이는 김제를 진개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동우리가 웬 말이냐?" 또는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遺屍)했노"라는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지금 그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효수된 사진만이 전해진다._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2>, p317


  <토지>에서 김개남이라는 인물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윤씨 부인, 아들 환이를 통해 회상되거나 언급되는 지난 시대의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핏줄과 정신은 주인공 서희를 보이지 않은 곳에서 도와주는 힘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투쟁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김개남, 아니 김개주를 살펴보는 것은 <토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물소개]에 담긴 김개주의 설명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김개주 : 중인출신이며 우관스님의 동생. 우관선사가 있는 연곡사에 휴양차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는다. 동학혁명이 한창일 무렵 무리를 이끌고 최참판가에 와서 윤씨부인에게 은밀히 환이의 성장소식을 전하며, 환이에게 생모의 존재를 알려주고 떠난다. 후에 혁명의 허무감과 상민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아들인 김환의 회상을 통해 드러난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 전주 감영에서 효수당한다._박경리, <토지 2>, p531/540  [인물소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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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7-25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김개주 실존 인물이 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깊이 있게 엮어 읽으시다니, 같은 토지 다른 느낌이네요~ㅋ
김개남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우리나라 동학농민혁명은 여러모로 더 알려지고 연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7-25 16:44   좋아요 1 | URL
저도 잘 몰랐다가 인물의 이름이 비슷해 찾아보니, 다행히 실존인물에서 빌려온 캐릭터였네요. 붕븡툐툐 말씀처럼 동학혁명의 의의를 저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제게 여러모로 의미있는 챌린지가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생각키에 민주란 뭐 대단한 이상이 아니라,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정당성 (legitimacy)이 보다 더 많은 다수의 합의(consent)를 지향하는 모든 정치형태를 추상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민주(民主)보다는 민본(民本)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직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_ 도올 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1> , P43


서학이 조선민중의 샤마니즘적 파토스와 결합되면  매우 폭발적인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사상의 공동을 전염병처럼 메꾸어 나갔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성리학과 서학이 제시하는 내재와 초월의 모든 패러다임을 만족시키면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는 운동이 19세기 중엽에 조선에 잉태하게 된다. 그 이론적 표현이 기학이었고, 그 실천적 표현이 동학이었다. 동학에 이르러 조선역사에 내재해온 플레타르키아의 열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게 된다. 그것이 "개벽" 이었다._ 도올 김용옥, <도올심득 동경대전 1> , P140

 최근 출판된 「동경대전1」의 구판. 2004년에 초판이 출판된 후 17년이 지난 후에서야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을 읽기 전에 마침 <토지>를 읽으며 가볍게 동학농민혁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꺼내든 책이다.


  비록「동경대전 1, 2」편에 비해 얇은 책이고, 오래전 출판된 책이지만 이 책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간의 저자의 학문 여정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난 시간 동안 혜강 최한기의 <기학 氣學>, 「맹자 孟子」, 「노자 老子」, 수운의 「동경대전 東經大全」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자칫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 저작들이 최종적으로 <동경대전>으로 향하는 과정이었음을 지난 2004년에 출판된 책에서 발견하게 된다.


 <노자>에서 말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이,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민중. 이러한 민중의 의식 구조를 형성하는 기학(氣學)과 실천으로서의 동학(東學)이 하나가 되어 비로소 21세기 혁명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를 이룬다는 저자의 철학. 이것이 저자가 평생 강조한 정치철학으로서의 몸철학의 얼개가 아닐까. 이 얼개를 완성하고 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까지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2004년에 출간된 얇은 책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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