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의 저자 유현준은 책에서 '빈 공간'을 말한다. '빈 공간'을 인정한 동양(東洋)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서양(西洋). 거의 같은 시기 발전해 온 문화권들은 어떻게 다른 사상을 발전시켜 왔을까. 저자는 이에 대한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두 문화권의 기후와 농작물 재배방식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적은 강수량 지대인 서양에서는 개인주의적인 밀 재배 문화가 발전해온 반면, 많은 강수량 지대인 동양에서는 보다 공동체주의적인 벼 농사 문화가 발전해왔으며, 그 결과 사회 성격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래로 '빈 공간'에 대한 문화권의 태도가 갈리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서양의 문화는 단절적인 선(線)의 문화다. 저자는 이를 위해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 ~ )의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논지를 끌어오는데, 우리는 막스 야머(Max Jammer, 1915 ~ 2010)의 <공간 개념  Concepts of Space>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막스 야머의 논지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허공'은 '채우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 때문에, 무(無)에서 유(有)가 낳는다는 노자(老子, ? ~ ?)사상과는 달리 이들(무와 유)은 서로 대립하는 존재다. 이러한 인식에서 신(神)과 인간(人間), 인간(人間)과 자연(自然)이 선(線)으로 구획되는 공간이 나왔다는 저자 유현준의 주장에 한층 공감할 수 있다.


 레우키포스(Leucippus, BC 470 ? ~ ?)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BC 460 ~ ?)는 허공 (虛空)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실재의 원자론적 구조를 가정할 때 나오는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서 비어 있는 것은 점유되지 앟은 공간을 뜻한다. 우주는 채워진 것(원자 atom)과 빈 것(허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간은 물질에게 상보적이며 물질에 의해 둘러싸인다. 물질과 공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비어있는 것(Kenon)"이라는 용어는 분명히 점유되지 않은 공간만을 뜻한다._막스 야머, <공간개념>, p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에 따르면, 제1신은 하늘의 경계이다. 그렇다면 신은 하늘의 경계와 다른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 경계이다. 그런데 신이 하늘의 경계와 다르다면, 하늘 밖에 다른 것이 있을 것이며, 그것의 경계는 하늘의 경계일 것이다._막스 야머, <공간개념>, p76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저자는 이러한 인식 차이가 19세기 이후 일본, 중국 문화가 서양에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좁혀지고, 최근에는 공간의 이종교배가 이루어지면서 하나로 융합되는 모습을 소개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을 통해 거장들이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들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이 <공간이 만든 공간>이 교양 인문서적으로 갖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반면,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느껴지는 아쉬움도 분명 있다. 책에서는 서양에 미친 동양의 영향이 언급되지만, 동양에 미친 서양의 영향은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서양의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동양사상이 영향을 미쳤다면, 서양의 생활 양식은 '도시화'를 통해 대중들의 삶 전반을 바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 융합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듯하여 부분은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물론,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 전작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디서 살 것인가>를 통해 충분히 다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짧게나마 소개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한 편으로, 동양을 받아들인 서양 문화와 서양을 받아들인 동양 문화를 보면서 일종의 '자리바꿈'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최근 미국 대선의 정치 지형도를 생각하게 된다. 저학력 백인들과 미국 남부 농촌지역의 폭넓은 지지를 미국 공화당이 받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 ~ 1865)이 공화당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한 이러한 급격한 정치 지형의 변화처럼 동서양의 사상 교체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물론, 남로당 출신 공산주의자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하는 정권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노동자당'으로 불리는 민주당은 서민층의 지지율이 급감한지 오래다. 특히 '백인'을 자처하는 지지다들의 이탈이 심각하다. 이런 경향은 2020 대선에서도 여실히 확인됐다. 초기 대선 출구조사에서, 트럼프는 저학력 백인 유권자로부터 무려 64%(바이든은은 34%)의 표를 득표했다. 특히 복음주의 기독교인(81%)과 농촌 주민(65%)의 지지가 두터웠다. 정각 2000년에 이르러서야 보수 세력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가장 빈곤한 선거구는 오늘날 공화당 표밭으로 바뀌었다. 반면 가장 부유한 50대 선거구 중 무려 44곳이 민주당에게 표를 던졌다._<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트럼프 없는 트럼피즘의 득세, p6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으면서 들었던 두서없는 생각을 담은 페이퍼는 이것으로 정리하자. 그 전에, 데모크리토스가 언급된 김에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가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 ~ BC 270)와 데모크리토스 철학에 대해 정리한 논문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페이퍼를 마무짓는다.


 에피쿠로스에게 원자론은 그 모든 모순을 품으면서 자기의식의 자연과학으로서 철저하게 수행되었고 완성되었다. 추상적 개별성의 형식 아래서 이 자기의식은 절대적 원칙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을 그 최종 결론으로 밀고갔는데, 그 최종 결론은 바로 원자론의 해체이며,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적 반대다. 반대로 데모크리토스에게 원자는 단지 경험적인 자연 탐구 일반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원자는 순수하고 추상적인 범주, 경험의 역동적인 원리가 되지 못하고 그것의 결과인 하나의 가설로 남았을 뿐이다._ 칼 마르크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르소 자연철학의 차이>,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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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2020-12-13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공간에 관심이 많은데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12-13 17: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쿼크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20-12-14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4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1-09 2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공간이 만든 공간
읽을지 말지 망설였는데
일단 장바구니속으로 ~@@

겨울호랑이 2021-01-10 07:59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공간이 만든 공간>은 공간에 대한 동/서양 사상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 여겨지네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라요~^^:)
 

 이 책에서 연구한 모든 역사적 궤적은, 불평등구조가 얼마나 기존 정치제체 형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구래의 삼기능사회든 19세기에 개화했던 소유자사회든, 심지어 노예제사회나 식민사회라 하더라도, 일정한 유형의 불평등주의체제를 지속시켜온 것은  바로 정치권력의 조직화 양식이다.(p1067)... 정치체제의 또다른 측면, 즉 정치활동과 선거민주주의의 자금 측면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시급하다.(p1068)... 요약하자면 시민 각자에게 동일한 가치의 연간 바우처를 주자는 것으로,.. 민주적 평등 바우처의 핵심 목표는 평등주의적인 참여민주주의를 고무하려는 것이다.(p1070) _토마 피게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전작 <21세기 자본>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불평등 문제를 지적한 피게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정치를 통한 해결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저작을 통해 비로소 <21세기 자본> -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피게티의 정치경제사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독일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조합이, 경제학계에 어느날 혜성처럼 등장한 그에게 아킬레우스가 그토록 원했던, 그리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야 누릴 수 있었던 불멸의 명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점자본과 부의 불평등이라는 공통된 시대의 과제를 다룬 두 경제학자들의 서로 다른 처방전을 대조해 보는 것은 분명 독서를 즐겁게 하는 또다른 방법이라 생각한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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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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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2 1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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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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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에서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충분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인간의 마음에는 의지력 말고도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복적인 행동 패턴, 우리의 습관 말이다._웬디 우드, 「해빗」, p42

「해빗」의 저자 웬디 우드는 책에서 인간의 의식적인 의지는 한계가 있으니, 바뀌기 위해선 비의식적인 습관을 활용할 것을 강조한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저자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고 상환을 재배열하며 적절한 보상을 통해 습관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끝. 자기계발서의 다수가 그러하듯 나머지 부분은 ‘습관 예찬‘이기에 책의 핵심은 이 정도가 될 듯하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독자 각자의 실천뿐이다. 자기계발서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심한 비판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몇 가지 의문을 지우기는 힘들다.

개인적으로「해빗」의 저자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습관화 과정이다. 저자는 인위적인 인간 의지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이를 대신한 습관화에서는 ‘보상‘이라는또다른 인위적인 개입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습관화의 주체를 폐쇄적인 ‘뇌‘로 한정시켜 바라보는 저자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저자는 인간 행동의 주체로서 ‘뇌‘를 설정하지만, 행동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뇌‘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마치 뇌를 기독교의 ‘신‘과 같은 절대적인 위치에 놓고 폐쇄계로서 시스템을 가정했기에 결국 ‘동기 부여를 통한 습관형성‘이라는 스키너의 주장에서 크게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전화번호를 누를 때 자주 사용하는 번호는 ‘손가락이 기억‘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반응은 의식적인 인간 기관인 뇌가 아닌 몸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서구적인 사고와 뇌과학에 기반한 습관화 연구가 선뜻 동의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습관화와 관련해서는 「해빗」보다 노자의 「도덕경」이 더 바람직한 길을 제시해 준다 생각된다.

인위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둔 상태(let it be)에서 별다른 감정의 기복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면 그것이 습관화가 아닐런지... 「해빗」을 통해 「도덕경」의 무위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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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1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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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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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이 일으킨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농경을 통해  (수렵·채집에 비해 훨씬 많은 노력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훨씬 많은 식량을, 즉 농부를 비롯해 그의 가까운 가족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을 충분히 생산해 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잉여분의 식량이 이후 일어나는 그 모든 사회적·정치적 변화의 토대였다. 그 덕에 일부는 농사를 짓지 않고도 생계를 부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서 핵심 질문은 농부가 가지고 있던 그 잉여분을 어떤 방식으로 누가 가져갔는가 하는 점이다._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p128

굳이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오지 않았음을, 그리고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주장하는 바처럼 우리의 기술은 발전되었다기보다 ‘차선‘을 이용하기 위해 변용되었음을 인정한다면, ‘신석기 혁명‘을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수렵 경제에 비해 필요노동량은 증대된 상황에서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생겨난 형이상학적 설명이 종교,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이래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 인류는 우리가 길들인 가축과 곡물들의 존속을 위해 이들에게 이용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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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1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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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2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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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는 ‘파리코뮌- 빅토르 위고‘로부터 시작하여 ‘드레퓌스 사건 - 에밀 졸라‘로 마감되는 세기말 파리의 예술사다. 여러 면에서 이 책은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빈」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19세기 말 이성과 문화의 정점을 향해 달리던 두 제국의 황혼을 다뤘다는 소재면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차이점이라면 전자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찬란한 영화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프랑스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과 후자가 다민족으로 이뤄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합노력이 그려진 정도가 아닐까 한다.

19세기 제국주의 황혼에 핀 문화, 예술, 과학에 대한 비교는 다른 페이퍼로 미루고 이번에는 간략하게 19세기 파리 물랑루즈(Moulin Rouge)의 배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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