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이 된 사람은 백성을 기초로 삼고, 백성은 재물을 근본으로 삼으니 재물이 고갈되면 아래에서는 배반을 하며 아래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위는 망합니다. 이리하여서 밝은 제왕은 기초와 근본을 사랑하고 아끼며 감히 끝으로 몰아가지 않는 것은 백성을 시키는 것이 마치 큰 제사처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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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때는 상감과 더불어 조정과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고, 이번에는 상감과 조정은 왜놈들 편에 서서 의병을 역적시하며 해산령을 내리거나 매도하는 가운데 백성들이 자발로 나서서 싸운 것이 크게 다른 점입니다._ 조정래, <아리랑 2> 中


 조정래(趙廷來, 1943 ~ )의 <아리랑>에서는 일본편에 서서 의병을 탄압하는 양반과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이 양반 출신 의병장 송수익의 입을 빌려 나온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시 임금 선조(宣祖, 1552 ~ 1608)는 빠른 속도로 의주까지 도망간 후 여차하면 명나라로 들어갈 생각을 했으니, 당시 상감이 백성과 함께 했다는 송수익의 말은 무리가 있다. 다만, 광해군(光海君, 1575 ~ 1623)이 분조(分朝)해서 백성을 위무했다는 점에서 조정과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말은 무리가 없겠지만. 아마도 송수익의 마음은 힘이 없더라도 최소 포로로 끌려갔다 도망간 이들을 변호하는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 1645)의 역할도 하지 않은 당시 조정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17일 오후 아문통사 한보룡(韓甫龍)이 관소에 와서 말하기를, "봄이 온 후로 도망간 사람이 무려 천여명이나 되어 잡아보내라는 뜻을 전후로 거듭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이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시행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보낸 숫자를 보니 매우 엉성합니다.. 그 도망간 사람은 또한 의당 알려서 잡아보내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대답하기를, "조선이 받들어 행함에 있어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목숨을 걸고 도망하여 숨은 사람을 잡기란 쉽지 않으며 만일 잡는다 하더라도 하나하나 들여보내니 그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일의 형편이 그래서입니다. 신사년 인조 19년"_ 소현세자, <심양장계 瀋陽狀啓>, p579


 그렇지만, 송수익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빠르게 힘의 이동을 깨닫고, 친일파로 변신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세와 부를 지킬 수 있었다. 반면, 가진 것 없고 이 땅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는 백성들은 의병(義兵)이라는 이름으로 이들과 맞섰다. 


 

 조선관리들은 궁장토며 역토 둔토 같은 것들이 전부가 국유가 아니고 태반이 사유지라는 내력을 환히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은 사유지들까지 다 몰아 왜놈들에게 넘겨 주는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_ 조정래, <아리랑 3> 中


 그들은 용맹스러웠다. 보잘 것없는 무기로 신식무기를 갖춘 적들과 맞서 싸웠다. 모두가 혼신의 힘으로 다해 싸우다가 죽어갔다. 누가 강제로 끌어낸 것도 아니었고, 싸움에 이긴다고 무슨 보장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다가 죽어갔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사람대접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하층민이었다. 대대로 빼앗기고 무시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내걸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나라의 참된 주인은 왜적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_ 조정래, <아리랑 2> 中


 이들은 무엇을 지키려고 했을까. 자신들을 업신여기고 수탈했던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보다 더 컸을 이들이, 선장마저 떠난 배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마을마다 전해지는 소년장수, 총각장수 전설 속에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부당하게 탄압받던 백성의 아픔이 담겨있는데, 이러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이 나라뿐이었을까.


 백성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이 글배우기를 싫어했거나 아둔을 타고나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글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다. 상것들은 절대 글을 익힐 수 없는 것이 수백 년에 걸친 규범이었다. 그건 양반층이 자행한 횡포고 억압이었다. 양반층은 권력을 독점한 상태에서 일체의 세금만 안 낸 것이 아니었다. 그 권세를 세세만년 누리기 위해서 백성들을 무식한 바보로 만들어 마음대로 부려왔던 것이다... 결국 양반층은 송수익의 말대로 위로는 왕족을 업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짓밟아가며 권세와 부의 감미만 빠는 그릇된 부류일지도 몰랐다. 사실 그들이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면 백성들을 모두 강압적으로 우민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고, 반란을 두려워해 사람을 그렇게도 잔인하게 병신을 만들 까닭도 없는 것이었다._ 조정래, <아리랑 4> 中


  만약,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나라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함께 한 마을 공동체였을까. 그렇다면, 마을 공동체가 갖고 있는 억압구조에 부당함을 느낀 이들은 없었을까. 같은 사안에 대해 여자에게 더 엄격한 사회규율에 대한 불만이 있었음에도 많은 이들이 일제 지배에 저항한 이유는 무엇일까.


 몸을 섞었다고 소문을 내버리면 그건 마지막이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남자가 발설한 이상 모두 남자의 말을 믿어버릴 것이었다. 샛서방질한 년은 남편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건 여자가 저지른 죄 중에 대죄라서 동네사람들 모두가 나서서 다스렸다. 그 벌은 끔찍스러웠다. 새끼줄에 목이 끌려 동네돌림을 당하며 돌질에 얻어맞거나 물벼락을 뒤집어써야 했다. 또는, 속곳을 벗긴 채 홑치마만 걸치고 배꼽 높이로 팽팽하게 맨 새끼줄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타야 했다. 그 둘 중에 어느 것도 견뎌낼 수 있는 벌이 아니었다. 그 벌을 받지 않으려면 동네사람들이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기 전에 목을 매는 수밖에 없었다._ 조정래, <아리랑 4> 中


 <아리랑 4>까지 읽으면서 식민지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선의 관리들이 앞장서 친일을 하게 되는 주된 이유가 과연 개인의 영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성리학적 세계관을 대신한 근대 사상의 도입 때문이었을까.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은 과연 자신들을 탄압한 국가였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또는,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오늘날 관점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거슬리는 반동(反動)은 아니었을까, 등등... 어쩌면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 안에서 이에 대한 답(答)을 구한다는 자체가 매트릭스(Matrix)안에 스스로를 던져 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리랑>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뼈대 위에  살을 잘 붙였기 때문이 아닐까...


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때 실기를 했으면 그 다음 강제 양위를 당했을 때 상감은 만백성을 향해서 외쳤어야 하네.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왜적들과 싸우자 하고 말이네. 그러고 군대를 이끌고 앞장섰어야 했네. 그러면 왜놈들이 곧 죽이고 말았을 거라고? 죽이면 죽어야지. 그게 나라를 뺏긴 상감이 책무를 다하는 길이네. 상감이 해산령을 내려도 의병으로 나서서 수만 명씩 죽어가는 백성들인데 만약 상감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죽었다면 백성들은 어찌했겠나. 이 땅에 합병이란 없었네._ 조정래, <아리랑 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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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31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본 아리랑을 요즘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다시 되새기는거 같아요. 추억돋다라고 말할까요? ㅎㅎ

조선의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에 통달한 사람들이었고, 따라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발전과 도덕성을 같이 가는것으로 생각했던 것을 그들의 글을 보면 발견하게 되더라구요. 서구나 일본이 발전한 것은 그들의 도덕성이 높기 때문이다같은....
하여튼 이 시기의 여러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제가 그 시대에 살았어도 딱 뭐라고 분명하기 얘기하기 힘들었겠구나 싶어요.

겨울호랑이 2021-03-31 07:4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성리학이 학자들의 학문 뿐 아니라, 조선의 헌법이라 할 <경국대전>의 주요 사상이 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조선시대 관리들이 사회 발전과 도덕성을 ‘이(理)‘와 ‘기(氣)‘ 관점에서 파악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기존에 중국을 ‘이‘로 생각했는데, 청나라가 무너지고 서구와 일본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이들을 ‘기‘로 받아들여야할 것인지, 새로운 ‘이‘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했을 듯 하구요... 아직은 공부가 미치지 못해 짐작으로만 넘겨짚어 봅니다. <아리랑>에 묘사된 당대의 상세한 묘사가 부족한 제 이해에 도움이 될 지 기대가 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캄브리아기는 진화의 역사에서 다양한 해양무척추동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다. 그중 일부는 눈과 강력한 턱 덕분에 최초의 적극적인 포식자가 되었다. 또한 삼엽충과 같은 다른 캄브리아기 진화동물군도 번성했다가 오르도비스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p70)... 디토모피게(Ditomopyge)를 포함한 마지막 삼엽충은 오래도록 쇠퇴기를 겪다가 페름기 말에 멸종했다._ 더글라스 파머 외, <선사시대>, p181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4번 째 주제는 삼엽충(三葉蟲, trilobite)이다. 삼엽충들이 살았던 시대는 약 3억 년이지만 이전 시대인 원생대(Proterozoic Eon)와는 달리 생명체들의 변화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삼엽충이 살았던 시대는 동물의 다양성이 극적으로 증가한 '캄브리아기'(Cambrian Period, 약 5억 4,200만 년 전~약 4억 8,830만 년 전), 해양동물군의 속성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오르도비스기'(Ordovician Period, 약 4억 8,830만 년 전~약 4억 4,370만 년 전), 해양무척추 동물이 자리를 잡고 오르도비스기 말의 멸망으로부터 벗어난 '실루리아기'(Silurian period, 약4억 4,370만 년 전~약 4억 1,600만 년 전), '어류의 시대'이자 세계 최초로 숲이 형성된 '데본기'(Devonian Period, 약 3억 9,500만 년 전~약 3억 4,500만 년 전), 거대한 석탄 퇴적지를 만들었던 '석탄기'(carboniferous period, 약 3억 5,920만 년 전~약 2억 9,900만 년 전), 마지막 5억년 동안 최소 90%이상의 생물이 사라진 대멸종의 시대인 '페름기'(Permian period, 약 2억 8,600만 년 전 ~ 약  2억 4,800만 년 전)에 이른다. 고생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삼엽충이 존재했기에, 많은 이들이 고생대를 '삼엽충의 시대'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삼엽충에 관한 사소한 진리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전체와 연관지을 수 있다. 삼엽충에 관한 사소한 진리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전체와 연관지을 수 있다. 에드워드 윌슨 Edward Wilson은 최근에 문화와 과학의 상호의존성을 주장하면서 지식의 통합사계를 제시했다. 그는 그것을 '통섭(consilience)'이라고 했다. 여기에 상술한 삼엽충 이야기는 더 작은 형태의 통섭을 보여준다. 종목록조차도 지자기, 판구조론과 결합되면 사라진 지구의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51 


 고생대의 랜드마크인 이 생물에 대해 <삼엽충 Trilobite!: Eyewitness To Evolution>의 저자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는 화석을 기반으로 삼엽충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소개한다. 오랜 기간 후손을 이어온 최초의 절지동물은 '눈'을 발달시키면서 캄브리아기에 등장한 후 빠르게 오르도비스기를 자신들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이 시기 다른 환경의 서식지에서 각각 살아왔던 삼엽충의 역사는 '눈(目)'의 역사이며, 이후 생명체 진화(evolution)의 방향을 '시각'으로 결정짓게 되었음을 <삼엽충>은 소개한다.. 


 삼엽충의 눈은 방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에서 그들은 동물계에서 독특한 존재다.(p115)... 방주석 결정을 살펴보면 삼엽충 시각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삼엽충은 맑은 방해석 결정을 눈의 수정체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들은 특이했다. 다른 절지동물에게서는 대개 몸의 나머지 부위를 구성하는 물질과 비슷한 큐티클로 이루어진 수정체, 곧 '부드러운' 눈이 발달했다. 삼엽충은 이런 한계 안에서 대단히 다양한 눈을 발전시켰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116


 포식자, 뻘벌레, 여과섭식자는 한 군집을 이루어 함께 생활했다. 이제 물에 잠긴 대륙이라는 중심부에서 그 주변의 심해에 이르기까지, 이런 동물들이 일련의 서로 다른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수심이 점점 깊어지면서 서식지가 달라지고, 각 서식지를 차지한 삼엽충들은 사냥하고 청소하고 침전물을 파고 뒤졌으며, 개흙이 부드러운 곳에서는 휘저어서 현탄액을 만들었다. 산소농도가 낮은 더 깊은 곳은 트리아르트루스 같은 전문가들이 차지했다. 그들은 풍요와 질식사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서식지에서 다른 삼엽충들보다 유리했다. 해저 바로 위에서는 작은 아그노스티드가 움직이는 렌즈콩처럼 헤엄을 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눈은 쓸모가 없어졌다. 그곳은 눈먼 자들의 세상이었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49


 오르도비스기 절정에 달한 삼엽충의 번성은 오르도비스-실루리아기 사이에 닥친 빙하기로 인해 큰 타격을 입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빙하기가 삼엽충들을 멸종에 이르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오르도비스기와 같이 생태계의 주도권을 두 번 다시 잡지 못하고 결국 페름기 말 디토모피게(Ditomopyge)를 비롯한 마지막 삼엽충들은 지구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르도스기 말에 생명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대멸종이 일어났다. 당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빙하가 오르도비스기 말의 기온을 급격히 떨어뜨렸고, 아마 그것이 동물군 위기의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빙하기와 관련된 퇴적물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주위에는 삼엽충들도 있다.(p280)...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 오르도비스기와 실루리아기에 비해 데본기 초와 실루리아기의 삼엽충들은 훨씬 구분하기가 어렵다. 데본기는 파콥스와 그 친척들의 전성기였다. 잠시나마 집합복안이 지배한 시기였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81


 페름기 말이 되자 20여 속에 불과한 그리 많지 않은 삼엽충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흔한 화석이 될 정도로 번성한 것들도 종종 있다. 가장 마지막 삼엽충은 페름기 말의 또 한 차례의 대멸종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사라진 듯하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20


 <삼엽충>에서는 크게 두 번의 대멸종이 나온다. 오르도비스기의 대멸종과 페름기의 대멸종이 바로 그것이다.  삼엽충의 크기는 불과 3~10cm 정도에 불과하지만 (물론 고생물학자들이 생태계에 일어난 큰 변화를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했겠지만), 이 작은 삼엽충들이 3억년 동안 지구에 살면서 고생대의 6기와 2번의 대멸종의 시기 동안 남긴 자취를 보면서 우리 인류가 남긴 불과 600만년의 발자취는 보잘것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작은 <삼엽충>의 몸에 새겨졌을 지구의 역사를 떠올리면서 '(역사의) 기억 앞에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마침 글을 마무리 하는 시간대에 들은 어느 신박한 표현에 대한 오마주를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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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3-30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선사시대] 재밌어 보여서 중고로 구했습니다! 기대되네요~

겨울호랑이 2021-03-30 16:32   좋아요 1 | URL
^^:) 말 그대로 역사 이전의 시대에 대해 잘 정리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황금모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bookholic 2021-03-30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 정가 마지막 반값세일 때 사두었다가 장식품이 되어버린 <선사시대>.. 이제 먼지를 털어낼 시간이 된 건가요..^^
즐거운 봄날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1-03-30 21:00   좋아요 1 | URL
bookholic님의 <선사시대>의 새역사가 시작되는 군요! 화창한 봄날 즐거운 독서 시간 가지세요 ^^:)
 

캄브리아기가 시작되면서 진화상에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겨우 몇 백만 년 안에 벌레류부터어류까지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 것이다. 이중 미생물의 화석이 뛰어난 보존상태를 보이고 있다.  작은 껍질생물화석들은 진화 사태의 증거물이다. 캄브리아기 전에 대부분의 동물들은 턱이나 소화관이 없었는데 이는 곧 항문이 없음을 의미한다. 씹는 활동, 그리고 포식의 진화를 통해 세계 곳곳의 생태계를 빠른 속도로 변화시킨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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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빛이 필연적으로 정교한 시각을 낳았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이 행성의 생명이 취한 특정한 경로, 단세포 생물의 단순한 감광성이 정교해지고 개선됨으로써 빚어진 결과일 뿐이었다. 삼엽충의 눈은 가능한 대안들 가운데 하나의 특정한 진화가지가 선택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바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한 혁신의 산물이다. 이 문턱은 일단 건너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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